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 감독
- 김영빈
2002년 | 싸이더스 감독, 각본 : 조민호 | 제작: 차승재 | 촬영: 이두만 | 음악: 김재원 박영 | 미술: 이대훈 CAST 기태: 장혁 | 철수: 이범수 | 멕: 전혜진 | 민철: 손창민 | 악어: 김뢰하 | 땅개: 봉태규 | 이 형사: 박원상 큰 흥행을 기록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 정글쥬스 >는 이른바 ‘양아치 영화’ 장르의 대표작입니다. 청량리 출신의 두 루저 기태(장혁)와 철수(이범수). 그들은 우연히 마약을 손에 넣지만 쫓기는 신세가 되죠. 그 끝은 부산 태종대. 2001년 초겨울, 그곳 현장에 갔습니다. 마약을 빼앗긴 조직 보스 민철(손창민)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두 주인공에게 총을 겨눕니다. 이 날 촬영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데요, 영화에선 꽤나 절박한 장면이지만 정작 현장 분위기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크랭크업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어서 그랬던 것 같네요. 위의 롱 숏을 앵글을 달리 해 두 개의 숏으로 쪼개 보면 이렇습니다. 뒷모습으로 보이는 손창민은, <정글쥬스>에서 ‘빡빡 머리’로 밀며 인상적인 변신을 보여줍니다. 한편 기태와 철수는 태종대 자살바위 끝까지 몰렸습니다. 과연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기태는 철수를 이끌고 벼랑 끝으로 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뛰어 내립니다. 혹시 이 장면… <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 >(리들리 스콧, 1991)의 마지막 장면을 패러디 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두 배우는 실제로 큰 액션과 함께 뛰어 내렸고, 아래 쪽엔 라면 박스가 쌓여 있었습니다. 든든한 안전 장치였는데요, 그렇다고 해도 시야에 바다가 걸리는 장소에서 벼랑 아래로 뛰어내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두 배우는 몇 번에 걸쳐 반복했습니다. 안 그래도 아찔한 벼랑 위의 촬영에, 더 아찔해 보이는 크레인이 동원됐습니다. 이두만 촬영감독은 정지우, 김용균, 임필성 감독 등과 함께 1990년대에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활동했고, < 눈물 >( 임상수 , 2000)로 장편영화 촬영감독이 되었습니다. <정글쥬스>는 두 번째 장편인데요, 서른 즈음의 젊은 촬영감독답게 활기 찬 화면을 만들어냈습니다. “컷!” 소리가 나자마자 배우들은 모니터 앞으로 달려옵니다. 중요도가 높은 장면이라, 꼼꼼하게 체크할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죠. 조민호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내도, 배우들의 요구로 더 찍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영화아카데미 출신은 조민호 감독은 김영빈 , 이민용 감독의 연출부를 거쳐 <정글쥬스>로 데뷔했습니다. 이후 < 강적 >(2006) < 10억 >(2009) 등의 작품을 내놓았고요. 기태와 철수, 두 루저 캐릭터에 대한 감독의 애정은 매우 컸습니다. “나는 <정글쥬스>에서 양아치들 바로 옆에 따라 붙고 싶었고, 그래서 핸드헬드 카메라를 많이 사용했다. 그것이 관객들에겐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겠지만. <정글쥬스>엔 인물이 없는 컷이 한 컷도 없다. 나는 인물들과 같이 호흡하고 느끼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현장은 열기로 넘쳤지만, 초겨울에 여름 의상을 입은 배우들은 추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두 배우는 점퍼를 입거나 하지 않고, 영화 속 의상 그대로 현장에 있었습니다. 조민호 감독은 “양아치 인생을 그렸지만 어두운 영화는 아니다. 밝게 찍어야 한다”고 배우들에게 주문했습니다. 한편 이범수에게 <정글쥬스>는 첫 주연작이었는데요, 그는 “이 영화를 찍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장혁은 이범수와 호흡을 맞추며 “만만한 셋째형을 건졌다”고 표현했는데요. “범수 형은 큰형이나 둘째형보다 조금 만만한 셋째형 같은 느낌이다. 콤비 플레이가 중요한 영화라서 핑퐁을 하듯 재미있게 연기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보스 민철의 피 묻은 손과 옷, 그리고 권총은 이 장면의 격렬한 느낌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이미지입니다. 어느덧 점점 어두워지는 태종대. 그래도 빛이 허락할 때까지 촬영은 이어집니다. 마치 벌레들처럼 바글거리며 살아가는 두 청춘의 이야기 <정글쥬스>. 조민호 감독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글쥬스>의 기태와 철수는 낮에는 유치찬란한 양아치고 밤에는 범죄를 저지른다. 그 아이들은 청년 실업자들이고 경제적 이해 관계로부터 소외된 하층 계급이다. 하지만 그 양아치들에겐 당당하고 자유로운 모습이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근처에 도둑고양이들처럼 말이다.”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
