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 감독
- 마이크 뉴웰
- 제작년도
- 1993
- 출연
- 휴 그랜트, 앤디 맥도웰, 크리스틴 스코트 토마스, 샬롯 콜만, 로완 아킨슨, 사이먼 캘로우, 존 한나, 코린 레드그레이브, 제임스 플릿, 데이빗 보워, 티모시 월커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이 글을 접하는 누구나 한 번쯤은, 일상의 답답함과 울적함을 주체할 수 없어서 기차를 타거나 마실을 나가는 것으로 어떻게든 해 보고자 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그러한 일상에서 비일상으로의 탈출이 본질적인 해답은 되지 못하곤 한다.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훌쩍 떠나간다 해도 완전히 야반도주라도 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머지않아 반드시 본래의 거처로 돌아와야 하며,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일상과 마주해야만 한다. 바로 귀로(歸路)에 서야 하는 것이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 < 귀로 >(1967)는 바로 이런 현대인의 고뇌를 서울과 인천이라는 두 도시 간의 이동을 통해 명징하게 드러낸 수작이다. 지금까지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 연재에서는 당대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1960~80년대의 여러 한국영화를 돌아보았지만, <귀로>와 같이 주인공의 심경과 처한 상황이 두 도시 간의 반복적인 이동(통근과 통학이라는 ‘일상’이 아닌)을 통해 비유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은 드물었다. 이미 많은 비평에서 <귀로>를 ‘멜로드라마 최고의 걸작’ 혹은 ‘세월의 흐름을 타지 않는 세련된 구도’ 등으로 호평하고 있는 만큼, 본 연재에서는 본 작품의 또 하나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공간적 배경에 대해 주목해 보고자 한다. 주인공 지연( 문정숙 )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으로, 하반신 마비로 인해 성불구자가 된 남편 최동우( 김진규 )와 14년째 그 어떤 것도 만족되지 않으며 족쇄와 같은 결혼 생활을 인천의 어느 양옥집에서 이어 나가고 있다. 지연에게 있어서 족쇄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는 남편의 신문 연재소설 원고를 서울 서소문의 신문사에게 전달하러 가는 시간뿐이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이러한 지연의 인천(지연의 집)-경인선 열차 3등 칸-서울역-서소문(신문사 소재지)을 오고 가는 이동 동선을 반복적으로 비춘다. 집을 떠나 인천역에서 경인선 디젤동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서 서소문으로 향했다가, 잠시 남산 중턱에서 시내의 경치를 내려다본 후 다시 서울역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열차에 올라타는 행적의 시퀀스를 되풀이해 목도하다 보면, 마치 지연의 일탈을 몰래 지켜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카메라는 1967년의 서울-인천 간의 이동을 세련되게 잡아낸다. 지연의 궤적을 뒤쫓아가며, 주목할 만한 공간적 배경을 짚어보도록 하자. 경인선 열차 지연은 서울에 원고를 전달하러 오고 갈 때마다 항상 경인선 열차, 3등 칸을 이용한다. 이 시기 경인선은 복선화가 완료되어(1965년), 시간당 1편의 열차가 운행되었으며 차내 모습은 극 중에서도 비치듯이 긴 의자에 손잡이가 달린 사실상 지금의 수도권 전철과 유사한 분위기를 띠었다. 지연은 열차를 타는 본인의 심경을 딱 한 번 대사로 읊는데, “지나가는 기차를 보면 시원스러워서 타고 싶은데 막상 타고 나면 답답해요(36:52경)”가 바로 그것이다. 본인을 옥죄는 가정에서 벗어나 서울행 기차를 타지만, 그곳조차도 완전한 도피가 되지는 못하는 상징으로서 경인선의 디젤동차 열차가 등장한 것이다. 인천역에서 서울역으로 향하는 경인선 디젤동차의 내부 모습 경인선 열차를 타는 이유를 강 기자에게 털어놓는 지연 서울역과 인천역 인천역은 지연에게 있어서 족쇄와 같은 일상을 상징하는 공간일 것이다. 반면에 서울역은 그러한 일상에서 조금이나마 물리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관문이자, 동시에 그마저도 남편의 원고를 전달해야 한다는 일상의 연장선상이라는 점에서 지연에게 경인선 열차와 유사한 공간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작중에서 서울역과 그 앞 지하도는 총 네 차례 등장하는데, 처음 두 번은 지연 혼자서, 세 번째는 지연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강 기자( 김정철 )와 함께, 그리고 네 번째는 강 기자 혼자서 지하도의 계단을 오르내린다. 자연스럽게 지하도가 지연의 원치 않았던, 하지만 거스를 수 없었던 일탈의 상징적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셈이다. 