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 주말에
- 감독
- 김영희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김모은, 김대현, 서은아, 박철현
전문직 여성 기술 스태프로서의 편집기사 편집기사 김영희(金英姬)를 조명하는 것은 한국영화를 추동한 큰 힘이었지만 잘 드러나지 않았던 기술 인력의 존재를 한국영화사에 기입한다는 큰 의미가 있다. 특히 2007년 김영희의 구술채록은, 감독이나 배우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영화사 연구의 작가주의적인 비평의 전통을 벗어나 한국영화사의 이면과 빈 곳을 채워줄 수 있는 연구방법론으로서의 구술사의 힘이 더 발휘될 수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주요 스태프들보다는 ‘뒷 스태프들’(편집, 미술, 특수효과, 녹음 등)의 구술을 보다 더 충분하게 채록하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갖는다. 더불어 김영희를 상세히 기록하는 일은 씨네-페미니즘의 틀로 한국영화사를 재구성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전문직 여성 영화인의 존재와 그 역사에 대한 재발견이기도 했다. 근현대 한국 사회의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의 활동이 많지 않았던 데다가 얼마 안 되는 여성 전문인의 역사적 자취를 찾기 힘든 것처럼, 영화계에서도 여성 전문 인력이 활발하게 활동한 공적인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까지 여성 영화감독은 박남옥, 홍은원, 최은희, 이미례 네 명뿐이었고, 여성이 영화계에서 담당한 분야는 주로 배우였다. 그나마 일부가 연출부, 시나리오, 스크립터, 의상과 편집의 분야에서 활약했다. 특히 한국에서도 여성이 기술 인력으로서 전문성을 담보하고 분야로서는 편집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 1, 2] 서울 미공보원 시절 편집하는 김영희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시작한 영화 인생 김영희가 영화인의 길로 들어선 것은 큰 언니(김갑순)의 남편인 촬영기사 양세웅의 덕분이었다. (양세웅의 딸 양성란도 김영희에게 편집을 배웠으니 가히 영화인 집안이라 해도 무리는 아니겠다.) 그녀는 1924년 충청도 공주에서 김동화와 김옥봉의 6녀 2남 중 다섯째 김옥례로 태어났다. 운송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덕분에 꽤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라도 순천으로 이사 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고녀를 다니고 있을 때만 해도 그저 노래 부르기를 즐겨 하고 영화 보기를 좋아하던 소녀였다. 김영희가 광주고녀 재학 중에 가족은 서울 청량리로 옮겨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자 자신의 학업은 포기하게 되고 큰언니의 부탁으로 형부의 손에 이끌려 일제의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제작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이었다. 19살이 되던 1943년부터 1970년 즈음까지 김영희는 수백 편의 문화영화, 뉴스영화, 기록영화와 극영화를 편집하며 27년 가량을 현역에서 활동했다. [사진 3, 4] <춘풍>(박기채, 1935)의 한 장면(상)과 스태프 사진(하). 이 영화로 박기채는 연출로, 양세웅은 촬영으로 조선영화계에 출사표를 던졌다. 도아키네마에서부터 수련을 같이 한 이 둘은 이후 콤비가 되어 활동했다. 김영희의 형부 양세웅(1906~?)은 일본 교토의 1924년 도아키네마(東亞キネマ) 촬영부에 입사해 영화를 시작했고, 동활영화(東活映畵) 촬영부에서 다년간 촬영을 연마해 1932년 조선인 최초로 촬영기사가 되었다. 귀국 후 양세웅은 <순정해협>(신경균, 1937). <군용열차>(서광제, 1938), <한강>(방한준, 1938), <애련송>(김유영, 1939), <새출발>(1939), <처녀도>(1939)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 후반 촬영기사로 맹활약하면서, 조선의 촬영 기술을 도약시키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 5, 6] 귀국 후 양세웅이 촬영한 작품 <순정해협>(신경균, 1937)의 한 장면(상)과 영화 <한강>(방한준, 1938) 속 장면(하) 1940년대부터 양세웅은 친일영화 제작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941년 <반도의 봄>(이병일)의 촬영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노래를 잘 불렀던 17세 김영희는 큰언니의 추천으로 이 영화의 주제가를 부를 기회가 있었지만 형부의 반대가 심했다. 