냥이
- 감독
- 정서윤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정서윤, 방민영, 윤수선
배우 송강호는 < 넘버3 >(1997)에서 뜻대로 상황이 전개되지 않았을 때 말을 더듬는 청부살인자 캐릭터 조필을 연기하였다. 그가 이 희대의 캐릭터를 창조하는 과정은 <넘버3>의 서사와 다른 등장인물 간의 상관관계에 있어 심대한 의미가 있다. <넘버3>의 진짜 주인공은 자신만의 개성으로 표현되는 주변부 인물들 속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조필의 동기와 등. 퇴장 방식, 출연 분량, 플롯 안에서의 배치를 분석해 보면 이 인물이 이야기의 핵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며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견인차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몇 개의 장면에서 이런 중요성이 확인된다. 영화의 첫 2분 동안 등장하는 몽타주 시퀀스에서 검은 옷을 입은 조필이 처음 나온다. 버드와이저 맥주 캔을 일그러뜨리고 위악적인 표정을 거울에 비추는 건달 태주(한석규), 샌드백을 두드리는 폭력적인 검사 동팔(최민식)에 이어 소개되는 조필은 주차장에서 피투성이가 된 시체 두 구를 수평으로 패닝하는 카메라 무빙의 끝 지점에서 손에 위협적인 회칼을 들고 나타난다. 첫 등장만으로 그가 사람을 도륙하는 지저분한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무자비한 암살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조필은 피에 젖은 손으로 바퀴벌레를 잡아 입 속에 넣는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한다. 채 10초가 되지 않는 이 장면에서 영화의 어둡고 코믹한 톤이 확립된다. 짧고 역동적인 쇼트들의 편집으로 순식간에 지나가는 오프닝은 캐릭터 묘사를 통한 ‘초두효과’를 완성한다. 초두효과라 함은 플롯의 초기 단계에 텍스트의 의미와 맥락, 기조, 주제, 스타일을 암시할 수 있는 세팅을 통해 이후에 올 것들에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스토리 설정의 전략을 말한다. <넘버3>에서 확립된 송강호의 스크린 페르소나는 이 초기 설정을 통해 영화 속 다른 배우들과 차별화되는 특징들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송강호는 조필 캐릭터를 통해 <넘버3>의 두 가지 성격을 확립한다. 하나는 폭력적인 킬러이다. 다른 하나는 어설프고 실없는 농담꾼 또는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았을 때 평정심을 잃어버리는 우스꽝스러운 미숙아이다. 조필의 등장과 첫 번째 행위는 불길함과 코믹함이 머릿속에서 계속 부딪히게 하는 궤적을 만들어낸다. ‘조필’이라는 이름에서조차 비하와 실패의 운명이 감지된다. 무엇 하나 온전히 해내지 못하는 하찮은 존재를 비하하는 말로 당대에 쓰였던 은어 ‘조삐리’로 발음하기 쉬운 이 이름에는 존엄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작명과 연결된 그의 됨됨이는 블랙 코미디의 양면성을 첫 장면에서부터 짐작하도록 만든다. 송강호는 무시무시한 킬러의 뒤에 드러나는 미숙아의 모습을 완벽에 가깝게 구현한다. 이런 페르소나와 관련하여 뇌리에 남는 것은 병원에서의 청부 살인 장면이다. 병원 화장실의 조필은 인근 병실에 든 조직 보스 강도식(안석환)을 살해하기 위한 채비를 하고 있다. 그는 이미 표적을 잘못 설정하여 암살에 실패한 적 있으며 이 미수에 그친 시도 때문에 한층 더 비장한 마음으로 미션을 완수하려 한다. 조필의 검은색 옷은 병원의 흰색 무균 벽과 대조를 이룬다. 조필이 들고 다니는 007 가방에는 라이터, 참치 통조림, 휴지, 생라면, 각종 알약 등 잡동사니 등이 너저분하게 들어 있다. 잡다한 물건들 사이의 밑바닥에서 위협적인 사냥용 칼과 회칼을 꺼내어 든 조필은 사냥용 칼을 집어 들고 가죽 허리띠에 갈아댄다. 질병과 죽음의 기운이 지배하는 병원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이 폭력적인 남자는 살인을 앞두고 있지만 그 전에 거울을 보며 자신을 단장할 필요성을 느낀다. 거룩한 의식이라도 되는 듯 또는 만화의 한 장면처럼, 조필은 눈을 가리는 짙은 선글라스를 얼굴에 쓴다. 이어서 그는 구순포진이 난 입가, 영양부족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갈라진 귓불에 연고를 바른다. 누군가를 죽이기 전에 결점을 감추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킬러의 모습을 형상화한 이 장면은 조필의 캐릭터를 캐리커쳐를 보는 것처럼 기술함으로써 오프닝의 초두효과로부터 누적되어 온 무드를 확고히 한다. 몇 차례에 걸쳐 묘사되는 청부살인의 수행, 그리고 어김없는 실패의 과정은 미숙아의 이미지를 반복, 강화한다. 