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동
- 감독
- 유영진
- 제작년도
- 1988
- 출연
- 정승호, 신성일, 태현실, 이보희, 이경영, 최민경, 김추련, 정혜선, 최성호, 정재순, 신충식, 김희라, 진봉진, 장정국, 이석구, 김철화, 이도련, 김운하, 김기주, 이성, 주상호, 윤일주, 김지영, 나갑성, 김기범, 김기종, 오영화, 이한숙, 김영인, 최경아, 최정미, 정은수, 한명환, 신찬일, 임용규, 김형섭, 김인석, 이설산, 조일봉
<올드보이>의 시그너처 장면. 장도리를 든 오대수(최민식)는 장엄한 롱테이크 액션 신을 펼친다 200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산업 드디어 한국영화는 본격적인 산업화의 길로 들어섰다. 100년에 달하는 긴 시간 동안 바라마지않던 영화기업화의 실현을 목전에 둔 것이다. 2000년대 한국영화는 1990년대 후반에 감지된 르네상스의 기운을 주저 없이 밀고 나갔다. 무엇보다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고 이와 연동해 전체 산업 규모까지 확대되었다. 먼저 지표상의 수치를 확인해보자. 1999년 한국영화 제작 편수는 49편, 평균 제작비가 19억 원이었는데, 2003년부터 제작 편수는 80편을 넘었고 편당 제작비도 40억 원을 넘겼다. 영화산업의 기반인 전국 스크린 수는 1998년 507개, 1999년 588개에서 2003년 1132개, 2004년 1451개로 3배 가까이 증가했다. 전국의 영화관이 속속 멀티플렉스 체인으로 전환되며 스크린 숫자가 급증한 것이다. 이에 외국영화를 포함한 전체 관객 수는 1999년 5472만 명에서 2003년 1억 1947만 명, 2004년 1억 3517만 명으로 두 배 이상의 증가세를 보였다. 주목할 부분은 전체 관객 수 중 특히 한국영화 관객이 증가한 것이다. 1999년 2172만 명에서 2003년 6391만 명, 2004년 8019만 명으로 매년 폭증하면서, 제작 현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1999년 <쉬리>(강제규)가 만들어낸 한국영화 붐과 포스트 <쉬리> 효과로 인해 1998년 25.1%에서 1999년 39.7%로 상승했던 한국영화 점유율은, 2001년 50%를 넘어서더니 2004년에는 59.3%에 달하며 60%대를 넘보게 된다(영화진흥위원회 각 연도 ‘한국영화산업결산’ 참조). 비록 스크린 수익에 한정되긴 했지만, 한국영화의 흥행 수익이 제작 비용으로 선순환되는 이상적인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의 영화산업은 충무로 토착 자본의 약화 그리고 대기업 자본의 지배력 강화로 설명할 수 있다. 새판을 짜기 시작한 대기업의 과감한 행보에 충무로 영화인들이 주도권을 내준 것이다. 사실 1998년 IMF외환위기 여파로 시장에서 한차례 철수했던 대기업들은, 영화산업 규모가 커지고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한 부가 시장의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다시 흥행 게임에 나섰다. 바로 CJ엔터테인먼트(2000년 제일제당에서 독립), 오리온 계열의 쇼박스(2002년 설립) 그리고 롯데엔터테인먼트(2005년 설립)가 대표 주자들이었다. 2002~2003년은 충무로 토착 자본을 상징하는 시네마서비스와 CJ엔터테인먼트의 2강 체제가 이루어졌고, 2004년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를 위시로 쇼박스가 두각을 나타내며 3강 체제로 재편되었다. 우선 각 회사를 살펴보자. 강우석 프로덕션이 모태인 시네마서비스(1994년 설립)는, 서울극장의 전국 배급망과 투자 배급에 대한 강우석의 뛰어난 감각이 만난 결과였다. CJ엔터테인먼트(현 CJ ENM)는, 1998년 CGV강변11을 위시로 멀티플렉스 극장 사업에 진출하며 배급과 흥행 기반을 닦아온 CJ가 만든 미디어 기업이다. 쇼박스는, 2000년 삼성동 코엑스에 메가박스를 지으며 멀티플렉스 사업에 뛰어든 오리온그룹이 출범시킨 투자배급사였다. CJ엔터테인먼트, 쇼박스, 시네마서비스(2002년 플래너스로 사명 변경)는 각각 CGV, 메가박스, 프리머스시네마라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망을 확보하며 제작?투자-배급-상영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구축했다. 2004년 CJ가 시네마서비스의 프리머스를 인수하고 시네마서비스가 다시 프로덕션의 역할로만 물러난 것은, 한국영화산업이 기존의 충무로 질서가 아닌 대기업 자본 체제로 재편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이후 2010년대로 이어지는 CJ의 독주를 예견한 사건이기도 했다. <올드보이> 촬영현장. 