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모델
- 감독
- 고먼 베차드
- 제작년도
- 2013
- 출연
- 린 만시넬리, 오드리아 에이어스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나를 웃음거리 정도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1]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세상에 정말 필요한 건 진짜로 연대하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거예요. 스타든, 노동자든, 흑인이든,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부디 저를 웃음거리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이런 제 신념과 함께 인터뷰 기사를 마무리해 주세요. Steinem, Gloria. Marilyn . New York: H. Holt, 1986, 23. * 마릴린 먼로가 사망 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이 마지막 부탁은 무시됐다. 죽음은 그 자체로 한 인간의 발언권을 몰수하는 사건이다. 죽음의 강을 건넌 사람의 생애를 함부로 규정짓는 것은 자칫 폭력이 될 수 있다. 1926년에 태어나 1962년에 사망한 한 미국인, 노마 진 모텐슨(Norma Jeane Mortenson)과 같이 혼란스러운 생을 살았던 이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다. 그녀는 타고난 스타였다. 그녀는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녀는 일생 내내 유·무형의 성적 폭력에 시달렸고 순탄치 않은 개인사를 겪었다. 그리고 그녀의 언행은 자주 모순적이고 불안정했다. 이 마지막 인상은,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연막에 그녀의 본 모습이 가려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늘상 ‘배우’로서의 자신을 강조했지만 일반적인 연기론과는 다르거나 불분명했다. 성적 매력을 부각시키는 배역 위주로 맡기는 소속 영화사에는 항의하면서도 자신의 아름다움에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에는 행복해 했다. 오히려 유명인사나 거물과 적잖은 염문을 뿌렸으니, 정서적으로 불안하다거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했다는 세간의 평을 듣기에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녀를 배우 ‘마릴린 먼로’가 아니라 ‘노마 진 모텐슨’이라는 한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는 오해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녀는 배우라는 탈출구를 통해 자신을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는 관객들을 갈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외적 아름다움을 포함한 자신의 ‘전체’를 보고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밤에는 샤넬 No. 5를 입고 자요’라는 발언이 의도적으로 성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을지, 아니면 정말 본인 말대로 피부가 민감해서 옷을 걸치지 않고 잔다는 의미였을지조차 헷갈리게 된다. 영화산업과 언론이 만들어낸 신화적인 이미지가 무려 60년 이상 재생산되고 있다. 이걸 걷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본인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상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신혼여행 중 도피한 여배우 6.25전쟁이 끝나고 고작 반 년이 지난 1954년 2월 16일, 서울 여의도공항에 C-54 수송기가 도착하고 마릴린 먼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위문협회(USO, United Service Organizations)가 해외 파병 미군을 대상으로 한 캠프 쇼(Camp Show) 공연에 출연하기 위해 왔다고 하지만, 이때의 기획은 다소 즉흥적이고 특별했다. 당시 마릴린 먼로는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Joseph Paul DiMaggio)와 결혼하고 일본의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신혼여행 중이었다. 이 결혼생활은 해가 가기 전에 고통스러운 파경 으로 치달을 것이었고, 신혼여행 중에도 이미 그 전조가 보였다. 조 디마지오는 신혼여행 중에도 일본 야구팀과의 공식 일정을 진행했고, 마릴린 먼로는 한국의 최전선에 근무하고 있는 미군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하기로 결정한다. 신혼여행 출발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거나 비행기 안에서 제의를 받았다거나 일본에서 전격적으로 결정했다는 등의 여러 설이 있지만 모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2] 다만, 한국에서의 모든 공연에서 그녀는 보라색 칵테일 드레스 한 벌을 입고 무대에 섰는데, ‘원래 파티장에서 입으려고 가져온 것이고 이것이 무대에서 입을 수 있는 유일한 옷이었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최종 결정 자체는 긴급하게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1954년 2월 1일, 도쿄 제국호텔 기자회견장에서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 부부 출처: 111-SC-452331, National Archives 마릴린 먼로는 2월 16일 여의도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19일까지 3박 4일동안 미군 기지 십여 군데를 순회하며 부대 내 야외 가설무대에서 위문공연을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2관에서 수집한 기록영상 중에는 미군 촬영병들이 이때의 마릴린 먼로의 모습을 기록한 푸티지가 3점 있다. 