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죠
- 감독
- 소리 후미히코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야마시타 토모히사 , 카가와 테루유키, 이세야 유스케, 카리나
처음으로 좋아한 격투기는 프로레슬링이었다. 김일의 박치기와 천규덕의 당수를 보며 가슴 졸이고 환호했다. 홍수환, 유제두, 박종팔 등의 복싱도 열심히 봤다. 그리고 프라이드와 UFC 등을 접하며 종합격투기에 빠져들었다. 격투기는 원초적인 스포츠다. 프로레슬링은 번외로 하자. 프로레슬링은 육체의 기술을 갈고닦아 캐릭터와 스토리를 더해 만들어진 쇼다. 육체의 화려함과 열정을 최대한으로 뽑아내는 엔터테인먼트. 프로레슬링은 쇼이지만, 복싱과 종합격투기는 일상의 싸움과 다르지 않다. 후두부와 성기 등 급소를 때리지 않는 정도의 규칙만 있을 뿐이다. 맹수의 공격을 방어하고, 동물을 사냥하고, 인간끼리의 다툼에서 필요한 생존의 기술은 격투기로 발전했다. 내가 격투기에 빠진 이유는 단순했다. 싸우는 그들에게 끌렸다. 격투기의 결과는 승패로 갈린다. 하나는 이기고, 다른 하나는 진다. 오로지 승리하기 위해 그들은 상대를 때리고, 걷어차고, 꺾는다. 혼자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싸운다. 하지만 격투기를 보면서 승자에게만 열광하지는 않았다. ’졌잘싸‘라는 말이 있다. 졌지만 잘 싸웠다, 의 줄임말이다. 비록 승부에서는 패배했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우는 이를 보면 가슴에 무엇인가 일렁인다. 오로지 승리하기 위해서, 치사한 전략으로 일관하는 놈을 보면 짜증이 일어난다. 단지 지지 않기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녀석을 보면 그저 한심하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미야케 쇼의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격투기의 감흥을 떠올리는 것은 어딘지 이상하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격투기, 복싱의 희열이 무엇인지 그리는 영화가 아니다. 복싱을 택한 청각 장애인의 일상을 보여주는 영화에 가깝다. 복싱은 케이코에게 중요하지만, 생활을 압도하거나 대체할 수 없다. 케이토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복싱을 택했을 뿐이다. 누군가가 아니라, 세상을 때리고 싶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싸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 우리는 던져진 것이니까.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일본 최초의 청각장애인 여성 복서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자서전 <지지 마!>(2011)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미야케 쇼는 오가사와라의 모든 이야기를 영화에 담을 생각은 없었다. 아니 그의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모든 시간과 사건을 그리지 않는다. 미야케 쇼는 말한다. ‘복싱을 다룬 것만이 아닌, 하루하루 링 위에서 그리고 링 밖에서 싸워나가는 한 여성을 그린 영화다.‘ 오가사와라 케이코가 소속된 체육관의 관장은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재능은 없어요. 키가 작고, 리치도 짧고, 스피드도 느리고요. 하지만 뭐랄까. 인간적인 기량이 있어요. 정직하고 솔직하고 아주 좋은 녀석이에요.’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케이코는 반항적인 아이였다. 고등학교 때는 분을 못 이겨 선생을 때릴 정도였다. 보통 아이들과 다른 자신의 처지 때문에 울분이 많고, 쌓인 감정을 발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반항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케이코는 호텔에서 객실 청소 일을 하고, 복싱을 시작한다. 케이코는 말한다. ‘때리면 기분이 좋아요.’ 그리고 또 말한다. ‘맞을 때 아픈 것이 싫어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은 아무래도 쉽지 않다. 치열하게 싸우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케이코를 비롯한, 싸우는 사람들에게 끌리는 것은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치고받으며 싸우는, 마지막까지 전장에 서 있는 이들을 보면 어딘가 연대감이 느껴진다. 처참하게 패배할지라도, 함께 끝까지 싸워보고픈 마음이 든다. <내일의 죠>의 명대사처럼, 마지막까지 ‘하얗게 불태워’버리고 싶은 마음이랄까. 