11시에 만납시다
- 제작년도
- 1982
- 출연
- 이계진, 오미희, 김동건
1980년대 한국영화를 이야기할 때, 과거에 가장 의존적이었던 장르는 하이틴 무비와 청춘 영화일 것이다. 모든 건 1970년대에 결정되었고, 1980년대 충무로에서 만들어진 틴에이저와 청춘의 이야기는 대부분 과거의 답습 혹은 각색이었다. 여기서 ‘1975년’은 기억할 만하다. 이 해에 얄개 영화가 시작되었고, 하길종 감독의 < 바보들의 행진 >이 나왔다. 이후 1980년대는 물론 21세기까지도, ‘스물 즈음’을 다룬 한국영화는 1975년이라는 시간에 정박되어 있었다. 먼저 하이틴 무비를 보자. 조흔파의 소설을 각색하고 안성기 가 주연을 맡은 1965년의 < 얄개전 >( 정승문 )이 있었지만, 얄개(얄미운 개구쟁이) 영화의 물꼬를 튼 영화는 10년 후인 1975년의 < 여고 졸업반 >( 김응천 )이었다. 1976년 문여송 감독의 ‘진짜진짜’ 시리즈가 이어졌고, 1977년 석래명 감독의 < 고교 얄개 >(1977)가 나오면서 ‘얄개의 전성시대’가 열렸으며, 1978년에 김응천-문여송-석래명 3인방은 옴니버스 영화 < 우리들의 고교시대 >에서 만난다. 1, 2. < 고교 얄개 >와 < 대학 얄개 >( 김응천 , 1982). 얄개 영화의 전통은 1980년대도 지배했다. 3, 4. < 바보들의 행진 >과 < 고래 사냥 >( 배창호 , 1984). ‘병태’의 청춘 스토리는 지속된다. ‘얄개 영화’는 유신 시대를 살아가는 10대들을 위한 가이드라인이었다. 최고 권력자를 정점으로 국가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던 시기를, 입시의 중압감과 칙칙한 교복과 ‘교련’으로 상징되는 군대식 학교를, 게다가 남녀 공학마저 없었던 시대를, 한참 꿈 많고 호기심 충만한 틴에이저로 살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여기서 얄개 영화는 작은 해방구이자, 참고 견디며 현실에 순응하자는 국책성 메시지였다. 각자의 개성과 고민이 있지만 결국엔 흐뭇한 웃음으로 무마되고, “그렇게 우린 성장한다”는 식의 찡한 엔딩으로 마무리되던 영화들이었던 셈이다. 한편 < 바보들의 행진 >은 아직까지도 ‘한국 최고의 청춘 영화’로 꼽히는 작품이다. 실제 대학생들을 캐스팅 한 이 영화는 당시 캠퍼스 청춘 문화를 배경으로 로맨스와 청춘의 고뇌를 담아내고, 동시에 숨 막히는 시대에 대해 절규한다. 그리고 한 친구는 죽음을, 한 친구는 군 입대를 선택한다. 장발 단속과 통금과 휴교령의 시대에 “한 마리 예쁜 고래를 잡는 것”이 꿈이었던 젊음의 이야기. 이 영화는 이후 청춘 영화의 정전이 된다. 그렇다면 1980년대의 양상은 어떠했을까? < 바람 불어 좋은 날 >( 이장호 , 1980)처럼 청춘들의 모습을 사회적 메시지와 결합시킨 작품도 있었지만, 여전히 ‘털보’ 김응천 감독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김응천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매우 흥미로운데, 그가 이룬 자가발전은 곧 10대를 다룬 하이틴 영화와 20대 초반을 다룬 청춘 영화를 아우르며, 이 장르들 자체의 역사가 된다. 유신 시대가 막을 내리고 교복 자유화가 이뤄진 1980년대에 얄개 영화는 지속될 수 없었다. 이때 김응천 감독은 대학 문화를 얄개 영화 방식으로 접근한다. < 꽃밭에 나비 >(1979)부터 조짐이 보였고, < 모모는 철부지 >(1980) < 달려라 풍선 >(1980) < 내 이름은 마야 >(1981) < 갈채 >(1982) 등을 거쳐 그는 드디어 < 대학 얄개 >(1982)와 < 대학 들개 >(1983) < 대학 괴짜들 >(1984)에 도달한다. 이 영화들의 테마는 꽤 익숙했다. 가난 속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 진실한 우정에 대한 깨달음, 부모의 강요와 자신의 꿈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화해, 학교생활의 낭만과 로맨스, 이루어지지 않는 첫사랑…. 김응천 감독의 ‘대학 청춘 영화’들은 여전히 얄개 영화의 세계관 안에 있었다. 고등학교는 대학 캠퍼스로, 교복은 사복으로, 치열한 입시는 머리 싸매는 고시로, 제과점은 나이트클럽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1. 