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센스 미션
- 감독
- 윤호준
- 제작년도
- 2012
< 여자가 더 좋아 >는 1965년 6월에 개봉하여 약 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당해 국산영화 흥행 2위에 올랐던 코미디 영화다. 그러나 대중이 이와 같이 호응했음에도 이 영화에 대한 당시 저널리즘과 평단의 반응은 혹독했다. 이 영화에는 “C급 저속 넌센스 소극”이라는 말이 붙어 다녔고, 1) 청소년 범죄를 부추기는 영화로 지목되었으며, 2) 주제가는 「동백아가씨」가 왜색조로 금지될 때 저속하다는 이유로 함께 금지되었다. 3) 이 영화를 제작한 이들은 “바로 오늘만을 살고 스스로 묘혈을 파는 어리석은 장사치의 대표적 유형”이자 심지어 ‘영화반역자’라고 비난받기도 했다. 이때 이 영화의 대척점에 놓인 영화들은 < 자유만세 >(1946), < 성벽을 뚫고 >(1948), < 순교자 >(1964) 등인데,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을 지닌 ‘세계시장을 지향하는 좋은 영화’로 일컬어졌다. 그러니 <여자가 더 좋아>는 그 반대의 ‘나쁜 영화’인 셈이었다. 앙리 베르그송이 웃음을 논하면서 희극과 예술일반을 비교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일반적으로 예술은 비극이고, 희극은 비극보다 열등한 것으로 오랫동안 간주되어왔다. 식민지에서 분단으로 이어지며 근대 계몽에 대한 욕구와 당위가 비등한 데다 이분법적 인식이 공고했던 한국에서 그러한 경향은 한층 더했다. 검열에서 코미디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했다는 증언은 이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경직된 규율의 눈으로 바라볼 때 코미디는 말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말할 가치도 없는 것, 그야말로 난센스(nonsense)였던 것이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것에도 위계가 있었다. 비현실적이고 개연성 없고 우발성과 과장으로 이루어져 웃음을 유발한다고 해도 마지막에 계몽이나 위로로 귀결될 때에는 희극으로 의미가 부여되었다. 그 웃음이 계몽에 닿으면 풍자가 되고, 위로에 닿으면 유머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4) 그리고 그러한 웃음은 미래지향적이고 건전하며 명랑한 웃음으로 웃음 중에서는 높게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이 ‘엎치락뒤치락’ 소동으로 끝날 때, 말도 안 되는 일이 말도 안 되는 상태로 끝난다고 보일 때 그것이 유발한 웃음은 “최저속선까지 철저하게 타락시킨 웃음” 5) 으로 질타되었다. 그리고 그 영화는 희극에 못 미치는 ‘저속한 C급 소극’으로 평가되었다. 바로 그 대표적인 영화가 <여자가 더 좋아>였다. 이 영화를 시종일관 끌고 가는 것은 코미디언 서영춘 의 페르소나다. 1960년대 초 라디오 방송에서 만담으로 유행어를 연달아 만들어내며 인기몰이를 시작한 서영춘은 1965년에 영화 세편에 출연한다. < 청춘사업 >(4월 개봉), <여자가 더 좋아>(6월 개봉), < 출세해서 남 주나 >(11월 개봉)가 그것인데, 그 중에서 가장 흥행한 영화가 <여자가 더 좋아>였다. 제목에서 할리우드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 Some Like it Hot>(1959)를 연상시키는 이 영화는 196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에 ‘여장 남자 코미디’ 유행을 견인한다. 이 영화 이전에 ‘여장 남자 코미디’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1년에 <뜨거운 것이 좋아>가 한국에서 개봉하여 크게 흥행하고 1962년 마릴린 먼로의 돌연한 죽음으로 롱런을 하면서 <뜨거운 것이 좋아>의 번안영화가 제작되었다.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 남자는 안 팔려 >(1963)가 그것인데 눈에 띄게 관객을 동원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2년 후에 <여자가 더 좋아>가 나와 크게 흥행하여 ‘여장 남자 코미디’의 유행을 촉발한 것이었다. 이 영화에서 서영춘이 분한 주인공 규철은 여자직업기술학교에 출강하는 음악 강사다. 그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체모도 적은 데다 바느질과 요리를 즐기고 말도 얌전하게 하며 입을 가리고 웃는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특징으로 인식되는 이러한 행동 때문에 그는 ‘여성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기술학교 학생 영숙( 최지희 )과 엄연히 연인 사이다. 