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벼락
- 감독
- 이두용
- 제작년도
- 1971
- 출연
- 박노식, 김정훈, 최지희, 독고성, 장혁, 추석양, 황백, 김칠성, 이강조, 한태일, 박종설, 장춘언, 최광호, 장인한, 김경란, 최주봉, 최재호, 황인철, 김광일, 마도식, 김홍규, 조용수, 최준, 김영인, 권오상, 박옥초
한국 장르 영화의 계보에서 이두용 감독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그는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했고, 그 모든 장르에서 뛰어난 작품성을 보여주었다. ‘액션’이 주종목이었지만, 경력 초기의 멜로드라마도 당대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 <최후의 증인>(1980) 같은 미스터리나 <귀화산장>(1980) 같은 호러 스릴러에서도 그의 장기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병태의 감격시대>(1975) 같은 슬랩스틱 코미디를 만들기도 했고, <경찰관>(1978), <장남>(1984) 같은 리얼한 톤의 드라마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시대극이라는 범주 안에서도 궁중 사극인 <내시>(1986)와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 같은 엄격한 형식미와 <뽕>(1985) 같은 서민 희극을 오가며 수작을 뽑아냈다. <초분>(1977), <물도리 동>(1979), <피막>(1980) 등에선 샤머니즘이라는 테마를 다루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인 <아리랑>(2003)은 흑백 무성영화였다. 한국영화사에서 이두용 감독처럼 넓은 스펙트럼을 지녔던 감독은 흔치 않다. 물론 이러한 다재다능함을 긍정적으로만 볼 순 없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그는 생존을 위해 영화산업이 요구하는 ‘제품’을 끊임없이 찍어내야 했던 감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그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1970~80년대는 한국영화의 거대한 모순기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에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영화는 1970년대에 서서히 하강기를 맞이했다. 1973년에 제정된 ‘유신영화법’은 국책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영화진흥공사’를 설립시켰다. 외화 수입이 제한된 상황에서, 영화 산업은 흥행성이 보장된 외화 쿼터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허가제에 의해 살아남은 몇몇 영화사들은 쿼터 확보를 위해 한국영화를 만들었고 ‘방화’라는 이름으로 비하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감독이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시스템에 철저히 적응해 기능공이 되는 것이었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도대체 한 감독이 만든 영화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일관성이 없는” 필모그래피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흥행 감독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데뷔 초기 합동영화사의 전속 감독이 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던 그는 반복되는 장르 영화 속에서 서서히 장인이 되었다. 다행히 그는 거기서 머물지 않았고 1970년대 말부터 서서히 작가의 영역으로 옮겨 갔다. 이것은 특유의 기질 때문이었다. 이두용 감독의 인생과 영화 경력을 살펴보면, 그에겐 때론 무모하게 보일 정도의 개척자 정신이 있었다.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 그는 멈추는 순간 뒤처진다는 걸 깨달았다. 기본적으로는 산업의 요구에 순응하면서도, 이두용 감독은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갔다. 당대의 트렌드였던 신파 멜로로 시작한 그의 경력은 태권도를 기반으로 한 발차기 액션 영화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후 그는 액션 연출력을 발판으로, 다른 영화인들은 모두 충무로라는 우물 안 개구리던 시절에 <아메리칸 방문객>(1976)으로 미국 로케이션 촬영을 시도한다. <피막>으로 베니스영화제에,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칸영화제에 초청 받았으며, 한국 영화감독으로는 최초로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작업한 <침묵의 암살자>(1988)를 내놓았다. 1980년대엔 자신의 제작사를 차렸고 이후 영화 수입과 극장 경영까지 겸했다. 비록 무산되었지만 1980년대엔 충무로 감독으로서 TV 영화를 연출하려 시도했고, <아리랑>을 들고 북한에 건너가 남북 합작 프로젝트를 논의하기도 했다. 흥행성과 작품성, 창작 활동과 비즈니스, 장르 영화와 작가 영화…. 그의 좌충우돌 영화 인생은 언제나 양 극단 사이에서 진동했다. <최후의 증인> 같은 영화는 검열에 의해 사지절단 되었고, IMF로 극장 사업을 접어야 했으며, 제작자의 외화 쿼터를 위해 봉사하듯 영화를 찍기도 했지만,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끊임없이 영화를 만들었다. 