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김치가 싫어
- 감독
- 김하은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김연교, 로즈 키즈긴, 진혜정
사이버 세상에 대한 몽상 일주일 내내 밤을 샜다. 조너선 크레리의 [24/7 잠의 종말]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책이 없었다. 어차피 읽을 시간도 없었다. 언제부턴가 집에서 책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책장 구석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포털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될 정도다. 처음에는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에게 책을 빌려준 게 언제였더라? 정지돈에게 프랭크 커머드의 절판된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을 빌려준 건 기억나는데. [유령과 파수꾼들](2018) 출간 기념으로 유운성 님과 함께 북토크를 하느라 그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아닐 수도 있고. 분명한 건 아직 책을 돌려받지 못했다는 건데, 괜찮아요 지돈 씨… 그런데 정말 그 행사는 뭐였을까? 나는 구글에 ‘유운성 정지돈 북토크’라고 쳐보았지만 내가 찾는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이라고 할까? 에이아이는 내게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사람들’과 ‘Kmdb 정지돈’이라는 관련 검색어를 제시해주었는데,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유운성 님을 뵈었을 때 조너선 크레리 책을 번역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게 떠올랐고,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하는 생각도 든다. 신이 있다고 해도 아마 그것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무언가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에이아이가 유일하지 않을까. 요 며칠 트위터에서 화제를 모았던 n행시 짓는 에이아이가 지은 삼행시를 보면 심증은 더 강해진다. 허공에의 질주 내가 밤을 샌 건 김쿠만과 나일선의 소설집에 해설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두 작가의 작품 모두 영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개들만이 안달루시아에서 산다’라는 단편으로 시작하는 나일선의 소설집에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루이스 부뉴엘, 리차드 라우드, 앙리 랑글루아, 차이밍량, 장 뤽 고다르, 장-마리 스트로브 같은 영화인들의 이름들이 이어진다. 네이버에 검색하면 AI가 알아서 김주만이라고 정정해주는 김쿠만이라는 이름은 실은 쿠엔틴 타란티노와 이만희에게서 한 글자씩 빌려온 것이다. 어차피 돌려주지 않을 것을 빌렸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지돈 씨… 덕분에 나는 [축음기, 영화, 타자기](프리드리히 키틀러), [소리의 정치](이화진), [경성과 도쿄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정충실), [영화와 소리]와 [영화의 목소리](미셸 시옹)처럼 영화에 관련된 책들을 읽고,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앨런 식수), [음악 인류](대니얼 J. 레비틴), [사탄 박사의 반향실](루이 추데 소케이), [역사](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내용 없는 인간](조르조 아감벤), [아케이드 프로젝트](발터 벤야민), [미래가 사라져갈 때](자넷 폴), [레트로 마니아](사이먼 레이놀즈), [리믹솔로지에 대하여](데이비드 건켈), [소설의 이론](게오르그 루카치), [미래 이후](프랑크 베라르디 ‘비포’), [자본주의 리얼리즘](마크 피셔), [허구세계의 존재론](미우라 도시히코)처럼 영화와 큰 관련은 없는 책들을 읽었지만 원고는 쓰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비평, 평론, 해설, 뭐라고 부르건,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 대해 쓰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고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 작품에 대해 말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말하지 않기. 둘. 최후의 최후까지 마감을 미루고 있다가 더는 미룰 수 없는 순간이 닥치면 눈을 감고 후다닥 써버리기. 