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윤 통합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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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 플라토닉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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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 플라토닉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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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 플라토닉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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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녀 김지윤 시낭송 가슴뭉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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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김지윤) 촛불문화재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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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IEANIFEST]벽돌깨기 박성웅 , 김혜림, 김지윤, 조은해, 최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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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아시아영화제, 한국영화 특별 섹션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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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안티 ‘로버트 알트만’ 영화 보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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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품행제로’ 보러 학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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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칼럼]베킷이라는 이름
베킷과 베케트, 서로 다르게 번역되었지만 두 이름의 철자는 Beckett로 동일하다. 베킷은 누군가의 이름, 베케트는 누군가의 성이다. 성의 자리에 놓이든 이름의 자리에 놓이든 사람들은 그를 베킷 혹은 베케트라 부른다. 영화 <베킷>의 주인공은 베킷이다. 문득 베킷(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풀 네임이 궁금해졌다. 베킷이라는 이름과 어울릴만한 성은 아무래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연인 에이프릴(알리시아 비칸데르)도, 낯선 미국 대사관 직원도 그를 베킷이라 부른다. 그의 이름은 퍼스트 네임과 라스트 네임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닉네임처럼 베킷이라는 두 음절로만 이뤄진 것 같다. Beckett은 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이름이기도 하다. 사뮈엘 베케트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줄여 부를 때는 베케트라고 지칭한다. 베케트가 영미권 학계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체어>(2021)를 보면 미루어 알 수 있다. <X 파일>의 배우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자신을 연기하며 특별 출연한 에피소드에서 베케트의 이름은 예기치 않게 등장한다. 유명 배우인 듀코브니는 교수직를 얻기 위해 오래전에 쓰다만 박사논문을 유물처럼 발굴하는데 그것이 바로 베케트에 관한 논문이다. 이는 예일대 영문학과 박사학위를 밟던 듀코브니의 실제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업데이트되지 않은 교수들에게 관대한 제스처를 보이던 학과장 김지윤(산드라 오)은 듀코브니와 그의 화석과도 같은 관심사에 대해서만은 유독 매몰차다. 초서를 향한 조앤(홀랜드 테일러)의 오랜 애정이 ‘힙한’ 것으로 재발견되었던 것과는 달리 베케트는 듀코브니와 함께 유행이 지난 이름이 되어 조용히 퇴장한다. <베킷>은 마치 고대 유적지 근처를 탐사하는 듯한 영화다. 두 연인이 누운 침대 곁에 놓인 메모에는 ‘신탁은 무엇이었는가’라는 도무지 그 맥락을 짐작할 수 없는 글이 적혀 있다. 도망자 베킷이 몸을 숨기거나 달아나는 장면에서 그를 든든히 지켜주던 바위산은 현지 로케이션이 비현실적인 무대 혹은 하나의 캐릭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양봉하는 부부와 사냥꾼 등 베킷이 만난 마을 사람들은 어딘가 고전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것이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라고 상상하게 한다. 