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이와 고슴도치 (25부)
- 감독
- 김영철
- 제작년도
- 2004
2020년 7월 7일부터 2021년 2월 10일까지 한국영화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해방 공간의 영화인들: 혼돈의 시간, 엇갈린 행로〉라는 전시가 열렸다. 전시장에 설치된 ‘북한영화특별관’에서, 모니터와 헤드폰을 이용해 북한영화 13편을 관람할 수 있었다. 이들 중 극영화 〈용광로〉(민정식, 1949),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윤용규, 1952), 〈정찰병〉(전동민, 1953), 기록영화 〈수풍에프런공사〉(천상인, 1948), 〈영원한 친선〉(1948), 〈38선〉(강홍식, 1948), 〈남북련석회의〉(천상인, 1948), 북조선 국립영화촬영소 제작 〈조선시보〉 4편 등 11편은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작품들이었다. 이 전시를 공동주최한 한상언 영화연구소와 한국영상자료원에 감사드린다. ( 한국영상자료원 사이트의 전시 소개 에서 전시 리플렛과 도록을 내려받을 수 있으며, 지금도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 해당 메뉴 에서 온라인 전시 를 체험할 수 있다. 또,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계정에서 한상언 박사가 전시 내용을 설명하는 강연 도 볼 수 있다.) 위 13편 중 〈 내 고향 〉( 강홍식 , 1949)과 〈 신혼부부 〉( 윤용규 , 1955)는 2003년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른 북한 영화 5편과 함께 상영된 적이 있다. 2000년 6월 사상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 북한이 대표단을 파견하며 남북 문화교류 바람도 촉진되어, 2003년 봄 전주국제영화제·대종상에서 북한영화 신작〈 살아있는 령혼들 〉(김춘송, 2000), 〈 청자의 넋 〉(표광, 2003) 등이 소개되었다. 또, 2002년 10월 이두용 의 〈 아리랑 〉(2002) 평양 상영회 때 남한 영화인들이 방북했고, 2003년에는 ‘남북영화교류추진특별위원회’가 조직되어 2차 교류가 이어졌다.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 및 비디오 심의에서 제한상영가·등급 보류 판정을 연거푸 받기는 했지만 개봉 및 비디오 출시를 목적으로 북한 다큐멘터리 〈동물의 쌍붙기〉(1987)가 이즈음 수입되기도 했다. 이전에 남한의 극장에서 공개 상영된 북한영화라고는 2000~2001년에 연이어 개봉하거나 특별상영으로 소개된 신상옥 · 최은희 부부의 〈 불가사리 〉(1985)와 〈 소금 〉(1985)뿐이었으니 변화가 실감되는 시기였다. 물론 노태우 정권이 ‘북방정책’을 추진하던 1990년에 관계부처가 북한영화를 신청자에게 제한상영하거나, 〈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엄길선, 1979)가 TV에서 방영된 사례가 있긴 했다. 근년에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 이은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으로 다시 여러 영화제에서 북한영화들을 소개하려는 바람이 일었으나, 2019년 베를린 교류추진특별위원회 회담은 불발로 끝났다. 2019년 제1회 평창국제평화영화제(당시 명칭은 평창남북평화영화제) 개막작이 〈 새 〉(림창범, 1992)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엔, 이 영화를 ‘불법’ 상영하던 90년대 초의 대학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 사회주의 정권 수립 과정을 다루는 〈내 고향〉은 국정원이 상영불가 의견을 낸 바람에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선 배지 소유자만을 대상으로 제한상영 되었다. 이와 달리 〈신혼부부〉는 같은 해 부산영화제에서 공개 상영되었기에 누구나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제 개막 직전에 언론들은 〈신혼부부〉의 감독을 (이번 전시에서도 〈신혼부부〉 시나리오 작가인 주동인의 동생으로 소개되었고, 영화제작자 출신으로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알려진) ‘주동진’이라고 보도했다. 2003년 영화제 개막이 임박해서야 성사된 고 안상영 당시 부산시장 겸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의 방북, 그에 이은 북한영화 상영 결정 과정 및 영화제 폐막 이후 상영작 프린트의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경위 등은 고(故)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부산일보에 연재한 칼럼으로 꽤 소상히 알 수 있다(김지석, 〈[스무 살 BIFF, 뜨거웠던 순간들] 19. 또 다른 전쟁 ‘프린트 반입’〉 (《부산일보》, 2015년 5월7일자). 한데 2015년에 게재된 칼럼인데도, 〈신혼부부〉의 감독 이름을 ‘윤룡구’라며 여전히 부정확하게 썼다. 이는 북한으로 간 윤용규의 활동과 영화를 남한에서 잘 모르고 있었다는 뜻이다. “해방 후 조선영화의 최고봉의 신기록을 지은 수작”(이태우, ‘조선영화의 발전’, 《경향신문》, 1949년 1월 6일자, 이준엽·함충범, 2018:2 재인용)이라는 윤용규의 대표작 〈 마음의 고향 〉을 제작자 이강수 가 파리에서1993년에 다시 공개하고, 문화재청이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해 문화재 등재 필름으로 2008년에 등록한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듯하다. 국내에서 ‘연출 윤용규’라는 이름이 적시되어 〈신혼부부〉가 일반 공개된 것은 이번 전시가 처음이다. 1. 북으로 간 영화감독 일본으로 건너간 윤용규는 도요타 시로 감독의 〈항구는 바람풍 港は浮気風〉(1937) 등 ‘도쿄발성’이 제작하고 ‘도호’가 배급한 작품들의 연출부로 활동(이준엽·함충범, 2018:11)한 뒤 귀국했다. 1939년 초연된 함세덕의 희곡 「동승」을 영화화한 〈마음의 고향〉(1949)으로 윤용규는 감독으로 ‘입봉’했다. 〈마음의 고향〉은 공개되자마자 서울특별시 문화상 영화부문상을 받았고, 경무대에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가 관람할 정도로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또, 최초의 한불 영화 교류작으로 1950년 파리에서 상영되었다. 그러나 〈마음의 고향〉에 쏟아진 갈채와는 별개로, 윤용규가 남한에서 활동하는 데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윤용규는 해방 직후 잇달아 설립된 ‘조선영화건설본부’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이 1945년 12월 16일 통합한 조직인 ‘조선영화동맹’ 서울시 지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리하여 윤용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 후 좌익 인사로 분류되어 감시 받았으며, 〈마음의 고향〉 촬영 현장과 후반 작업과정도 경찰이 사찰했다.(박철, 「서정적 수법이 탁월한 공훈배우 윤룡규」, 《조선예술》, 1957.8., 90쪽. 이준엽·함충범, 2018:14). 윤용규가 북으로 간 계기를, 2000년 12월 15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초창기 북한 영화와 일본인〉에서 일본 영화연구자 몬마 다카시가 진술한 바 있다.(지금은 온라인에서 해당 기사를 볼 수 없다.) 초창기 북한영화 편집에 참여한 키시 토미코에게 들은 내용을 근거로, 몬마는 윤용규가 ‘월북’하지 않고 ‘납북’됐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키시 토미코는 닛카츠 영화사 등에서 편집을 배운 뒤 ‘만주영화협회(이하 만영)’에서 활동하던 중 일본 패전을 맞는다. 이후 만영은 중국 공산당 정권 하에서 ‘동북전영제편창(東北電影制片廠, 이하 동북전영)’으로 개편되었다. 키시는 동북전영에서 북한영화 제작에 조력했는데, 처음 담당했던 북한영화가 바로 윤용규의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1952)이었다. 영화 제작 중에 윤용규는 자신이 북한으로 간 경위를 키시에게 설명했다 한다. 전쟁 중 찾아온 북한군 병사들이 북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20분 내로 준비하라고 했고, 윤용규는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만나거나 준비할 틈도 없이 따라 나섰다고 키시는 전한다. 기실, 윤용규는 서울영화사의 창립 4주년 기념작 〈하얀 쪽배〉를 만들려던 참이었다.(〈서울영화사서 「하얀 쪽배」 제작〉, 《자유신문》, 1950년 5월 18일자. 이준엽·함충범, 2018:15~16 재인용) 결국 전쟁 중 북한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윤용규는 〈소년 빨치산〉(1951)과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1952)을 연출한다. 이즈음, 한국전쟁 초기부터 제공권을 선점한 미군의 폭격으로 평양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 시기의 참상은 전후에 프랑스와 북한이 합작한 〈모란봉Moranbong, chronique coréenne〉(1958, 이 영화에 강홍식 과 함께 출연한 엄길선은 후일 1원짜리 구 화폐에 등장할 만큼 북한을 대표하는 감독 겸 배우가 되었고, 〈신혼부부〉의 주연 배우 김현숙과 1962년에 결혼했다.)을 보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연출자 장클로드 보나르도와 각본을 쓴 극작가 아르망 가티가 크리스 마커·클로드 란즈만 등과 방북하여 제작한 〈모란봉〉은 유엔군의 평양 폭격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는 이유로 프랑스에서도 2010년까지 상영할 수 없었다. 1947년 건립된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도 파괴되어 촬영은 물론 후반작업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폭격을 피해 강계로 소개했던 북한영화인들은 1951년 5월부터 1953년 11월까지 장춘의 동북전영에서 중국 정부의 인력 협조와 물적 지원을 받아 영화를 만든다. 기록영화와 시보 여러 편 외에도 〈소년 빨치산〉(윤용규, 1951), 〈또 다시 전선으로〉(천상인, 1952), 〈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 〉(윤용규, 1952), 〈비행기 사냥꾼조〉(강홍식, 1952), 〈정찰병〉(전동민, 1953) 등 5편의 ‘예술영화’(극영화)가 장춘에서 제작되었다. 북한 정부는 이 시기 중국의 도움을 공식적으로는 부인하며, 평안북도 의주·수풍·창성과 자강도 만포군 등에 소개한 촬영소에서 김일성이 영화 제작을 지휘하여 온전히 북한 영화인의 힘으로만 전쟁 시기를 극복했다고 주장한다.(유우, 2010:249~250) 1954년 말에야 촬영 및 제작 기반 시설이 복구되어 북한영화인들은 1955년을 전후해 평양으로 모두 귀환했다. 한데 휴전 이후 윤용규가 연출한 〈빨치산의 처녀〉(1954)는 장춘에서 평양으로 이행하는 시기에 제작되었기에 마무리가 늦어져 1955년 1월에야 공개되었다.(한상언, 2011:289~290) 작업이 지연된 이유는 김일성이 외국영화와 비슷한 장면이 있다며 추가 촬영 및 보완을 지시했기 때문으로 일단 알려졌다. 그런데, 장춘에서 제작 중이던 〈빨치산의 처녀〉 작업이 늦어진 데는 주연배우 문예봉 이 카를로비바리영화제에 참석한 직후에 사적으로 술회한 여행담 때문에 ‘반쏘분자’로 지목된 탓도 있었다. 휴전 직후부터 남로당계 숙청이 시작되어 1953년 8월에는 임화 가 처형당했고, 남한출신 인사들에 대한 견제가 이어진다. 월북 직후인 1949년에도 남편 임선규가 공격 당한 적이 있었던 문예봉은 이 위기를 어쨌든 넘긴다.(한상언, 2020:95~97) 2. 휴전 직후, 신혼부부의 세계 전쟁 중 북한이 제작한 극영화가 5편인데 그 중 윤용규가 연출한 작품이 2편이었으니, 감독 윤용규의 역량을 남북한 모두가 공히 인정한 셈이다. 윤용규 이전에 북한에서 극영화를 연출한 강홍식ㆍ 주인규 는 모두 배우 출신이었고, 연출 수업을 경험한 극영화 감독은 1951년부터 작품 활동을 한 남한 출신 민정식과 윤용규가 첫 세대였다. 윤용규가 북에서 처음 연출한 〈소년 빨치산〉은 1950년 10월 말 미군이 점령한 어느 마을에서 ‘미 제국주의’의 만행에 맞서는 소년들을 영웅으로 그린다. 이 작품은 1952년 6월 중국에서 열린 ‘제6차 국제영화축전’에서 ‘자유를 위한 특별상’을 수상하며 베이징의 13개 극장에서 상영되었고, 이듬해 중국의 ‘신년 경축 특선’에서도 북한 영화로는 유일하게 선정되는 등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유우, 2016:259)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은 유엔군이 수복한 강원도 고성을 배경으로 ‘인민유격대원’들의 투쟁을 그리는 영화이고, 휴전 다음해에 나온 〈빨치산의 처녀〉는 인민군이 ‘전략적 후퇴’를 감행한 1950년 하순 후방 농촌 마을에서 투쟁을 이어가는 민간인들을 보여준다. 〈신혼부부〉를 만든 다음에 윤용규가 연출한 〈어랑천〉(1957)도 전쟁 중 그가 만들었던 작품들이 구축한 시공으로 회귀한다. 이 영화는 1950년 11월, 미군에 밀려 패퇴하다 어랑천을 사수하려는 전투원들의 영웅주의와 인민들의 지원을 다룬다. 이렇듯 1957년까지 윤용규가 만든 영화들이 당대 북한 영화의 주된 소재였던 항일·반제·반미·공습과 학살의 기억(한상언, 2011:295~301)을 되불러오는데, 〈신혼부부〉는 예외다. 휴전 성립 후 전후 복구 체제를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하는 당대를 그리며 삶을 재구축하려는 개인과 공동체, 국가의 시도를 다루는 〈신혼부부〉의 세계는, 애인이 미군 간첩임을 알게 되자 주저 없이 그를 사살하는 〈어랑천〉 주인공 박순봉(조효경)의 세계와는 판이하다. 무자비한 폭격을 당했던 평양에 막 복귀한 영화인들이 갓 세운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안팎에서 만든 영화임에도, 〈신혼부부〉는 근과거였던 전쟁의 잔혹함이나 전후의 비참함을 재현하는 대신 ‘현재’라는 시공 속에서 인물들의 관계가 자아내는 활력을 우선 포착하려 한다. 공장에서 5년 동안 선반 일을 하던 은실(첫 주연작 〈신혼부부〉의 연기부터 큰 호평을 받고 엄청난 인기를 모았던 은실 역의 김현숙은 〈모란봉〉의 원정희, 윤용규가 시나리오를 쓴 〈정방공〉(오병초, 1963)의 최부실, 김정일의 두번째 반려자였던 성혜림 등과 함께 북한영화의 5~6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연기자이며 연기 교육자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은 철도 노동자 김영철(〈내 고향〉에서 유격대원 관필 역할을 맡았던 유원준이 연기했다. 그는 1998년 타계할 때까지 북한의 ‘아버지’ 상을 구현한 배우로 통했다.)과 결혼하며 전업주부가 된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반장(반장 역을 맡은 문예봉은 유원준과 더불어 〈내 고향〉의 주연이었다.)과 막내 옥단 등 공장 동료들이 은실을 자주 찾아주지만, ‘노동역군’의 자리를 떠난 은실의 낙담은 가시지 않는다. 그러던 중 자신처럼 결혼 후 공장을 떠났다가 공사장에서 다시 일하는 옛 동료를 우연히 만난 은실은, 일터를 떠난 자신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여성을 집안에 잡아두고 싶다는 영철과 여성 노동자로서 이대로 주저앉고 싶지 않다는 은실의 갈등은 그리하여 깊어간다. 철도노동자로서 목표량 달성에 성공하여 기쁨에 들뜬 영철은 은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면 당신이 한 것과 다름없는데 바깥일 참견할게 뭐 있소. 나만 보고 산다며?" 은실은 조목조목 반박한다. 소꿉놀이 같은 집 안에만 아내를 가두어 두는 태도는 잘못이며 여성을 노리개나 보상물로 보는 것이라고, 또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하던 가부장적 태도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냐며, “당신을 옳게 도우려면” 자신도 공장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은실의 싸움에 버팀목이 되어주는 이들은, 경험이 풍부한 반장을 비롯해 목표 작업량을 달성하는 공장 여성반 동료들이다. 여성이 혁명투쟁과 생산에 앞장서는 모습은, 북한에서 윤용규가 연출한 영화에서 예사롭게 등장한다. 미군이 점령한 마을의 여성동맹위원장인 주인공을 유경애가 연기하는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1952, 〈소년 빨치산〉과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쓴 윤두헌이 숙청된 뒤부터 집체작으로 기록됐다.)이나, 〈어랑천〉(1957, 시나리오 한성)의 사례가 그러하다. 역시 여성이 주인공인 60년대 뮤지컬 영화 〈정방공〉의 시나리오도 앞서 언급했듯 윤용규가 썼다. 