미션을 수행할 때 항상 입고 있는, 신비롭게 보이는 검은 옷의 이면에는 송강호의 역사를 아는 현재의 관객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어수룩함이 서려 있다. <넘버3>에서 송강호의 캐릭터 묘사는 한국영화의 스타일을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었다. 한 배우의 페르소나의 출발점이자 정수로서 이 영화는 조형적인 언어구사력과 증폭된 제스처, 인물의 단면을 드러내는 신체 언어를 개발하여 이 대배우의 수많은 스크린 페르소나에 반(反) 영웅주의적인 페이소스를 심었다. 이 영화를 통해 송강호가 확립한 것은 신체 훈련, 신체 조작, 대사 애드리브를 통해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구축하는 능력이다. 무언의 신체 언어에 대한 송강호의 재능은 무성영화 형식으로 연출된 한 챕터 ‘쌈마이(들)’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과장된 슬랩스틱 액션 장면들의 몽타주로 구성된 이 신은 표정과 몸짓으로 전달되는 색다른 퍼포먼스를 시전한다. 조필은 조직의 명예와 규범을 가진 사람으로 자신을 묘사하려는 신경증적인 노력과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조잡한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유머를 이끌어낸다. 송강호의 조필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히스테릭하게 행동하지만, 말을 더듬는 등 과도하고 놀란 반응은 그들의 불안과 취약성을 증명할 뿐이다. 그는 인간의 우스꽝스러운 실수를 구현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심오한 성찰을 몸으로 표현하는 이 배우가 <넘버3>를 통해 창조한 개성은 다양한 장르에서 확장되며 생생함을 더하게 되었다. 그의 레퍼토리 전반에 걸쳐 송강호는 힘과 권위를 추구하지만 그 본성이 목표에 닿지 못하는 인물들을 거쳤다. < 반칙왕 >(2000)의 대호, < 살인의 추억 >(2003)의 박두만, < 괴물 >(2006)의 강두, < 우아한 세계 >(2007)의 강인구, <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2008)의 이상한 놈, < 기생충 >(2019)의 기택에 이르기까지 송강호의 말투와 신체, 분리된 행동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가 지휘하는 집단으로부터 자신을 분리되어 가는 인물들을 묘사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넘버3>에는 이와 같은 페르소나의 맹아가 있다. 보스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부하들과 겸상하는 것을 거부하는 대사,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고 협객 최영의의 무용담을 과장하는 말과 신체의 제스처는 위계와 권위를 보호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이 필연적으로 실패로 귀결되는 캐릭터의 파토스를 구축하는데 기여한다. 송강호가 권위과 자존심, 권력이라는 아우라를 유지할 깜냥이 못 되어 조롱거리가 되는 남자들의 대표주자가 된 발단의 지점에 <넘버3>가 있다. <넘버3>의 오프닝에서 조필의 등장 방식과 함께 분석해야 할 것은 그의 퇴장인데 조필의 마지막 모습은 검은 군화의 클로즈업 쇼트로 형상화된다. 자신들이 섬기는 보스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세 제자들은 참담한 실패 끝에 해체된 조직 ’불사파‘를 상징하는 아이콘을 내세운 포장마차를 운영하고 있다. 고수부지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포장마차에 조필이 나타났을 때 제자들은 마치 유령이라도 만난 것처럼 예전의 보스를 응시한다. 그들은 경외감 또는 공포에 사로잡힌 것 같다. 카메라는 또 다른 청부살인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조필의 군화 뒤꿈치를 클로즈업한다. 주변의 속도와 달리 슬로 모션으로 움직이는 이 남자가 불사의 아이콘을 향해 팔자걸음으로 당당하게 걷는 동작에서 이미지는 얼어붙고 배우 송강호의 커리어도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 한국영상자료원 강좌 <2022 영화 글쓰기 키트: 영화 기자가 알려주는 리뷰 작성>의 과제 선정작입니다.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이다. 