우리가 이두용의 영화 인생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이 부분, 즉 장르 영화 장인으로서 지녔던 생명력이다. 그 안에서 그는 자신만의 주제 의식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외국의 영화제에 의해 먼저 발견된 후 한국의 평단에 의해 평가되었다. ** 이두용 감독은 1941년(호적엔1942년)에 서울 청파동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였고, 아버지는 간장 공장 기술자였다. 학창 시절엔 친구들과 극장에 몰려다니던 활극 영화광이었고, 미술에 뛰어난 소질을 지닌 학생이었다. 영화에 대한 꿈을 점점 키워나가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 우연하게 충무로의 일원이 된다. 당시 미술 선생이 영화 포스터 그리는 일을 했는데, 심부름으로 동성영화사의 만리동 스튜디오에 갔다가 처음으로 영화 현장을 접한 것. 이후 그는 이강천 감독 연출부에서 스크립터 일을 하며 영화계에 발을 내딛었고, 1950년대 말에 몇 편의 영화를 거치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짧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스물두 살의 나이에 감독을 꿈꾼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이었지만, 부모님을 설득해 거의 집 한 채 값의 거금을 받아 <여승>이라는 영화를 직접 제작하고 연출했던 것. 하지만 극장 배급을 책임지기로 한 흥행사가 돈을 가지고 도망가면서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다. 금전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했지만 교훈은 있었다. 제대로 영화를 배운 후 감독이 되어야겠다는 깨달음이었다. 제대 후 이두용 감독은 세 명의 감독 연출부에서 일하며 많은 걸 배웠다. 전홍직 감독은 어떻게 해야 영화가 흥행하는지 잘 알고 있는 ‘기획자’였다. 일본 유학파인 김수동 감독은 콘티의 정확성과 압축해서 명료하게 표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정소영 감독은 배우의 감정을 끌어내는 데 탁월했다. 무려 7편의 영화를 함께 한 정소영 감독은 이두용 감독의 데뷔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정 감독은 <미워도 다시 한 번>(1968)으로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며 신파 멜로드라마의 트렌드를 만들어냈는데, 이두용 감독의 첫 작품 <잃어버린 면사포>(1970)도 그 계열이었던 것. 기획자 방규식은 정소영 감독의 제작부장이었고, 시나리오 작가 김수현도 정소영 사단의 일원이었다. 이 영화로 시작해 <작은 새>(1974)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멜로는 당대의 트렌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품들이었다. 가부장제에서 신음하는 여성의 비극적 운명을 강조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모성애를 그다지 강조하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대신 여성의 상황을 더욱 가혹하게 몰고, 그 기저에 ‘가난’이라는 경제적 계급 차이가 있음을 강조한다. 이런 테마는 <초분> 이후 일련의 샤머니즘 영화와 사극으로 이어지며 변형된다. 여성의 비극을 개인사의 차원이 아닌, 역사와 사회에 의해 구조화된 모순의 결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두용 감독의 전성기는 액션 장르와 함께 찾아온다. 변화의 원인은 신파 멜로에 대한 염증이었고, 좀 더 영화적인 기능을 살리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액션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는 외국 시장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는데, 이것도 액션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되었다. 영세한 제작 환경을 극복하고 외국 관객들에게 관심을 끌 만한 영화는 액션 밖엔 없었다. 박노식이 출연하는 <날벼락>(1971), 호러와 무협이 결합된 <야오귀>(1971), 범죄 액션 <체포령>(1972), 전쟁 액션<홍의장군>(1973) 등이 있었지만, 진짜 시작은 <용호대련>(1974)이었다. 그는 대규모 오디션을 통해 액션 배우를 꿈꾸는 전국의 유단자들을 끌어 모았고, 재미 교포인 ‘챠리 셸’ 한용철을 주인공으로 발차기를 중심으로 하는 태권도 액션 영화를 발명했다. 1974년 한 해에만 <용호대련>, <죽엄의 다리>, <돌아온 외다리>, <분노의 왼발>, <돌아온 외다리(속)>, 그리고 <배신자>까지 한용철 주연의 액션 영화 6편이 개봉되었는데, 이 영화들은 당대의 신드롬이었다. 하지만 한용철은 이두용 감독과 결별했고, 이후 이두용 감독은 강대희와 <무장해제>(1975)를, LA의 태권도 사범인 정준(준 청)과 <아메리카 방문객>(1976)을 찍는다. <비밀객(속)>(1976)부터 <해결사>(1981)까지는 신우철과 안태섭이 액션을 맡았고, <돌아이>(1985)는 당대 최고의 아이돌 가수였던 전영록을 카메라 앞에 세워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흥미로운 건 이두용 액션이 지닌 사회적 의미였다. 유신 헌법 이후 갈수록 엄혹해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호쾌한 발차기가 작렬하는 그의 액션은 대중에게 정서적 탈출구였고, 오승욱 감독의 표현에 의하면 “뭔가에 억눌린 모든 것을 폭발시키는 파워풀한 액션”이었다. 