유신에서 신군부 독재로 이어지는 1970~80년대에 대해 ‘한국영화 암흑기’라는 레이블을 붙이는 건 정설처럼 보인다. 사실이었다. 영화는 TV에 밀리고 있었고, ‘반공’과 ‘새마을 운동’을 내세운 국책 영화에 얽매인 영화계는 점점 뒤틀려 갔으며, 사전 심의와 사후 검열 속에서 크리에이티브는 서서히 증발했다. 산업적 토대의 붕괴, 불합리한 제도, 미학적 고갈이 동시에 진행되었던 이 시대는 몇몇 감독들의 개인기로 돌파하기엔 너무 어두웠다. 시스템이 붕괴될 때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무분별한 트렌드 추종이다. 1980년대는 그 정점이었다. 멜로드라마와 문예 영화와 스타 시스템을 토대로 1960년대에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영화는 1970년대에 서서히 무너졌고 1980년대에 난장판이 되었다. 멜로는 여전히 만들어졌지만 예전 같은 힘을 잃었다(진부한 신파의 클리셰에 빠져 있었다). 그 개념은 조금 모호하지만 ‘양질’의 문학 작품을 스크린에 옮겼던 ‘문예 영화’는 더 이상 영화화할 만한 소스를 구할 수 없었다(대신 1970년대부터 최인호나 조해일 같은 새로운 작가가 등장했다). 과거의 스타들은 일거에 물러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만한 스타는 도착하지 않았다( 안성기 가 유일한 희망이었던 시대였다). 1. 한수산 원작의 <거리의 악사>(정지영, 1987) 2. 이문열 원작의 <레테의 연가>(장길수, 1987) 3. 김홍신 원작의 <인간 시장>(김효천, 1983) 4.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 가장 심각한 건 ‘소스 부족’이었다. 1960년대엔 근대 단편 소설들이 ‘문예 영화’라는 이름으로 애용되었다(여기엔 ‘우수 영화’에 외화 수입 쿼터가 주어지는 현실적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라디오 연속극도 각광 받았고, 때론 일본 영화 시나리오를 그대로 가져온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는 서서히 재료가 떨어졌고 1980년대에 오면 바닥을 드러낸다. 새로운 광산이 채굴되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의 하이브리드 현상이 나타난다. 심하게 말하면, ‘돈 될 만한’ 건 뭐든지 끌어다 썼던 1980년대였다. 여전히 ‘문학’은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1970년대 최인호와 조해일에 이어 1980년대엔 한수산 이외수 이문열 박범신 등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영화계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1980년대엔 훨씬 더 대중적인 콘셉트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시장』 시리즈의 김홍신은 대표적이었으며 김성종 유홍종 백시종 김병총 등의 작가들도 가세했다. ‘시대정신’이었던 에로티시즘도 영향을 미쳤다. 외설 시비에 휩싸였던 염재만의 소설 『반노』가 대표적. <빨간 앵두> (박호태, 1982)도 최희숙의 소설이 원작이며, <매춘> (유진선, 1988)은 『매춘: 전국 사창가와 창녀 실태』라는 사회학 서적에서 온 것이었다. 전통의 부활도 있었다. 한동안 맥이 끊어졌던 문예 영화의 흐름은 에로티시즘을 통해 재등장했고 나도향과 김유정이 소환되었다. 일본 소설도 영화화되었다.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은 큰 흥행을 거두었고 호즈미 타카노부의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이미례, 1984), 하시다 스카코의 <오싱>(이상언, 1985), 나쓰키 시즈코의 <W의 비극>(김수형, 1985형) 그리고 이쿠시마 지로의 <한쪽 날개의 천사>(이성민, 1987) 등이 이어졌다. 1960년대 한국영화가, 당시 문화 교류가 없던 일본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가져가 음성적으로 번안해 영화화했다면 그 원천을 밝혔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모습이다. 미즈키 교코 원작의 만화 『캔디 캔디』도 영화화되었다. 1.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최재성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다. 2. <신의 아들>은 최민수의 데뷔작이다. 3. 강철수 원작의 <팔불출> 4. 한희작 원작의 <한희작의 러브러브>. 가장 강력한 소스는 만화였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화한 <이장호의 외인구단>(이장호, 1986)이 장안을 뒤흔들기 전, 1980년대 초부터 꾸준한 시도가 있었다. 그 시작은 길창덕 화백의 <순악질 여사>(김수형, 1980)였다. 이야기보다는 ‘순악질 여사’라는 캐릭터를 가져온 면이 강하며, 장미희가 주인공을 맡았다. 이후 1980년대에 약 20편가량의 만화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스포츠 신문 연재나 만화 가게나 당시 쏟아지던 만화 주간지를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쌓은 터에 흥행성이 꽤 괜찮았다. 이현세를 주로 이야기하지만, 이 시기 만화 원작 영화의 주요 인물은 강철수였다. <팔불출>(고응호, 1980)의 원작자였던 그는 이후 영화 쪽에 큰 관심을 보이며 <사랑의 낙서>(심재석, 1988)엔 아트 디렉터로 참여했고, 1989년엔 <발바리의 추억>으로 직접 메가폰을 잡는다. <가루지기>(1988)의 고우영 감독도 만화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잠시 업종 전환을 한 케이스인데, 1980년대의 만화는 충무로에 원작뿐만 아니라 인력도 공급한 셈이다. 그리고 <이장호의 외인구단>이다. 