동시에 왕가위 감독의 영화 제목이고, 개인적으로 참 애정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헤어질 결심>의 해준과 서 래를 보면서 <화양연화>의 주모운(양조위)과 소려진(장만옥)이 오버랩될 때가 종종 있었다. <헤어질 결심>이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과는 조금 결이 다른 영화인 것처럼, <화양연화> 역시 ‘불륜’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우아하면서도 진중한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남녀 주인공의 미묘한 엇갈림과 모호한 상황들로 안타까움과 애틋함을 전해주며, 동시에 연기나 대사 외에도 색채와 영상미 등 진중한 스토리에 녹아든 화면의 미장센이 빛을 발한다. <헤어질 결심>의 주제가인 정훈희의 노래 <안개>는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김수용 감독의 영화 <안개>의 주제가이기도 한 것처럼, 왕가위의 <화양연화> 역시 1930-40년대 중국 가수 주선의 히트곡 '화양적연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쯤에서 ‘안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안개(Fog)는 대기 중의 수증기가 응결하여 지표 가까이에 작은 물방울이 떠 있는 현상을 말한다. 구름과 안개는 떠 있는 위치가 다른 것으로, 하늘 높이 떠 있으면 구름이고, 지표 가까이 떠 있으면 안개이다. 구름일 때는 시야 속 경관을 아름답게 하지만, 안개일 때는 시야를 가리게 되는 것도 특이점일 것이다. 안개는 영화 <헤어질 결심>의 중요한 모티브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흘러나오는 정훈희의 노래도 그렇거니와, 사건도 감정도 인물 간의 관계도 무엇 하나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애매하고 모호한 이 영화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아쉬운 흥행 스코어 속에서도 N차 관람하는 관객이 많은 이유도 서사구조는 심플한 데 비해 그것을 전달하는 장치들은 다양한 층위와 모호함을 전략으로 내세우고 있기에, 각자 인상 깊거나 여운이 남는 (흔히 말하는 ‘꽂힌’) 부분에 대해 나름의 해석들을 자유롭게 내어놓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예전 인터뷰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평범하고 착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극한 상황에서 극단적인 행동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느냐는 질문에, 감독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변태라서 그렇습니다.” 좌중의 웃음을 끌어냈던 이 한 문장은 살짝 유머 코드를 갖고 있지만 영화감독으로서의 박찬욱을 단적으로 표현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좀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배운 변태’라는 말이 좀더 어울릴 것이다. 영화계에서 자타공인하는 영화광다운 해박한 지식과, 미장센에 대한 집착에 가까울 정도의 열정은 박찬욱이 대한민국의 잘 나가는 영화감독에서 칸이 사랑하는 영화계의 거장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박찬욱 감독이 그리는 영화는 리얼리티의 세계가 아니다. 영화는 사실성에 기반을 두고 현실을 재현하지만, 현실의 모습을 온전히 옮기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 안에 작가로서의 해석과 재창조가 들어가야 한다. 박찬욱 감독 스스로 본인이 그리는 영화 속 세상이 아주 사실적인 세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가 그리는 세계는 리얼리티의 세계가 아니라, 비유의 세계이다. 감독으로서 박찬욱이 중시하는 것은 어디를 선택해야 좋을지 모르 겠는 딜레마 상황이고, 그런 상황을 만들어 놓기를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딜레마 상황에 어떤 도덕적인 성격이 개입되어 있다면 더욱 좋다고 이야기한다. 관객들이 보았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으냐’라는, 윤리적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윤리적 질문이 난처할수록 영화는 재미있어진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말은 영화감독 박찬욱을 표현하는 여러 수식어들 앞에 ‘배운 변태’라는 또다른 수식어를 자연스럽게 연결짓게 만든다. <헤어질 결심> 역시 ‘배운 변태’ 영화감독으로서의 박찬욱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런 요소들을 빠짐없이 담고 있다. 산과 바다로 대표되는 서래와 해준의 이야기이면서, 용의자인 서래에게 의심과 관심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형사 해준의 딜레마가 그려지고 있다. 거기에 해준과 서래 둘다 기혼자라는 점에서 (서래의 남편은 극이 시작되자마자 변사체로 등장하긴 하지만) 불륜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다. 