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발
- 감독
- 권우정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권우정, 정지후, 정인섭, 신유진, 우진아
학교에 관한 두 가지 장면이 있다. 운동장을 가득 채우는 수백명의 학생들. 이들은 모두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구령을 외고 있다. 유독 한 아이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들을 제압하듯 뻗어나온다. 당신은 우연히 그 아이와 시선이 얽혔다. 그 살기등등한 눈빛. 한편으로, 밤중에 복도를 걷고 있는 당신의 곁을 슥 지나치는 누군가가 있다. 불현듯 이 시간쯤 학교에 출몰한다는 어느 여학생 귀신의 얘기가 떠오른다. 소름이 돋아 다시 뒤를 돌아본다. 등을 보인 채 멀어져가는 그 애는 낯익은 옆 반 학생이다. 아니 잠깐, 그런데 그 애의 머리가 단발이었던가? 두 단편적인 이미지는 학교라는 공동체-공간이 품고 있는 매혹과 공포의 서로 다른 뿌리다. 전자가 존재증명을 향한 분투와 같이 획일적으로 도열된 이미지의 표면을 뚫고 나오는 우상 신화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표상한다면, 후자는 또다른 원천을 나타낸다. 바로 모두의 외양이 서로의 복사판처럼 유사한 상황 속에 불쑥 유령적인 징후가 들이밀어지는 순간이다. 새로 출현한 우상을 구심점으로 한 집단이 다시 질서지어지는 과정과는 반대로, 이는 유사 판본들의 차원에서 경쟁과 유희의 장이 열리는 원심적인 작용을 의미한다. 진본으로 이름 붙여진 것은 유실되었거나,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상호 유사성 가운데 태어난 판본들은 계속적인 인력과 척력 작용으로 서로를 반영하면서 유기적 관계망을 형성해나간다. 올해로 개봉 20주년을 맞이하는 김태용, 민규동 감독의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 김태용 , 민규동 , 1999)는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관객과 평단을 사로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이 '여고를 배경으로 삼은 공포영화' 시리즈를 대중의 인상 속에 고유명사처럼 안착시킨 작품이다. 그런데 이렇게 '여고괴담' 시리즈를 떠올릴 때마다 흥미로운 것은 여고라는 장소와 괴담이라는 소재 사이에 어떤 친화성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연결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남고, 혹은 10대 남성들의 세계를 경유하곤 하는 학원-조폭물 계보의 영화들이 사회 구조나 권력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우화로서 독해되는 데 비해, 여성집단의 공간은 주로 괴담이나 불가해한 사건들의 발원지로 묘사되어온 것은 한국 영화가 만들어온 어떤 하나의 경향성 여기에서 그 계보를 다루는 것은 목적이 아니고, 또 모두 다룰 수도 없는 광대한 주제이지만, 한국영화에서 가장 시원적인 ‘여고’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에서 중간중간 등장하는 여공들의 야학까지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하녀’라는 강렬한 캐릭터의 모태공간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이 여공 집단은 언제나 입을 모아 합창하고, 중년의 중산층 남성 주인공 동식의 등 뒤에서 끊임없이 가십과 저들만의 은밀한 눈빛을 주고 받으며 주인공에게 무의식적인 공포를 심어주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드러난다. 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가운데 '여고괴담'을 위치시키고자 한다면, 시리즈의 다른 편들과는 달리 당시의 10대 여성의 문화는 물론 여성 퀴어 주체들에게까지도 시선을 확장하면서 '여고'라는 실제적인 장소성을 세밀하게 포착했다는 평을 받아온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야말로 우리가 다시금 주목해야 할 작품이 될 것이다.