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성폭력의 위험
- 감독
- 김영한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여운계, 이순재, 현석
※ 섬뜩한 이미지들이 많으니 심약한 분들은 주의를 요합니다 한국 공포영화의 주기는 파란만장하다. 196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 장르는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상상력은 다양했다. < 악의 꽃 >(1961, 이용민)처럼 흡혈 식물을 소재로 한 영화도 있었고, < 불가사리 >(1962, 김명제)와 < 대괴수 용가리 >(1967, 김기덕)같은 괴수 영화도 있었다.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였던 이용민 감독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 살인마 >(1965)나 < 목 없는 미녀 >(1966) 같은 걸작을 내놓았다. < 월하의 공동묘지 >(1967, 권철휘)는 한국 공포영화의 정전이 되었고, 유현목 감독의 <한>(1967)은 큰 흥행을 기록하며 ‘옴니버스 호러’의 전통을 세웠고 속편으로 이어졌다. 당대 최고의 영화사였던 신필름도 이 장르에 결코 무관하지 않았는데 < 천년호 >(1969, 신상옥), < 사녀 >(1969, 신상옥)는 당대의 흥행작이었다. 박윤교 감독의 <마계의 딸>(1983) 1960년대에 ‘준 메이저’ 장르로 시작한 한국 호러는 197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용민, 박윤교, 이유섭, 김인수 등의 감독들이 꾸준히 작품을 이어갔고 사극의 서브 장르로서 1960년대의 유산을 양적으로 확장시켰다. < 설야의 여곡성 >(1972, 임원직), < 며느리의 한 >(1972, 박윤교) 등이 이때 등장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크리처 쪽으로 트렌드 변화가 왔다. < 반수반인 >(1975, 김기)의 늑대 인간, < 정형미인 >(1975, 장일호)의 고양이 인간, < 원무 >(1976, 박윤교)의 미이라 등 더 이상 소복을 입지 않는 공포영화가 등장했다. 대만, 홍콩, 필리핀, 태국 등과도 합작이 활발히 이뤄졌다. 남자의 등을 어루만지는 귀신의 손길. <삼국여한>(1982. 김인수)의 한 장면. <깊은 밤 갑자기>(1981. 고영남)의 이기선은 세련되면서도 당돌하지만 한편으론 백치미를 지닌, 복합적 이미지의 배우였다. 1980년대 마지막 호러인 <하녀의 방>(1987. 김인수). 이 시기에 이르면 호러와 에로의 경계를 거의 무너진다. 1980년대 호러의 가장 큰 특징은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exploitation film)의 경향이다. 즉 ‘노골적인 상업영화’라는 강력한 상업적 의지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 급격하게 진행된 한국영화의 산업적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1970년대에는 크리처와 합작이 그 타개책이었다면, 1980년대엔 에로티시즘과 하드고어였다. 1980년대 호러에 새로운 것은 없다. 대신 표현 수위의 강도를 상승시키며 생존하려 했다. ‘여인의 한과 피맺힌 복수’라는 전통적 가치는 오롯이 살아 있지만, 그 정서와 방법론과 비주얼은 훨씬 더 자극적이었다. ‘에로틱 호러’의 창궐은 시대정신에 발맞춘 것이었다. < 애마부인 >(1982, 정인엽)을 기점으로 충무로에 불기 시작한 ‘살색 열풍’은 모든 장르를 잠식했다. 단지 ‘야한 영화’가 양산되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크게 보면 ‘선정주의’의 확장이었다. 성적 표현뿐만 아니었다. 액션 스펙터클이든 폭력 묘사든 감정 표출이든 ‘80년대식 표현’은 이전에 비해 한두 눈금 더 올라가 있었고, 호러 장르는 그 표현에 최적의 토양이었다. 당대의 에로티시즘 영화와 일맥상통했던 ‘1980년대산 호러’는 비주얼의 관능성과 폭력성에서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김인수 감독은 상징적 인물이었다. 1990년대엔 비디오 시장으로 건너가 <젖 소부인 바람났네 >(1995)를 연출하며 거대한 족적을 남긴 그는, 1980년대에 마치 그 예행연습이라도 하듯 끈적끈적한 공포영화를 선보였다. 