대신 그는 처제를 조선영화주식회사 촬영소의 현상실 조수로 취직시켰다. 김영희가 출근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 현상실은 광희동(본사는 남대문 근처)에 있었다. 그는 현상과 편집을 하던 양주남 밑에 있었다. 먼저 현상 기술을 익히고, 곧 양주남이 책임지고 있는 편집실에서 편집 조수로 일하게 되면서 영화계에 입문한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 막 들어가자마자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해변 장면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던 에피소드가 있지만 이 영화는 그녀가 처음 네가 편집을 한 영화가 될 줄은 몰랐다. [사진 7, 8] 김영희가 주제가를 부를 수도 있었던 <반도의 봄>(이병일, 1941)의 촬영 스틸(상), 그리고 처음 네가 편집을 한 영화인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한 장면(하) 해방이라는 열린 시공간 속에서 조선의 영화 인력들은 민족영화 제작을 향한 의지를 가지고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때 김영희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조선영화주식회사 시설에서 후반작업을 하고 있던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의 편집조수를 했다. 1946년부터 1년 간 김영희는 ‘이필우 프로덕션’이라고 회고하는, 중앙청에 위치했던 미군정청의 공보부 영화과로 자리를 옮겨 문화영화, 기록영화, 뉴스 등에 자막을 입히는 작업과 편집을 담당했다. 그러다 짧은 미군정기가 끝날 무렵인 1947년 이필우의 권유로 미공보원(USIS)으로 자리를 옮겨 편집기사로 함께 일했다. 6.25 전쟁 당시 곧바로 피난을 가지 못해 인민군 100일 적치(敵治)의 서울에 있었다. 그때 강홍식에게 평양국립촬영소로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보위국에 끌려가 자술서를 쓰는 등, 중앙청 공보실의 편집실에서 북한군에게 9일 동안 북한군의 전쟁 촬영분에 대해 편집을 강요당했다. 식민지 시기, 해방, 건국과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김영희는 무비올라 앞에서 조선-일본/한국/미국 영화를 잘라 붙이고 있었다. [사진 9, 10] 진해와 상남 시절 미공보원에서 일하는 김영희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리에 이루어지자 그 틈을 타 북한군에게서 탈출하여 숨어 지냈는데, 이때 형부 양세웅은 북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1950년 12월에 미공보원이 진해로 피난하면서 김영희도 공보원을 따라 진해로 왔다. 이후 계속 진해(2-3년), 상남(2년)에서 미공보원에서 편집기사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1955년 즈음에는 1년가량 진해의 해군 교재창(敎材廠)에서 교육영화를 편집하기도 했다. 이때 미공보원이 제작한 <주검의 상자>(김기영, 1955)를 촬영하러 온 최무룡과 강효실을 만난 일도 있다. 진해와 상남에서 일하던 김영희가 충무로와 연을 맺은 것은 잠시 서울에 올라왔던 길에 일주일 간 이규환의 <춘향전>(1955) 편집을 담당해준 덕이었다. 이 즈음 충무로는 폐허를 딛고 활력을 띠기 시작했는데 김영희는 아예 서울로 터전을 옮겨 와 이만흥의 <결혼진단>(1955), <원한의 성>(1955)를 시작으로 극영화에 본격적으로 투신했다. 1 이 시기 아시아재단의 지원으로 정릉에 만들어진 정릉촬영소에서 2년 간 편집 일을 하기도 했다. [사진 11] 해군 교재창의 편집실 모습 충무로 입성, 신필름 편집실 생활 [사진 12, 13] 김영희가 편집한 <춘향전>(이규환, 1955)의 한 장면(상)과 <원한의 성>(이만응, 1955)의 신문 광고(하) 2, 3년 간은 알음알음 충무로의 호텔을 전전하며 <백치 아다다>(이강천, 1956), <황진이>(조긍하, 1957), <무영탑>(신상옥, 1957) 등을 편집했다. 