한기 씨는 글이 안 써지면 눈을 감고 쓴대요, 언젠가 정지돈은 내게 말했고 그것은 분명 효과가 있다. 가끔(실은 자주) 내가 무엇을 쓰는지 나조차 몰라야 글을 쓸 수 있는 때가 있는 것이다. 중력을 모르기 때문에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처럼. 나는 지금 <루니 툰Looney Tunes>의 로드러너와 와일 E. 코요테의 클래식 루틴을 떠올리고 있다. 배고픈 코요테는 호시탐탐 로드러너를 노리지만 잡을 수 없다. 로드러너가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무슨 방법을 써도 로드러너의 발끝도 못 쫓아가던 코요테가 로드러너를 앞지르는 순간이 오는데, 그건 로드러너가 절벽 앞에서 급제동을 할 때다. 절벽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코요테는 걸음을 늦추지 않고, 로드러너를 지나쳐 허공으로 질주(Running On Empty)한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때 코요테는 의기양양하고, 자신감에 차 있으며, 공중에 떠 있다. 자신이 공중에 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전까지는. 비극 주인공이 종국에 도달하는 앎은 자신의 불행을 낳은 오류에 대한 앎이었다, 라고 랑시에르는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에서 말한다. 나는 내가 공중에 떠 있어도 절대 모를 거야. 꿈에도 모를 거야, 라고 TV를 보던 어린 나는 다짐한다. 정지돈의 말마따나 내가 “대체로 정신이 나가 있다고 할 수 있다”면 아마 내가 어린 시절의 다짐을 아직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과 상상 1) 어제와의 이별 - 김쿠만 해설의 결말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 괴로워하며 트위터 타임라인을 새로고침 하고 있는데 나일선의 트윗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영화 이미지 두세 컷과 직접 찍은 책의 구절(혹은 부감으로 찍은 커피잔)의 이미지를 데쿠파주한 잠언풍의 트윗이었다. 첫 두 장은 검은 화면 위에 적힌 독일어 문장의 이미지였는데, 그 아래 “우리를 어제와 이별하게 만드는 것은 / 균열이 아니라 위치의 변화다”라는 한글 자막이 달려 있었다. 이건 어디에 나오는 거죠? 나는 나일선에게 멘션을 보냈고, 알렉산더 클루게의 어제와의 작별 시작 부분입니다, 라는 친절한 답을 받았다. 그때 나는 비로소 며칠을 끌어오던 김쿠만 해설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마지막 단락은 이렇게 시작한다. “알렉산더 클루게의 영화 < 어제와의 이별 >(1966)은 “우리를 어제와 이별하게 만드는 것은 균열이 아니라 위치의 변화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그것이 김쿠만이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을 통해 하는 일이다…” 2) 메멘토 - 이번 ‘한영한사’는 시간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영화가 시간을 공간으로 바꾸는 픽션의 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시간이 없고, 가난한 사람이 돈을 생각하듯 내가 시간을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물론 돈도 생각하고… 그런 생각으로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고 있는데, 내가 지난해 12월 4일에 ‘한영한사’ 업데이트 소식을 알리며 “쇼미는 끝났지만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한 것 같네요 이번 화에서는 자비스 코커와 토니 블레어와 노엘 갤러거와 벤앤제리가 혼톨로지 음악의 리듬에 맞춰 노래합니다 그래요 뮤지컬이죠”라고 쓴 트윗을 누군가 리트윗 했다는 알림이 떴다. 뜬금없이? 이 시대를 살아가며 SNS를 하는 다른 많은 작가들처럼 혹시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그게 지금 털린 건가? 벌벌 떨며 링크를 클릭해 ‘한영한사’ 9화를 읽었는데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내가 이번 화에 쓰려던 모든 것을 그때 이미 써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론적으로 순수한 선행 기억상실’이라는 소제목을 붙인 단락을 나는 이렇게 쓰고 있었다. 모든 것은 시간 문제다. 요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원고를 마감하는 것도 시간 문제고, 밀린 책을 쓰는 것도 시간 문제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우리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돈? 물론 중요하지. 