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천리
- 감독
- 남홍일
- 제작년도
- 1959
- 출연
- 박암, 이민자, 김진규, 안성기, 이경희, 박광수, 최성호, 한은진, 윤왕국, 성소민, 김칠성, 최삼, 윤란성, 백성희, 임운학, 박성근, 전숙, 박순봉, 이예민, 독고성, 독우영, 송돈상, 최수경, 채훈, 송일근, 윤신옥, 고애란, 방선향, 김은주
[사진]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에 출연한 김동원, 오른쪽은 배우 신성일 구경꾼들 폭소 자아낸 <밤의 태양>의 야외 촬영 1948년 밀수 근절을 위한 수도청 후원의 정책 홍보영화 <밤의 태양>(박기채 감독)에 출연한 김동원(金東園)은 신극배우로서 은막에 진출한 첫 사례가 된다. 그동안 극단 황금좌를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영화에 출연한 황철, 심영 등 해방 전 신파배우들과는 달리 그는 신극을 지향한 극예술협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상대역은 최은희, 조연으로 전택이, 한은진 등이 합류했다. 그는 영화가 연극과 장르는 달라도 연기의 이치는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막상 카메라 앞에 서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관된 흐름 속에서 전개되는 무대 연기와는 달리 감독의 콘티에 따라 진행되는 토막 촬영이어서 감정을 잡지가 쉽지 않았다. 거리에서 교통사고로 쓰러진 애인(최은희)을 안아 일으키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긴장한 나머지 여자를 안고일어서다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구경꾼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졌음은 물론이다. 그의 첫 출연은 이렇게 ‘실망스럽게’ (김동원, 『미수의 커튼콜: 나의 예술과 삶』, 태학사, 2003, 144~145쪽) 끝났다. <밤의 태양>에 출연한 후 다시는 외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김동원이 문화영화 <코리아>(신상옥, 1954)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로부터 6년 만이었다. 명승지와 그곳에 담긴 일화를 소개하는 이 영화에서 그는 남원을 무대로 전개되는 <춘향전>의 이몽룡 역할을 맡아. 춘향 역인 최은희와 다시 호흡을 맞추게 된다. 그사이 그는 악몽 같은 ‘6,25 동란’을 겪었다. 극단 신협이 앙코르 공연으로 마련한 번역극 <뇌우(雷雨)>(부민관)가 끝난 지 이틀 만이었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종로구 필운동 처가에서 숨어 있다가 붙들려 한밤중에 연극인 일행과 함께 북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임박한 때였다. 그러나 다행히 평양을 지나 대동강 중류 연안의 순천지역에 이르렀을 때 유엔군과 함께 진격해온 국군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된다. (김동원, 앞의 책, 173~180) <자유부인> 이후 형성된 신사풍의 캐릭터 김동원이 관객들의 시선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1956)부터였다. 1954년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정비석의 서울신문 연재소설(215회) 『자유부인』을 영화화한 이 작품에 양품점 주인 안태석 역이 주어졌다. 검열 당시 그가 유부녀 오선영을 끌어안은 포옹 장면과 그녀가 이웃청년 신춘호(이민)와 가진 키스 장면이 한국의 도덕 기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상영이 보류될 위기 (“키스 장면이 말썽, <자유부인>도 상영 불허”, 『동아일보』, 1956.6.9) 를 맞기도 했으나 수도극장에 개봉되면서 15일간 15만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안태석 역할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영화평론가 이봉래는 ‘완전한 미스캐스트’라고 전제하고 “그 신파조의 대사와 움직임이 없는 생경한 연기는 이분이 어떻게 연기를 한 분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근래의 쾌작, 영화 ‘자유부인’”, 『한국일보』, 1956.6.7)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동원은 이 영화의 성공과 함께 대중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그런 후광 덕인지 그는 잇따라 같은 해에 김소동, 김한일 형제 감독에 의해 각기 만들어진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1956)와 <여성의 적>(1956)에 출연하게 된다. [사진] <자유부인>(한형모, 1956)에 출연한 김동원, 상대역은 여주인공 오선영을 맡은 배우 김정림 이후 그는 홍성기 감독의 <실낙원의 별>(1957)을 비롯한 <장미는 슬프다>(박상호, 1958),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1958), <한말 풍운과 민충정공>(남홍일, 윤봉춘, 1959)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신상옥, 1959), <연산군>(신상옥, 1961), <유정>(김수용, 1966), <엘레지의 여왕>(한형모, 1967),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 <엄마 결혼식>(조문진, 1973) 등 160여 편에 캐스팅 된다. 