리얼리티가 아닌 비유의 세계, 범인을 잡아야 하는 형사로서의 자아와, 아름답고 묘한 여자에게 이끌리는 남자로서의 욕망. 그 둘 사이에서 안개에 싸인 듯 흐릿하고 모호한 상황에 처한 해준의 딜레마.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질곡동 살인사건의 결정적 단서가 되어준 서래의 말은 이러한 딜레마 상황에 ‘불륜’이라는 익숙하고 상투적인 윤리적 질문까지 얹어 놓는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해준이 밤새 서래의 집 앞에서 망원경으로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스마트 워치에 녹음하는 장면은 용의자 감시이면서 동시에 관심이 가는 이성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보다 많은 것을 알기를 원하는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해준은 저녁을 아이스크림으로 때우고, 길냥이들에게 밥을 주는 서래를 지켜본다. 해준에게 서래 집 앞의 잠복근무는 감시이면서 관심이고, 의심이면서 매혹이다. 해준의 수사과정은 점점 더 서래에게 이끌리게 되는 마음의 동요이고, 연애의 또 다른 모습이다. 용의자 선상에서 완전히 제외된 후, 서래와 해준은 비 오는 날 산사에 간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감정의 동요가 느껴지는 시간들. 굳은 살이 박힌 서래의 손에 핸드크림을 발라주는 해준을 보며 서래는 마음을 전한다. “처음부터 좋았습니다. 날 책임질 형사가 품위 있어서”라는 서래의 말에, 해준은 ‘경찰치고는? 한국인치고는? 남자치고는?’이라며 서래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장난인 듯 아닌 듯 집요하게 물어본다. 서래 역시 장난스레 ‘현대인치고는’이라고 말하며 해준의 우산을 뺏어 들고 먼저 걸어간다. 혼자 남은 해준은 남은 핸드크림을 자신의 손에 마저 바른 후 서래를 쫓아간다. 그토록 달달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기도수의 살해 당일, 서래의 행적을 알게 된 해준이 서래를 찾아와 추궁하면서 파탄이 난다.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서래의 말에 해준은 자조적으로 말한다. “우리 일? 우리 일, 무슨 일이요? 내가 당신 집 앞에서 밤마다 서성인 일이요? 당신 숨소리를 들으면서 깊이 잠든 일이요? 당신을 끌어안고 행복하다고 속삭인 일이요?” 해준이 인정한 것처럼 서래의 집 앞에서 해준이 했던 행동들은 비록 사랑한다고 직접적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결국 사랑에 들뜬 보통 남자들이 하는 행동이었다. “나에게 선물이 꼭 하고 싶다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주세요. 난 좀 갖고 싶네.” 길냥이의 털을 쓰다듬으며 하던 서래의 중국어가 번역기의 무미건조한 남성의 목소리로 번역될 때 해준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살인 용의자인 여자가 자신의 심장을 갖겠다는 말은 생명의 위협에 다름 아니다. 후에 서래가 ‘심장’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분명하게 수정하긴 했지만, ‘심장’이든 ‘마음’이든 서래가 해준의 중요한 무언가를 갖고 싶어 했음은 분명하다. 해준의 자아가 흔들릴 정도로 위험하고 소중한 무엇, ‘심장’ 또는 ‘마음’.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요? 자부심이예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 붕괴됐어요.” 해준의 윤리적 질문은 기혼자로서 갖게 되는 불륜이라는 죄책감이 아니었다. 해준의 윤리적 딜레마는 형사로서의 자부심과 연인으로서 지켜주고 싶은 마음, 그 사이에 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헤어질 결심>의 장르는 범인을 추적하는 형사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형사물이 아닌 로맨스 영화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서래의 범행을 알게 된 후, 해준은 월요일 할머니의 폰을 바꿔주고 중요한 증거인 핸드폰을 서래에게 돌려주며 이렇게 말한다. 품위 있는, 자부심 있는 형사였던 해준이 서래를 위해 자신의 품위를, 자부심을 포기하고 범죄행위를 은닉하게 도와주었다는 것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종말이다. 해준의 사랑은 서래의 범행 은닉을 도와주는 순간 끝나버렸고, 해준이 자신을 위해 품위 있는 형사이기를 포기한 것을 안 순간 서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그 순간 나를 좋아할 확률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사람의 감정은 ‘단일한’ 속도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감정의 크기가 같을 수도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긋나고 빗나가기 일쑤인 게 사랑이란 놈의 속성. 