나아가 서울역의 1번 플랫폼 또한, 지하도와 유사하게 지연의 일탈과 포기(혹은 체념)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으로서 비친다. 서울역 1번 플랫폼에 도착한 경인선 열차. 현재 이 플랫폼에서는 천안행 1호선 급행열차가 발착한다. 서울역 지하도를 올라가는 지연의 뒷모습. 일부러 사선 구도를 취함으로써 6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어색함이 전혀 없다. 서소문 건널목과 서소문 고가차도 서울 도심 유일의 기차 건널목인 서소문 건널목을 이렇게까지 중요한 공간적 배경으로 담아낸 영화는 아마 본 작품이 유일할 것이다. 나아가 당시에 갓 준공되었던 서소문 고가차도(당시엔 ‘서소문 육교’라고도 불렸다)도 함께 등장함으로써 단절(건널목)과 소통(고가차도), 혹은 고즈넉한 인천의 집과는 다른 복잡한 근대도시 서울을 효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서소문 건널목은 작중에서 지하도와 마찬가지로 총 네 차례 등장한다. 처음 두 차례는 서울역과 서소문의 신문사를 오고 가는 지연 혼자서, 세 번째는 지연을 무작정 뒤쫓는 강 기자의 갈팡질팡하는 시선(1:01:01경)으로, 네 번째는 다시 지연 혼자서 건널목 앞에 멈춰 서는 시퀀스에서 서소문 건널목은 등장인물들의 막막한 심정을 대변하듯이, 마치 단절을 의도한 것 마냥 육중한 기관차가 스크린을 가로지른다. 지연을 무작정 뒤쫓는 강 기자의 시선에 서소문 육교와 사방으로 향하는 도로 안내판이 담긴다. 아마도 지연에게 마음을 빼앗겨 갈팡질팡하는 강 기자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인천의 집까지 쫓아온 강 기자 앞에서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직후, 지연은 서소문 건널목 앞에서 육중한 화물열차에 길이 가로막힌다. 참고로, 작중에서 딱 한 번, 지연이 서소문 건널목이 아니라 그 위를 가로지르는 서소문 고가차도를 도보로 건너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나 지금이나 서소문 고가차도는 자동차 전용 도로로서, 보행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서소문 고가차도 보행 장면은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한형모, 1966)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데, <귀로>에서의 해당 씬은 <워커힐에서 만납시다>의 그것과 거의 유사한 위치에서 촬영되었다. 물론 맥락과 의도는 두 영화가 완전히 다르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1년 간격으로 똑같은 씬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여러 의미를 고려하게 만든다. <워커힐에서 만납시다>에 등장한 서소문 고가차도 보행 씬 본 작품에서 유일하게 서소문 건널목이 아닌 고가차도를 건너가는 시퀀스. 오른쪽 뒤편으로 중앙일보 사옥, 대한빌딩 등이 관찰된다. <귀로>는 대사량이 그렇게 많은 영화가 아니다. 물론 주인공 지연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외마디 비명처럼 내뱉는 중요한 대사가 삽입되어 있지만, 러닝타임의 상당 시간은 지연의 뒷모습(어떤 비평에서는 문정숙을 ‘뒷모습이 아름다운 배우’라 칭하기도 했다)을 비추며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음악과 공간적 배경만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연출 덕에, 처한 상황이 지연과는 다소 다를지라도 1967년 공개 당시는 물론이요, 거의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귀로>를 보며 지연의 심경에 공감하거나 나아가 감정 이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귀로>를 보고 난 후, 시청 앞과 서소문 일대를 거닐며, 철거 공사 중인 서소문 고가를 올려다보고 그대로 서울역으로 향해서, 경인선 열차에 올라타 인천역에 내려보는 일종의 <귀로> 성지순례 체험을 해 보는 것 또한, 본 작품을 온전히 즐기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 그만큼 현대인에게 주는 울림이 큰 작품이니 말이다. 김영준(도쿄대학 특임연구원) 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