이 가운데 주연급이 ‘영화연기로서의 이행을 확실히 실증 ’(유한철, “57년 영화계 총평”, 『조선일보』, 1957.12.26) 한 <실낙원의 별>(소설가 역) 등 60편에 이른다. 1950년대 중후반 김동원은 그동안 연극배우로서 누려온 정상의 위상에 버금하는 인기를 누렸다. 이 사실은 당시 월간 대중지 《희망》이 독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현역 남녀배우 인기투표’ 결과 (“제2회 배우 인기투표, 제1위에 남 김동원, 여 조미령”, 『조선일보』, 1957.8.3) 가 말해 준다. 그는 2위의 전택이, 3위의 최무룡을 제치고 대중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배우로 선택받았다. 그동안 그는 왕(<왕자 호동과 낙랑공주>, <연산군>)이거나, 회사 사장(<장미는 슬프다>), 독립운동가(<별아 내 가슴에>), 충신(<한말풍운과 민충정공>,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대학교수(<낭만열차>(박상호, 1959), <일월>(이성구, 1967)) 소설가(<실낙원의 별>, <장군의 수염>), 초등학교 교장(<저 하늘에도 슬픔이>(김수용, 1965)) 등 악역과는 거리가 먼 점잖은 신사풍의 인물들을 만들어 내었다. [사진] <장미는 슬프다>(박상호, 1958)에 출연한 김동원, 상대역은 여배우 김지미(사진제공: 김종원) 일본 유학 시절의 단역 출연 김동원은 1916년 11월 14일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에서 양화점을 경영하는 김경순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혁(東爀)이 본명이었으나 해방이 되는 해 11월 <검찰관> 공연 때부터 획이 많고 딱딱한 본명 대신 대중들이 알기 쉽게 평소 좋아한 작가 이광수의 아호 ‘춘원’에서 원(園)자를 따서 새로 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개성제일공립보통학교 4학년이 되자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보통학교 과정을 마치자 배제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 후 처음 유진 오닐의 〈고래〉로 연극무대에 섰다. 부풀어 오른 그의 ‘대배우로의 야망’은 결국 일본대학 예술과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유학시절 그는 조선유학생들끼리 동경학생예술좌라는 연극 서클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일생에 연극의 동반자가 된 이해랑을 만나게 된다. [사진] <실낙원의 별>(홍성기, 1957)의 한 장면, 왼쪽이 여배우 주증녀, 오른쪽이 노경희(사진제공: 김종원) 이 무렵 그는 쇼치쿠(松竹) 영화사의 연기자 모집에 응모하여 8개월 동안 연수를 받고 ‘얼굴도 보이지 않는 단역’ 몇 편에 출연하기도 했다 .(김동원, 앞의 책, 70쪽) 그러나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결국 1939년 5년간의 일본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에 오른다. 이후 그는 신협 등에서 활약하며 국내 최초의 <햄릿>(1951)에 출연, ‘한국의 로렌스 올리비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정확한 발성과 화술로 중후한 연기를 보여줬던 김동원은 2006년 5월 13일 아흔 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첫 키스 신의 수혜자에서 이완용 단골 배우로 해방 후 미군정기(1945년 9월 9일~ 48년 8월 15일)까지 제작된 영화는 최인규 감독의 <독립전야>(1948)까지 29편에 이른다. 이 가운데 경찰의 지원 아래 만든 정책 계몽영화가 <밤의 태양>(박기채, 1948), <수우(愁雨)>(안종화, 1948), <여명>(안진상, 1948) 등 세 편이다. 이향(李鄕)은 이 가운데 <밤의 태양>(1948)으로 영화계에 이름 석 자를 올렸다. ‘7’이라는 별명을 가진 불량배 역할이었다. 그는 영화를 찍는 동안 박기채 감독의 유난스런 호각 소리를 여러 번 들어야 했다. 박 감독은 일반적으로 쓰는 ‘레디고’대신 먼저 ‘레디’라 외친 뒤 호각을 불었다. 이 영화를 촬영할 때 모조품이 아닌 각종 총기가 소품으로 사용되었다. 특수효과 기술이 빈약해 실탄을 넣고 쓰다 보니 배우들이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이향, 「예(藝)에 살다, 연기일생(12)」 , 『일간스포츠』, 1980.1.18) 그는 <밤의 태양>에 이어 김성민 감독의 <사랑의 교실>(1948)과 프랑스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마테오 팔코네」를 번안 각색한 <심판자>(1949)에 출연했다. 이렇게 조연에 머물렀던 그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1954)에 고학생으로 위장한 방첩대 대위 신영철 역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그는 도둑의 누명을 쓰게 됐을 때 자신을 구해준 술집 종업원 마가렛(윤인자)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가 위장 대남 간첩(정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권총을 겨눠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향은 그 여간첩이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결말 부분의 키스 신을 찍기 위해 감독과 함께 1주일 동안 상대역인 윤인자를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키스라고 해야 겨우 입술만 댔을 뿐인 어설픈 이 장면이 한국 최초의 키스신이 된 배경이다. [사진] 