당시 프로야구 열풍과 이현세의 만화에 대한 컬트적 반응을 힘입은 이 영화는 영화 제목에 ‘공포’가 들어가선 안 된다는 당시의 심의 규율 때문에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개명해야 했는데, 이것이 액땜이 되었는지 서울에서 약 28만 7,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빅 히트를 기록한다. ‘까치’ 오혜성 역을 맡았던 최재성은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으며, 동네 전파사마다 정수라가 부른 주제가 ‘난 너에게’(“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가 흘러나왔다. 프로야구의 인기, 이장호 감독의 흥행력 등 이 영화의 성공 원인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핵심은 이야기였다. 당대 한국영화와 비교해볼 때 이 영화가 지닌 극적 요소는 두 배 정도는 셌다. 강한 승부욕, 목숨을 건 순애보. 팽팽한 긴장 관계, 뼈를 깎는 극기 정신…. 떡볶이로 치면 고추장이 아닌 캡사이신 맛이었고, 그 강렬함에 젊은 관객들은 반응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일련의 스포츠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박봉성의 『신의 아들』, 이현세의 『지옥의 링』, 허영만의 『카멜레온의 시』 등 복싱 소재 만화들이 영화화되었다. 1980년대 ‘복싱’은 여전히 있기 있는 스포츠였고, 여기에 혹독한 트레이닝과 청춘의 고독과 비극적 로맨스가 결합되었다. 안타까운 건 원작을 따라가지 못했던 인기였는데 완성도가 문제였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트렌드는 역시 ‘에로티시즘’이며 스포츠 신문 연재를 통해 성인 만화의 흐름을 이끌었던 한희작과 배금택은 주역이다. <서울 손자병법>(김현명, 1986)이 한희작의 원작이 지닌 지명도에 기대 제목 정도만 가져 왔다면, <한희작의 러브러브>(윤석태 김정진, 1991)은 아예 제목에 작가의 이름을 드러낸다. 당대의 섹시 아이콘인 강리나는 만화 캐릭터를 별 위화감 없이 소화하는데, 이후 배금택 원작의 <변금련>(엄종선, 1991)에서도 캐릭터와의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하지만 만화 원작 영화의 흐름은 1990년대엔 뜸해진다. 이현세가 직접 연출을 맡은 <아마겟돈>(1996)이나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1996) 등 극장용 애니메이션 쪽에서 성과를 냈고, 이현세의 『카론의 새벽』을 옮긴 <테러리스트>(김영빈, 1995)와 허영만 원작의 <비트>(김성수, 1997)가 흥행했지만 1980년대만큼의 양적 성과를 내지 못한다. 다시 그 붐이 일게 된 건 2000년 이후. 여기엔 웹툰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 1. <멋대로 해라>의 혜은이와 김동현. 그들은 이후 부부가 된다. 2. <너무 합니다>의 원작자이자 주인공인 김수희. 3. 박남정 주연의 <새앙쥐 상륙 작전> 4. <담다디>의 이상은과 민규.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아이돌 출신 연기자들의 활약이 돋보이긴 하지만, 가요계와 영화계의 크로스오버 현상은 이미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전 1960년대부터 주제가는 영화 흥행의 중요한 요소였고, 남진이나 나훈아 같은 슈퍼스타들이 은막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1980년대는 남달랐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지만, 이 시기엔 당대의 히트곡 제목을 그대로 딴 영화들이 쏟아졌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출연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영화 내용도 노래 가사와 대부분 무관했다. 오로지 노래 제목의 인지도를 이용한 경우들인데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와 ‘비련’, 와일드 캣츠의 ‘마음 약해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윤시내의 ‘난 모르겠네’와 ‘열애’, 이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김현준과 민해경의 ‘내 인생은 나의 것’,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이선희의 ‘J에게’, 최성수의 ‘풀잎 사랑’ 등 수많은 히트곡들이 그 제목을 충무로에 빌려주었다. 물론 가수가 직접 영화에 출연한 경우들도 있었다. 지난 연재에서 이야기했던 전영록이나 송골매, 김형용 같은 청춘 영화의 스타들은 대표적인 경우. 이외에도 <나를 보러 와요>(이유섭, 1980)의 방미, <슬픈 계절에 만나요>(박남수, 1981)의 백영규, <잊혀진 계절>(이형, 1984)의 이용, <담다디>(김응천, 1989)의 이상은, <울고 싶어라>(배해성, 1989)의 이남이, <앗싸! 호랑나비>(원정수, 1989)의 김흥국 등은 노래의 주인공이 직접 카메라 앞에 서는 경우들이었다. <너무 합니다>(남석훈, 1984)은 김수희의 자전적 이야기로, 그녀는 원작자이자 주연 배우로 참여한다. 노래와 상관없이, 가수 자체의 인기로 영화계에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낌없이 바쳤는데>(박호태, 1980)의 심수봉, <멋대로 해라>(김정현, 1980)의 혜은이(1970년대부터 배우 활동),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1)의 조용필, <날마다 허물 벗는 꽃뱀>(강대선, 1982)의 이은하, <흑녀>(강대선, 1982)의 인순이, <졸업 여행>(오성환, 1985)의 김범룡, <새앙쥐 상륙 작전>(김정진, 1989)의 박남정 등이다. 