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
- 감독
- 이규환
- 제작년도
- 1974
- 출연
- 윤미라, 최성호, 조재성, 하용수, 한세훈, 장훈, 김은수, 노강, 조송자, 정철, 임운학, 백송, 양일민, 구종석, 이예민, 김호연, 김수천, 임성포, 오정열, 전소양, 김소제, 권일정, 김애라, 지계순, 김경란, 손연순, 박진희, 강호정, 유운화, 나윤선, 이상빈, 이은화, 서경옥, 송민경, 이성영, 권영준, 이용형, 강대현, 진태진, 김진수, 윤성훈, 신정일, 나성수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1895년에 개관한 극장 1895년에 개관한 애관극장은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극장이자 13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한국 근대 문화예술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조선 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영화·공연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란 점에서 애관극장의 연혁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895년, 인천의 사업가인 정치국이 애관극장의 전사인 협률사를 설립했다. 협률사는 서울 정동에 지어진 동명의 공연장인 협률사보다 7년, 종로의 영화관인 단성사보다 12년 앞선 시기에 세워진 극장이다. 정치국은 현재의 애관극장 터에 벽돌 건물을 쌓아 올렸고 협률사를 <박첨지> <흥부놀부전>과 같은 인형극부터 창극, 신파연극, 남사당패 등의 공연을 올리는 공연장이자 영화관으로서 활용했다. 이곳을 중심 무대로 활동했던 배우 서일성은 한국은 물론 일본, 중국에서까지 명성이 자자했으며 그를 중심으로 구성된 ‘7면 구락부’는 우리나라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극작가 진우촌과 함세덕 그리고 연출가 정암을 배출했다. 애관극장 역사를 전시하고 있는 통로 1911년, 협률사는 개항장 인천의 이미지에 맞춰 잠시 축항사로 이름을 바꿨다가 1921년경에 애관으로 개명했다. 이때부터 애관은 연극과 영화의 상설관으로 탈바꿈했다. 그로 인해 한동안 애관극장 부근의 경동거리는 ‘시네마 천국’과 다름없었다. 1927년 애관극장은 관객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르네상스식 건축물로 증축됐으며 이 건물에서 1930년, 인천 최초로 발성영화인 <야구시대>가 상영되었다. 1935년에는 애관극장의 한 해 입장객이 총 15만 명을 돌파하는 기록을 남겼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고 인천상륙작전 때 함포사격으로 인해 인천의 경동 일대가 폐허가 됐다. 경동에 위치한 애관극장 또한 피해를 입었다. 사람들은 극장이 무너진 자리에 임시 건물을 올려 영화를 계속 상영했고, 1960년 새롭게 지어진 건물이 지금의 애관극장이다. 1972년에는 현 애관극장 대표인 탁경란 씨의 부친 탁상덕 전 대표가 애관극장을 인수했다. 1989년에는 인천 최초로, 그리고 전국에서 네 번째로 70mm 상영관이 개관했다. 이는 현재 애관극장의 1관이다. 1관은 영화 상영관인 동시에 나훈아, 하춘화 등 유명한 가수들이 돌아가며 공연을 펼친 무대였다. 당시 애관극장에 걸린 공연과 영화를 보고 박정자, 한명숙, 최불암, 전무송 등의 가수와 배우들이 꿈을 키웠다. 2000년에는 현 애관극장 대표인 탁경란 씨가 극장을 인수했다. 탁경란 대표는 멀티플렉스 극장에 대항할 목적으로 2004년 5개관으로 증축했다. 접근성이 좋은 극장 동인천역에서 신포역 방향으로 15분 정도 걸어 내려간 뒤 개항로로 좌회전해 올라가면 좌측에 파란색과 노란색의 구조물이 번갈아 놓인 애관극장이 나타난다. 애관극장의 본관 입구로 들어서면 1관과 휴게실, 작은 매점 등이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애관극장은 본관과 신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관에는 1관, 신관에는 2~5관이 위치한다. 특히 1관은 공연장처럼 1, 2층으로 나뉘어 있으며 스크린 아래에 큰 무대까지 마련되어 있는데 한때 공연장으로도 활용됐던 애관극장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본관과 신관은 긴 복도를 통해 이어져 있다. 해당 복도에는 애관극장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연표, 신문 기사, 포스터, 사진 등의 자료가 걸려있다. 한때 오락기가 놓여있던 신관의 휴게 공간도 현재는 오락기를 빼고 그 자리에 극장 관련 자료를 걸어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1,2층으로 구성된 애관 1관 내부 1895년 인천 중구 개항로에 신설된 애관극장은 계속 같은 곳에 터를 잡고 있다. 극장 근처엔 인일여자고등학교, 제물포고등학교, 송도중학교,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등 총 6개의 학교가 있으며 극장의 오른편에 인천중구청, 차이나타운, 동인천역부터 답동사거리까지 길게 뻗은 동인천 지하상가가 위치한다. 애관극장은 접근성이 좋은 극장이다. 동인천역과 인천역, 신포역에 둘러싸인 모양새인데 1호선 동인천역과 분당선 신포역에선 극장까지 도보로 10분, 1호선 동인천역에선 버스로 10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또한 840m 떨어진 곳에 인천항이 있어 애관극장 옥상에 오르면 바다를 볼 수 있다. 항구 근처에 자리한 경동은 오래전부터 인천의 문화적 중심지였다. 교통의 요지이자 답동성당, 능인사 등의 종교 시설도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유동 인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인형극장, 동인천극장, 동방극장, 키네마 등 한때 동인천 일대에 19개의 독립예술극장이 자리했던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전부 문을 닫고 애관극장과 미림극장만이 남아있는 상태다. 미림극장은 애관극장에서 약 7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한국영화사의 과거와 현재가 오롯이 기록된 공간으로서, 애관극장은 128년째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존을 위한 움직임 2017년, 애관극장에 관한 다큐멘터리 <보는 것을 사랑한다>(2021)를 촬영할 당시 윤기형 감독이 탁경란 대표를 인터뷰하면서 극장의 매각 소식을 전해 들었고, 유동현 굿모닝인천 전 편집장이 관련 칼럼을 게재하면서 애관극장의 경영난 소식이 처음 알려졌다. 