김응천 감독은 1970년대 틴에이저 무비를 개척해 1980년대 청춘 영화로 변형시켰다. 그는 1980년대에 20편의 하이틴 청춘 영화를 만들었다. 2. 이규형 감독은 1980년대 청춘 영화의 대표적 감독이었다. 3. 이장호 감독의 < 바람 불어 좋은 날 >(1980). 1980년대의 포문을 연 이 영화는 < 바보들의 행진 >과는 다른 방식으로 청춘의 현실을 다룬다. 4. 전상국 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 우상의 눈물 >(1982). 얄개 출신인 진유영 은 이 영화에서 사뭇 다른 톤의 십대 연기를 보여준다. 배우들도 여전했다. 단짝이었던 김정훈 이 대만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이승현 은 여전히 ‘사고뭉치’ 캐릭터로 이 장르를 이끌었다. 그는 김응천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고등학생으로 시작해 대학에 가고 결혼을 하고 취직을 한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과 ‘앙토완 드와넬’ 시리즈의 장 피에르 레오처럼) 한 감독의 영화 안에서 배우가 성장하는 ‘감독-페르소나’ 관계였던 셈이다. “흥, 절교야!”라며 홱 토라질 때 남학생들의 애간장을 녹이던 깍쟁이 강주희 , 완력을 앞세우던 ‘마초 고교생’ 진유영 , 어눌하면서도 인간적이며 낙관적인 의리파 손창호 ,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김보연 , 부잣집 도련님 스타일의 활동파 전영록 , 동안의 감성파였던 전호진 과 박재호 (이후 < 내일로 흐르는 강 >(1996)으로 감독 데뷔), 얄밉게 고자질하던 강남길 …. 그들은 여전히 얄개 시절의 캐릭터를 지닌 채 대학생이 되었다. 오토바이 사고로 활동을 중단했던 이덕화 는 < 대학 얄개 >에 ‘얄개 1기 선배님’으로 불리며 등장하기도 했다(단 20대에 접어든 임예진 은 연기 변신을 시도하며 이 대열에서 이탈한다). 인력 충원도 있었다. 송승환 김주승 강문영 이미영 조용원 등이 ‘포스트 얄개’ 시대의 청춘스타가 되었고, 이미숙 이나 원미경 도 이 장르에 적잖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특기할 사랑은 가수들의 진출이었다. 전영록 의 사례가 있긴 했지만, 1980년대엔 가요계와 영화계의 하이브리드 현상이 두드러졌고, 청춘 영화 장르는 그 격전지였다. 일단 당대 최고 인기 밴드였던 송골매가 있다. 처음엔 카메오처럼 등장하더니 < 모두 다 사랑하리 >( 김응천 , 1983)와 < 대학 괴짜들 >에 이르면 배철수 와 구창모 는 주요 배역을 차지한다. 숨은 강자는 김형용 이었다. ‘김형용과 톱니바퀴’의 리더로 ‘해변가요제’ 출신인 그는 당대는 희귀한 미소년 스타일로 어필했다. < 고래 사냥 >( 배창호 , 1984)의 김수철 , < 졸업 여행 >( 오성환 , 1985)의 김범용 도 가세했다. 여기서 김응천 감독의 전환점(사실 하강점)이 되는 영화는 이상아 와 하희라 주연의 < 말괄량이 대행진 >(1986)이다. 여기서 그는 다시 고교 시절로 돌아가며, 다음 해 < 얄숙이들의 개성 시대 >(1987)를 이어간다. 이런 회춘이 가능했던 건, 새로운 스타덤의 등장 덕분이다. 198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하희라 이상아 김혜수 김희애 이응경 최수지 이미연 , 그리고 강석현 이재학 민규 최재성 최민수 허준호 박중훈 김민종 김보성 김세준 등은 좀 더 화려한 아이돌 스타덤을 이루었다(1980년대에 한국의 아이돌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여기서 김응천 감독은 기존의 청춘스타를 조연으로 기용하고, 신진 세력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방식으로 나름의 ‘절충’을 이룬다. 1. 김응천 감독의 < 대학 들개 >(1983). 전영록 과 이승현은 1980년대에도 여전히 얄개로 활동했다. 2. < 스물한 살의 비망록 >( 김응천 , 1983)의 송승환 과 강문영 . 1980년대 초에 새롭게 등장한 청춘 배우. 3. < 모두 다 사랑하리 >( 김응천 , 1983)의 김형용 . 