연기력을 인정받진 못 했지만, 당시 이 영화들은 그 화제성으로 이슈가 되었다. 당시 가요계와 영화계의 끈끈한 관계는, 가요 쪽의 붐에서 기인했다. 트로트 중심이었던 한국 대중가요는 1980년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며 대중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아이돌 문화를 형성했다. 이 시기 침체기를 지나던 영화계는 가요계의 호황을 이용하려는 수많은 기획을 시도했고, 그 결과 수많은 ‘가요적 영화’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영화들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흐름은 한국영화가 자생력을 서서히 지니기 시작하는 1990년대가 되면 사라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충무로가 수혈받았던 또 하나의 원천이 있었다면 바로 TV의 코미디언과 개그맨이었다. 이전에도 영화와 방송을 겸하는 수많은 희극인들이 있었고 그 전통은 이주일로 이어졌다. 특히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 <조용히 살고 싶다>(김수형, 1980)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이형표, 1983) 등의 ‘유행어 영화’는 작은 트렌드를 이뤄 <웬일이니>(김종성, 1983) <난 이렇게 산다우>(남기남, 1985) 등으로 이어졌다. 이것 역시 대중문화의 인기를 영화로 끌어오려는 기획이었다. 새로운 경향은 개그맨들의 진출이었다. ‘아동용 SF 액션’에 대한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듯, 1980년대의 수많은 개그맨은 SF 프랜차이즈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들은 아이들 영화를 벗어나 성인용 영화에도 종종 출연했다. 이외에도 서세원 주병진 김명덕 김형곤 김병조 등 당대의 인기 개그맨들은 대부분 영화계와 만났으며 전유성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비디오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1.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의 이주일. 2. <회장님, 우리 회장님>(엄종선, 1988)은 개그 프로그램을 영화화했다. 3. 주병진과 이미숙이 주연을 맡은 <가슴 깊게 화끈하게>(김수형, 1981) 4. 리메이크 영화인 <미워도 다시 한번 1980 - 1부>(변장호, 1980). 1980년대는 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강렬한 생존 욕구로 인해 숱한 하이브리드 현상이 일어났던, 용광로 같은 시기였다. 대중 문학계든 가요계든 만화계든 희극계든, 노래 제목이든 유행어든,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접목시켰으며 그 중엔 적잖은 성공도 있었고 대부분의 실패가 잇따랐다. 수많은 속편 영화들이 있었고 리메이크도 적잖았으며 애교(?) 섞인 표절도 종종 있었다. 아무튼 살기 위해 모든 것을 했던 시절이었다. 새삼 던져보는 질문. 1980년대는 과연 한국영화의 침체기였나? 표면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면을 살짝 엿보면 이 시대만큼 역동적이었던 시대도 드물다. 장르적으로 매우 다양했고, 영화 이외의 분야와 끊임없이 접점을 만들어갔다(그런 점에서 2000년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생존을 위한 분투. 1980년대는 천박한 상업주의와 여기에 저항하는 힘, 과거의 관습을 지속하려는 의지와 돌연변이 같은 존재들이 뒤엉켜 기묘한 연대기를 써 가던 시대였다. 이 시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이토록 미로처럼 뒤얽힌 상황 때문일 것이다.
올해 4월 12일, 한때 오시마 나기사의 진정한 라이벌 가운데 하나였고 일본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이기도 한 마츠모토 토시오(松本俊夫)가 세상을 떠났다. <장미의 행렬 薔薇の葬列>(1969)과 <수라 修羅>(1971)와 같은 마츠모토의 장편극영화는 국내의 시네필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2005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영화와 혁명 특별전’(2005.7.27~8.15), 한중일 아티스트들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 신시각(新視角)의 서울 전시행사로 2009년에 열린 ‘LINK!! 미디어아트전’(2009.9.4~9.13), 그리고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플랫폼 2010: 프로젝티드 이미지’(2010.11.3~11.19) 등을 통해 그의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 작업이 꾸준히 소개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오시마의 『전후영화: 파괴와 창조』와 같은 해(1963년)에 출간되어 새로운 영화를 모색하던 1960년대 일본의 젊은 영화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알려진 마츠모토의 평론집 『영상의 발견: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도 2004년에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된 바 있다. 