그가 1982년에 연출한 < 삼국여한 >의 예고편 문구인 “치정과 욕정이 얽힌 성인용 공포 드라마”는 당대 공포영화 감독들의 좌우명이었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옴니버스 호러였던 <삼국여한>은 단순한 에로티시즘이 아니라 도착적 성을 다룬 ‘섹스 과잉 공포’로서 여기에 하드고어를 결합했다. 그의 < 미녀 공동묘지 >(1985)에는 시체와의 섹스까지 등장하니, 1980년대 한국 호러의 성적 상상력은 에로티시즘에서 사도마조히즘을 거쳐 네크로맨틱에 이르는 여정이었던 셈이다. ‘호러 장인’ 박윤교 감독의 < 춘색호곡 >(1981)의 오프닝도 ‘섹슈얼 호러’라 불러도 될 만큼, 그의 전작들과는 확연히 다른 톤이었고 < 천년백랑 >(1983)에서는 근친적 삼각관계를 보여준다. <춘색호곡>과 <한녀>(1981, 이유섭)의 ‘귀신 액션’. 스타일과 비주얼도 더욱 자극적이며 적나라한 양상을 띠었다. 그 결과물 중 하나는 호러와 무협 액션의 결합이었다. 이 시기 귀신들에게 텀블링은 기본이었으며 피아노 줄을 달고 경공술을 선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춘색호곡>은 대표적이며, 한중일 콘셉트의 옴니버스 영화인 만큼 <삼국여한>은 중국식 무협과 사무라이 액션 등을 선보였다. 남기남 감독의 < 흑삼귀 >(1985)는 강시 영화를 좀 더 하드고어 버전으로 만든 듯한데, 1970년대 액션 전문 배우였던 권영문이 등장하며, 도사 캐릭터의 활약이 펼쳐진다. <천년백랑>의 후반부는 호러보다는 무협 액션에 가깝다. <깊은 밤 갑자기>는 다양한 광학 효과로 그로테스크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런 효과는 1980년대 호러의 클리셰였다. <천년백랑>에서 사람이 여우로 변하는 장면. 디졸브를 이용해 꽤 그럴듯하게 변신을 표현한다. <공포의 축제>와 <월하의 사미인곡>. 특수분장의 기술적 발전을 토대로 호러 비주얼을 만들어낸다. <삼원녀>의 잘린 팔과 <제4의 공포>의 잘린 머리. 다양한 효과들이 호러 장르의 시각적 쾌감을 위해 사용되었다. 1980년대 호러는, 지금 보면 약간 조잡하게도 느껴지지만 다양한 광학 효과를 통해 기괴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화면을 흐리는 블러 효과를 비롯, 렌즈를 통해 왜상을 만들고 프리즘 효과를 냈으며, 이중노출이나 디졸브 등을 통해 변신이나 빙의를 표현하기도 했다. 여기엔 대부분 자극적인 사운드가 결합되어 그로테스크한 기운을 더했다. 특수효과와 특수분장도 빼놓을 수 없다. 소복 소매에서 흰 연기가 나오는 <원한의 공동묘지> 스타일의 초보적 수준도 있었지만, 때론 실감나는 수준을 보여주었다. 이 분야의 기술적 발전 역사에서 1980년대는 초기에 해당하는데, 자본의 취약성에 때문에 그 수준은 높지 않았지만, 당시 공포영화가 원하던 ‘쎈’ 표현을 어느 정도는 충족시켰다. 신체를 절단하고 괴물 같은 얼굴을 필요로 했던 하드고어 콘셉트가 대거 등장할 수 있었던 건 그런 이유다. 특히 김철석(특수효과)과 장인한(분장)이 만난 < 월녀의 한 >(1980, 김인수), < 마계의 딸 >(1983, 박윤교), < 제4의 공포 >(1984, 노진섭), < 월하의 사미인곡 >(1985, 박윤교) 등은 이 분야의 초석이 된 작품들이다. 기술적 발전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영화도 있다. 김인수 감독의 <제4의 공포>와 < 공포의 축제 >(1986)는 기형적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영화다. < 한녀 >(1981, 이유섭)은 경성 시대를 배경으로 성형 수술을 소재로 한다. < 삼원녀 >(1981, 김시현)와 <삼국여한>엔 팔이나 머리가 잘리는 신체 절단 요소가 있으며, <월하의 사미인곡>이나 <여곡성> 등 1980년대 중반 사극 호러에 오면 더욱 괴물 같은 메이크업을 선보인다. <관 속의 드라큘라>와 <흡혈귀 야녀>. 서양의 뱀파이어 캐릭터는 1980년대에 직접 도입되거나 귀신으로 변형된다. 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인 <괴시>, 좀비 연쇄 살인마가 등장하는 <육체의 문>. <제4의 공포>와 <여곡성>. 메이크업을 통한 섬뜩한 ‘괴물적 캐릭터’의 탄생. ‘스네이크플로이테이션 무비’(snakeploitation)라고 불러도 무방할 <인사대전>. 이 영화에서 뱀은 무차별한 학살의 대상이며, 건물 한 채를 혼란에 빠뜨리는 재난의 원인이며, 인간과 액션 대결을 하는 가공할 만한 크리처다. 1960~70년대의 전통적 공포영화에서 벗어나 더욱 자극적인 요소로 호소하려는 1980년대 호러의 노력 중 하나는 이국적 요소의 도입이었다. 