가수이자 배우로 1980년대 초 청춘 영화를 잠시 이끌었다. 4. < 대학 괴짜들 >의 배철수 . 그가 속했던 밴드 ‘송골매’는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청춘스타 중 하나였다. 스타 지형도만 변한 게 아니었다. 1980년대 중반, 한국의 틴에이저 무비는 1970년대의 영향권을 벗어나 드디어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 김응천 의 세계관’을 벗어나기 시작한 십 대의 이야기는 훨씬 더 거칠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작은, 당시로선 충무로에서 정말 드물었던 ‘20대 여성 감독’ 이미례 의 데뷔작 < 수렁에서 건진 내 딸 >(1984)이었다. 호즈미 다카노부의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한국영화의 10대들이 더 이상 얄개 영화의 해피 엔드에 갇혀 있을 순 없다고 말한다. 폭력적 사회와 무관심한 가정 사이에서 콤플렉스를 지닌 16세 소녀 유리( 김진아 )는 갈 길을 잃고 저항한다. 1985년 동명 연극을 영화화한 < 방황하는 별들 >( 차현재 , 1986)은 밤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의 사연 속으로 들어간다(< 나쁜 영화 >( 장선우 , 1997)의 선배격이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비디오 다방, 술집, 대학로, 만화가게, 성인 오락실, 나이트클럽, 여관 등을 휘저으며 단속에 걸린 10대들을 경찰 보호실로 내몬다. 영화는 뮤지컬 형식을 통해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내며, 소외당한 아이들의 외침을 들려준다. 이런 시도들은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 강우석 , 1989)를 통해 대중적 폭발력을 지닌다. 1990년대 초 기획영화의 포문을 여는 ‘신씨네’의 신철 대표는 이 영화의 기획을 맡았는데, 그는 수백 명의 중고등학생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었고, 취재를 바탕으로 김성홍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으며, 강우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와 로맨스를 배치함으로써 얄개 영화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이 영화는 당시 아이들이 실제 모습을 영화에 담아낸다. 이후 <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 김성홍 , 1990) <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 이미례 , 1990) <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 조금환 , 1990) < 열아홉의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 노래 >(강우석, 1991) < 인생이 뭐 객관식 시험인가요 >( 강구연 , 1992) 등 ‘긴 제목 영화’들이 쏟아진다. 다소 나이브한 태도는 있지만, 이 영화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포착했던 영화들이었다. 리얼리즘에 좀 더 기운 영화들도 있었다. <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 황규덕 , 1990)는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와는 다른 방식으로 입시 지옥을 보여주는데, 담임 교사( 문성근 ) 캐릭터를 통해 ‘참교육’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변하기 시작한 한국 사회의 움직임과 맞물리는 부분으로, 1989년에 ‘전교조’를 계기로 ‘참교육’이라는 단어가 등장했고 그 문제의식은 영화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독립영화 단체 ‘장산곶매’에서 제작한 < 닫힌 교문을 열며 >( 이재구 최호 김숙 김건 강경환 황길재 , 1990)는 바로 전교조 문제를 담아낸 첫 영화였다. 1. < 방황하는 별들 >의 이상아 . 