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술
- 감독
- 노영석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송삼동, 육상엽, 김강희, 탁성준, 이란희, 신운섭, 이승연, 윤수안, 윤경호, 이도희, 김가온, 오남숙, 이귀녀, 김정규, 황은심, 김영수, 최경미, 양미숙, 노영석
< 춘천, 춘천 >은 겹쳐진 표제어의 꼴이 말해주는 것처럼 두 개의 춘천에 관한 이중구조의 영화이다. 장우진이 묘사한 미시 우주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과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의 교차를 매개하여 우연과 시간의 관계를 묵상하면서 인간 상호작용의 저류(低流)를 지도 그린다. 플롯은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에 관한 두 갈래 내러티브를 따라 평행하게 진행한다. 느릿한 페이드(fade)로 화면이 열리면 기차 안에서 한 청년(우지현)이 옆에 앉은 중년의 남녀(양흥주, 이세랑)가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있다. 그들의 목적지는 서울 동쪽에 있는 도시 춘천이다. 여행자의 행색이 완연한 중년 커플에 비해 청년의 차림새는 어딘지 헐거워 보인다. 비좁은 의자를 나눠 앉은 청년과 중년 커플 사이를 쇠기둥이 단호하게 가르고 서 있다. 프레임을 양분하는 쇠기둥이 접는 면을 이루듯 플롯의 전반부는 지현, 후반부는 흥주의 세랑을 따라 두 개의 여로를 제시한다. 나란한 서사 라인을 연결하는 이박삼일 동안의 두 조각 모음은 캐릭터의 병렬 경험을 따라서 흘러간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느 지점에서 서로 엮이는가? <춘천, 춘천>의 시각 스타일은 미니멀리스트의 방식이다.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고 간헐적으로만 패닝하며 움직이는 캐릭터들을 따라 트래킹하지 않는다. 단순한 구도의 1인 또는 2인 쇼트에 의존하는 이러한 스타일은 디테일에 집중하게 하고 캐릭터 행위의 미세한 변화를 새기게 하며 이런 진부한 스토리를 보고 있는 이유에 대해 계속 사고하게 한다. 서사적으로는 두 개의 시간 층위를 겹치면서 이야기의 주름을 만든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한 지현이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방랑하는 행장기 다음에 흥주와 세랑의 여정이 포개진다. 두 경로는 모두 고요한 휴양 도시의 지형도 위에서 펼쳐지는데 단지 그것만이 공통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저들의 우주는 근거리의 좌표 상에 그려진다. 일자리를 얻어 서울로 향하는 동향(同鄕) 친구와 춘천역 에스컬레이터에서 교차한 지현은 그날 밤 구직 면접에서 탈락했다는 통보을 받고 크게 낙담한다. 다음 날 이 도시를 대표하는 마라톤 경기의 출발선에 서 비틀거리던 지현은 페리를 타고 호수를 건너 청평사에서 기원을 추정하기 힘든 기도를 올린다. 정처 없이 떠돌던 청년의 발걸음은 친구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 평상에서의 넋두리를 지나 다음 날 아침 페리호 위에서 종료된다. 흥주와 세랑의 이동 경로는 지현의 꼬리를 밟는다. 저렴한 모텔 방이 모두 소진되어 비싼 숙소에 든 두 사람은 한 방에 묵게 된다. 다음 날 아침, 이번에는 마라톤 경기의 결승점에서 북적대는 인파들 사이를 빠져나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식당의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한다. 어색하고 썰렁한 식사를 마친 세랑은 23년 전에도 이곳에 들러 산채비빔밤을 먹었는데 그때도 맛은 별로였다고 회고한다. 페리를 타고 청평사에 들어가 세랑은 절을 하고 흥주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늦은 오후 절에서 나온 두 사람은 소박한 식당에 앉아 낮술을 마신다. 다음 날 아침 안개 낀 호수 기슭의 잿빛 풍경을 보고 상념에 빠진 그들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점진적으로 분리된다. 캐릭터의 묘사는 섬세하고 상황의 전개는 느슨한 <춘천, 춘천>은 진정한 삶이 어떻게 경험되는지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항상 사이에 끼인 과정임을 깨닫도록 한다. 이 일상의 휴먼 드라마는 모든 영화적 감각이 시간의 흐름과 사소한 제스처, 빛의 변화에 맞춰져 있다. 영화의 진가는 시각적 표현, 소리, 우연한 마주침에 있으므로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훼손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인간들이 상호작용하는 장소로서 공간을 새롭게 인식하는 두 개의 롱테이크 신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먼저 취업에 실패하여 한껏 울적해진 지현이 에스컬레이터에서 스친 고향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노래를 불러 달라고 조르는 밤의 정경을 묘사한 신이다. 후회와 자책, 망연함이 뒤섞이는 10분의 지속 시간 동안 우리는 천천히 무너지는 청년을 지켜본다. 