인천 시민들과 인천시의 움직임으로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하면서 2021년 애관극장의 매각 가능성이 다시금 거론됐다. 극장을 지키기 위한 일환으로 지난 2022년 4월 18일, 탁경란 애관극장 대표, 박남춘 전 인천광역시장, 이원석 인천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애사모(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 이희환 대표가 모여 ‘애관극장 보존 및 활용을 위한 상호 협약’을 맺었다. 하나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후 인천광역시장이 바뀌었고 애관극장의 향후 향방에 관해선 현재 명확히 정해진 바가 없다. "We ♥ 애관"이 적힌 현수막. 현수막에는 애관의 공공매입과 공공적 활용을 후원하는 개인 및 단체의 이름이 적혀있다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 인천 중구 개항로 63-2 2. 설립일: 1895년 3. 대표자: 탁경란 4. 규모: 264.4m² (스크린 크기 1관 16.4*7m, 2관 7.5*3.2m, 3관 8.5*3.5m, 4관 6.7*3.8m, 5관 6.3*3.3m) 5. 극장 구성: 총 5개관 (좌석수 1관 403석, 2관 114석, 3관 112석, 4관 98석, 5관 81석) 6. 운영시간: 평일 10:00~23:00 금토 9:00~23:00 (금, 토 심야 상영 있을 경우 9:00~2:00) 7. 입장료: 조조, 경로 5,000원, 학생 7,000원, 일반 8,000원 8. 공간 구성: 상영관 5관, 매점 1개, 휴게실 3개 (1관 휴게실 50석, 2~3관 휴게실 26석) 인터뷰: 윤기형 감독(<보는 것을 사랑한다> 연출) 윤기형 감독 조현나 _자기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윤기형 _안녕하세요. 저는 윤기형 감독입니다. 인천에서 태어났고요. 얼마 전에 <보는 것을 사랑한다>(2021)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습니다. 조현나 _<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어떻게 만들게 되셨나요? 윤기형 _애관극장이 1895년에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극장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더라고요. 최초의 극장인데 왜 이렇게 사람들이 잘 모를까.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결심했고 5년 정도 극장에 관해 공부하고 관련 자료들을 준비하며 만들었습니다. 조현나 _애관극장에 관한 자료 중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으신가요? 윤기형 _개항장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 지금의 극장 바로 위였어요. 다른 길이 없었고 서울로 가려면 무조건 이 도로로 가야 했기 때문에 그 길목에 극장이 설립됐어요. 당시 개항장 쪽은 일본인 마을, 지금 차이나타운이 위치한 곳엔 중국인 마을, 여기는 조선인 마을이 있어서 이곳에 조선인이 극장을 세운 거였죠. 1928년 <별건곤>이라는 대중잡지에 이 외리에 관한 묘사가 재미있게 돼 있는데요. “쨍쨍거리는 불당소리, 땡땡거리는 성당 소리와 기생의 장구 소리, 그리고 극장에서 관객들을 모으는 악대의 소리가 어우러진 곳이 이쪽 외리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옆에 능인사라고 절이 있거든요. 또 옆에 답동성당이 있고요. 그리고 인천 중구 용동 일대엔 기생집들이 많았습니다. 여기에 또 극장이 있었고. 극장에서는 관객들을 모으려고 밥을 팔고 했거든요. 불당과 성당과 기생집과 극장이 한 거리에 어우러져 당시의 모습이 굉장히 재밌게 묘사가 됐던 거죠. 조현나 _애관극장은 인천 신포역과 동인천역 사이에 있고 근처에 학교나 상가도 많습니다. 인천의 번화가에 자리한다는 점으로 인해 생긴 특성도 있을까요? 윤기형 _동인천역, 신포동, 경동 이쪽이 인천의 명동이었죠. 현재는 옮겼지만 전엔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 10여 개가 근처에 다 몰려 있었어요. 그러니까 늘 사람이 바글바글했죠. 인천에 70mm 상영관을 설립한 극장도 애관극장이 최초입니다. 서울에서 좌석제를 실시할 때 인천은 아직 좌석제를 실시하지 않았었거든요. 관객들이 하도 많아서 자리를 잡으려고 영화 끝나기 5분 전에 극장에 들어가고 그랬어요. 간신히 자리를 잡고 보면 이제 영화 결말을 두 번 보는 관객도 있었죠. 그 정도로 어마어마했어요. 서서 보는 관객들이 앉아서 보는 관객의 두 배는 됐으니까요. 애관극장 4, 5관 영사실과 조상열 영사기사 조현나 _애관극장의 실내 시설에 관해서도 취재를 진행하셨습니다. 어떤 점이 인상적이던가요? 윤기형 _지금의 극장은 1950년대에 실추된 뒤, 1960년에 새로 지어진 거거든요. 옛 극장의 흔적이 사라진 게 좀 아쉬워요. 여기 영사실에 옛날 35~70mm 겸용 영사기가 있어요. 영사 기사님께서 아직 잘 돌아간다고 한번 보여주셨거든요. 디지털 영사기 옆에 옛날 아날로그 영사기가 있으니까 그런 점도 되게 신기했죠. 애관극장 1관 영사실에 보존되어 있는 필름 영사기 조현나 _다큐멘터리를 위해 100여 명 정도를 인터뷰하셨죠. 애관극장에 관한 추억이 있거나 애관극장에서 영감을 받아 꿈을 키운 영화인들이 영화에 등장하는데요. 어떤 분들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셨는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윤기형 _박정자 선생님은 어릴 때 극장 근처에 사셨고, 당시 극장에서 공연을 보며 감동 받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리고 한명숙 선생님은 인천의 태양 악극단에서 활동하며 첫 데뷔 무대를 애관극장에서 올리셨죠. 전무송 선생님은 애관극장에서 간판 그리는 일을 하셨다고 하셔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조현나 _관객의 경우 주로 어떤 분들이 애관극장을 찾으시던가요. 윤기형 _젊은 사람들은 드물고 저같이 추억이 있거나 저보다 나이 드신 분들이 주로 오시죠. 제 아이가 여기에 왔을 때 극장에 대한 느낌을 들어보니 '매우 낡았다, 오고 싶지 않다, 여기서 영화를 보고 싶지 않다'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조현나 _인천 시민들에게 애관극장은 어떤 공간인가요? 