왼쪽부터 대수 역의 최민식, 우진역의 유지태 그리고 감독 박찬욱 21세기 한국영화의 핵심 가치 한국 영화산업에서 2000년대 초중반 시기가 중요한 것은, 영화산업의 성장에 필요한 핵심적인 요소들이 과감히 시도되고 또 이것들이 성과로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 키워드는 산업의 양적 성장을 대변하는 ‘천만 영화’, 질적 성장을 상징하는 ‘웰메이드 영화’ 그리고 글로벌 영화로 도약을 예견하는 ‘한류’ 등이다. 천만 영화의 기운을 만들어낸 것은 단연코 <쉬리>의 공이 크다. 1999년 ‘단돈’ 28억 원의 제작비로 전국 62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산업의 파이를 확장했다. 이어 한국영화산업은 2001년 810만 관객을 동원한 <친구>(곽경택)의 경험을 디딤돌 삼아, 2004년 두 편의 천만 관객 영화를 만들어낸다. 2003년 12월에 개봉한 <실미도>(강우석)와 2004년 2월 개봉한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가 각각 400개 이상의 스크린에서 동시 개봉해 11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것이다. 이는 분명 그전의 한국영화산업이 도달하지 못한 새로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두 편이 촉발한 천만 관객 시대가 긍정적인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한국영화산업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슈인 스크린 독과점 문제가 이때 시작되었다. 영화 한류(韓流) 역시 <쉬리>의 역할이 컸다. 남북 관계를 첩보액션 장르로 밀도 있게 연출한 <쉬리>는 2000년 일본의 전국 150개관에서 동시개봉하며 130만의 관객을 동원한다. 잇달아 <공동경비구역 JSA>(박찬욱, 2000), <엽기적인 그녀>(곽재용, 2001)가 흥행에 성공했고 <내 머리속의 지우개>(이재한, 2004)가 30억 엔 수익을 올리며 한류 열풍의 정점을 찍었다. 드라마와 공조한 영화 한류는 한국영화 수출의 일등 공신이었고, 이후 2010년대 한국영화가 세계시장을 대상으로 글로벌 영화를 꿈꾸는 시험 무대가 되었다. 하지만 영화 한류 또한 명암이 존재했는데, 영화의 주요 수출 지역이 아시아 권역, 특히 일본에 집중된 것이 한계였다. 2005년 말부터 일본 시장에서 한국영화 흥행이 참패하자 해외 수출액 자체가 급감한 배경이다.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붐을 일으킨 한류가 글로벌 한국영화를 시도하는 한 축이었다면, 또 다른 축은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지역의 관심이었다.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봉준호 등 이른바 작가주의 영화가 예술영화 배급 라인을 타고 한국영화의 미학을 알렸다. 전자의 두 감독이 많은 관객을 목표로 하지 않는 순수한 예술영화 진영인 데 비해, 후자의 두 감독은 대중과의 접점을 중요하게 고려하는 장르영화로 승부를 내며 스타 감독으로 등극했다. 박찬욱, 봉준호는 각각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 2003년 <살인의 추억>을 내놓으며 ‘대중적 작가주의’라는 새로운 인식 기준을 제시한다. 이는 ‘웰메이드(well-made) 영화’ 논의로 연결된다. 이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3년이다. <살인의 추억>(봉준호),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이재용), <올드보이>(박찬욱), <장화, 홍련>(김지운) 네 작품 모두 3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영화 박스오피스 5위권에 들자, ‘돈 버는 영화’와 ‘공들여 잘 만든 영화’의 간극이 없어진 것을 포착한 영화 저널과 비평가들이 내놓은 용어다. 특히 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한 <올드보이>(326만 명 동원)가 이듬해 제57회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까지 받은 것은 웰메이드 담론의 핵심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덕분에 2000년 흥행 1위를 차지한 박찬욱의 전작 <공동경비구역 JSA>(583만 명)는 한국영화의 웰메이드 시대를 연 것으로 재정의되기도 했다. 상업영화라는 한계를 안고서도 감독의 연출력을 최대한 밀어붙여 만든 영화가 작품성도 인정받고 흥행에도 성공한다면 그것은 영화산업의 가장 건강한 모습일 것이다. 그 중심에는 박찬욱 영화가 자리한다. 그는 21세기 한국영화가 세계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세계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감독이 되었다. 