한편, 〈빨치산의 처녀〉(시나리오 김승구)의 문예봉과 〈어랑천〉 속 박순봉이 연기한 역할을 계승하듯 미군에 맞서는 여성전사(조유경)가 등장하는 〈녀성영웅광부〉(윤용규, 1960)의 시나리오는 〈신혼부부〉의 주동인이 썼으니, 은실과 같은 입체적이고 능동적인 여성 인물 조형은 윤용규와 협업한 당대 북한 영화인들의 공동창작 결과라 하겠다. 1955년 4월에는 ‘조중 영화배급 계약’이 체결되는데, 1956년 북한영화의 대표격으로 중국에 유일하게 소개된 영화도 〈신혼부부〉였다. 〈신혼부부〉가 1956년 8월 15일부터 8월 21일까지 베이징에서 상영될 때, 중국 언론은 “노동경쟁에서 나타난 개인영웅주의와 여성 노동자의 가치를 무시하는 잘못된 관점을 비판하는” 작품이라 소개한다.(유우, 2020:157) 3. 소리와 노래 〈신혼부부〉에서 영철과 동료 철도노동자들은 휴식 시간에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언덕을 산책하는 부부와 은실의 공장 동료들은 창공을 배경으로 이렇게 노래한다. "그대와 함께 푸른꿈 키우며 / 당신과 나는" 부분적으로 뮤지컬 장르 양식을 채용한 〈신혼부부〉 가 제작되기 직전에 평양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무용 가극 공연을 채록한 〈아름다운 노래〉(전동민, 1954)였다. 그리고 북한 ‘예술영화’ 중 공연 채록을 제외한 평양 복귀 후 첫 작품이 바로 〈신혼부부〉였다.(유우, 2020:142) 〈신혼부부〉가 만들어진 이듬해인 1956년에는, 광주 출신 음악가 정추의 형이며 일본 니혼대학에서 유학했던 정준채가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아 최승희의 무용극을 옮긴 〈사도성 이야기〉도 나온다. 컬러 필름으로 인민적 전통과 민족문화를 다루는 영화들의 시초라 할 작품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윤용규도 1958년에 북한의 네 번째 컬러 극영화 〈 춘향전 〉을 연출한다.( 「북한에서 만든 영화 <춘향전>」 , 한상언 블로그) 〈신혼부부〉가 나오기까지, 북한영화에 음악은 물론 사운드 기술이 도입된 기간은 기실 그리 길지 않았다. 북한의 첫 발성(토키)영화는 〈인민위원회〉(1947)였다. 정준채 감독이 다큐멘터리 제작 제안을 받아 1945년에 월북한 뒤 연출한 〈인민위원회〉는, 소련 기술진들의 도움으로 녹음설비를 구축하여 1947년 준공되었으나 전쟁으로 파괴될 평양의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에서 만들어졌다. 그런 까닭에 초창기 북한 영화는 소련 영화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사운드와 뮤지컬 장르의 도입에서 그 영향은 명백하다. 소련 영화사에서 사운드 녹음 기술을 처음 도입한 작품은, 1929년 11월에 상영된 아브람 룸 감독의 〈위대한 파업의 계획Plan velikikh rabot〉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학 연구자 김수환은 〈위대한 파업의 계획〉을 예로 들며, 서구뿐 아니라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도 사운드 기술이 처음부터 생산 및 산업의 문제, 노동과 기계의 소리를 담았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고 분석한다. 김수환에 따르면, 소련 무성영화는 발성영화로 단숨에 옮겨가지 않았다. 소련에서 처음 토키영화가 상영된 1929년 11월은 “신경제정책이 제1차 5개년 계획으로 바뀌는 시기”였고, 1920년대를 뒤흔들었던 혁명적 아방가르드 영화의 실험적 미학주의가 ‘형식주의’로 공격당하고, 2년 뒤인 1934년에 소련의 문예 창작 공식 지침으로 채택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얼개를 드러내던 때이기도 했다. 이 시기를 거치며 혁명기의 전위적 몽타주 영화는 “만인을 위한 영화”인 토키영화로 변모해갔다. 사운드를 채용한 소비에트 영화는 크라카우어 식으로 표현하자면, ‘대기실’의 기간을 가져야 했다. 하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로 변화되는 중에 있던, 아직 혁명이 완수되어 모든 것이 확실해지기 이전의 세계, 그런고로 불투명한 잠재성과 가능성의 다발들이 공존할 수 있었던 “끝에서 두번째 세계”. 혁명기의 “실험적인 파토스”가 잦아들었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지만, 도래할 그 무엇을 정확히 예측하지는 못 하는 때.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이를 대체할 시대가 목전에 다다른 이 상황은, 크라카우어가 말한 역사의 “대기실 풍경”, 혹은 “끝에서 두번째 세계”(크라카우어, 2012:232)와 흡사했다. 끝으로 향하기 위한 “대기실”의 풍경을 보여주는 이행기의 영화로 김수환은 〈홀로Odna〉(그리고리 코진체프·레오니드 트라우베르크, 1931)를 꼽는다. 〈홀로〉는 정치, 사회,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하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로 변화하는 총체적인 ‘이행기’에 출현했다. 무성영화로 만들어진 〈홀로〉는 개봉 때 발성 대사를 더했으며,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영화음악(작품번호 26번, 가사가 있는 노래도 포함되어 있다.)을 사운드 트랙으로 채용했다. “혁명적 아방가르드 영화의 ‘시작’과 ‘끝’ 사이”에 걸쳐져 있는 영화. 무성영화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전형적 발성영화도 아닌, 1920년대 아방가르드 영화 양식에서는 이미 벗어났지만, 아직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독트린으로 따르지도 않는 ‘양가성’이 〈홀로〉를 특징짓는다. ‘다수의 집단적 주체’가 아니라 한 평범한 젊은 여성이 주인공이며, 제목이 이 개인성을 전면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은 1920년대의 혁명적 아방가르드 영화와는 확연히 다르다. 감독들은 이 제목이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에 정해졌으며, 당시로선 논쟁적인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 후 정태적 사실이 아니라 혁명 과정에서 운동하는 현실을 담으라는 정언명령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의거해 소비에트 영화는 “만인을 위한 영화”를 자임하며 완전한 발성영화로 전환했으며, 그 과정에서 “승리한 계급의 요구이자 권리”로서 “마땅히 도래”해야 하며 “있어야 할” “흥겹고 즐거운” 소련을 제시하는 ‘스탈린 식 뮤지컬 코미디 영화’라는 변종을 낳는다. 이 새로운 장르는 현실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할리우드의 대체물로 작동했다.(김수환, 2017:436, 440, 443, 449, 450, 452, 457~458, 460, 462) 〈신혼부부〉의 양상들도 “이행기의 영화”인 〈홀로〉와 여러 모로 닮았다. ‘신혼부부’라는 제목이 표상하는 개인들의 내밀한 생활과 가정이라는 소우주도 ‘소년 빨치산’, ‘또다시 전선으로’,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 ‘비행기 사냥꾼조’, ‘정찰병’, ‘빨치산의 처녀’ 등 투쟁하는 공동체의 일원 혹은 집단을 호명하던 북한 ‘예술영화’(극영화)의 제목과는 퍽 다르다. 한편, “노동계급의 노동투쟁” 영화(유우, 2019:150)라고도 일컬어지는 〈신혼부부〉의 평양 선반 공장 노동자 은실, 열차 노동자인 영철과 그 동료들은 이전 북한 영화에 주로 등장했던 농업 공동체와는 절연한 상태다. 전쟁의 기억도 전혀 술회하지 않는 그들은 도시의 공장과 기관차·철로변에서 기계와 더불어 일하고, 직장 기숙사와 평양의 노동자 주택에서 여가를 보내며 평화롭게 노래한다. 신혼부부가 다투거나 속삭이는 말소리 외에도, 영화의 사운드 스케이프는 노동 생산 과정에서 분출되는 기계 소음,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노동자들의 토론과 노래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의 음성과 노랫소리는 기계음, 도시를 복구하는 건설 소음들과 함께 인간 내면의 목소리를 영화의 표면에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때로는 새로운 소비에트에서 경험하는 삶의 내밀한 감정을 발산하고 때로는 당의 명령과 자신의 소명에 회의를 토로하는 주인공의 마음을 방백처럼 들려주는 〈홀로〉의 사운드가 담당한 몫과 〈신혼부부〉의 소리와 노래의 역할은 특히 비슷하다. 3년을 넘긴 전쟁으로 초토화된 평양, 그 중에서도 집중적으로 폭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대동강변을 건설노동자들이 재건하는 장면을 익스트림 롱쇼트로 조망하거나, 평양 상공을 장식하는 불꽃놀이를 신혼부부가 바라보는 장면은, SF영화처럼 단숨에 혁명 소비에트의 수도를 세워 올리던 〈새로운 모스크바Novaya Moskva〉(알렉산드르 메드베드킨·알렉산드르 올레닌, 1938)를 떠오르게도 한다. 전쟁 중이던 1951년에 작성된 작성된 「평양시복구건설 총 계획도」는 전후 인민경제 복구발전 3개년계획의 수립과 함께 수정되었는데, 실상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한다. 평양의 도시재건도 영화 스튜디오 건립의 경우처럼 소련과 동유럽 기술진 및 건축자재 원조에 기대어 진행되었으며, 건축설계자와 건설노동자들은 휴전 후 다시 발표된 「제2차 평양시 복구위원회 결정」에 따라 평양 중심부를 재설계하고 정치적 상징공간을 조성한다. (김태윤, 2022:97, 128) 〈신혼부부〉는 한국전쟁 이전 ‘민주기지’의 중심도시였던 평양이 전후복구 과정에서 명실상부한 북한의 수도로 자리매김해가는 이 과정을 집약하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스크린에 재현하기 보다는 “있어야 할 세계”를 향한 사회주의적 열망으로 평양이라는 도시의 새로운 공간들, 노동자들의 일터와 집을 묘파한다. 사람들과 사물들 사이로 신작로가 닦이며 건물이 다시 들어서고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갈 때, 인간 관계 및 계급, 유기물이나 비유기물을 포괄하는 새로운 우주가 형성되는 듯하다. 그런데 이 신세계에서 간간히 불리는 관조적인 노래들은, 스탈린 집권 이후의 소련 뮤지컬 코미디들이 지닌 무작정 흥겹고 쾌활한 음조나 동화와 같은 정조에는 아직 도달하지 않고 있었다. 해방부터 휴전에 이르기까지 북한 문학예술을 지배한 사조는 소위 ‘고상한 사실주의’였다. 신생 국가의 바른 ‘기풍’을 위해 고상한 덕성을 갖춘 모범인물을 창출하는 문예창작을 주문하는 지침이었다.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은 대개 1930년대 이후 소련이 정초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따랐으나, 해방 직후 북한의 ‘혁명단계’는 아직 사회주의를 달성하지 못한 인민민주주의 단계로 여겨졌기에, 이행 단계를 상정하는 개념을 구상한 것이었다. 그러다 〈신혼부부〉가 세상에 나온 직후인 1956년 즈음, 김일성 일인 지도 체제가 확고해지고 중공업 우선정책을 채택하여 생산력이 증대하자 북한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사회주의 리얼리즘)’를 공식 기조로 언급하게 된다.(정영권, 〈북한영화의 역사와 미학-1945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 《씨네21》, 2018. 06. 27.) 사회주의로 가는 이행기로 치부된 전시 공산주의와 달리, 스탈린의 지도 하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구현하는 세계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교시로 삼았던 ‘사적 유물론’에 따르면 마지막 세계, 즉 묵시록의 시간을 이미 거친 시간이었다. 그리고 1969년에 이르러, 〈신혼부부〉의 서정적인 노래들은 피와 불의 바다를 재현하는 ‘혁명가극’으로 변모할 것이다. 4. 대기실의 몽타주 〈신혼부부〉는 뮤지컬 장르를 일부 채용하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대 뮤지컬 코미디의 전형과는 궤를 달리한다. 물론 미디엄 쇼트와 바스트 쇼트가 주를 이루는 〈신혼부부〉의 화편화 전략은 언뜻 봐선 1950년대 소련 영화의 주된 경향들과도 닮아 있다. 그러나, 무수한 회의와 망설임 끝에야 비로소 재건 중인 국가의 부름에 응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은실이나, 자신의 아내가 사회적 노동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이기도 하다는 걸 많은 시행착오 후에 깨닫는 영철은, 유토피아 건설을 향한 무한한 신념으로 무장한 ‘전형적 주인공’들과는 거리가 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의거하자면 되레 ‘부정적 인간형’에 가까울 이들 부부가 마침내 결단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 〈현기증〉과 같은 히치콕의 연출작에서 자주 만나기도 했던 - 줌인트랙아웃 쇼트는 여전히 아방가르드적이다. 문예봉이 분한 반장이 과거의 피땀어린 작업을 술회하는 시퀀스는, 전경에 기계를 배치하고 인물은 초점을 흐린 채 후경에 둔다. 공업 중심 정책을 밀어붙이기 시작한 신생국가 북한의 이념을 형상화하는 표현주의적 연출이라고 부연할 만한 장면이다.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영철이 사과하여 공장에 복귀하기까지 은실이 주로 머무는 집 내부와, 은실을 찾아와 집 밖에서 부르는 공장 동료들의 활력을 때로는 나누고 때로는 합하며 재배치하는 〈신혼부부〉의 편집 방법론은 1920년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영화의 몽타주를 전범으로 삼은 듯 보인다. 1957년에 공개된 윤용규의 〈어랑천〉을 보고 쓴 박철(평론가로 추정)의 아래 글(「서정적 수법이 탁월한 공훈배우 윤룡규」, 《조선예술》, 1957.8)은 윤용규의 작가적 역량, 특히 그의 몽타주에 대한 당대 북한 영화계의 높은 평가를 어림하게 한다. 전문은 한상언 박사의 블로그 에서 볼 수 있다.(현재 통용되는 표준 한국어 규정과 다른 표기 용례를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두었다.) “(전략) 전후에 제작한 〈신혼부부〉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복구 건설에 궐기하고 있는 인민들의 생활 화폭이 경쾌한 수법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일군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공명주의와 개인주의가 우리의 건설 사업을 어떻게 방해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었고 한편 가정에 대한 낡은 관념이 발전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극복되여 가는가를 이야기 해 주었다. 이 영화는 평화와 행복을 창조하고 있는 공화국 근로자들의 영웅적 노력투쟁과 이 과정에서 힘차게 일떠서는 전후 복구 건설의 웅장한 모습들을 소개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노동의 빠포스를 일관시키면서 공화국의 불패의 생활력을 과시하였다. 이상과 같이 윤룡규는 창작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우리 인민들의 사상 감정을 작품에 정확히 반영시키고 있으며 역사 발전의 중요 모멘트에서 버려지고 있는 사변들을 감동적으로 모사하면서 자기 자신도 현실과 함께 발전해 나갔다. (중략) 선이 굵고 서사적인 수법에 능한 예술가와 섬세하고 서정적 수법에 능한 연출가를 구분할 수 있다면 윤룡규는 보다 후자에 속하는 작가다. 그의 이와 같은 창작적 특성은 영화의 분위기 묘사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 뜨락또르 엔진 소리가 들려온다. 마을 안 골목길들에서 아이들이 환성을 올리며 달려 나온다. 길목에서 모이를 쪼아 먹는 닭이며 돼지들이 달려드는 뜨락또르에 놀라서 기급하여 달아난다. 마을 아이들과 아낙네들의 신기로운 시선이 뜨락또르에 집중되자 운전대에 앉아 있던 명춘보는 그들에게 눈인사를 보내면서 의기 양양행서 뜨락또르를 몰아간다.…… 이것은 영화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의 한 장면이다. 얼핏 생각하면 이 장면은 전체 구성으로 보아 주선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세심하게 살펴보면 이 장면이 전후 관계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놀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낙후한 생산도구로 농사를 지어 오는 농민들에게 있어서 근대적 농기계인 뜨락또르의 출현은 경이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윤룡규는 이와 같은 정황을 신기한 괴물의 출현에 놀라서 혼비백산하는 닭, 돼지들의 유모라스한 화폭과 마을 어린이들과 아낙네들의 감정과 또 앞으로 농촌의 개변에 중요한 역할을 놀게 될 뜨락또르 운전수의 궁지에 찬 시선을 통하여 집약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서정적 분위기가 안받침되여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개간지에 뜨락또르가 도착하였을 때 이를 환영하는 농민들의 환희에 찬 감정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 이와 같은 수법은 〈신혼부부〉에서도 재치 있게 적용하고 있다. 