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길X김재욱] 나쁜남자의 연인 (나쁜남자 패러디)
- 제작년도
- 2010
소실된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나는 최대한 이들의 원래 모습 그대로를 상상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김기덕 의 1969년 작 < 흑장미성의 미녀 >에 대한 글을 쓸 때는 그게 잘 안 된다. 김기덕 자신도 그게 쉽지 않을 것이다. 강조원이 쓴 이 영화의 오리지널 각본은 척 봐도 해머 호러 영화나 로저 코먼의 에드거 앨런 포 영화에 나올 법한 장엄한 유럽의 대저택이나 고성을 요구한다. 제목부터 보라. <흑장미성의 미녀>! 빰, 빰! 빠! 5, 60년대 해머 영화의 컬러풀한 세트가 떠오르지 않는가? 오프닝 크레디트에 깔리는 음악으로는 이런 걸 상상하시면 되겠다. James Bernard - Vampire Rhapsody 아쉬워라. 이 영화엔 흑장미성이 안 나온다. 대신 나오는 건 흑장미관이라는 시골집이다. 야심 차게 제목에 성이라고 박아놨는데 조국의 현실이 못 따라준다.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가지고 있는 걸 모아 대신 쓸 수밖에. 물론 피터 쿠싱이나 잉그리드 피트 대신 김희라 와 남정임 , 윤소라 를 캐스팅할 수밖에 없었던 거고. 기영욱과 한지숙이라는 20대 청춘이 주인공이다. 영욱은 신문사 사회부 ‘민완’ 기자이고 지숙의 남자친구이다. 척 봐도 지숙은 영욱보다 몇 단계 위인 부잣집 딸이다. (이런 커플링에 대해서는 저번 연재분을 참고하시길.) 지숙은 다음과 같은 애절한 편지를 받고 여학교 때 단짝친구였던 민혜련을 방문하려는 중이다. “지숙아 지숙이밖에는 아무도 호소할 데가 없기에 이 편지를 써! 지숙이 나를 구해 줘! 나는 지금 어떤 생명의 위협 앞에 벌벌 떨고 있어! 자세한 얘기는 밝힐 수 없지만 너무나 무서운 사실이 내 주변에 일어나고 있어. 지숙이 나를 도와 줘! 아 불쌍한 혜련이를 구해 줘! 아 무서워! 흑장미관 혜련이로부터” 옛 단짝친구에게 이런 편지가 왔다면 귀찮은 남자친구 없이 혼자 가야 하는 건데 말이다. 하지만 당시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 리가 없다. 당연히 영욱은 지숙을 따라나선다. 지문은 흑장미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두 사람의 시야에 석양의 역광을 받아 검게 우뚝 솟는 삼 층 건물. 지붕은 화재로 내려앉고 기둥만이 솟아 있다. 어떤 귀기마저 감돈다.” 김기덕 과 그의 미술팀이 작가의 야심을 얼마나 만족시켰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해머 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하련다. 계속 이어지는 장면도 마찬가지. ‘어둠 속에 백발 흑의의 노인이 서 있지 않은가. 마치 중세기 서양의 고성에 사는 사람과 같은 풍모다’같은 지문을 보라. 감독을 대신해서 작가에게 괜히 미안해진다. 지만이란 이름의 그 노인의 안내를 받아 흑장미관으로 들어간 두 주인공은 ‘하얀 까운에 긴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돌아서 있는 여인’이며 ‘창백한 얼굴에 가끔 경련이 스치고 우수 깃든 눈에 어떤 슬픔이 잠겨져 있는’ 민혜련을 만난다. 편집자가 밑에 윤소라의 사진이라도 한 장 박아주었으면 좋겠다. 잉그리드 피트 이름을 들먹이며 투덜거리긴 했지만 이국적이고 선이 굵은 미인이었던 윤소라는 지숙 역의 동글동글 남정임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임팩트가 있었을 것이다. <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 >의 윤소라 혜련의 사연은 무엇일까. 집에 귀신이 나온다는 것이다. 입에서 피를 흘리며 나타나는 머리를 푼 여인. 이 정도면 같은 학교를 다닌 단짝 친구가 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는 이상한 믿음 자체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저택엔 막 교도소에서 나왔다는 혜련의 먼 친척인 달수가 산다. 평판 나쁜 남자랑 같이 사는 외딴 집에 단짝 친구를 불러들인다? 한밤중. 지숙과 영욱이 ‘드라큐라 엄마 같은 심부름하는 할멈’, 하얀 유령처럼 생긴 빨래, 사람 다리처럼 생긴 나무떼기의 습격을 받으며 저택을 수색하는 동안, 고고하게 혼자 피아노를 치고 있던 혜련은 귀신과 마주친다. 바람에 꺼진 촛불을 다시 켜는 동안 뒤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니 피아노가 혼자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비명 소리를 듣고 두 주인공이 달려왔을 때는 피아노는 멀쩡하다. 