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거장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난 박찬욱은 서강대 철학과 재학 시절 히치콕의 <현기증>(1958)을 본 뒤 영화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영화감독을 꿈꾸며 영화광으로 살아가던 그는 졸업과 동시에 충무로 현장으로 뛰어든다. 충무로 시절은 그에게 시련을 안겼지만, 단련과 성장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장호 감독의 ‘판영화사’가 제작한 <깜동>(유영진, 1988)의 연출부를 거쳐, 곽재용 감독의 <비오는 날의 수채화>(1989)에서 각본과 조감독을 맡았다가 중도 하차했다. 그리고 <달은…해가 꾸는 꿈>(1992)으로 비교적 빨리 감독 데뷔를 했지만, 소수 마니아들만의 지지로 그친다. 이후 영화평론가로 살던 그는 다시 <3인조>(1997)를 내놓았지만 역시 흥행에 실패했다. 그가 비주류 감독에서 흥행 감독으로 단박에 올라선 것은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다. 충무로에 새로운 바람이 불던 시기, 명필름의 프로듀싱 능력과 장르영화에 대한 그의 감각이 행복하게 조우한 결과였다. 그리고 복수 3부작이 펼쳐진다. <복수는 나의 것>(2002)에서 다시 대중적 화법과 멀어지며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올드보이>에서는 대중성과 작가주의 미학의 접점을 찾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2005)로 대중의 영화 감각을 끌어올리는 그만의 연출력을 각인한다. 이후 행보도 주목할 만하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에서 디지털 영화 미학을 실험한 뒤, 2009년 <박쥐>로 다시 칸영화제의 선택(심사위원상)을 받았다. 이후 미국에서 영어 영화 <스토커>(2013)를 내놓았고, <아가씨>(2016)로 칸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과 428만의 관객 동원으로 대중적 성공까지 동시에 이뤘다. 영국과 북미에서 크게 성공한 이 영화는 한국영화 최초로 영국아카데미영화상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라 수상까지 한다. 몬스터의 기억을 지운 오대수는 다시 미도와 만난다 <올드보이>가 개척한 대중미학적 경지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사는 남자, 오대수(최민식)는 영문도 모른 채 사설 감옥에 갇혀 군만두만 먹고 지낸다. 15년 되던 해 겨우 벽을 뚫어 바깥 공기를 쐬지만,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시 세상에 내보내진다. 우연히 들른 일식집에서 미도(강혜정)를 만난 그에게 이우진(유지태)의 전화가 걸려온다. 왜 갇혔는지 알고 싶으면 자신을 찾아오라는 것이다. 복수의 몬스터가 된 대수는 사설 감옥의 위치를 찾아내 스무 명도 넘는 패거리를 혼자서 상대하며, 그 유명한 장도리 액션 신을 펼친다. 수평 트래킹 기법으로 완성된 2분 40초에 달하는 롱테이크는 이제 세계영화사의 명장면으로 남았다. 하지만 감옥방 사장(오달수)은 진정한 복수 상대가 아니었다. 우진이 대수를 찾아와 말한다. 복수하면 즉 자기를 죽이면, 갇혀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없지 않으냐며 5일의 시간을 줄 테니 이유를 알아내라고 한다. 그러면 스스로 죽어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우진이 대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설계한 것이었다. 왠지 모르게 끌리는 대수와 미도는 관계를 가지고, 대수는 잊고 있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이우진, 이수아 남매의 관계를 기억해낸다. 이제 이유를 알았으니 그의 복수가 시작된다. 하지만 우진은 미도가 그의 딸임을 알려주고, 대수는 스스로 혀를 잘라 사죄한다. 결국 대수의 복수는 실패한 것이다. 우진 역시 완전한 복수에는 실패한다. 남매에 관한 소문의 근원인 대수를 단죄하기 위해 벌인 일이었지만, 누나를 죽인 것이, 정확히 말하면 죽도록 방조한 것이 우진이라며 대수가 그의 무의식에 새겨진 죄의식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우진은 미도에게 대수가 아버지라는 것을 알리지 않고, 스스로 머리에 방아쇠를 당긴다. 최면술사의 도움으로 기억을 지운 대수는 미도와 다시 조우한다. 이제 그는 미도가 딸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대수는 몬스터의 기억을 완전히 지웠을까? 