배우들이 “으악!” 소리와 함께 나뒹군다고 ‘으악새 영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이두용 표 액션’의 힘은 꾸준히 지속되었다. <무장해제>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실제 왕궁에서 촬영되었으며, <해결사>는 세트 없이 도심 한가운데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액션을 보여준다. <돌아이>는 카 체이스 같은 현대적 액션을 시도했다. *** 액션은 이두용 감독을 대표하는 장르지만 그는 종종 회의를 느끼곤 했다. 액션에 대한 당대의 사회적 시선은 멸시에 가까웠다. 이때 우연히 제안 받은 <초분>(1977)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커다란 분기점이 된다. 무속적인 소재를 다룬 일련의 영화들이 시작되었으며, 이 영화들을 통해 ‘억압 받는 인간’이라는 테마가 드러났다. 그리고 사극에선 이데올로기의 억압에 저항하는 자들을 통해 그 테마는 더욱 명확해진다.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가 대표적이며, 특히 이 영화의 정제된 스타일은 이두용 감독의 미장센이 정점에 올랐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세계무대에 알려진 것도 <초분> 이후 영화들 덕분이다. <피막>은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부문 특별상에 수상하는 I.S.D.A.P 상을 수상했고,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 받는다. 서구 비평가들이 처음으로 발견한 한국영화는 바로 이두용의 작품들이었으며, 혹자는 일본의 미조구치 겐지 영화와 비교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의 시선엔 오리엔탈리즘이 작용했지만, 이전까지 국내의 그 어떤 평론가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이두용 감독의 텍스트는 서구를 경유해 비로소 자국의 평단을 자극했다. <경찰관> 같은 리얼한 톤의 서민 드라마나 가족이라는 테마를 진지하게 접근한 <장남>, 실화를 바탕으로 인권 문제를 제기한 <청송으로 가는 길>(1990), 그리고 노부부의 삶을 다룬<애>(1999) 등 장르적 요소를 제거하고 정직하게 드라마로 승부할 때도 이두용 감독의 연출력은 빛난다. 특히 <장남>은 가족을 다룬 한국영화의 계보에 아직도 최고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두용 감독의 가장 위대한 영화적 유산은 <최후의 증인>일 것이다. 당대 충무로의 최대 역량이 결집되었던 이 영화는 누군가의 밀고로 혹독한 검열을 거쳐야 했고, 제작자와 감독은 검찰 조사를 받아야 했다. 영화는 한 시간 가까이 잘려나간 상태에서 상영되었고, 개봉 날 극장에 들어갔던 이두용 감독은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오고 말았다. 이후 한 세대 가까이 잊혀져있던 이 영화는 2006년 감독판으로 복원되면서 지금의 관객들과 다시 만났다. 전설이 현실이 되어 눈 앞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두용 감독은 2002년에 만든 60번째 영화 <아리랑>를 마지막으로 현업에서 물러났다. 대사 없이 초당 18프레임의 동작으로 진행되며 변사의 설명이 곁들여진 흑백 영화다. 이후 오랜 기간 동안 품어 왔던 <월광무> 프로젝트를, 남북 합작 방식으로 완성하기 위해 추진했지만 상황은 쉽지 않았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에 대해서는 애증이랄까…. 영화 때문에 겪은 갖가지 일들에 대해 후회는 안 하지만, 이젠 뭔가 내 직업에 대한 어떤 결과를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영화고, 내 존재의 이유를 영화를 통해서 드러내야 한다는 것. 영화를 통해 삶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 영화로 내 삶의 큰 매듭을 짓고 싶다.” 부디 노장의 작은 소망이 이뤄지길 기원한다. [사진1] 조감독 시절의 이두용 감독. <속 미워도 다시 한 번>(1969) 현장이다. 오른쪽부터 주연을 맡은 신영균, 정소영 감독, 이두용 감독이다. 이두용 감독은 정소영 감독 연출부로 7편의 영화를 함께 했다. [사진2] 1970년 <잃어버린 면사포>로 데뷔한 이두용 감독은 한 동안 신파 멜로드라마를 만든다. <댁의 아빠도 이렇읍니까>(1971)는 두 번째 영화로 전작의 흥행세를 이었다. 배우 문희, 황정순과 스태프들 그리고 이두용 감독(맨 왼쪽)이 함께 했다. [사진3] 1974년 한 해 동안 이두용 감독은 <용호대련>을 시작으로 여섯 편의 태권도 영화를 내놓았고, 그 모든 영화에서 발차기의 주인공은 ‘차리 셸’ 한영철이었다. 사진은 <돌아온 외다리>(1974)의 한 장면. [사진4] 이두용 감독의 작품 세계는1977년 <초분>부터 변화한다. 이전까지 액션을 중심으로 한 장르 영화를 만들었다면, 이 영화부터 그는 미스터리 서사를 토대로 한 드라마의 세계로 접어들며 샤머니즘과 ‘한’의 테마를 다룬다. [사진5] 당대의 액션 스타 장동휘는 액션 전문 감독 이두용이 자신을 기용하지 않는 데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이두용 감독은 <경찰관>(19789)과 <선배>(1979)를 통해 장동휘의 진짜 매력을 드러냈다. [사진6] 이두용 감독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 <최후의 증인>(1980). 