중국인 며느리의 한을 담은 <삼원녀>나 중국과 일본의 요소를 끌어들인 <삼국여한>, 혹은 국적 불명의 <흑삼귀> 등은 대표적이다. 여기에 한동안 한국영화에선 선보이지 않았거나 최초로 등장하는 호러 크리처들이 등장했다. 흡혈귀들이 대표적인데, 사극 공포영화에서 여자 귀신들은 종종 흡혈을 하며 <삼국여한>에는 관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받아먹는 귀신마저 등장한다. 주목할 만한 영화는 < 관 속의 드라큘라 >(1982, 이형표)다. 영미권의 호러 캐릭터인 드라큘라를 도입해 한국적 맥락에서 퇴마를 가한다. < 흡혈귀 야녀 >(1981, 김인수)는 기존의 사극 귀신에 흡혈의 모티브를 두드러지게 결합시킨다. 좀비 영화도 등장한다. < 괴시 >(1981, 강범구)는 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로 평가되는데, 해충 박멸을 위한 초음파 실험이 시체들을 깨어나게 한다는 설정이다(방사능이 원인이 되었던 조지 로메로의 <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1968)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이기환 감독의 <육체의 문>(1981)엔 좀비 연쇄살인마가 등장해 여자들을 연달아 살해한다. <제4의 공포>엔 화상으로 흉측한 얼굴을 지니게 된 남자가 마치 미이라처럼 얼굴을 붕대로 휘감고 등장하며, <여곡성>엔 괴물처럼 변해버린 마님이 등장한다. 독사에 물린 여자가 뱀파이어가 되는 < 몽녀한 >(1984, 강범구)과 기형 인간이 등장하는 <공포의 축제>도 언급할 만한 영화다. 동물들도 한몫 했다. 고양이, 뱀, 까마귀 등의 동물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한의 매개체’가 되는 전통적 소재였는데 1980년대에 와서는 더욱 끔찍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바로 ‘학살’의 대상이 된 것. 홍콩과의 합작 영화인 < 인사대전 >(1983, 김선경)은 < 홀로코스트 >(1980, 루게로 데오타도)를 연상시킬 정도로 수많은 뱀들을 무차별로 죽인다. <원한의 공동묘지>에선 수많은 고양이들이 죽임을 당하는데, 이런 살풍경은 이전 호러에선 좀처럼 접하기 힘든 잔인한 스펙터클이었다. <여곡성>엔 전설의 ‘지렁이 국수’ 장면이 있다. <망령의 웨딩 드레스>의 계단 신. 김기영 감독의 미장센을 연상시킨다. <깊은 밤 갑자기>에서 무당의 딸인 하녀는 주술적 위력과 함께 섹슈얼한 힘으로 집을 장악한다. 1980년대 공포영화의 트렌드 중 하나는 별장이나 외딴 곳의 저택을 배경으로 하는, 굳이 이름 붙인다면 이른바 ‘맨션 호러’의 등장이다. 할리우드의 ‘하우스 호러’가 집에 깃든 악령이나 저주로부터 섬뜩한 기운을 가져온다면, ‘맨션 호러’는 집 자체에 영혼을 부여하진 않는다. 대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젊은 여자와 중년 남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며, 여기서 억울한 죽음과 복수극이 벌어진다. 그런 면에서 < 하녀 >(1960, 김기영)나 < 마의 계단 >(1964, 이만희) 같은 1960년대 한국 스릴러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할 듯하다. 1980년대 ‘맨션 호러’는 공포 장르의 공간을 확장하려는 의도 속에서 과거의 유산을 되살리는 시도였다. 그 전형은 < 망령의 웨딩드레스 >(1981, 박윤교)다. 회사를 운영하는 남자는 우연히 히치하이킹으로 만난 여자를 자신의 별장 하녀로 고용한다. 그녀는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마치 <하녀>의 하녀처럼 남자를 차지하겠다고 위협한다. 이에 남자는 여자를 죽이고 우물에 던져버리지만, 마치 <마의 계단>처럼 그녀는 다시 출몰한다. 귀신인지 산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 구도는 < 귀화산장 >(1981, 이두용)에서 병원장과 간호사의 관계로 변주되며, <깊은 밤 갑자기>에선 주술적 요소가 가해진다. 특히 <깊은 밤 갑자기>는 전원 저택의 안주인(김영애) 캐릭터에 초점을 맞춰 망상 속에서 미쳐가는 여성을 보여준다. <살인마>를 리메이크 한 < 목없는 여 살인마 >(1985, 김영한). 