그렇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이 있기만 하다면. 시간과 관련된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시간과 관련된 문제는 또 있다. 뭘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하건 약간의 시간만 흘러도 까맣게 잊혀진다는 사실이다. 정지돈이 말하는 몇몇 고유명사들은 나도 익히 아는 것들이었다. 나는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축음기, 영화, 타자기]를 읽었을 뿐만 아니라 역자 유현주 선생을 모시고 출간 기념 북토크를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내용은 내개 전혀 새롭게 들렸다. 혼톨로지? 물론 알지. 사이먼 레이놀즈의 [레트로 마니아]와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물론 혼톨로지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책은 아니지만)을 두어 번은 읽었으니까.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도 읽었다. 반쯤. 나원영과 강덕구가 번역한 마크 피셔의 글들도 읽었고, 큰 상관은 없지만 베리얼의 첫 두 앨범을 최근 LP로 구입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것들은 내게 매번 새롭게만 느껴지는 걸까… 3) 긴 복도 그렇다면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새롭게 하자, 지금껏 내가 한 번도 가져오지 않았던 레퍼런스를 가져오자, 나는 생각했고 조너선 크레리의 [24/7 수면의 종말]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책이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책은 보이지 않았고, 책장 구석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포털이 있는 건 아닌지 투덜거리면서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고 있는데, 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과 e-flux가 연계 온라인 상영을 해서 정여름의 < 긴 복도 >를 볼 수 있다는 트윗이 올라왔다. 나는 링크를 따라 e-flux에서 <긴 복도>를 플레이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책들이 사라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환상의 빛 김쿠만 해설, 나일선 해설, 한영한사, 그리고 정지돈 작가론까지… 4중의 마감에 시달리다 정지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내 전화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국 영화 속 싸대기 액션, 혹은 액션으로서의 싸대기에 대해서. 혹시 그건 제 싸대기를 때리고 싶다는 뜻인가요? 나는 묻지 않았다. 마감에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는 데 그중 하나는 크고작은 피해망상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지돈은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싸대기는 할리우드에는 없는 한국의 고유한 액션입니다. 그것의 목적은 단순히 상대를 제압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계도 나아가 계몽의 수단인 거죠. 정연씨, 모르시겠어요? 뺨을 맞으면 눈 앞에 빛이 번쩍하는 빛이 바로 계몽의 빛이라는 걸! 라이트 오브 엔라이트먼트(Light of enlightenment)! 과거에 싸대기는 부정적인 액션이었습니다. ‘아부지 뭐하시노?’라는 김광규의 대사, 그리고 이어지는 무자비한 싸대기를 떠올려보세요! 그때 싸대기는 권력의 부조리하고 억압적인 폭력을 상징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그것은 참교육이라는 이름의 사이다가 되어버렸죠. < 베테랑 >이 천만 관객을 넘은 건 황정민이 유아인의 뺨을 때리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장면에 아트박스 사장으로 나오는 마동석을 기억하세요. 황정민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마동석이 싸대기 액션의 대명사가 되어 헐리우드까지 진출한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싸대기는 김치 싸대기 아닌가요? -뭐요? -김치 싸대기요. -그게 뭐죠? -김치 싸대기라고요 지돈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그러니까 미래는 드라마다. 