하지만 개봉 당시 이 영화는 검열에 의해 사지절단 되었고, 2003년이 되어서야 감독판으로 대중과 늦은 재회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2016년 4K로 디지털 복원되었다. [사진7] <피막>(1980)은 한국영화가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받은 이 영화는 감독 부문 특별상인 I.S.D.A.P를 수상했다. [사진8] <피막>(1980) 현장의 이두용 감독과 주연을 맡은 유지인. <생사의 고백>(1978)으로 이두용 감독과 인연을 맺은 유지인은 이 영화에서 강렬한 복수의 주인공이 된다. [사진9] <해결사>(1981)는 세트를 벗어나 리얼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도시 액션이다. 신우철과 황정리가 주인공을 맡았다. 숨겨진 걸작 중 하나이며, <돌아이>(1985)를 예견하게 하는 작품이다. [사진10]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4)는 최초로 칸영화제에 초청받은 한국영화였다.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되었고, 외국 평단의 큰 관심을 받았다.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장면이다. 통역 옆의 왼쪽이 이두용 감독이다. [사진11]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4)로 하와이영화제를 찾았을 때 해외 영화인들과 함께 한 이두용 감독. 왼쪽부터 홍콩의 임호 감독, 일본의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 중국의 장이모우와 첸카이거 감독, 영국의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 그리고 이두용 감독. [사진12] <낮과 밤>(1984)은 말 그대로 5대양6대주를 누비는 영화였고, 해외 로케이션에 강한 이두용 감독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였다. 아프리카 현장에서 마사이족과 함께 촬영하는 모습. [사진13]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장남>(1984)은 이두용 감독의 자전적 영화이자, 한국 가족 영화의 걸작 중 한 편이다. 형제로 나오는 신성일, 김희라와 함께 현장에서 리허설을 하는 모습. [사진14] 1970년대 ‘발차기’에서 시작한 이두용 감독의 액션 연대기는 1980년대 이르러 <돌아이>(1985)에 도착한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카 액션과 패션 감각을 선보였던 영화로, 전영록은 이두용 감독의 새로운 액션 히어로가 된다. [사진15] <뽕>(1985)에서 ‘안협네’ 역을 맡은 이미숙. 나도향의 단편을 각색한 윤삼육의 시나리오는 여러 제작사를 돌아다니다가 이두용 감독을 만났고,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져 큰 흥행을 기록했다. 아직도 꾸준히 언급되는 ‘컬트’ 영화다. [사진16] 자신의 제작사 ‘두성영화’를 차린 이두용 감독은 창립 작품으로 <내시>(1986)를 만든다. 그의 최고 흥행작으로, 궁중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반란을 그린다. 당국의 정치적 해석으로 심의가 나지 않아 개봉에 애를 먹기도 했다. [사진17] 한국영화 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할리우드에 초청 받아 연출한 <침묵의 암살자>(1988) 현장. 미국에선 <Silent Assassins>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교포 배우인 정준(준 청)과 필립 리가 출연한다. [사진18] 밑바닥 삶을 사는 인간을 향한 리얼한 시선. 걸레 스님 중광을 캐스팅 한<청송으로 가는 길>(1990)은 이두용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매우 독특한 지점이다. 모스크바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사진19] IMF 시기, 두성영화의 마지막 작품으로 만든<애>(1999). 남궁원과 이경희가 노부부로 등장한다. <장남>에 이은 또 하나의 가족 영화로, 제대로 된 개봉을 거치지 못하고 묻혀 버린 수작이다. [사진20] 2002년에 만든 <아리랑> 현장의 이두용 감독. 나운규 시절의 영화 미학, 즉 흑백과 무성의 스타일로 만들었다. 노장의 녹슬지 않은 솜씨가 돋보인다. 이두용 감독의 60번째 영화다. * 이 글은 2016년 한국영상자료원과 부산영화제가 공동 제작한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 도서 『장르의 해결사 : 이두용』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지난 8월 ‘영화와 공간: 홍콩’ 프로그램이 총 9,212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성공리에 마쳤다. ‘성공’이라는 말을 부연하기 위해 숫자를 동원해보면, 본 프로그램의 경우 317석의 시네마테크KOFA 1관에서 총 33회 상영했으니 평균 좌석점유율은 86.2%라 할 수 있다. 지난 주말(9월 3주)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한 작품은 < 살인자의 기억법 >이며, 주말(금~일) 평균 좌석점유율은 21.8%이다. 두 숫자를 비교해보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힐 것이다. 