음악을 그만두고 서울에 취직자리를 얻은 친구가 불러주는 애절한 노래의 마지막 음이 밤공기를 가르고 떠오를 때까지 지현은 숨을 참는 것 같다. 두 번째 롱테이크 신은 아마도 지현이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식당에서 막걸리와 파전, 전골을 놓고 나누는 흥주와 세랑의 대화이다. 카메라가 거의 움직이지 않는 까닭에 우리는 머뭇거리는 저들의 대화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 진부해 보이는 시간의 길고 유동적인 흐름은 얇은 비닐 가림막 뒤에서의 조용한 대화를 보여줄 뿐이다. 비닐 가림막 너머에 있는 태양이 구름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는 동안 카메라는 두 사람의 과거를 회고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서툴고 더듬거리는 말들을 수록한다. 주변에 떨어지는 빛의 명암은 그들의 변화하는 감정에 따라 황금빛에서 어두운 그늘로 수시로 바뀐다. 변화하는 빛과 서늘한 바람 소리, 시간의 흔적이 그대로 기록된 이 신의 도입부에는 사마귀도 등장한다. 흥주는 사마귀와 방아깨비의 차이를 설명하고, 가을이 더 깊어지면 사마귀도 색깔이 낙엽 색깔처럼 변해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고 이야기한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세랑은 어린 시절 몸에 사마귀가 났을 때 사마귀가 그걸 먹어주면 없어진다고 했던 속설이 진짜인지를 흥주에게 묻는다. 흥주는 사마귀는 몰라도 잠자리를 사마귀에 갖다 대면 그걸 물어뜯기는 했었노라고 경험의 차이를 이야기한다. 이런 식의 한담과 그들 각자가 과거에 다른 연인과 춘천을 방문했던 기억을 나누는 동안 사마귀는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던 흥주는 세랑이 앉은 쪽으로 자리를 옮겨 그녀의 옷에 붙어있던 사마귀를 쫓고, 어색한 두 사람을 한 자리에 나란히 앉도록 한 사마귀는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이 기우뚱한 구도 안에 세랑-흥주-사마귀가 나란히 놓인 형상은 춘천행 기차 안에서 쇠기둥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던 세 여행자를 떠올리게 한다. 무려 12분이 넘는 시간 동안 인물들이 자신을 발견하는 무성한 풍경들을 천천히 축적하는 과정은 시간에 대한 감각과 미물(微物)에 투영된 복잡한 감정의 흐름을 전달한다. 평행 우주의 다른 좌표에서 지현은 청평사를 내려오는 길바닥 위에 죽어 있는 사마귀를 본 적이 있다. 사마귀는 어떻게 거기에 나타날 수 있었을까? 영화를 보는 사람들 모두가 장면의 비밀에 대해 알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속 시간의 무게를 탑재한 이 장면들은 빛의 소멸, 미묘하게 반향하는 두 쌍, 투명함의 감각을 위해 시간의 드라마를 변환한다. 과거의 유령, 잃어버린 연결과 놓친 기회가 두 부분을 맴돌며 애잔한 사슬로 청년과 중년을 엮는다. <춘천, 춘천>은 일상적인 장소와 날씨, 빛의 기록이자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그 시간을 통과한 인간과 자연에 관한 유려한 미니어처이다. 장우진은 풍부한 특성화와 미적 감성을 통해 세계의 복잡성을 추론하게 한다. 우리의 삶이 곧게 뻗은 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곡선이며 때로는 이미 지나갔던 길의 되밟기라는 것을 이 영화는 이야기한다. 내러티브를 형성하는 반복된 말과 사물, 우연한 만남, 이상한 재조합, 전화 통화, 절, 마라톤, 사마귀는 내러티브의 체계 위에서 진동한다. 형식적으로 흥미로운 장우진의 기하학적 플롯은 이중구조와 심리적 묵시라는 수단을 흡수하여 스토리텔링을 해석하는 관객들에게 복합적인 층위를 상상하도록 한다. 정보를 많이 제공하지 않으면서 한 번의 몸짓이나 이미지에 평생의 후회를 담는 이 캐릭터들은 과거를 몇 번이나 회상해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완전히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생생한 계절의 톤에서 안개 낀 회색으로 반복적으로 흔들리는 이야기는 화장실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대는 카메라로 모호한 이중 결말을 이룬다. 표면적으로는 겸손하면서도 은근하게 야심에 찬 장우진의 연출은 세부 사항, 반복 및 후속 보기를 의미 있게 만드는 내적 운율을 통제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작지만 결정적인 순간을 제시한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덜어냄으로써 남아있는 것들 안에 뉘앙스를 드러낸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일상에서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자면, 대화 당사자들 이외의 청자를 반드시 요하는 대화(예컨대 공개토론회), 그러한 청자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대화(삼삼오오 어울려 길을 걸으며 재잘거리는 이들부터 서로 고성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다투는 이들까지), 마지막으로 그러한 청자를 철저히 배제하는 사적인 대화가 있을 것이다. 