영화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배경으로 장소를 캐스팅한 것이 아니라 장소를 먼저 캐스팅한 뒤에 그 공간을 잘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 누군가가 끊임없이 걸어서 이동하는 이야기를 만든 것 같다. 베킷은 추격전 도중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공격당하는데, 이때 주로 공격당하는 부위는 손과 팔이다. 끊임없이 도망가야 하는 그의 운명을 알려주듯 어떤 상황에서도 다리만은 별다른 상처 없이 멀쩡하게 남겨진다. 주로 손 부위에 상처가 집중된 상황은 그에게서 운전대를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손의 한계로 인해 그는 탈 것으로 이동하는 대신 두 발로 걷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누군가가 운전하는 차 트렁크에 숨은 채 이동해야 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딱 한 번 오토바이를 빼앗으려 하지만, 매몰차게 밀린다. (영화에서 누군가의 탈 것을 빼앗는 것쯤은 절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카체이싱 혹은 공중전 같은 속도에 바탕을 둔 추격전이 대세인 상황에서 두 다리로, 그것도 때론 손이 포박된 채 어설프게 뛰는 도망자를 보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베킷>이 넷플릭스에 공개된 후 그리 긍정적인 반응을 얻지 못한 데는 추격전이라는 장르적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탓이 크다. 여행 중 불미스러운 사고로 연인을 잃은 뒤 이유도 모른 채 쫓기는 신세가 된 상황은 추격전의 전형적인 세팅이다. 그러나 이후에 벌어지는 이야기는 관객이 기대하는 바로부터 멀리 도망친다. 어쩌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는 것이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아니었을까 싶다. 안락한 오락 영화를 바랐을 관객에게 영화는 어딘가 애매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넷플릭스 영화라는 모종의 바운더리 안에서 그렇고 그런 영화가 되는 대신 이상한 실패작으로 남을 수 있었다. <베킷>은 추격전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장르 영화는 아닌 조금 이상한 영화다. 이상함은 첫 장면부터 감지된다. 영화 초반 드러나는 베킷과 그의 연인 에이프릴의 여행은 어딘가 스산하다. 이 드넓은 여행지에 마치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다. 물론 주변에는 다른 여행객이 있다. 그러나 타인과의 접촉은 일어나지 않는다. 연인은 여행객들을 몰래 관찰하면서 그들의 이름과 관계를 추측하는 둘만의 게임을 벌인다. 나는 필시 여행객과 접촉해 추측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뒤따를 것이라 예상했다. 아니었다. 두 사람은 사진을 찍은 뒤 그곳을 빠져나온다. (후에 혼자 남은 베킷이 사람들과 접촉하는 모습은 초반의 에이프릴과 함께 한 게임 장면을 연상시킨다. 베킷은 이제 어떤 사람이 믿을만한지를 혼자서 끊임없이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식당에서도 손님은 둘 뿐이다. 가게 주인이 스치듯 카메라에 포착되긴 하지만 그와 대화하거나 접촉하는 장면은 배제된다. 식당 TV에는 훗날 베킷이 연루될 유력 정치인의 조카 실종 사건과 관련한 뉴스가 보도된다. 이것은 관객을 위한 복선처럼 보이지만, 실은 베킷이 사건에 연루되는 과정에 운명과도 같은 힘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베킷은 기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자신을 좇던 그리스 경찰에게 발각된다. 이때 양손을 앞으로 모은 채 끈으로 묶인 상태가 된 베킷은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뒤에도 얼마간은 그 상태로 다닌다. 그의 손은 기도하는 손 모양을 연상시킨다. 그의 여정이 자신의 과오로 죽은 에이프릴을 향한 일종의 길고 긴 고행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동작이다. 동시에 기도하는 손은 아테네에서 대규모 집회가 일어나는 장소를 가리킨다. 이처럼 개인의 슬픔과 애도는 정치적인 상황으로 곧장 연결된다. 베킷이 사람들에게 떠밀려 데모하는 군중과 합류하는 장면은 <모던 타임즈>(1936)에서 찰리 채플린이 얼떨결에 시위대의 선봉에 서는 장면과 겹친다. 찰리의 우연한 시위는 그가 파업과 무관하지 않은 인물이기에 절묘하다. 베킷의 여정 역시 블랙 코미디로 만들어졌다면 지금보다 납득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베킷은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살아남았고 결국에는 정해진 운명처럼 유력 정치인의 납치된 조카를 구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운명은 우연의 다른 말이다. <베킷>은 지나치게 우연적이며, 다른 말로는 지나치게 운명적이다. 다시 베킷이라는 이름을 생각해본다. 퍼스트 네임도, 라스트 네임도, 그렇다고 애칭도 아닌 하나의 이름으로 온전한 것은 신의 이름이다. 제우스, 헤라, 아테네, 헤르메스... 이 목록에 베킷을 넣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베킷인가.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는 그 자체로 오지 않는 신을 지칭한다. 고도를 기다리던 두 주인공은 고고와 디디라는 다른 이름이 있는데, 두 이름을 합치면 곧 신(god)이 된다. 베킷 혹은 베케트가 신의 이름이 된다면 그 이름의 의미는 아마도 ‘어떻게든 버티는 자’일 것이다.
