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이로제 가족
- 감독
- 서유민
- 제작년도
- 1997
- 출연
- 강명식, 배혜린, 조진영, 신지훈, 오광호
<플란다스의 개>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가고 싶은 질문. 영화평론가와 아닌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한때는 비평의 태도로 영화글을 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비평’의 의미를 정의해보려고 했고, 내 안에서만 작동하는 매우 보수적인 기준을 세워보려 했던 시절도 있었다. (《씨네21》이나 《부산일보》 등 매체에서 평론상을 받고 등단한 사람? 적어도 영화 관련 전공 대학원 석사 이상 학위를 소지한 자?) 요즘은 그냥 본인을 영화평론가라고 지칭하느냐 마느냐, 에 달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보기엔 쓰는 글에 차이가 없는데 누군가는 “어이쿠, 제가 감히? 어떻게? 영화평론가인가요? 그냥 리뷰어, 리뷰어!”라고 손사래를 치고 누군가는 영화평론가라고 본인을 수식하며 강연을 다닌다. (이것을 자신감의 차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그런데 영화평론가는 ‘영화력’의 등급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 아니었나. 이를테면 내가 이른바 언론고시를 준비했었고 ‘취재’를 직업적 정체성으로 생각하며 12년 동안 일했던 사람인지라 스스로를 ‘기자’라고 먼저 정의하는 것처럼. 어찌 됐든 자아 성찰 끝에 스스로를 ‘영화평론가’라고 지칭할 근거를 찾고 주변에서도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는 사람들, 이라고 얼렁뚱땅 정의를 내린 후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다. 한국에서 ‘영화평론가’라는 타이틀은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 비평가의 정체성이나 비평의 의미를 논하는 글이 아닌,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취미로 영화평론을 한다면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 브런치에 글을 올리거나 뉴스레터를 발행해도 되겠지만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글을 기고할 수 있는 매체를 확보하는 것이 권장된다. 영화 잡지가 여럿 존재했던 전성기(너무 아득해서 역사책에 나오는 얘기 같다)를 지나 지금은 비평을 실을 수 있는 매체가 얼마나 있는가? 그러니까 이 시장이 충분한 독자층을 갖고 있나? 구독 매출만으로 유지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기성 지면 매체는 결국 광고 없이 생존할 수 없다. 영화 관련 지면에 가장 많이 들어올 법한 광고가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영화다. 광고 집행을 결정하는 광고주 그리고 그들이 파는 영화를 비평하는 글이 실리는 매체의 협력 때로는 신경전은 그 역사가 참 유구해서 새삼스럽게 언급하기도 민망할 정도다. 그 와중에 영화 시장은 어려워지고 마케팅 트렌드가 급변했으며 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다. 멋진 독립 잡지들을 기획하고 발행하는 업계 동료들은 매체의 딜레마와 극장 산업 하락세, 비평의 위기 속에서 나름의 전략을 갖고 비평이 독자를 만날 수 있는 창구를 확장해 가고 있다. 늘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다. 영화평론가를 꿈꾸는 어느 20대 학생에게 “글만 쓰면서 먹고 살 수 없다”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줬더니 “관객과의 대화(GV)를 다수 진행하며 커리어를 키우고 싶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냉정하게 계산해 보겠다. 영화글과 GV 모더레이터 활동을 병행하는 것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매달 원고지 200자 기준 70~100매의 원고를 쓸 수 있는 (원고료를 후려치지 않고 입금이 밀리지도 않는) 안정적인 지면이 마련되어 있고 매달 5~10개의 GV를 진행해야 한다. 그러면 최저 임금 수준의 돈을 벌 수 있다. 글을 기고할 수 있는 매체든 GV든 이미 탄탄한 네트워크를 만든 선배들과 한정된 자리를 갖고 경쟁해야 하는 것도 명심할 것. 이 와중에 진행비를 안 받거나 최소한만 받고 하겠다는 더 유명한 사람이 나타나면 나라도 그 사람에게 맡길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자기 PR’의 기회로 삼아 방송 출연 기회까지 가닿는다면 돈벌이 면에서 나아질 수 있다. 당연한 소리지만 방송 출연료가 원고료나 모더레이터 진행비보다 들이는 시간 대비 수입이 높다. 방송 경험을 인정받아 안정적인 방송인으로 활동할 수 있다면 ‘영화평론가’여도 나름 괜찮은 수입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고정 방송 스케줄이 존재하는 영화평론가나 기자가 몇 명이나 있는지 떠올려보길 바란다. 요즘 영화 자체가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GV 문화가 사라진다면? 지금이야 존재하지만 딱히 대체할 마케팅 방식을 찾지 못해 지속되는 것일 뿐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안다. 나는 모더레이터 일을 병행하는 사람 중에 “언젠가 이 시장이 사라질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방송 출연 스케줄이 있는 사람들도 똑같이 말한다. 그밖에 대표적인 부업으로는 대학이나 교육기관 강연, 영화제 심사 등등이 있다. 그렇게 믿을 구석 없는 프리랜서는 알아서 경력 쌓고 인맥 만들고 일거리를 따와야 한다. 