례를 들어 신혼부부들이 시내로 구경을 나왔을 때 부닥치는 분위기 묘사는 지금까지 신방을 지키고 있던 신부의 감정에 큰 파문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하게 형상되였다. 복구 건설에서 로력적 위훈을 세우고 있는 인민들의 씩씩한 모습, 힘차게 일떠서는 웅장한 거리르 이 모든 정황은 신부가 상상하던 지난날의 그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벅찬 현실 속에 신부를 안내했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이 자기를 뒤에 남겨 두고 훨씬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을 자각하게 되며 온화하던 그의 감정 세계에서는 파문이 일게 되는 것이다. 이밖에 윤용규는 인간의 감정 세계에 침투하는 예리성으로써 신혼부부의 섬세한 감정의 교차를 파악하고 형상에 옮겨 놓음으로써 백화점 장면 또는 가정 내에서의 생활 분위기들에서 갓 결혼한 젊은 부부들의 생활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와 같이 윤룡규는 섬세하고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인간들의 생활감정에 침투하며 생활적 디테일을 발굴하여 인물들의 성격을 형상해 내는 우수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중략) 우수한 몬따쥬와 영화의 정확한 리즘과 템포의 조성은 관객들의 예술적 감흥을 환기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놀고 있다.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의 개간 장면에서 느낄 수 있는 경쾌한 리즘과 템포는 농민들의 노동에 대한 희열과 노동 과정에서 조성되는 율동과를 정확히 결부시켜 주었다. 〈신혼부부〉에서는 건설장 장면에서 얼마 길지 않은 화면들을 훌륭하게 몬따쥬함으로써 건설의 벅찬 분위기를 집약적으로 묘사하였다.(후략)” 박철은 “역사 발전의 중요 모멘트에서 버려지고 있는 사변들을 감동적으로 모사”한다고 진술하며 윤용규 영화 속 몽타주의 힘을 꿰뚫는다. 그가 언급하는, 은실과 옛 동료가 만나는 공사현장 몽타주와 은실 부부가 산책하는 대동강변 몽타주는 인물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선명히 드러낸다. 인물뿐 아니라 꽃, 아코디언, 책, 탁자, 스탠드, 창틀, 그림 엽서, 시계, 벽에 걸린 옷과 모자, 빨래, 사과, 밥상 등 실내 정물을 비롯한 〈신혼부부〉 속 사물들은 몽타주라는 이론과 실천의 근간이 되는 ‘파편’으로 작동한다. 이 “이질적인 시간들의 파편”은 “또 다른 생성의 잠재성을 내포하며 (사유의) 섞임, 교환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며, “‘잃어버린 것으로 기억된 것’이자 존재의 희미한 전조”로 현전하며 잠재적 카오스라 할 파편화 상태에서 충돌하고 투쟁하며 길항하다 어느 순간 “단박에 빛의 속도”로 결합하여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전대미문의 관계” (이정하, 2022:118~121, 327)를 미구에 창조할, 새로운 역사 주체 형성의 가능성을 감지하게 하는 몽타주를 이뤄낸다. 글 서두에서 언급했던 전시 도록 64쪽에, 1956년 중국 영화 잡지 《대중전영》 15호 표지에 실린 〈신혼부부〉 컬러 스틸이 실려 있다. 은실은 사과를 깎고 있고 공장 막내 옥단이가 은실을 지켜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손짓을 한다. 이 장면에서 보이는 사과는 부부생활의 ‘위기’를 맞게 될 은실과 영철의 신혼집 탁자 위에 영화가 전개되는 내내 놓여 있다. 사물과 사람이 부딪히며 접속하여 구축하는 〈신혼부부〉의 리듬과 템포는, “영화의 기계적 지각으로 시각적 무의식 지대, 나아가 일상적 무의식 지대”를 목도할 수 있으며, “이 일상적 무의식 지대가 우리의 의식으로 포착되지 않고 파악되지 않는 비결정적 영역이자 역사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의 틀에서도 빠져나가는 영역”이라던 벤야민의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속 한 구절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벤야민의 스승 에른스트 블로흐는 당대의 현실을 복수적이고 공시적인 시간성, 곧 ‘비-동시대성’이란 개념으로 해석할 것을 제안하며 그 방법론을 현대예술의 몽타주에서 찾으려 했다. 블로흐에 따르면 몽타주는 근대 도시의 비-동시대적 시간성에 정합적인 인식 형태이다. 장기지속된 시간 동안 과거의 지층에 잠재해 있다가 현재라는 이질적 공간에 급작스레 출현하는 ‘역사적 징후’를 현시하는 형식인 몽타주는 바로 그러하기에 ‘지금-시간’을 혁명적 아방가르드로 이행시킬 ‘중지(중단)의 방식’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몽타주로 해체된 과거의 대상들에서 이전에 현실화한 적이 없는 잠재적 힘을 포착하여, 사물에 잠재한 힘들을 해방하고 해방된 힘으로 미래를 축조할 초석을 마련하자고 블로흐는 주창한다. 한편 죄르지 루카치가 정초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익히 알려져 있듯 몽타주를 리얼리즘 미학에 반하는 형식주의 방법론의 정점으로 여겼다. 루카치에게 있어 “통일성을 깨뜨리고 유기적인 것의 소멸을 야기”하는 몽타주는 역사적 데카당스의 징후를 드러내는 명백한 표징일 뿐이었다.(이정하, 2022:326~327, 329, 332~333, 335) 블로흐의 역사의식을 빼 닮은 사유를, 후학인 모스크바-타르투 학파를 대표하는 문화기호학의 창시자이며 영화이론가였던 유리 로트만의 저작 『문화와 폭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로트만에 따르면 과거와 미래의 관계는 대칭이 아니다. 미래는 가능태의 공간이며, 현재란 아직 전개되지 않은 의미 공간의 갑작스러운 점화이다. 그것은 잠재적으로 미래의 모든 발전가능성을 자신 안에 담지하고 있다. 이 가능성 중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이 인과 관계나 핍진성의 법칙을 따르진 않는다. 미래의 선택은 우연히 실현된다. 그러하기에 그 선택은 극도로 높은 정보성을 지니게 된다. 동시에 폭발의 순간은 잠재적 가능성으로만 남은 다른 노선들을 잘라내고 인과 관계의 법칙이 다시 작동하게 하는 기점이기도 하다. 폭발의 순간은 체계의 모든 정보성이 급격히 늘어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완만한 발전은 이제 완전히 새롭고 예측 불가능한 노선으로 도약한다. 체계 내의 모든 요소가, 혹은 폭발로 인해 미래의 운동가능성이 구축한 망 속으로 우연히 들어온 다른 체계의 요소조차, 폭발의 결과로 태어나 미래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지배적 요소로 등장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음 단계에서 이미 그것은 사건들의 예측 가능한 연쇄를 만들어낸다. 폭발적인 역사의 국면에서 이루어진 모든 미래 예측의 경험들이 증명해주는 바는, 역사의 급격한 전환을 정확히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폭발이 소진되는 순간은 전개 과정의 전환 국면을 표상한다. 역사의 영역에서 이는 향후 발전을 위한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자기를 인식하는 지점에 해당한다. 이후의 발전 과정은 의식적으로 우리를 폭발의 최초 지점으로 되돌릴 터이다. 이미 발생한 사건이 관찰자의 판단에 투영되며 새로운 존재성을 획득한다. 이때 사건이 근본적인 변모를 겪게 되는데, 즉 우연히 발생했을 뿐인 사건이 이제 유일한 가능성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관찰자의 의식 속에서 예측불가능성이 법칙성으로 탈바꿈한다. (로트만, 2014: 29~32) 『문화와 폭발』을 한국어로 옮긴 김수환은, 로트만이 쓴 구절을 공들여 인용해가며 다음과 같은 역자 해제를 썼다. “예술가의 창작 과정을 다룬 이 시(알렉산드르 블로크의 「예술가」)에서 제시되는 영감의 순간은 번역 불가능한 것을 번역 가능한 것으로 바꿔놓는, 예측 불가능한 폭발의 국면과 다르지 않다…. “기호학적 지층에 뚫린 창문”으로서 폭발은 불가피하다. …만일 그 창문이 없다면, ‘기호계’ 역시 존속 할 수 없다. 창문(폭발) 없는 기호계(문화)는 더 이상 약동하는 생성의 메커니즘이 아닌 죽어버린 감옥이 될 뿐이다. 폭발은…가능한 것이 아닌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향해 조준된 개념이다…. 문화와 폭발, 그것은 모든 허용된 예측가능성의 경계 너머로 돌파하는 예외적 사건의 행위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작동의 원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뚫고 지나갈 균열의 장소, 곧 “기호학적 창문”을 요구했던바, 바로 그 창문이 ‘폭발’의 이름으로 대두한 것이다.”(로트만, 2014:310~311, 315, 329, 332~333) 〈신혼부부〉에는 말 그대로 ‘창문’이 수 차례 대두하며 다음과 같은 몽타주를 동반한다. 영철이 누워 있는 직장 기숙사 창문 밖에서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걸려 멈춘 달의 형상. 공장을 그만두고 답답해하는 은실이 바깥을 내다보는 창에 걸린 레이스 커튼의 미세한 흔들림. 이 장면들은 연속적 시간에서 벗어나 있는 듯한 찰나의 이질적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하며 새로운 시간성을 개시한다. 다시 김수환을 인용하자면, 폭발은 “기존의 상황을 급변시키는 급격한 단절의 사태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사태를 가능케 하는 어떤 조건의 급작스러운 개시”를 뜻한다. 또, 폭발은 혁명적 사건의 발생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을 위한 가능성의 급작스러운 열림이다. 이는 연속적 과정들의 시간성 안에서 온전히 재현될 수 없기에 분절되고 탈구된 시간이 되며, 이 ‘빠져나온 시간성’ 안에서 불가능했던 잠재태가 가능태로 변모한다. (로트만, 2014:332, 334)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를 탐색하며 창문을 바라보는 은실과 영철 부부는 이 시공에 개시되는 “폭발의 시간성”에 휘말린다. 해방공간의 전후 동안 남북 양측에서 윤용규의 동료였던 임화도 일제강점기에 쓴 글에서 벤야민과 블로흐, 로트만을 연상하게 하는 역사관을 밝힌 바 있다. 「조선영화발달소사」, 「역사·문화·문학: 혹은 시대성이란 것에의 일 각서」 등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 사이에 임화가 조선영화 및 역사기술을 다룬 저작의 구조를 살피며, 손이레는 임화가 뒤엉킨 시간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조선영화의 형성 과정을 기술한다고 분석한다.(손이레, 2018:376~379) 손이레에 따르면, 시급히 과거를 탐구하기 위해, 임화는 위기라는 감각을 압도하는 지금-여기의 조건을 강조한다. 역사에 대한 이러한 발견적 접근은 임화의 시간성에 대한 이해와 결부되어 있다. 이는, 현재의 일부분이 아직 과거 가운데 살고 있음에도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과거 가운데 살아 있는 현재가 아니라 현재 가운데에 살아 있는 과거이며, 현재 가운데 살아 있는 미래에 대하여 우리의 주요한 관심이 향해 있기 때문이다. 임화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성이 뒤얽혀 있음을 “현실성”과 “가능성”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과거 가운데 살아 있는 현재: 과거의 가능성 중 현실화된 것 -현재 가운데 살아 있는 과거: 현실화된 것 중 한때 가능성이었던 것 -현재 가운데 살아 있는 미래: 현재의 가능성 중 미래에 현실화될 것 임화가 역사를 통해 모색하려는 바는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일방통행로에서 도출되지 않는다. 이는 과거의 가능성과 현실화된 가능성들의 관계,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조건 관계를 인식할 때 가능하다. 그것은 현실성과 가능성 간의 혼종을 내비치지만, 동시에 과거와 미래의 접촉면인 현재의 어떤 가능성이 현실화되는지는 인식하기 어렵다는 점도 임화는 지적한다. 가능성과 현실성의 뒤얽힘에서 가능성이 현실화하는 현재가 생성되고, 현실성의 조건 속에서 또 다른 가능성이 배태되는 것이다. 그러나 임화가 식민시기부터 암중모색했던 이 조건들의 창문은, 그에게만은 휴전 직후에 영영 닫히고 말았다. 5. 대기실 밖으로 나서다 〈신혼부부〉 제작을 전후한1954-56년 사이에 ‘전후복구3개년계획’이 진행된다. 1956년 말에는 천리마운동이 노동강화·경쟁운동으로 시작되었고, 이후 생산성 향상을 위한 경제 자주노선 천명은 물론 정신개조를 위한 장기 운동으로까지 이어진다. ‘조선필림’ 로고조차 평양 복귀 직후엔 모스필름의 그것과 닮은 인민 형상이었다가, 천리마운동이 시작되고 사람들 사이에 말이 끼어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는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 1956년 흐루쇼프가 소련공산당 대의원 회의에서 비밀연설을 하며 점화한 스탈린 격하 운동의 시기와도 겹친다. 따라서 북한도 소련의 상황에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55년에는 남로당계를 대표하던 박헌영이 우선 제거되었다. 1956년 8월에는 전후복구를 위한 경제 원조를 청하러 동구권 국가를 방문 중이던 김일성을 윤공흠 등이 비판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반당종파분자로 몰린 서휘 등 4인의 연안파는 중국으로 탈출한다. 이른바 ‘8월 종파사건’으로, 연안파 외에도 소련파 등과의 연합정권 성격이 짙었던 북한이 확고한 김일성 단일 체제로 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에는 영화감독 정준채의 동생인 음악가 정추와 모스크바 영화학교 유학생들도 연루되었으며, 이들은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소련으로 망명한다. 영화 〈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 김소영 , 2017)가 다루어 우리에게도 낯설지만은 않은 역사다. 이즈음 김일성은 영화 등 예술창작노선에도 직접 개입하기 시작하는데, 윤용규가 〈어랑천〉을 발표하는 해인 1957년 1월17일에는 조선영화예술촬영소에서 연설했고, 1960년 무렵엔 김정일에게 영화예술 ‘영도자’의 지위를 승계한다. 이 시기에 북한은 자유주의적 문화예술인을 “반동적 부르주아 작가”라 칭하며 ‘반우파 투쟁’도 전개한다. 1956년 1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서 「문학예술분야에서 반동적 부르주아사상과의 투쟁을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결정을 내려 기석복, 정률 등을 “협애한 지방주의 및 종파주의” 혐의로 1952년에 비판 받은 김남천, 이태준 등을 지지하는 부르주아 작가이자 종파분자로 지목한 뒤, 같은 해 4월에는 “이러한 부르주아 반동 작가들이 전파한 사상적 악영향”을 완전히 숙청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또, ‘8월 종파 사건’ 직후인 1956년 10월에 열린 ‘제2차 조선작가대회’에 나선 김일성은 카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을 혁명으로 확립하여 “자본주의 사상잔재 버리고 당과 혁명을 위하여,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예술인”이 되라고 요구한다. 중국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벌어졌는데, 1958년에야 북한과 중국에서 ‘반우파투쟁’이 일단락되며 예술적 자율성을 침해하는 관료주의와 사회주의 리얼리즘만을 천명하는 교조적 통제가 문화예술계마저 지배하게 되었다.(유우, 2020:148) 〈신혼부부〉가 상영된 이듬해에는 천리마노동운동을 처음 다룬 영화인 〈행복의길〉(전동민), 한설야(그는 1960년대 초에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의 대표작 『력사』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김일성을 항일유격투쟁의 민족영웅으로 자리매김하며 일인 체제 강화를 선전하는 영화 〈백두산이 보인다〉(김락섭)가 연달아 나온다. 북한영화가 끝에서 두번째 세계의 대기실을 나와 “역사 발전의 마지막 단계”에 진입한 때를 이즈음이라 할 수 있겠다. 그 후, 1960년대에는 “당과 혁명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을 지니고 생산목표 달성을 위해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여 기적적인 성공을 거두는 천리마 영웅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는 1960년 11월 김일성이 ‘작가, 작곡가, 영화 부문 일군들과 한 담화’에서 「천리마 시대에 맞는 문학예술을 창조하자」라는 연설을 통해, 문예 창작에 시대 정신을 반영하는 현실적 주제, 즉 “천리마의 기세로 내달리고 있는 우리 인민의 이 위대한 창조적 생활”과 “천리마 시대 사람들의 보람찬 생활과 영웅적 투쟁 모습”을 형상화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었다.