윤기형 _제 나이 또래의 인천 시민들에게 애관극장은 당연히 한 번쯤은 와봤던 극장입니다. 안 와볼 수가 없는 극장입니다. 저 역시도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 연애 시절, 결혼 후에도 와서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봤으니까요. 그러니까 인천 시민이라면 마음 속에 애관극장에 관한 추억이나 사연 하나씩은 무조건 있다고 보면 돼요. 조현나 _애관극장 말고 미림극장도 같이 취재를 하셨잖아요. 두 극장의 특성은 어떻게 다른가요? 윤기형 _애관극장은 최초의 극장이고 미림 극장은 1957년도 전쟁 이후에 생긴 극장입니다. 전쟁 후에 극장들이 동네마다 들어섰는데 그때 송현동에 들어선 게 평화극장이고, 1958년에 평화극장의 이름이 바뀌어서 미림극장이 됐습니다. 미림극장도 잠시 폐관했다가 '추억극장 미림'으로 재개관했으니까 그런 걸 따지고 보면 대단한 극장이죠. 애관극장 1관 로비 전경 조현나 _탁경란 대표 취재를 하면서 애관극장의 매각 소식을 접했고, 유동현 굿모닝인천 전 편집장이 관련 칼럼을 쓰면서 해당 내용이 대대적으로 알려졌죠. 이후로 극장을 돕기 위한 활동이 다양하게 이루어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윤기형 _코로나19를 겪으면서 극장 관객이 점점 줄어드니 경영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죠. 애사모(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가 결성이 돼서 많은 분들이 애관극장을 살리고자 했고 인천시에서도 협상에 나섰습니다. 현재로선 인천시가 극장을 매입해 기증하는 방법이 가장 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현나 _그밖에 애관극장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윤기형 _가장 좋은 건 관객들이 많이 찾아주는 거죠. 근데 젊은 사람들은 극장에서 영화를 잘 안 보려고 하고, 나이 드신 분들이 추억 삼아 오시니까 그런 것들이 안타까운 거죠. 조현나 _애관극장은 어떤 의미를 지닌 그장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요? 윤기형 _유일무이입니다. 다른 극장이랑 비교할 수가 없어요. 고일 선생님의 <인천석금>이라는 책 그리고 최성연 선생님의 <개항과 양관역정>이라는 책에서 '1894년~1895년 청일전쟁 때 정치국이 벽돌로 극장 협률사를 지었다'는 문구를 확인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애관극장의 기원을 알 수가 있습니다. 축항사, 애관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놀라운 극장입니다. 조현나 _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윤기형 _아직 애관극장이 오랜 역사가 있는 최초의 극장인 걸 모르시는 분들도 많아요. 애관극장에 많이들 오셔서 좋아하는 영화도 보고 애관극장이 이런 역사를 갖고 있는 극장이구나 같이 알아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터뷰: 이희환 교수(인천대학교, 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 대표) 이희환 교수 조현나 _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희환 _저는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의 학술연구교수로 연구 활동하고 있는 이희환이라고 합니다. 조현나 _애관극장에 관해 오랜 시간 연구를 이어오셨는데요. 이를 토대로 애관극장의 변천사 그리고 역사에 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희환 _사실은 개항장이 제일 먼저 생긴 곳이 바로 인천이거든요. 또 조선인이 극장을 만든 것도 인천이 최초이고 그것이 바로 애관극장의 전신이었던 협률사라는 극장입니다. 협률사라는 극장은 청일전쟁 전후에 만들어졌다는 회고록이 남아있습니다. 1900년대 넘어가면서 여러 가지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다가 처음에 극장을 만들었던 정치국이라는 사람이 매각을 하면서 축항사로 이름이 바뀝니다. 거기서 이제 일본에서 유입돼 들어오는 신파 연극이 공연됐던 장소가 되는 거죠. 축항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신파 공연장으로 많이 활성화됐던 이 극장은 1910년대로 넘어가면서 일본의 무단 통치 속에서 많이 위축됩니다. 1920년대 새로운 인수자에 의해 지금의 애관이라는 이름이 극장명으로 사용되고, 애관극장이 조선 식민주의 시대에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문화시설로 자리를 잡습니다. 이때 영화의 전신인 활동사진도 상영하고 때로는 학생들의 학예회, 정치적인 집회도 열리고 공간을 변형해 권투 시합도 하고 무용 발표회도 하고, 복합 문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식민지 시대 내내 담당했던 극장인 셈이죠. 그래서 애관극장이야말로 살아있는 인천 근대 문화의 자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식민지 시대에 인천의 문화, 조선인의 문화를 일구는데 중요한 근거지가 됐던 곳이 바로 애관극장입니다. 1945년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50년까지도 굉장히 많은 공연들이 여기서 펼쳐졌습니다. 전쟁 때 일부 피해를 받기도 했습니다마는, 1960년대 이후에는 극장도 새로 신축해서 더 확장되고 영화의 전성기를 거치면서 풍성한 시기를 거쳐 온 것 같습니다. 로비에 전시된 애관극장 연표 사진 조현나 _최초 애관극장이 경동의 현재 자리에 건물을 올리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희환 _애관극장 앞의 길이 인천 개항장에서 서울로 가는 육로였어요. 그리고 일본 조계와 조선인 조계의 경계가 바로 극장 앞의 도로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일본이 전관 조계지역에 극장을 만들었고 정치국이라는 사업가가 ‘극장이 흥행이 되겠구나’라는 사업적 발상에서 시작해 조선인 조계에다 극장을 만든 겁니다. 