사진: “ Jonas Mekas. Requiem ”, Francesco Urbano Ragazzi (© estate of Jonas Mekas) 돌아보니 2023년 한 해에만 상복을 네 번 입고, 네 점의 작품을 제작해 전시했다. 남아서 살아가야 하는 자들의 증상은 모든 의식이 끝난 뒤 발현된다. 2024년이 시작되자마자 몸은 소진되었고, 마음은 무력감으로 충만해졌다. 1년간 참 많은 영화와 콘텐츠들을 접했지만 소진된 육체와 무력감으로 충만한 마음으로는 잘 소화시킬 수 없었다. 사사로운 리스트에 올린 영화들은 그런 무감각 속에서 간신히 발견한 것들이다. 특히 요나스 메카스의 < 레퀴엠 >(2019)은 쓸데없이 흘려보낸 시청행위의 흐름을 끊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요나스 메카스의 유작 <레퀴엠>을 오랫동안 소문으로만 전해들었다. 특히 영상의 주된 사운드인 베르디의 ‘레퀴엠’은 이 영화의 전시 오프닝 때 현장에서 라이브로 연주되었다기에 기대가 컸다. 전시장에서 상영된 필름 영상과 실연된 사운드가 어떤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고 관객들에게 전달되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감독은 고인이 되었고, 우리가 기대했던 전시 상영은 이뤄지지 않았다. 만약 감독이 이 영화의 전시 방식에 따른 메뉴얼을 남겨두었다면, 훗날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뉴욕 복합문화예술공간 “The Shed”에서 <레퀴엠> 영상과 함께 작곡가 테오도르 쿠렌치스의 지휘로 연주되는 베르디의 ‘레퀴엠’ (사진: Kate Glicksberg, “ REQUIEM CONCERT PERFORMANCES ”, The Shed) 영화는 필름이란 긴 흐름 위에 감독이 여러 요소들을 자유롭게 띄워놓은 것 같다. 거리에 핀 꽃, 성경 구절과 뒤섞인 작가의 말, 매체로 공유되는 세계의 참상, 그리고 베르디의 ‘레퀴엠’이란 조각들이 영화에 흐름에 따라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이어져 독특한 수평의 흐름을 형성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글자를 읽고, 감독이 촬영한 자연물을 보다, 인쇄되고 방영되는 세계의 참상을 받아들여야 하며, 동시에 약 170여 년 전의 음악도 들어야 한다. 어쩐지 이러한 구성 자체가 베르디의 레퀴엠과 비슷하다. 베르디의 레퀴엠에선 소프라노와 테너를 비롯한 모든 파트가 독립적으로 각자의 아리아를 부른다. 꽤 매끄럽지 않지만 강렬한 조화를 이룬다. 요나스 메카스의 레퀴엠을 이루는 영상과 사운드 조각들이 수평을 이루며 동일한 층위에서 다소 거칠게 연결된 것도 이와 비슷하다. 그래서 이 거칠고 다소 성글게 엮인 조각들을 전시장에서 상영하고 연주했다면 그 효과가 더 뛰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는다. 물론 블랙박스에서의 사운드는 오픈된 공간에서의 라이브 연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감각하게 한다. 감독과 함께 LP판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마치 기계적 결함이나 일시 정지 버튼에 의해 발생했을 법한 단절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한 사운드의 빈틈은 감독의 신체와 카메라에 의해 포착된 사운드로 채워진다. 잠깐의 침묵, 노인의 숨소리, 무언가를 지칭하는 목소리, 나직한 웃음소리, 자연을 향한 감탄의 언어와 같은 것들이 음소거 된 사운드를 대신한다. 이러한 음악적 구성 외에 요나스 메카스가 수많은 진혼곡 중 베르디의 ‘레퀴엠’을 선택했던 이유를 반교권주의에 있다고 보았다. 요나스 메카스가 반교권주의자라는 얘기가 아니다. 영화 레퀴엠에서 요나스 메카스는 성경 구절을 인용함과 동시에 신에게 말을 건다. 그 말들은 교회가 아닌 DV-Cam 이미 위에서 펼쳐지며, 오직 신과 감독의 말만 존재한다. 신이 인간에게 전한 말씀과 인간이 신을 향해 내뱉는 말 사이엔 어떠한 중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 관객들은 백지에 기록된 신과 동일선상에서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인간과 마주하게 된다. 그 인간이란 90대의 노인이 되어도 카메라를 놓지 않은 감독 자신일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양 끝에 스프로킷뿐인 길고 거친 필름 위에서 감독이 남긴 손짓과 그림자, 그리고 쉰 목소리에 의지해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장황한 사변이나 일기 형식이 아니더라도 잠깐의 감탄사와 읊조림, 그리고 숨소리와 짧은 문장 하나만으로 감독의 존재감이 영화 전체에 걸쳐 드러난다. 필름의 물질성과 감독의 정체성이 고화질의 투명함으로 인해 가려진 동시대의 영화 환경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기에 가능하다. 때문에 요나스 메카스의 ‘레퀴엠’을 보는 내내 우리는 추구하고 감춰야만 완성할 수 있는 동시대 영화로부터 떨어져 잠시나마 큰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사진: “ Jonas Mekas REQUIEM ”, CURA. / " Jonas Mekas's "Requiem ", e-flux Criticism (© estate of Jonas Mekas) 물론 해방감은 곧 ‘지금 우리는 카메라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담을 수 있을까’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영화 레퀴엠에서 동시대 전쟁과 재난의 장면들은 출판물과 TV화면으로만 제시되고, 거리에 핀 꽃과 자연물들만이 직접 촬영한 것들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습관적으로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세계의 참상은 리얼하고 스펙터클하게 재현될 것이고 거리에 핀 꽃과 자연물들은 짧게 등장하는 배경으로 치부되거나 편집 과정에서 지워져도 무방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매체를 통해 접한 세계와 몸으로 체험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병치시켜 위계 없는 세계를 보여준다. 