이상아는 198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새로운 아이돌 스타덤의 기수였다. 2. < 캠퍼스 연애특강 >( 조금환 , 1988)의 강석현 하희라 민규 . 3. < 수렁에서 건진 내 딸 >의 김진아 . 4. 연극을 영화화한 < 방황하는 별들 >은 다큐멘터리, 극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적 요소가 결합된 실험적 작품이었다. 틴에이저 무비 계열에서 ‘현실’이라는 화두가 떠오르며 얄개 영화와의 결별이 서서히 이뤄졌다면, 청춘 영화 계열에서도 작은 변화는 있었다. 이 시기 조금씩 시도되던 청춘 로드 무비가 그렇다. < 바보들의 행진 >의 병태( 윤문섭 )가 꿈을 찾아 떠나듯, < 고래사냥 > < 열아홉 살의 가을 >( 김응천 , 1984) < 가슴을 펴라 >( 최원영 , 1987) < 굿모닝! 대통령 >( 이규형 , 1989) 등의 그들도 길 위에서 인생을 배운다. < 내일은 뭐 할 거니 >( 이봉원 , 1984) 같은 실험적 영화도 등장했다. 1960년 4.19 때 도주 중이던 대학생과 창녀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 B( 강석현 )은 대학생이 된 1980년대에 마치 사회 부적응자처럼 방황한다. 아마도 < 바보 선언 >( 이장호 , 1984)과 함께 가장 파격적인 스타일과 내러티브의 1980년대 영화로 기억될 <내일은 뭐 할 거니>는 당시 젊은이들의 무기력함에 대한 메타포였다. 새로운 흐름을 만든 사람은 이규형 감독이었다.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1987)가 흥행작이지만, 먼저 그가 20대 때 만든 데뷔작 < 청 블루 스케치 >(1986)를 주목해야 한다. 이 영화는 당시로선 드물게 ‘청춘 비가’ 스타일의 영화였으며, 이야기보다는 모던한 공간 감각과 비주얼에 더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다. < 비 오는 날의 수채화 >( 곽재용 , 1990)나 < 비트 >( 김성수 , 1997)의 장르적 근원을 더듬다 보면 <청 블루 스케치>를 만날 수 있는데, 로맨스와 범죄 세계의 폭력과 비극적 서사 장치를 결합한 청춘 영화는 1980년대에 만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밋밋한 흥행(서울 관객 약 4만 명) 이후 이규형 감독은 ‘얄개의 세계’에 더 접근했고,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로 서울 관객 약 26만 명을 동원한다. 대학 초년생인 영문과 미미( 강수연 )와 신방과 철수( 박중훈 )의 연애담인 이 영화는, 미래지향적 분위기와 젊은 날의 고뇌를 동시에 담았고, 이규형 감독은 청춘 영화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극한다. 이 영화로 청춘의 아이콘이 된 또 한 명은 배우 박중훈이었다. 그는 < 이장호 의 외인구단 >(1986)으로 상한가를 치던 최재성과 투 톱을 이뤄 <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 >(1988)와 < 내 사랑 동키호테 >(1989)를 이끈다. 메가폰의 주인은 얄개 영화의 장인이었던 석래명 감독. 그런데 두 영화는 같으면서도 달랐다. 두 편 모두 젊음과 사랑과 도전과 우정을 다루지만, <내 사랑 동키호테>는 당시 입시 현실을 다루던 하이틴 영화와 접점을 지닌다. 두 주인공이 개발한 ‘쿨쿨 머신’은 수면 중에도 뇌파 조작을 위해 학습을 할 수 있는 기계. 이것은 당시 밤낮없이 책상 앞에 앉아 입시 공부에 매달려야 하는 십 대의 현실에 대한 풍자였다. 이처럼 1980년대 말에 오면, 이 장르 안의 그 어떤 영화도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게 된다. 1.