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 하프 위크
- 감독
- 아드리안 린
- 제작년도
- 1986
- 출연
- 미키 루크, 킴 베이싱어, 마가렛 휘튼, 크리스틴 바란스키, 데이비드 마굴리스, 카렌 영
갓 제대하여 고향인 섬으로 돌아가던 도경은 배에서 가인을 만난다. 바다로 뛰어들 것처럼 위태로운 그녀를 잡아주고, 그녀에게 빠져든다. 선배가 데리고 간 술집에서 가인을 만나고, 하룻밤을 보낸다. 그날 밤, 가인은 말한다. 나랑 결혼할래? 놀란 도경에게 농담이라고 말하지만 이후 벌어지는 상황은 뭔가 이상하다. 가인은 다시 결혼을 말하고, 놀라 그녀를 피하던 도경을 만나러 그의 집으로 간다. 도경이 확실하게 거부 의사를 밝히자 얼마 뒤 가인은 도경의 아버지를 유혹해 섹스를 하고, 그의 집에 머무른다. <사랑받지 못한 여자>의 장르를 한국 분류에 따르자면 에로영화다. 일본에서는 핑크 영화라고 부르는 장르. 하지만 에로영화는 편의상의 분류일 뿐이다. 원칙적으로 본다면 드라마, 로맨스에 포함되고 세부 장르로 가면 에로틱 로맨스 정도로 부를 수 있다. 정사 장면을 어떻게 다루는가, 영화의 주제가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차이가 지는 정도이고, 포르노와는 다른 장르다. < 아메리칸 파이 >나 < 포키스 > 등도 섹스 코미디 이전에 코미디인 것처럼. 일본은 AV가 나오기 전까지는 핑크 영화만 존재했다. 포르노가 금지된 한국은 70년대의 호스티스영화와 토속 에로영화에 이어 < 애마부인 > < 매춘 > < 뽕 > < 변강쇠 > 등이 있었고 비디오 시장이 커지면서 < 야시장 > < 젖소부인 바람났네 > <바람꽃> <자유학원> 등 비디오용 에로영화가 양산되었다가 시장 축소와 함께 몰락했다. 근래 IPTV 시장이 확장되면서 다시 에로영화들이 활발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조잡한 에로영화들만 양산되는 것은 불만이다. 가끔 볼만한, 저예산이지만 나름의 매력을 가진 에로영화들이 보이지만 극소수다. 아무리 옷을 벗고 나체로 노골적인 섹스 장면을 길게 보여준다고 해도 끌리지가 않는다. 저예산의 한계를 지닌 에로영화에서 대단한 스펙터클이나 세트를 기대하기는 힘들지만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양으로 본다면 < 투 문 정션 >이나 < 나인 하프 위크 > 정도의 영화가 가끔은 나와 줘야 하지 않을까. 그런 에로영화를 찾아서, 수많은 에로영화를 보고 또 보다 멈추고는 하지만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 사랑받지 못한 여자 >도 분류상으로 에로영화에 속한다. 이 영화를 고른 대부분이 에로영화를 원하며 보았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사랑받지 못한 여자>의 감상을 적은 글에서, 에로영화인데 예술을 추구했다, 는 말이 보인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영화를 만들면서 오락과 동시에 예술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많은 에로영화들이 오로지 보여주는 것에만 몰두하며 그 이상의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사랑받지 못한 여자>는 에로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만족을 준다. 그들이 섹스를 하는 장면은 당위성이 있고, 때로 절박하며 감정적으로 고양되어 있다. 관객이 몰입하게 만든다. 가인을 연기하는 김화연은 아름답다. 세파에 지친 여인이 보여주는 허무와 고통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 그녀의 얼굴과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물론 섹스 씬이 야한 것은 기본이고. 그것만이 아니다. 단지 배우가 야하고 아름답고, 섹스 장면이 흥분되는 것뿐이라면 비교적 세련되게 만든 에로영화일 뿐이다. < 사랑받지 못한 여자 >에는 그 이상이 있다. 가인은 묘한 여자다. 술집에서 적어도 10년은 굴러먹은 여자가 멀리 섬까지 내려온다는 것은 일종의 전락이다. 가인의 미모를 본다면, 아마도 그녀의 어떤 태도나 극적인 상황이 그녀를 이곳까지 끌어내렸을 것이다. 그녀는 늘 말한다. 죽는 것보다 혼자인 것이 더 싫고 무섭다고. 