경력 초기의 그가 영화와 관련해 쓴 주요한 글 대부분이 수록되어 있는 『영상의 발견』이 번역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츠모토 토시오의 영상작업(특히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이 그가 개진한 이론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일본의 경우, 사카모토 히로후미가 편집 책임을 맡은 총 네 권짜리 마츠모토 토시오 저작집 출간이 2016년 2월부터 시작되었는데, 현재까지는 1953년부터 1965년까지 마츠모토가 쓴 글들을 모은 제1권만이 나와 있다.) 이론적 맥락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가 없이 마츠모토의 영상작업을 보는 일이 무의미하다거나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서만 새로운 영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스스로를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영상작가 - 마츠모토는 자신을 ‘에이조사카’(映像作家)라 칭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하나다. - 로 규정하게 된 것은 왜인지 등을 살펴보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그의 이론과 실천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거리 혹은 ‘괴리’가 있다. 그런데 그의 영상작업과 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생하고 유효한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거리 혹은 ‘괴리’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거리 혹은 ‘괴리’는 작가로서의 그가 개인적 능력의 부족이나 한계로 인해 극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영상의 근본문제에 집요하게 매달린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영상의 발견: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 표지 간략하게나마 『영상의 발견』에서 개진되고 있는 마츠모토의 영화론을 살펴보자. 그에게 있어서 영상의 근본문제란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에 이르는 모든 것의 총합으로서 하나의 사물”(「네오다큐멘터리즘이란 무엇인가」)이 된 영상, 바꿔 말하면 ‘사물로서의 영상’을 출현시키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물’ 혹은 ‘모노’(もの)란 과연 무엇인가? 영어로는 통상 ‘thing’으로 번역되곤 하는 이 개념은 『영상의 발견』에 수록된 마츠모토의 글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사물이란 본디 직접적으로 지각될 수 없는 것이지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대상들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활동을 통해 그리고 오직 그러한 활동을 통해서만 인지되는 실재(reality)라고 할 수 있다. 마츠모토 자신은 이처럼 집요한 응시를 눈을 감는다고 해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사물과 맞닥뜨리게 하는 ‘잔혹을 응시하는 눈’(残酷を見つめる眼)에 빗대고 있다(「잔혹을 응시하는 눈: 예술적 부정(否定)에 있어서 주체의 위치에 관하여」). 일견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들을 집요하게 응시하다 보면 대상들이 낯설게 보이고 사물이 출현하는 순간이 ‘우연히’ 발생하기도 하는데, 카메라가 이러한 순간과 대면할 때 생성되는 것이 영상이고 다큐멘터리의 이념은 이러한 영상을 부단히 발견해 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짐작했겠지만, 마츠모토의 영상 개념은 기술적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mechanically produced image’, ‘projected image’ 혹은 ‘video’ 같은 영어식 표현으로는 그 뜻이 대단히 불충분하게만 전달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견해는 마츠모토만의 고유한 것이라기보다는, 2차 대전 이후 일본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하나다 기요테루의 저서 『아방가르드 예술』(1954), 러시아 형식주의와 빅토르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 개념, ‘두려운 낯설음’(unheimlich)에 대한 프로이트의 논고, 그리고 무엇보다 초현실주의 운동 등에서 얻은 아이디어가 다큐멘터리 방법론과 결합된 것임은 익히 알려져 있으며 마츠모토 스스로도 숨김없이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초현실주의 작가 루이 아라공의 다음과 같은 글을 위에서 약술한 마츠모토의 사물론과 비교해 보라. “나는 어떤 장소들, 어떤 광경들이 내게 행사하는 커다란 힘을 느꼈는데 이 매혹의 원리는 알지 못한 채로 그러했다. 내게 있어 일상의 몇몇 대상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러한 수수께끼의 일부를 간직하고 있었고, 나를 그러한 수수께끼 속으로 몰아넣었다. 