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는 하이틴 영화가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한 영화다. 2. <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는 ‘참교육’을 이야기한다. 3. < 내일은 뭐 할 거니 >는 실험적 스타일 속에서 억압적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무기력함을 보여준다. 4.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는 1980년대에 가장 흥행한 청춘 영화이다. 1970년대 얄개 영화와 청춘 영화는 1980년대 시기 변형을 겪은 후 1990년대에 리얼리즘으로 방향을 잡았다. < 숲속의 방 >( 오병철 , 1992)이나 < 세 친구 >( 임순례 , 1996) 등이 ‘현실’이라는 프리즘으로 방금 고등학교를 벗어난 아이들의 삶을 바라본다면, < 정글 스토리 >( 김홍준 , 1996)처럼 힘겹게 자신의 길을 가는 청춘의 이야기가 있었다. < 비트 > < 태양은 없다 >( 김성수 , 1999) < 질주 >( 이상인, 1999) 등은 ‘도시 청춘’을 스타일리시한 영상과 결합시켰다. 흥미로운 건 1990년대 말에 나타난 장르화 현상이었는데, 남녀의 성이 바뀌는 판타지 < 체인지 >( 이진석 , 1997), 아이돌 문화나 밴드 콘셉트와 결합했던 음악 영화들인 < 세븐틴 >( 정병각 , 1998)과 < 짱 >( 양윤호 , 1998) 그리고 호러 장르를 부활시킨 < 여고괴담 >( 박기형 , 1998) 등이 등장했다. 어떻게 보면 1980년대 하이틴 청춘 영화는, 이 장르의 역사에서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한 셈이다. 전통은 수정되었고, 관습은 변주되었으며, 배우는 교체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수많은 젊음의 테마들은 좀 더 시간이 흐른 2000년 이후 독립영화와 저예산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그렇다면 얄개 영화의 전통은? 거의 희석되었고, <학교> 시리즈 같은 TV 드라마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이어졌다.
2015년 2/4분기에 시작한 TV애니메이션 작품 중에 < 내 이야기!!俺物語! !>라는 작품이 있다. 고릴라를 닮은 2m의 키에 근육질 몸의 남자주인공이 알고 보면 착한 학생이며 누구보다도 순수한 캐릭터라는 설정으로 그를 둘러싼 오해와 사랑, 사람들과의 관계가 펼쳐지는 작품이다. 원작도 애니메이션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이지만, 이 작품의 기본 설정을 보고 있노라면 계속해서 오버랩이 되는 작품이 하나 있다. 1992년 작으로 학원 액션 코믹이라는 장르에 착각물(?)이라는 요소를 가미한 야기 노리히로의 < 엔젤전설 >이다. 악마 같은 얼굴이 아닌 정말 악마의 얼굴을 가진 이 작품의 주인공 ‘키타노’는 만화, 애니메이션은 물론 거의 어지간한 대중콘텐츠에서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하이스팩의 잘생긴 외모를 지닌 주인공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있다. 초반의 이미지나 스토리에서는 그 인상에 많은 괴리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외모가 우선시 되는 현대의 겉면에 대한 중시에 대해 조금은 생각하게 해주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클레이모어>의 원작자이기도 한 이 작가의 작품은 솔직히 말해 애니메이션 운은 없는 편이다. < 엔젤전설 >은 1996년 도에이에서 OAV(오리지널 애니메이션 비디오)로 딱 2편이 제작된 것이 전부로 당시 원작의 인기도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이다. 감독의 사망설부터 애니메이션 제작권의 혼란 등 몇몇 루머에 휩싸이며 추가 에피소드가 제작되지 못했다. 