(유우, 2020:182) 또, 앞서 언급한 〈정방공〉을 비롯해, 〈갈매기호 청년들〉(1961), 〈붉은 꽃〉(1963) 등 스탈린 식 뮤지컬 영화들도 다수 만들어졌다.(정영권, 같은 기사) 한편, 〈신혼부부〉의 인간형은 곧 시대정신이 되는 천리마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철과 은실은 전후 복구와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성심을 다하면서도 회의하고 부부싸움도 하는 평범한 소시민적 인간이다. 문예봉이 연기하는 선반 공장의 작업반장 선배도 목표량 달성을 위해 동료들을 곡진하게 추동하지만, 천리마 시대의 초인적 영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신혼부부〉는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전후 복구와 새로운 공화국 건설 과정에서, 개인 영웅주의를 되레 비판하는 작품으로 당대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들의 세계는 천리마 운동으로 정향된 것이 아니었으니, 그들은 천리마 시대와 이후에 이어지는 ‘고난의 행군’이 아닌 다른 시공으로 향할 수 있었던 가능성을 품고 대기실에 머물러 있었던 셈이다. 이렇듯 사뭇 ‘비-동시대적’인 작품을 창작한 윤용규는 1955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발탁되고, 1964년에는 중앙위원이 된다. 같은 해에 그는 조선영화인동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및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이 되고, 배우로도 활동하며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는다. 하지만 이후 ‘복고주의자’로 몰려 한동안 영화계에서 떠나있어야 했다. 윤용규와 여러 작품에서 협업했던 문예봉도 1969년부터 활동을 중단했다. 잡지《조선영화》 1965년 4월호에 나운규 를 회고하며 찬사를 섞은 일이 빌미가 되었다 한다. 윤용규는 1980년 〈춘향전〉을 다시 한번 만드는데, 유원준과 공동연출했다. 일제강점기의 첫 발성영화인 < 춘향전 >( 이명우 , 1935)에서 성춘향을 연기했던 문예봉이 이번엔 이몽룡의 모친 역을 맡아 북한영화계에 복귀했다. 또, <마음의 고향>에서 주인공 도성의 어머니로 분했던 김선영 이 이 작품에서는 월매로 등장한다. <춘향전> 제작 후에 다시 활동이 뜸하던 윤용규는, 1984년 5월 22일에 “온 사회를 주체사상화 하는 역사적 위업에서 연극 영화 예술인으로서 지니고 있는 자기의 임무와 책임에 충실했”다며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이준엽·함충범은 훈장 수여의 실제 연유를 다른 데서 찾는다. 약 한 달 전인1984년 4월 19일, 신상옥과 함께 첫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에서의 활동을 기정사실화하고 김정일의 절대적 신임을 얻은 최은희가, 〈마음의 고향〉으로 자신을 주연배우로 부상시켜 준 윤용규에게 사의를 표했다는 해석이다. 훈장을 받은 윤용규는 1986년에 〈가야금에 깃든 사연〉을 연출했는데, 이 작품 이후의 행적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북한영화 연구자들은 윤용규가 다시 활동을 중단한 까닭을 최은희·신상옥이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 주재 미국대사관으로 탈출한 사건과 연관하여 유추한다. (이준엽·함충범, 2018:28, 46~48)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전환의 국면이 배태한 영화 〈신혼부부〉와, 시간성이 분기하는 역사와 현실을 현시하는 역량을 지녔던 영화인 윤용규가 ‘오래된 미래’인 과거에서 도래한 2021년. 지금-여기 또한 무언가 다른 것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끝에서 두번째 세계’의 대기실일 지도 모른다. 다시 김수환에 기대자면, 혁명의 진정한 아포리아는 그것의 시작이 아니라 끝의 지점에서, 그러니까 그것이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모되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 대기실에서 〈신혼부부〉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시네마테크 KOFA의 큰 스크린에서 〈신혼부부〉를 꼭 다시 보고 싶다. 참고문헌 - 이준엽•함충범, 「남한과 북한에서 제작된 윤용규 감독 영화에 대한 비교 연구」, 『한민족문화연구』 제63권 63호, 2018. - 유우, 「한국전쟁기 중국에서의 북한 영화에 관한 연구」, 『현대영화연구』 25호, 2016. - 한상언, 「6.25전쟁기 북한 영화와 전쟁 재현」, 『현대영화연구』 11호, 2011. - 한상언, 「전후 북한영화의 재건에 관한 연구」, 『영화연구』 84호, 2020. - 유우, 「북한과 중국의 영화 교류 연구(1956~1966)」, 『비교문화연구』 제59집, 2020. - 김수환, 「혁명과 소리」, 『다시 돌아보는 러시아 혁명 100년 2』, 박종소 엮음, 문학과 지성사, 2017. -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끝에서 두번째 세계』,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12. - 유우, 「한국전쟁 이후 북한영화의 제작 및 중국에서의 상영(1955∼1960)」, 『영화연구』 82호, 2019. - 김태윤, 「전후복구시기 ‘수도’ 평양의 탄생과 상징공간의 조성(1953~1956)」, 『도시연구: 역사·사회·문화』 29호, 2022. - 이정하, 『몽타주』, 문학과지성사, 2022. - 유리 로트만, 『문화와 폭발』, 김수환 옮김, 아카넷, 2014. - 손이레, 「도래(해야)하는 식민지 조선영화의 고유성: 임화의 조선영화론 재고」, 『동아시아 지식인의 대화-영화 이론/비평의 감정 어린 시간』, 김소영 엮음, 2018, 현실문화연구 * 가독성을 위해 본문에 필자 이름과 발행시기, 해당 쪽수만 괄호 안에 표기했던 문헌 서지정보를 인용한 순서대로 밝힙니다.
2003년 | 프리시네마 감독: 박광춘 | 각본: 설준석 | 각색: 박광춘 김은정 | 제작: 서우식 | 촬영: 김영철 | 미술: 오상만 이미지 | 음악: 미하엘 슈타우다허 CAST 강지석: 조인성 | 이희진: 신민아 | 이유정: 강래연 | 홍성혜: 박정아 | 심만호: 김수로 | 준호: 하정우(김성훈) 이른바 ‘스타의 리즈 시절’을 만나는 건 조금은 설레는 일입니다. 그들의 풋풋한 모습 때문이죠. <마들렌>은 조인성과 신민아의 20대 초반 시절을 만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지금은 배우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은 30대 배우가 되었지만, 이 영화를 촬영하던 2002년에 조인성은 22살, 신민아는 19살이었습니다. 그들에겐 모두 두 번째 영화였고요. 말 그대로 ‘풋풋한’ 시절의 로맨스 영화였던 셈이죠. 현장 공개는 2002년 8월, 여름 밤이었습니다. 지석(조인성)과 희진(신민아)이 함께 마들렌을 나눠 먹는 장면이죠. 작가 지망생인 지석은 신문 배달을 하는데요, 연인인 희진은 새벽 길을 동행합니다. 지석이 새벽에 항상 마주치는 사람은 우유 배달을 하는 만호(김수로)입니다. 제빵 기술을 배우는 만호는 매일 자신이 만든 빵을 지석에게 주는데요, 그날엔 우연찮게 희진도 새벽의 ‘시식회’에 참여하게 된 것이죠. 촬영 장소는 이화동이었습니다. 옛 동네의 정취를 담고 있는 이곳은 작은 골목과 집들로 빼곡한 장소죠. 그리고 동숭교라는 소박한 느낌의 다리가 있습니다. 촬영은 바로 그 다리 위에서 이뤄졌습니다. 당돌한 희진은 처음 만난 만호에게, 흰 우유를 딸기 우유로 바꿔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조촐하게 마들렌 파티를 하는데요, 이때 지석은 문학도답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소설은 주인공이 어린 시절을 기억하면서 시작되거든요. 그 기억의 계기가 되는 게 바로 이 ‘마들렌’이에요.” 약간은 문어체 스타일의 대사였는데요, 의외로 소화하기 힘든 대목이었고, 열 번 정도 테이크를 간 후에 OK 사인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대사가 끝난 후에, 세 사람은 마들렌을 먹을 수 있었고요. <마들렌>은 < 퇴마록 >(1998)으로 데뷔한 박광춘 감독의 두 번째 영화입니다. 전작과는 너무나 성격이 다른 작품이었는데요, 그럼에도 <마들렌>에 삽입된 귀여운 컴퓨터그래픽 장면들은 감독 특유의 비주얼을 보여주었습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사인을 해 달라며 동네 아이들이 조인성에게 몰려 왔습니다. 조인성은 짬 날 때마다 아이들에게 모두 사인을 해주었고요. 당시 조인성은 시트콤과 드라마를 통해 각광 받던 ‘라이징 스타’였습니다. 첫 영화는 장혁 과 공연했던 프루트 챈 감독의 < 화장실 어디에요? >(2002)였는데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그에게 <마들렌>은 본격적인 데뷔작 같은 작품이었죠. 지석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조용하면서 자기 심지도 있고, 다른 사람 배려할 줄도 아는”, 매력적이면서도 배울 점이 많은 캐릭터라고 설명했습니다. 현장에서 가장 강렬한 비주얼은 두 배우의 ‘기럭지’였습니다. 조인성은 187센티미터이고, 당시 신민아는 170센티미터 이상이었는데 계속 자라고 있었죠. 두 사람은 같은 소속사(싸이더스HQ)의 절친이었는데요, 연기할 때 장단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장점은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소통이 잘 된다는 점이었고요, 단점은 개인적으로 너무 친해서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의 설레는 느낌을 표현하는 게 조금은 어색했다는 거죠. 카메라를 잡은 김영철 촬영감독은 < 강원도의 힘 >( 홍상수 , 1998) < 정사 >( 이재용 , 1998) < 파이란 >( 송해성 , 2001) 등으로 실력을 인정받았고 <마들렌>에서 박광춘 감독과 만났습니다(카메라 아래 안경 쓴 사람). 이날은 밤샘 촬영이었는데요, 집중력을 잃지 않고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날 현장엔 유독 동네 아이들이 많이 몰려 왔습니다. 카메라에 걸리지 않는 곳에 앉아 현장을 구경하고 있습니다. 신민아는 < 화산고 >( 김태균 , 2001)에 이어 <마들렌>이 두 번째 영화였습니다. <화산고>의 유채이보다 <마들렌>의 희진은, 신민아의 실제 성격이 훨씬 많이 반영된 캐릭터였는데요, 촬영을 마치고 “평생에 단 한 번 쯤은 이렇게 솔직한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소감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조인성에게 <마들렌>은 처음으로 현장에서 집중력을 가지고 연기에 대해 고민했던 영화였습니다. “<마들렌>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닮아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예요. 슬프거나 박장대소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은근하게 다가오는 영화죠.” 멀리서 본 촬영 장소의 풍경과 부근 동네의 고즈넉한 모습입니다.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
... (네 번째 이야기) 영화 안에 영화가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그걸 지젝은 외설적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이 순간이 그렇게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등장인물 중의 누군가가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는 순간과 마주하는 장면은 영화사 속에 수 없이 등장한다. 아마 누군가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버스터 키튼의 < 셜록 주니어 >를 떠 올릴지 모르겠다. 정반대의 방법이기는 하지만 지가 베르토프의 < 카메라를 든 사나이 >로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다. 나는 그냥 별다른 검색을 하지 않고도 이 자리에서 백편 이상의 제목을 열거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은 영화 안의 영화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먼저 여기서 내가 다루려는 영화 안의 영화는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영화 안의 영화는 두 가지 영화가 있다. 하나는 버스터 키튼이나 지가 베르토프처럼 영화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영화 안의 영화를 (말 그대로) 만들어내야 하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영화가 진행되고 있는 중에 갑자기 영화 속의 등장인물 중의 한 사람이 영화를 보러가는 바람에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게 되는 경우이다. 이때 이 영화는 여기서 다시 둘로 나뉜다. 하나는 영화의 필요에 의해 그 영화를 만들어내는 경우이다. 금방 떠오르는 예. 우디 앨런의 < 카이로의 진홍빛 장미 >. (하지만 어쩌면 이 영화는 첫 번째 설명의 예가 될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그저 무턱대고 다른 영화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영화 안에 끼어드는 경우이다. 물론 오로지 다른 누군가의 영화를 보러 가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차이밍량의 < 안녕, 용문객잔 >은 내내 호금전의 < 용문객잔 >이 상영되는 극장에서 배회하면서 그 영화를 보다말다 하기를 반복한다. 그런 다음 이 사이에 수많은 변주가 있다. 영화가 영화 안으로 들어갈 때 즉각적으로 여기에는 위험이 따른다. 왜냐하면 영화 안의 영화는 그 영화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영화는 한편으로 서로에게 의지하지만 동시에 모든 영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영화 안의 영화는 자기를 표명하는 대신 자기의 존재 방식을 실천하기 시작한다. 어떤 영화는 대화를 나누지만 어떤 영화는 침묵을 지키기도 한다. 가장 이상한 경우는 독백을 하기 시작할 때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 둘은 고스란히 겹쳐지지 않는다. 같은 말이지만 (반대의 방향에서 즉각적으로 저항하자면) 그 위에 덧씌워지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영화 각자의 고유한 존재의 권리 행사. 이때 영화 안에 영화가 들어오는 순간이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만큼 항상 아방가르드한 것은 아니며 대중들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이 영화에서 저 영화에로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영화 안에 영화를 감금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반대로 영화 안에 영화가 들어올 때 영화의 환대란 순환이라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어떤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영화 안의 영화는 그 영화가 꾸는 꿈이 아니다. 차라리 영화 안의 영화는 영화의 안에 들어온 바깥이다. 영화 안의 영화는 가까스로 하나로 모아놓은 영화의 서로 다른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면서 영화 안의 모든 기호들을 분산시키려들 것이다. 그런 다음 지금 보고 있는 영화의 경험에 대한 한계를 일깨우고 갑자기 그 바깥으로 나가려 들 것이다. 영화 안의 영화는 단지 +1이 아니다. 블랑쇼의 말처럼 바깥이란 보이던 것을 보이지 않게 만들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든다. 이때 영화 안에서 영화를 잡아당길 때, 끌어들일 때, 감싸 안을 때, 잠시 한눈을 팔 때, 원컨 원치 않건 그 안으로 단지 다른 영화가 들어서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다른 역사가 끼어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단지 구조 안에서의 대화에 머물지 않고 여기에서 저기로, 그런 다음 다시 저기서 여기로 이행할 때 그 과정 중에 전혀 다른 두 개의 리듬이 공존한다는 것은 서로의 다른 존재가 역사 안에서 견뎌가는 자기의 근거를 내세우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근거의 지평. 