편집 1세대 양주남, 유재원을 이어 김영희는 편집 2세대라 할 수 있는 김희수, 이경자, 김덕진 등과 함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충무로 극영화를 맹렬히 이어 붙였다. 1958년부터 4년 간 신필름 편집실로 출퇴근하면서 편집조수로 박양자와 조카 양성란을 편집 인력으로 키워내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시절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 <지옥화>(신상옥, 1958), <촌색씨>(박영환, 1958),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성춘향>(신상옥, 1961), <연산군(장한사모 편)>(신상옥, 1961) 등 신필름의 작품 대부분이 그녀의 손을 거쳤다. 좀 더 전문적이고 적극적으로 편집 일을 하기 위해 충무로 3가 스타다방 맞은편에 김영희 편집실을 차리고 독립한 그녀는 1970년 영화계를 떠날 즈음까지 120여 편의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 14, 15] 신필름 편집실에 근무하던 시절, 조카 양성란과 함께 편집한 신상옥의 <열녀문>(1962) 속 장면들. 이 영화로 김영희는 제2회 대종상 편집상을 수상했다. 스타다방 옆 김영희 편집실, 인서트의 재발견 1편당 5만원을 받고 한 달에 서너 편씩 편집을 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밤낮없이 김영희 편집실이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어떤 편집 기계를 썼던 것일까, 극영화 편집 규칙과 스타일은 어땠을까. 감독과 편집자의 관계란 어떤 것이었을까. 미공보원에서 일했던 그녀는 스플라이서(splicer)와 무비올라(moviola)를 일찍이 접했다. 충무로에 개인 편집실을 내고 극영화를 편집했던 1960년대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와 미공보원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직접 편집대를 주문⋅제작해 돋보기와 스플라이서로 편집을 하였다. 완성된 16미리 영화의 경우는 본인이 소유한 영사기에 돌려보고, 35미리의 경우는 영사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시사했다. 편집에 철두철미했던 신상옥,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조긍하와 이강천 감독 같은 이들은 김영희가 재촬영을 요구해도 용인해 줄 정도로, 믿고 맡기는 편집인으로 그녀를 택했다. 이 시기 편집의 장면 전환은 커트(cut)-커트(cut)로 연결되어 급박하게 전환되는 편집 스타일보다는 부드럽게 장면이 전환되는 방식이 더 선호되었다. 그래서 페이드인(fade in)-페이드아웃(fade out)과 오버랩(over lap)을 사용하여 ‘스무쓰(smooth)’한 장면 전환 능력이 편집자에게 있어 가장 요구되었다. [사진 16] 조긍하 감독 [사진 17] 이강천 감독 “편집을 하면서 느끼는 점인데요. 왜 감독들이 「인서트·카트」를 쓸 데에다 안 쓰느냐 하는 것을 역설하고 싶어요.” 2 인서트(insert)는 영화에서 극의 흐름을 전환하고 또 잠시 극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한 휴지기를 주기 위한 장치로 연출자는 이를 종종 은유적인 방식으로 사용해 자신의 미학을 드러내기도 한다. ‘스무쓰(smooth)’한 편집이 대세였던 당시 김영희는 감독들에게 인서트 장면의 삽입을 제안하곤 했다. ‘화면이 부드럽고 좋기’로 입소문을 타자 인서트 장면이 필요한 감독들은 종종, 촬영 시에 충분히 인서트를 따놓지 못해서 난감할 때 그녀를 찾았다. 특히 기록영화에서 길게 찍어 두었던 설경, 바닷가 모래사장 경치, 석양의 풍경 같은 것은 하나 둘 모아두었다가 연출자가 특정 장면을 요구하거나 극의 흐름을 조절하기 위해 편집기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인서트 커트가 삽입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단풍이 짙은 명산, 비 오는 서울 거리 같은 커트는 촬영기사들의 손에서 만들어져 항상 편집실 한쪽에 걸려있었다. 우리가 쉽게 넘겨버렸던 혹은 감독의 미학으로 불렸던 소소한 그 인서트는 어쩌면 편집기사의 손에서 만들어졌던 장면이었을지 모른다. 충무로의 걸출한 그녀들, 삼바가라쓰(さんば-がらす) [사진 18, 19] 1984년 충무로의 '삼바가라쓰' 김영희와 박남옥(상), 김영희와 홍은원(하)의 사진 김영희: 인제 남옥이랑 웬만큼 알게 되니까요. 그리고 역시 감독, 여감독이라놔서 그런지 서로 신경이…… 나도 응, 홍은원 씨 보고 싶고, 또 홍은원 씨는 또 김영희라는 사람을 보고 싶고. 