정서경 작가가 각본을 쓴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티저 예고편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짧은 영상을 통해 내가 파악한 바로는 가난하지만 구김살 없이 살아보려는 세 자매 앞에 어느날 700억이 든 가방이 나타나고 가질 것인가 돌려줄 것인가 고민하는 사이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된다는 내용인 것 같았다. 이건 드라마보다는 영화에 어울리는 시놉시스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던 기억도 난다. 그래서 의아하다기보다는 더욱 기대가 됐다. 지난 원고에서 정지돈은 맨날 보는 애들만 보면 뭐하냐, 안 볼 사람도 봐야 진짜 예술이지, 그래서 문학은 끝났고 영화는 아직 가능성이 있다, 라는 임재철 님의 말씀을 인용했다. 내 생각은 다르다. 기나긴 팬데믹을 거치며 영화 역시 이제는 보는 사람만 보는 매체가 되어 가고 있다. N차 관람러들 아니었으면 내 인생은 공허했을 거라는 박찬욱의 말을 떠올려보라. ‘그’ 박찬욱의 영화도 거듭 관람하는 팬들이 아니었으면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나만 해도 그렇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영화는 거의 보지 않지만, 올해 본 드라마만 해도 벌써 <스물다섯 스물하나>(마지막 두 편은 안 봄), <우리들의 블루스>, <나의 해방일지>, <우린폭망했다wecrashed> 그리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까지. 모두 더하면 영화를 최소한 40편은 볼 수 있었을 시간이다! 마담 보바리, 그것은 바로 나다, 라고 플로베르는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바로 대중이라고 말해야겠다. 지금보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엔 나도 내 취향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안다. 내 취향은 정확히 대중적이라는 것을, 다만 남들보다 조금 느릴 뿐. 요즘 내가 즐겨 듣는 노래는 2010년대의 히트곡들이다. 정작 그때는 그게 히트했었는지도 몰랐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 마감 때문에 마음이 소금밭인데 홍대에 갔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영화인 교육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오진우 평론가의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특강. 길지 않은 특강이었지만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을 직접 제작하는 사람으로서의 경험담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던 점이 특히 좋았다.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의 위상이 너무 애매해서 만들다 보면 차라리 글을 열심히 쓰거나, 영화를 만들거나, 유튜버가 되거나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같은 부분이… 한국의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의 역사와 현황을 일별하는 와중에 박유정의 <The Futures of Future 1>, 정여름의 <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 같은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작품뿐 아니라 김병규 평론가 같은 분들이 [씨네21] 지면을 통해서 이미지들과 텍스트를 병치시키며 그 자체로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에 대한 스크립트가 될 수 있는 작업을 한 것들을 예로 들며 우리의 ‘한영한사’가 지나가듯 언급되기도 했다. “그리고 정지돈 작가와 금정연 작가가 연재하고 있는 ‘한국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이 있는데… 거의 유일하게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을 이야기하시는 분들이죠. 글쎄요, 영상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데, 뭐랄까, 영상화가 되기를 바라지만… 이루어지기는… (크흡) 모르겠습니다…” 오진우 평론가가 최근에 하고 있는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 작업도 잠깐 소개했는데, 매일매일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모은 <덧 없는 이미지들>(2022)도 그렇고 아이폰으로 직접 촬영한 영상만으로 만든 <영상자료원 가는 길>(2022)도 그렇고, 다른 영화의 장면들을 직접적인 재료로 하지 않는다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이 글을 통해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엥? 