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와 그 화학작용에 집중하며 통상적인 학원 공포물의 기획을 넘어서고 있다는 기본적인 인상들에 더해, 이 영화는 왜 '여고'는 '괴담'으로 대중에게 먼저 읽혀져야 했는가를 근원적인 지점에서 재질문하며 적극적으로 여고라는 공간의 공포를 성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의 진입, 몸의 배반] 늦은 등교길, 지각생 민아(김규리)는 수돗가에서 숨을 돌리다 우연히 빨간색 교환 일기장 한 권을 발견한다. 그 일기장의 주인은 어딘가 재수 없는 아이로 소문 나 있는 효신(박예진)과 민아의 동급생인 시은(이영진)이다. 호기심에 일기장을 들춰보기 시작했던 민아는 점차 빨간 일기장에 담긴 효신과 시은의 관계 속으로 깊이 몰입해 들어가고, 그에 따라 같은반 단짝인 지원(공효진), 연안(김재인)과 공유하는 학교에서의 평범한 일상들 위로 겹쳐지는 또다른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피처럼 빨간 일기장 속에는 효신과 시은 사이의 이끌림과 갈등, 그리고 효신의 외로움이 선명하게 맺혀있다. 효신의 투신을 기점으로 학교에 일어나기 시작하는 기이한 사건들 틈에서 섬뜩하게도 계속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면서, 민아는 이 파국의 진실을 좇아 학교를 누비게 된다. 단순한 줄거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민아는 틈입자이자 매개자로서, 현재와 과거, 나와 타자, 효신과 시은, 학교에 공존하는 일상적 세계와 유령적 세계 등의 대립쌍을 자연스레 포개어 놓는 역할을 담당한다. 제 3자의 눈을 경유해 풀려나가는 이야기 구조는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영화에서 특히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민아와 비교할 만한 또다른 대칭쌍이 함께 제시된다는 것이다. 학교의 국어선생님인 고형석 역시 이야기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으며, 효신과 시은의 사이를 잠시나마 비집고 들어갔던 전적이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형석이 이야기 안에서 하고 있는 역할은 크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는 효신과의 관계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야기 공간으로부터 끊임없이 거부당하고 있는 것처럼 무력해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마도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두 명의 틈입자, 민아와 형석 중 왜 한 명은 이야기의 매개자로서 승인되고 한명은 외부자로 밀려나는가? 다시 말하면, 왜 민아는 효신과 시은의 관계에 진입하는 데 성공하며, 형석은 관계의 바깥에서 사멸하는가? 우선, 타이틀 시퀀스 이후로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의 도입부, 수돗가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민아와 형석은 여기서 교차하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이 행동 경로를 자세히 살피면 두 사람이 자연스레 어떤 공통분모를 형성하면서도 서로 빗겨나며 대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돗가에서 물의 세례를 받듯 얼굴을 흠뻑 적시다 우연히 효신과 시은의 교환일기장을 발견하는 민아와, 쓰레기를 주워 버리고 간단히 한 쪽 손만을 씻어낸 뒤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형석 사이의 평행선은 이후로도 영화에서 몇 차례 반복된다. 민아가 별다른 의식 없이 효신의 '약'을 삼켜버리는 데 비해, 형석은 효신과 어울리고 싶어 하지만 그와 마시는 술을 모두 게워내고 마는 체질이다. 