그렇기 때문에 해준과 서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서래는 해준의 자부심에 한 점 얼룩이 되었고, ‘붕괴되어버린’ 해준은 더 이상 서래에게 줄 ‘심장’이 없다. 서로에게 ‘꼿꼿하고’ ‘품위있는’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된 두 사람. “당신 목소리요. 나한테 사랑한다고 하는. 너무 좋아서 자꾸 들었어요.” 얘기하는 서래에게 해준은 말한다. “내가요? 내가 언제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어쩌면 해준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몰랐을까? 아니면 끝까지 부정하고 싶었을까? 서래는 자신의 존재를 소멸함으로 해준의 ‘미결사건’이 되고자 한다. 보통 사람에게 짙은 안개는 이포를 떠나게 만드는 이유지만, 서래에게는 이포로 오게 만든, 단 하나의 이유였다. 죽은 까마귀를 묻기 위해 흙을 파내던 청록색 양동이로 바닷가 모래를 퍼내는 서래.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킨다. “벽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나직하면서도 다정하게 속삭이는 서래의 목소리는 더 이상 사랑의 고백이 아니다. 서래의 실종 이후 해준이 겪을 상실감을 상상하면 오히려 저주에 가깝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이포의 바다는 무심하게도 해변의 모래알들로 서래가 누워있는 구덩이를 메운다. 강한 파도에 쌓여있던 모래 더미들이 쓸려나가고, 해준이 달려올 무렵에는 그곳에 서래가 있었다는 어떠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해준은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너무 좋아서 자꾸 들었다는 그 언젠가의 서래처럼.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타오르는 강렬한 석양. 하얀 포말로 부서지며 거칠게 넘실거리는 만조의 파도. 그 안에서 ‘마침내’ 해준도 자신이 이미 서래에게 사랑을 고백했음을 깨닫는다. 더불어 서래가 예전 해준의 말대로 핸드폰을 바다에 버렸을 것임을 감지한다. 충격과 슬픔에 일그러지는 해준의 얼굴. 이제 해준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시간도 없다.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풀렸던 신발끈을 다시 고쳐매고, 손전등을 켠 채 서래의 이름을 부르며 바다로 들어간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거칠게 밀려드는 파도에 몇 번씩이나 쓰러지면서도 해준은 바다로 들어간다. 서래가 있을 그 바다로. 빛을 잃어가는 하늘빛도, 보는 관객의 마음도 먹먹하다. 사랑이란,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개 속을 헤매이는 것, ‘붕괴’될 것을 알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거센 파도를 맞으며 바다로 나아가는 그런 것. 안개는 미혹(迷惑)과 비슷하다. 무엇에 홀린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고, 정확하게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기도 어렵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안개는 인간의 욕망, 사랑과도 비슷하다. 혼돈과 모호함 속에 시작하지만, 종국에는 상실의 아픔도 내포한다. 사랑의 완성이 결혼이 아니듯,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 오히려 사랑의 감정을 소멸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트였을 때 그 때 보이는 풍경이 늘 아름답지는 않는 것처럼, 흐릿하게 눈을 가리던 것이 사라졌을 때 드러나는 진실의 모습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화양연화>에서 주모운이 결국 이루지 못한 사랑을 앙코르와트에 가만히 속삭이며 봉인해 버리는 것처럼, <헤어질 결심>에서는 서래가 해준의 ‘미결사건’으로 남고자 스스로를 바닷가 모래 구멍 안에 감추어 버린다. 안개 속을 헤매이듯 모호하고 흐릿한 감정의 편린 속에서도 누 군가는 사랑을 보고 이야기하고 냄새 맡는다. 비록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고 봉인될 수 밖에 없는 감정일지라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임은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말했어요?’