그녀를 좋아하는 것 같은, 좋아한다고 믿는 도경을 만나자 가인은 집착한다. 같이 있자고, 결혼하자고 무조건 들이댄다. 세간의 상식 같은 것은 애초에 무시하고 가인은 자신의 의지만을 관철시켜 간다. 도경의 아버지와 섹스하고, 함께 살고 그러고도 다시 도경을 유혹한다. 너와 함께 있고 싶어 그런 것뿐이라고. 그녀가 누구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첫 장면에서 가인은 여자아이의 사진을 보고 있다 바다에 날려버린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를 낳았고,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녀는 아이를 잃은 후 상실감으로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일까? 어쩌면 모든 것은 망상이 아닐까. 아이를 낳고 잃은 것도, 상실감과 외로움도 모두 그녀의 파괴적인 망상에 비롯된 것이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오히려 가인의 이해할 수 없는 모든 행동이 설명 가능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사실일 경우에도 설명은 가능해진다는 것이 난점이다. 애초에 가인의 행동은 비상식적이고, 일반적이지 않으니까. 그녀의 이유는 그 무엇이든 가능하고, 그렇기에 그녀의 정체를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모호하다. < 사랑받지 못한 여자 >는 영화 속에 보이는, 두 남자에게 결국 사랑받지 못하는 가인의 모습이다. 또한 사랑받지 못하여 자기파괴에 탐닉하는 그녀의 과거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랑받지 못한 여자>를 일종의 판타지이자 스릴러로 위치하게 한다. 정말로 아이 때문이었다면 가인은 전형적인 신파의 주인공이다. 강박적인 망상에 휘말린 위험한 여자였다면 또한 스릴러 영화의 공식을 따라갔을 것이다. <사랑받지 못한 여자>는 그 어느 것도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가인은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는 가련한 여인일 뿐이다. 섹스의 순간에만은 너무나도 열정적이며 쾌락의 지점이 무엇인지 아는 위험한 여인인 동시에. < 사랑받지 못한 여자 >는 가인의 영화다. 김화연의 영화이기도 하다. 그녀가 매혹적이지 않다면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지 않는다. 그녀를 보는 순간에 위험한 매력이 느껴지지 않으면 영화를 보는 내내 생경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수 없는 이상하고 위험한 여자. 가인에게는 그런 매혹이 있다. 흐트러진 헤어스타일과 때로 마른 입술까지도 남자를 끌어당긴다. 게에게 물린 도경의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아주는 가인의 얼굴은 아름답고 한없이 야하다. 결혼은 아니지만, 그녀가 끌어당긴다면 아마 바닥까지 그 순간에는 내려갈 것 같다.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 있고, 마지막까지 그녀를 궁금하게 한다는 점에서 <사랑받지 못한 여자>는 성공적이다. 저예산의 에로영화는 한계가 많다. 메이저에서 만드는 영화들과는 애초에 출발 지점부터가 다르다. 그런 점에서 < 사랑받지 못한 여자 >는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 에로영화를 보는 관객의 목적에 충실한 동시에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를 정확하게 담았다는 점에서. 단지 이야기가 아니라 가인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그녀로 인해 굴절되어 가는 도경과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불확실성을 또한 보여주고 있다. 김화연이라는 배우의 탁월한 연기를 끌어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수 있다. 노진수 감독의 에로영화를 계속 보고 싶다. 그가 만들어내는 더욱 다양한 인간의 성벽 그리고 섹스와 죽음을 보고 싶다.