이 영상들은 현재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4) > [3] 을 통해 공개되고 있는데, 모두 흑백으로 촬영됐고, 특별한 경우 외에는 음향을 함께 녹음하지 않는 군 기록영상의 특성상 군인들의 환호성과 마릴린 먼로의 음성이 담겨 있지는 않다. 원 소장처에서는 모두 “MARILYN MONROE SHOWS, K-2 AND K-16, KOREA”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관리되고 있었는데, 이를 자료원 컬렉션에서는 <1954년 2월, 마릴린 먼로 내한 - 미군부대 순회공연> (A), (B), (C) [4] 로 구분했다. (이하, <영상 A>, <영상 B>, <영상 C>로 지칭하겠다.) 이 부부의 결혼은 ‘세기의 결혼’으로 일컬을 만했다. 결혼과 신혼여행도 평범하지는 않아서 화제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의외로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의 신문보도에서도 이 순회공연의 전 일정이 빠짐없이 명시된 기사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마릴린 먼로 헌정 사이트나 각종 블로그의 내용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출처도 분명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슬레이트 정보와 부대마크가 포함된 기록영상들은 귀중한 근거가 된다. 다만, 이 영상들에는 당시의 몇몇 일정이 빠져 있고 시간 순서대로 묶여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정리가 필요하다. 이 영상들과 당대 신문기사를 종합해 마릴린 먼로의 일자별 방문지 순서를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 2월 16일(화) : 여의도 K-16 비행장 도착, 미 제1해병사단 제1보병연대(첫 공연) [5] , 미 제7보병사단 ◦ 2월 17일(수) : 미 제3보병사단, 제40보병사단 제160보병연대, 제24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 [6] ◦ 2월 18일(목) : 미 제2보병사단, 제45보병사단 [7] ◦ 2월 19일(금) : 대구 K-2 공군기지(마지막 공연) 이렇게 확인된 일정만 봐도 4일 동안 총 9군데의 미군 부대를 방문했다. 기억에 의존한 일부 블로그 글, 예를 들어 마지막 날 대구 전에 춘천 공연이 있었다든지 하는 것들을 신뢰한다면, 18일과 19일에 각각 최소 2~3군데의 일정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촬영된 부대들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18일까지는 군사분계선을 따라 최전선 부대들을 방문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기사들은 공연이 있었던 장소를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서부 전방’(‘Western Front, Korea’), ‘중부 전방’(‘Central Front, Korea’), 그리고 마지막 날인 19일 제45보병사단 기사에서 ‘동부 전방’(‘Eastern Front, Korea’)으로 보도하고 있다. 따라서 마릴린 먼로와 공연팀들은 서울을 기점으로 경기 북부와 강원도의 전방 부대들을 동쪽으로 순회한 후 마지막 날 대구를 비롯한 후방 주요기지를 방문한 뒤 일본으로 귀환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가는 곳마다 적게는 6,000여 명에서 많게는 13,000여 명의 군인들이 몰려들었다. 17일까지 이틀 동안 집계된 관객수를 6만명 으로 보도한 기사가 있고, 대략 19일까지 총 관객수를 10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하는 견해가 일반적인 듯 하다. 영상들은 주로 마릴린 먼로에 초점을 두고 촬영됐지만 다른 전반적인 정보도 함께 담고 있다. 마릴린 먼로는 서울에 도착할 때와 대구 비행장으로 갈 때만 수송기를 탔고, 부대에서 부대로 이동할 때는 군용 헬리콥터를 탔다. 이 위문공연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보이는 밴드 ‘Anything Goes’ 일원들, 남편 조 디마지오의 동료 야구인의 아내 진 오둘(Jean O’ Doul), 그 외에 매니저 역할을 한 장교로 추정되는 인물이 늘 마릴린 먼로와 함께 이동했다. 따라서 이 인원들과 악기까지 감안하면 헬리콥터도 최소 3기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대마다 사단장급이 나와서 일행을 영접했고 도착 장소에서 한동안 포토타임을 가졌다. 공연은 보통 밴드원들이 노래, 연주, 만담 등으로 분위기를 띄운 후 마릴린 먼로가 등장해 노래를 몇 곡 부르고 군인들과 포토타임을 가지는 식으로 진행됐던 것 같다. 마릴린을 데려와라! - 신경쇠약 직전의 군인들이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 마릴린 먼로는 1953년 한 해 동안 출연한 영화 세 편이 모두 흥행하면서 떠오르는 스타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영화배우 데뷔 이전에 누드모델로 활동했고, 당시 군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핀업걸(Pin-up Girl) [8] 중 하나였다. 대중문화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한국의 미군들에게 마릴린 먼로는 영화배우라기보다는 핀업걸로 익숙했고, 사진에서 보던 모델이 현실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9] (왼쪽) 미 제1해병항공단 비행대대 “Devil Cats”, 퀀셋 안 벽에 가득 ‘핀업’된 여성 모델과 배우 사진들 출처: 127-GR-223-A345138 , Box 32, Folder 223, National Archives. (오른쪽) 1953년 2월 14일, 미 제9군단 항공관측부대 간이비행장 관제소에서 통신 중인 병사. 창에 ‘핀업’된 여성 사진. 출처: 111-LC-31969, National Archives / 열람: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4) > 중 <AERIAL PHOTO MISSION, IX CORPS, KOREA (2)> 2분 40초 지점 하지만 여의도공항에 마중 나온 군인들의 뜨거운 열기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비정상적인 수준이었다. 