이 글은 이 ‘성공’ 뒤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이자 때로는 가혹하기까지 한 시네마테크KOFA 프로그램 담당자에 대한 이야기다. 2015년부터 특정 도시를 다룬 영화를 한데 모은 ‘영화와 공간’ 시리즈를 매 여름 선보이고 있는데, 우디 앨런과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뉴욕 시리즈에 이어 올해 홍콩을 다룬 본 프로그램은 시네마테크KOFA 인기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딱 떨어지는 주제에 유명 감독의 대표작으로 구성된 이 프로그램의 기획과 수급이 일견 수월해 보일 수도 있지만, 고전이라 칭하기에는 지나치게 젊고, 신작이라기에는 이제는 나이 들어버린 8, 90년대 작품이 주를 이루는 본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것은 그리 쉬운 편에 속하지 않는다. 하물며 한국영화 산업만큼 부침이 심했던 홍콩영화계는 저작권자를 찾거나 상영본을 수급하는 측면에서 여간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다. 그래서 ‘영화와 공간’을 처음 기획했을 때부터 홍콩은 항상 마음속에서 최상위를 차지하는 도시였지만, 섣불리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였다. 이런 고민 중에, 2016년 여름 한 통의 전화가 운명처럼 걸려왔다. 시작은 이러했다. 홍콩의 중국 반환 20주년을 기념해 홍콩특별행정구는 2017년에 글로벌 문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었고, 그 일환으로 홍콩영화 세계 순회 상영을 계획하고 있었다. 본 특별 상영회의 실무를 맡은 홍콩국제영화제의 로저 가르시아 집행위원장은 당시 한국의 로컬 파트너를 찾고 있었고, 나는 ‘영화와 공간: 마틴 스콜세지 인 뉴욕’의 준비를 막 끝내고 내년 기획을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이 얼마나 운명적인 만남인가? 어느 PD님의 소개로 부천에서 만난 우리 둘은 서로의 프로그램이 잘 맞아떨어진다며 기뻐하며, 자세한 건 이메일로 연락하자는 인사와 함께 흡족하게 미팅을 마치고 헤어졌다.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나는 이게 웬 행운이냐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행운이라고 생각했던 이 운명의 이면에 그만큼의 고난이 함께 한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다른 기관과 공동으로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낸다는 것은 같은 작업을 혼자 단독으로 하는 것에 비해 몇 배의 수고스러움과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번 ‘영화와 공간: 홍콩’은 특히 이 사실을 더욱 혹독히 깨닫는 과정이었는데,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넋두리하자면 이렇다. <메이드 인 홍콩> DCP 수급으로 다급했던 26일의 흔적 첫째, 하루에도 수십 통씩 주고받는 이메일 폭탄이다. 2016년 겨울로 접어들면서 ‘영화와 공간: 홍콩’의 기획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가르시아 집행위원장과 서로 적당한 작품을 추천하며 상영작 선정 작업을 마무리할 때쯤, 그와 내 메일에는 점점 한 명씩 참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프로젝트는 홍콩과 중국 내 4개 도시를 제외하고도 전 세계 10개 도시가 참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당연히 실무를 맡은 홍콩국제영화제 위원회는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감당하기 위해 집행위원장 외 기획은 물론 예산, 홍보, 상영본 운송 등을 담당하는 여러 명의 스태프가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영화와 공간’ 프로그램을 맡은 한국영상자료원의 담당자는 단 한 명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나중에 시간이 허락한다면 더 자세하게 소개할 일이 있겠지만, 시네마테크KOFA 프로그램의 업무 프로세스는 영화제 프로그램팀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영화제가 기획부터 프린트 수급까지 단계별로 세분되어 분업화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반면, 이곳은 한 명의 담당자가 하나의 프로그램 전체를 관할하는 개별 책임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A라는 프로그램을 맡은 담당자는 A의 기획부터 상영작 선정은 물론 배급사에 연락해 상영료를 지급하고 상영본을 받는 작업까지 모두 담당한다. 그것뿐이랴. 시놉시스 정리부터 포스터와 리플릿을 어떻게 만들지, 한국어 자막을 대여할지 제작해야 할지를 확인하고, 개막식과 같은 부대 행사라도 진행하게 되면 게스트 섭외부터 심지어 개막식 사회자 대본 작성, 리셉션의 음식 메뉴까지 정해야 하는, 말 그대로 해당 프로그램의 A부터 Z까지 모든 과정을 결정하고, 책임져야 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홍콩국제영화제의 Tiffany, Pearl, Lemon, Shing, Nichol 등 몇 명의 담당자가 돌아가며 하루에도 수십 통의 이메일로 자신의 업무를 전달하고, 확인을 요청하면 우리 쪽은 담당자 혼자 그 모든 것을 결정하고 회신하고, 기안을 올리는 데 허덕여야 했다. 