스펙터클하게 재현될 참상을 그가 접한 매체의 특성 그대로 담아 그 사건의 본질에 집중하게 만든다. 감독의 카메라에 포착된 거리의 흔한 꽃무더기와 자연물을 보다 보면 우리의 몸이 실제 세계에서 어떤 경험과 체감을 놓치고 살아가는지 질문하게 만든다. 이러한 방식이 무엇에 더 집중하거나 공감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길가에 핀 꽃과 해골이 쌓여있는 지구 반대편 어딘가의 불행을 등치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몸으로 보고 듣고 감각하는 실제의 현장과 물리적으로 먼 곳으로부터의 소식과 정보가 전해지고 교환되는 방식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공감 혹은 무감각은 그러한 현장과 방식에 의해 생성되는데, 문제는 이 두 세계의 균형이 깨질 때다. 이 영화는 두 세계를 담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스펙터클에 대한 숭배와 재현 의지, 그리고 작은 것들에 대한 무시 혹은 지나친 감성을 비껴간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을 피사체 삼아도 영화의 정서는 값싼 감성에 치우치지 않는다. 끔찍한 살육과 재난을 목격했을 때 감독은 그 참상이 담긴 매체를 촬영하며 스펙터클과 재현의 의지를 상쇄시킴으로써 오히려 본질적인 공감과 애도에 주목하게 만든다. 결국 그의 영화는 끊임없이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감각하고 경험하고 있는지 되묻게 하는 것이다. 사진: “ Jonas Mekas. Requiem ”, Francesco Urbano Ragazzi (© estate of Jonas Mekas) 물론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조각들은 철저히 감독이 자신의 세계로부터 이끌어낸 것이다. 그의 몸이 경험한 현장과 그가 접한 매체 속 세계로부터 포착한 것이다. 그렇기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자들은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For You”란 문장을 덥썩 물어선 안 된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레퀴엠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어쩐지 90대의 노인이 마지막으로 자신이 습관적으로 바라보고 가치를 부여했던 것들과의 작별로 이해했다. 가령 세속의 가치에 따라 이미지의 층위를 형성하고, 세계를 말끔하고 선명한 화면에 담아내며, 권위에 기댄 말에 복종하는 예술 행위와 같은 것들에 대한 저항 의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이 영화는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결국 감독 자신을 향한 것으로 읽힌다. 필름에 담긴 의식의 조각들 또한 철저히 그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비롯된 그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요나스 메카스의 레퀴엠은 결국 그가 자신의 죽음을 위해 미리 마련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평생 열망해 왔고 앞으로도 유일하게 안식할 수 있는 곳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 오랜 삶만큼이나 죽음 또한 결국 자기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죽음에 대한 애도와 위로 또한 자기 의지로 받고 싶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쩐지 요나스 메카스라면 가족과 친구들이 일반적인 장례식장에 몰려와 관습적 의식에 참여해 본인을 애도하는 방식은 원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오히려 직접 마련한 재단에 손수 만든 도구를 정렬한 뒤 자신의 영혼을 그곳에 뉘여 누구든 언제나 영화를 보고 만드는 행위로 위로하길 바라지 않았을까. 결국 관객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보다 보면 그가 배치한 조각들을 맞춰보고 그 사이에서 육신이 새긴 흔적을 찾게 되니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의 영화를 보는 순간 그가 마련한 레퀴엠에 참여하게 되었다. 무진형제(미디어 작가 그룹) l 무진형제는 3명으로 구성된 작가 그룹이다. 세간의 지배적인 가치와 믿음체계로 굳어져버린 것들을(眞) 의심하고 해체시켜(無) 동시대의 ‘인간-환경 시스템’을 재구성한다. <삼속(三俗)의 담(談)>, <궤적(櫃迹)-기술된 선인(善人)들> 등을 작업했다.