외딴 폐가와 병원을 오가는 <제4의 공포> 등도 같은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작품들. 한편 < 악녀의 밀실 >(1984, 김선경)이나 < 요색유희 >(1985, 강대선)는 집에 깃든 악령의 존재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1980년대, 작게나마 호러 전문 배우진이 형성된다. 정세혁과 박암은 대표적. 사진은 <망령의 웨딩 드레스>와 <삼국여한>이다. <미녀 공동묘지>의 진봉진과 곽은경. 그들도 1980년대 한국 공포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배우들이다. 1980년대 호러엔 이국적 이미지의 배우들이 종종 등장했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괴시>의 유광옥, <여곡성>의 홍명진, <월녀의 한>의 박병순, <제4의 공포>의 정현숙. 서양의 호러가 가톨릭 사제를 주로 퇴마사로 내세운다면, 한국의 공포영화엔 대사나 법사의 존재가 있었고 십자가 대신 불교의 상징인 ‘卍’(만)이 있었다. <여곡성>과 <월녀의 한>에 등장하는 ‘卍’. 1980년대 한국 공포영화는 흥행을 위해 좀 더 강렬한 이미지와 스토리로 관객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영화산업의 전반적인 침체와 낙후한 자본 구조 속에서 장르적 진화를 이루지 못하고 클리셰를 반복했다. 그 결과 1980년대 중반이 되면 충무로에서 더 이상 호러는 생산되지 않는 멸종 상황에 이르며, 이 암흑기는 < 여고괴담 >(1998, 박기형)이 등장할 때까지 이어진다. 10년 넘게 제작되지 않은 셈인데, <여고괴담> 이후 2000년대 초중반에 왕성하게 부활한 호러는 2010년 이후엔 다시 침체기에 들어섰다. 한국영화의 수많은 장르들 중에서 가장 격렬한 흥망의 사이클을 보여주는 장르, 호러. 지금은 잠시 침체되었지만 언제 또 새로운 모습으로 상승곡선을 그리며 등장할지 모른다. <원한의 공동묘지>의 마지막 신을 장식하는 자막은 그 이유를 잘 설명한다. “원한은 죽지 않는다. 언제나 우리 가슴속에 맴돌고 있다.”
유도 8단이 단단한 체격에 굵고 검은색이 짙은 눈썹, 정감이 넘치는 호남형 마스크의 윤양하 는 멜로물 데뷔로 영화배우를 출발했으나 곧 검객물의 히어로로 탈바꿈했다. 윤양하는 1967년 김수용 감독의 멜로물 < 빙점 (氷點)>에 데뷔했다. 일본 여류작가 三浦綾子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양녀로 입적시킨 소녀를 친딸을 죽인 살인범으로 오해한 양부모가 그녀를 구박해오다 20년이 지난 다음 사실이 밝혀져 양부모가 양녀에게 사죄한다는 내용이다. 부모 역으로 김진규 , 김지미 양녀 역에 당시의 톱스타 남정임 이 출연했고 윤양하는 남정임의 상대 역이었다. 이 영화는 야녀와 양부모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었음으로 젊은 남배우의 영화 속 배역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윤양하는 퍽 인상적인 데뷔를 했다. 그러나 그 당시 한국영화계 제작 상황이 윤양하 를 멜로물에 머물게 하지 않게 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동남아 영화시장은 단연 일본과 홍콩의 검객물이 풍미했다. 일본은 가스 신따로를 내세운 <맹협 시리즈>를 , 홍콩은 왕우를 간판으로 한 <외팔이 시리즈>로 동남아 영화 흥행을 휩쓸었다. 이들 두 사람을 주연으로 한 검객물의 위세가 어떻게나 설쳤는디 마침내 가스 신따로와 왕우 두 검객 스타를 한 영화에 출연시킨 <맹협과 외팔이>란 영화를 만들어 동남아 극장가를 석권했고 한국에도 1969년 상영되어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의 영화제작계도 검객물의 영향과 자극을 받아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검객물 붐이 일었다. 당시는 한국영화 전성기로 일년에 200편 이상의 영화를 쏟아냈다. 그래서 당시의 톱스타 남배우들은 멜로물의 겹치기 출연에도 숨이 벅차 검객물 출연은 외면했다. 이런 상황에서 체격이 단단하고 검객물 주연 마스크로 가장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은 윤양하 가 검객물의 히어로로 발탁된 것이다. 