영화는 스릴러에 액션을 가미한 장르를 취하고 시종일관 관객의 눈을 사로잡으며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또 장면 장면에 정교하게 설계된 블랙 유머로, 관객과의 소통에도 성공한다. 특히 대사와 내레이션을 오가는 대수의 문어체 화법과 이에 조응하거나 어긋나는 장면들이 그렇다. 영화는 지극히 폭력적이지만 영리한 연출 덕분에 고어(gore)적 이미지가 직접 제시되는 것은 피해가고, 이 역시 블랙 유머와 결합하며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대수와 감금방 사장이 등장하는 신들이 인상적인 이유다. 또 이 영화에서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 운을 뗀 그의 양식적 미장센이 본격적으로 발화한다. 이제는 박찬욱 사단이 된 미술감독 류성희, 촬영감독 정정훈 등이 합류한 덕분인데, 이후 그의 영화 세계가 공고해지는 결정적인 기반이 된다. 작가주의적 인장이 새겨진 공들인 미장센과 더불어 대중영화 특유의 몰입감까지 만들어내는 한국영화, 바로 <올드보이>가 출발점이었다. 웰메이드 영화의 또 다른 경지 2006년 한국영화는 최고의 호황을 기록하며 산업의 최대치를 보여줬고, 박찬욱이 선취한 대중적 작가주의는 그해 흥행 1위를 차지한 봉준호의 <괴물>이 또 다른 수준으로 확장했다. 2000년대 이후 박찬욱, 봉준호가 구축해온 영화 세계는 진지한 관찰의 대상임에 분명하다. 이후 2010년대 한국영화는 산업적으로 더욱 성장했음에도 시스템의 안락함에 매몰돼, 2000년대 한국영화가 개척한 ‘대중적 작가주의’라는 야심만만한 시도를 더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엄밀한 학술 용어는 아니지만, ‘웰메이드’를 2000년대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어로 곱씹어봐야 하는 이유다.
1. 1980년대, 이장호 의 시대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 현은 자신의 나이가 4.19와 5.16 시절에서 멈췄다고 말한 바 있다. 1980년대를 자각 있는 청년으로 통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김 현의 표현처럼 1980년에 나이가 멈췄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끝없이 흘러가지만, 멈춰 있는 의식의 시간과 공간은 집요할 정도로 제자리 걸음이다. 그 제자리 걸음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므로 제 발 밑을 더욱 깊게 파내려 갔을 것이다. 그 파내려간 자국, 나는 그것을 1980년 한국 근대의 상처라고 부르고 싶다. 1980년대 한국영화들 역시 그 상처의 흔적, 어눌한 표현으로 이루어진 상처의 자국으로 본다. 그 영화들 속에 등장한 인물들, 그들은 1960년대 한국 영화 속 주인공들보다 더 못나고 집요하며 파괴적이었다. 그 역할은 대체로 남자들이 맡았다. 남성 감독들은 그렇게 남성을 묘사함으로써 스스로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1980년대의 한국 영화도 그런 상황에서 새롭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광란의 1980년대를 다시 되돌아본다면, 1980년대는 한국의 근대가 겪어야 될 하나의 과정이기도 했다. 독재 정권에 대한 ''힘없는 저항''은 당연히 또다른 독재 군사 정권을 낳았던 것이고, 그 독재 정권이 추동했던 경제 개발은 당연히 빈부의 격차를 극대화했고, 그 서구의 근대화를 모방한 경제 개발은 고유의 문화와 공동체의 미덕을 당연히 파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이장호 감독이 서있었던 지점은 바로 그 곳이었다. 우리가 1980년대 한국 영화를 떠올리면서 언제나 이장호를 앞자리에 세울 수밖에 없는 까닭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그래서 이장호는 독보적인 동시에 1980년대 영화 청년들에게는 ''스승''이었다. 그는 80년대 한국영화의 새로운 물결을 주도한 인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감독이었다. 과거 '1980년 ''서울의 봄''에 때맞추어 나타난 비판적 리얼리즘 영화를 시작으로 해서...'라고 표현할 당시의 비판적 리얼리즘 영화란 바로 < 바람불어 좋은 날 >을 가르키는 것이었다. 또 당시 젊은 평론가들이 80년대 영화를 대상으로 뽑은 베스트 10에서도 이장호 의 영화는 < 바보선언 >(1위), <바람불어 좋은 날>(2위),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6위), < 과부춤 >(8위) 등 무려 네 편이나 포함될 정도였다. 80년대 이후 한국의 영화평론가들이 이장호를 가장 많이 언급한 까닭은 6,70년대 한국영화의 전통을 흡수하여 80년대에 쏟아낸 피드백 장치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장호 감독보다 여러모로 선배격인 감독들과 동년배 감독들도 그러한 역할을 했지만 그가 유독 돋보인 까닭은 가장 충무로적으로 자라났으면서도 가장 격변기의 청년의식을 잘 대변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풍부한 공식 기억이 현재의 관객들에게 기억되지는 않고 있다. 