이 거리를 사리재라고 하는데, 사리재는 일제시대에도 조선인 상권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일본 상권과 연결되어 있는 조선의 상권 지역에 극장이 만들어진 것이 의미가 있고, 1899년에 경인선이 만들어지고 전철역과 그렇게 멀지 않은 지역에 극장이 위치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극장 바로 앞에 프랑스 성당도 있고 또 길 건너에는 미국의 감리 교회가 있고, 그러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에 극장이 만들어진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조현나 _애관극장이 한국 영화사, 한국 극장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시나요? 이희환 _조선인이 만든 최초의 극장으로서 전통 연희 공연을 시작으로 근대 공연장, 근대 영화관으로 바뀌어 간 극장, 식민지 시대 우리 극장의 역사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극장이 애관극장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본인들이 1883년 인천을 개항시킨 다음에 인천을 교두보로 삼아서 경성으로 진출하려는 목적 하에 자기들의 극장 문화를 가져왔는데, 이것에 맞서서 조선인이 조선인 극장을 만들었다는 게 아주 실험적이면서도 획기적인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닌가 합니다. 근대 문화를 만들어 나가려고 했던 그 움직임이 애관극장의 전신인 협률사로부터 시작해 126년이 넘는 역사가 끊기지 않고, 지금까지도 이 단관극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굉장히 소중하고 귀중한 역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애관극장 2관 내부 조현나 _과거의 애관극장은 여러 공연을 올리고 다양한 영화를 상영할 만큼 번영했지만, 현재는 운영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교수님께선 현재 애사모(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의 대표를 맡고 계시기도 한데, 애관극장을 위해 모임 차원에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희환 _애관극장이 멀티플렉스 극장에 밀려서 복합상영관 형태를 만든 것까지는 지켜봤지만, 자주 오진 못했죠. 그런데 4년 전쯤 갑자기 매각 소식이 들려왔어요. 그렇게 애관극장을 사랑하는 시민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저희가 나서기도 하고 또 인천시도 나서서 사정을 알아보면서 상황이 가라앉았었는데, 2021년 3월에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을 받아서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소식이 전해졌죠. 다시 2차 애사모 모임을 갖고 기자회견도 하면서 나서게 됐고요. 이번엔 극장주 개인에게 손해 보면서까지 이 극장의 역사를 유지하라고 해서는 안 되겠다, 인천시가 나서는 방법밖에 없겠다고 주장하면서 인천시와 민관협의체도 구성하고 협의를 계속 벌여왔죠. 그래서 이번 4월 즈음에 박남춘 전 인천광역시장님과 탁경란 애관극장 대표, 이원석 인천영상위원회 위원장과 모여서 애관극장이 역사를 이어나가도록 서로서로 역할을 분담해서 노력하자는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조현나 _마지막 인사 부탁드립니다. 이희환 _바뀐 시장님께서 꼭 애관극장을 인처의 소중한 문화공간으로, 공공 공간으로, 역사의 자부심을 지닌 공간으로 발전시켜 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시민들도 애관을 더 많이 찾아주시고, 영화 관람과 더불어 근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명소로 애관극장이 거듭났으면 좋겠습니다. 필자: 조현나(씨네21) 사진촬영: 최성열(씨네21) 인터뷰 일자: 2022년 6월 24일
연흥사(演興社)와 장안사(長安社)는 러일전쟁 직후 만들어진 조선인 극장이다. * 연흥사는 1907년 11월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송지만(宋芝萬), 이준동(李俊東), 이종진(李鍾振) 등이 절골, 즉 사동(寺洞) 장윤직(張潤稙)의 집을 개조하여 연희루(演戱樓)를 건축하고자 경시청에 청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연희장이 연흥사가 아닌가 한다. 이 정확한 위치는 탑골공원 왼편 훗날 조선극장 자리로,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30번지이다. 1912년 연흥사에서 연극공연을 본 바 있는 연극인 박진(朴珍)의 회고에 따르면, 동향(東向)에 비계목(飛階木)으로 만든 이층짜리 건물이었으며 일층 객석은 나무로 만든 장의자를 길쭉길쭉하게 놓았고 이층에는 삿자리를 깔았다고 한다. 당시 여느 조선인 극장과 마찬가지로 객석은 성별에 따라 나누어져 있어서 일층은 남자석, 이층은 여자석이었다. 1912년 여름에는 극장 천장에 선풍기를 달아 관객들로 하여금 한여름의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하여 관람의 편의를 높였다. 사진 2. 딱지본 소설 『산천초목』의 표지에 그려진 연흥사의 모습(이해조, 유일서관, 1912) 초기 극장이 대게 그러하듯 운영자는 자주 교체되었다. 1908년 연흥사는 박원근(朴元根)이 총무를, 송종오(宋鐘五)가 감독을 맡았다. 개장 초기에는 창극을 주로 공연했으나, 극장을 경영해본 경험이 일천했던 데다가 전황으로 경영난이 닥치자 극장을 방매한다. 이후 전당포 주인 석숭환(石崇煥) 등이 돈을 대어 유지해 나갈 수 있었는데, 1909년 당시 석숭환이 연흥사에 투자하여 손해 본 액수만 3만 냥에 이르렀다고 한다. 연흥사가 언제부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단, 1908년 초부터 신문지상에 연흥사 광고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대 들어 연흥사는 다른 어떤 극장보다 신파극을 자주 공연한다. 이로써 경영난을 극복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신파극은, 1910년대 초반 조선인 극장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는데, 특히 연흥사는 신파극 공연을 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신파극 전용 극장이라 선전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박진 역시 연흥사에서 이뤄진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革新團) 공연을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 당대 사람들에게 연흥사는 신파극의 본산으로 인식되었던 모양이다. 