최초의 키스신으로 알려진 <운명의 손>(한형모, 1954)의 한 장면 이향은 <운명의 손> 이후 <인생역마차>(김성민, 1956), <마의태자>(전창근, 1956), <검사와 여선생>(윤대룡, 1958), <형제>(김성민, 1958) 등에 주연으로 기용되면서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인생역마차>에서는 암흑가의 두목과 신문기자 1인 2역을, <마의태자>에서는 타이틀 롤을, <검사와 여선생>에서는 은혜를 입은 옛 은사를 법정에 세워야하는 검사 역을 맡고, <형제>에서는 남의 아내가 된 옛 애인 앞에 살인강도가 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에게 이와 같은 기회를 준 것은 <사랑의 교실>부터 <형제>까지 네 편에 불러준 김성민 감독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그 후의 배역들이 앞의 작품들에 비해 비중이 떨어지거나 비호감형, 악역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멜로드라마 보다 시대극이나 활극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사진] <형제>(김성민, 1958)에 출연한 이향_사진제공 김종원 그 예로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의 일본 경찰 주임, <한말풍운과 민충정공>(윤봉춘, 남홍일, 1959)의 강압적인 일본 사신 하야시, <아아, 백범 김구 선생>(전창근, 1960)의 저격 미수범 한태구, <안개 낀 거리>(강범구, 1963)의 살인 청부 역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전창근, 1959) 이후에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신상옥, 1959) 등 이완용 배역만 무려 여섯 번이나 맡아 ‘이완용 단골 배우’가 되었다 .(이향, 「예에 살다, 연기일생」 (19) 『일간스포츠』, 1980.1.27) 그는 1964년 한 해 동안 <동굴 속의 애욕>(강범구) 등 11편에 출연, 최다기록을 세우며 1991년 7월 29일 알츠하이머로 77세의 삶을 마칠 때까지 <원점>(이만희, 1967), <검은 장갑을 껴라>(이상언, 1971), <악인의 계곡>(김묵, 1974), <족보>(임권택, 1978), <바람 불어 좋은 날>(이장호, 1980), <초대받은 성웅들>(최하원, 1984) 등 모두 131편의 영화를 남겼다. [사진] <검사와 여선생>(윤대룡, 1958)의 한 장면 단련된 몸으로 이미 맛본 단역 경험 독특한 저음이 만들어내는 광물성의 강한 목소리, 날카로운 눈매로 36년 동안 한국영화계의 길목을 지킨 이향은 1914년 2월 8일 서울 효제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근식(李根植)이다. 그는 아홉 살 때까지 강원도 홍청군 서면 동막리에서 자랐다.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자신은 일본 사람을 상대로 모피 장사를 했다. 이 소년은 집근처인 연동교회에 다니며 뒷날 부통령이 된 함태영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풍족한 아버지 덕에 서울주교보통학교 4학년을 졸업하고 경신(儆信)학교에 입학했으나 2학년 학기 초에 배재고등보통학교의 축구선수로 스카우트되는 바람에 학교를 옮겨야만 했다. 그런데 축구가 싫어졌다. 이 학교를 나와 들어간 곳이 연희전문학교 별과(別科)였다. 별과란 축구와 야구선수로 구성된 일종의 특기 반이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연극에 있었다. [사진] <이름없는 별들>(김강윤, 1959)에 출연한 이향 이 무렵 낭만좌(座)라는 극단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조연 배우가 나가는 바람에 급히 자리를 메워야 한다며 출연을 권했다. 그 대타로 나가게 된 것이 <아편전쟁>의 쿠리 역이었다. 작은 역할이었으나 칭찬을 받게 되자 학업마저 중단했다. 연극 일이 늘면서 한 선배가 그에게 “고향을 그리듯이 조국을 잊지 말라”며 시골 향(鄕)자가 들어간 예명을 지어 주었다. 이향은 <밤의 태양>에 앞서 해방 전 눈에 안 띄는 배역이지만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스물다섯 살 때였다. 하루는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제작부장(이백산)이 불러 만났더니 영화에 나오라는 것이었다. 맡겨진 배역은 갑, 을, 병 세 명의 농부 가운데 한 명인 농민 역, 김유영 감독의 <수선화>(1940)였다. 의정부 촬영장으로 나갔더니 감독의 지시라며 바지저고리부터 입게 하고는 4, 5일 동안을 땅바닥에서 지내게 했다. 그래야만 농부의 분위가 몸에 밴다는 것이었다. 황달병을 앓고 있던 김 감독은 눈이 퉁퉁 부은 상태로 들것에 실려 나와서도 극성스럽게 현장을 지휘했다. (이향, 「예에 살다, 연기 일생(8)」 『일간스포츠』, 1980.1.14) 이향은 그 뒤 연극계의 선배인 극작가 이광래의 소개로 연극지망생인 처녀와 사귀었다. 1949년 ‘제3무대’라는 극단을 만들어 공연 준비에 한창 바쁠 때였다. 손 씨인 그녀의 아버지는 당시 대한통운의 전무였고 오빠는 아나운서였다. 하지만 그녀의 집안에선 그들의 교제를 적극 반대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동거로 맞섰다. 첫딸이 네 살이 되어서야 겨우 승낙을 받고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1970년 이향이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병마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보살폈던 그런 아내도 6남매를 남긴 채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