어느 부분이? 라고 되물으신다면… 한국 영화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인용)을 하지 않는다는 부분이…? (*출처: 오진우 평론가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jinu_montage/222855477268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지돈 씨에게, 우리가 통화한 게 화요일이던가요? 전화를 끊기 전에 제가 그랬죠. 지돈씨 걱정마세요, 10시까지 제가 김쿠만 해설 쓰고 아침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한영한사 원고 써서 보내드릴게요. 그러니까 와, 좋아요, 하더니 이렇게 물었잖아요. 근데 정연씨, 여태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요? 그때도 말했지만 있습니다. 최소한 한 번은, 어쩌면 두 번쯤, 생각을 백 번 했다면 그중에서… 지금은 금요일 아침이고 저는 오늘도 밤을 꼬박 새고 말았네요. 그렇지만 김쿠만 원고에 이어 이렇게 한영한사 원고도 마감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제가 그랬잖아요. 저는 무척 대중적인 사람인데 단지 조금 느릴 뿐이라고. 원고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마감을 칼 같이 지키는 사람입니다. 단지 조금 느릴 뿐이죠… 사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고 싶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지돈씨가 좋아하는, 그리고 저도 좋아하는 요아킴 트리에의 신작을 개봉하는 날이었거든요. 게다가 트위터를 보니(이번 원고에 트위터란 말이 몇 번이나 나오는지 정말 알고 싶지도 않네요) 아트나인 9관에서 8시에 영화를 관람하는 모든 관객들에게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 모자를 준다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무척이나 예쁜 초록색 모자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극장에 가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 원고를 썼죠.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나일선 해설과 정지돈 작가론 두 개만 남았으니까요. 하하. 가끔은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누구도 잘못하진 않았어요. 저도 알아요. 제가 궁금한 건, 그렇다면 왜 저는 매일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걸까요? 가끔은 정말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쓸데없는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하지만 너무 걱정마세요. 지돈씨 원고의 도입부는 벌써 생각해두었거든요.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에 붙인 나탈리 레제의 서문의 한 구절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이런 부분이에요. 바르트가 죽었을 때 그의 타자기 위에는 스탕달에 대해 진행하던 연구의 원고 한 장이 끼어 있었고, 그 제목은 "인간은 항상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데 실패한다......"였다. 이만 총총. (*출처: 그린나래 미디어 트위터 https://twitter.com/greennaraemovie )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올해 초쯤, 계속되는 팬데믹 속에 적응해 나가는 한국영화 제작사들에 대한 취재를 한 적이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의 기승 덕분에 국내의 한 해 총 관객수가 73.7% 급감했던 터다. 극장 개봉 일정들은 미뤄지거나 아예 취소 되어서 작품들이 OTT 서비스로 직행하는 경우가 속속 나왔다. 그리고 제작사들을 취재하다 보니 원래 극장용 영화로 기획 되던 작품들이 예산을 줄여 작은 화면 OTT용으로 만들 궁리를 하거나 심지어 시리즈물로 변환되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 영화계 생존을 위한 현실적이고 당연한 처사였다. 유독 외유내강 강혜정 대표와 통화했을 때, OTT에 열려 있기도 하지만 ‘어떻게 하면 더 사람들이 돈 내고 영화관에서 보고 싶게 만들 수 있을까’에 중점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서 현실성과 적응력을 보였지만, 외유내강은 거기에 더해 패기를 보였다. <모가디슈>라는 영화가 그런 제작사에서 나온 것이 놀랍지 않다. 