아침에 수상쩍은 남자 달수는 의외로 여기서 정보전달자 역할을 한다. 달수 어머니가 이 저택에 살았을 때 억울한 일을 당해 독약을 먹고 죽은 여자의 유령이 나왔고 그 유령을 본 혜련의 할머니와 어머니 모두 미쳐 죽었고... 그날 밤은 더 파란만장하다. 드디어 같이 자다가 없어진 혜련을 찾아 나섰던 지숙은 영욱과 함께 혜련이 말한 산발한 여자 귀신을 목격한다. 귀신을 쫓아가던 둘은 기절한 혜련을 안고 나오는 노인과 마주친다. 잠시 뒤 검은 복면을 쓰고 지하실을 털러 내려간 달수가 커다란 검은 상자를 낑낑거리면서 여는데, 아까 본 여자 귀신이 그 안에서 튀어나와 달수를 덮친다. 달수 퇴장. 하지만 그리워하지 마시길. 달수가 남긴 빈자리가 그렇게 아쉬웠던지 작가는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곧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킨다. 혜련의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데려와 키웠다는 벙어리 꼽추이다. 포스터 다시 밤.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여자 유령 때문에 지숙과 혜련이 기절하고 비명 지르고 달아나는 동안, 일 때문에 돌아간다 거짓말을 하고 혼자 떠났다가 몰래 흑장미관으로 돌아온 영욱은 지만 노인이 지하실에서 달수의 시체를 꺼내 땅에 묻는 걸 발견한다. 지만 노인은 혜련을 놀라게 해서 죽이면 전 재산이 자기 것이 될 거라고 믿고 귀신 흉내를 냈으며, 그 사실을 눈치챈 달수도 죽였다고 자백한다. 지숙은 아무래도 그 귀신은 여자 같았다며 영욱의 설명을 믿지 못하지만 영화가 사라져버렸으니 정말 그런지 우리가 직접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이 점점 지겨워진다. 이야기가 재미없어서 그런 게 아니다. 반대로 필름이 발견되어 영상자료원에서 8월쯤에 호러 특집으로 튼다면 관객들 반응이 썩 좋을 거 같다. 호러 효과는 별 게 아니겠지만 뻔뻔스러운 유원지 스타일의 재미는 상당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직접 보면 재미가 있을 것 같다고 해도 귀신 나타났다, 여자들 비명을 지른다, 귀신 사라진다...를 끝도 없이 반복하다 보면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지치기 마련이다. 이런 이야기는 글로 요약하는 것보다 이 유튜브 클립을 소개하는 것이 더 이해가 빠르다. Scooby Doo Openings 내가 불평하는 동안 각본가는 서양 공포 영화와 추리 소설을 보고 읽으면서 품었던 마지막 판타지를 현실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아까 달수가 끙끙대며 열었던 상자를 기억하는가? 그 밑에 비밀통로가 있었다. 수색하러 들어갔던 지숙과 영욱은 그만 꼽추가 입구를 막아서 갇히고 마는데, 다행히도 다른 출구가 있어서 빠져나온다. 알고 봤더니 그 꼽추는 꼽추도 아니었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밤이다. 이번엔 짧게 끝난다. 영욱의 방에 꼽추가 칼을 들고 들어온다. 기다리고 있던 영욱이 반격한다. 혜련의 방에는 귀신이 칼을 들고 들어온다. 지숙을 찌르려는 귀신을 영욱이 막는다. 귀신은 달아나다가 떨어져 죽는다. 가면을 벗겨보니 혜련이다. 그러고 보니 혜련과 귀신이 같은 화면에 나왔던 적이 없긴 했다. 이 줄거리 요약을 읽은 독자들은 몰랐겠지만. 영욱은 혜련이 정신병을 앓고 있었고 화재도 혜련이 친척들을 내쫓기 위해 낸 것이고, 꼽추는 계속 혜련을 돕고 있었던 것이고, 귀신소동도 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며 녹음기에서부터 피아노 줄에 이르는 온갖 장치들을 동원해 설명하는데, 그런다고 이 이야기가 설명이 될까? 성도 안 나오면서 < 흑장미성의 미녀 >란 제목을 씩씩하게 달고 나온 영화에게서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정신병을 앓던 단짝 친구가 자기를 죽이려다 죽었다는 사실을 막 알게 된 여자가 “노 노 천만에 이제 모험하군 담을 쌓기로 했어요. 그저 겁많은 주부가 될래요” 따위의 대사나 읊으면서 남자친구에게 까르르거리는 걸 보면 이 여자, 신경이 좀 이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90년대 초부터 시작된 김소영 의 비평작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나아가 그녀는 이제 영화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영화를 만들기까지 하고 있다. 