라고 반문할 정도로 기억조차 못한다고 해도. 흐릿해도, ‘마침내’ 선명하게. 그리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영화 프로듀서란 무슨 일을 하는가’ 라는 주제의 칼럼을 써주지 않겠느냐는 원고 청탁을 갑작스럽게, 사무실 옆 테라스에서 받았다. 영화 프로듀서의 역할을 잘 모르는 독자들이 많고, 현장의 이야기를 다룬 글의 반응이 좋다며 편집자는 나를 설득했다. 그러나 지금은 현역에 있지도 않은 데다 PD로서의 경험이 많지 않아 이런 글을 쓸 깜냥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거절하다 그럼에도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는, 개인적으로도 영화계 지망생 또는 시네필들에게 많은 문의가 왔었고, 내가 이 글에서 주로 언급하고자 하는 한 편의 영화, < 소셜포비아 >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특이한 시작과 결과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지 않을까 하는 긍정적인 소견이 나를 지배한 이유에서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영화 제작은 사실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①시나리오 ②사람들(감독, 배우, 스태프) ③예산 ④시간 이렇게 네 가지의 희소한 자원만 있으면 영화를 ‘찍을’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영화를 ‘찍는 것’과 ‘영화를 만드는 것’은 상당히 느낌이 다르다. 물론 모든 영화인들은 영화를 ‘영화’처럼 만들려고 하니까 당연히 쉽지 않은 작업이 되는 결과에 봉착한다. 위 네 가지를 숫자 표기까지 하며 언급한 까닭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영화 제작에서 중요함의 우선순위를 강제로 나열하기 위해서지만, 사실 각각의 이해관계가 촘촘히 얽혀져 있어 모든 것이 똑같이 중요하다고도 볼 수 있다. 영화 프로듀서는 업무에 따른 역할과 책임에 따라 세부적으로 나뉜다. 영화의 제작 케이스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그 종류에는 프로듀서, 기획 프로듀서, 라인 프로듀서(Line Producer, 우리나라에선 제작실장이라고도 불린다), 이그지큐티브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 우리나라에선 제작자 또는 대표님이라고 불린다) 등이 일반적이다. 업무가 구분되어 있지만 서로 상충하는 부분이 많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영화 프로듀서라고 부르는 사람은 제작자(일반적으로 제작사 대표)에게 제작 권한을 위임받은 1인 또는 다수의 프로듀서로서, 영화의 기획 시점부터 개봉까지 영화 제작과정을 총괄한다. 일반적 상업영화 기준으로 제작사와 시나리오, 감독, 배우 정도가 윤곽이 잡히게 되면 투자를 받거나, 거꾸로 투자를 받아 그를 통해 감독, 배우가 정해지는 등 유동적인 시스템 속에서, 투자 이후부터 개봉까지 시나리오 탈고와 캐스팅, 스태핑, 예산, 스케줄, 제작 진행, 후반 작업, 개봉까지 영화 제작 전반의 과정을 진행... ...역시 재미가 없다(사실 나도 잘 모른다). 프로듀서의 역할에 대한 원론적인 설명 등은 영화 관련 서적과 인터뷰, 인터넷에 정보가 무더기로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란다. 대신하여 내가 PD로 참여했던 < 소셜포비아 >의 제작 과정을 제작기 형식으로 전하도록 하겠다. 2013년 여름 어느 날, 이전부터 여러 작업을 함께 해왔던 이성중 촬영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장편제작연구과정에 선발되어 < 소셜포비아 >라는 장편을 준비 중인데 프로듀서가 필요하단다. 일반적으로는 프로듀서가 촬영감독을 섭외하는데 이 영화는 학교에서 제작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학생인 감독과 촬영감독이 프로듀서를 찾았던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프로듀서를 하기에는 나의 경험이 스스로 염려되었거니와 당시 막 < 타짜-신의 손 >의 제작팀에 들어갔기에 그의 부탁을 고사했다. 그러나 <소셜포비아> 라는 제목이 주는 기묘한 매력 때문인지 시나리오를 읽고 싶은 마음에 도통 잠이 오지 않는 밤의 연속이었다. 결국 시나리오를 받아 단숨에 읽어보고서는 무릎을 탁 쳤다. 거칠고 어수룩한 초고였지만 영화의 소재와 스타일, 인물들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 영화 만들고 싶다’라는 강렬한 욕구가 용솟음쳤고 바로 감독과 미팅을 잡았다. 종각역 어느 카페에서 홍석재 감독과 이성중 촬영감독과 나는 70페이지가량 되는 초고를 놓고 둘러앉았다. 