더군다나 본 프로그램 준비가 한창이던 올해 초는 ‘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 ’를 마감하고, ‘시네마테크KOFA가 주목한 2016년 한국영화’와 ‘로버트 알트만 X 폴 토마스 앤더슨’을 막 시작할 때라 아침에 출근해서 쏟아지는 메일에 회신을 보내고, 수십 개의 기안을 올려 업무를 처리한 후 퇴근해도 다음 날 출근하면 다시 산더미처럼 똑같은 업무가 쌓이는 <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 >(해롤드 래미스, 1993)과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라 업무 강도가 평소 몇 배로 높았다. 둘째, 고난의 절정은 프린트 수급이었다. 앞서 말했듯 ‘영화와 공간: 홍콩’은 전 세계 10개 도시 순회 상영회의 일부이다 보니 몇몇 작품의 상영본은 다른 도시에서 상영한 직후 서울로 들어오기도 하고, 서울 상영 후 다음 도시로 바로 출고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말인즉슨 프린트 수급 일정이 매우 빠듯함을 의미한다. 통상 상영본은 최소 2주 전에는 입고되어 검수 과정을 거친 후 상영이 되는데, 이번 프로그램의 경우 상영 바로 며칠 전에 상영본이 입고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기획 초반부터 < 순류역류 >(서극, 2000)의 경우 디지털 복원은커녕 홍콩 내에서도 상영 가능한 필름 프린트를 찾기 어려웠다. 이곳저곳 수소문 끝에 파리의 시네마테크프랑세즈에서 불어 자막본 35mm 프린트를 보유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시네마테크프랑세즈에 프린트 대여 협조를 요청하자 프린트 손상을 문제로 두 가지를 조건으로 대여를 허락했다. 하나는 상영을 단 1회로 제한하며, 나머지 하나는 상영 전 프린트 체킹 폼을 반드시 작성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실제 프린트 검수를 담당하는 영사실에 이 사실을 알리자 난색을 표했다. 유럽의 경우 프린트 체킹을 사전에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프린트의 스크래치와 손상 정도를 일일이 기록함으로써 상영 전후의 손상 여부를 파악하고, 책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프레임 하나하나를 꼼꼼히 봐야 하는 이 과정은 보통은 몇 시간에서 프린트 손상이 심한 경우 며칠이 걸리는 수도 있는 작업이라 영사실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다. 최소한 상영 일주일 전에는 프린트를 받아야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영사실의 당부에 우리보다 앞서 상영하는 베를린 측에 상영 직후 바로 프린트를 서울로 보내달라고 요청하고 기다리던 중, 7월 20일 페덱스로부터 드디어 연락이 왔다. <순류역류> 35mm 프린트가 인천 세관에 입고되었으며, 통관 심사에 걸려 있으니 필요 서류를 제출하라는 메일이었다. 해외에서 상영본을 수급할 때 인천 세관의 통관 심사에 걸리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다. 이럴 경우 상영 후 원 귀속자에게 재반출됨을 증명하는 서류와 국내 통관을 위한 담보 설정 절차를 진행하면 된다. 서류를 모두 준비해 보내자 통관 절차를 시작하겠다는 답변과 함께 한국영상자료원의 다른 물건 중 하나의 관세 납부가 완료되지 않았으니 이 부분을 확인해달라는 요청을 페덱스로부터 받았다. 확인해 보니 다른 부서 담당자가 최근 해외에서 수집한 프린트가 있었는데, 아직 관세 납부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담당자에게 이 사실을 전달하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이를 넘겼다. 통관은 보통 하루 정도 걸리기에 7월 21일에 통관이 완료되리라 예상하고, 주말인 22일과 23일에 영사실에서 프린트 검수를 할 수 있도록 페덱스에 토요일(22일) 특송을 요청했다. 걱정했던 것보다 프린트가 일찍 도착해 다행(상영은 7월 29일이었다)이라고 생각하며 주말을 보낸 뒤 24일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영사실 담당자에게 프린트 상태를 물었다. 그런데 맙소사! 토요일에 프린트가 배송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잔뜩 화가 나서 페덱스에 전화를 걸었다. 왜 특급 배송이 이루어지지 않았냐는 항의에 페덱스의 답변을 듣고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부서의 관세 미납 탓에 <순류역류> 프린트가 아직 세관에 억류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여러 해 통관 업무를 처리해 왔지만, 같은 사업자의 경우 한 건의 물건이라도 관세가 미납된 상태라면 나머지 다른 물건 역시 서로 상관관계가 없어도 억류된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부랴부랴 해당 담당자에게 24일 중으로 관세를 납부해달라고 다시 한번 요청하고, 페덱스에 사정 설명을 했다. 다행히 25일 화요일 오후에 <순류역류> 프린트가 극적으로 상암동에 도착해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런데 이것도 잠시, 다음 날 더 큰 복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이드 인 홍콩> 외장하드만 빈 채 도착한 패키지 최대 위기는 ‘영화와 공간: 홍콩’의 프로그램이 시작되는 26일에 터졌다. 큰 규모의 부대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같은 부서는 물론 다른 부서 직원들까지 많은 도움을 주지만, 개막식 당일은 홍보물 데코레이션부터 리셉션 세팅, 개막식 리허설까지 신경 쓸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오전부터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오후, 영사실로부터 다급하게 연락이 왔다. 