무언가가 계속되고 있을 때 그것을 총체적으로 되돌아볼 길은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만 90년대의 페미니스트 비평가로서의 그녀의 면모만을 생각해보기로 한다. 사실 90년대에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페미니즘이 약진했던 분야가 바로 영화비평이 아니었나 싶다. 어쩌면 영화 자체가 여성 친화적인 매체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문학이나 미술에 비해 여성 비평가들의 진입이 유독 활발해 보이는 것이 단지 착시현상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김소영 의 활동이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이유는 그것이 좀더 조직적이고 학문적인 양상을 띠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화적 이력 초기에 ‘여성영상집단 바리터’를 결성했던 것, 여러 연구자들을 아울러 『시네-페미니즘, 대중영화 꼼꼼히 읽기』(과학과 사상, 1995)를 출판했던 것은 모두 그러한 활동방식의 소산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서구에서 페미니즘 영화론의 부싯돌이 된 것은 68혁명 이후의 담론적 자장 안에서 ‘시각적 쾌락’의 남성적 성격에 주목한 로라 멀비(Laura Mulvey)의 글이었고, 이후 그것을 대리보충하는 논의들이 속속 잇따르면서 시네-페미니즘의 긴 역사를 형성해갔다. 이들은 주로 여성 인물과 그들의 욕망이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방식을 집중적으로 관찰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가부장제 사회의 욕망에 부합하거나 저항하는지를 분석했다. 김소영 의 여성주의 비평도 큰 가닥은 그와 같았다. 동시대 영화에 관한 단평들을 모은 『영화 리뷰』(한겨레, 1997)를 보면 그녀가 4년여 동안 부지불식간에 걸러낸 영화들 중 상당수가 여성영화들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은 변영주 , 임순례 , 리브 울만, 마사 쿨리지, 제인 캠피온 등의 여성 감독들과 그녀들의 영화들, < 개 같은 날의 오후 > < 코르셋 > < 두 여자 이야기 > 등 남성 감독이 만든 여성영화들,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재현되는 여성 주체성의 문제를 고루 다루고 있다. 한편 『시네마, 테크노 문화의 푸른 꽃』(열화당, 1996)에서 그녀는 아예 한 장을 ‘시네 페미니즘, 성의 정치학’에 할애하며 이론과 비평의 결합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 쉬리 >와 < 공동경비구역 JSA > 등 이른바 2000년대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에 대한, 페미니즘적 관점에서의 비판적 주목으로 이어진다(「사라지는 남한 여성들」, 『아틀란티스 혹은 아메리카』, 현실문화연구, 2001). 시네-페미니즘에 대한 김소영 의 접근법의 특이성은 그녀가 역설적으로 ‘어떤 페미니즘’으로부터의 거리두기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여성들 간의 차이를 대문자 여성으로 환원시키는 페미니즘으로부터, 그리고 80년대 이래로 한국사회에서 성취했던 여성해방운동과 단절된 채로 유포되고 있던 페미니즘 담론의 현학으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비로소 페미니즘 본연의 가치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대안이 구태의연한 민족주의 담론일 수 없음을 김소영은 이후의 행보를 통해 보여주었다.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그녀는 페미니즘적 관점에 입각하여 내셔널 시네마를 비판하는 작업으로 전환하는 한편, 동아시아 영화를 대상으로 트랜스내셔널리즘의 쟁점들을 제기하는 작업으로 입각점을 옮겨가게 된다. 김기덕 의 < 나쁜 남자 >는 한국의 페미니즘 비평가들을 가장 자극했던 영화였고 그런 의미에서 2001년은 한국 페미니즘 영화비평계의 존재를 가장 극적으로 증명한 해였다. 그녀들의 그 열기는 1997년에 창립되어 성공적으로 안착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속에서 지금까지도 매년 되살아나고 있다. 여성영화제는 어쩌면 한국 페미니즘 영화비평사가 남긴 가장 가시적인 유산일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누구나 김소영 을 볼 수 있다.