그는 결혼하기 위해 영숙의 부모님을 만나는데, 의학적으로 여성에 가까운 중성이라는 이유로 파혼을 당한다. 영숙은 박문기( 남궁원 )라는 밴드마스터와 곧바로 결혼하고 이에 상처받은 규철은 복수를 결심한다. 그는 여장을 하고 규화라는 이름의 식모로 영숙의 시집에 들어간다. 영숙의 시아버지( 김희갑 )는 성정이 ‘괴벽스러워’ 식모를 붙어있지 못하게 만드는 영감인데 규화의 ‘서비스’에 만족하여 규화와 잘 지낸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영숙은 규화(규철)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리지만 규화는 영숙의 남편 박문기와 악단주 선우광( 양훈 )까지 매혹한다. 규화(규철)가 불행한 영숙을 보며 자신의 복수에 대해 회의할 때쯤 선우광의 구애로 정체를 들킨다. 선우광이 규화(규철)에게 수작을 걸 때 현장을 덮친 선우광의 부인 때문에 그는 슈미즈 바람에 가발이 벗겨진 채 마침 나들이에서 돌아오던 영숙과 문기, 영숙의 친정어머니와 시아버지까지 모두 보는 가운데 뛰쳐나가게 되는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프린트에서는 이 상태로 영화가 끝난다. 그런데 시나리오 상으로는 규철이 성전환 수술을 하여 결국 여성이 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와 같이 여장 남자로서 남성과 여성을 넘나드는 전개는 서영춘의 규정을 거부하는 ‘난센스 페르소나’를 통해 이분법을 끊임없이 교란하며 웃음을 유발한다. 서영춘의 외양과 태도는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분방한 모호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행동거지와 거기에서 분출되는 에너지는 남녀로 분리된 젠더박스에 진동을 일으키고 균열을 낸다. 이는 1960년대 말 구봉서가 출연했던 ‘남자 시리즈’(< 남자 식모 >, < 남자 미용사 >, < 남자와 기생 >)와 비교해 보면 보다 명확하다. 이 영화들에서 구봉서 는 깔끔하고 자상한 남자로서 여자 흉내를 잘 낼 뿐이지 결국 남자다. 여자로 변장했을 때의 모습과 남자로서 연인과 있을 때의 모습이 확연히 구분되는 데서 젠더 이분법이 잘 드러난다. 그가 여장을 통해 수행하는 것은 발언권이 세진 여성들과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남성들을 동시에 비판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영화들은 가부장적인 젠더 질서를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안착한다. 이와 달리 <여자가 더 좋아>에서 서영춘이 표상하는 것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독자적 섹슈얼리티다. 이에 대해 박선영은 “서영춘의 그로테스크한 신체는 회복되지 않은 남성성과 포기되지 않은 여성성의 기묘한 공존을 시각적으로 전시하는 것”이라고 요약한다. 6) 그런데 따져보면 규철은 영숙과 혼인신고만 안 했지 부부와 다름없이 지냈던 것으로 나온다. 그는 불량배를 만났을 때 그들을 물리적으로 물리칠 완력은 없지만 기지와 헌신으로 여성들로부터 떼어놓는다. 그가 다른 남자들처럼 밖으로 나돌지 않고 술 담배도 입에 대지 않기에 영숙은 그를 믿고 좋아했던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남성으로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음에도 그의 취향이나 태도가 일반적으로 여성들의 것이라 하여 그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너는 남자니? 여자니?’ 라는 질문 속에서 경계의 지점은 용납될 수 없기에 그는 자신 그대로 사회에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성전환을 할 수밖에 없다. 이는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마지막에 제리(잭 레먼)가 가발을 벗으며 “나는 남자야. I’m a man”라고 고백하지만, 필딩이 “완벽한 사람은 없지. Nobody is perfect”라고 받는 것과 갈라지는 지점으로, 당시 한국사회가 포용할 수 있는 난센스의 한계를 보여준다. 당대에 웃음으로 봉합될 만한 수위 차원에서 결말을 생각해보면 규철이 성전환을 해야 영숙이 오해를 받지 않고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규철에게 매혹되었던 모든 인물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래서 규철의 성전환은 선택이 아니라 다른 인물의 안전과 그에 따른 관객의 안심을 위한 사회적 거세에 해당한다. 이 영화는 1983년에 더스틴 호프만이 여장 남자로 분한 영화 <투시 Tootsie>(1982)가 흥행하면서 7) ‘남자 시리즈’의 심우섭 감독 연출로 리메이크된다. 8) 이 영화에서도 서사의 전개는 유사한데 결말은 오히려 더 계몽적인 양상을 띤다. 