나는 어떻게 그리되는지(méthode)는 모르지만 어떻게 하는지(pratique)는 알고 있었던 이 도취상태를 사랑했다. [……] 내가 그것을 보는 방식에 따라 하나의 대상은 변형되었는데, 그것은 알레고리적 외양을 띠는 것도 아니었고 상징적 특성을 띠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관념을 표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바로 그 관념 자체였다.”(루이 아라공, 『파리의 농부』) 아라공이 자신만의 보기의 방식을 통해 대면한 ‘관념 자체’라는 것이 마츠모토의 사물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일상 언어의 용법에서 사물과 관념이 종종 대립되는 의미를 띤다는 점에 집착하지 않고, 이러한 용어가 아라공과 마츠모토 각각의 글의 문맥에서 기능하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마츠모토가 루이스 부뉴엘의 < 안달루시아의 개 >(1929)나 제르맹 뒬락의 <조개와 성직자>(1928) 같은 영화들은 물론이고 초현실주의 운동 자체에 매력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초현실주의를 비롯한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종종 내부세계와 외부세계의 긴장보다는 내부세계 자체에 비합리적으로 몰두(혹은 도취)한다는 데 불편함을 느꼈다. (바꿔 말하자면,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실천에 내재한 응시의 방법론은 충분하다 여겨질 정도로까지는 잔혹하지 않았다.) 여기서 내부세계란 인간의 무의식에서부터 비가시적인 사회구조까지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용어라고 이해해도 좋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가시적 내부세계에 대한 마츠모토의 관심은 1960년대에는 전자로부터 후자로 이행해 가는 경향을 보였고, 멀티프로젝션 방식을 실험한 확장영화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つぶれかかった右眼のために >(1968)와 그의 장편 데뷔작 <장미의 행렬>은 후자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에 제작된 작품이다.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의 프레임들 마츠모토는 ‘사물과의 대결’(ものとの対決)이란 “응시하는 사람의 내부에 꿈틀거리는 비합리를 그 외부의 비합리와 깊이 관련짓는 것”(「영화예술의 현대적 관점」)이라고 보았지만, 내부와 외부를 관련짓는 노력 자체는 그 둘의 긴장에 항상 예민하게 촉각을 세우고 있는 합리적 주체의 의식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를 끊임없이 주체적으로 관련시키려고 하는 엄격함을 결여하고 있는 것”(「전위기록영화론」)이었다.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라는 구분을 도입하는 것이나 이러한 구분에 바탕을 두고 다큐멘터리의 의의를 찾으려 하는 것은 하나다 기요테루의 논변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지적되곤 한다. 본격적으로 영화제작에 뛰어들기 전인 1957년, 마츠모토는 오시마 나기사, 요시다 기주, 하니 스스무 등 (조만간 일본영화계에 새로운 기운을 몰고 올) 젊은 영화인들이 멤버로 있던 스터디 그룹 ‘영화와 비평 모임’(映画と批評の会)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그룹에서 발간한 잡지 『영화비평』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는데, 이 모임은 하나다가 만든 ‘밤의 모임’(夜の会)을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고 한다. 하나다의 주장 가운데 일부를 마츠모토의 그것과 비교하며 음미해 보자. “새삼스레 밝힐 필요도 없이, 내부세계의 구체적인 것은 외부세계의 구체적인 것의 반영에 지나지 않으며, 외부세계의 사물 자체와 대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영 내부세계의 무의식적인 것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하나다 기요테루, 「기계와 장미」) “감춰진 세계라는 것을 단순히 마음 내부의 문제에 한정된 것으로서 이해한다면 그것은 일면적이며 차라리 전도된 것이다. 왜냐하면 내부의 감춰진 왜곡이란 최종적으로는 모두 외부의 감춰진 왜곡에 의해 규정되며 그것을 반영한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유물론적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내부라는 것은 외부의 연장이며 그 둘 사이를 절대적으로 구별 짓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마츠모토 토시오, 「감춰진 세계의 기록: 다큐멘터리에 있어서 상상력의 문제」) 겨냥하는 것은 부조리한 ‘감춰진 세계’(隠された世界)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시적이고 외부적인 것을 통해 의식적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큐멘터리란 이러한 가시성에 천착하는 ‘장르’로서 이해된다. 하지만 마츠모토의 눈에 종래의 다큐멘터리는 내부세계와의 관련을 상실한 채 소박하게 외부세계에 밀착하는 ‘자연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것처럼 비쳤다. 그리하여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지양한 것과 마찬가지로 종래의 다큐멘터리를 지양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때 그에게 영감을 제공한 것이 알랭 레네의 단편 <게르니카>(1950)이다. 