효신의 소지품을 경유해 환영을 만나는 장면에서도 같은 패턴을 볼 수 있다. 민아가 온몸으로 침투해오는 효신의 손길로 인해 기절할만큼 강렬한 빙의를 경험하는 반면에, 형석은 효신의 환영을 겨우 귓가로 불러들여 무언가 속삭이게 했을 뿐이다. 그리곤 목숨을 끊고 만다. 이러한 차이들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분명 여러 차원을 아우르는 복잡한 설명 역시 가능하겠지만, 의외로 가장 유력한 해답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단순한 사실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바로 외연이다. 고형석은 선생-남성이고, 민아는 학생-여성이라는 가시적인 차이 하나. 영화의 초반부에 생기를 불어넣는 지원과 캠코더 소동은 이 당연한 차이를 재확인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달려와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며 웃는 민아와 달리 형석은 지원의 짝사랑 대상이자 멀리 떨어진 타자로서 암시된다. 지원은 그의 사적인 공간을 엿보려 캠코더를 들지만, 창과 창이 마주보는 건물구조를 통해 지원과 형석 사이에 놓인 물리적 거리가 정사-역사의 관계로 간신히 봉합되었을 때조차, 그의 얼굴이 아웃포커스로 새겨진 역사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결코 섞일 수 없는 이질적 이미지로서의 형석의 외연이다. 반면에, 민아는 '동등한 몸'으로 효신-시은의 관계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다. 이것은 공동체-연결망을 유지하는 유일하고도 암묵적인 규칙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즉, '외적인 유사성' 속에서만 여기-이-공동체의 몸으로 귀속될 수 있음. 같은 원리로 효신의 죽음 이후 학교의 옥상, 복도, 화장실에서 출몰하는 유령들이 화면을 스칠 때, 우리의 시각이 판별할 수 있는 정보는 하나 뿐이다. 이들의 외양을 교복을 입은 그 주변의 친구들과 구분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공포인 동시에 매혹이다. 그러므로 왜 상관도 없는 타자의 일에 개입하냐는 친구 연안의 말에 "너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라고 응수하며, 효신의 죽음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는 민아의 뛰어난 공감적 상상력은 이 유기적 네트워크의 본질적인 측면으로 확대하여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효신이 자신의 창작시를 통해 우리에게 넌지시 던지는 힌트 그대로다. "나는 누구도 될 수 있다. 진실이 거짓이 되듯.“ [재수 없는 것들] 그러나 이러한 네트워크-몸에도 언제나 정상성의 기준이 요구된다. 주요 사건들이 벌어지는 7월 9일은 효신과 시은의 생일이자 신체검사일이기도 하다. 낭만적이면서도 냉소적인 시선을 가진 효신은 키나 몸무게를 표지하는 숫자들이 진짜 성장에 대해 무엇을 알려줄 수 있겠냐고 반문하지만, 의외로 아이들의 몸은 쉽게 그러한 분별과 통제의 수단을 전유하고 뛰어넘는 것처럼 보인다. 사적인 신체적 특징과 정보를 교실이라는 공동의 공간에서 기록하는 이 신체검사 의례는 학교 시스템의 폭력적인 면을 상기시키지만, 또한 교실은 다시 그 수치들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폭로하는 놀이터로 전복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키를 잴 때 슬쩍 까치발을 드는 아이를 통해 신체검사의 경직된 절차들이 느슨하게 풀어지며 일상적인 층위로 해체되어가는 순간, 비명소리로 먼저 암시되는 효신의 투신은 정상성의 폭력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공표하며 우리를 뒤흔들어놓는다. 영화에서 연안을 비롯한 아이들은 제 마음에 들지 않게 튀는 것들을 볼 때마다 여지 없이 "재수 없어"라고 반응한다. 