근거의 각자의 전술. < 외아들 一人息子 > (오즈 야스지로, 1936) 나는 곧장 임권택 의 두 편의 < 장군의 아들 > 안에 머무는 두 편의 영화 안의 영화로 달려가기 전에 두 편의 경험을 먼저 말하고 싶다. (좀 수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영화를 보다 말고 영화 안의 영화를 보게 된 적이 그렇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오즈 야스지로의 < 외아들 >을 보다 말고 갑자기 빌리 포르스트의 <미완성 교향악>을 보게 되었을 때 어떤 쇼크를 느꼈다. 이 영화는 오즈의 첫 번째 토키이다. 언제나처럼 일정한 리듬으로 진행하던 영화가 35분 19초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와 아들은 제국극장에 영화를 보러 간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두 세 개의 텅 빈 방안 장면을 보여준 다음 보는 쪽은 아무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게도) 느닷없이 <미완성 교향악>의 한 장면이 마치 다음 쇼트처럼 이어진다. 물론 오즈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영화를 보기 위해서 극장까지 가는 장면을 찍지 않았으며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와 아들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빌리 포르스트가 1934년에 연출한 첫 번째 영화 <미완성 교향악>의 쇼트가 아무렇지도 않게 갑자기 이어질 때 누구라도 멈칫 거기 서버릴 것이다. 마치 영화가 중단된 듯한 기분. 프란츠 슈벨트와 소프라노 가수 카롤린의 사랑을 담은 이 영화의 원제는 연가곡 ‘백조의 노래’ 중의 한곡인 ‘세레나네’의 첫 구절 “Leise flehen meine Lieder (나의 노래를 나지막이 노래하네)”이지만 일본에서 <미완성교향악>으로 개봉하였다. 이 영화는 일본에서 크게 성공했고 비평가들로부터도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오즈가 이 영화를 좋아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1936년에는 매년 써 오던 일기를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 오즈는 슈벨트와 카롤린을 보여준 다음에야 비로소 객석에 앉아 영화를 보는 어머니와 아들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그런데 자꾸만 몰려오는 졸음을 참아가며 그만 고개를 떨군다. 아들은 약간 부끄럽지만 금방 그런 어머니를 미소를 머금으며 쳐다본다. 두 개의 영화는 서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오가기 시작한다. 오즈의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멈춰 서 있지만 빌리 홀스트는 화면의 크기를 바꿔 가면서 두 연인을 보여주다가 밀밭 사이를 걸어가는 카롤린을 따라 수평으로 바람결처럼 쫓아간다. (horizontal_tracking) 두 영화는 서로 다른 체계, 다른 리듬, 다른 원칙, 다른 배우, 다른 국적, 단지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멀리 있다. 여기서는 어느 쪽도 어느 쪽에 안주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오즈는 <미완성 교향악>의 장면을 그대로 가져오긴 했지만 <외아들>의 진행 리듬에 맞추어 잘랐기 때문에(decoupage) 기괴하게도 원래 영화의 장면은 알겠는데 빌리 포르스트의 리듬을 가늠할 수가 없다. 뭐랄까, 여기엔 잘 설명하기 힘든 불화 속의 무효가 있다. 오즈는 <미완성 교향악>으로부터 아무 것도 이용하지 않는다. 두 영화 사이의 침묵.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영화 속의 영화에서 분할의 관계는 일단 구조 안에 들어오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립적이고, 더 적대적이며, 더 주관적이고, 더 분명하게 서로의 주권을 놓고 다투게 된다. 말하자면 여기서 (그것이 원래의 의도인지 아닌지를 주장하긴 어렵지만) 결국 쇼트가 연결된다는 것은 서로를 잡아당기면서(attraction) 다시 한 번 에이젠쉬테인 프로그램 안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이젠쉬테인이 종종 인용한 윌리엄 브레이크의 말. “내가 체계를 세우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체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 비브르 사 비 Vivre sa vie: Film en douze tableaux > (장 뤽 고다르, 1962) 두 번째 예. 물론 가장 잘 알려진 예는 고다르의 < 비브르 사 비 >이다. 12개의 장으로 나뉘어진 이 영화 세 번째 장 <아파트 관리인, 폴, 잔 다르크의 수난, 저널리스트>에서 안나는 극장에서 칼 드레이어의 < 잔 다르크의 수난 >을 본다. 하지만 오즈처럼 느닷없는 것은 아니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insert_shot)이 먼저 나온다. 고다르는 그걸 약간 카메라를 비스듬히 누여서 한밤중에 극장에 매달려 있는 두 개의 네온사인으로 시작한다. 하나는 여기가 극장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왼쪽에 매달린 사인인데 CINE만 보이고 MA는 꺼져있다. 이 극장이 별 인기없는 변두리 극장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며, 아마도 그런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라면 지금 하는 영화는 철지난 영화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오른쪽 아래 비스듬히 < JEANNE D’ARC >라고 제목이 걸려있는 네온사인이다. 잘 알려진 잔 다르크에 관한 영화는 세 편인데 하나는 칼 드레이어의 < 잔 다르크의 수난 (La Passion de Jeanne d’Arc) >이고 다른 하나는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으로 나온 (빅터 플레밍 연출의) < 잔 다르크 (Joan of Arc) >, 그리고 로베르 브레송의 < 잔 다르크 재판 (Le proces de Jeanne d’Arc) >이다. 그런 다음 한참 뒤에 자크 리베트는 <잔느 성처녀>라는 제목 아래 <전쟁터>와 <감옥>을 찍었다. (나는 여기서 구태여 뤽 베송의 잔 다르크는 셈에 넣지 않았다. 물론 몇 편의 잔 다르크 영화가 더 있다) 다만 브레송은 고다르가 <비브르 사 비>를 찍고 있을 때 그 영화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고다르(의 주인공들)은 보러갈 틈이 없었을 것이다. 내가 구태여 한글 제목 옆에 원제를 병기한 것은 아래 비스듬히 보이는 제목 < JEANNE D’ARC >라는 네온사인은 아무래도 <비브르 사 비>를 위해서 제작한 것 같기 때문이다. 드레이어의 영화 앞에는 < La passion... >이 붙어있고 빅터 플레밍은 영어식으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세 번째 장을 시작하면서 ‘...잔 다르크의 수난...’이라고 표기했지만 이것이 영화 제목이라는 별도의 표시를 하지 않았다. 극장 간판이 보이고 난 다음 나나는 극장에 들어간다. 화면을 향해서 바라보는 관객을 오른쪽에서 수평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는 화면에서 무슨 영화를 상영중인지 알 수가 없다. 불이 꺼져있기 때문에 영화를 상영중이라는 건 알겠는데 아무 소리도 없기 때문에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무슨 영화를 상영중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영화가 무성영화라는 것이다. 뒤에 앉은 남자는 따분하게 바라보고 있고, 앞에 앉은 남자는 옆에 앉은 여자의 어깨에 팔을 올려놓는다. 나나는 그들을 지나 더 뒤에 가서 앉는다. 고다르는 나나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여주는 대신 그 다음 장면에서 갑자기 잔 다르크를 연기하는 팔코네티의 커다란 클로즈업을 보여준다. (잔혹연극으로 알려진) 앙토넹 아르토가 연기하는 사제가 잔 다르크에게 화형이 구형되었음을 알려주러 온 그 유명한 대목이다. 사제는 약간 비웃는 듯도 하고 또 그만큼 가련하다는 듯한 얼굴로 그 소식을 전한다. “사형이 결정되었습니다” 잔 다르크가 묻는다. “무슨 형인가요?” “화형입니다” (물론 이 대사는 자막으로 진행된다) 그때 아무런 분장도 하지 않은 채 머리를 짧게 깎은 팔코네티가 연기하는 잔 다르크는 가볍게 경련을 일으키는 눈꺼풀을 참아가면서 극심한 두려움을 참아낸다. 그저 단지 이 얼굴을 클로즈업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피로에 지친 피부. 자기도 모르게 감기는 것만 같은 눈. 생명이 거기서 증발하고 있다. 그때 그 얼굴은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만 같은 시선. 드레이어는 그 장면에서 기적에 가까운 쇼트를 만들어낸다. 그녀는 눈을 뜨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마치 자기의 시선을 거두는 것만 같은 표정. 영화에서 불가능의 성립. 그때 고다르는 재빨리 이 클로즈업에 나나가 마치 넋을 잃어버린 것처럼 바라보는 클로즈업을 이어 붙인다. (reverse_shot) 물론 잔 다르크의 시선 없는 표정은 나나의 얼굴이 바라보는 시선과 (노엘 버치의 표현을 빌리자면) 접합되지 않는다. 그때 이 접합의 핵심은 나나를 (앞의 쇼트인) 잔 다르크에서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나를 (다음 쇼트인) 사제가 바라보는 것처럼 연결시키고 있다. 시네마데크에서 머물러 살다시피 한 고다르는 이 쇼트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고다르는 나나가 영화(속의 잔 다르크)를 바라보는 모습을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상상선을 따라가면서 찍었다. 영화 이론은 이 장면을 고다르가 브레히트를 따라 이화작용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마치 누군가 훔쳐보고 있는 것처럼 찍었다고 다소 따분하게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설명한다. 누가? 바로 우리가. 그래서 이 장면을 우리에게 영화란 훔쳐보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도덕적인 쇼트라고 불렀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나의 쇼트를 잔 다르크를 바라보는 시선의 이미지라고 설명하는 대신 사제가 바라보는 쇼트라고 설명하게 되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판본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사제는 두 사람을 겹쳐놓고 바라보는 것이다. 이때 한 명은 물론 잔 다르크지만 다른 한 명은 나나가 된다. 물론 이 두 개의 쇼트는 단순하게 교환되지 않는다. 고다르의 믿음. “씬을 어디까지 지속해야할 지를 아는 것은 이미 몽타주이다” (<나의 멋진 근심, 몽타주>) 지속의 문제는 동시에 중단의 문제이다. 이때 무엇을 무엇과 연결시킬 것이라는 결정은 본다는 동사가 주어와 목적어 사이에서 어떻게 활동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우리는 고다르가 영화를 종종 (구조주의자들과 아무 연관 없이) 언어처럼 다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두 개의 주어. 하나의 목적어. 그 사이에서 고다르는 동사를 구부러뜨린다. 영화 안의 영화를 영화의 안과 바깥으로 나누는 대신 영화 바깥을 영화 안으로 밀고 들어간 다음 두 명의 주인공을 영화 안에서 바라보게 만들 때 나나는 잔 다르크의 자리로 간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나나의 눈물을 정말 브레히트적인 방법으로 쳐다볼 수 있게 된다. 벤야민은 브레히트를 설명하면서 중단을 끌어들인 다음 거기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에도 비유할만한 감정이입의 전도를 본다. 고다르는 그 방법을 영화적인 판본으로 조금 더 밀고 나아간다. 나나는 잔 다르크처럼 자본주의적인 방법으로 화형을 당하게 될 자신의 운명을 거기서 말 그대로 자기 눈으로 자신의 미래를 본다. 마지막 장면. 총에서 불을 뿜으면서 추운 겨울날 대낮 거리에서 버림받은 개처럼 죽게 될 신세. 임권택 은 조금 다른 경로를 따라간다. < 장군의 아들 >에 갑자기 다른 영화가 침입하는 순간이 두 번 있다. 한 번은 첫 번째 편이고, 다른 한 번은 두 번째 편이다. 그리고 세 번째 편에는 영화 속의 영화 장면이 없다. 두 번 모두 물론 오즈처럼 느닷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고다르처럼 감정교육의 프로그램에 따라 구성한 것도 아니다. 임권택은 우리에게 충분히 준비를 하게 만든다. 우선 세 편의 <장군의 아들> 중 첫 번째 영화 속의 영화 장면을 둘러싼 줄거리에 관한 약간의 설명. 이제 막 수표교 굴레방 다리 거지패을 떠돌던 김두한은 극장표를 얻었다가 그것 때문에 종로패 ‘똘마니’들과 시비가 붙고 거기서 보여준 주먹 솜씨 때문에 쌍칼의 눈에 든다. 하지만 김두한은 극장에서 일하기를 원하고 쌍칼은 그런 김두한을 우미관의 주먹패 우두머리인 김기환에게 데려간다. 아직 김두한의 솜씨를 모르는 김기환은 그에게 극장 안에서 상영 전에 좌판을 메고 객석 사이를 돌아다니며 군것질 거리를 파는 일을 맡긴다. 임권택은 여기서 삶을 불어넣기 위해 김두한의 생활을 묘사하는 디테일을 살려 놓는다. 이 장면을 둘러싸고 겹겹이 종로의 시장통 일상생활이 담기고(insert_shot) 여기서 쇼트는 종종 초상화와 장르화 사이를 오가는 것처럼 그 사이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드는 순간들이 있다. 이 장면들은 단지 활기를 불어넣거나 혹은 화면에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키려든다기보다 그 이상으로 종로 거리 자체를 하나의 고유한 시간 질서를 지닌 세계로 이끌어 올린다. 말하자면 여기서 이 일상의 디테일들은 다른 시간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 다음 그 질서의 리듬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그 사이에서 인물과 일상 사이의 친화성이라는 관계 안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임권택이 영화 안에 영화를 끌어들이는 이유는 시간의 질서라는 리듬 안에서 찾아야 한다. < 국경 > ( 최인규 , 1939) 김두한이 우미관에서 일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영화의 무대는 종로 2가 89번지에 자리한 극장 앞으로 옮겨온다. 한국영화사 속에서 수많은 영화 이야기가 여기서 모이고 흩어지곤 했던 전설적인 우미관은 1912년 12월 9일 개관을 한 1,000석 규모의 대형극장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극장이었다는 뜻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미관은 한국전쟁 중에 전관 소실되었고, 휴전 이후 다시 문을 열었지만 1959년 화재로 전소한 후 재개봉관으로 바뀌었고 그 이후 쇼 무대와 영화를 번갈아하면서 역사 속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은 1939년이다. 단성사와 함께 경성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극장. 오늘 오후 신마적 엄동욱과 구마적이 우미관 앞에서 종로 상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로 벼르던 대결을 벌일 것이다. 그 하루를 시작하면서 종로 빵집 유리창 너머로 우미관에서 상영하는 영화의 간판이 슬쩍 보인다. 간판에는 < 國境 >이라는 제목과 함께 그 아래 감독 崔寅奎 , 그리고 주연에 金素英 , 李錦龍 , 崔雲峰 , 이라고 써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국경>은 한국영화사에 두 편이 있다. 한편은 1923년 1월 24일 단성사에서 단 하루 개봉하고 (기술상의 이유로) 간판을 내린 김도산 의 연출 작품이고, 다른 한편은 1939년 5월 20일에 개봉한 최인규의 연출작품이다. 나는 < 장군의 아들 2 >와 < 일대종사 >의 상상의 연표를 재구성하면서 이 두 편의 영화 사이에서 1940년에 서로 우연히 스쳐지나가듯 이어진 서로 다른 계절의 각자의 대결에 대해서 셈했다. 그 셈에 따르면 < 장군의 아들 > 일편은 그 전해인 1939년의 이야기일 것이며 여기서 상영중인 <國境>이 최인규의 영화인 것은 연대기적으로 당연하다. 하지만 <국경>은 한국영화사 속에서 사라진 영화중의 한편이기 때문에 <장군의 아들>에서 사용된 장면은 임권택 이 연출한 영화(found_footage)이다. 하지만 여기에 약간 복잡한 문제가 있다. 이때 임권택 은 간판에 최인규 의 < 國境 >를 내걸고 있지만 그걸 장면에 담으면서 이 영화를 참고한 것 같지 않다. KMDb의 줄거리 소개에 따르면 “K국경지대의 밀수단 두목 이금용 에게는 애첩 김소영 이 있었다. 애첩 김소영은 기회만 있으면 도망치려 한다. 