또 한국영화를 ''직업적으로'' 기억하는 평론가나 학자들 사이에서도 잊혀지고 있다. 그 망각은, 현란한 변화로 압축할 수 있는 21세기식 변화에서 가장 큰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다른 이유 또한 없지 않을 것이다. 두 가지 이유 즉, 80년대식 시선으로 이장호 의 영화들을 바라보는 방법을 잊어버린 집단 기억 상실증 혹은 현재의 시각으로 봤을 때 뭔가 석연찮은 미학의 부재 등이 그 망각 현상을 초래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는 이장호의 시대였다. 2. 이장호 라는 상처 이장호 는 < 별들의 고향 >(1974)으로 감독길로 들어섰고 다행히 이 작품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청춘의 아름다움과 애정을 노래한 < 어제 내린 비 >(74), < 너 또한 별이 되어 >(75), <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 >(75) 등을 연거푸 만들던 중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5년간의 강제된 공백기간을 가졌다. 당시의 한국은 남자머리가 길다고 파출소에서 강제로 머리를 자르거나 길을 가는 여자를 불러 세워 미니 스커트의 길이를 자로 재던, 말도 안되던 시절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가혹한 불행의 시기였지만 대통령의 부하가 대통령에게 총을 겨눌 정도로 국민들의 억제된 민주화 요구가 서서히 폭발 직전에 다다른 그 시절은 상대적으로 그의 의식이 첨예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기간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 바람불어 좋은 날 >(80)은 바로 그 시절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시골에서 상경한 세 청년이 결국 서울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그린 이 영화는 독재 정권의 경제 개발과 그 개발이 가져온 빈부의 격차와 인간성의 파괴 등을 담은 것이었다. 그는 시대의 상처를 자신의 재기작에 심었던 것이었다. < 바람불어 좋은 날 > 이후 < 어둠의 자식들 >(81), < 낮은 데로 임하소서 >(81), < 바보선언 >(83), < 과부춤 >(83)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회성 드라마 혹은 관객과 현실을 이어주는 영화들이 있는가하면, 여러모로 동의를 구하지 못한 작품인 < 일송정 푸른 솔은 >(83)이나 < 무릎과 무릎사이 >(84), < 어우동 >(85)같은 가벼운 포르노 그라피, 그의 부정적인 재능이 결집된 < 이장호의 외인구단 >(86), < 와이의 체험 >(87) 등이 그의 작품연보를 채우고 있다. 그래서 그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무척 힘들다. 사회 반영의 의지, 흥행 집착, 작가의 지향 등이 마구 뒤섞인 그의 작품연보는 보는 이들은 물론 본인조차 무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아무튼 그는 어떤 것이라도 다 할 수 있었지만, 어떤 것을 만들어도 불안한 기간을 거치면서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를 내놓았다. 평자들의 평가가 엇갈리기는 해도, 이 작품에 대한 견해는 가장 진지하면서도 가장 실험적인 그리고 이야기와 형식의 독특한 경지를 확보한 것이라는데 대체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장호 는 이 작품에서 민속신앙과 우리 민족의 용해된 삶, 역사적 비극으로부터 가차없이 침범 당하는 개인의 삶, 분단과 통일에 대한 뒤틀린 견해로 가득찬 사회 등을 풍부하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조명하고 있다. 이 영화만 본다면 그는 작가이자 격조 높은 예술가였다. 그러나 예술가이면서도 그는 영화 제작자였다. 