주인공 유경진(강태기)이 아파트에서 가정부로 일하며 젊은 부부들에게 건전한 생활을 유도하다 표창장까지 받고 여성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1960년대보다 1980년대가 민주적으로 진보했다고 여겨지나 서영춘이 보여준 난센스와 같은 경계적 특이점이 설 자리는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서영춘은 <웃으면 복이 와요>(1969~1985)가 프로야구 붐으로 돌연 폐지 9) 된 이듬해에 간암으로 타계했다. 10) 그는 한동안 잊혔다가 21세기에 대중문화 장르와 다양성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면서 비로소 ‘저질’에서 벗어나 ‘독보적인 코미디언’으로 재평가된다. <여자가 더 좋아>가 ‘말할 가치도 없는 난센스 소극’에서 벗어나, 난센스라는 요동으로 경직된 시스템에 파문을 일으키며 젠더 이분법을 일찍이 뒤흔든 영화로 재발견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재평가와 맥을 함께 한다. >> 여자가 더 좋아 고화질 VOD 보러가기 << 1) 「만화조 넌센스 소극」, 《조선일보》, 1965.7.15.; 「소극붐 수준급 이하의 넌센스들」, 《조선일보》, 1965.11.11.; 「영화 황량한 질 안고 과잉생산」, 《동아일보》, 1965.12.27. 2) 「자극적인 영화제목과 소년범죄」, 《조선일보》, 1965.8.24. 3) 「왜색조를 추방」, 《조선일보》, 1965.9.7.; 「방송음악 日色調 일소키로」 , 《동아일보》, 1965.9.11. 4) 웃음의 유형에 대해서는 박유희, 「총론: 웃음의 서사와 한국 대중문화」,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4.코미디』, 이론과실천, 2013, 22-23면. 5) 「만화조 넌센스 소극」, 《조선일보》, 1965.7.15. 6) 박선영, 『코미디 전성시대』, 소명출판, 2018, 529면. 7) 「추석 극장가 외화가 압도」, 《동아일보》, 1983.9.20. 8) 「방화에도 남성 치맛바람 강태기 여장하고 김환진과 주연」, 《경향신문》, 1983.6.15. 9) 「프로 감축 항의 MBC 코미디언들 파업」, 《조선일보》, 1985.4.25. 10) 「코미디언 서영춘씨 별세」, 《매일경제》, 1986.11.1.
일제강점기 조선의 중심도시 경성은 인구가 대폭 증가하면서 4대문 밖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여 나갔다. 1910년 경성부에 편입된 용산 지역 외에도, 서쪽으로는 서대문 넘어 신촌과 마포 방향으로, 동쪽으로는 동대문을 지나 청량리와 왕십리 방향으로 도시가 확장되었다. 1930년대 새롭게 도시로 편입된 지역에는 영화관이 설립되었다. 도화관(桃花館), 도화극장(桃花劇場) 도화관(桃花館)은 서울 마포 도화동에 위치한 극장이다. 1930년 11월 1일부터 이곳에서 <여류명창대회> 공연 기록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1930년 이전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여류명창대회“, 《동아일보》, 1930.11.1) 일설에 의하면 도화관이 1929년 정기준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1 극장의 규모가 협소한 탓에 건물의 신축을 꾀해 1933년 10월 7일 낙성식을 거행하고 영업을 재개하게 된다 .(“도화관 낙성식”, 《조선신문》, 1933.10.8) 당시 건물주는 토미이 지츠타로(富井實太郞)였다. 그는 1877년 일본 효고(兵庫)현에서 태어나 포목상으로 일하던 사람으로, 1905년 5월 조선으로 건너와 용산 원정(元町) 3정목에서 토미이상점(富井商店)을 열었으며 용산상영회(龍山商榮會)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도화관 신축을 추진할 당시 이를 반대하는 도화동 주민들의 진정이 있었다. 도화동 주민 150여명은 연명 날인하여 도화관이 활동사진상설관으로 신축되면 풍속의 아름다움을 해치게 하여 아직까지 보존하여 오든 동리의 미풍을 해롭게 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경기도 보안과에 반대 진정을 냈다. 지역 주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극장의 신축은 이루어졌다. 1933년 신축된 극장의 이름은 도화관에서 도화극장으로 바뀌었다. 일제말기까지 도화극장은 토미이가 운영하고 있었다. 《영화순보》에 실려 있는 도화관에 관한 정보를 확인해 보면 흥행주는 토미이, 지배인은 스가와라(管原)였으며, 총 좌석 수는 782석이었다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해방 후 적산처리 된 도화극장은 1950년대 경보극장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신부좌(新富座) 신부좌는 동대문 밖 신당정에 설립된 영화관으로 1936년 10월 10일 낙성식을 개최하고 12일 개관했다. 