한편 이금용의 부하 전택이 는 김소영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전택이는 김소영을 도와 밀수단 소굴에서 탈출한다. 이금용 일당이 그들을 추격한다. 격투가 벌어졌다. 피투성이가 된 전택이는 사력을 다해 이금용 일당을 때려눕히고 김소영과 함께 국경을 넘어간다”라고 되어있지만 아마도 이 줄거리는 1923년에 만든 김도산 의 < 국경 >의 줄거리인 것 같다. 같은 KMDb의 줄거리 소개에 따르면 “국경지대의 밀수단 두목의 애첩과 그 부하간의 사랑을 위한 도피행각을 그린 영화”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최인규의 <국경>은 김도산 영화의 리메이크가 아니다. 좀 더 믿을만한 최인규의 <국경>의 줄거리 소개는 다소 장황하지만 이렇게 이어진다. “압록강 상류 어느 벽촌에 사는 빈농에 사는 김용태에게는 외딸 영자와 그의 약혼자 이세림이 있었다. 세림은 어렸을 때부터 용태가 키워온 고아였다. 늙은 용태에게는 그들의 성장과 혼례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들을 키우기 위하여 생긴 채금(債金)이 항상 붙어 다녔다. 어여쁜 영자에게 딴 마음을 두고 있는 박동일도 그 채권자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용태에 대한 그의 수단을 볼 때 양자로써의 세림의 눈에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급기야 세림은 동일에게 얼마만한 기한을 약속하고 영자나 용태에게 아무 말 없이 마을을 떠나 신의주 밀수자들의 무리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그러나 모처럼 꿈꾼 일확천금의 꿈은 흩어지고 몸까지 상하여 가지고 그는 뜻에 없는 귀향을 하게 된다. 세림이가 돌아온 그날 밤 세림과 동일 사이에는 영자를 중심으로 대소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를 두려워하여 사랑하는 양인(兩人)이 아무 미련 없이 마을을 떠날 수 있게 하려는 마음으로 용태는 늪에 몸을 던지나 한편 세림도 또한 그릇하여 칠성이란 백치의 사내를 죽이게 된다. 이리하여 고향은 그들에게 안주(安住)를 허락지 않고 세림은 치사죄로 팔년의 징역을 간다. 영자는 감형운동으로 평양에 공소(控訴)하기 위하여 최후의 수단으로 몸을 팔았으나 결국 무죄는 안 되고 삼년의 감형이 되었을 뿐이다. 그 대신 영자는 몸값 삼백 원 때문에 상술집 계집으로 창녀라는 윤락의 길을 밟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림에 대한 사모의 염(念)은 영자로 하여금 여급으로까지 구하여낼 수 있었다. 마을의 비극 이래 동일은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행방불명이 되나 삼년이 지난 어떤 날 안동에서 영자와 기이한 해후를 한다. 영자는 그가 너무나 양심적 인간으로 변한 것에 고민하나 그러나 압제(壓制)할 수 없는 복수지념(之念)에 이끌려서 품었던 비수로 동일을 찌를 때 도리어 실수하여 절벽에 다리를 떨어져 다리를 상한다. 일 년 후 절름발이가 된 영자는 동일의 호의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애처로운 여자였다. 어떤 날 밤 은(銀)밀수를 밀고한 이가 밀수자에게 붙들렸을 때 영자는 비로소 동일을 떠나서 살 수 없이 된 자신을 발견한다. 운명의 장난! 영자는 그저 동일의 품에 안겨서 흐느껴울 뿐이었다. 그리하여 또 한 해가 지나갔다. 아름다운 생활을 꿈꾸면서 평양의 감옥을 나온 세림이가 본 영자는 이미 동일의 아내였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스런 어린 것까지 있었다. (끝)” (동아일보 1937년 5월 7일자, 이 소개 중 한자를 한글로 표기했으며, 지금과 다른 맞춤법 일부를 수정한 이외에 그대로 옮겼다) 그러나 < 장군의 아들 > 속의 <國境>을 보고 있으면 임권택은 김도산의 판본과 최인규의 판본 어느 쪽도 따르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간판에 따라 최인규의 <국경>을 염두에 두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 것은 이 영화가 무성영화라는 점이다. 최인규의 판본은 토키영화이며 개봉 당시에 이 영화는 “빼어난” 녹음으로 당시 신문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최인규 자신도 “보기 좋은 영화의 첫째 조건으로 나는 화면과 음향이 깨끗해야한다고 믿습니다. 영화의 내용이 철학적인 것보다도 그 형식이 미려한 것을 취하고자 합니다. (...) 내가 <국경>을 연출하는 데 취한 첫 의도는 그렇게 화창한 것이었습니다” (동아일보 1938년 11월 16일자)라고 대답했다. 임권택은 (꼭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한국영화사 안에 존재하는 <국경>을 영화 안으로 가져온 다음 최인규의 영화와 상관없는 <國境>을 만들 때 이 디테일은 단지 시대적인 고증과 상관없이 (혹은 심지어 그것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미 영화 안의 영화로부터 영화의 일부에로 옮겨간 것이다. 그런데 <국경>은 너무 유명한 영화이기 때문에 만일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다면 다소 까다로운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나는 임권택이 영화 안에서 얼마나 디테일의 세부 안으로 들어가서 그 자체로 하나의 증언이 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여기서 <國境>이 <장군의 아들> 서사 안에 개입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일부를 연결하거나 혹은 어떤 계기, 전환의 순간, 희미하지만 둘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 설명을 시작하는 사건(이나 인물 사이)의 환유, 아니면 결정적인 궤도의 이탈, 때로 전혀 상이한 맥락에서 마주치게 되는 두 개의 상황 사이의 텔레파시, 그런 것도 없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國境>은 내게 단지 일부가 잘못된 지식이 아니라 잘 알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무언가 다른 것을 지칭하면서 거기 그렇게 머물고 있는 측면 원근법적 장치의 일부가 아닐까, 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S# 1 S# 2 S# 3 S# 4 S# 5 S# 6 S# 7 S# 8 S# 9 S# 10 S# 11 S# 12 S# 13 S# 14 S# 15 S# 16 나는 먼저 영화와 영화 안의 영화 사이의 수직적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우미관에서 상영하는 < 國境 >의 간판을 보여준 다음 영화가 상영하는 극장 안까지 들어오기 위해서 임권택 은 거의 굽이굽이 안을 돌아가듯이 한참을 극장 건물 안 여기저기를 돌아본 다음에야 비로소 객석으로 들어온다. 표를 사지 않고 창문을 넘어 몰래 화장실 변기통 밑에 숨어 있다가 영화를 보려는 아이들을 따라가는 것은 단지 한 시대의 풍속이라기보다는 (물론 그런 이유도 있지만) 서사의 경제성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이 아이들은 김두한의 어린 시절을 압축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한 (김두한을 상상하는 우리들의) 감정적인 진동판을 건드린다. 그런 다음 붙잡힌 아이 중의 하나를 끌고 가서 대걸레로 씻겨주고 함께 영화를 보기 위해 객석에 들어설 때 (그게 다소 상투적이라 할지라도) 인격의 일부로서의 행동을 보여주는 절차가 된다. 하지만 임권택은 영화 <國境>을 시작하기 전에 갑자기 김두한의 동선을 끊어낸다. 누구라도 여기서는 멈칫 할 수밖에 없다. 그런 다음 마치 줄거리 바깥으로 나온 것처럼 슬그머니 극장 무대 커튼을 걷고 (관객이 얼마나 찼는지를 보기 위해) 객석을 몰래 쳐다보는 변사의 얼굴이 보인다. ( S#_1) 나는 여기까지 보면서 단 한 번도 변사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어떤 소개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갑자기 시선의 방향이 옮겨갔다. 마치 여기서부터 극장이라는 건축이 자기의 시선을 갖고 활동하듯이 슬그머니 시선의 주도권을 가져간다. 임권택의 연출이 종종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내기의 순간, 슬그머니, 라는 보이지 않는 단락(短絡). 마치 그걸 우리에게 확인이라도 시켜주듯이 순간적으로 마치 암전된 것처럼(fade_out) 검은 화면을 그 사이에 넣기라도 한 듯 카메라 앞을 완전히 가로 막았다가 지나쳐서 변사가 무대 위로 올라온다. 마치 막이 다시 열리는 듯 한(wipe_out) 검은 화면의 순간적인 이동. 변사가 의자가 앉으려는 순간 저 멀리 왼쪽 화면 끝에서 거의 같은 동작으로 극장 맨 끝자리보다 더 뒤에 자리한 입검석(立檢席)에 일본 경사 두 명이 앉는 것이 보인다. 그러면 극장 불이 꺼지고 변사가 대사를 낭독하기 위해 책상 위의 전등을 켠다. 저 멀리 영사실에서 영사기의 불빛이 한줄기 쏟아져 나온다. 말하자면 영화가 시작된다. ( S#_2) 갑작스러운, 차라리 이제까지 < 장군의 아들 >을 보던 관객들에겐 난데없는 흑백화면에 그려진 그림. 그때 변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국경, 아 살얼음 치는 국경!” (voice_over) 나는 여기서 멈칫 설 수밖에 없었다. 무성영화 시대에는 1.85 사이즈의 영화가 없다. 그런데도 <國境>은 태연자약하게 이 화면 사이즈로 시작한다. 물론 위아래를 잘라낸 것도 아니다. 이유는 단 하나일 것이다. 1.33 화면은 무조건 양 옆을 검게 만들 것이다. (black_masking) 그러면 <國境>과 <장군의 아들>은 서로 완전하게 떨어져나가게 될 것이다. 임권택은 두 영화 사이를 흑백과 칼라로 나누는 정도에서 멈춘다. 그런 다음 그 둘을 변사의 목소리로 이어 붙인다. ( S#_3) 이어지는 변사의 목소리. “조선과 만주를 가르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 한 많은 강물은 흘러 흘러 어디로 가느냐. 서해로 가느냐, 태평양으로 가느냐,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이때 화면은 이미 영화가 시작한 극장 안으로 김두한과 소년이 들어오는 것을 보여준다. ( S#_4) 즉각적인 질문. 그렇다면 <國境>의 첫 장면을 김두한은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때 우리는 약간 까다로운 논제와 마주치게 된다. 만일 우리가 김두한을 경유하지 않고 영화 안의 영화를 보게 된다면 우리의 시선(sight)이 머무는 자리(site)는 어디인가? 나는 뒤늦게 극장 안에 도착한 김두한이 만들어낸 균열이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나는 여기서 김두한이 <國境>을 본다기보다는 <國境>을 보는 김두한을 본다고 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이때 뒤이은 <國境>의 장면은 김두한이 그 장면을 보기 때문에 되돌아왔다기보다는 마치 잠시 김두한에게 한눈을 팔았기 때문에 원래의 화면에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여겨진다. ( S#_5) “한편 여기는 국경도시 의주, 쫓기는 사나이들이 있었으니 앞선 사나이는 김영철이오, 또 한 사나이는 박동일이었다” (변사) 당연한 말이지만 임권택은 무성영화를 찍은 적이 없다. 단지 흑백으로 찍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장군의 아들>을 따라온 우리에게) 이 첫 화면의 구도와 질감은 이상하게 보인다. 전체 구도가 모두 초점 거리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deep_focus) 약간 과도할 정도로 밝게 찍혔다. (이 영화를 만들었을 때 한국영화는 아직 디지털 색 보정이 도입되기 전이라는 사실을 계산에 넣어두기 바란다) 하지만 더 이상한 것은 인물로부터 카메라가 너무 멀리 있다는 것이다. 이 장면이 전체를 보여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master_shot) 경사진 이 동네의 지붕들과 저 멀리 하늘이 조금이나마 보여야 하기 때문이라 할지라도 너무 멀리 있다. 물론 회화를 염두에 두고 무대와 같은 구도(tableau)를 만든 초기 무성영화에 관한 카메라와 피사체의 거리(와 운동)의 이론이 있다. (David Bordwell, Ben Brewster, Noel Burch, Richard Abel, Charles Musser, Thomas Elsessar, Tom Gunnung, AND...) 하지만 그걸 염두에 두어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이다. 인물의 동선을 화면 아래쪽에 배치한 다음 왼쪽 골목에서 나와서 오른쪽 담벼락에 몸을 숨긴다. 이때 김영철과 박동일은 단지 아래서 찍었기 때문이 아니라(low_angle)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코트자락에 감춰지기는 했지만 거의 무릎까지 보인다. (knee_shot) 그들을 추적하기 위해서 나타난 인물들도 화면 아래 부분에서만 오갈 뿐이다. 만일 이 장면을 보기 위해서 귀로 듣는 대신 자막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면 당신은 김영철과 박동일을 추적하기 위해 나타난 사람의 모습을 자막에 가려 거의 보지 못할 것이다. 추적자를 다른 길로 따돌린 것을 보면서 김영철이 박동일에게 (변사) “동일아, 우리 하루삔에서 만나자” 라는 대사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하자면 오로지 그 이유 때문에, 마치 그 장면에서 대사를 클로즈업 하듯이 다가가서 다시 찍은 것(bust_shot)은 쇼트 분할의 낭비이다. ( S#_6) 임권택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했다. 나는 처음 볼 때 다시 영화 안의 영화에서 빠져나와 김두한에게 돌아오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 ( S#_7) 다음 장면은 내리막길에서 서로 재회를 기약하며 손을 흔들면서 각자의 길을 떠나는 두 사람을 할 수 있는 한 멀리서 찍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듯 변사는 목소리를 높인다. (변사) “이들은 왜 쫓기는 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는가” 마치 김두한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혹은 이 세 개의 쇼트는 한 씬이기 때문에 서로 절대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듯, 서로 이어 붙어있다. 그런 다음 마치 대꾸를 하듯이 영화 안의 영화를 보는 영화 장면의 쇼트가 연이어 세 개 이어진다. ( S#_8) 변사는 영화에 빠져든 표정으로 마치 웅변이라도 할 것처럼 낭독한다. (변사) “아! 드디어 때는 바야흐로 시베리아에서 휘몰아쳐오는 북풍한설이 매운 기세로 휘몰아쳐오는 엄동시절에...” ( S#_9) 재빨리 이어 붙은 입검석에 앉아있는 두 명의 일본 순사. 한 명은 <國境>에는 별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다가 객석을 쳐다보기를 반복하고 다른 한 명은 대본을 들여다보면서 변사의 낭독을 감시한다. (변사) “.... 조선의 백성들은 추위와 허기에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 S#_10)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영화에 완전히 빠져든 김두한과 그가 데리고 들어와 옆에 앉힌 (몰래 화장실을 통해 공짜로 영화 구경을 하려다 붙잡힌) 소년(과 그 곁의 몇몇 관객)을 보여준다. 그때 변사의 낭독은 절정에 달하고 있다. (변사) “아! 조선의 백성들아, 백성들아!” 이 세 개의 쇼트에 대한 세 가지 질문. 첫째, 영화 안의 영화로부터 나와서 <國境>을 바라보면서 진행 되자 변사의 낭독에는 대사가 없고 지문만 있다. 단지 영화가 영화 안의 영화를 바라보는 순간에는 <國境>의 대사 안으로 침입할 수 없다는 듯이 갑자기 이야기 바깥으로 나온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두 번째, (앞의 질문에 이어서) 게다가 이 지문은 줄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이건 일제 식민지 강점하 조선의 상황에 대한 심정의 비분강개에 가까운 웅변이지 지금 진행 중인 <國境>을 위해서는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세 번째. 낭독하는 변사와 입검석의 두 명의 일본 순사, 그리고 김두한과 소년, 이 세 개의 쇼트는 각자 영화 안의 영화와 다른 방식으로 접합되어 있다. 변사는 <國境>의 목소리라는 방식으로 영화 안의 영화 바깥에서 활동하는 기계장치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이 쇼트는 ( S#_8) 영화 안의 영화의 외부적 확장이다. 혹은 이 쇼트를 보는 것은 <國境>의 장면을 청각적으로 ‘보는’ 것이다. (두 번의 ‘본다’라는 설명이 서로 다르게 활용되고 있음을 유심히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반대로 입검석에 앉아있는 두 명의 일본 순사는 ( S#_9) 영화 안의 영화를 쳐다보고 있지만 동시에 <장군의 아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역사적 기호 이외의 어떤 기능도 하지 않는다. 