효신과 시은이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길 때, 마치 반작용처럼 교실은 이들을 밀어낸다. 재밌는 것은 남학생 집단을 다루는 영화에서 주로 시선을 장악하는 것은 전적으로 힘이 있는 인물인 데 비해, 여기서는 '비정상'으로 낙인 찍히고 고립되는 인물들이 오히려 이목의 중심에 선다는 점이다. 이미 고형석을 '외부자'로 날인한 바 있는 이 유사한 이미지들은 이렇게 자신들만의 협화음을 쌓으면서 그 내부의 주파수를 넘어서는 '다른 음'들을 다시 예민하게 집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청력 문제로 음악시간에 노래를 함께 부르지 못하는 시은과, 어른들 아이들도 지겹다는 듯 아웃사이더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효신에게는 늘 눈총이 따라다닌다. 그런데 진정한 역설은 이 척력 작용이 강하면 강할수록, 거부된 이미지들은 거꾸로 집단 내부에 음각처럼 깊게 새겨진다는 것이다. 효신은 물론이고 효신의 죽음을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는 민아에 대해서까지 과할 정도의 적개심을 표출하는 연안은 사실상 그 누구보다 '재수 없는 애' 효신의 존재감을 지워버리지 못하는 인물이다. 시은이 홧김에 찢어버린 교환 일기장의 페이지들이 결코 사라지지 않은 채 무언가 사라져버렸다는 사실만을 덧붙이며 되돌아와 더 날카롭게 마음을 할퀴어대는 것처럼, 효신의 존재와 부재는 어떤 의미로든 강력한 것이 된다. 이때 학교는 공간 속에 배어든 과거의 기억들을 뿜어내며 효신의 자취와 반향을 이룬다. 그렇게 효신을 향했던 배제의 원리는 학교와 아이들의 무의식 속으로 다시금 어떤 유령적 판본을 불러들인다. 특히나 여러 사람이 이미 너무 갑작스럽고 돌출적인 이미지라고 지적한 바 있는 ‘욕조씬’(욕조에 앉아 혼자 울고 있는 효신)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참조하면 이 지점은 더욱 흥미롭다. 원래는 시은과 효신이 욕조에서 나누는 대화가 여러 씬 있었는데, 이후 편집 과정에서 대중의 정서에 맞지 않는 거북한 장면들로 받아들여져 결국 모두 강제로 잘려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가위질이 놓친 장면 하나가 살아 남아 영화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고의 공포, 그것은 '여고'라 이름 붙은 무신경한 묶음 속에서 유사 이미지로 귀속되는 몸들이 다시 파악 가능한 지평을 넘어서는 돌출물을 내밀기 시작할 때 한 번, 그리고 집단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온몸으로 밀어내어 온 이미지들이 불현듯 기억들 속에서 재활성화 될 때 또 한 번 세워진다. 이 유기망을 이루는 개별적 몸이자 결절점이었던 우리는 그것을 아직도 몸으로 기억한다. 영화 초반 시은에게 관심을 드러내며 눈 속에 담기는 인영, '눈부처'를 언급한 효신은 어느날 불안감에 이렇게 다시 묻는다. "내가 안 보여? 내가 개미야?" 그리고 중간중간 삽입된 이질적인 질감의 화면들을 통해 암시되던 효신의 유령적 시점이 마침내 강당의 지붕 위로 드리운 거대한 효신의 눈동자로 현신하여 학교 공간 자체를 눈부처로서 담아낼 때, 우리는 효신의 얼굴을 눈과 마음에 새기며,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너의 죽음을 잊을 수가 없다고. 어떻게 잊겠냐고. 이제, 모든 것은 밝은 빛으로 산화된다. 우리는 유령적 시간인 과거로 돌아가 그들과 자리를 바꾼다. 기억들이 주체가 되고, 우리는 유령적 시선으로서 그곳에 머문다.
2월은 겨울의 막바지로 봄이 오기 직전의 달이기도 하지만, 긴 겨울을 지나오면서 뼛속까지 냉기가 배인 달이기도 하다. < 이월 >은 봄에 대한 기대보다 몸에 깊게 스민 냉기를 담은 영화이다. 냉기를 다루되, 냉기에 감정을 담아 설명하거나 판단을 강제하지 않는다. 그냥 인생에 있어 이월의 냉기 그 자체를 오롯이 담고 있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주인공이 계속 되뇌는 말처럼 몹시 “춥다.” 아주 잠시 온기를 느끼는 순간도 여지없이 ‘겨울’임을 각인시킨다. 주인공 민경은 이월을 살아가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이월 그 자체이기도 하다. 