영화는 이 모든 대화들을 담아낼 수 있지만, 일종의 ‘부재하는 청자’로서의 카메라/마이크가 대화당사자들의 묵인 하에 채록한 것 같은 인상 - 극영화든 다큐멘터리든 이러한 묵인의 인상이 없다면 그것은 순전히 도청이나 몰래카메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을 주는, 세 번째 범주의 대화 상황의 구성에 특별히 관심을 쏟는 매체다. 물론 이 사적인 대화는 그 내용에 따라 고백이나 약속 같은 친밀한 것으로부터 모의나 협박 등 적대적인 것까지 수준을 달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대화 상황의 특수성에 걸맞은 영화적 표현은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은 유성영화가 탄생한 이래 감독들에게 부과된 중요한 과제다. 굳이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올해 몇몇 한국독립영화를 보면서 거기 묘사된 대화 상황이 지극히 단조롭고 편향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인데, 특히 많은 평자들로부터 상찬을 받은 윤성현 의 < 파수꾼 >은 내겐 오히려 리얼함이 과장된 적대적 대화나 그도 아니면 대화가 실패하는 상황이 교차되는 상황을 제법 기교를 부린 내러티브, 카메라워크 및 편집으로 눈가림한 좀 미숙한 영화처럼 보였다. (이와 유사한 인상을 주었던 독립영화로 윤종빈 의 < 용서받지 못한 자 >가 떠오른다.) 특히 또래 남녀학생들이 지하철 안에서, 길 위에서, 그리고 중국집에서 주고받는 대화 상황을 연출한 방식 - 아이들의 모습을 잘게 나눈 쇼트들로 분할해 보여주면서 음악만 얹어 뮤직비디오 풍의 장면을 만들거나, 대화의 전체 맥락을 그려내지도 않은 채 한 두 마디 말만 불분명하게 들려주고는 그에 반응해 웃는 광경만을 보여주는 TV드라마 같은 방식 - 을 보면, 과연 이 감독이 일부 평자들이 상찬한 대로 동시대 아이들의 초상을 제대로 다룬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진다. 윤성현이 사소한 것으로 치부한 이 장면들은, 예컨대 앤드류 부잘스키나 알렉스 로스 페리 같은 미국독립영화계의 ‘멈블코어’(mumblecore) 작가들에게서라면 그 자체로 훌륭한 영화적 소재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감독은 ‘파수꾼’이라는 제목이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가져온 것이라 했다지만 그는 J.D.샐린저가 <프래니와 주이>의 작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 같다. 적대의 언어가 아니라면 대화 상황을 의미 있게 영화적으로 구성해내지 못하는 난점은 (개별 영화들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많은 다른 독립영화들에서도 발견된다. 내밀함을 요하는 대화 상황은 어쩐지 진부하고 낯간지러운 방식으로만 묘사되고, (홍상수의 영화나 부당하게 냉대 받은 배창호 의 < 여행 >같은 중견감독들의 ‘독립영화’, 그리고 노영석 의 < 낮술 >이나 윤성호 의 영화 정도를 제외하면) 평범한 대화의 이면에서 혹은 그것을 굴절시켜 다양한 감정적 효과를 끌어내려는 연출의 사례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다수의 한국독립영화들이 장르적이기보다는 리얼리즘적이기를 - 혹은 적어도 장르의 리얼리즘을 - 추구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경묵 의 < 줄탁동시 >는 적대적이거나 진부한 대화 상황, 그도 아니면 침묵의 순간들로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지극히 동시대적인 한국독립영화다. 어쩌면 오늘날 한국독립영화에선 대화의 기술을 잃은 자들의 도착적 자기표현으로 폭력( 양익준 의 < 똥파리 >와 전규환 의 < 애니멀 타운 >)과 침묵( 박정범 의 < 무산일기 >)만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 독립영화의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짐승의 (대화의) 끝.’ 보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말을 걸어오는 쪽이 있다면 그건 여성들이다. 때로 그녀들은 거의 당혹스러울 만큼 직설적인 표현으로 - 이서 의 < 사람을 찾습니다 >나 양익준의 중편 <미성년>에서처럼 - 단조로운 (남성적) 대화의 세계에 신선한 공기를 더한다. 혹은 오직 그녀들만이 세속적인 소통의 기술과 그 필요성을 안다( 민용근 의 < 혜화, 동 >과 박정범의 <무산일기>). 비언어적 표현(제스처와 폭력) 혹은 반언어적 표현(적대의 언어)은 남성의 편에 언어적 표현은 여성의 편에 할당하는 식으로 전통적 역할에 있어서의 전도(顚倒)가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야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지만, 대체 이러한 전도가 겨냥하고 있는 영화적 지향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2009년 한해동안 독립영화는 여러 개의 흥행 홈런을 쳤다. 신년 벽두에 개봉한 < 워낭소리 >의 이례적이고 기록적인 흥행은 대중성과는 무관하다고 생각됐던 독립영화 그리고 다큐멘터리에 대한 선입견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연이어 < 낮술 >과 < 똥파리 >의 선전은 독립영화는 재미없고 심각하다는 편견을 해소시키면서 관객들의 커다란 호응을 얻어냈다. 