이러니까 저 서이가 인저 만나노니까 ‘삼바가라쓰’ 3 라고 서이서 아주 그냥 정이 들어가지고, 면담자: ‘삼총사’ 이런 말이에요? 김영희: 예, 삼…… 여자니까 삼총사 이런 말은 못하고, 우리는 일본말로 ‘삼바가라쓰’. <중략> 서이서 잘 돌아다녔었어요, 만나서. 그때 친해진 게, 여자니까 서로 기냥 말도 못 하게 친해지드라고요. <중략> 그니까 지가 바쁠 때는 “야, 홍 감독. 자고 가라, 우리 집에 가서 자자.” 그러면 “느이 영감 있는데……” “영감, 저 방에 가라 그러고 나하고 자면 되잖아.” 이러면서 지냈었어요, 서로가. 우리 집에 오면 또 영감님하고 얘기도 잘하고요, 말이 통하니까. 그리고 응, 오면은 같이 밥도 먹고, 드뤄 눠 자고, 차도 먹고, 이러고 참. 남옥이는 남옥이 대로 바뻤지만은, <중략> 서이 만나노면 아주 그냥, 남옥이가 그냥 사내 같이 굴었어요. (웃음) <중략> 그런 정도로 우리는 그렇게 지냈지, 뭐 감독, 편집기사 이런 정도로서, 따악 한계를 지어놓고 일을 한 게 아니었었어요. 4 김영희의 구술문을 보면, 남성의 활동이 단연 독보적인 영화 제작현장에서 여성영화인들 간의 공적 사적 교류와 우정에 대해서 전면화하는 구술들이 있다. 이 부분이야 말로 여성영화인들의 구술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부분인데, 가정을 가진 동시에 같은 직종의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우정과 일을 어떻게 함께 병행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미망인>(1955)을 만든 박남옥 감독과 <여판사>를 만든 홍은원 감독은 충무로의 ‘삼바가라스’였다. 홍은원의 작품 <홀어머니>(1964), <오해가 남긴 것>(1966)은 친구 김영희의 손을 거친 것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 배우를 제외한 여성 스태프들만의 모임이었던 영희회는 남성적인 영화 제작현장에서 여성 스태프의 권익을 위해 모였다. 김영희의 구술을 통해, 역설적으로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남성적인 작업 환경 속에서 비교적 보조적인 역할의 직업군에 종사하는 직업 생명이 짧은 여성 스태프들은 모임을 지속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모임은 아쉽게도, 곧 와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20, 21] 홍은원의 <홀어머니>(1964)와 <오해가 남긴 것>(1966)의 포스터. 두 작품 모두 김영희가 편집을 담당하였다. 격변의 시기 국가기관과 영화, 그 속에서 활약한 영화인 김영희 공식적으로는 이봉래의 <역전파출소>와 <장미의 성>(1969)를 마지막으로, 1970년 즈음 그녀 나이 마흔 아홉에 편집실을 접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27년을 재봉틀 같은 편집기 앞에 앉아 바느질 하듯 밤낮없이 일을 했고, 이 중 15년은 충무로에서 극영화를 자르고 붙였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인화와 현상을 익혔고, 워낙 ‘기계에 관심이 많아’ 영사 일도 배우고, 결국은 양주남의 편집조수를 하면서 어깨너머로 편집을 배웠다. 일본인 스크립터에게서 일본에서는 어떻게 편집을 하는지 들어보고, 외국영화를 보면서 편집하는 방법들을 공부했다. 김영희의 영화 인생은 역경의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국가 기관과 관련해 그 줄기를 연명해왔던 한국영화사 제작 인력들의 굴곡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제치하의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근무하던 상황과 광복 후에는 다시 미국의 영향 하에 군정청 공보부 영화과에서 일하던 주변 상황, 이후 미공보원으로 다시 재편⋅흡수되었던 제작 인력들의 활동 경로가 그녀의 행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녀는 연출자가 요구하지 않아도 인물의 행동 시간을 스스로 계산해서 맞추고, 조심스럽게 편집 순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보다 안정적이고 ‘스무쓰’한 극의 흐름을 위해서 인서트 필름을 요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모두는 그러한 것이 영화의 원활한 흐름과 조화를 최우선 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편집자의 능력으로 꼽았다. [사진 22, 23, 24] 김영희가 충무로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편집한 이봉래 감독의 작품 <역전파출소>(1969)와 <장미의 성>(1969) 숨겨진 여성영화인의 역사, 한국 최초의 여성 편집기사 김영희 편집기사 마가렛 부스(Margaret Booth, 1898~2002)는 1915년 데이비드 그리피스의 네가편집자로 함께 일하면서 <동도Way Down East>(1920)의 명장면을 만들어냈고, 1919년에는 MGM으로 가 일하면서 할리우드의 편집 규칙을 만들어갔다. 