표면적으로는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대한 다큐멘터리이지만, 피카소의 그림 전체를 한눈에 보여주는 일 없이 그림 자체를 파편화하고 낯설게 보이게 함으로써 오히려 레네가 본 어떤 ‘비전’ 자체를 형상화하고 있는 듯한 이 영화에 마츠모토는 깊이 매혹되었다. 피카소가 회화적 평면의 합리성을 의식적으로 해체해 버리는 작업을 통해 전쟁이라는 부조리에 상응하는 사물로서의 회화를 출현시켰다면, 레네는 어떤 정합적인 영화적 공간도 구성하지 못하는 몽타주를 용의주도하게 구사함으로써 피카소의 회화를 통해 환기되는 세계의 부조리에 상응하는 사물로서의 영화를 출현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레네의 영화에서 마츠모토는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를 이중적으로 지양하는 새로운 리얼리즘, 즉 ‘전위기록영화’ 혹은 ‘네오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보았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쓰인 글이 1958년 5월 『기록영화』지에 발표된 「전위기록영화의 방법에 대하여」이다. 오시마 나기사가 “처음 읽었을 때 느낀 충격을 잊을 수 없다”고 토로한 바도 있는 이 글은 ‘전위기록영화론’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영상의 발견』에 수록되었다. (이 글을 읽다 보면 < 히로시마 내 사랑 >(1959)이 나오기도 전에 이 영화의 방법론을 예견하는 듯한 어조로 알랭 레네라는 작가를 ‘발견’하고 있는 ‘비평가’ 마츠모토의 혜안에 놀라게 된다.) 잔혹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눈에 대한 강조는 이미 이 글에서 분명히 표명되고 있는데, 가령 레네는 “사드의 눈으로 상황을 응시할 수 있는 많지 않은 작가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든가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는 애매한 인간성 따위를 한번 철저히 추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주장할 때 그러하다. 마츠모토가 그의 전위기록영화 방법론을 레네의 선례를 따라 충실히 적용해 본 사례 가운데 하나는 TBS 방송국의 의뢰를 받아 만든 단편 <돌의 노래 石の詩>(1963)이다. 이 영화는 어니스트 사토가 찍은 사진들을 부분적으로 재촬영한 이미지들만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마츠모토가 그의 전위기록영화 혹은 네오다큐멘터리 방법론을 가장 래디컬하게 밀고 나간 것은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에서다. 이것은 1968년 4월, 소게츠아트센터(草月ア―トセンタ―)에서 ‘무언가 말해줘, 지금, 찾고 있어’(なにかいってくれ、いま、さがす)라는 표어 아래 5일간 열린 ‘EXPOSE 1968’ 행사에서 첫 공개된, 3대의 16mm 영사기를 사용한 멀티프로젝션 작품이다. 이 작품이 공개되기 불과 두 달 전 벌어진 김희로 사건 - 재일한국인 김희로가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자신을 모욕한 야쿠자들을 살해하고 이후 스마타쿄의 후지미 여관에서 투숙객들을 인질로 삼은 뒤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고발하며 경찰과 대치한 사건으로 김영빈 감독이 < 김의 전쟁 >(1992)으로 영화화한 바 있다 - 에 관한 텔레비전 뉴스화면과 보도사진을 비롯해 신주쿠역에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예술가들과 구경꾼들의 모습, 당대의 게이 문화를 담은 사이키델릭한 영상, 거리에서의 데모 광경, 오토바이 및 자동차 경주를 촬영한 기록영상, 각종 광고영상과 사진과 포스터, ‘준비!’(用意)나 ‘스타트!’(スタ―ト) 같은 문자들과 화살표나 물음표 같은 기호들이 언뜻 보기엔 두서없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마츠모토가 작성한 ‘그래프콘티’를 보면 멀티프로젝션에 사용된 3벌의 프린트 각각이 대단히 꼼꼼한 계획에 따라 제작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의 그래프콘티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는 후루하타 유리코 같은 논자가 지적하고 있듯 1960년대 일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화두 가운데 하나였던 당대의 ‘액추얼리티’(アクチュアリティ―)를 포착하는 데는 분명 성공하고 있다. 이 작품을 보다 보면 당대 일본 사회를 감싸고 있던 저널리즘적 기호들이 한꺼번에 끓어 넘치는 용광로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떠오르는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액추얼리티란 것이 과연 영상의 사물성과 곧바로 등치 될 수 있는 것일까?