설립자는 도화극장의 운영자인 토미이 지츠타로(富井實太郞)이다. (“新富座成る”, 《京城日報》, 1936.10.11.) 신부좌의 개관을 알리는 기사를 보면, “4층의 철근 콩크리트 극장으로 수용인원이 1,200명이나 되는 큰 건물이며 12일부터 동극좌(東劇座) 일행의 공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영업을 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동부의 신극장 신부좌 낙성(落成)“, 《매일신보》, 1936.10.14.) 1943년 당시 신부좌의 흥행주는 토미이(富井實太郞), 지배인은 古都勇作으로 총 좌석수는 758석이었다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해방 후 적산처리 되었으며 이름을 한성극장으로 개칭했다 .(“신부좌, 한성극장으로 개칭”, 《동아일보》, 1946.1.20.) 광무극장(光武劇場) 1930년 5월 2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광무대는 상왕십리 쪽에 가설극장을 짓고 영업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1933년 봄 상설극장으로 전환을 꾀하게 되면서 이름도 광무극장으로 바꾸었다 .(“광무극장 상설”, 《조선중앙일보》, 1933.5.18.) 영화와 연극을 고루 상연하던 광무극장에서는 1934년 5월 카프에서 세운 극단 신건설이 <서부전선 이상 없다>, <누가 제일 바보냐>, <신임 이사장> 등을 공연 한 바 있다. (“신건설 순회공연 시외 광무극장서”, 《동아일보》, 1934.5.2.) 1943년 당시 광무극장의 흥행주는 소노다(園田實生)였다. 총 400석의 좌석수를 가지고 있었다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해방 후 적산처리 되었다. 영등포연예관(永登浦演藝館), 영보극장(永寶劇場) 영등포연예관은 1930년대에 들면서 공업지역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영등포 지역에 들어선 영화관으로 1935년 10월 개관했다. 설립자는 써커스단을 운영하며 다년간의 흥행 경험을 가지고 있던 오오타(太田光)란 일본인인데 그는 충남 예산에서 큰 농장을 경영하던 오오타 칸(太田寬)의 동생으로 1939년 《국민신보》 창간 기념 광고에도 관주로 기록된 인물이다 .(“광고”, 《國民新報》, 1939.8.20.) 영등포연예관은 213평의 부지에 총공비 5만여 원을 들여 연와의 2층 건물로 만들어졌다. 개관 첫 공연은 연극호(演劇號)의 연극이었다. (”영등포연예관 연극호 대인기“, 《매일신보》, 1935.10.13.) 영등포 지역의 유일한 영화관으로 존재하던 영등포연예관은 1942년 9월 1일자로 흥행주가 환영영화사(丸榮映畵社)의 무라이(村伊德治)로 바뀌게 되면서 그 이름을 영보극장(永寶劇場)으로 바꾸었다. 새로운 경영자가 운영하게 된 영보극장은 최신식 『로-라』 발성영사기를 장치하는 등 시설과 외관을 정비하여 영화관으로의 새롭게 변신하였다 .(“영보극장 래 일일 개관”, 《매일신보》, 1942.8.26.) 1943년 당시 영보극장은 흥행주 무라이(村伊德治), 지배인 기하라(木原督夫)로 총 좌석수는 400석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1. 이에 관한 이용남의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마포 도화정의 도화극장은 1929년 정기준이 세운 목조 1층 건물의 극장으로, 무대는 허술하였으며 수용인원도 300명 정도의 초라한 극장이었다. 개관 후 1년이 못되어 일본인 富井實太郞이 사들여 2층 벽돌 건물로 다시 지었다. 새 건물은 무대도 넓었으며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이었다. 도화극장은 영화 상영을 주로 하였으며 가끔 연예나 연극 등도 공연하였다. 후일에는 영화관으로 사용되었다.” 이용남, 「해방 전 조선 영화극장사 고찰」, 청주대석사논문, 2001, 116쪽. * [사진](상단) 신부좌 작성 당시 기사에 게재된 사진 [자료] 《매일신보》, 1936.10.14. 동부의 신극장 신부좌 낙성(落成), 십이일부터 개관 대경성(大京城)의 실현에 ᄯᅡ라 경성 근교의 인구증가률은 기하급수(幾何級數)적인 숫자를 보이고 잇슴에 반하야 근교(近郊) 부민들의 오락기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업서 곤난중이더니 이것을 유감으로 역이든 유지의 손으로 이번에 신당정(新堂町)에다 신부좌(新富座)라는 사층의 철근 『콩크리-트』 극장을 세웟다는데 수용인원이 일천이백명이나 되는 큰 건물로 십이일부터 동극좌(東劇座) 일행을 맞이하야 개관하얏다고 함니다.(사진은 신부좌) [자료] 《매일신보》, 1942.08.26. 영보극장 래(來) 일일 개관 영등포 유일의 영화상설관 연예관(演藝館)이 금번 새로운 경영주를 마지하는 동시 이름도 영보극장(永寶劇場)으로 곳친 후 최신식 『로-라』 발성영사기를 장치하는 한편 내용과 외관도 일신해가지고 오는 구월 일일부터 개관하기로 되엇는데 환영영화사(丸榮映畵社) 무라이(村伊德治)씨가 신경영주로 제반경영을 담당하게 되엇다. [자료] 《동아일보》, 1937.08.12. ●팔월 십이일부터 특별대공연 개관 일주년 기념대흥행 ○ 납량특별 『선물』 진정! = 요금특별 봉사제공 = 대인석 십오전 균일 조선극계의 정화! 