실베스터 스탤론의 < 록키 >처럼, 지더라도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쏟아내고 난 후 링 위에 꿋꿋하게 서 있고 싶어진다, 할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젊을 때는. 나이가 들면서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미야케 쇼는 인터뷰에서 ‘나는 솔직히 말해 10대부터 20대까지 꾸준히 성실하게 살자, 라고 하는 구호에 약간의 반감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이대에 접어드니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숏 한컷 한컷이 쌓여 완성되는 영화처럼 인생의 의미란 것이 결국 아주 조그마한 것들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쌓아가는 게 아닌가, 그렇게 느리고 작은 움직임이 소중하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영문 제목을 떠올려 보니 ‘Small, Slow But Steady’다. 작고, 느린 것이 소중함을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케이코의 위대한 승리나 처절한 노력을 말하지 않는다. 케이코는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체육관에서 열심히 훈련한다. 그것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편해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시합에서 지는 일은 벌어진다. 그렇다고 상대가 엄청난 것도 아니다. 그 역시 케이코와 마찬가지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운동하며 살아가는 생활 복서다. 천재도, 셀럽도 아닌 그들의 성취는 작고 느리게 이루어진다. 미야케 쇼는 케이코의 일상을 세심하게 그려낸다. 케이코는 들을 수 없지만, 세상에 가득 찬 소리들. 케이코가 다니는 체육관과 강변 그리고 골목길 등을 채우는 햇살과 공기 그리고 먼지들. 우리들의 일상은, 문득 멈추어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작고 느린 것들로 가득하다. 16밀리 필름으로 촬영한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다정하고, 섬세하다. 그리고 사려깊다. 소리도, 공기도, 어느 하나도 허투루 쓰이지 않고 각자 있어야 할 곳에 존재한다. 작고 느린 것들은 꾸준하게 움직이며 어디론가 나아간다. 아니 존재한다. 케이코는 아픈 것이 싫다. 복싱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있다. 세상도 그렇다. 때리고 싶고 싸우고 싶은 마음만큼 도망치고 싶고 피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넘친다. 그런 케이코를 붙들어주는 존재는 타인이다. 오랜 시간 권투를 했고, 지금은 후배를 키우는 체육관 관장. 나이가 들어 육체는 쇠하며 병이 들었고, 재개발로 인하여 체육관을 닫아야 한다. 세상은 결코 그의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재능이 뛰어나지 않은 케이코를 가르친다. 청각 장애인인 케이코가 싸워나가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은 일상의 싸움을 무수하게 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공감했을 것이다. 관장만이 아니라,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인물들은 모두 예사롭지 않다. 음악을 하는 케이코의 남동생은 말한다. 누나는 강하다고. 자신은 누나처럼 강하지 않다고. 흑인 혼혈인 남동생의 애인 하나는 케이코에게 선뜻 다가가 인사를 하며 친해진다. 하나는 케이코에게 춤을 알려준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재능이 있고, 최고가 아닐지는 몰라도 서로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무엇을 가르칠 정도는 된다. 그들은 자신의 길에서 작고 느리게, 꾸준하게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윗세대인 케이코의 엄마와 체육관 관장은 그들이 걸어가는 길을 지켜보고 있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미리 판단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면서, 세파에 움추러든 아이들의 등을 따뜻하게 두드려준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따뜻한 영화다. 케이코는 결코 외롭지 않다. 언제나 그들이 있고, 풍경이 있다. 케이코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풍경 속에서 어우러져 있다. 그리고 소리와 공기가 가득 차 있다. 케이코도 우리도, 언제나 함께, 세상 안에 있는 것이다.