내가 존경하는 어떤 선배들은 비평 기고, 모더레이터, 교육기관 강연, 영화제 심사가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을 멋지게 개척했다. 역시 저 정도 기획력과 추진력이 있어야 오래오래 살아남는 걸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아, 한 가지 확실한 길이 생각났다. 바로 영화과 교수가 되는 것이다. 본업은 교수, 부업은 평론가라니, 할 수만 있다면 갖고 싶은 부러운 삶이다. 그러려면 석박사 학위부터 필요하겠지? 물론 쉽지 않다. 십 년 전쯤 “다 때려치우고 뉴욕의 모 영화 학교나 갈까?” 하고 정보를 알아볼 때 억대 학비와 생활비가 들어간다는 그 학교에 이미 다니고 있는 학생이 “여기 한국인이 되게 많고요…. 한국으로 돌아가면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그럼 우리끼리만 해도 경쟁률이…. 저요? 요즘 《씨네21》 영화평론상 준비하고 있어요”라고 말해서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이 난다. 석박사 학위, 그리고 꽤 많은 돈이 깨지는 유학 경력만으로 보장되는 것은 없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잘 해야 한다. 공교롭게도 이 글을 쓰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 플란다스의 개 >(2000)였다. 예술가보다는 인문대 시간 강사가 영화기자 및 평론가의 상황과 비슷해서라기보다는, 극중 캐릭터들이 처한 곤궁과 선택이 닮아서였다. 윤주( 이성재 )는 “여성들이 원하는 배우자의 직업 순위 48위 광부, 49위 농부”보다 순위가 낮은 “50위 인문계 대학원생”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인문대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지만 교수 임용이 되지 못해 경제적으로 아내에게 의지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 내 개 짖는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린 그는 결국 강아지들을 납치해 감금 혹은 살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 시작하는데, 정작 임신한 아내가 반려견을 집에 데려온다. 아내가 애지중지하는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러 나갔다가 실수로 잃어버린 후 윤주의 입장도 달라진다. 아파트 경비실 경리 현남( 배두나 )과 함께 강아지를 찾아 헤매던 그는 마지막 남은 양심을 걸고 자신이 독거 할머니의 강아지를 죽인 범인이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만취한 현남은 알아채지 못한다.) <플란다스의 개>는 한국의 일상적 공간에서 장르성과 정치 역학을 포착한 뒤 치밀하게 때로는 분방하게 교차해 온 봉준호 감독의 인장을 일찌감치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복도식 아파트, 지하실, 경비 사무실은 공포, 미스터리, 스릴러의 가능성을 시험할 수 있는 무대이자 한국 소시민 사회의 축소판이다. 현남은 사회 정의 실현으로, 윤주는 명예와 물질적 보상으로 일종의 신분 상승을 노리지만 완벽히 실현되지 못한다. 공교롭게도 현남에게는 명예와 물질적 보상이 부족했고, 윤주는 윤리를 저버린 타락한 소시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남의 행위는 대가가 허무했고(할머니가 남긴 건 무말랭이가 전부다) 그의 영웅적 행위는 널리 알려지지 못한다(그는 인터뷰에 응하지만 TV 뉴스는 그의 존재를 지운다). 강아지를 구한 자신의 인터뷰를 편집한 TV 뉴스에 실망한 현남은 아파트 경비실 경리직에서도 근무 태만으로 해고되고 친구와 함께 산으로 도피한다. 윤주는 아내가 퇴직금으로 마련한 천오백만 원을 뇌물로 바치면서 교수 임용에는 성공하지만, 마지막 양심 고백이 가닿지 못해 윤리의 최저선을 방어할 기회를 무산시킨다. 현남과 윤주 새로운 영화 담론을 제시해 사유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비평의 욕망에는, 이런 행위가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을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시킬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가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비평의 자리가 좁아지면서 나의 행위가 누구에게 전해지고 있는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직업적 자아실현과 ‘먹고사니즘’이 충돌할 때 우리는 때로는 타협한다.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것은 A지만, 꾸준히 A를 할 수 있는 미래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B와 C까지 하는 것이라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 생계 압박이 낳은 조바심이 내가 설정한 하한선을 위협할 때, 아니 그 하한선을 어디까지 더 내려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찾아온다. 영화기자와 영화평론가의 현실적 고민은 대체로 윤주와 현남 사이를 오간다. 그래도 윤주의 선택이 현실에 가깝다고 자조하기보다는 현남의 소우주에서 싹튼 정의감이 소소하게라도 이어졌으면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그런 성향의 인간이라 아직 좋은 글과 좋은 영화가 주는 성취감을 믿고 악착같이 붙잡고 있다. 임수연(영화기자) l 어렸을 때는 물리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보니 영화기자가 되어 있었다. 