사진: " 도큐멘타 14에 관한 뒷 얘기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5년을 주기로 열리는 현대미술 전시회 ‘도큐멘타 14(documenta 14)’의 예술 감독인 아담 심지크(Adam Szymczyk)가 도큐멘타의 커뮤니케이션 책임자 헨리에트 갈루스(Henriette Gallus)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갈루스는 심지크에게 “그녀는 영악한 짓을 하고 있어요. 우리와 자신을 묶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심지크가 대꾸한다. “영악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가 우리와 함께 가라앉을지도 모르니까요.” 1년 후, 그들이 말하는 ‘그녀’에 해당하는 아네트 쿨렌캄프(Annette Kulenkampff)는 540만 유로의 적자를 빌미로 도큐멘타 CEO 직(職)에서 물러났으며 이 스캔들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예술행사의 성취를 통째로 가려버렸다. 독일 언론으로부터 ‘무모한 침입자’로 묘사된 심지크는 도큐멘타 14가 남긴 적자의 원흉으로 공격을 받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지나친 예술적 야심이 화를 불렀다고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예술계에서 비난을 받는 사람들 중에는 끈기와 주견, 고독, 창의성을 지닌 별종들이 있다. 심지크는 그런 인물이며, < 도큐멘타 14에 관한 뒷 얘기(exergue - on documenta 14) >(디미트리스 아티리디스, 2024)는 이 별스러운 인물에 관한 캐릭터 연구이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현대적 예술 제도의 존재 양식과 가치 기준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제시한다. 도큐멘타 14는, 심지크의 담대한 결정에 따라 역사상 처음으로 독일 카셀과 그리스 아테네, 두 도시에서 나눠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막대한 적자가 났고 정치인과 미디어 기관의 공격이 쏟아졌다. ‘아테네에서 배우기’라는 제목 하에 개최된 이 웅대한 프로젝트는 유럽 역사에서 식민주의를 탐구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포함하고 있었고, 미투 운동과 테러리즘, 유럽발 경제위기, 폭력과 전쟁의 한복판에서 열렸다. 어떤 다큐멘터리도 특정 행사의 총체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지만, 14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는 바로 그것을 해냈다. 디미트리스 아티리디스 감독은 큐레이터들의 회의, 스튜디오 방문, 기자회견과 프레젠테이션 따위의 공개 행사, 예산 문제, 설치 과정, 파티를 횡단하면서 위기에 처한 기관의 속살을 들추어낸다. 2015년 여름부터 2017년 가을 도큐멘타 14가 종료될 때까지를 따라가며 14개의 장으로 구성한 이 영화는 사명감에 불타는 예술 큐레이터의 행적을 시간순으로 기록하였다. ‘아트 바젤’의 디렉터였던 심지크는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거의 없는 대신 카메라를 벗어나거나 화면 가장자리에 휴대폰을 두고 사진을 찍는다. 예술이 정치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 그는 예민하지만 편집증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영화는 ‘돈’이라는 주제를 피하지 않지만, 예산은 큐레이터들 간의 대다수 대화에서 나타나는 유령처럼 보인다. 오히려 <도큐멘타 14에 관한 뒷 얘기>는 거대한 논쟁을 낳은 열네 번째 에디션이 예술 전시의 개념에 대해 급진적인 방식으로 변화를 꾀한 내력을 초점으로 한다. 사진: " exergue - on documenta 14 ", IMDb 미술 전시 큐레이팅에 대한 14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를 볼만한 가치가 있는가? 확실히, 그렇다. 디미트리스 아티리디스가 이룬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매력적이고, 긴장감 넘치고, 시의적절한 문제의식이다. 3년 넘게 아티리디스는 폴란드 출신의 예술 감독이 전 세계 국가를 돌며 뛰어난 작품을 찾고, 창의적인 큐레이터 팀과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유력한 지식인, 예술가, 영화 제작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자금을 조달하는 기관과 협상하고, 작품을 설치하고, 정치인과 만나고, 언론에 답변하면서 도큐멘타 14를 조직하려는 노력을 조명한다. 이것은 흥미롭고 신명이 나는 광경인 동시에 끔찍한 시간이기도 하다. 혼란스러운 구조와 큐레이션 담론을 묘사하는 정밀성을 통해 심지크의 큐레이션 팀은 선동적인 정치가 무참하게 무너뜨린 것(예술의 본원적인 가치)을 구제하려고 했다. 이런 종류의 거대한 예술 이벤트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피상적인 수준에 머문다. 