5 제인 게인즈가 언급했던 것처럼 무성영화기를 비롯,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여성 영화 인력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들은 배우로, 감독으로, 제작사 사장으로, 편집자로 오늘날 못지않게 넓은 분야를 점령했었다. 6 숨겨진 영화사를 발굴해낸, 지난 100년 간의 여성 편집기사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편집 : 여성 편집기사(Edited By: Women Film Editors)>(Su Friedrich, 75min.)에서 던지는 질문을 살펴보자.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빅터 플레밍, 1939)를 편집했고, <알렉산더 네브스키([Alexander Nevsky]>(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1938)를 편집했고, <400번의 구타(The 400 Blows, 1959)>(프랑수아 트뤼포, 1959)를 편집했고, 아카데미 편집상을 가장 많이 수상했고, 그저 ‘자르는 사람(cutter)’을 ‘편집 기사(film editor)’라는 전문 분야 종사자로 명칭을 바꾼 사람.” 7 그렇다, 모두 여성 편집 기사였다. 한국영화 100년, 우리 영화사에서는 김영희가 그 처음이었다. 신필름 황금기, 신상옥의 많은 작품이 김영희의 손을 거쳤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필자가 면담자로 참여한 구술, 「김영희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3』,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한국영상자료원, 2007과 「원로 여성영화인의 삶을 듣는다는 것의 의미: 편집기사 김영희와 이경자의 구술채록을 중심으로」, 『영상예술연구』 vol. 18, 2011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김영희의 구술과 달리, KMDb에는 <춘향전>의 편집은 이성파로, <구원의 정화> 편집은 홍일명으로 되어있다. 2) 「예술의 주변 8 : 영화편집의 마무리 김영희 영사 필름 다루어 20년」, 『경향신문』, 1962년 3월 20일자 4면. 3) 삼바가라스(さんば-がらす), 어떤 분야에 특출한 세 사람을 말한다. 4) 심혜경·김영희, 『2007년도 원로영화인 구출채록 자료집 : 김영희 편』, 한국영상자료원, 125∼127쪽. 5) Kristen Hatch, "Cutting Women: Margaret Booth and Hollywood’s Pioneering Female Film Editors." In Jane Gaines, Radha Vatsal, and Monica Dall’Asta, eds. Women Film Pioneers Project. New York, NY: Columbia University Libraries, 2013. https://wfpp.columbia.edu/essay/cutting-women/ 6) Girish Shambu, “Hidden Histories: The Story of Women Film Editors”, https://www.criterion.com/current/posts/6582-hidden-histories-the-story-of-women-film-editors 7) 이는 프린스턴 대학 시각예술 교수이자 실험영화 작가인 수 프레드리히(Su Friedrich)가 만든 서베이 다큐멘터리로, 206명의 여성 편집기사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프로젝트이다. 비메오(https://vimeo.com/310219288)를 통해 볼 수 있다. http://womenfilmeditors.princeton.edu 참고.