뉴욕 아시안 영화제 조직 위원장 사뮤엘 자미에는 ‘카 체이스 씬 하나만 보려고 극장에 가도 될 만 한 영화다’라고 하면서 올해 개막작으로 상영하기도 했다. 1980년대 말부터 유엔 가입을 먼저 하는 것을 목표로, 남한과 북한이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다고 한다. 1990년 말 소말리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숙적이던 두 대사관 사람들이 힘을 합쳐 수도 모가디슈를 탈출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어떤 때는 실화가 더 거짓말 같을 때가 있다. 관객들이 못 미더워 할 같아 많은 취재와 고안 끝에 카 체이스 씬도 나온 것이라 류승완 감독은 말한다. 아이들까지 해서 네 대의 차량에 나눠 탄 두 대사관 사람들은 구조 비행기를 마련한 이탈리아 대사관을 향해 간다. 류 감독은 실제로도 처음에는 정부군이 반군으로 오인하면서 사격을 가했고, 탈출 하는데 반군이 또 정부군으로 오인해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결국 양쪽의 추격과 사격을 받으면서 이탈리아 대사관 50미터 앞까지 가는데 한 사람만 사망한 실화가 너무 기적 같아서 고민했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라 영화로 처음 이것을 접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싶어 조사 하다가 당시 AK 소총이 전화번호부 한 권을 뚫지 못했다던가, 명중률 자체가 낮은 데다가 정부군 조차도 훈련이 잘 안되어 있어서 표적을 잘 못 맞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사관에 있는 책과 문짝, 즉석에서 헌 옷으로 만든 모래 주머니를 박스 테이프로 차에 붙여 임시방편으로 나름의 방탄 차량을 만드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와중에 아이들 팔에 매직 마커로 크게 혈액형을 적어주는 모습이 잠깐 나온다. 죽거나 다칠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 직시 하며 현실적으로 대비 하는 모습이 긴장감을 한층 높여 준다. 준비 끝에 서커스단 차량처럼 색색가지 물건으로 뒤덮이고 그 무게에 눌려 기우뚱거리는 외교관 차량 네 대의 행렬은 가관이다. 실제로 촬영 중에 이 80년대 자동차들은 세월과 물건들의 무게를 못 이겨 가다가 서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류승완 감독은 ‘스펙타클 보다 서스펜스’를 목표로 연출했다고 말한다. 총알 세례 추격전 중에 네 대의 차량 내부를 관통하는 하나의 샷인 듯한 것으로 모든 이의 공포와 서스펜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창문에 매달린 군인과 싸우는 모습까지 가미해 결국 액션, 서스펜스, 스펙타클 두 마리도 아닌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모가디슈> 언론배급시사를 놓치고 광복절 주말 극장에 가서 보고 이틀을 못 참고 다시 보러 간 사람으로서 카 체이스 씬에 더해 하나를 더 꼽는다면, ‘양주 장면’이다. 엄청난 소리와 액션과 위험이 따르는 카 체이스에 반해, 늦은 밤 대사 집무실에서 조용히 벌어지는 장면이지만 서스펜스와 솔솔한 재미가 있는 장면이다. 남한 대사 한신성 역을 맡은 김윤석 배우가 안기부에서 파견된 강대진 참사관 역을 맡은 조인성을 회유하는 장면이다. 양주병을 들고 이야기하면서 술을 따라주려다가 자기 마음을 몰라준다, 섭하다 한숨을 내쉬면서 마치 무의식적으로 양주병을 내려 놓는 한 대사, 시선이 은근히 양주병을 따라가다가 자기 차례 대로 회유에 나서는 강 참사,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도 한국 고유의 풍습 대로 자작은 또 서로 못하게 하는 등 둘의 안무는 큰 화면에서 가히 볼 만 하다. 이런 경우, 연기도 스펙타클이다. 소말리아에서는 계속 되는 내전으로 현지 촬영이 불가능하여 모로코에서 100% 촬영한 영화다. 2019년 11월 11일부터 2020년 2월 18일까지 에사우이라와 케니트라 두 항구 도시에서 찍고, 수개월의 후반작업으로 90년대 초 모가디슈 모습을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대대적인 오디션 끝에 한국, 케냐, 그리고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배우를 데려와 한국어, 영어, 불어, 스페인어 등 통역도 여러 명 둔 촬영 현장이었다. 그리고 무술팀이 현지에서 임시 액션 스쿨을 만들어 배우들을 훈련 시켰다고 한다. 이 영화, < 블랙 호크 다운 >이 아니다. 역시 소말리아 내전 배경으로 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1년 영화도 모로코에서 찍은 것이라 비교가 되기도 하는데, 아는 사람이라면 비교가 아니라 대조라 해야 할 것이다. 할리웃 액션영화만큼 잘 만들고 재미있을 지는 몰라도, <모가디슈>에 나타나는 세계관이나 인간에 대한 접근 방식은 다르다. 아프리카 현지인을 ‘우리 주인공들이 그저 넘어서야 할 장애물’ 또는 악당 역으로만 그리는 일반 할리웃 영화와는 달리, <모가디슈>가 소말리아인들을 그리는 방식은 한국인들을 그리는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 관객이라면 안다. 