이벤트의 연속성을 조각조각 모으려는 이 영화의 엄청난 노력은 검열이나 부채로 인해 가려지는 것들, 예술가와 큐레이터의 이상적인 협업 모델, 시대의 쟁점을 가시화하는 과정에 대해 말해준다. 2017년 나는 ‘도큐멘타 14’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고 다양성과 깊이를 갖춘 전시의 모든 레퍼토리에 감동을 받았다. 7년이 지난 지금도 노이에 갤러리(Neue Galerie)의 방들, 스탠리 휘트니(Stanley Whitney)의 추상화와 어니스트 만코바(Ernest Mancoba)의 수채화, 올루 오귀베(Olu Oguibe)의 오벨리스크, 기차역의 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에게서 받은 영감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화려한 축제의 뒷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도큐멘타 14에 관한 뒷 얘기>는 만성적인 위기에 시달리는 예술계, 이 역설과 씨름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고고한 에디터 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한 사례를 언급할 수 있겠다. 베이루트에서 폭발이 일어나기 전 큐레이터들은 지붕을 타격하는 총소리를 듣는다. 그리스의 극우 정당인 ‘황금의 새벽’은 도큐멘타 본사 바로 앞에 있는 노점상에 불을 지르고 도큐멘타 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광경을 바라본다. 베이루트에서 작가 카엘렌 윌슨-골디(Kaelen Wilson-Goldie)와 미술계의 순회 전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심지크는 “파티는 끝났다”라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심지크의 허탈한 말과 달리 도큐멘타 14의 현란한 주제 설정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폐허, 다중적 시간성, 장애 연구, 반정신의학, 섹슈얼리티의 정치, 트랜스 페미니즘, 포스트 포르노 정치학, 에너지 정치, 죽음과 애도, 의식의 기술, 샤머니즘, 다중 자연주의, 자유의 발명을 위한 프로토콜로서의 건축, 범 아프리카주의, 흑인 전통, 반 식민지주의와 탈식민지주의 지식, 원주민, 토착주의, 급진적 교육학.’ 시대를 통찰하는 예술 행사의 문제설정에서 비판과 창의성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사진: " exergue - on documenta 14 ", IMDb / " 도큐멘타 14에 관한 뒷 얘기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전설적인 피터 왓킨스(Peter Watkins)의 <레산(Resan)>(1987)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긴 다큐멘터리로 기록된 <도큐멘타 14에 관한 뒷 얘기>는 예술 시장과 외교의 관계에 대한 심오한 연구 작업을 만들어냈다. 지적인 야망을 품고 관료주의적이고 부조리한 현실을 뚫고 가는 이들의 용기가 한 편에 있지만, 독점적인 접근을 통해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빛나는 예술 작품의 큐레이션이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힘을 얻는 것도 예술의 힘이다. 영화에는 숱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싸우고, 고군분투하는 사람들, 그리고 두려움, 분노, 기대, 좌절, 기쁨 등과 같은 보편적인 감정이 있다. 시를 읽거나 그림에 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거나 무언가를 발명할 때 느끼는 것도 감정이다. 오늘날 영향력 있는 예술 콘텐츠는 미디어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다. 이 영화는 다른 수준에 존재하는 예술, 지적이고 영적인 희망을 줄 수 있는 예술의 감정에 관해 묵상하게 한다. 축제 기획자이자 큐레이터로서 나는 이런 주제를 말하는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였다. 정부 지원 이벤트의 큐레이터가 정부의 요구를 따르지 않고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인가? 공공 예산을 사용하는 예술 이벤트의 큐레이터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인가? 예술과 대중의 간극을 극복할 방법은 있는가? 이것은 혁신가 아담 심지크의 고뇌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예술 전시 축제의 기획자로 일하는 모든 이들의 뇌리를 맴도는 질문이다. 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l 영화주간지 《필름 2.0》 편집장,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영화글을 쓰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