한국영화걸작선과 < 무릎과 무릎사이 >( 이장호 , 1984)의 만남. 만약 이 ‘기이한 조합’에 고개를 끄덕인다면, 아마도 당신은 성적 판타지가 만개하던 중고등학교 시절에 <무릎과 무릎사이>를 본 관객일 가능성이 높다. 때로 어떤 영화는 잊히지 않는 몇몇 장면을 뿌리 삼아 밑도 끝도 없이 무럭무럭 자라다가, 어느새 ‘상상의 영화’가 되어 원작을 압도하곤 한다. <무릎과 무릎사이>가 바로 그런 영화다. (관람 당시 중고생이었던) 한 남자의 인생을 관람 이전과 이후로 갈라놓은 < 나인 하프 위크 >(애드리안 라인, 1986)에 필적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한국영화. 그것이 <무릎과 무릎사이>다. 강렬한, 너무나도 강렬한 이미지 < 무릎과 무릎사이 >는 3S(섹스, 스포츠, 스크린)로 대변되는 1980년대를 넘어 지금까지 등장한 그 어떤 한국 영화보다 선정적인 제목을 지닌다. 특히 그 주인공인 이보희 가 의자에 앉아 무릎을 치켜세운 모습을 전면에 노출한 포스터는 이 작품에 농밀한 느낌을 더한다. <무릎과 무릎사이>의 제목이나 포스터의 관능에 견줄만한 영화는 < 올 레이디 두 잇 >(틴토 브라스, 1994)이 유일하다. 어쨌든, <무릎과 무릎사이>는 제목과 포스터에서 남성 관객의 에로틱한 욕망을 낚아채려 했고, 그해 한국영화 흥행 2위라는 성적은 이 전략이 꽤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장호 는 이 영화의 성공과 함께 1980년대 중반 충무로를 대표하는 흥행사로 재도약한다. < 무릎과 무릎사이 >는 페미니즘 진영에서 경멸할 만한 것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실제로 강간에서 쾌감을 얻는 여성 주인공 자영( 이보희 )의 캐릭터나, 여성의 신체를 파편화하여 관음증적 쾌락의 도구로 삼는 연출, 타락한 여성을 남성이 용서하고 구원하는 도식적 드라마 등, <무릎과 무릎사이>는 여성 비하적인 설정과 장면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것이 <무릎과 무릎사이>에 대한 비평적 접근을 가로막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무릎과 무릎사이>는 무관심 속에 버려두기에는 텍스트의 ‘비균질성’이나, 남성의 가학적인 성적 판타지를 안전하게 유지시켜주는 상업적으로 영리한(?) 스토리텔링, 그리고 무엇보다 (남성) 관객의 기억에 평생 달라붙을 만한 강렬한 쇼트의 힘만큼은 한국영화 중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 작품이다. < 무릎과 무릎사이 >에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몇몇 장면이 있다.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자영에게 그녀에 대한 소유욕으로 가득한 동창( 임성민 )이 찾아온다. 동창은 무릎을 중심으로 자영의 신체를 애무한다. 이장호 는 동창의 행동과 자영의 리액션을 과감하게 이어 붙인다. 동창의 손을 따라서 자영의 몸을 부유하는 카메라. 자영의 입술. 이 모든 것의 빅 클로즈업. 그리고 그 반복. <무릎과 무릎사이>는 관객들에게 클로즈업이 사물의 확대라는 것, 우리에게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영화적 기법이라는 것을 온전하게 가르쳐준 영화다. 이 장면이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기억에서 조금도 잊히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물론 <무릎과 무릎사이>의 압권은 비 오는 밤 벌이는 동창과 자영의 정사 장면일 것이다. 이장호는 해변 장면보다 이 장면에서 더욱 과감해진다. 폭우, 천둥, 번개와 두 사람의 정사가 앙상블을 이루면서 1980년대 한국 에로영화 중 가장 압도적인 ‘야한 이미지’를 완성한다. 어린 시절 이후 이 영화를 다시 보는 이가 있다면, 이 장면에서 의외로 노출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장면은 우리 세대에게 가장 ‘야한’ 장면으로 착시적으로 기억되어 있다. 그것이 쇼트의 힘이고, 이미지의 강렬함이다. 이장호는 신체의 노출이 아니라, 음향이 가미된 쇼트의 리드미컬한 구성만으로 그것을 성취한다.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 < 무릎과 무릎사이 >에는 두 무릎 사이를 넘어서는 또 다른 ‘사이’가 존재한다. 자영의 동생은 마이클 잭슨에 빠져있고, 이는 전통을 추구하는 자영의 연인 조빈( 안성기 )와 대조를 이룬다. 또한 억압적인 방식으로 전통적인 순결을 강요하는 어머니와 자영을 성추행하는 서양인 선생의 대립이 있다. 실제로 자영이 서양인 선생이 성추행했던 무릎에 페티시즘적 쾌락을 갖게 된 것은 억압적인 어머니에게 반항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 자영은 한국 사회가 전통과 서구화로 찢긴 지점, 바로 그 ‘사이’에 위치하는 인물이다. 달리 말해, 그녀의 페티시즘적 쾌락은 전통과 서구화의 충돌과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화적 혼란의 병적 징후인 것이다. 이장호 가 전통적 판소리와 클래식 연주의 교차 편집 등의 장면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 무릎과 무릎사이 >는 사회적 문제 제기를 위해 여성의 신체를 경유한 것일까, 아니면 여성의 신체를 탐닉하기 위한 알리바이로서 사회적 문제의식을 끌어들인 것일까? 어쩌면 19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이 이 작품을 두 질문의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당시에 이장호 는 ‘내 영화의 겉포장은 섹스, 내용물은 정치’라고 공공연히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영화에 남은 것은 내용이 아니라 겉포장이다. 한마디로, 이미지가 모든 것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