오전에 도착한 < 메이드 인 홍콩 >(프루트 첸, 1997) DCP 외장 하드 박스를 열었는데, 하드 디스크가 없다는 것이다. 이건 또 웬 날벼락인가. 영사실로 뛰어 가보니 박스 안에는 하드 디스크 케이스부터 연결 잭까지 모든 것이 다 완벽히 들어 있지만, 정작 하드만 보이지 않았다. <메이드 인 홍콩> 상영은 약 26시간 후인 다음 날 오후 7시였다. 홍콩국제영화제의 필름 트래픽 담당자인 Shing에게 바로 메일을 썼다. 그 역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야 누가 이 황당한 상황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마치 메신저를 하듯 실시간으로 몇 번의 메일이 오가다 안 되겠다 싶어 하드만 쏙 빠져 있는 박스 상태를 사진으로 찍어 보냈다. Shing은 나보다 더 놀란 듯했다. 서울과 홍콩, 그리고 이전 상영 기관이었던 베를린, DCP 원본을 보유하고 있는 우디네 담당자들이 모두 참조된 상태에서 사태 파악하기 위해 서로 메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상황인즉슨 베를린에서 상영을 하기 위해 DCP 하드를 영사기에 삽입해 파일을 복사한 뒤 하드를 빼지 않은 채 박스만 패킹해서 서울로 보낸 것이다. 당시 내가 갖고 있던 백업 상영본으로는 DVD도 아닌 한글 자막 제작을 위해 모 파일 공유 사이트에서 내려받은 초저화질 파일밖에 없었다. 만약 DCP를 받지 못한다면 다음 날 상영은 취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Shing은 우디네 측에 DCP 원본 파일을 이메일로 전송해달라고 요청했지만, 200기가가 넘는 용량의 파일이 정상적으로 들어오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마침 개막식 참석을 위해 극장에 도착한 가르시아 집행위원장도 이 황당한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망연자실한 우리 둘과 달리 Shing은 재빨리 또 다른 대안을 제안했다. 홍콩에서 보유하고 있는 또 다른 DCP를 오늘 밤 항공 특송으로 발송하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같은 아시아권이라지만, 반나절 만에 패키지를 받기도 어려울뿐더러, 세관에 걸리지 말라는 보장도 없었다. 눈앞은 깜깜했지만, 준비된 행사는 치러야 했기에 7시에 예정대로 개막식을 시작했다. 마치 기품 있는 실내악이 흘러나오는 파티장에서 긴박한 스코어가 중첩되어 흐르는 스릴러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이제 만 하루도 남지 않았다. 개막작 < 매드 월드 >(웡 춘, 2016) 상영과 관객과의 대화를 포함해 모든 일정을 마친 뒤 뒷마무리를 하고 파김치가 되어 사무실로 돌아오자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메일을 여니 정말로 이탈리아로부터 200기가짜리 대용량 파일 링크가 도착해 있었다. 우선 전송 시작 버튼을 눌렀다. 이것저것 서류 정리를 한 지 1시간쯤 지났을까? 파일 전송 상태를 확인해보니 겨우 3%밖에 되지 않았다. 새벽 3시쯤 되었을 때 링크로 파일을 받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그날 밤 홍콩에서 출발한 또 다른 DCP가 비행기를 타고 인천으로 오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더는 앉아 있을 기력도 없어 컴퓨터를 켜 둔 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퇴근했다. 다음 날 아침 눈 뜨자마자 DHL 운송 내역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홍콩에서 출발한 DCP가 정말로 인천에 도착해 있는 것이 아닌가? 희미하게 희망이 보였다. DHL 통관팀에 연락해 혹시라도 세관 통관에 걸리게 되면 우선 물건부터 받은 후 통관 절차를 신청할 수 있도록 미리 협조를 구한 뒤 출근했다. 출근 후, 회의를 다녀오니 기적처럼 내 책상 위에 “EXPRESS 12:00”라고 크게 쓰여 있는 노란 DHL 패키지가 놓여 있었다. 왈칵 눈물이 났다. 그렇게 그 날 오후 7시, 4K 디지털 복원된 <메이드 인 홍콩>이 시네마테크KOFA에서 무사히 상영되었다. 기적과 감동의 “EXPRESS 12:00” 지금까지 ‘영화와 공간: 홍콩’ 프로그램을 예로 들어 시네마테크KOFA의 프로그램 기획부터 영화가 스크린에 걸리기까지의 과정을 구구절절하게 늘어놓았다. 이토록 길게 넋두리를 한 이유는 어쩌면 어떤 관객은 스크린 뒤에 보이지 않는 이 과정을 궁금해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그램 담당자 역시 남모를 고충이 있으니 조금은 잘 봐달라는 애교 섞인 투정이라고 바라봐주길 바라서이다. 이번 ‘영화와 공간: 홍콩’도 담당자인 나 역시 꼭 보고 싶은 영화도 많았고 더 나은 매체로도 상영하고 싶었지만, 여러 현실적인 여건상 포기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과정에서 좌절감이 들 때도 있고, 이게 뭐라고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구는 걸까라며 스스로를 힐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 역시 시네마테크KOFA를 찾는 관객처럼 영화를 사랑했기에 이 일을 시작한 사람인지라 그간 쌓였던 피로와 열패감은 극장에서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순간 사그라든다. 