이강천 의 < 피아골 >(1955)은 반공법 위반으로 상영이 금지되었던 최초의 영화다. 더불어 반공법을 위반한 최초의 반공영화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형용모순의 수사는 <피아골>을 설명하는 데 있어 턱없이 모자란 표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흥미로운 면모를 살피는 데 있어서는 얼마간 유효해 보인다. 당시 이 영화는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상영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논란이 되었는데, 주인공 애란( 노경희 )이 지리산을 내려와 공허한 몸짓으로 백사장을 걸을 때, 그녀가 남한사회로 귀순할지 피아골로 다시 오를지 목적이 불분명해 보인다는 이유서였다. 제작자는 이후 영화 마지막에 태극기 장면을 삽입했고, 개봉된 영화에선 지친 애란의 모습 위로 휘날리는 태극기가 디졸브 되며 이야기가 끝난다. 위풍당당하게 휘날리는 태극기가 당대에는 중요한 표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마지막 태극기만큼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 없다. 내막을 모른 채 마지막 장면을 맞더라도, 이물감이 강하게 느껴져 억지로 끌어온 장면이라는 걸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피아골>은 반공영화이기 이전에, 휴전 후 지리산 피아골에 잔류한 소수 빨치산을 세밀하게 그린 탁월한 인물화다. 여는 반공영화와는 달리 이 영화엔 남한군이나 경찰이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관념적인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서사를 할애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영화가 관심을 두는 건 피아골에 갇힌 빨치산의 생태계와 죽음에 가까워 가는 인물들의 절박한 생존기, 무너져 가는 이념 속에서 얼룩져 가는 인물들의 초상에 있다. 멀리서 날아오는 총탄과 포탄의 피해로 아가리( 이예춘 ) 부대의 대원들은 쓰러져 가지만, 그들에게 더 큰 공포는 지리산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일이다. 나약한 인물들을 지탱하고 있던 이데올로기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점차 자리를 잃어가고, 각자의 신념은 견지한 당성의 강도와는 상관없이 무너져 가며, 인물들을 저마다의 회의와 모순과 광기 속으로 빠져든다. 이를테면 대장 아가리는 부대의 규율을 어긴 자들을 잔혹하게 처치하면서도 스스로는 비밀스럽게 규율을 어기며 자기모순에 빠져있고, 부대원들이 보급투쟁을 하러 부락에 내려간 사이 고요한 사찰에 홀로 남아 과오에 대한 죄의식으로 분열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의 비서인 애란 역시 당성이 강한 인물로 그들이 반동분자로 명명한 이들에게 잔혹하긴 마찬가지지만, 그녀를 지지하고 있는 건 신념과 함께 빨치산의 규율을 지킴으로써 돌아갈 고향도 없는 자신의 운명을 피아골에 결부시키는 일이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부대의 간부이지만, 영화 시작부터 혁명투쟁에 회의하고 있는 철수( 김진규 )는 부대의 잔혹한 행위들을 은밀하게 거부하면서도 무력하기 그지없는 표정들로 얼룩져 가는 인물이다. 외에도 부대원들은 서로 짝을 이뤘다 배신하기를 거듭하며 불안한 공동체의 마지막 모습을 아로새긴다. 사실 그들의 초상 속에 반공메시지가 스며들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초상 하나하나를 구체적으로 그리며 이데올로기의 작동 시스템에 잠식당한 인물들의 항변에 이처럼 귀 기울이는 작품도 영화사에 흔치 않았다는 점을 부인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피아골>은 탁월한 인물화기도 하지만, 심리의 풍경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간혹 넋을 잃고 바라보게 만드는 유려한 움직임과 리듬으로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감정을 세밀히 묘사한다. 또한 지리산의 견고한 바위와 유약한 풀잎들 사이, 그리고 사물들이 드리우는 그림자 속에 인물들을 배치시키며 그들의 복잡한 심리를 형상하고 있다. 이를테면 영화는 철수와 마음을 나누는 소주( 김영희 )가 지대 본부로 소환되기 전까지 철수와 소주 그리고 철수를 연모하는 애란 사이에 흐르는 감정을 세심히 어루만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세 인물 사이의 감정적 기류를 아리고도 아름답게 표현한 장면이 있다. 소주가 대장 아가리에게 겁탈 당한 후 이어지는 장면들에서다. 