데뷔작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에 이어 < 가족의 탄생 >, < 만추 >로 이어지는 김태용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늘 예상을 벗어나곤 했다. 그러나 일관된 주제의식도 손에 잡히는 형식도 없지만 김태용의 작품에는 늘 어떤 ‘무드’가 발견된다. 이제 필름이 유실되어 누구도 그 실체를 확인 할 수 없는 신성일 주연,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년)를 시작으로 사이토 고이치 감독의 일본영화 <약속>(1972), 김기영 감독의 < 육체의 약속 >(1975년), 김수용 감독의 < 만추 >(1981년)로 이어지며 리메이크 되었던 익숙한 이야기를 김태용 감독이 다시 리메이크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분명 다른 영화가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그것은 <만추>라는 원형 위에 더해질, 새로운 ‘무드’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2010년 김태용 감독을 만나며 < 만추 >의 무대는 미국 시애틀로 옮겨간다. 남편을 죽인 죄로 7년 째 복역 중이던 애나(탕웨이)에게 어느 날 어머니의 죽음이 전해진다.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72시간의 특별휴가를 받은 애나는 시애틀 행 야간버스에 오르고, 그곳에서 누군가에게 쫓기듯 뛰어든 남자 훈( 현빈 )을 만난다. 마음과 몸이 굳게 닫쳐버린 애나와는 달리 이 남자, 훈은 몸도 마음도 활짝 열려있다. 늦겨울과 한여름의 기운을 가진 남과 여. 가슴팍에 두 손을 꽂은 채 걷던 남자와 땅을 향해 두 팔을 늘어트린 여자는 어느 늦가을, 안개 낀 도시의 모퉁이에서 잠시 서로의 손을 마주잡는다. 사랑의 끝은 무엇일까, 결혼일까 아니면 이별일까. 만약 그렇다면 애나는 이미 그 종점의 풍경을 모두 봐 버린 여자다. 결혼서약을 깨고서라도 복원하고 싶었던 운명적인 사랑은 그저 ‘남의 포크를 탐하던’ 남자의 이기심으로 종결된다. 애인은 떠났고 남편은 죽었고, 사랑 따윈 필요 없다. 그런 그녀 앞에 바람처럼 훈이 나타난다. 그는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줄 수 있다”고 말한다. 좋은 남자를 원하면 좋은 남자가, 나쁜 남자를 원하면 나쁜 남자가 되어준다고. 그리고 이 완벽한 타인들은 짧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밥을 먹고, 놀이동산에 가고, 시장을 구경하고, 잠깐 서로의 육체를 원하기도 하고, 마침내 입술을 나누기도 한다. 그래서 그것은 사랑이었을까? < 만추 >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냥 누구랑 같이 있는 거... 좋잖아요?” 사랑의 과정과 결과, 혹은 시간에의 강박을 버리고 72시간이라는 스톱워치를 켠 채 시작되는 < 만추 >는 오히려 찰나를 영원으로 만드는 실험을 시작한다. 애나와 훈은 각각 정반대편에서 출발해 서로 잠시 스쳤다가 결국 또 다시 반대편에 당도한다. 깃털보다 가볍게 살던 남자는 조금 무거워지고, 바윗덩이 같은 추를 안고 살던 여자는 그 무게를 조금 내려놓는다. 낯선 곳에서 만난 남녀가 짧은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지만 < 비포 선라이즈 >같은 순진한 설렘도 < 비포 선셋 >같은 막연한 희망도 남기지도 않는다. <만추>는 사건의 축적에는 별 관심이 없다. 드라마틱한 일들은 모두 이 교차점 이전 혹은 이후에 일어난다. 대신 그래프가 교차하는 그 3일간의 여정을 고요하게 응시하며 훈과 애나 사이를 떠도는 미세한 무드의 변화에 집중한다. 쓸쓸함에서 따뜻함으로, 김우형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 파주 >에 이어 안개의 도시에 출몰한 유령들의 풍경을 탁월하게 잡아낸다. 훈과 애나는 한국어와 중국어가 아닌 영어로 소통한다. 하지만 서로 온전하지 않은 타국의 언어는 훈이 “하오(좋네요)”와 “화이(나쁘네요)”만을 반복하며 애나의 지난 아픔을 경청해주는 장면처럼 언어적 이해를 뛰어넘는 기적을 연출한다. 그렇게 말을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과 물리적 시간에 대한 사랑의 신화를 깨며 그들은 마침내 ‘늦은 가을(晩秋)’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가득 찬 가을(滿秋)’을 맞이하게 된다. 어쩌면 긴 여운을 남기며 애나가 기다리고 있는 건 훈도, 다가올 봄도 아닐 것이다. 인생에서 어떤 사랑은, 가을 날의 짧은 며칠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