게다가 당시에는 LD(레이져 디스크)에서 DVD로 넘어가던 과도기로 수록매체에 대한 결정이 모호했던 탓인지 오로지 VHS 비디오테이프로만 출시되어 화질보존까지 하기 어려운 불운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니메이션의 큰 장점은 원작자가 데뷔 초기작인 관계로 그림실력이 제일 떨어지는 초판 에피소드 스토리를 아주 깔끔한 캐릭터 디자인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1992년이라는 제작연도에 걸맞게 최근 애니메이션 작품에 비하면 거칠지만 악마의 얼굴이 가진 포스와 주인공의 애환과 액션이 움직일 때마다 팬으로 하여금 원작에 대한 애정을 다시금 보듬고 강하게 해준다면, 애니메이션이 가져야 될 덕목 중 중요한 큰 부분은 만족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학원액션과 코믹과 연애라는 부분을 조합함에 있어 지나치게 치우치거나 오버된 감정을 자아내지 않으면서, 단계마다 새로운 재미를 부여해주는 작품이다. 요즘 웹툰 등에서 유사한 풍의 작품이 꽤 많이 보이긴 하지만 작품명에서 있는 단어처럼 ‘전설’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콘텐츠이니 꼭 한번 보길 바란다. 일본의 경우 워낙 창작 작품수가 많고, 저작권 관리가 철저하면서도 복잡하기 때문에 한번 멀티소싱의 시기에서 벗어난 작품들은 다시 애니메이션화 되기 매우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다품종 소량 생산의 타켓 마케팅 시대를 보내고 있는 최근의 일본 콘텐츠계의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작품 정도 하나는 TV애니메이션시리즈로 부활해 주는 모험심을 바라는 바이다.
지금은 청춘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일이 하늘의 별 따기(?) 같지만, 1970~80년대만 해도 흔할 정도로 청춘영화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관련 영화가 개봉하는 날이면 피카디리, 단성사, 서울극장 등이 몰려 있는 종로 일대에는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내가 중학교 1학년이었던 1987년에는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1987, 이하 ‘<청춘 스케치>’)가 장안의 화제였다. 당대 최고의 배우이자 청춘스타였던 강수연 과 박중훈 이 각각 미미와 철수로 분하고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주목받던 최양락 이 함께 출연한다고 해서 개봉 전부터 영화 팬들의 기대감이 대단했다. 철수는 학교 대항 농구 대회를 구경하던 중 상대방 팀을 응원하던 미미를 보고는 첫눈에 반한다. 응원객인 주제에 선수들을 모아 놓고 왜 이렇게 경기를 못 하냐며 당돌하게 구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비췄던 것이다. 미미를 쫓아 버스에 올라탄 철수는 많은 사람 앞에서 고백한 끝에 서로 호감이 가는 사이로 발전한다. 하지만 미미는 그 관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가문 좋은 의대생과 선을 봐 철수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대학 생활이 배경인 만큼 < 청춘 스케치 >는 젊은이들의 지지를 얻으며 서울에서만 26만 관객을 동원, 그해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에 등극했다. 극 중 미미와 철수의 대학생으로 사는 삶과 고민이 당대 청춘들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연출 데뷔작 < 청 블루 스케치 >(1985)에서부터 청춘의 삶에 관심을 보였던 이규형 감독은 두 번째 연출작 <청춘 스케치>에서는 대학 생활의 낭만을 코미디로, 철없는 대학생의 성장을 신파로 황금 분할해 이후 나올 청춘영화의 모범을 제시했다. 미미와 철수가 일반의 대학생을 묘사한다면 최 아랑드롱( 최양락 )은 코미디를, 보물섬( 김세준 )은 신파를 의미하는 기능적인 인물들일 터. 