냉기로 인해 생겨난 단단한 얼음이기도 하고, 얼음을 깨고 올라오려는 새싹이기도 하다. 단, “자라지 못하면 이름이 없는” 존재이다. 영화는 이월이 가진 냉기와 함께 이월의 이중성 혹은 역설을 담는다. 여러 결의 모호함을 질문으로 던지면서. 영화는 소리와 함께 시작한다. 방안에서 흐르는 따뜻한 음악 소리, 날카로운 겨울바람 소리 그리고 찬 공기 속에 손 비비며 후-하고 내쉬는 민경의 입김 소리가 들린다. 이어 까치발로 창살에 매달려 방 안을 들여다보던 민경은 조용히 웃는다. <이월>의 오프닝은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마주하는 민경을 응축하고 있다. 차가운 겨울 머물 곳을 찾는 민경은 동정과 연민을 바라지 않고 자기를 지키며 자기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면서 종종 정체불명의 희미한 모나리자 미소를 짓는다. 다음 장면에서 민경은 방 안으로 들어온다. 음악은 자살을 시도한 친구 여진이 틀어놓은 것이고, 여진은 유언 대신 중국집 쿠폰을 남기고, 방에 누워있다. 민경은 그런 여진을 가만히 바라보며 특유의 웃음을 짓고 숨을 내뿜는다. 처음에는 간지럽히듯이, 다음은 생명을 불어넣듯이 긴 숨을 쉰다. 그러나 영화는 민경이 왜 웃음을 머금고 긴 숨을 여진에게 내뿜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속 여진이 마저 민경에게 소리쳐 묻는다. “왜 웃어? 왜 웃냐고?” 민경의 웃음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마치 민경이 흥얼거리는 노래가 그냥 음악이 아니듯이. 민경 곁에는 이처럼 낯선 결을 동반한 오브제는 더 있다. 앞서 언급한 중국집 쿠폰과 원피스 그리고 5만 원이 그들이다. 따뜻함과 동시에 차가움이 내재되어 있다. 함께한 기억으로, 뭔가 남겨주고 싶어서, 선물이자 용돈으로 건넨 물건이지만, 그 속에는 연민과 동정 그리고 대가가 존재한다. 주는 자와 받는 자 간에 위태로운 의미가 교차한다. 그 ‘위태로움’의 경계에서 민경은 이 겨울을 나고 있다. 민경은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민경 자체도 그렇지만 영화도 민경의 내면을 아는 척하지도 들추지도 않는다. 그런 민경이 두려움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그녀는 여진이 들려준 이모할머니가 빠져 죽었다는 웅덩이를 무서워한다. 미쳐버린 이모할머니 이야기 때문인지, 늪과 같은 웅덩이의 존재 때문인지, 아님 웅덩이 속에 비친 자기 모습 때문인지 민경은 웅덩이를 두려워한다. 어쩌면 민경 자신과 미쳐버린 이모할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일지도 모르겠다. “미치면 아프지 않다”는 민경은 미칠까 봐 두렵고 동시에 미치지 않아 아픈 거다. 그저 아프지 않은 척할 뿐이다. 그녀가 보이는 공격적인 행동과 말은 한 번만 더 곱씹어보면, 공격이 아니라 상처의 흔적이자 상처받은 자의 방어이다. 친구의 자살시도를 목격한 그 순간을 잊지 못하고 있음을 노래로, 자살의 방법으로, 원피스로 말하고 있는 거다. 차가운 냉기가 스며든 순간의 기억들은 자신이 상처받는 또 다른 순간에 공격이 되어 방어로 드러난다. 영화에서 세 번 배경음악이 등장한다. 음악으로 거의 감정을 강제하지 않는 영화가 희미하게나마 감정을 부여하는 세 장면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민경이 몰래 들어간 자기 집에서 빚 청구서 더미를 볼 때이고, 두 번째는 여진의 집에서 도망 나오다 웅덩이에 빠질 때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컨테이너 박스가 하늘을 날 때다. 세 경우 모두 민경이 막바지에 몰렸을 때이다. 특히 웅덩이는 그녀가 잠시 온기를 느끼려는 순간 내리치는 냉기와 함께한다. 여진과 생애처럼 보름밥을 먹는 순간, 자신과 꼭 닮은 성훈과 함께 지내는 법을 익혀가는 순간, 착각하지 말라고 찾아온다. 웅덩이는 온몸에 냉기가 배여 있는 그녀조차도 느끼는 두려움의 형상이다. 민경은 머물 곳이 없다. 집은 이미 보증금까지 날린 상태이고, 여진의 집은 동생의 등장으로 쫓겨나고, 아저씨 집도 아저씨의 사고로 머물 수 없다. 그것만이 아니다. 만둣집에서 쫓겨나고, 학원에서도 버티다 나온다. 