혁신단의 연흥사 공연은 1912년 2월 18일 <육혈포강도>를 기점으로 본격화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수전노(守錢奴)>, <소위휘선사자친죄(少尉揮善捨子親罪)> 등의 작품을 올렸는데, 쌀값 폭등으로 불경기가 도래하자 임시로 공연을 중단, 다시 개연하여 <선탐후개(先貪後改)>, <서승어적(庶勝於嫡)> 등을 공연했다. 이후 <눈물>이나 <장한몽> 같은 대표적 신파극 레퍼토리 공연이 큰 인기를 끌면서, 임성구의 혁신단은 신파극의 대표 주자로 인정받게 된다. 예컨대 <눈물> 공연을 본 ‘사동생’이라는 이름이 독자는, “나는 눈물 연극 구경을 갓다가, 부인셕에셔 일졔히 우는 것을 보면은, 졀로 눈물이, 것잡지 못하게 쏘다져요” 1 라며 극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장한몽>을 본 '애극생'이라는 관객은, “연흥샤 쟝한몽 연극은, 참 재미잇습듸다. 사람은, 엇지도 그리도, 만히 드러 가는지 매일 여젼하던 걸이오. 잇흔날브터는 즁편이라지오, 샹편 보고, 즁편 안 볼 슈 잇나, 불가불 일즉 언이 가, 보아야 하겟스니, 할인권 백인 신문이나, 오날은 일즉이 돌이게 하십시오” 2 라며 연흥사의 신파공연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을 표현했다. 신파연극의 흥행 성공과 더불어 연흥사는 탕자음부가 모이는 곳이라는 오명도 쓰게 되었다. 이에 조산부(助産婦)양성소의 자선연주회 같은 공익적 역할의 공연을 개최하는 등 인식 개선에 나서기도 했다. 1914년 10월 8일, 연극장이 협소하여 공연하기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경무청에서 허가를 취소함으로써 연흥사는 돌연 문을 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이 바로 철거되지는 않았는데, 신파극을 대신하여 김창환, 이동백 등 명창들의 판소리 공연장으로 활용되다가 1915년 5월 무렵 철거된다. 철거된 자리는 빈터로 남아 있다가 7년 뒤인 1922년에 조선극장이 들어선다. * 장안사는 동구(洞口) 내(內) 장대장동(張大將洞) 장사골에 건립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박진은 장안사의 위치에 대해 “낙원동과 익선동 사이, 즉 단성사에서 동관대궐이라던 창덕궁을 향해 가는 큰 길과, 낙원동에서 경운동으로 가는 큰 길과의 사이”에 “동궐나뭇장(柴場)이라고 해서 넓은 공지가 있었는데 그 공지가 장안사가 있던 터”라고 회고했다. 장안사의 건설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성사, 연흥사와 비슷하게 1907년 말에서 1908년 초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개장 초기에는 전통 연희를 비롯하여 중국의 경극을 상연하고, 활동사진도 상영했다. 개관 초기에는 관람자가 적어 여타 극장들처럼 경영난을 맞았지만, 연흥사나 단성사에서 연행하지 않는 “꼭두각시의 홍동지, 박첨지놀음과 광대 줄타기, 남사당패의 무동 서기, 서도잡가, 경기 입창 등”의 전통 연희를 주요 레퍼토리로 삼아 공연하면서 장안사만의 전문성을 살려 나갔다. 사진 3. 장안사에서 상연된 중국연희 공연(《황성신문》, 1909년 4월 21일자, 3면.) 장안사는 최홍석(崔弘錫)이 사장이던 1910년 4월 무렵 활동사진 영사기를 도입하여 프랑스 파테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활동사진을 상영하기 시작했다. 3 이에 학부(學部)에서는 장안사에서 상영하는 활동사진을 중등 이상의 학교 교육에 활용하도록 지도하기도 했다. 4 같은 해 5월부터는 파테회사가 아닌 일본인 흥행업자 가즈토키(和常)와 필름 배급계약을 체결하고 일본에서 오는 필름을 상영했다. 5 1912년에는 잠시 서양인이 극장을 임대하여 지만관(志滿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요컨대 1910년대 초반 장안사는 활동사진관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1912년 말 대정관, 우미관, 황금관 등 본격적인 활동사진관이 설립되어 운영되기 시작한 이래로는 송만갑, 김창룡 등의 명창이나 채란, 해선 등의 기생들에 의한 노래 공연이나 소위 구(舊)연극을 상연하는 장소로 더 유명했다. 장안사는 1915년경에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된다. 단성사가 화재로 소실된 뒤 단성사에서 연행하던 김재종(金在鍾) 일행이 장안사로 옮겨 연행을 계속한다는 기사가 있는 한편, 그들이 연흥사에서 연행한다 기사도 있다. 미루어 짐작컨대, 장안사의 극장 상태가 공연에 부적절했다기보다 시설이 괜찮은 연흥사를 택해 연행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장안사는 아마도 이즈음 폐관된 것으로 보인다. 1) 「독쟈구락부」, 《매일신보》, 1913년 10월 29일자, 3면. 2) 「독쟈구락부」, 《매일신보》, 1913년 11월 4일자, 3면. 3) 「광고」, 《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1일자, 3면. 4) 「교육에 활동」, 《황성신문》, 1910년 4월 17일자, 2면. 5) 「활동사진 계약」, 《황성신문》, 1910년 5월 17일자, 3면. * 참고문헌 유민영, 『한국근대극장변천사』, 태학사, 1998, 116~151쪽.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50~52쪽. * 사진1(상단). 혁신단 단장 임성구(《매일신보》, 1914년 2월 11일자, 3면.) [자료] 《대한매일신보》, 1906.03.30. 