쥴리안 포
- 감독
- 알란 웨이드
- 제작년도
- 1997
- 출연
- 크리스찬 슬레이터, 로빈 튜니, 마이클 파크스, 체리 존스, 프랭키 페이슨, 하버 프레스넬, 앨리슨 재니, 라타냐 리차드슨, 디나 스파이베이, 브루스 본, 로이 쿠퍼, 제리코 이바넥
< 어느 여배우의 고백 >은 영화배우들 사진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나탈리 우드, 킴 노박, 존 웨인 같은 외국 스타들, 또 김지미 , 남정임 , 김진규 같은 충무로 스타들의 사진들을 배경으로 오프닝 크레딧이 뜬다. 말하자면 <어느 여배우의 고백>은 ‘영화에 대한 영화’라는 ‘자기 반영성’의 테마를 전제하며 시작하는 것이다. 세계영화사에서 영화가 스스로를 거울에 비추는 태도, 곧 자기 반영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963년이다. 이 해에 두 개의 중요한 영화, 곧 페데리코 펠리니의 < 8과 1/2 >, 그리고 장-뤽 고다르의 <경멸>이 발표됐다. 주로 외부로 향해 있던 영화의 시선이 자기 내부로 향하는 성숙한 태도를 갖게 된 것이다. 김수용 감독의 <어느 여배우의 고백>은 한국영화사에서 자기 반영성을 말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작품이다. 충무로의 영화 만들기 과정 전부가 영화의 중요한 스토리로 이용되고 있어서다. 영화가 자신을 거울에 비추다 보니, 현실과 이미지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현실과 허구는 뒤섞인다. 그래서 주요 인물들은 전부 실제 이름 그대로 나온다. 김진규 는 과거 충무로의 스타였다. 영향력 있는 제작자와 상대 배우 캐스팅 문제로 다투다가 눈에 나는 바람에 영화계에서 쫓겨났다. 지금은 형편이 궁색하여, 거의 숨어 살다시피 한다. 우연히 옛 동료 황정순 을 만나, 과거 상대 배우의 딸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김진규는 연인이었던 그 배우가 출산하다 죽는 바람에 딸도 죽은 줄 알고 있었다. 그 딸, 남정임 은 술집을 운영하는 집에 입양돼 있다. 김진규는 딸의 외모에 깜짝 놀란다. 죽은 배우와 너무 닮아서다. 김진규는 자신의 궁색한 처지가 부끄러워 신분을 밝히지는 못하고, 남정임을 스타로 키우기 위해 뒤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당시 데뷔 2년 차였던 22살의 남정임은 실제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 어느 여배우의 고백 >은 1960년대 특유의 눈물을 자극하는 ‘최루성’ 멜로드라마다. 할리우드의 고전 영향도 느껴진다. 무명의 여성을 스타로 길러내는 조지 쿠커의 < 스타 탄생 >(1954, 이 작품도 영화에 대한 영화다), 딸의 신분 상승을 위해 궁색한 처지를 숨기는 엄마의 희생에 관한 킹 비더의 < 스텔라 달라스 >(1937)의 서사구조가 자주 겹친다. 남정임 은 점점 스타로 성장하고, 김진규 는 그 과정에서 딸의 미래에 방해가 될까 봐 점점 뒤로 물러난다. 오로지 희생으로만 묘사되는 헌신적인 부성이 ‘최루’의 무기다. 이 과정에서 당시의 충무로 세계가 그대로 노출된다. 감독( 전창근 )은 최선의 화면을 잡기 위해 재촬영을 거듭하고, 필름 값을 아끼려는 제작자( 허장강 )는 감독의 그런 태도에 화를 낸다. 다섯 편에 겹치기 출연하는 스타 배우( 한성 )는 촬영현장에 늦게 오기 일쑤고, 스타덤에서 밀려난 배우( 전계현 )는 질투심에서 신인 남정임 에게 못되게 군다. 남정임은 사라진 김진규 가 간혹 들른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양어머니가 운영하는 술집에서 하루 일하다 감독으로부터 ‘스캔들’ 주의를 듣는다(충무로에서 가끔 일어나던 일이다). 스타의 품위를 지키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충무로의 이런 ‘현실’들이 ‘허구’와의 경계를 자주 허무는 점이다. 전계현 은 신인 남정임 이 스타로 급성장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좋아했던 남자 배우 한성 (1960년대 미소년 같은 외모로 인기를 끌었다)과도 친해지자, 깡패를 동원해 두 사람의 관계를 깨려고 한다. 충무로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는데, 두 배우가 깡패의 폭력 앞에 놓여 있는 긴장된 순간에 감독의 “컷”하는 소리가 들리는 식이다. 우리가 보고 있던 영화 속의 현실은 사실 허구였던 것이다. < 어느 여배우의 고백 >은 현실이 허구이고, 허구가 또 현실일 수 있는 공간을 세련되게 교차하고 있다. 자기 반영적인 영화들은 관객들에게 영화의 속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미덕을 갖고 있다.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약간 높은 시선에서 내려다보는 경험을 하기 때문에 영화에 대해 되돌아보는 성찰적 태도를 가질 수 있다. 브레히트의 용어를 빌리면, ‘비판적 관객’이 되는 셈이다. 동시에 단점도 있다. 일반영화에서 기대되는 ‘환영적 쾌락’, 곧 주인공과의 동일시와 감정이입이 종종 차단된다. 남정임 이 아버지의 헌신을 뒤늦게 알고, 오열하고 있을 때, 관객은 이것이 현실인지 연기인지 고민하기 때문에 배우에게 감정 이입하기가 머뭇거려지는 것이다. < 어느 여배우의 고백 >은 이런 형식상의 도전 때문에라도 소중한 작품으로 남는다. 당시의(사실 지금도) 영화 환경에선 반상업적, 반대중적으로 여겨질 주제를 하나의 작품으로 완결지은 까닭이다. 