극단 혜성좌(彗星座) 대공연 ▲ 혜성좌 名극본 대진용! =예제 매야 교환 상연= ○ 만주애화(哀話) 만주의 십년몽 이막 ○ 정의극 마음의 꽃다발 이막 ○ 사회비극 나는 왜 범죄를 하였나 삼막 ○ 희비극 온천장 행진곡 이막 ○ 시대물 임거정전(林巨正傳) 삼막 ○ 모성비극 모성애의 금자탑 삼막 막간 = 넌센스, 합창, 민요, 스켓취, 독창 무용 =혜성 올째스뺀드= 요금 싸고 『선물』 가저가시게 만원되기 전 일즉 일즉 오십시요 왕십리정 광무극장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3.05.18. 광무극장 상설 부외 상왕십리(上往十里)에 잇는 가설극장 광무대(光武臺)를 금번에 상설극장(常設劇場)으로 개혁하는 동시에 극장 일흠도 광무극장(光武劇場)으로 고치고 활동사진과 기타 연극 등을 흥행하리라 한다.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3.10.21. 시외 도화동에 도화극장 신축 【경서(京西)】 시외 도화동(市外 桃花洞)에 잇는 영화상설관 도화극장(映畵常設館 桃花劇場)은 지난 십일일 동극장 내에서 신축 낙성식을 대성황리에 거행하엿다는대 동 극계에 경험이 잇는 부정실태랑(富井實太郞)씨와 동 지배인 김년(同 支配人 金年)씨가 가티 삼만 오천원이란 거금을 드리여가며 조선극예술을 위하여 만흔 노력을 한다하며 또 부정씨는 마포에 양영학교란 보교를 건설하고 조선무산아동을 모아서 가르킨다는데 근처 일반은 부정씨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다. [자료] 《동아일보》, 1932.07.22. 상설극장 반대 도화동민 진정 시외 도화동(桃花洞) 주민 일백오십여명은 련명 날인으로 부정(富井)씨의 경영하는 도화관(桃花館) 신축을 반대키 위하여 금 이십일일 오전 십일시경 경기도 보안과를 방문하고 진정한 바 잇섯다고 한다. 동 도화관은 활동사진 상설관으로서 풍속의 아름다움을 손하게 하여 아직ᄭᅡ지 보존하야 오든 동리의 미풍을 해롭게 한다는 것이 반대 진정의 주요 원인이라 한다.
1937년 벽두 《삼천리》에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경무국장에게 보내는 아등(我等)의 서(書)」 1 라는 제목으로 실린 공개서한은 식민지 조선 대중의 자본주의적 욕망과 문화적 욕구를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자료로서 그동안 자주 언급돼 왔다. 이제는 너무 익숙한 제목과 내용이지만, 이 공개서한을 다른 맥락과 겹쳐 읽는 것으로 이 글의 서두를 열고자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공개서한에 연명한 이들은 “대일본레코-드회사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 조선권번 기생 오은희, 한성권번 기생 최옥진, 종로권번 기생 박금도, ᄲᅡ- <멕시코> 여급 김은희, 영화 여우(女優) 오도실, 동양극장 여우 최선화”이다. 한 명의 남성과 일곱 명의 여성. 일곱 여성들의 직업은 마담, 기생, 여급, 여배우로 그들은 모두 근대 도시의 유흥과 여가에 종사한다. 공개서한의 수신자는 부임 3개월째를 맞는 미쓰하시(三橋) 경무국장이었다.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라는 도발적인 제목과는 달리 “미쓰하시 경무국장 각하여”라며 공손한 어투로 시작된 서한은, ‘댄스홀’이 문명 도시를 가늠하는 상징적인 기준이며 ‘댄스’가 얼마나 건전하고 명랑한 오락인지를 극도의 존칭과 경어를 사용하며 조목조목 설득한다. 여기서 경무국장에 대한 존경과 자신들에 대한 겸양은 다소 과도할 정도인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당돌해 보이기까지 한다. 다시 말해, 이 공개서한은 경무국장에게 보내는 진지한 호소라기보다 경무국장에게 ‘댄스홀’ 허가를 요청하되 그 결과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의 ‘의미 없는 메시지’임을 과시하는 ‘넌센스(nonsense)’다. 식민 도시 경성에서 벌어진 이 ‘넌센스’는 문자 그대로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에 누구도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다. 수신자인 ‘미쓰하시 경무국장’조차 이 공손한 서한에 공식적으로 화를 내지는 못했을 터이다. 그러나 경성의 모든 풍속에 대하여 취체의 책임이 있는 경무국장으로서, 그는 통제의 대상인 공개서한의 발신자들―끽다점, 권번, 바, 레코드, 흥행업 종사자들―과 《삼천리》의 독자들이 구성하는 공감 속에서 기실 유머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미쓰하시는 원래, 1936년 8월 조선에 부임한 미나미 지로 총독이 소위 ‘동아 정국’, 그러니까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무기한 정간된 상황에서 경무국장으로 임명한 인물이었다. 