사실상 멀지 않은 과거의 한국에서도 소말리아와 마찬가지로 부패한 정권에 대한 저항과 독재 타도를 위한 시위, 폭력진압, 그리고 심지어 학살까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정부 인사가 자녀 학자금 명목으로 뇌물을 요청할 때, 민간인들이 시위를 하고 무참히 밟힐 때, 전쟁통에 시장에서 난리가 날 때, 우리는 한국의 비슷한 상황들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다. 피부색은 달라도 사람들의 행동 모습들이 너무 낯익어 기억 속의 영상들과 중첩 될 때가 있다. 주인공들이 드디어 떠날 때 창 밖을 보며 재난이 닥친 그 나라에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부채감을 안고 가는 모습도 그래서 더 와닿을 지도 모른다. 한국 현대사를 모르거나 생각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이 <모가디슈>가 무조건 할리웃 영화처럼 현지인들을 치부할 것이라 생각하는 걸 보면 답답할 때가 있다. 그런 편견을 깨는 것도 우리 몫일 지 모른다. 그 외에 한국인들에게는 친숙하고 당연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그리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라면 먹는 것과 거기에 담긴 의미에 관한 게 있다. 국내에서 많이 회자 된 ‘깻잎 장면’은 남북 대사관 사람들이 서로 긴장된 첫 식사 자리에서 깻잎 반찬이 붙어 북한 사람이 난감해 할 때 남한 사람이 잡아주는 장면이다. 같은 아시아인끼리도 김치나 깻잎 같은 걸 잡아주면 깜짝 놀라서 고마워 하는 경우는 봤지만 이런 행동을 당연 시 하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 밖에 없을 지도 모르겠다. 아주 쬐그만 행동이지만 그 자연스러움에서 같은 동포임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북한 대사관 사람들이 습격을 받고 중국 대사관으로 피신하려다가 남한 대사관까지 와서 들여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까지 서로 온갖 방해 공작에 치열하게 외교전을 벌이던 두 대사관 사람들이다. 한 대사가 들여보내주기를 거부하고 허준호 배우가 맡은 북한 림용수 대사에게 계속 핀잔을 준다. 그러다 같이 나온 꼬맹이들에게 눈길이 가면서 ‘아이들 밥은 먹였소?’ 하는 순간, 우리는 게임이 끝났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른 명분은 필요 없다. 애들은 굶기는 게 아니다. 보면서 속 시원했던 것이 하나 있다. 모든 한국인들의 정말 한국적인 영어 사용법이었다. 예전에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기자회견을 하는 걸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던 게 기억난다. 영어 문장은 세련된 고위 관료의 것인데, 발음은 기가 막히게 아니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생각하고 보면 당연하다. 그 시대, 그 세대 외무고시를 보고 외교관 된 사람들은 어디에 중점을 두고 공부했겠는가? 발음 연습과 교정의 기회가 얼마나 됐겠는가? 지금처럼 편리한 인터넷과 DVD나 방송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안기부 직원이라면 외신 기자에게 담배 한 보루 선물 던져 주면서 “Your favorite cigarette!”을 그냥 (사실 단수가 아닌 복수가 맞는데) 한글로 발음 적어놓은 듯, “유어 패이버릿 시가렛!”을 노래 부르는 어조로 하는 것이 사실상 더 자연스럽다. 대사관에 쳐들어오려는 현지 경찰들을 막으려고 “Listen, you can’t come in here!”라고 해야 되는데 흥분해서 “리슨, 유 캔트 낫 컴 인 히어어”로 (이중 부정의 문장을 만들어 마찬가지로 한국적인 발음으로) 소리치는 서기관의 모습, 그런 모습들이 더 자연스럽고 개연성 있다. 한국 배우가 영화 속 인물에 적절하지도 않은 영어 숙어나 문장 구조와 발음을 구사하면서 연기는 뒷전, 부자연스러운 대사를 얼마나 잘 외웠나, 발음은 얼마나 잘 하나, 무슨 줄타기 곡예 구경하듯 긴장하면서 보는 한국 영화는 이제 많이 없어져서 속 시원하다. 발음이 너무 한국적이어서 해외 배급할 때 자막 깔아야 하면 그냥 깔면 된다. 우리도 북한말 나올 때 한글 자막 까는데 무슨 상관인가? 인물에 맞는 말하기 방식과 발음,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올 때 전달 되는 게 더 많다. <모가디슈>에 대한 이야기는 하면 할수록 이것저것 더 할 수 있겠지만, 일단 ‘2021년 사사로운 영화’의 원고는 여기서 이만 줄인다. 다만 이 작품을 보면서 한국 영화가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것, 패기가 넘친다는 것에 기쁨을 표할 뿐이다.