《씨네21》에서 영화를 포함한 미디어 업계 전반을 취재하며 다양한 심층 리포트를 써왔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 폭스트롯Foxtrot >(사무엘 마오즈, 2017)을 보자마자 올해의 사사로운 리스트에 재빨리 추가했다. 이스라엘 감독 사무엘 마오즈의 두번째 장편영화인 이 작품은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수상작으로, 2018년 만날 수 있었던 가장 독창적이고 유려하며 감각적인 작품 중 하나였다. 국내에서 다시 볼 기회가 요원한 것 같아 아쉽지만, <폭스트롯>이 어떤 영화인지 궁금한 관객이라면 웹상에 공개된 2분가량의 예고편( 유튜브 바로보기 )을 보길 권한다. 파트너 대신 총을 얼싸안고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는 군인이나, 무장 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를 한 마리의 낙타가 유유자적 통과하는 장면만 보아도 이 영화가 한 프레임 안에 담아내고자 하는 다층적인 맥락을 짐작할 수는 있을 듯하다. <폭스트롯>에서 일상과 폭력과 유머는 장면마다 뒤엉켜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종종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난감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은 이야기가 전개될 수록 슬픔과 무력감으로 전환된다. 이스라엘 사회의 아이러니한 단면을 유려한 내러티브와 독창적인 비주얼을 통해 구현하던 <폭스트롯>은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인간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운명과 세대를 거쳐 반복되는 비극의 연대기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작품의 스케일을 확장한다. 예상치 못한 우회로를 경유해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그러나 출발지에서 무엇을 상상했든 목적지에서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는 영화. <폭스트롯>은 그런 연유로 마음이 가는 작품이다. 세 갈래의 이야기로 진행되는 <폭스트롯>은 부분을 통해 전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영화다. 이 작품의 내러티브는 많은 부분을 빈칸으로 비워두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조금씩 그 빈칸을 채워나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사건의 전말과 인물의 속마음이 공개되는 세 번째 파트에 가서야 관객은 퍼즐을 완성할 수 있는데,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텐션을 잃지 않는 연출자의 솜씨가 대단하다. <폭스트롯>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텔 아비브에 사는 부르주아 부부, 미카엘과 다프나로부터 출발한다. 어느 날 갑자기 비극이 그들의 집 현관문을 두드린다. 군대에서 복무 중이던 아들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이다. 부부는 크게 상심하지만, 신속하고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장례 절차는 그들에게 아들을 애도할 최소한의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데 몇 시간 뒤 부부의 집을 찾아온 군인들은 뜻밖의 소식을 전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미카엘과 다프나의 아들 요나단이 근무하는 이스라엘 북부의 국경을 배경으로 한다. 인적 없는 국경에서 요나단과 동료들이 하는 일이라곤 이따금 초소를 통과하는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하거나,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며 소일하는 것이다. 전시 중의 국경이라기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볼품없는 요나단의 초소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총격 사고로 지옥이 된다. 세번째 파트에 해당하는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다시 미카엘과 다프나 부부가 등장한다. 서먹해져 버린 그들의 관계는 영화의 초반부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밝혀지는 진실은 충격적이면서도 서글프다. 사무엘 마오즈는 외상을 입은 인간의 마음 상태를 시각적으로 구조화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다. 그건 아마도 전쟁의 후유증을 크게 앓았던 그의 과거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마오즈는 1982년 레바논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이스라엘의 여느 청년들처럼 전쟁에 참전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죽였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청년이었던 그는 전쟁에서 살아온 뒤로 오랫동안 카메라를 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모티브로 한 영화 < 레바논Lebanon >(2009)(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을 만들었다. 대부분 장면을 밀폐된 탱크 안에서 촬영한 이 작품은 오직 포수(사무엘 마오즈 자신이 포수였다고 한다)의 스코프를 통해 탱크 밖 세계를 조명하며 관객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이라면 방아쇠를 당길 수 있겠습니까?