홍석재 감독은 당시 단편영화 < 킵 콰이어트Keep Quiet >로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므로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이런 ‘덕력’ 가득한 시나리오를 쓰는 오타쿠는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한 마음이 매우 컸다. 기대와는 다르게 꽃사슴같이 예쁜 외모는 나의 편협한 시각을 반성하게 만들었지만 당시 그의 행색은 영락없는 오타쿠 영화감독 꼴이라 나름 안심하기도 했다. 미팅을 주선한 이성중 촬영감독은 우리들 중 가장 연장자로 무척이나 아날로그 한 감성을 소유한 심성 탓인지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근래의 디지털 문화와 과도하게 그 문화에 쏠려버린 인물들의 심리 등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고 있었는데, 때문에서인지 홍석재 감독은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기이한 현상과 문화에 대해 나름 빠삭(?)하게 알고 있는 나를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첫 만남은 시나리오 얘기보다는 시덥지않은 인터넷, 게임, 만화책 얘기만 실컷 하다가 여러 의미가 담겨있는 악수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영화 제작이 시작되었다. 나에겐 전도유망한 젊은 감독과, 20살 때부터 영화를 시작해 당시 영화 경력이 14년에 이르는 베테랑 촬영감독과, 지금 생각해도 너무 적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일금 육천만 원의 예산과, 다듬어지지 않아 아직 돌덩이 같은 시나리오와, 준비 기간과 촬영 기간을 포함한 5개월의 시간과, 동료 영화인들에게 도움을 호소하기 위한 아이폰이 있었다. 예산이 적은 것 빼곤 꽤 괜찮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주승(왼쪽) 변요한 류준열 감사하게도 꽤 괜찮았던 캐스팅이었다는 평을 들었지만 최종 캐스팅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감독은 주연 중 ‘용민’ 역에 이주승 배우를 콕 집어 캐스팅 의사를 밝혔는데 나를 비롯한 제작진 모두가 동의했다. 가장 중요한 주연이라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신뢰할 수 있고 반짝이는 배우가 붙어주어 성공적인 시작이었다. 캐스팅이란 배우의 섭외뿐 아니라 제작진 안에서의 합의 과정까지 포함된다는 점을 상기하자. ‘지웅’역을 위해 꽤 많은 오디션과 배우 미팅이 있었는데 처음부터 캐스팅 보드 맨 위에 있던 변요한 배우로 최종 낙점됐다. 당시 < 들개 >( 김정훈 , 2014)가 동경영화제에 초청되어 일본에 가 있던 변요한과 전화로 미팅을 잡고, 귀국하자마자 지체 없이 만났다. 주연배우들의 미팅 이후 계약까지, 캐스팅이 수월했던 건(눈물 나는 계약금의 설득은 수월하지 않았다) 시나리오의 공이 컸다. 극 중 처음부터 끝까지 우르르 몰려다니며 사건을 진행하는 ‘현피 멤버’는 그 수가 무려 일곱이었는데, 배우 한 명을 볼 때 어느 역할 하나를 콕 집어 캐스팅하려고 하기보다는 여러 캐스트 중 어디에도 들어갈 수 있는 자유로운 캐스팅을 진행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류준열 배우를 ‘BJ양게’ 역으로 만나게 되었다(원래 류준열은 다른 역할로 오디션을 봤었다). 감독과 나는 BJ양게 역의 캐스팅을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했던 부분이었는데, 시나리오 수정을 위해 감금시켜놓은 감독 대신(결국 시나리오는 탈고하지 못하고 촬영에 들어갔다) 연출부가 진행한 오디션의 영상을 돌려보던 나는 류준열 배우의 BJ방송 진행 연기 영상을 보고 바로 감독에게 추천했고, 오디션 영상을 본 감독은 박수를 쳤다. 써놓고 보니 너무 순조로운 것 같지만 말 못할 구구절절한 사연들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노량진에서 경찰시험을 준비하는 인물들의 영화를 만드느라 촬영 이전부터 노량진에 수십 번을 갔다. 실제 노량진에서 경찰시험을 준비했던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컵밥을 먹었다.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져버린 노량진 육교를 수십 번 건너고, 500명의 학생이 한 강의실에 들어가서 수업하는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촬영부는 카메라와 함께 담요를 뒤집어쓰고 강의실 구석구석에 숨어 세 시간 동안 경찰학 강의를 들었다. 노량진이라서 좋았던 것은 3천 원으로 뷔페식 식사와 과일에 라면까지 마음대로 끓여 먹을 수 있는 ‘고시식당’이었는데, 많은 제작진들이 좋아해서 다행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 단가가 나올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세 군데가 넘는 경찰서에 협조를 구해 촬영을 하다 어느 한 곳에서는 쫓겨나기도 했고, 옥탑방에서 자살 신을 찍다가 경찰에 신고가 들어와 영화촬영을 설명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예산이다. 