숙소 안의 상황을 모르는 철수는 대장에게 보고할 사항이 있어 아가리의 숙소 앞에서 잠시 기다리고 철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던 애란은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대장의 명령을 받은 철수는 먼저 자리를 뜨고, 숙소 앞에 남아있던 애란은 시간차를 두고 나오는 대장과 소주의 매무새를 보고선 소주가 당한 일을 얼핏 눈치 챈다. 그러나 그녀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않는다. 다만 숙소의 모퉁이를 지나가는 소주를 애란이 조용히 따르고 카메라 역시 둘의 움직임을 유유히 따를 뿐이다. 철수와 소주와 애란이 차례로 숙소 모퉁이를 지나갈 때 세 인물 사이에 흐르는 애정과 질투와 환멸과 연민의 감정은 그런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표정과 고요한 움직임 사이에서 아릿하게 미동한다. 그리고 소주가 떠난 밤, 부락으로 보급투쟁을 나서는 대원들의 모습은 나뭇잎들이 드리운 그림자로 인해 얼룩지거나 건물들이 드리운 짙은 그림자 속에 묻히곤 한다. 출구 없는 암담한 운명이 그들을 자꾸만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영화는 그들의 불안과 회의와 광기의 현장을 무섭도록 고요하게 비춘다. 이 영화를 반공영화로 보아야 한다면, 이들의 잔혹함과 광기를 치밀하게 그려서가 아니라, 이들의 침묵 속에서 저 홀로 청명한 소리를 내고 있는 계곡의 물소리가 더 깊이 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대립된 이념에 아우성치지 않고 침묵 속에 새어나오는 신음을 첨예하게 그린 <피아골>은 어느 한 범주에 몰아넣기에는 품이 넓은 영화다. >> 피아골 VOD 보러가기 <<
홍은원 (洪恩遠)은 영화계에서 그 본명과 예명 홍설아(洪雪娥)·홍진아(洪眞娥)만큼이나 여러 일에 종사했다. 그는 스크립터로 출발해 조감독을 거쳐 시나리오작가, 작사가, 감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능을 보인 충무로의 정통파였다. 두 예명에 예쁠 아(娥)자를 넣을 만큼 그는 눈처럼 아름답고 참되게 살려고 했던 것일까. 실제로 스튜디오에선 언니로 통할 만큼 영화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1950년대 중후반 그는 전창근 , 유두연 감독과 허백년 평론가 등 영화인들이 즐겨 찾던 명동 나일구 다방에 자주 나타났다. 명동에는 이 다방과 함께 김승호 , 김동원 , 장민호 와 같은 배우들이 드나든 동방살롱 등이 있었다.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에서 명동 방향 골목에 있던 예술인들의 찻집이었다. 충무로에 스타다방, 청맥다방과 같은 영화인들의 휴식 공간이 미처 생기기 전이었다. 아침에는 으레 날계란을 띄운 모닝커피가 나왔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이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창근 감독 일행과 한자리에 있던 한 여성이 담소 중에 크게 웃었다. 누군가가 야한 농담을 한 모양이었다. 궁금해서 돌아보니 바로 홍은원 씨였다. 작고 가냘픈 몸매였지만 베레모를 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정작 그와 알고 지내게 된 것은 훨씬 뒤였다. 자주 마주치다 보니 은연중에 인사를 하게 된 것이다. 직접 만나고 보니 활달하고 정이 깊은 분이었다. 그의 두 번째 감독 작품 < 홀어머니 > (1964)가 개봉된 시기였다. <오해가 남긴 것> 촬영현장 홍은원은 명문가 출신이다. 구한말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낸 홍철주(洪澈周)의 손녀로, 1922년 9월 24일 은행가인 홍우만(洪佑晩)의 2남2녀 중 둘째 딸로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교육자인 어머니 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서울 재동국민학교를 거쳐 경기고녀(경기고등여학교, 現 경기여고)에 입학한 뒤에는 학과보다 오히려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광복 전 경기고녀를 졸업했으나 집안 형편이 나빠지는 바람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서 들어가게 된 것이 마루젠(丸善)주식회사였다. 다행히 서적부 소속이라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1년 3개월을 보내고 아버지를 따라 만주 신경(新京)의 반관반민의 직장으로 옮겼다. 1940년 초여름이었다. 