이 쇼트는 양쪽 모두에 기생한다. 그 당시의 모든 영화는 그렇게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에도 다시 검열 받았다. 입검석에 앉아있는 두 명의 일본순사는 1939년 영화의 일부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개봉관에는 입검석이 반드시 맨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자리는 영화 검열을 위한 자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 대한 감시의 체제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서 극장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고 언제나 그런 장소는 의견의 광장이자 일순간에 흩어진 힘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했다. 권력은 언제나 공개적인 장소를 감시했다. 내가 아니라 푸코가 한 말이다. 입검석은 1939년 극장의 일부이다. 그런 다음에야 영화 안의 영화를 보는 김두한의 쇼트가 등장한다. ( S#_10) 김두한(과 소년)은 약간 지나칠 정도로 영화에 빠져들어서 바라본다. <國境>은 <장군의 아들>과 직접적으로 접합되지 못한 채 우회의 경로를 택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다시 <國境> 안으로 되돌아간다. ( S#_11) 옥순의 집 안 방문 앞에서 문을 열고 옥순이 나와 김영철과 포옹을 한다. (변사) “옥순아! 하루삔으로 가자, 어서! 어서!” 영화 안의 영화로 돌아가자 변사는 재빨리 다시 복화술사처럼 영철의 목소리를 대신 한다. 두 가지 지적. 첫 번째, 신기할 정도로 정교하게 영화 화면과 목소리를 연결한 때 두 번 모두 영철의 목소리만이 일치한다. 두 번째. 이 화면은 몇 번을 다시 보아도 이상하다. 이 구도는 의도적으로 방문을 중심에 놓은 다음 양 옆에 어떤 장식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왼쪽은 조명이 닿지 않아 그림자마저 생겼다. 나는 전체 화면을(master_shot)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집의 구조를 알지 못한다. 이때 방문을 중심으로 이 화면은 기묘하게도 1.33 사이즈의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내게 좀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은 정면으로 찍은 구도이다.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서 나는 정면 쇼트와 마주해본 경험이 거의 없다. <장군의 아들>에서 두 사람을 세워 놓은 다음(two_shot) 정면으로 찍는 경우는 없다. 구태여 그렇게 앉은 장면은 하야시 구미(組)가 다다미 실내에 앉아있는 일부 쇼트들뿐이다. 정면으로 인물을 찍으면 영화는 다음 장면의 진행에서 심각한 문제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그렇게 찍었다. 그때 이 장면은 두 사람을 장면 분할 없이 진행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영철의 대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장면을 변사로 옮겨갔다. ( S#_12) 변사는 두 손을 가슴에 모아가면서 옥순의 대사를 낭독한다. (변사) “못가요, 못가요! 부모 형제를 놔두고 어찌 만리타국으로 가야 한단 말이에요” 그런 다음 목소리를 바꾸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영철의 대사를 한다. (변사) “옥순아, 우리는 가야 한다” 이 정면쇼트는 오랜 시간 동안 내게 머물러 있었다. 뭐랄까, 여기서 만들어진 이상한 디테일의 사실감이 <장군의 아들> 전체의 어느 장면보다도 1939년이라는 인상을 만들어냈다. 나는 구태여 여기서 느꼈다, 는 말 대신 만들어졌다, 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 디테일이 만들어낸 것은 정확하게 무엇일까. 그런 다음 화면은 ( S#_13) 영철이 옥순의 손을 잡고 문을 나서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변사) “부모냐 사랑이냐, 망설이던 옥순은 애인을 따라 나서고 말았으니 이들의 앞날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장면은 <國境>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 것처럼 현대적인 방법으로 찍혔다. 카메라는 집을 나서는 옥순과 그녀를 잡아 이끄는 영철을 재빠르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따라가면서(pan_shot) 동시에 눈에 보이게 이동하고 있다. 멀리 사라져가는 두 연인은 <國境>의 두 번째 장면, 김영철과 박동일이 쫓기던 그 골목으로 사라져간다. 나는 마지막 순간에 이 장면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國境>이 한창 상영되고 있을 때 김두한(과 소년)이 앉아있는 뒤편 입구, 그러니까 입검석 바로 옆에 난 문으로 종로패 사내가 두리번거리면서 들어온다. ( S#_14) 그가 김두한에게 귓속말로 이르자 김두한은 잠시 생각하다가 영화를 보다 말고 나간다. 물론 변사는 아랑곳없이 더 열을 올리며 낭독을 한다. (변사) “여기는 압록강, 김영철과 옥순은 인정 많은 어부를 만나 쪽배를 구할 수 있었으나, 아 그러나 아뿔싸, 그 자가 경찰의 끄나플일 줄이야, 그 누가 꿈엔들 알았으랴” 김두한이 우미관 앞마당에 나왔을 때 막 신마적 엄동욱과 구마적이 대결을 벌이기 위해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고 구경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 S#_15_16) 영화 속의 영화 <國境>은 여기까지이다. 그런 다음 김두한도, 임권택도, 영화도 <國境>을 잊어버린 채 진행된다. 두 번째 편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 사실의 환기. < 國境 >을 보는 내내 이상한 것은 자막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당시의 관객들 상당수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변사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자막은 당시 영화의 일부였다. 무성영화에서 무자막 형식이 시도된 것은 1924년 프리드리히 W. 무르나우의 (종종 <최후의 인간> 혹은 미국 개봉제목인 < 마지막 웃음 >으로 알려진) <밑바닥 인간(Der Letzte Mann)>에 이르러서다. 물론 지금 <國境>을 보는 건 1939년의 일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영화사에서 무자막 형식의 무성영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무자막 무성영화의 역사는 매우 짧다. 왜냐하면 첫 번째 토키영화 <재즈 싱어>가 1927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잠시 후에 다시 이 질문에로 돌아올 것이다. 두 번째 영화 안의 영화는 < 장군의 아들 > 두 번째 이야기에 나온다. 약간의 설명. 김두한이 구치소에서 나오자 혼마치깡 하야시 구미(組)가 기다렸다는 듯이 새벽에 기습을 한다. 어이없이 패배한 다음 김두한은 종로 한복판에서 종로 상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야시 앞에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한다. 뒤이어 구치소에서 종로패의 두목인 김기환이 출소한다. 상황을 파악한 김기환은 김두한과 함께 혼마치깡의 사쿠라(櫻) 카페에 가서 하야시와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맺는다. 여기서 그만 술에 취한 김두한은 모자를 두고 온다. 그래서 사쿠라 카페의 여주인 세츠코는 김두한에게 모자를 돌려주기 위해 종로를 찾아온다. 둘은 종로 빵집에 마주 앉지만 김두한은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에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종로패 중에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워싱톤을 부른다. 옆에 쪼그리고 앉아 워싱톤이 그녀에게 묻는다. “무슨 말이었습니까?” 세츠코는 약간 수줍게 대답한다. “영화도 구경할 겸해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워싱톤이 김두한에게 “영화를 보러 왔대요”라고 전해주자 김두한이 호기롭게 대답한다. “내가 보여주겠다고 그래” S# 1 S# 2 S# 3 S# 4 S# 5 S# 6 S# 7 S# 8 S# 9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상영중인 영화 간판을 보여준다. ( S#_1) 영화 제목은 <最後の復?>. 내게 1940년 일본영화 연감이 없기 때문에 이 영화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하지만 감독 이름이 나를 미심쩍게 만든다. 감독 池田忠雄(이케다 다다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이 시기에 활동한 일본 영화인 이케다 다다오는 시나리오 작가이다. 그는 오즈 야스지로의 1930년 영화 <아가씨>를 시작으로 1947년 <세입자 인명록>까지 각본을 썼다. 그런 다음 노다 고고와 함께 오즈는 < 만춘 >을 쓰고 그의 유명한 가족의 순환이라는 우주로 들어선다.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동명이인의 영화감독이 있을지 모른다. 또한 <最後の復?>라는 영화가 정말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경국립근대미술관 내 국립영화박물관에서 <最後の復?>는 검색되지 않으며 이케다 다다오는 각본작가의 이름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하필이면 (누구라도 떠올렸겠지만) 김두한을 찾아온 카페 여주인의 이름은 <만춘> 이후 오즈 영화의 영원한 노처녀 하라 세츠코(原節子)와 동명이인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오즈로부터의 연상을 멈출 생각이다. 김두한은 호기롭게 세츠코를 대동하고 우미관 극장문으로 들어선다. ( S#_2) 우미관 안쪽에서 들어서는 김두한을 바라보면서 서 있는 것이 전부인 장면. 입구에 기도가 서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표도 끊지 않고 극장 안으로 들어선다. 이제 더 이상 첫 번째 이야기, 그러니까 작년의 김두한이 아니다. 앞에 서있던 기도도 김두한에게 구십 도로 허리를 숙여 어서 옵쇼, 라고 목청 높여 인사를 한다. 그는 여기에 늘 이런 식으로 드나들 것이다. 뒤를 따라오던 세츠코는 기도를 보고 멈칫 서서 망설인다. 김두한은 들어서다 말고 돌아서서 그냥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자 그녀는 기쁜 기색으로 따라 들어간다. 그 뒤를 따라오던 종로패 부하들은 멀리 서서 그 모습을 보면서 “개판이다, 개판이야”라고 빈정거린다. 아마도 돌아온 김기환은 하야시 구미(組)에게 세금까지 바쳐 가면서 종로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고 김두한은 그런 상황에서 일본 여자와 데이트를 하는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 장면은 우미관 간판과 영화 안의 영화 <最後の復?> 사이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임권택 은 다시 한 번 우미관 극장 안의 디테일을 소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설명이긴 하지만 김두한은 세츠코에게 우미관을 소개할 이유가 없다. 여기서 장면 진행은 다소 교묘해 보인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자. 영화 안의 영화 < 國境 >을 시작하면서 첫 번째 장면으로 타이틀 자막이 있는 화면을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타이틀 자막을 보여주는 대신 우미관에 매달려있는 간판 <最後の復?>를 정면으로 보여주면서 제목과 감독, 주연배우, 여기에 더해 이 영화의 장르가 찬바라(チャバラ,칼과 칼이 ‘찬찬찬’ 부딪치는 시대 활극물(時代 活劇物)) 라는 것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장르에 성차(性差)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1940년 경성 종로에 있는 유명한 극장 우미관에서 하는 찬바라 영화를 보러 세츠코가 찾아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설정이다. 경성에 영화관이 단 하나 뿐은 아니었으며, 그 시대에 찬바라 영화는 남자들의 장르이며 나미나(淚, 멜로) 영화는 여자들의 장르라는 식으로 멋대로 구분해버린 다음 찬바라를 여자가 보는 것은 흉한 광경이라고 생각하는 시절이었다. 당신은 모던 걸의 시대이기도 했다고 반박하고 싶을지 모른다. 세츠코는 혼마치깡에서 종로까지 김두한을 찾아오면서 기모노를 입고 온 여자이다. 그런 다음 영화에서 단 한 번도 신식의상을 입은 적이 없다. 게다가 그녀는 하야시 오야붕이 종로패 김기환과 화해(를 빙자한 협상)의 술자리를 가질 때 찾아갈 만큼 고급 요정의 마담이다. 그러므로 세츠코는 ‘가오(顔)’를 중요시여길 것이다. 그런데도 김두한을 만나서 영화를 보겠다고 한 다음 우미관에 <最後の復?>를 보러왔다. 당신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반대로 말하면 모자를 돌려주기 위해 종로까지 찾아온 세츠코에게 고맙다고 김두한이 영화를 보여주겠다고 한 다음 상대방의 처지를 고려치 않고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서 데려온 것이 아니다. 게다가 김두한은 이미 이 영화를 여덟 번이나 보았다. 그렇다면 왜 <最後の復?>를 보러 온 것일까. 좀 이상하게 들리긴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싶어 온 사람은 임권택이다. 몇 가지 가설. 첫 번째, 세츠코를 따라서 (일본 영화사전의 분류에 따라) ‘인정(人情)’ 영화나 ‘연애(戀愛)’영화를 보러 간다면 원래의 영화인 < 장군의 아들 >이 만들어놓은 ‘다찌마와리’로 돌아오는데 (임권택의 표현을 빌리면) “애를 먹거나” 아니면 “한참 다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두 번째 가설에 더 기대고 싶다. 임권택은 <장군의 아들>을 통해서 자신이 1970년대에 보낸 ‘다찌마와리’의 시절로부터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지 보고 싶었다고 몇 차례고 대답했다. 아마도 그 대답을 <장군의 아들> 일편에서 만족스럽게 얻었을 것이다. 1990년의 관객들은 기꺼이 이 영화를 환영했고 비평적으로도 환대를 받았다. 여기에는 두 가지를 셈에 포함시켜야 한다. 임권택은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이후 ‘살아남은 거장’의 대접을 받기 시작했지만 <장군의 아들> 이전에 흥행의 시장에서 성공한 적이 없다. 다른 한 가지. 1980년대 비디오의 백화제방을 통과하면서 성장한 (아마도 박찬욱으로 대표되는) 완전히 새로운 시네필 세대는 B급영화와 컬트영화들을 새로운 고전의 반열에 올리면서 비평의 엄숙주의와 전투를 벌였고 영화와 미학 사이에서 새로운 접속 방식을 찾아낸 다음 그 사이에서 이루어진 긴장을 때로 통과하고 때로 가로 막으려는 도그마와 전투를 벌이면서 새로운 바깥의 출구를 찾고 있었다. <장군의 아들>은 제 시간을 찾아서 도착했다. 그런 다음 임권택은 두 번째 <장군의 아들>을 만들면서 영화 안의 영화로 자신이 1970년대에 만들었던 ‘다찌마와리’ 영화들보다 더 천대받았던 ‘으악새’ 영화를 끌어안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칼을 한 번 휘두르면 엑스트라들이 일제히 ‘으악’ 소리를 내면서 죽는다고 충무로 내에서조차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장르. 물론 그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무언가 여기에는 대면의 느낌이 있다. 물론 여기서 더 밀고 나아가면 안 된다. 여기가 비평의 임계점이다. 나는 재빨리 우미관으로 돌아올 생각이다. 아니, <最後の復?>로 들어갈 생각이다. ( S#_3)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김두한이 세츠코와 함께 우미관에 들어서자 다음 쇼트는 <最後の復?>의 장면이다. <國境>과 같은 점. 두 영화 모두 흑백으로 찍었다. 그리고 영화 안의 영화 장면을 보여줄 때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극장 풍경의 중계 없이 곧장 영화 안의 영화를 보여준다. 다른 점. <最後の復?>는 토키영화이다. 그러므로 <國境>에서 볼 수 있었던 변사가 없다. 물론 상당한 기간 동안 토키와 무성영화는 공존하였으며, 일본영화에서 토키는 1931년에 만든 <이웃집 부인과 나의 아내>에서 시작되었다. 오즈도 한참을 망설인 다음 1936년에야 첫 번째 토키영화 < 외아들 >을 만들었다. 내 관심을 끈 것은 두 번째 다른 점이다. 여기서 <最後の復?