奉常劃提調李苾和氏가 人民敎育하기를 爲하야 上䟽한 全文이 如左하니 續 此臣所謂敎育一事庶可以爲日後來復之基也雖然所謂敎育者亦有古今之異其泥於古而昧於今者子莫之執也 若專尙今而棄舊則忘其本者也盖有國有民必有宗敎故宗敎興則其國興宗敎衰則其國衰環天下亘萬古不易之典也 夫孔孟之道我 國之宗敎也惟我邦國之不振由於宗敎之不興如欲振興其邦國必先懋興其宗敎也 今以遭世界更新之運不得不學今之學者又事勢之不得已也孔孟之敎係是三綱五常之道也必使幼冲之子弟經之以三經五常之道使不失其本然之彜性然後學今之學則中散萬事末合一理可以並行之不悖矣臣願 陛下深留聖意於斯亟令學部益勵敎育之責任 規模則先興孔孟道學之宗敎次修開明之新學節次則特加尊崇文廟仰瞻羹墻而俎豆絃誦升降拜揖使靑年子弟咸知慕聖之本義而尊重其宗敎焉 以成均舘爲大學校而京師則一署各置一中學校而一面各置小學校一里各置一村塾 小學校卒業之人陞之中學校焉中學校卒業之人陞之大學校焉定其課程第其高下歲拔其優等者薦之於政府而充補其相當職不出十年之間而仕於 朝者皆大學校卒業之人至於農商工亦莫不然而隨其人才派送各國各修其藝焉 又錄其敎師之勤者而薦用之又採私立學校者優施補助者而褒賞之不數年之內不費國金而學校之設必遍滿於 國中 然則三千里內養成之聰明子弟亦不少矣夫何患乎人才之不能就乎雖然敎育一事爲近日之例套語而已則終未見其效而今日之勢惟在實踐二字而已 臣願 先下詔勅令學部改定敎育一致之法上自太學至于各郡鄕校置大中小學校實行其作成人才之方 今漢城及各道道臣上 奏學校私立之人以勳章褒章以勸以奬焉臣雖不學的知今日 國家之興惟在敎育之興惟在宗敎之興故 忘其僭陋而爲 陛下國家一言之伏乞 陛下勿以臣之卑微而少 垂察其言則 國家幸甚生民幸甚 完 [자료] 《황성신문》, 1906.04.19. ●李氏上疏 奉常副提調李苾和氏가 皇帝陛下께 上䟽한 全文이 如左하니 伏以臣向以興學校振敎育一事猥陳荒說優蒙 聖批至有令政府禀處之旨旣而大 詔煥發如綸如綍使於敎育人才事方專心講究俾有實効臣伏讀 詔書感極涕發窃有少湏臾無死之願而計以爲此時此 詔不啻若大旱之逢甘霈則其舉而行之宜必汲汲如不及以對揚休命矣伏竢累日以臣之躁妄實不能無滋惑焉盖今日百獘之本惟以虛文二字爲詐飾若幷此敎育一事而亦歸虛文則臣所謂國家來復之基永無其望矣然則臣安得不心枯膓焦疾聲㪅籲於 天陛之下哉我國素穪文明而至于近日禮義都毀而學問盡味則昔之爲文明者旣不可復見矣又於新學問者亦未有一人能窺其藩籬者然則可謂東敗西傷矣爲今之計莫如尊重太學申明先聖之道責任學部篤習當時之務使宗敎復明繼聖訓開來學以忠愛爲義務然後弱可爲强野可爲文國權可以光復文運可以賁篩臣旣以敎育不行爲憂而冒此煩陳則固不當㪅攙他說而區區忠激之意有不容不一陳者尙有數事焉其一即掌禮院旌褒例納錢事也夫忠孝烈旌閭乃是國家所以扶植綱常敦尙風化之大柄也有其實者亦當精擇審知然後可許其棹楔之典况乎無其實者乎今則不然不問事行之虛實惟視例納金八百之有無而許之碍之則是行迹爲虛而例納爲實也雖有忠孝烈實蹟必湮沒於千古而不得闡揚於世矣此豈 廟堂立法之本意哉伏乞 亟下嚴勅于掌禮之臣永革其旌閭例納錢凡干係 恩典者必令道臣博釆而審知之然後 奏聞請褒若有循私納賄誣虛而爲實者該呈狀人及道臣幷論罪以勵風化千萬幸甚其一即判任官及地方官俸金與兵丁巡檢掖庭所屬吏胥皂隷之月料事也夫仕者祿足以代其耕然後可以忘父母妻子之憂而能盡心職事不生他念矣今夫判任官及地方官之俸給僅足以資其一身而不能食其父母妻子則雖持心淸白者不爲事勢所牽者鮮矣書曰旣富方糓富而後能善古昔帝王之使臣工先富其身而使善其心此所以必先重祿使之忘其憂也伏乞陛下垂察焉內而府部院廳判任官巡檢兵丁掖庭所屬吏胥皂隷之屬外而觀察守宰鄕將吏輩使喚之屬當厚其俸給使之忘其家憂而盡其職事如是而有不用命者論罪而正法綱焉則千萬幸甚其一卽協律社貽獘事也臣聞孔子於顏子以爲邦之道必曰放鄭聲今夫協律社者臣雖不知其主倡之爲何人然臣聞其通宵設戱男女雜遝鬪爭易起亂淫相屬此豈非鄭聲乎大抵習舞演劇之戱於外國亦皆有之不過是俳優丐賤之軰區區營生者而如今協律社之穪以 宮內府所管發票營利者東西列邦所未聞見事也淫聲亂色眩惑耳目傷風敗俗年少之學問實業一不留心淫風從生實爲國家人民憂者此也伏乞 陛下亟令警廳不日嚴禁以絕亂階申飭掌樂之臣復講法樂千萬幸甚右臣所言諸條雖皆當今之可行而語其最急且大者則果能上下一心務進敎育之實而國家人民之知識一開則如貪賂之俗淆雜之風亂淫之戱雖不禁而人自耻焉而不爲矣伏望 陛下留 神裁察焉하소셔하얏더라
1912년 유일서관에서 출간된 이해조의 신소설 『산천초목』의 표지화는 연흥사 앞 수상한 세 남녀의 그림이다. 연흥사는 1907년 서울 중부 사동(寺洞)에 개관해 주로 전통 연희와 신파극을 많이 공연하던 극장이다. 소설 속에서 희대의 호색한 이시종은 박참령의 첩 강릉집을 유혹하기 위해, 첫 만남 장소로 연흥사를 선택한다. 두 남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소설 전반부에는 이 시기의 극장 풍경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근대 초기 극장 문화를 재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제, 이시종이 강릉집을 유혹하던 연흥사의 시간 속으로 거슬러 가보자. 평소 연흥사를 ‘연애 작업장’으로 애용하던 이시종은 어느 날 경복궁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강릉집을 보았다. 예의 끼가 발동한 그는 뚜쟁이 신마마를 졸라 드디어 강릉집을 연흥사 앞까지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단성사, 장안사, 원각사 구경은 몇 번씩 해봤지만 연흥사는 말만 들었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강릉집. 그날 순진하게 신마마를 따라 극장 구경에 나선다. 강릉집과 신마마에게는 입장을 위해 표를 살 때부터가 이미 극장 구경이다. 두 사람은 매표소에서 특등표를 골라 사는 것도 재미있고, 그렇게 산 특등표와 찬성표 1 를 들고 극장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는 것도 재미있다. 이시종은 표 파는 사람 행세를 하며 강릉집 일행에게 특등석이며 화장실의 위치를 자상하게 가르쳐주고, “손바닥을 두어 번 딱딱 쳐 뽀이를 부르더니, 방석을 가져오너라, 화로를 가져오너라, 가비차 2 도 갖다주고 여송연도” 갖다준다. 잠시 후 두 남녀의 눈길이 오가고 강릉집 얼굴은 발개진다. 극장은 이시종과 강릉집 같은 이들이 새로운 인간관계를 체험하는 곳이다. 물리적으로는 사방이 막힌 폐쇄 공간이지만 가정과 같이 내밀한 사적 공간도 아닌 곳에서, 모르는 남녀가 같은 시간 한 공간에 있다. 부인석이 따로 구분되어 있다고 해도, 남녀 관객 그리고 공연자와 관객 사이에는 은밀한 눈길과 희롱이 오갈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이 새로운 공적 공간에서 ‘사교’가 이루어지고, 때로는 ‘연애’도 시작되는 것이다. 일찍이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에서 조선 사람들이 넓혀야 할 문명국가의 ‘견문(見聞)’으로 소개되었던 극장은 막상 조선에 세워지자 음부탕자(淫婦蕩子)들의 음란폐풍 공간으로 지탄을 받았다. 황실극장 협률사의 운영 책임을 맡았던 봉상시(奉常寺) 부제조(副提調) 이필화는 스스로 협률사 폐지를 주장하는 상소(1906)를 올렸는데, 그 폐지 사유 중 하나가 협률사 공연이 음란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시켜 미풍양속을 해칠 뿐 아니라 청년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며, 천한 무리의 생계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구 문명국가를 따라 황실극장은 지어놓았으나, 무대에 오르는 공연은 남사당패와 기생 연희, 판소리와 잡가 등 ‘천한 집단의 음탕한 작태’다 보니, 고관대작과 부유한 집 자제들이 음란, 사치, 낭비를 일삼는 일탈 공간에 불과하다는 염려가 그런 상소를 올리게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극장 구경이 ‘원님도 보고 환자도 타는 일’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방탕한 남녀의 대합소’라는 근대 극장을 향한 비난과 우려 속에는 새로운 변화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의 봉건적 유교주의 사회가 극장으로 대표되는 근대 문물과 만났을 때, 거기서 분출되는 욕망들이 일으킬 불온한 균열과 파장에 대한 불안 말이다. 