< 보물섬 >은 지금까지도 데자키 오사무가 연출한 역대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TV 애니메이션으로, 당시 후지 TV의 경쟁 프로(똑같이 매주 일요일 저녁 시간대에 방영)였던 `니폰세계명작극장` 시리즈가 원작을 충실히 옮겨냈던 경우라면 데자키 오사무의 <보물섬>은 감독에 의해 원작이 얼마나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를 제시했던 작품이었다. 일찍이 데자키 오사무가 생명력을 부여했던 캐릭터들은 만화(혹은 소설)가 만화영화화 되면서 보여지는 단순히 움직인다는 개념의 애니메이션이 아닌, 그 이상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스스로의 의지까지 함께 불어 넣어왔다. < 에이스를 노려라!> 의 오카 히로미, < 내일의 죠 >의 야부키 죠, < 집 없는 아이 >의 비탈리스 할아버지, 그리고 < 베르사이유의 장미 >의 오스칼.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운명을 거슬러 스스로의 삶의 이유를 찾으려 했던 캐릭터들로 원작에서 보여진 이미지들이 몇배는 증폭되어 애니메이션 속에서 더욱 강한 잔상을 남겨 놓게 된다. 데자키 오사무의 다음 타겟은 존 실버라는 남자였다. 스티븐슨 원작의 < 보물섬 >에는 단지 해적의 신분을 숨기고 배후에서 음모를 꾸미는 전형적이고 악당스런 이미지의 실버가 등장한다. 하지만 데자키 오사무는 이 캐릭터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는 악역이지만 카리스마가 살아있고 해적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인간적인 캐릭터로 실버를 재창조해 낸다. 그 결과 일본 애니메이션사에 어쩌면 가장 특별한 유형의 캐릭터가 창조되게 되는데, 이전까지 애니메이션들의 주인공은 하나 같이 어린이였다. 심지어 단순히 상상해 봐도 아무나 조작할 수 없어 보이는 그 복잡한 거대 로봇의 조종사들 조차 대부분 어린이이거나 청소년 연령 이상을 넘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린이에게 주인공을 빼앗긴 애니메이션 속 어른들의 모습은 어땠을까? 비중적으로도 조연의 범주를 넘지 못하고 있었지만 애니메이션 속 어린이 주인공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모습은 대개 사욕에 눈이 먼 추악한 얼굴들로 묘사된 경우들이 많았다. 심지어 가장 현실적인 애니메이션 속 어른상을 보여주었다는 <기동전사 건담>의 브라이트 노아 조차 아무로 레이의 눈에는 한심한 기성세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쩌면 이러한 어른들의 모습들 때문에 애니메이션에 대한 사회적 편견(어린이들만의 전유물)의 벽이 오랜 기간 허물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는데, <보물섬>의 외다리 해적 존 실버라는 캐릭터는 너무나도 달랐다. 물론 그 역시 껍질 안에는 악을 품고 있는 캐릭터였지만, 적어도 짐 호킨스의 눈에 실버는 동경의 대상이자 나중에 커서 자신이 되고 싶은 남자의 모습으로 비춰 진다. 주인공 짐의 그러한 바람은 시청자들에게도 똑같이 전달 되었고 이는 이전까지 어린이 주인공에게만 거의 일방적으로 할애되었던 캐릭터의 성격 배분 판도를 뒤집어 엎는 매우 의미있는 표본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데자키 오사무의 캐릭터 성격 배분은 실버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보물섬>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캐릭터들에게 하나하나 성격을 만들어 나누어 준다. 리브시 선생과 스몰렛 선장과 같은 인물들은 물론 해적이었지만 변심해 아군이 되는 그레이 같은 캐릭터는 조연임에도 방영 당시 실버 만큼의 지지를 받게 되며, 그밖에 검둥개, 키잡이 한스, 앤더슨 갑판장, 갈매기 빠삐 등 어느 한명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이들은 분명한 성격을 부여 받은 캐릭터들이었고 이에 자극을 받은 성우들의 호연까지 더해져 데자키 오사무의 <보물섬>은 진정한 명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의 영상미를 담보해 주고 있는 것은 데자키 오사무 특유의 스타일쉬한 연출과 그의 명콤비 스기노 아키오의 작화력. 결정적인 순간에 화면이 정지 화면으로 바뀌는 하모니 기법의 완성자 미술감독 코바야시 시치로, 그리고 하모니와 함께 데자키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인 입사광 기법의 창시자 촬영감독 타카하시 히로카타의 황금 조합에 의해서 TV 시리즈임에도 매우 높은 퀄리티를 유지해 냈다.) 데자키 오사무의 < 보물섬 >에 대한 재해석은 최종회에서 최고의 빛을 발한다. 원작에는 없는 10년 후의 짐과 실버의 재회 장면을 에필로그로 추가한 것이다. 성인이 된 짐을 모른 척 외면하며 술집을 나가 버리는 실버. 더이상 그의 눈에는 꿈이나 미래의 빛을 찾아 볼 수 없는, 그저 늙고 병약한(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실버는 기합을 넣어가며 힘차게 말한다. 마치 뒤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짐에게 말하듯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늙은 앵무새 플린트에게 다시 한번 날아 보라고 힘주어 말한다. 어디에 가더라도 어떤 일과 맞부딪치더라도 그런 마음만 있으면 우린 아직 얼마든지 날 수 있다고 의연하게 웃으며 실버는 마지막에 짐을 돌아 본다. 마치 저 마지막 한 커트를 보여주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엄청난 감동의 잔상. 변하지 않았어. 나의, 나의 실버는! 제목: 보물섬 제작년도: 1978년 감독: 데자키 오사무 목소리출연: 와카야마 겐조( 박상일 ), 시미즈 마리( 김순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