민경은 그때마다 컨테이너로 찾아든다. 컨테이너로 찾아들기 전 사이 시간은 일종의 “비변증법적 시간”이다. 별다른 사건도 행동도 없이 먹고 자는 시간들을 보내고 그것마저 거부당할 때 민경은 컨테이너로 찾아든다. 온기라곤 없는 곳에서 추위에 떨며 웅크리며 잔다. 컨테이너는 웅덩이와 달리 그녀의 마지막 보류의 공간이다. 그러나 곧 묻게 된다. 민경에게 웅덩이와 컨테이너는 다른 곳이었을까? 마지막 춥고 어두운 컨테이너에서 민경은 성훈이를 부탁하는 진규의 전화를 받고 여진의 자살시도 때 들은 노래를 부르며 잠이 든다. 이어 거대한 균열과 함께 컨테이너가 하늘을 난다. 환한 분위기와 달리 영화는 마냥 해피엔딩 같지가 않다. 컨테이너 박스 속 민경은 어쩌면 웅덩이 속으로 들어간 건 아닐지, 그녀의 환한 웃음이 이제 통증을 느끼지 못한 (미친) 단계로 들어선 건 아닌지, 혹은 삶에서 완전히 이탈한 것인지 모호하다. < 이월 >은 치우치지 않으면서 삶의 냉기가 가진 양면을 모두에서 만나게 하는 힘 있는 작품이다. + 제목 ‘이월’을 달력의 2월이자 이월하다의 이월로 읽어낸다면, 남겨진 아이 성훈이 너무 아프다. 민경과 꼭 닮은 성훈은 민경의 어린 시절 같기도 하고, 민경과 같은 냉기를 고스란히 담아 겪어나갈 다음 세대일 터. 2월이 3월로 이월되었으면 좋겠다.
한 무리의 여고생들이 저들끼리 사진을 찍으려다 지나가던 한 남자에게 촬영을 부탁한다. 그리고 통역이 없으면 알아듣기 힘든 여고생들의 감탄사가 이어진다. 오빠라고 부르기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저씨라고 부르기엔 죄송한… 사내가 셔터를 누르려고 하자 아이들은 다시 괴성을 지르면서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고 까치발을 든다. 화면이 어두워지면 뜨는 제목, 기념촬영. 마지막이 되어버린 한 장의 사진. 정윤철 감독의 단편영화 < 기념촬영 >은 1994년 10월 21일 아침, 어이없이 무너져버린 성수대교 참사를 사건의 중심에 놓고 그 시간에 있었던 두 여고생의 엇갈린 운명을 그린다. 영화가 시작되면 카메라는 두 여고생의 뒷모습을 따라 등굣길을 비춘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정한 대화들. “(…) 내 다리 날씬해진 것 같아?”, “하나도 아니다, 진짜 아니다.”, “너 치마 또 접었지?”, “그래 접었다.”, “우유 또 마셔?”, “내가 우유 마시고 싶어서 먹는 거냐, 키 크라고 엄마가 주니까 먹는 거지, 남의 속도 모르면서…”, “인스테드 오브 뭐뭐를 대신에, 프롬 타임 투 타임 때때로, 같은 뜻이 뭔지 알아?”, “썸 타임-”, “어 맞았어. (…)” 길을 걷던 중 수진은 미술수업 준비물인 스케치북을 빠뜨리고 왔다면서 친구 소연을 먼저 버스에 태워 보낸다. 성수대교로 향하는 버스, 그리고 집으로 되돌아가는 수진. 영화는 1997년 7월 3일, 1급 교량으로 탈바꿈한 성수대교 재개통의 날과 ‘사회적 살인’이 벌어졌던 그 날의 아침을 오가며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한 개인의 평화로운 일상을 무참히 부숴버린 뒤 망각의 시간을 경험하게 되는지 보여주고, 두 여고생이 나눈 우정의 시간과 이별의 순간을 비통한 심정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한국 사회는 더 나아졌을까. 또는 더 안전해졌을까. 우리가 망각하는 사이 내 이웃과 친구의 죽음은 단지 나쁜 운을 맞이한 타인의 것이 되었고 그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동안에 우리 사회는 더없이 사악하고 악랄한 구조가 되어버렸다. 이 러시안룰렛과 같은 게임에 제 운명을 맡기는 것이 당연한 삶이 되어버린 지금,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열쇠는 다시 우리에게 주어졌다. 내 귓전에는 아직도 살아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생명력 넘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맴돈다. 그래 넋이여 참담한 운명이여 승천하지 말고 이승을 떠돌아라. 세상이 뒤집힐 때까지 우리와 함께 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