[테마연재]<너는 여기에 없었다> 사라지기 위한, 살아가기 위한 카운트다운
영원히 잊고 싶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참혹한 순간들이 있다.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선명한 사진으로 박재되는 그 순간들은 불현 듯 지금의 일상을 덮쳐오기도 한다. 묻어두었던 과거가 밀려오는 그 감각. 현재의 삶을 꺾어버리고 무력하게 만드는 그것에게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을까. 방법이 있긴 할까. 조(호아킨 피닉스)가 생각해낸 방법은 자신의 죽음이다. 사람들의 의뢰를 받아 납치, 감금 등의 사건을 처리하는 해결사인 그는 생생히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사건을 해결하고 일상을 보내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과거의 순간들은 조의 생각을 갉아먹는다. 소리치는 아빠와 식탁 밑에 숨은 엄마, 그런 엄마의 손짓, 아빠의 발, 그가 쥔 해머. 혹은 파병 시절 구하지 못했던 피해자 여성들, 그들이 갇혔던 컨테이너의 손잡이, 손잡이를 열자 보였던 시체 더미. 손전등 아래 보이는 시체의 얼굴. 눈. 입. 벌어진 입. 조는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다가도, 길을 걷다 행인의 얼굴을 마주하다가도, 편집되어 떠오르는 과거의 순간에 괴로워한다. 삶이 계속되는 한 영원할 것 같은 그 괴로움. 조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죽음을 꿈꾼다. 마치 여기에 없었던 것처럼 말끔히 사라지는 죽음을. 이렇듯 사라지고 싶은 조의 심리와 그런 그를 트라우마에 가두는 조의 현실은 그가 길을 걷는 장면들을 통해 드러난다. 영화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길을 걷는 조를 스크린에 배치한다. 한 구석과 정중앙.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조는 원래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사라지기를 반복하는데, 그때마다 영화는 그가 떠나기 직전 혹은 직후의 공간을 바라본다. 이 때문에 조는 8차선 도로 너머에서 언뜻 보이거나, 벌판을 가로질러 숲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조금 스친다. 죽음으로서 현실에서 사라지고 싶은 조의 심리는 스크린에서 정말로 사라지는 듯한 이미지를 통해 시각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조가 손쉽게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카메라는 그를 끈질기게 프레임의 정중앙에 배치하는데, 이로 인해 길을 걷는 조는 한참을 걸어도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갇혀있는 듯 보인다. 예컨대 영화 초반부, 현관문이 아닌 골목길로 난 쪽문을 통해 집을 나서는 조의 모습에서 이러한 구도가 여실히 나타난다. 카메라는 건너편 도로에서 그를 마주 봄으로써, 골목길을 한참 걸어 나오고 있는 조가 프레임 상에서는 여전히 한 자리에 머물도록 만든다. 결국 조는 가정폭력의 기억이 서린 집의 그늘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로 비춰진다. 이러한 서사의 시각적 구현에서 전작 <케빈의 대하여>(2011)와 <가스맨>(1998)을 통해 은유적 이미지를 정적이면서도 정확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평가받은 린 램지 감독의 시선이 느껴진다. 한편, 괴로운 과거에 갇힌 조는 괴로운 현실에 놓인 니나(예카테리나 삼소노프)를 만난다. 시의원의 딸인 니나는 권력 세력이 연루된 성폭력 조직에 납치되어 끔찍한 성폭행 범죄에 노출되고, 조는 시의원으로부터 니나를 구해달라는 의뢰를 받아 범죄 현장에서 그녀를 구출한다. 그리고 잠시 뒤, 니나를 조수석에 태워 돌아가던 차 안. 조는 문득 니나를 바라본다. 그녀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숫자를 거꾸로 카운트다운하고 있다. 마치 어린 시절의 조와 오프닝 시퀀스에서의 조가 그러했듯이. 이렇듯 카운트다운을 하는 니나의 행동은 니나가 조와 닮아 있다는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지점은 카운트다운을 하는 동안 두 사람이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의 첫 번째 카운트다운이 등장하는 영화의 첫 장면은 어두운 화면에서 나지막히 카운트다운을 하는 조의 목소리 직후 비닐을 뒤집어 쓴 채 질식사하기 직전인 그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이 때문에 조의 카운트다운 끝에는 죽음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남긴다. 반면 니나는 자살시도는커녕 일말의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얼굴로 카운트다운을 하며 영화에 등장한다. 그 숫자의 끝에 니나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쉽게 유추할 수 없다. 