이제는 우리 곁을 떠난 앳된 얼굴의 장국영을 마주할 때 극장 안에 흐르던 그리움의 공기와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꽉 찬 객석을 바라볼 때, 그리고 시네마테크KOFA 프로그램 덕분에 이번 여름이 행복했다는 관객의 짧은 후기를 확인하는 순간, 그래도 이 일을 선택하길 잘 했다는 보람을 느끼고, 다음 프로그램을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에 다녀왔다. '12번의 사회를 보는 동안 검은 머리 청년에서 반백이 됐다'는 권해효 씨도, '소통할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는 개막작 <거대한 대화>의 박세호 감독도 반가웠지만, 내 눈길을 잡아끈 건 단연 김의석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서울독립영화제는 2년 간 영진위로부터 지원이 끊긴 채 영화제를 치러야 했다. 개막전에 만난 조영각 집행위원장은 '어느 면에선 비참하고 힘들더라'고 했다. 법적인 검토를 받아도 문제가 없었지만 영진위 내부의 과도한 평가가 원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지원 중단에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이 '창피했다'고도 했다. 사실 돈이란 게 그렇다. 아끼면 아끼는 대로 꾸리고 지탱해나갈 순 있지만 규모의 축소보다 심리적 위축과 스트레스가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 아니겠나. 그러한 위기를 조영각 집행위원장은 '심기일전하면서 후원도 많아졌고, 영화제를 지지하는 흐름을 새롭게 인식하게'됐단다. 지원 중단이란 경제적 타격을 심기일전의 계기로 삼았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어떤 단단함이 느껴졌다. 개막식 무대에선 김의석 위원장이 영화제 식구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한 이유도 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서독제 전후로 독립영화와 안팎의 몇몇 영화인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때가 때이니만큼 대화의 끝은 2012년 한 해를 돌아보고 결산하는 쪽으로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그 중 역시나 ''기자정신''을 발동시키는 화두들은 ''지원''과 ''배급환경''이었다. 어느 영화감독은 2008년 장편독립영화를 촬영하던 당시보다 ''지원''을 받기가 몇 배는 힘들어졌다고 토로했다. 그만큼 외적으로 비춰지기로는 독립영화의 개봉 편수가 늘어난 것 같지만 그 수치와는 별개로 현장에서 영화를 만들기는 더 어려워졌다는 설명이었다. 최근 신작을 개봉시킨 다른 감독은 독립영화의 배급과 상영환경이 점점 ''게토화''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멀티플렉스 위주로 상영환경이 돌아가다 보니 작은 영화들은 설 곳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물론 발품을 파는 적극적인 관객들 아니고서는 독립영화를 만날 수조차 없게 됐다는 한탄이었다. 불과 5년 전 수 만 명의 관객들과 행복한 만남을 가졌던 그 감독은 더 열악해진 배급환경에 대한 체감지수가 더 높은 것처럼 보였다. 개인적으로 창작과 완성까지와 연결되는 지원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배급환경''이라고 믿는 쪽이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영화제라는 축제의 공간에서 상영되고 마는 것 만큼이나 슬픈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인디스페이스와 인디플러스가 버팀목으로서 자리를 잡고 있지만, 최근 벌어지고 있는 멀티플렉스들의 횡포와 생색내기는 극에 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예컨대 민병훈 감독의 < 터치 > 논란은 곪은 대로 곪은 이 배급환경과 극장상황에 대한 창작자들의 뼈아픈 심정을 대변하는 것일 터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4개 부문을 수상하고 선댄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 지슬 >의 오멸 감독이 지방 독립영화협회들과 대안상영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새로운 시도라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어쩌면 당할 수밖에 없는 멀티플렉스의 횡포를 미리 피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어 서글퍼진다. 그런 점에서 지난 9일 민주통합당에서 발의한 ''피에타법''의 향방에 주목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영화발전 기금으로 저예산 독립예술 상영관의 설립 및 운영을 지원하고 영화진흥 기본계획에 ''저예산 독립·예술영화의 육성 및 지원''을 포함하도록 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과연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느냐도 관건이지만 ''슈퍼갑''으로 부상한 극장들의 협조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실효성을 거둘지도 의심이 된다. 대선이 코앞이다. 이래저래 독립영화인들을 힘들게 했던 현 정권의 유통기한도 만료를 맞았다. 부디 내년엔 이 ''배급환경''에 대해 진지한 논의와 실천적이니 법안을 내놓는 정권이 탄생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피에타법''이 그 출발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