이와 같은 부분이 이전의 청춘영화가 내세웠던 공식이 강화된 지점이었다. < 청춘 스케치 >가 등장하기 이전, 이 장르는 최훈 감독의 ‘하이틴’ 시리즈와 석래명 감독의 ‘얄개’ 시리즈가 양분하고 있었다. 이들 시리즈가 큰 인기를 얻었던 이유는 <청춘 스케치>의 흥행 공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 공식을 <청춘 스케치>가 이어받은 것인데 고등학생, 대학생 할 것 없이 영화 속 청춘들은 별생각 없이 살다가도 어떤 계기로 성장을 이룬다. 그와 같은 이야기상의 공식을 세운 것이 ‘하이틴’과 ‘얄개’ 시리즈였다. 이규형 감독은 이를 대학생 버전으로 가져와 코미디와 신파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기록적인 흥행을 이끌었다. 대학생은 아니었지만, 대학 입학 만이 지상 최대의 목표였던 나도 < 청춘 스케치 > 속 주인공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얼마나 웃고 울었던지. 철수의 생일을 맞아 최 아랑드롱이 총각 딱지를 떼주겠다며 생면부지의 여자에게 헌팅을 시도하는 대목에서는 이것이 대학생활의 낭만이구나, 넋 놓고 웃다가도 보물섬의 죽음 앞에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숙연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학생들이야 예나 지금이나 다가올 미래에 대한 막연함으로 불안했던 게 사실이지만, 이상(理想)의 형태에서만큼은 달라 보이는 것이 흥미롭다. 빨리 죽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철수에게 보물섬은 이런 얘기를 한다. “다른 친구들이 나보다 오래 산다고 꼭 행복한 건 아니야.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이상이나 가치나 없는 사람이 수두룩하잖아.” 그런 보물섬은 죽음을 앞두고 형편이 넉넉지 않아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기부한다. 그리고 미미와 철수에게는 사랑의 가치를 전하며 둘을 이어주고 떠난다. 그런 결말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대학 입학이 삶의 전부가 아니구나, 배워야 할 더 큰 가치가 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청춘영화가 의미가 있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이유다. < 청춘 스케치 > 이후로 이규형 감독은 < 어른들은 몰라요 >(1988) < 굿모닝! 대통령 >(1989) < 난 깜짝 놀랄 짓을 할 거야 >(1990) 등 자기 복제 작품들로 영화계에서 지분을 점점 잃어갔다. 그에 반해 오히려 석래명 감독이 <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 >(1988)를 위시한 ‘동키호테’ 시리즈로 <청춘 스케치> 이후 청춘영화의 흐름을 주도했다. 그리고 내 기억으로는 청춘영화의 맥은 거기서 끊겨 버렸다. 지난해 < 족구왕 >(2014)이 깜짝 흥행에 성공했지만, 거의 이벤트성에 가까울 만큼 일시적이었다. 소위 ‘천만’으로 대변되는 ‘대박’ 영화에만 경도된 메이저 영화사들은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영화 제작에만 올인한 상태고 작은 규모의 영화들은 온전한 상영 기회를 보장받지 못해 고전 중에 있다.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청춘영화가, 무엇보다 청춘이 홀대받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런 사회가, 영화계가 건강할 리 없다. 여전히 우리의 청춘들은 힘든 여건 속에서도 그들만의 사연을 만들어가며 고군분투 중에 있다. 한국 영화계는 창작의 더듬이를 좀 더 예민하게 곤두세워 이들의 삶과 고민에 눈과 귀를 기울여 청춘영화를 만들 필요가 있다. 지금의 청춘을 대변할 < 청춘 스케치 >가 절실하다. 2015년의 미미와 철수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