무엇을 위해 카운트다운 하는 것인지 그녀에게 직접 물어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니나는 또 다시 권력자에게 납치당하고 만다. 니나를 잃은 이후 조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주변인들의 죽음이다. 조는 분주하게 움직여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알 만한 이들을 찾아가지만,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현장에 뒤늦게 도착할 뿐이다. 무엇보다도 그를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다. 영화의 초반부부터, 조가 자살시도를 할 때마다 그를 찾고 부르며 죽음을 중단시키던 어머니는 손 쓸 새도 없이 권력세력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제 그에게는 죽음을 저지할 어머니의 부름조차 남지 않게 된 것이다. 결국 조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래도록 꿈꾸던 죽음을 택한다. 그의 카운트다운이 끝나면, 삶 또한 끝날 것이다. 40, 39, 38, 저 멀리 엄마의 시체가 수장되는 것이 보인다. 37, 36, 주머니에 한 가득 돌을 넣은 조 또한 곧 저 깊은 강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33, 32. 기다리던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을 때, 조는 문득 카운트다운을 하던 니나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그때 조는 왜 니나의 카운트다운을 떠올렸을까. 29, 28, 환각처럼, 니나가 물속에 가라앉는 것이 보인다. 니나의 카운트다운은 죽음을 향했던 것일까, 혹은 삶을 향했던 것일까. 20, 19. 조는 결국 주머니의 돌을 빼내고 수면으로, 햇빛으로 올라간다. 환상처럼 보이던 니나 또한 그를 따라 세상으로 나간다. 그렇게 조는 오랫동안 꿈꾸던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다. 죽음으로 향하지 않는다. 그는 다시 길을 나서며, 니나를 구하는 것을 선택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니나는 조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았다. 자신에게 향할 수 있었던 칼을 다른 누군가에게 겨누어 괴로움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해낸 것이다. 심지어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 조를 향해 무던하게 “이제 괜찮아요.”라는 말도 건넨다. 이는 조가 니나를 구해내는 동명의 원작소설과 다른 결말이다. 이에 대해 린 램지 감독은 여자 아이 캐릭터를 수동적으로 그려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며, 서사 내에서의 역할이 많아진 만큼 캐릭터의 이름 또한 원작과 다른 니나로 바꿨다고 밝힌 바 있다.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내게 만들었다는 그 설명처럼, 니나는 죽음을 향하지 않은 카운트다운을 한 듯하다. 그리고 그 카운트다운은 이제 조와 함께한다. 두 사람은 괴로움뿐인 현실의 끝에서 그렇게 만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혼자서 살아내야만 했던 두 사람은 이제 어떤 현실을 살아가게 될까. 앞으로 살아갈 현실은 과연 지금까지의 삶보다 더 나은 것일까. 그리고 그 속에서 그들이 향하는 카운트다운의 끝에는 무엇이 놓여 있을까. 두 사람은 그 답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금 이 순간 죽음을 택하지 않고 길을 나설 것이라는 점이다. 니나와 마주앉은 레스토랑의 한 구석. 니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조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완벽한 죽음을 생각한다. 발랄한 음악이 흐르는 이곳에서 당장 죽음을 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 죽음을 택했다고 느낀다. 하지만 죽음은 벌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돌아온 니나는 조를 조용히 깨우며 말한다. 나가요, 아름다운 날이에요. 아름다운 날이구나. 니나의 말을 따라 읊조리던 조는 무슨 생각을 떠올렸을까. 영화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와 니나가 사라진 이후에 남겨진 빈자리를 포착한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달리 그들은 이곳에 있었던 흔적을 남겼다. 흔적 없이 그림자처럼 사라지던 두 사람은 이제 함께 길을 나설 것이다. 부디 그 삶에서는 흔적을 남기며 살아도 괜찮을 만큼 괴롭지 않기를, 그들이 있었던 빈 테이블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기원한다. 그들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