일본의 청년 장교들이 천황의 친정을 명분으로 쿠테타를 일으켰던 5.15 사건 이후 점차 짙어졌던 군국주의 기운이 조선에도 여파를 미치던 시점에서, 경무국장에게 ‘서울에 댄스홀을 허하라’는 내용의 서한을, 그것도 경성에서 술과 노래와 음악과 연기를 업으로 하는 이들이 보낸다는 것 자체가 당돌한 일이리라. 그렇다면 이 넌센스는 그저 의미 없는 농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발신자와 수신자 그리고 이들이 놓인 권력의 위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긴장을 돌발적으로 노출한 사건일 수 있다. “만주사변 직후에 우가키 전(前) 총독은 서울 있는 신문 기자를 향하여 국가 비상시에 딴스는 허가할 수 없다고 말했읍니다. 그러나, 만주사변은 모다 이제는 평정하게 되고 평화의 기상이 세상에 차고 있지 않읍니까”라는 호소는 일본과 조선에서 ‘비상시(非常時)’라는 말이 다시 유행하는 상황을 우회적으로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계엄령이 내려지고 도쿄에서도 댄스홀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던 터에, 식민지의 도시 경성에 댄스홀이 허가될 리 없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할 때까지 근 8년간은 ‘전쟁의 시대’이자 ‘총동원의 시대’였다. 식민지 조선의 삼천리 방방곡곡에 ‘총동원 체제’가 가동되고 ‘비상시’가 장기화됨으로써 ‘비상시의 상시화’라는 상황적인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된다. 1937년 벽두 ‘댄스홀을 허하라’는 이 느닷없는 호소문의 넌센스는 ‘비상시의 상시화’라는 상황적 아이러니에 대한 예보, 비상시의 일상에서 수도 없이 발생하는 ‘의미의 과잉’과 ‘무의미의 의미’에 대한 예고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상시가 아니다’라는 이 단순한 의미의 ‘비상시(非常時)’는, 1937년 이후 보다 구체적인 맥락에서 사용된 ‘전시기(戰時期)’나 ‘전환기(轉換期)’, ‘신체제(新體制)’ 등과 계열을 이루게 된다. 중일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엘리트들 사이에서 이미 유행했던 ‘전환기(轉換期)’라는 표현이 어떤 혼란이나 불안을 내포한 것이었다면, 1940년 제2차 고노에(近衛) 내각이 출범하면서 내걸었던 ‘신체제’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전시체제에서의 선명한 수행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비상시’는 이러한 ‘전환기’의 불안과 ‘신체제’의 수행을 모두 아우르는 동시에, 통치 주체로 하여금 전시에 발생하는 그 어떠한 제도적 폭력과 비합리성도 정당화하면서 아무런 기약 없이 정상화를 유예할 수 있게 하는 주문과 같았다. ‘비상시가 상시화’되고 사회의 전분야가 전시체제로 재편되는 가운데, 식민지 조선의 각 주체들은 지역별(도시와 농산어촌), 직능별(노동자, 농민, 지식인, 문인 등등), 젠더별(‘청년’, ‘소국민’, ‘총후부인’ 등)로 자신이 어떻게 ‘봉공(奉公)’하고 ‘보국(報國)’하는지를 전시했다. 주체들의 이러한 자기 전시 혹은 자기 증명은 전시체제 속에서 ‘진술적인(constative)’ 언어들이 ‘수행적인(performative)’ 언어로 전환되는 과정과 겹쳐지기도 한다. 예컨대, ‘나는 총후부인이다’라는 말은 표면적으로는 진술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참과 거짓의 판단과 연관되기보다는 오히려 ‘총후부인 되기’를 선언하는 것으로, 이를 끊임없이 자각하고 수행하는 실천을 동반하게 된다. ‘봉공(奉公)’이라는 말이 함축하듯이, 이때의 ‘나’는 ‘나의 것’이기도 하며 ‘나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비상시의 ‘국민(國民)’이라면 심지어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는 것까지 일상의 매순간을 국가와 연관지어야 하며 ‘비국민(非國民)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공중(公衆) 앞에서 과잉된 언어와 제스추어로 자기를 전시해야 하는 때도 있었다. 사회의 모든 혼란과 무질서의 원인이 ‘비상시’로 수렴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이해득실이나 생존의 문제도 ‘비상시’라는 말뚝에 얽매여 있었다. 그런데 제국주의 전쟁이 초래한 ‘비상시’의 일상 속에서 이 수행적 언어들이 갖는 동원의 효과는 어디까지였을까. 