아마 그런 형식의 남다름 때문에 내용은 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신파조로 흐른 것 같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 덕분에 한국영화사는 형식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예술가는 종종 남다른 전기적 사실로 자신의 예술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반 고흐처럼 자살하고, 슈베르트처럼 병사하고, 파졸리니처럼 타살되고···. 그 명단은 제법 길게 이어질 수 있다. 잔인한 운명에 내몰린 이들의 공통점은 통념에 역류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우리 영화계에서 그런 특별한 전기적 사실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이 신상옥 이다. 냉전시대에 남북한을 통과한 사실 하나만 기억하면 될 듯하다. 납북(?), 탈북, 미국망명, 귀국으로 이어지는 행보는 자기 의지 너머의 운명의 명령처럼 보인다. 개인적으로 신상옥 감독에의 관심은 우선 이런 전기적 사실의 특별함에서 시작됐다. 통념을 무시하는, 혹은 비웃고 넘어서려는 듯한 태도와 행동에서 보이는 이탈과 도전의 비장함이 그의 영화에는 새겨져 있다. 그런 태도를 한 눈에 알게 하는 작품이 < 지옥화 >(1958)이다. 동아시아의 지역성에 매몰되지 않고, 세계영화의 흐름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안간힘은 열정이 되어 관객까지 감염시킬 정도다. 사실 당시의 많은 한국영화들이 인과율도 제대로 맞추지 못할 때였는데, <지옥화>는 단숨에 동시대의 표현 양식을 갖추고 있다. 이 영화를 볼 때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 라쇼몽 >(1950)이 떠오른다. 일본영화의 전통에 서양영화의 역동성을 끌어들인 획기적인 시도와 비교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 지옥화 >는 갱스터 장르와 필름 누아르, 그리고 멜로드라마의 특성까지 버무려 놓았다. 한탕을 노려 성공하려는 시골 출신 건달 영식( 김학 )이 시커먼 뻘밭에서 최후를 맞이하고(갱스터), 그의 운명을 시궁창에 빠뜨린 팜므 파탈 소냐( 최은희 )의 치명적인 매혹이 있고(필름 누아르), 그리고 형 영식의 탈선을 막고 그를 가족의 품으로 데려가려는 동생 동식( 조해원 )의 애절함이 있다(멜로드라마). 신상옥 감독은 동경예술학교(동경예대의 전신)에서 미술을 전공한 탓인지, 미장센의 아름다움과 남다름을 담아내는 데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몇 개의 뛰어난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의 미덕은 오래 남을 것 같다. 먼저 할리우드의 필름 누아르를 보는 듯한 미군부대 클럽의 춤 장면이 있다. 기지촌의 소위 양공주들과 미군들이 한데 엉켜 있고, 무대 위에서는 무희들이 선정적인 춤을 추고 있다. 나이트클럽 같은 이런 장면은 범죄와 욕망이 뒤엉키는 누아르 특유의 클리셰인데, 한국영화에서 퇴폐적인 춤동작을 이렇게 어른스럽게 표현한 경우는 지금도 대단히 드물다. 그리고 뭐랄까, 이 장면은 앙드레 바쟁이 말하는 리얼리즘의 정수처럼 보인다. 영화의 허구적 재현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를 그대로 제시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로셀리니가 이 장면을 본다면, 자신과 미학적 입장을 공유한 동양의 한 감독에게 반가움을 느낄 것 같다. 그런가 하면 갱스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추적 장면의 묘사도 압권이다. 기차, 트럭, 그리고 지프들이 함께 달리고, 이를 트래킹으로 찍은 모습은 서양영화의 형식적 완성도에 뒤지지 않으려는 청년 신상옥 (당시 32살)의 안간힘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이 부분이 특히 < 라쇼몽 >과 비교된다. 도입부에서 나무꾼이 산을 오를 때의 역동적인 트래킹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종결부도 갱스터 장르의 전형을 이용하고 있다. 할리우드의 문법에 따르면 사회의 제도를 무시한 갱스터들은 결국 비참한 죽음으로 처벌 받는다. 그래서 밤에 비오는 더러운 뒷골목에서 갱스터 주인공이 개처럼 죽는 게 윌리엄 웰먼의 < 공공의 적 >(1931) 이후 하나의 관습이 됐다. < 지옥화 >는 갱스터의 종말을 뻘밭에서 진행한다. 시커먼 뻘이 얼굴을 뒤덮고 온몸을 더럽힐 때, 처벌로서의 죽음의 순간이 함께 오는 것은 '지옥'을 생생하게 현시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뻘밭에서의 갱스터 영식과 팜므 파탈 소냐의 최후,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든 동생 동식과의 주먹다짐 등은 우연스럽게도 2년 후에 공개된 루키노 비스콘티의 < 로코와 그의 형제들 >(1960)을 예견케 한다. 팜므파탈로 인한 형제살해의 위협과 근친상간이라는 멜로드라마적 테마까지, 두 영화는 유사점이 많고, 그래서 종결부는 더 없이 풍부한 독해의 가능성까지 열어놓았다. < 지옥화 >는 지역의 한계를 넘어 세계와 경쟁하려했던 한 열혈청년의 도전의 결과이다. 그 열정이 얼마나 순수한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옥화>는 점점 더 사랑 받고, 평가 받는 작품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