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 관객이 세계를 보는 도구인 스코프는 <레바논>에서 한 치 앞 운명을 알지 못하는 군인들이 느꼈을 노이로제와 공포감을 실감 나게 표현하는 데 일조했다. 전작에 비해 내러티브와 공간의 폭이 확장된 두 번째 장편영화, <폭스트롯>에서도 역시 사무엘 마오즈는 챕터(편의상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에 따라 달라지는 등장인물과 그들의 심리 상태에 조응하는 시각적 표현 기법을 명민한 감각으로 취사 선택하고 있다. 먼저 첫 번째 챕터가 묘사하는 아버지 미카엘의 세계는 현기증을 유발할 정도로 단정하고 억압되어 있다. 그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뜨거운 물에 손을 담그며 자학할지언정 다른 사람들 앞에서 목놓아 울지 않는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부모 세대를 둔 덕분이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미카엘의 부모 세대는 자녀로 하여금 그들의 아픔이 홀로코스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법을 가르쳤다. 아들의 부고 소식을 전하는 미카엘과 그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만으로 관객은 세대 간의 불발되는 소통과 그로부터 작동되었을 미카엘의 방어기제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미카엘과 달리 요나단의 세계는 지나치게 환상적인 필치로 묘사된다. 파스텔톤의 하늘과 황량한 벌판에 울려 퍼지는 낭만적인 재즈 넘버, 물 위에 비치는 군인들의 댄스 장면은 요나단의 세계를 전시 중의 국경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장소처럼 묘사하고 있다. 요나단과 세 명의 젊은 군인들은 지나치게 나이브하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총을 껴안고 춤을 추는 그들은 스스로를 온라인 사격 게임 속 스나이퍼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총을 들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누구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고, 상처를 받을 일도 없는. 그러나 분명한 경고의 신호조차 감지하지 못한 그들은 환상에 젖었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영화의 제목인 ’폭스트롯’은 ’어느 방향으로 가든 원래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오게 되는’ 특성을 가진 춤의 이름이다. 사무엘 마오즈는 결말에 해당하는 영화의 세,번째 챕터를 통해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듯 보였던 아버지와 아들이 실은 같은 춤을 다른 방식으로 추고 있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건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과 죄의식이다. 마오즈는 극 중 요나단이 만화로 그린 미카엘과 요나단 자신의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삽입함으로써 세대를 거쳐 반복되는 이스라엘인들의 트라우마를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불가사의한 운명의 작용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몸으로 운명에 부딪혀보려는 인간의 의지가 하나의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폭스트롯>의 세 번째 챕터는 그리스 비극을 닮았다. 그동안 이스라엘 사회가 직면한 전쟁과 그로 인한 희생을 다룬 영화는 많았다. 하지만 <폭스트롯>처럼 잔인함을 전시하지 않고 눈물을 강요하지 않으며 다층적인 맥락과 독창적인 시각으로 비극의 연대기를 탐구하는 작품은 드물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사무엘 마오즈의 <폭스트롯>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폭스트롯>은 지난해 이스라엘 사회에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실수로 아랍 청년들을 죽인 뒤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는 극 중 장면 때문인데, 이스라엘 문화부 장관인 미리 레제브가 "세계에서 가장 윤리적인 군대를 부정하며 젊은 세대를 선동하고 있다"며 영화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좌파 진영에서는 이 영화가 전쟁을 너무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며 ’점령의 미학’을 선보이는 영화라고 비난했다. 어찌 되었건 이 영화는 심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이스라엘인들의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끓게 만든 것 같다. 과거의 아픔을 망각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이들의 발목을 잡고 지금 여기에서 여전히 비극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 사무엘 마오즈의 <폭스트롯>은 지금 현재 가장 뜨거운 이스라엘 영화다. < 쇼아Shoah >(1985)의 감독 클로드 란즈만이 세상을 떠난 2018년, <폭스트롯>을 만난 건 정말이지 의미심장한 우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