내 생각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장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잘되는 걸 본 적이 별로 없다.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장르의 컨벤션 안에서 다양한 주제와 캐릭터들이 뛰놀기 때문에 비슷한 색깔을 가지면서도 그 정취가 제각각이다. 음식으로 비교하면 만두 같다. 밀가루 피는 다 비슷하지만 그 안에 고기, 김치, 두부, 야채, 새우 뭐 하여간 뭐든지 집어넣어 쪄버리면 만두이지 않은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속 내용물은 보지 않고 밀가루 피로 싼건 다 똑같다며 무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된 장르 영화가 잘 안 나온다. 나와도 망한다. 가끔은 ‘한국형’이라는, 일단 붙으면 뭐든 후져보이게 만드는 수식어를 붙여서 등장하는 작품도 있는데 이것도 대충 망한다. 아마 많이 안 만들어 봤으니 노하우도 적고, 노하우가 적으니 잘 만들어지기가 어렵고, 잘 만들어지기가 어려우니 관객들도 잘 안보고.. 의 악순환이 진행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독립영화에서 이런 작품들을 꾸준히 제작하고 경험을 가진 감독들이 상업 영화로 넘어가 규모와 재미를 확장시킨다면 아주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 이것도 참 안 된다. 2000년대 초중반, 단군 이래 영화계에 돈이 가장 많이 몰렸다던 그때. 이런 시도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감독들은 상업 영화로 넘어오면서 더는 그런 장르의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종종 공포, 스릴러의 영화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왜인지 대체로 신인감독이 연출을 맡는 경우가 많았고 결과물도 신통치 않은 것이 대부분. 한국에서 장르 영화는 정말 안 되는 걸까? 이돈구 감독의 < 팡파레 >(2019)는 그래서 참 반가운 영화였다. 상업, 독립 영화를 통틀어 이런 유의 장르를 만난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할로윈 밤. 제이( 임화영 )은 우연찮게 막 할로윈 파티가 끝나고 영업을 정리 중인 술집에 들어가게 된다. 데킬라를 한 잔 시켜서 마시고 있으니 2인조 형제 무장 강도가 들이닥쳐 제이는 인질이 된다. 그러다 동생 희태( 박종환 )은 우발적으로 가게 사장을 살해하게 되고, 양아치로 평생을 살아온 자신과 달리 전과도 없고 무려 사이버 대학까지 나온 집안의 기둥, 희태를 지켜야하는 강태( 남연우 )는 이 일을 무마하려 평소 알고 지내던 깡패 쎈, 졸라 쎄서 쎈이라고 불리는 쎈( 이승원 ) 형을 부르게 된다. 현장에 도착한 쎈은 시체를 토막 내 유기하기로 하고 자신이 자주 이용하는(무려 VIP 고객이란다.) 살인청부업자 백선생( 박세준 )을 또 부르게 된다. 이렇게 한 공간에 모이게 된 5명은 시체를 처리하고 깔끔하게 정리를 한 후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생각처럼 일이 잘 안풀린다. <팡파레>의 재미 정도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영화를 좋아해서 맨날 비디오 가게를 들락거리는 삼촌이 유명하거나 볼 만한 영화는 이미 다 봤고 아무거나 표지만 보고 골랐는데 의외로 꽤 재미있었다. 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 아무거나 표지만 보고 고른 영화에 해당한다. 유명하지도, 어마어마한 뭔가가 숨어 있지도 않다. 다만 한 공간 안에서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다섯 명이 서로 해치거나 혹은 살아남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는 모습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저예산 독립 영화이니 완성도 면에서는 아쉬움이 남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깡패, 살인청부업자, 사이버 대학을 나온 집안의 기둥 등 뻔할 수 있는 캐릭터들이 묘하게 나사가 빠져있거나, 기존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생기는 재미가 있고 또 캐스팅이 상당히 잘 되어있어 연기를 주고 받는 모습을 보는 맛도 좋다. 특히 쎈 역의 이승원과 백선생 역의 박세준이 보여주는 능청스러운 모습을 상당히 즐겁게 보았다. 이돈구 감독은 데뷔작 < 가시꽃 >(2013)으로 주목받은 후 곧장 꽤 큰 규모의 차기작 < 현기증 >(2014)을 발표하며 여러 사회문제를 다소 강한 톤으로 그려왔다. 그런 그가 5년 만에 오로지 재미만 생각한 것 같은 <팡파레>를 내놓았다. 묘하게 다른 사람들과는 반대의 행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흥미롭다. 앞으로의 활동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