이 작품들은 대중적인 호응 뿐만 아니라, 평단의 지지와 해외영화제에서의 연이은 수상으로 작품성에 대한 평가도 동시에 얻어냈다. 그리고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예고했다. 사실 이전에도 독립영화들은 주류영화와는 다른 재미로 관객들과 만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물론 그 재미가 상업영화에서 추구하는 재미와 다르고, 현실을 잊게 하는 대신 환기하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낯선 영화로 비춰진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이고 다양한 도전과 실험들이 올해의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몇편의 영화가 얻은 성공이 불균등한 영화 환경을 바꿔놓을 수 없다는 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대다수의 독립영화는 개봉하기가 어렵고 극장을 잡기가 어렵다. 개봉을 하더라도 관객을 만나는데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독립영화계에 오래 몸담고 있었던 사람으로 이런 일은 흔하게 봐왔기 때문에 어느정도 익숙해졌다. 물론 좋다고 생각한 영화에 관객이 없을 때는 역시 안타깝기도 하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어렵게 영화를 만들고 처음 개봉하는 입장이 되는 감독들은 더더욱 이런 사실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어도 자신의 영화에 관객이 없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때문에 극장 탓을 하기도 하고 배급사나 마켓팅사에 항의를 하기도 한다. 그 명백한 사실을 이미 체득한 감독들은 영화가 개봉할 경우 애써 무심한 척한다. 영화의 홍보에도 인색하고, 차라리 다음 영화에 더욱 에너지를 쏟는 경우도 있다. 흥행수치에 그건 내 일이 아니라는 듯 둔감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 오히려 배급사에게 핀잔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의 이런 사례들이 수집될 수 있었던 것은 일년 내내 독립영화만을 상영하는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반 극장과는 전혀 다른 영화들을 상영하면서 새로운 영화문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인디스페이스]는 2009년 12월 31일부로 문을 닫는다. 앞으로 운영자 공모를 통해 새로운 독립영화전용관 운영자가 선정되고 새로운 극장이 생기겠지만, 어느 극장이 전용관이 될지 누가 운영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너무 아쉽고 참담한 기분이 든다. 많은 창작자들이 이제 자신의 영화를 어디서 상영해야 하는지 걱정하고 있다. 꾸준하게 독립영화를 관람했던 관객들은 자신들의 공간이 사라지는 것을 우려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그들은 다시 블록버스터들이 향연을 벌이는 멀티플렉스를 전전해야 하는가? 조금더 어렵고 힘들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돌파해내지 못한다면 독립영화가 아니다. 충분히 이런 상황을 넘어서고 극복할 수 있다. 당연하다. 독립영화전용관이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비판하며 싸우는 것도 독립영화인들의 몫이다. 2009년에 쌓아올린 독립영화의 지난 10년 이상 쌓아온 노력의 결과이다. 그것은 몇편의 영화가 상징적으로 이뤄낸 성과 이상이다. 독립영화는 편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다양해졌으며 질적으로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왔다. 사회의 제도적 환경은 점점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독립영화는 항상 시대와 대면하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새로운 환경을 개척해왔다. 생각해보면 2009년은 연타석 홈런으로 대량 득점에 성공했지만,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대량 실점해서 패전의 위기에 몰린 해이다. 축구선수 박지성의 표현대로 심판의 편파판정이나 오심도 게임의 일부라면, 받아들이긴 어렵지만 게임 자체를 포기할 수 없다. 홈런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안타와 치고 달리는 작전으로 지지 않는 게임을 벌여야 한다. 최근 독립영화에는 젊고 신선한 감각의 신인 뿐만 아니라 10년 이상 필모그라피를 채워오면서 역사를 지켜온 베테랑 감독들도 건재하다. 그만큼 선수층이 두텁다. 2010년 새로운 10년이 시작된다. 새로운 시즌이다. 두터운 선수층으로 새로운 작전을 구사해서 지지 않는 게임을 해야 할 시기이다. 독립영화의 새로운 10년을 기대하시길. 그리고 해피 뉴 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