판영화사를 차려서 우습고도 야릇한 작품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장호를 근대 한국의 상처이자 제대로 자랄 수 없었던 1980년대 한국 영화의 상처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상처의 정확한 문맥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그의 영화와 행적을 통하여 우리는 한국영화를 이해하는 몇 가지의 개념들을 파악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한국영화의 모더니티, 신파성, 한국형 내러티브와 스타일, 집단주의, 사회문화적 맥락 등은 이장호 를 통하여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1980년대 한국영화의 뉴 웨이브, 이장호]({영상문화정보}, 2002년 여름호)에 실린 글을 토대로 다시 쓴 글이다. 이효인 (영화평론가,경희대교수) / 2003년 <프로필> 1945년 5월 15일 서울 출생 1966년 홍익대학 미술대학 건축미술과 2년 수료. < 작품 연보 > 1974 '' 별들의 고향 ''감독 데뷔 제13회 대종상 신인감독상 수상 제11회 한국 연극 영화 예술상 신인상 수상 1975 어제 내린 비 / 너 또한 별이 되어 1976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 1980 바람불어 좋은 날 제19회 대종상 감독상 수상 제17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영화부문) 작품상ㆍ대상 수상 1981 어둠의 자식들 (흥행 베스트) /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1982 낮은 데로 임하소서 제21회 대종상 작품상ㆍ감독상 수상 제18회 한국연극ㆍ영화예술상 작품상 수상 1983 일송정 푸른 솔은 제 22회 대종상 우수작품상 수상 1983 바보선언 시카고 국제영화제 본선 진출, 'OUTSTANDING OF MERIT' 수상 1984 과부춤 일본 키네마준보 우수외국영화에 선정 1984 무릎과 무릎사이 (흥행 베스트) 1985 어우동 (흥행 베스트) 1986 판영화 설립. 대표이사 취임 1986 이장호의 외인구단 (흥행 베스트) 1987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제2회 동경 국제영화제 국제비평가상 수상 1987 Y(와이)의 체험 1988 바보선언 ''과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 베를린 국제영화제 영인터내셔널포름 부문 동시출품으로 ZITY상, CALIGARI상 각각 수상 1988. 9. 제 26회 뉴욕 필름페스티발 선정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 1990 미스 코뿔소 미스터 코란도 1992 명자 아키꼬 쏘냐 1995 천재선언 제9회 기독교문화대상 영화부문 수상 < 주요 경력 > 1996년∼2000년 8월 31일 - 중부대학교 연극영화과 부교수. 1997년 - 부천시 영상도시화 PROJECT 연구원 1997년 - 제1회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1999년 - 창작 오페라 ''황진이'' 연출, 예술의 전당<오페라하우스> 공연 2000년 - 중국문화부초청 8월 24일, 25일 북경 21세기극장 오페라 ''황진이''공연 연출 2000년 - (사) 한국영화감독협회 부이사장 2001년 - 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 TM 공동개최기념공연 오페라 ''황진이'' 도쿄 신국립극장공연(4월 15ㆍ16일) 연출 2001년 - 전주시 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2002년 - 미주 한국일보 초청 오페라 ''황진이'' LA -Hollywoo d KODAK 극장 공연 (8월7. 8일) 연출 2002년 11월 서울시문화상 수상. 2003년 현재 - 전주대학교 예체능영상학부 연극영화전공주임교수 < 주요 논문 > 「부천 영상산업화 연구보고서 」(공동), 부천시 , 1997년. 「일본문화개방 이대로 좋은가?」(단독), 아태평화재단 , 1998년. 「큰 정신 작은 영화」(단독), 한성대학교 , 1999년. < 주요 저서 > 「모두 주고 싶다」 태멘출판사 , 1980년 「바보처럼 나그네처럼」 도서출판 산하, 1987년 < 기타 영상제작배급실적 > 1986년 - 이장호의 외인구단 제작배급 1987년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제작배급 1987년 - Y의 체험 제작배급 1988년 - 깜동 공동제작배급 1988년 - 이장호의 외인구단2 공동제작배급 1989년 - 독일 이탈리아 합작영화 '' 모모 '' 수입배급 1989년 - 베르린 국제영화제 은곰상 수상작 ''죄''(영국제작)수입배급 1989년 - 미스코뿔소 미스터코란도 제작 배급 1990년 - 미국영화 ''헬레이저'' 수입배급 1991년 - 미국영화 '' 헬 바운드 '' 수입배급 1992년 - ' '숲 속의 방 '' 제작배급 1992년 - '' 핸드백 속 이야기 '' 제작배급 1994년 - KBS 텔레비젼 특집드라마 3부작 ''너의 뺨에 입 맞추리'' 외주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