전쟁이 장기화되고 비상시가 더 이상 비상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일상의 모든 것이 시국(時局)과 연관되어 있는 한편으로 그 시국의 긴장감은 둔화되어 버린 순간, ‘신체제’니 ‘봉공’이니 ‘보국’이니 하는 말이 어떤 감흥도 없이 상투어처럼 내뱉어지는 순간, 이러한 순간순간들에 ‘비상시’는 필연적으로 ‘의미의 과잉’이나 ‘무의미의 의미’를 낳는 것이 아닐까. 전시체제하 개개인의 신체가 일상적으로 국가적 의례와 결부되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국가와 결속시키는 그 순간순간들에서, 의미의 충만을 넘어선 과잉들은 필연적으로 어떤 전도(顚倒)를 초래하지 않을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는 가장 ‘숭고한 것’이 가장 ‘통속적인 것’이 되고 ‘비속한 것’이 ‘성스러운 것’으로 뒤집히는 상황이다. 그림1. 「극장에 늘어선 사람들에게 일감을 준다면」 출처: 《신시대》1941년 5월호, 182쪽 그림2. 「악극단」 출처: 《신시대》1941년 5월호, 180쪽 중일전쟁 발발 이후 식민 도시 경성의 극장가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어트랙션(attraction)’은 ‘비상시’가 초래한 넌센스의 상황들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관객을 극장으로 유인하기 위해 메인 프로그램에 부수적으로 편성된 쇼를 일컫던 어트랙션은, 당시 경성에서 연극이나 영화와 거의 맞먹을 정도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여 때로는 연극과 영화의 아성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1930년대를 지나며 담론화되었던 ‘도시=소비/농촌=생산’의 이분법적 구획이 전시체제기에는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한편에서 도시에 집중되었던 극장을 농산어촌, 공장, 광산 등의 생산지대로 확산시키는 ‘이동극장’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자숙(自肅)’과 ‘내핍(耐乏)’이 강조되는 사회적 분위기라고 해서 전쟁 전에 이미 팽창해 있었던 문화적 욕구들이 경성의 극장가에서 아주 사그라진 것도 아니었다.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서양영화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던 시기 프로그램의 공백을 메워가던 악극과 어트랙션이 전쟁의 장기화와 더불어 점차 프로그램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 상황, 그리고 그 버라이어티 쇼가 반서구 정책에 의해 부정되었던 ‘재즈(Jazz)’나 ‘양풍(洋風)’을 풍부하게 접속할 수 있는 장소로서 위치된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근대의 극장은 언제나 국가 권력의 통제 아래 있었지만, 철저하고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1) 「서울에 댄스홀을 허하라―경무국장에게 보내는 我等의 書」《삼천리》1937년 1월, 162~166쪽. ‘친일’과 ‘반일’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을 무너뜨리며 식민지 시기의 다채로운 풍경에 주목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김진송의 저서―『현대성의 형성: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현실문화, 1999)―가 이 공개서한의 제목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것은 상징적이다. 2) 이 공개서한은 일본의 시인 사토 하치로(サトウ・ハチロー, 1903-1973)가 만주사변을 전후한 시점에서 발표했던 ‘넌센스’들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소설가, 수필가, 동요 작사가 등으로도 활동한 사토는 방탕과 기행을 일삼았다고 전해지는데, 단편집 『아사쿠사(浅草)』(素人社, 1931)는 특유의 넌센스가 넘치는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 「경시청감에게 드리는 글(警視総監に与ふるの書)」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는바, 어쩌면 이서구는 공개서한의 제목을 구상하며 사토 하치로의 넌센스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사토 하치로의 넌센스와 관련한 아이디어는 미리엄 실버버그의 『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근대 일본의 대중문화』(강진석·강현정·서미석 옮김, 현실문화, 2014)에서 얻었다. * 상단사진 1. 《삼천리》에 실린 「서울에 댄스홀을 허하라」기사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雙Q生「[거리의 수첩] 애트랙슌론(論)」《조선일보》1940년 6월 27일자, 4면. 