매일 아침은 김밥이고, 현장에 간식은커녕 물 외에 다른 음료도 없었다. 배우, 스태프들 모두와 계약을 하긴 했지만, 계약서상 금액을 보면 허탈한 웃음이 났다. 발전차를 쓰지 못해 그 무거운 발전기를 모든 회차에 들고 다녔고, 가게에서 전기를 빌려다 길바닥에서 분장을 하고, 의상 실장은 배우, 스태프들의 옷을 빌리기 위해 그들의 빈곤한 옷장을 털었다(인물들의 설정이 고시생이어서 다행이었다). 지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지만 손난로를 추가로 살 돈이 없어서 ‘영하 10도 이하인 회차에만 손난로를 준다는 기준을 세워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다 울컥했다. 촬영 중 대기할 공간이 없어 24시간 맥도날드에서 밤을 새우다 쫓겨나고, 깎고 깎아서 세트에 들어갔지만 시간을 초과해 촬영 종료한 척 문을 잠그고 세트장 직원 몰래 조용히 찍다가 쫓겨날 뻔했다. 이듬해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 예산이 1억 가까이 늘었다는 말을 듣고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뭔가 억울했다. <소셜포비아> 촬영현장 영화는 절대 혼자서 만들 수 없다. 한 쇼트의 탑에서 엔드까지, 시각적, 청각적인 표현을 만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관여한다. 각자의 분야에서 논의와 고성이 오가고, 서로 기대고 도와가며 영화를 만든다. 프로듀서란 결국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영화의 완성까지 이끌어 가는 스태프인 것인데 나의 경우에는 예산을 이유로 너무나 척박한 환경을 제공해 우리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역류성 식도염, 원형 탈모, 간헐적 혈변이 익숙해지는 때가 되니 영화의 촬영이 끝났다. 몇 번의 추가촬영까지 진행하고 후반 작업이 시작되었다. 서교동 한국영화아카데미 3과 1/2층에 가면 맥(Mac) 몇 대가 놓여있는 매우 좁은 편집실이 있는데, 각자 자리의 구획을 나누기 위한 파티션이 철창으로 되어있어서(거짓말이 아니다.) 몇몇 감독들이 마치 유치장과 같은 곳에서 감금당해 편집하는듯한 기괴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몇 개월간의 감금(편집)과 후반 작업이 끝나고 영화는 완성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프리미어 상영을 했다. 모든 상영이 매진됐고, 박수가 나왔다. 두 개의 상을 수상했고 잡지와 매체에 < 소셜포비아 >가 소개되었으며, 우리는 계속 트위터를 새로고침 했다. 홍석재 감독은 단편 영화들을 만들 때부터 영화제에 초청되어 수상하면 상을 꼭 두 개를 탔는데, 이쯤 되면 영화계의 홍진호, 또는 영화계의 용개라고 불려야 할 것 같다. 몇 번의 국내외 영화제를 다녀오고 해가 넘어가서 개봉을 하게 되었다. <소셜포비아>를 만들 당시 나는 우리 배우들에게 “수퍼스타가 될거야” 란 말을 습관적으로 말했는데, 그렇게 빨리 될 줄은 몰랐다. 배우들이 수퍼스타가 된 덕분에 <소셜포비아>는 독립영화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많은 상영관을 가지고 개봉했다. 저예산 독립영화였고, 배우들은 무명이었고 감독을 포함한 많은 헤드 스태프들이 장편 데뷔하는 작품이었다. 척박하고 궁핍했고 추웠지만 우리는 치열했다. < 소셜포비아 >의 프로듀서로서 부족하고 아쉬운 점은 너무 많았다. 프로듀서로 참여해 큰 즐거움이 한가지 있다면 처음 기대한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봤고, 영화를 본 관객들이 영화에 대해 논하고 비평하며 현실 사회를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처음 감독과 촬영감독과 함께 논했던, 이 영화를 만들기 전에 의도했던 대로 말이다. 또 한 가지, 함께 했던 동료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배우들은 스타가 되었고, 감독은 계약했고, 촬영감독과 미술감독, 조명감독은 또 다른 장편을 만들었다. 막내는 < 옥자 > 제작팀에 들어가서 브래드 피트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 나는 지금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수집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담당자로서 마지막 한 마디. 우리의 영화유산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도록 소중한 자료의 기증을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