한편 극장은 그 안팎에서 들려오는 근대의 모든 소란스러운 소리를 모아내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소설 속에서 강릉집 일행에게 뽀이가 방석과 화로를 가져다준 것은 이들이 특등석과 찬성표를 들고 입장했기 때문인데, 이처럼 엄격하게 지켜지는 좌석의 등급 구분에 대해 불만이 적지 않았다. 누구나 돈만 있으면 구경꾼이 될 수 있었지만, “돈 좀 적게 내는 하등석이라고 앉을 자리도 없는 중, 앞에는 혹시 중등으로 들어갈까 겁이나 철망을 얽는 동아줄로 서까래를 매어놓는다. 별별 구박을 다 하고도 난로 하나 안 피워주니, 우리 돈은 돈이 아니고 무슨 사금파리인 줄 아는지, 정작 돈 주는 사람은 그렇게 냉대를 하고 동전 한 푼 안내고 허입권으로 통행하는 사람은 상등석으로 모시고 불도 따뜻이 피워주니 이런 불평한 데가 어디 있소” 3 라고 어떤 ‘불평객’이 볼멘소리를 투고할 정도였다. 그러자 그 이튿날 신문에는 “연극장에서 하등석에 난로 안 피고 철망으로나 서까래로 앞을 막는 것도 분하지마는, 제일 아니꼽고 괘씸한 것은 상등객에게는 굽실굽실하는 사무원들이 하등객에게는 조금만 하면 눈을 부라리며 호령이 나오니 그래서야 어찌 연극장 하등에 구경 들어가겠어요” 4 라고 ‘동감생’이 맞장구를 쳤다. 기생 구경 가느라 극장 출입이 잦은 한량이 있는가 하면 기생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썩 유쾌하지 않은 부인네도 있고, 신문기자 행세를 하며 매일 무료 관람하는 사람, 연극장을 화투장으로 만드는 노름꾼, 극장에서 사람을 속여 생활하는 사기꾼, 밤마다 극장에서 사느라 시험에 낙제한 학생, 상등석에서 남자들과 어울려 앉은 여염집 규수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자연히 사고도 많고 소동도 잦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극장은 그 어느 곳보다도 풍기가 문란하여 엄격한 통제와 규율이 요구되는 공간으로 비춰졌다. ‘부랑한 자의 집회소’가 되어서 ‘부정한 무리’가 옳지 못한 일을 하는 곳이 바로 극장이니 경찰의 단속이 있어야 한다고 당국의 통제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인 만큼 공중위생 문제와 예절 문제도 예민하게 작용했다. 예컨대 초창기 극장 좌석은 대부분 계단식 마루였던 터라 실내로 들어가기 전에는 매표소 옆 작은 방에 들러 신발을 맡기고 신발표를 타야 했다. 서민들 중에는 평소 신을 신지 않는 이가 많았는데, 이들은 우물에서 발을 씻은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1920년대에는 덧신을 10전에 대여해 주기도 했다. 또한 수백 명의 사람이 서로 어깨를 비비며 기운을 통하는 극장은 여름마다 전염병 발병의 온상으로 지목되었다. 극장 지배인을 경찰서로 불러 질서문란, 소란, 위생과 청결, 적정인원 입장에 대해 주의를 주는 것은 1930년대에도 늘 있는 일이었다. 이처럼 근대의 극장은 경찰의 감시가 있어야 하는 곳이며, 아울러 보여줄 것과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검열을 거쳐야 하는 공간으로 조명되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식민 당국은 위생과 질서, 그리고 ‘공공의 안전’을 명분 삼아 단속, 검열, 순시를 통한 감시 체제를 더욱 강고하게 했다. 극장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삐라를 살포하거나 불법연설을 해서 ‘풍속을 괴란하고 공안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당국의 감시 대상이었다. 음부탕자와 불온한 무리는 때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했다. 그러나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감시하고 통제해야 할 위험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그들 사이의 간극은 매우 얇은 것이었다. 1) 초대권. 2) 커피. 3) 《매일신보》 1913년 12월 3일자, 3면. 4) 《매일신보》 1913년 12월 4일자, 3면. 상단 그림 . 연흥사 앞의 남녀들. 출처: 이해조, 『산천초목』(유일서관, 1912)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이해조, 『산천초목』(유일서관, 1912), 부분 발췌 둥구재 넘어가는 해가 볼일이 바쁜 듯이 어정어정 내려가다가 만인간(萬人間)을 돌아보며, ‘밤새 평안히들 계시오. 나는 내일 다시 오리다’ 하는 부탁이 들리는 듯하더니, 낙산 한허리로 두렷이 밝은 달이 반갑게 올라온다. 그 달빛이 탑골공원 서편 마당에 반쯤 들랴 말랴 하니까 별안간에 네누나 나누나 나니누 네눈실, 그 나팔 뒤를 따라 장구 소고 징 제금을 함부로 두드려내니, 이는 사동 연흥사에서 날마다 그맘때면 취군하는 소리라. 같은 귀로 같은 소리를 듣기는 일반이언마는 어떤 사람들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살을 잔뜩 찡그리며, “에잉, 저놈의 소리가 또 나노, 세상, 귀가 듣그러워 사람이 살 수가 있나? 기왕 연극을 하려거든 역사적 학문적으로 아무쪼록 풍속을 개량하거나 지식을 발달할 만한 것을 하지 아니하고, 마치 음담패설로 남의 집 부녀와 젊은 자식들을 모두 버리게 하는 와굴을 만드니, 경무청에서는 왜 저런 것을 엄금하지 아니하누?” 어떠한 사람들은 나팔소리에 어깨춤이 나서 저녁밥을 허둥지둥 재촉을 하여 먹으며, “이애, 이동백이 김봉문이는 정말 명창이더라. 난쟁이 요술도 신출귀몰하던걸. 나는 밤낮 보고 밤낮 들어도 싫지 아니한 것은 연흥사 구경이더라. 속담에 ‘원님도 보고 환자도 탄다’는 일체로, 연극도 구경하고 부인석에 갈보 구경도 실컷 하겠더라. 에 참, 갈보도 많이는 모여들어. 아마 장안 갈보가 취군 나팔소리만 들으면 나 모양으로 신이 절로 내리는 것이더라.” 치마 쓴 계집, 인력거 탄 계집, 양복 입은 자, 모자만 쓴 자, 잘생긴 자, 못생긴 자, 떼떼로 작축하여 사동 넓은 길이 뻑뻑하도록 모여 들어오는데, 이문 안 언덕길로 의복을 선명히 입고 방망이 같은 여송연을 새로 피워 뻑뻑 빨고 조끼에서 보석시계를 내어 연해 보며 분주히 사동으로 내려오는 소년 명사는 이시종이라. (중략) 강릉집이 신마마와 같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연흥사 문앞에를 당도하여 신마마더러, 강 : 형님, 돈은 내가 드릴 것이니 구경표를 내 것까지 형님이 좀 사주시오. 