흥행업자들에게 있어서 일 년 중 네 절기에 있어서 여름 같이 또 싫은 『씨-즌』은 없다. 우선 더워서 사람이 안 들어오니까 짐이고 낭패다. 그러나 그렇다고 여름철만 어떻게 극장 문을 닫아버리고 그야말로 무슨 학교나 그런 곳 같이 ‘하기휴가’를 할래야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소위 요즘에 하나의 유행 같이 횡행하고 있는 『애트랙슌』인 것이다. 지금 서울서 우리가 『써-비스』 받고 있는 『애트랙슌』이란 얼른 말하자면 영화를 보고 또 거기다가 덤으로 노래나 춤을 공으로 보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애트랙슌』은 이러한 본질적인 의의에 견주어보아서라도 어디까지나 가볍고 명랑하고 즐거워야 한다. 한다가 아니라 했으면 한다. 그렇지 못하고 그저 우리들로서는 뭐가 무엇인지 이해키 어려운 것을 가져다가 그저 아쉬운 대로 『애트랙슌』이란 딱지만 붙여 내놓는다면 이거야말로 『애트랙슌』으로서는 낙제하지 않을 수 없을 비참한 『애트랙슌』이다. 그야 사람에 따라서는 그 사람의 취미나 교양에 따라서 영화보다도 『애트랙슌』에 끌리어 단순히 그것만을 보러 가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러한 관객이 하나라도 는다면 느는 그대로 극장으로서는 성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여튼 이 점에서 영화상설관은 연극상연단체나 극장보다는 유리하고 편리하다. 반대로 극단이나 연극만을 상연하는 극장은 그야말로 선전 『발류-』(value)가 찬란한 『애트랙슌』이 없이는 이 여름 한철을 무난히, 다시 말하면 결손 없이 돌파하기는 힘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영화상설관에서는 『애트랙슌』이라는 미명 아래 값싼 오락물을 질서 없이 덤 주듯 한다면 이 역시 단순히 『애트랙슌』만을 보러 가지 않는 우리로서는 할 이야기가 과연 많을 줄 안다. 그것은 불평도 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항의도 될 수 있다. 2. 요시무라 고도 * 씨 담(談)「전시(戰時)의 생활 이대로 좋을까④ / 극장 앞에 늘어선 풍경 아메리카풍의 재즈와 레뷰 환영은 국민의 수치」《매일신보》1942년 1월 21일자, 4면. 생활에서 영미 양풍을 쫓아내자 총후를 명랑케 하는 수단으로서 건전한 오락을 건설하는 것은 국민을 위하여 국가에서 대단히 생각해온 바입니다. 시국과 관련하여 그처럼 건전 오락이 특별히 문제가 된 것은 지금까지의 오락이 건전치 못했던 때문이올시다. 그럼 지금까지의 오락이 왜 건전치를 못했나 하면 그것은 그 오락이란 것이 근대의 그 개인주의와 향락주의의 소산으로서 대개가 국민의 생활과 떠나서 순전히 향락적인 것으로 퇴폐해 갔기 때문이올시다. 만일 그 오락이 무슨 생활과 관계가 있었다면 그것은 도시의 유한(遊閑)한 젊은 남녀의 소비적인 향락 취미 생활에 뿌리를 박고 있었을 뿐일 겝니다. 그러니까 국민의 전체 생활로 보면 아무 관계없는 오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락이 저급해지고 타락이 된 데는 한편으로는 그것을 보아 온 여러분의 오락 취미가 그렇게 떨어져버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네가 자기의 취미를 돌아보면 잘 아실 겝니다. 극장에서 그 아메리카 풍의 재즈라든가 경박한 레뷰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극장 앞마다 장사의 진을 치고 젊은 남녀가 서로 어우러져서 몰려섰는 풍경은 이 시국에서 가장 보기 창피스러운 풍경의 하나인 줄 생각합니다. 이번 대동아의 전쟁이 되면서부터 당국에서도 적극적으로 통제를 하고 지도도 해서 일반 악극 단체에서도 많이 자숙해져서 이른바 악극에서 아메리카의 요소를 뽑아버리려는 노력도 있고 해서 퍽 색채가 달랐지만 근본 문제는 그 문제보다도 여러분 자신들의 오락에 대한 취미문제올시다. 여러분의 오락 취미로선 아직도 그런 아메리카의 경박한 향락적인 레뷰나 재즈를 좋아하는 경향이 마음에 남아 있다고 하면 이것은 국민으로서의 양심에 부끄러운 일이요, 또 자신네의 오락의 취미로서도 여간 부끄러운 바가 아닌 줄 압니다. 우리들의 모든 생활면에서 영미의 요소를 조사해가지고 청산해 버려야 할 이때에 우리 일상생활의 중요한 부분인 오락의 취미에 아직도 미국 같은 곳의 저급한 오락을 환영하는 경향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것은 당국이나 지도 측에서 노력하고 지도할 점도 많겠지만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이 자진해서 깨닫고 오락에 대한 건전한 취미를 길러 가시기를 바랍니다. [강조는 원문] * 요시무라 고도(芳村香道) :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소설가 등으로 활동했던 박영희(1901∼?)의 창씨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