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의 힘이란 어쩌면 마츠모토가 그토록 강조했던 응시의 잔혹함과 집요함을 보기의 현장감과 기민함으로 대체함으로써 얻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일상성과 응시」에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에 대해 숙고하면서 이 영화들에서는 “대상과 주체의 관계가 목격하는 시선에 의해 결합”되어 있음을 간파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 전화의 저편 > 같은 영화에서는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목격하는 시선 [……] 응시하는 것 자체가 영상화”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영상 그 자체에 의해 대상이 주체화되고 또한 주체가 객체화되는 과정의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외부와 내부의 관계를 사물을 통해 결합시킨다는 「영화예술의 현대적 관점」의 논지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츠모토에게 있어서 영상, 응시, 사물이라는 개념이 종종 상호교환적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을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와 관련해 생각해보자. 대상들(당대 일본과 관련된 시청각적 기호들)이 주체화되는 것은 영상 그 자체를 통해서라기보다는 시선 없이 객체화된 주체의 의식, 즉 구성(그래프콘티)을 통해서이고, 게다가 대상들은 주체화되기 무섭게 영상의 액추얼리티가 선사하는 사이키델릭한 산만함 속에서 다시 객체화되어 버리고 마는 것처럼 보인다. 마츠모토는 사회의 비가시적 구조를 사물-영상으로서 드러내기를 겨냥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구조로부터 파생된 다종다양한 가시적 현상들을 포괄적으로 끌어들이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구조는 더욱 수수께끼 같은 것이 되고, 몇몇 현저한 현상들에만 집중하다 보면 스스로가 신랄하게 비판한 종래의 다큐멘터리의 소재주의나 자연주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그는 대중사회 상황에 있어서 일상성(이라는 사물) 자체와 대결하는 일은 가시적인 것에 대한 집요한 응시를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낸다고 하는 네오다큐멘터리 방법론 이상의 노력을 필요로 함도 깨닫고 있었다. 왜냐하면 “일상성 그 자체는 여전히 두루뭉술한 채로 일견 포착할 곳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아다치 마사오의 <약칭: 연쇄살인마 略称: 連続射殺魔>(1969) - 1968년에 서로 다른 도시에서 네 명을 살해한 18세의 연쇄살인범 나가야마 노리오가 여행 과정에서 보았음직 한 일련의 풍경들만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1975년에 이르러서야 개봉되었다 - 에 ‘풍경론’이라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이들을 사로잡은 고민도 마츠모토와 같은 종류의 것이었을 터다. 마츠모토가 새로운 리얼리즘의 과제로 제시한 다음과 같은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눈에 보이는 것밖에 비추지 못하는 카메라로 그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응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일상성과 응시」) ※ 마츠모토 토시오의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 작품들은 우부웹(www.ubu.com/film/matsumoto.html)에서 감상할 수 있다. 마츠모토는 <장미의 행렬>과 <수라> 이후에 <16세의 전쟁 十六歳の戦争>(1973)과 <도구라 마구라 ドグラ マグラ>(1988) 두 편의 장편극영화를 더 연출하기도 했다. 마츠모토의 영상론을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고 싶다면 영문으로 된 문헌들 가운데서는 후루하타 유리코의 『Cinema of Actuality: Japanese Avant-Garde Filmmaking in the Season of Image Politics』(2013)의 1장과 2장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마츠모토의 『영상의 발견: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유양근 옮김, 동국대학교출판부, 2004)와 더불어, 이 글을 쓰면서 주로 참고했던 것도 이 책이다. 후루하타의 박사논문 「Refiguring Actuality: Japan’s Film Theory and Avant-Garde Documentary Movement」(2009), 그리고 2002년 여름호 『Positions』지에 게재된 아베 마크 논스(Abé Mark Nornes)의 「The Postwar Documentary Trace: Groping in the Dark」도 유용하다. 본문에서 인용한 하나다 기요테루의 「기계와 장미」는 사카모토 히로후미의 박사논문 「전위기록영화론의 전후적 의미: 1970년까지의 마츠모토 토시오의 여러 활동을 바탕으로 前衛記 録映 画論の戦後的意味: 1970年までの松本俊夫諸活動をもとに」(2017)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이 논문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사이트(dl.ndl.go.jp/info:ndljp/pid/10357205)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이 논문에는 부록으로 마츠모토의 <안보조약 安保条約>(1959), <니시진 西陣>(1961), <돌의 노래>의 구성표와 내레이션이 수록되어 있다.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 제작을 위해 마츠모토가 작성한 그래프콘티의 사진 또한 이 논문에 부록으로 실린 것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