신 : 이런 데 와서 돈도 제 돈을 내고 표도 제 손으로 사야 재미가 있나니, 표 살 돈을 나도 가지고 왔네. 도섭스러운 말 말고 우리 제각기 표를 사가지고 들어가 보세. 강 : 부끄러워 어떻게 표를 사나? …… 그러면 형님부터 사시오. 신 : 이애, 아양부리지 말아라. 부끄럽기는 쥐 밑구멍이 부끄러워? 하며 표 파는 구멍 앞으로 앞서 가더니 주머니에서 돈을 내어 구멍 앞에다 탁 놓으며, “여보, 특등표 한 장 파오.” 신마마가 표를 받아들고 나서니, 강릉집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서 마침 꺼내들었던 돈을 구멍 앞에다 여전히 놓으며, “나도 특등표 한 장만 주오.” 하고 표 주기를 기다리느라고 그 구멍을 들여다본즉, 표 파는 사람이 표 한 장을 쭉 찢어 주더니, “아차, 그것은 이리 도로 주십시오. 중등표올시다.” 강릉집이 표를 받았다가 도로 들이밀고 섰노라니, 표 파는 사람이 이 표 저 표 여러 장을 들고 한참을 뒤적뒤적하며 찾는 모양을 하다가 표 한 장을 들고 문밖으로 나아오더니 강릉집 앞에 와 공순히 서며, “이렇게 오래 서 계시게 하와서 가이 없습니다. 특등표가 다 팔리고 이것 한 장뿐이온데, 이것은 돈을 받고 파는 것이 아니라 무료로 구경하는 찬성표올시다. 돈은 도로 넣으시고 이 표를 가지고 들어가십시오.” 강릉집이 그 대답은 아니하고 신마마를 돌아보며, “형님이나 구경을 하고 오시오. 표가 다 팔리고 없다니까 나는…….” 신: 우리가 조금만 부지런히 올 걸 그리 했지. 아우님 도로 가는데 나 혼자 뒤처져 구경하고 있을 의리가 있나? 아우님 가면 나도 가지. 표 파는 자가 강릉집더러는 대답 없는 말을 또 하기 몰렴하던지 신마마를 보고, “왜 구경을 아니 하시고 가신다고 하십니까? 이 표는 당장 돈을 주시는 것보다, 가지고 구경을 하여주시면 본사에서 얼마쯤 더 감사히 여기는 터이올시다. 아무 관계 말으시고 어서 들어가 구경을 하시지요.” 신: 이왕 저처럼 말씀을 하니 그 표를 받게 그랴. 말이 쉽지, 우리가 날마다 밤마다 오겠나? 벼르고 별러 온 길인데 공행(空行)을 하면 절통하지 않은가? 강릉집이 마지못하여 그 표를 받아들고 신마마의 뒤를 따라 장내로 들어가는데, 표 팔던 자가 앞에서 연해 인도를 하며, “이리로 들어오시오. 이리로 올라오시오. 여기가 특등이오. 변소는 저리 가오.” 하며 손바닥을 두어 번 딱딱 쳐 뽀이를 부르더니, 방석을 가져오너라, 화로를 가져오너라, 가비차도 갖다주고 여송연도 갖다주며, 똑바로 마주 보이는 자리에 가 앉아 정신없이 강릉집 건너다보고 앉아서 헛기침을 연해 하더라. 2. 박진, 『세세년년』(세손, 1991[경화출판사, 1966]), 부분 발췌 1912년인 성싶다. 내가 여덟 살 때니까. 서울 종로 철물교 건너편 사동 큰길을 들어서면 왼손편에 동향편으로 커다란 가설극장인 연흥사(演興社)에서는 임성구의 혁신단이 갖가지 재미나는 신파극을 상연하여 장안의 인기를 끌었다. 임성구는 그 전해에 일인 경영인 남성사 [필자 주: '어성좌'의 오기] 에서 창립공연을 했으나 장소가 일인촌인 관계로 실패했고 다음해에 동관(東關)에 있는 단성사(현 단성사)에서 제2회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고 이어서 연흥사에서 많은 상연목록을 가지고 계속했다. 해질 무렵이 되면 장안 한복판에서 하늘을 찌르고 퍼지는 징, 꽹과리, 날라리소리는 장안 사람의 궁둥이를 들먹거리게 했다. 나는 그때 중붓골이라는 중사동, 즉 지금의 장사동에 살았으니 그 날라리 소리는 나를 매일같이 연흥사 문밖에 불러다 세웠다. 대인은 10전, 소인은 5전, 출입구 옆 고좌(高座)에 앉은 사람이 나무패를 두드리며 핏대를 올리고 외쳤다. 그 위에 높다란 곳에서는 호적소리가 신이 났다. 사동길 연흥사 앞엔 사람이 산같이 모였다. 나는 맨 앞에 서서 그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몹시 부러워했다. 이런 매일을 보내다가 견딜 수 없어 어머니를 졸랐다. 될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하도 울고 떼쓰고 안달하는 귀여운 아들을 위해서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탈출을 했다. 장옷을 쓰고 소비(小婢)에게 요강을 보에 싸서 들리고 나를 앞세웠다. 아들의 소원을 풀어주려는 갸륵한 용기였다. 대인 하나 소인 둘, 입장권인 나무판대기를 손에 쥔 순간 한숨이 터져 나오면서 이상한 흥분에 가슴이 뛰었다. 장내에 들어서니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아래층에 나무 걸상이 길쭉길쭉하게 놓였다. 우리 일행은 이층으로 갔다. 거기는 삿자리를 깔았다. 비록 비계목으로 엮은 가설이었지만 객석은 아래 위층으로 되었고 무대도 넓었다. 객석은 물론 남녀별로 나뉘어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서 부인석으로 갔다. 희미한 전등불이 담배연기로 더욱 침침했다. 그렇건만 나는 천당에나 온 것 같았다. 아래 위층에서 웅성대는 소리, 잃어버린 일행을 찾느라고 이름 부르는 소리, 과자 삽쇼, 담배 삽쇼, 물건 사라는 소리, 대목날 장터 같았다. 면막은 외겹 포장인데 갖가지 광고가 가득 찼다. 전면 이맛전에는 철사를 가로 매놓고 거기에 길게 자른 백지를 주렁주렁 달았는데, 그 종이에는 “일금(一金) ○원야(圓也) ○○씨”라고 쓰여 있었다. 이것은 유지들의 희사금이랄까, 기부금이랄까, 보조금이랄까 어쨌든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투척하는 돈이다. 더구나 재미있는 것은 연극을 구경하다가 어느 장면에서 흥이나 신이 나면 돈을 던진다. 이것은 마치 무당굿 구경을 하다가 신명이 나면 무당 이마에 지전을 붙여주는 것과 같은 것이고, 일본사람들은 가부끼(歌舞技)나 신파 구경을 하다가 배우가 잘했거나 자기 자신이 흥이 났거나 했을 때에 휴지에 돈을 싸서 무대로 던진다. 이런 풍습은 내가 일본에 가서 공부랍시고 할 때에 활동사진관에서도 보았다. 명변사가 활변(活辯)을 했을 때, 그 영화가 끝나고 불 켜진 다음에 보면 스크린 앞에 휴지 뭉치가 수두룩했다. 어느 것이나 적지 않은 돈이다. 그때 연흥사에서도 장안사(낙원동에 있었다)에서도, 단성사에서도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이 좋은 풍경이 없어진 지도 오래다. 고도의 문화족이 된 까닭에 시시한 고풍은 없앤건지는 모르나 돈은 안 던져도 좋으니 연극 구경을 많이 와 주기나 했으면 좋겠다. 문이 메이도록 모여들던 때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