>는 1.33 사이즈로 상영된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제까지 1.85로 진행되던 화면에서 양옆을 어둡게 한 다음 첫 장면을 볼 수 있다. 임권택은 이 화면 사이즈를 만들면서 단지 양 옆만을 어둡게 잘라내는 대신(masking) 위아래도 지워내면서 화면 전체를 영화 안의 영화라기보다는 영화관에서 바라보는 기분을 내면서 두 편의 영화, 영화 안의 영화와 그 영화를 바라보는 영화를 공존시키고 있다. 그때 이 장면에서 바로 앞 장면, 그러니까 김두한이 세츠코와 함께 우미관에 들어서던 장면의 구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장군의 아들>은 좁은 세트를 넓게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 이상으로 양옆을 펼쳐놓거나 수평으로 만든 쇼트들의 구도로 진행된다. 그건 세 편 모두 그렇다. 다만 대결 장면을 벌일 때에만 종종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실내로 들어간다. 그런데 우미관이 야외에 지어진 세트인데도 불구하고 김두한이 세츠코와 우미관에 들어설 때 극장 안에서 두 사람이 들어서는 것을 수직의 구도로 찍었다. 출입구이기 때문에 양 옆은 유리문으로 닫혀 있고 오로지 앞과 뒤로만 인물의 동선이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이 쇼트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지만 김두한이 들어선 다음 나가려다 말고 뒤 돌아서서 세츠코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고 그래서 우미관으로 두 사람이 들어간 다음 그 뒤를 따라오던 종로패들이 “개판이다, 개판이야” 대사까지 모두 하는 장면을 고정된(fixed) 카메라로 편집없이 모두 찍었기 때문에(long_take) 심리적으로 길게 느껴진다. 물론 이 쇼트를 불필요한 편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롱 테이크로 찍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이때 이 방법은 전형적인 학습의 쇼트이다. 무엇을 위한 학습? 1.85를 좁은 구도로 좁혀놓은 다음 어떤 개입도 없이 이어진 쇼트에서 1.33의 구도로 전개될 <最後の復?>를 준비하고 있다. ( S#_3) 숲속에서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달려가며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라고 외치고 화면 바깥에서, 아마도 그녀의 뒤에서, 그러니까 화면 오른쪽 바깥에서 그녀를 쫓아오면서 “거기 서”라는 소리가 일본어로 들린다. 이때 자막은 오로지 지금 영화를 보는 당신을 위해서만 제공된다. 만일 1940년 우미관에서 그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위해서였다면 당연히 화면 왼쪽에 세로 쓰기로 씌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1937년 내선일체를 강요한 일본은 이듬해 조선어 교육 금지를 명령하였으며 지금 영화를 보고 있는 1940년은 창씨개명이 요구된 해였다. 그날의 우미관 관객들은 일본어로 영화를 보아야 했을 것이다.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달려가는 것과 거의 같은 속도로 숲속을 카메라가 수평으로 이동한다. 그러면 같은 속도와 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카메라가 다시 한 번 그녀를 쫓는 검은 옷을 입은 자객들을 따라서 거의 동일한 방법으로 이동한다. ( S#_4) 교과서에서 금기시된 방법. 하지만 임권택은 여기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냥 반복한다. 그래도 괜찮은 것일까. ( S#_5) 왼쪽에 서 있는 세 그루의 나무. 더 멀찍이 물러나서 이동하던 카메라를 저 멀리 있는 세 그루의 나무가 멈춰 세우기라도 하듯이 거기 그렇게 문득 서 버린다. 나무 뒤에서 홀연히 등장하는 한 남자. 우리는 협객물의 약속을 잘 알고 있다. 여인이 자객들에게 쫓길 때 그 앞에 나타나는 남자는 언제나 구원자이다. 이 낯선 남자를 향해서 자객들은 저마다 “비켜라” “누구야”를 외치지만 모두들 흠칫 물러선다. 이 세 개의 쇼트는 모두 수평의 동선과 구도로 진행된다. 하지만 세 번째 쇼트 다음 장면은 낯선 남자와 자객들 사이의 ‘찬찬찬’ 검술 살진(殺陣)이 아니라 <最後の復?>를 보고 있는 김두한과 세츠코의 모습이다. 세츠코는 열심히 영화를 보고 있지만 김두한은 따분한 표정을 짓다가 하품마저 하고 만다. ( S#_6) 물론 내용이 재미없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화면에서는 칼을 빼든 자객들로부터 “죽여라”(voice_out_of_frame)는 외침이 터져나오면서 이제 막 결정적인 활극장면이 펼쳐질 순간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은 영화 안의 영화 <最後の復?>를 (이론적으로만 설명하면) 김두한이 아니라 세츠코를 경유해서 보는 중이다. 서사의 차원에서 설명은 단순하다. 우미관은 김두한의 ‘나와바리’이고 게다가 <最後の復?>은 찬바라 영화이기 때문에 김두한은 시간이 날 때마다, 달리 할 일이 없을 때마다, 혹은 순전히 재미로 수없이 보았을 것이다. 그건 하나도 이상한 제스처가 아니다. 내 질문은 거기에 있지 않다. 김두한과 세츠코의 쇼트는 자유자재로 옮길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 자리에 가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 쇼트는 마치 <最後の復?>의 결정적 순간을 보려는 관객들, 그러니까 영화 안의 영화를 보려는 우리들을 불만족스럽게 만들려는 의도의 자리에서 몰입의 리듬을 방해하고 있는 중이다. 김두한과 세츠코의 감정적 관계는 아직 아무 관계도 아니며 이후에도 (함께 영화를 본 다음 데이트 장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들의 궁금한 기다림에 대답이라도 하듯 다음 쇼트는 다시 영화 안의 영화로 돌아간다. ( S#_7) 기모노 여자는 나무 뒤에 서서 바라보고 있고 낯선 남자는 자객들과 일대 사로 대결을 한다. 이때 이 장면의 구도는 기이하게도 남자와 자객들 사이의 일대 사의 대결이 막 시작되려는 광경을 눈 앞에 펼치는 대신 나무 뒤에 숨은 기모노 여인의 뒤에 (두 개의 뒤라는 말을 염두에 두어서 이 장면을 다시 보라) 서서 바라보고 있다. 칼 바람소리와 비명소리가 날 때 기모노 여인은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close_up) 쳐다보고 있다. ( S#_8) 낯선 남자는 자객 네 명을 모두 쓰러트린 다음 조금도 호흡이 거칠어지지 않은 채 칼을 절도있게 칼집에 넣는다. 나무 뒤에 숨어있던 여자가 나와 무릎을 꿇고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지만 거들떠 보지도 않고 (카메라가 서 있는 맞은 편으로) 성큼성큼 걸어 떠나간다. ( S#_9) 김두한은 그걸 보다가 하품을 하면서 눈을 감고 잠이라도 잘 기세다. 그러자 영화에 빠져들었던 세츠코는 김두한을 보면서 “面白くないですか (재미없습니까?)”라고 물어본다. 그 말을 못알아듣자 손바닥을 가로 흔들며 “ゼミ(재미) ないですか” 라고 다시 물어본다. 일본말을 못하는 김두한은 변명이라도 하듯이 손가락 여덟개를 펴 들고 “나, 저 (영화) 여덟 번째야, 여덟 번”이라고 말한다. 세츠코는 그 모습을 보고 입을 가리며 웃는다. 그런 다음 장면은 없다. 그 낯선 남자가 누구인지, 기모노 여인은 왜 쫓겼는지, 그 여인의 운명은 어찌되었는지, 자객들의 복수는 이루어졌는지, 무엇보다도 최후의 복수는 성공했는지, 아무 관심도 없이 영화 속의 영화 <最後の復?>는 거기서 끝나고 화창한 초여름날 야외에서 데이트하는 김두한과 세츠코로 옮겨간다. 내 질문은 간단하다. 왜 영화 속의 영화를 거기서 끝내도 괜찮은 것일까. 얼핏 보면 거기서 <最後の復?>의 한 시퀀스가 끝났기 때문에 우미관 극장 안의 씬과 영화 속의 영화 <最後の復?>의 숲 속의 대결 씬을 맞춘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때 내 반론은 그렇게 되면 김두한과 세츠코의 이야기도 거기서 끝난 다음 재빨리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서사의 진행에서 차라리 방해라고 할만한 두 사람의 고궁에서의 데이트 장면에로 옮겨간다. 이 씬은 우미관 장면의 감정적인 연결이다. 여기서 핵심은 세츠코가 김두한의 손가락 여덟 개를 펼쳐든 모습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제스처에 있다. 입을 가리고 웃을 때 세츠코는 이미 기모노 여인의 운명에 관심이 없다. 그녀의 운명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최후의 복수가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 제스처는 영화 안의 영화가 더 이상 영화 안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것에 대한 거절의 동작이다. 왜 거절의 제스처가 성립하는 것일까. 나는 영화 속의 영화 <最後の復?>의 타이틀이 미처 우미관에 들어가기도 전에 마치 영화 속에 삽입(indert_shot)되었다고 말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이 영화는 김두한이 보고 싶어서 세츠코와 온 것이 아니라 세츠코가 보고 싶어서 김두한이 함께 온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 속의 영화에 이끌리는 시선은 김두한이 아니라 세츠코를 중심으로 이끌린 응시와 그 반응이다. 심지어 김두한은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그는 하품을 하고 눈을 감고 금방이라도 잘 것만 같다. <最後の復?>에서 우리가 보는 첫 장면은 이 영화를 보는 세츠코와 일치를 시키기라도 하듯 숲 속을 달리는 기모노의 여인으로 시작한다. 나는 여기서 다소 기계적인 동일화의 도식을 따라가볼 생각이다. 물론 영화는 그렇게 단순하게 기제가 작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군의 아들>이 장르영화라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고 여기서 시선의 네트워크가 불러 일으키는 문법적인 전이 효과만을 계산에 포함시킬 것이다. 그런 다음 문득 나타나 그녀를 구해준 낯선 남자가 등장하기까지의 장면( S#_3_4_5)은 단조롭긴 하지만 이상하지는 않다. 그러나 하품을 하는 김두한과 곁에서 온통 영화에 빠져든 세츠코가 화면을 바라보는 장면( S#_6) 이후는 마치 영화를 보는 쪽에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영화와 영화 속의 영화를 분리해낼 수 있다면 기모노 여인을 구하러 나타난 낯선 남자가 자객들과 마주하는 장면( S#_5) 다음 쇼트는 ( S#_7) 나무 뒤에서 기모노 여인이 숨어서 대결을 바라보는 것을 그녀 뒤에서 찍은 장면이다. 두 개의 쇼트 사이에 김두한과 세츠코의 장면이 없었다면 이 두 개의 쇼트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혹은 순간적으로 연결시킨다 할지라도 이상할 정도로 어색해보인다. 왜 그렇게 이상해진 것일까. 그건 대결을 나무 뒤에 숨어서 훔쳐보는 기모노 여인의 얼굴(close_up)을 보기 위해서이다. ( S#_8) 그렇지 않으면 대결이 중심에 있는 화면에서 그 바깥에 있는 여인의 얼굴을 잘라 들어가는 것은 완전히 흥을 깨는 일이다. 그때 이 여인의 얼굴은 세츠코가 이 씬을 바라보면서 감정을 몰입하는 주관적인 쇼트처럼 보인다. 혹은 영화를 바라보는 세츠코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영화 안의 영화 바깥으로 나갔다 되돌아올 필요없이 두 쇼트를 하나로 겹쳐놓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동일화 효과이다. 말하자면 쇼트의 경제성. 기모노 여인이 아니라면 이 순간 세츠코는 도대체 누구에 의지해서 <最後の復?>를 보고 있겠는가. 가장 이상한 쇼트는 낯선 남자가 자객들을 물리치고 나자 나무 뒤에 숲어있다가 나타나는 기모노 여인의 장면이다. ( S#_9) 그녀가 무릎을 꿇고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지만 낯선 남자는 돌아보지도 않고 떠난다. 나는 그녀가 나타난 방향 때문에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해졌다. 도대체 어떤 원칙으로 이 숲길에 상상선을 그은 것일까. 숨어서보던 그녀는( S#_7) 반대쪽 방향에서 나와서( S#_9) 인사를 한다. 두 가지 원칙. 첫째, 네 개의 쇼트는 카메라가 모두 정지해 있다. 그러기 위해서 액션 장면을 모두 담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하지만 장면의 성질로 볼때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서 찍었다. 둘째, 이 네 개의 쇼트는 180도를 기준으로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한다. 왜 그렇게 찍은 것일까. 유일한 이유. 언제든지 진행을 중단할 수 있다. 네 개의 쇼트는 어떤 원심력도 갖지 못하고 모두 제각각 떨어져나간 것이다. 이때 이 쇼트의 진행을 멈출 수 있는 절단의 힘은 그저 세츠코가 관심을 잃으면 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最後の復?>를 보는 까닭은 세츠코가 보고 싶어서이기 때문이다. 그때 세츠코가 영화 속의 영화로부터 눈을 거두고 감두한에게 눈을 돌리기만 하면 된다. 영화 안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라도 한듯 세츠코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김두한을 보는 것은 하나의 중단이자 새로운 연결의 신호이다. 아쉽지만 <最後の復?>는 이 순간 이미 끝난 것이다. < 장군의 아들 3 > 엔딩 아쉽지만 < 장군의 아들 > 세 번째 편에는 영화 속의 영화 장면이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상한 기시감이 든다. 모든 이야기가 다 끝난 다음, 그러니까 김두한과 김동회가 힘을 합쳐 혼마치깡에 쳐들어가 하야시 구미(組)와 최후의 대결을 벌인다. 세 편의 <장군의 아들>에서 수없는 대결장면이 있었지만 이렇게 혈겁(血劫)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광경은 거의 유일하다. 그런 다음 김동회는 김두한을 부축하여 떠난다. 그런데 김두한은 종로를 떠나서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이 장면은 내게 두 가지 이미지로 다가온다. 하나는 이제 이 긴 연작이 끝났다는 작별인사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힘겹게 비틀거리면서 떠나가는 두 남자. 여기에는 그 동안 김두한을 둘러싸고 등장했던 어떤 인물도 곁에 없다. 그들은 마치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것만 같다. 하나의 계열의 소멸. 더 이상 작동할 것이 남아있는 않은 장르 기계. 저물어가는 석양의 햇살. 여기에 남은 쓸쓸한 기호들. 물론 이것은 해석이 아니라 그저 덧붙여진 감상이다. 나는 여기에 하나의 감상을 더 할 생각이다. 이 장면을 보았을 때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장군의 아들> 일편에서 본 영화 속이 영화 < 國境 >에서 찍지 않은 쇼트를 본 것만 같았다. 갑자기 이 장면만을 마치 기억 속의 한 장면처럼 희미해보이게 찍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fog_filter) 나는 김두한과 김동회가 사랑도 잃고 조국도 잃고 오직 그 둘만이 서로를 의지하며 그들의 유일한 고향인 종로를 떠나는 뒷모습에서 김영철과 박동일의 마지막 모습, 아니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國境>의 마지막 장면을 본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와 영화 속의 영화가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만 같은 착각을 보았다. 물론 이 설명은 그저 부질없는 소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중얼거렸다. 영화와 영화 속의 영화 사이의 화해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영화에서 영화 속의 영화를 말하는 것은 죽음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세르주 다네가 말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부활의 시간을 설득하려는 것이다. 나는 그 둘이 대립적인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에서 과거에로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할 때 그와 동시에 이미 본 영화의 과거의 시간이 지금 보고 있는 영화의 현재의 시간 속에서 운동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설명하고 싶다. 나는 영화 안의 시간을 무한정 팽창시키고 싶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거의 유일한 임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이번 이야기 끝, 그리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