이런 영화계 사연으로 머리을 올려 상투로 묶고, 턱에 수염을 붙이고, 들짐승 가죽으로 옷을 입고 날카로운 검을 손에 든 한국의 검객 스타 윤양하가 탄생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 월하의 검 >, < 필살의 검 >, < 내장성 대복수 > 등 20여 편의 검객물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검객물 붐이 쇠퇴하자 윤양하 는 중후한 조연 배우로 토속물과 역사물, 액션물에서 새로운 연기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검객물에서 주연배우로 활약했지만 윤양하는 여기에 얽매이지 않고 조연배우로서 다시 신인이 된 자세로 연기에 임했다. 토속물로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 물레방아 >, < 씨받이 > 역사물로 < 악인의 계곡 >, < 30인의 여도적 >, < 오사까의 대부 >, < 카페리호 불청객 > 멜로물로 < 속눈썹이 긴 여자 >, < 복부인 >, < 겨울부인 >, < 설마가 사람잡네 >, < 흑녀 > 문예물로 <갈매기떼>, < 아제아제 바로아제 >, 전쟁물로 <안케작전>, < 아벤고 공수군단 >, < 일송정 푸른 솔은 > 등을 들 수 있겠다. 1967년 데뷔 이래 2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지금도 현역 배우이다. 200여 편의 출연을 통한 연기 흐름을 볼 때 단연 토속물엣 윤양하 의 연기는 빛났다. 특히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의 산 사내 역과 < 씨받이 >에서의 문중 종손 대를 잇게 하려는 시골 양반 배역은 분명 윤양하 연기의 대전환기를 보여 주었으나 이를 계속 밀고 나갈 수 있는 작품을 이어주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윤양하는 본명이 윤병규(尹炳奎)로 1940년 5월 1일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로이 장대한 대장부였고 어머니는 둥근 얼굴에 하얀 피부를 지닌 전형적인 대가집 마님 스타일이었다. 체격은 아버지를 얼굴은 어머니를 이어받은 윤양하는 소년 시절부터 같은 나이의 아이들보다 체격이 크고 힘이 셌다. 동네에선 대장이었다. 윤양하와 악수를 해본 사람은 느꼈겠지만 그의 손은 솥뚜껑처럼 두껍고 단단해 장력이 대단함을 금방 느낄 수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손이 컸다.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기차가 다니지 않은 전북 내륙지역 순창은 버스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집에서 순창읍 버스 정류장을 운영했으니 집안 형편은 여유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힘이 세며 특히 장력이 뛰어난 윤양하 는 그 당시 시골에서 가장 인기있는 운동이 씨름을 했다. 중학교 때는 학교 안에서 적수가 없을 정도로 씨름꾼이 되었고 순창농고 재학시절에는 군 단위 씨름대회에 출전, 어른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거머쥐기도 했다. 순창에서는 고교시절부터 잘 생긴 씨름 선수로 이름을 떨쳤다. 장래 희망도 대한민국 제일의 장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때 꿈이 바뀌고 인생행로를 영화배우로 세웠다. 그때 홍성기 감독의 < 춘향전 >에 이도령 역으로 주연했던 고향 선배 신귀식 이 귀향했는데 순창읍이 떠들썩할 정도로 환영을 받았고 읍내는 신귀식을 보려는 사람들로 난리를 피웠다. 이 황홀난 광경을 목격한 윤양하 는 씨름장사보다 더 인기있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느꼈다. 고향에서 영웅대접을 받고 있는 선배 영화배우를 보고 윤양하는 자신도 배우가 되기로 작정했다. 대학은 유도대학(현 용인대학교)으로 진학했다. 당시 유도대학은 서울 소공동에 있었는데 씨름선수였던 그였기에 유도 실력도 일취월장으로 늘었다. 스타에의 꿈을 잠시 접어두고 유도에만 매달려 피나는 연습을 했다. 마침내 윤양하는 국가대표 선수로 뽑혔다. 중량급 선수로서 올림픽 출전 후보 선수로 선발되어 대망의 올림픽 출전을 눈앞에 두었으나 최종 선발에서 재일교포 선수 김의태에게 패배, 아깝게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한 순간에 세계 제패의 꿈이 사라지자, 윤양하 는 깊은 허탈감에 빠져 좌절했다. 