그는 새 직장에서 합창단원으로 뽑히고 다시 1년 만에 신경음악단의 홍일점 가수가 된다. 그때 받은 월급이 120원, 웬만한 봉급자의 갑절이 넘는 고액이었다. 조선영화사에서 음악을 담당한 친지를 졸라 최인규 감독을 소개받은 것은 여름휴가를 얻고 경성(서울)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최 감독은 그에게 < 태양의 아이들 >이라는 시나리오를 건네주며 하고 싶은 역할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연기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8·15 광복을 맞아 서울에 돌아온 것은 1946년 11월 초순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박계주 작가 일행을 따라 돈암동 최인규 감독 집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는 < 자유만세 >의 주인공인 전창근, 황려희 와 감독을 꿈꾸는 박남 옥도 와 있었다. 최 감독은 그에게 다음 작품인 < 죄 없는 죄인 >(1947)의 스크립터 일을 제의했다. 이때 그가 촬영 현장에서 터득한 것이 영화제작에는 낮과 밤이 따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홍은원은 이 일이 끝나자 다섯 살 아래인 극작가 이용찬과 결혼했다. 그러나 양가 부모의 반대 속에 이루어진 부부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딸(이희재 숙명여대 교수, 박물관장 역임)을 낳고 4년 8개월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여판사> 촬영현장 1953년 초가을 그는 전쟁이 할퀴고 간 서울의 한 모퉁이에서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촬영기사 한형모 였다. 그는 결혼에 실패한 후배를 위로하며 영화로 보람을 찾으라고 권유했다. 이에 힘입어 조정호 감독의 < 여군 >에 조감독 겸 스크립터로 들어가 현장 감각을 익히고, 잇따라 전창근 감독의 < 불사조의 언덕 >(1955), < 단종애사 >(1956)와 이강천 감독의 < 백치 아다다 >(1956), < 사랑 >(1957)의 스크립터 겸 조감독 일을 했다. 특히 “초여름 산들바람 고운 볼에 스칠 때/ 검은 머리 큰 비녀에 다홍치마 어여뻐라”로 시작되는 그의 작사곡 ‘백치 아다다’(김동진 작곡)는 여주인공인 가수 나애심이 불러 크게 히트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홍은원은 그사이 시나리오에도 손을 댔다. 신경균 감독의 < 유정무정 >(1959)과 유두연 감독의 < 젊은 설계도 >(1960) 등이 대표적인 예다. 영화계에 들어선 지 11년 만이다. 이후 시나리오작가 유두연 의 콘티뉴이티 담당 수석 조감독으로 들어가 그의 감독 데뷔작 < 조춘(早春) >(1959)과 < 사랑의 십자가 >(1959)를 완성시키고 윤봉춘 감독의 < 여인천하 >(1962), < 애정삼백년 >(1962) 등에 참여하며 시대물을 익혔다. 그에게 메가폰을 잡을 기회가 온 것은 이 무렵이다. 1962년 4월 <사랑의 십자가>를 찍은 장환(張煥) 기사가 원고 한 뭉치를 들고 찾아온 것이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어느 여판사의 사건에서 힌트를 얻은 < 여판사 >(1962, 명보극장 개봉)였다. 뜻밖에 화폐개혁이 단행되는 악조건 속에서 어렵게 완성한 문정숙 주연의 <여판사>는 “여감독다운 섬세한 플롯의 전개에 명확한 커팅은 몇 사람의 중견감독을 조감독으로서 오히려 길러낸 숨은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새영화 ‘여판사’, 「경향신문」)는 호평을 받았다. 이어 조미령 주연의 < 홀어머니 > (1964, 아세아극장)와 김지미 주연의 < 오해가 남긴 것 >(1965)을 만들었다. 그런데 세 작품 이후 그에게 좀처럼 연출의 기회가 오지 않았다. “홍은원은 환갑이 지나도 다람쥐처럼 영화계를 누비고 다닐 것”이라던 유두연의 예상과 달리 그는 스스로 표현했듯 “환갑은커녕 50세도 못 돼서”(여류감독의 비애, 「세대」 1976년 1월호) 영화 현장에서 물러나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만성 폐쇄성 폐질환을 앓다가 1999년 1월 5일 세브란스병원에서 76세의 생애를 마쳤다. 37년 전인 1981년 늦은 봄, 첫 여감독과 함께 셋이 커피를 마시며 추억의 영화를 얘기하던 서울 서대문 근처의 다방 정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김영희 편집기사와 홍은원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