그러나 좌절의 기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두 번째로 희망했던 배우에의 길을 두드렸다. 실의를 딛고 당시 충무로에 있었던 한국배우 전문학원에 입학했다. 4년제 대학에 연극영화과가 개설되기 전에는 국내 유일의 배우 양성기관으로서 명성을 떨쳤던 학원으로 신성일 , 최지희 , 김창세 등도 이 학원에서 수학했다. 원장은 김인걸 (金仁杰)로 작고했지만 일본대학 연극과 출신이었다. 그 당시 이 학원에는 유현목 , 김수용 , 박상호 같은 당대의 유명감독들이 출강하고 있어서 윤양하는 이들 감독들의 이름을 보고 학원에 들어갔다. 이 배우학원에서 김수용 감독을 만났고, 이 만남이 인연이 되어 김 감독이 연출한 < 빙점 >에서 배우로 데뷔했다. 예술적인 열정과 사회적인 야망을 품고 살아가는 윤양하 의 행동 반경은 배우라는 단순한 범주에 안주하기를 거부한다. 더우기 술을 좋아하고 사람 만나고 사귀는 것을 천성적으로 즐긴 그는 사람 교제 범위가 다양하고 넓다. 영화계 뿐만 아니라 체육계, 기업, 법조계 등에 친교가 넓다. 그와 술을 한번이라도 마셔본 사람이라면 우선 그의 주량에 놀라고 압도당한다. 맥주, 소주, 양주 등 주종을 가리지 않고 대량으로 마시면서도 분위기는 언제나 화기애애하게 이끄나. 어쩔 땐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만큼 친화력이 화려하다. 윤양하 는 1986년부터 88년까지 3년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지냈다. 이때 그는 16개 영화사에게만 영화 제작권을 독점케 하는 영화법을 개정해서 제작자유화로 이끄는 영화운동을 온 몸으로 펼쳤다. 1986년 영화법 개정의 숨은 일꾼은 영화배우협회 회장 윤양하였다. 그는 두더쥐작전으로 영화법 개정의 당위성을 호소하는 신문광고를 전격적으로 게재했다. 이 광고문이 영화법 개정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지금도 윤양하는 영화인협회 총회에서 논리적인 어법과 달변으로 영화계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해서 많은 영화인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의 열정과 야망은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로 이어진다. 그는 1996년 고향인 전북 순창.임실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했다. 첫 출마였다. 7명의 후보 중에서 2등했다. 그러나 한 명만 뽑는 선거에서 2등도 패배자였다. 차점으로 낙선했다. 지금은 정계 진출의 꿈을 접고 체육계 활동에 열성을 쏟고 있다. 대한체육회 산하 유도협회 수석 부회장으로 있다. 유도 8단으로 1월 25일 유도인의 날 기념식에서 특별 공로상을 수상했다. 그는 유도협회 행사가 있을 때마다 명사회자로서도 이름을 떨치고 있다. 고향인 순창에 청소년수련원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전주대 교수로 있는 이장호 감독과 손을 잡고 수련원 부지에 영화촬영 세트장 건립을 추진중에 있다. 전주영화제 집행위원회 위원장은 이장호이고 부회장은 윤양하 다. 가족으로는 이화여대 체육과 출신의 부인 서성미와 두 아들이 있다. 장남 윤세웅 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영화배우가 되어서 이혁수 감독의 < 클릭 >과 김영한 감독의 < 천사의 시 > 두 편에 출연했다. 차남 윤태웅은 동원증권 아이스하키 팀의 주전 선수이고 국가대표이기도 하다. 김화(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본 명 : 윤병규 출 생 : 1940. 5. 1 전북 순창 학 력 : 용인대 유도학과,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데 뷔 : 1968년 김수용 감독 < 빙 점 > 주요 경력 : 한국영화배우협회 23,24대 회장 역임/ 현 한국영화배우협회 명예회장/ 바르셀로나, 아틀란타 올림픽 한국유도대표팀 단장/ 현 대한유도회 수석 부회장 수상경력 : 전남일보(1972) 신인상 / 호남일보(1973)남우조연상 등 다수 주요작품 : < 빙점 >, <시발점>, < 필살의 검 >, < 임진란과 계월향 >,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등 230여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