이때의 미군 병사들은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먼 다른 나라에 와서 3년간 전장을 경험했다. 특히 전방 부대들은 정전 후 7개월이 지난 시점에도 귀환하지 못하고 군사분계선 이남의 방비태세를 정비하거나 잔존하는 전쟁 재발의 위협에 대응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생존의 불안감과 오랫동안 누적된 피로감, 고국의 민간 사회와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이들의 전반적인 정서였을 것이다. [10]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USO가 발족하고 캠프 쇼를 기획했던 것도 바로 파병 군인들의 이런 정서를 달래 사기를 진작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6.25전쟁 중에도 캠프 쇼가 수차례 열렸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더라도 마릴린 먼로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한국 땅을 밟은 다른 ‘레전드’급 연예인들 이상이었는데, 그만큼 이때의 미군들이 지쳐 있었고 절실히 귀환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왼쪽) 1954년 2월 18일, 제2보병사단 공연 후 자신이 담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스터에 사인을 해 주는 모습 (<영상 C>, 3분 58초 지점) (오른쪽)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즐거워하는 제2보병사단 군인들 (<영상 C>, 21초 지점) 한 군인은 너무 당황해서 카메라 렌즈 뚜껑 벗기는 것을 잊었다. 먼로가 뚜껑을 열어주며 말했다. “자기야, 그거 벗기는거 잊었어.” 한국 전역 군부대 PX에서는 필름이 모두 매진되었고 제7보병사단 공연에서는 플래시가 너무 많이 터져, 한 기자가 "공산군들은 제7보병사단이 야간 기동 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보도했을 정도였다. "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터지는 플래시 불빛에 하늘이 계속 환했다." [11] 1954년 2월 16일, 제7보병사단. 무대 조명을 세팅하는 모습(왼쪽, <영상 A> 3분 44초 지점)과 공연 중 플래시가 터진 순간(오른쪽, <영상 A> 4분 29초 지점) 영상에서 비춰진 마릴린 먼로는 여신처럼 군림하는 스타가 아니라 군인들과 팔짱을 끼고 대화를 나누는 ‘친구’였다. 마중 나와 기념사진을 찍은 장교보다는 사병들이 카메라에 추억을 담을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내어 주었다. 그녀는 영하의 날씨에도 얇은 어깨끈만 있는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라 헌신적으로 공연을 펼쳤다. 비나 진눈깨비가 온다고 하여 공연을 취소하거나 연기하지 않고 예정대로 진행했다. 제40보병사단에서는 비와 추위로 잠시 무대 뒤로 들어가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나와 공연을 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 39도의 고열로 앓아누운 것은 이때 무리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12] 지친 병사들은 이토록 친밀하고 친절한 모습으로부터 아마도 위로 또는 이해받고 있다는 감정 비슷한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한편 마릴린 먼로가 군용항공점퍼를 입고 헬리콥터나 전차, 지프 등에 올라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은 병사들에게 긴 긴장상태가 끝날 날이 머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줬으리라 생각한다. [13] 한국에서 군인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하러 갔을 때, 그녀는 영하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1만 3천 명의 미군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진심으로 놀라고 감동했습니다. 군인들이 끊임없이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추위를 무릅쓰고 어깨끈 없는 드레스 [14] 와 샌들을 신고 무대에 섰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사람들에게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라고 회상했습니다. Steinem, Gloria. Marilyn . New York: H. Holt, 1986, 20. 병사들은 이렇게 억눌렸던 욕구가 해소되고 위로 받는 감정을 폭동에 가까운 격렬한 호응으로 표출했던 것 같다. 영상에 누락됐지만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공연 중에는 무대로 달려들려는 군인들 때문에 안전상의 이유로 공연이 일시 중단되는 상황이 있었다. [15] 이어 가장 격렬했다고 알려진 2월 18일 제45보병사단 공연에서는, 약 6,000명의 군인들이 마릴린 먼로의 차례를 기다리지 못해 앞 순서 공연자들에게 ‘마릴린을 데려와라!(Bring on Marilyn!)’라며 야유를 하고 돌을 던졌다. 결국 마릴린 먼로가 예정보다 일찍 등장하자 이들이 일제히 무대로 달려드는 통에 한 군인이 부상을 당해 구급차에 실려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16] 이런 해프닝들도 있었지만 현장에 있었던 군인들은 한결같이 회고록이나 구술을 통해 이때를 좋은 추억으로 회고하며 특히 마릴린 먼로에 대해서는 ‘최고로 멋진 여성이었다’, ‘여배우지만 겸손해서 놀랐다’ 등 좋은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영상에 드러나는 이때의 마릴린 먼로는 ‘추억보정’이라고 하기엔 유별나게 헌신적이었다. 한마디로 스타성과 진정성이 함께 폭발한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야외 무대 ‘Grenadier Palace’ 공연 : 진눈깨비에 가까운 비가 내리자 마이크를 손으로 닦아주는 관계자(위, <영상 A> 7분 7초 시점). 결국 잠시 퇴장했다가 다시 나오는 마릴린 먼로(아래, <영상 A> 7분 21초 시점) (왼쪽)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공연장에 가득 찬 군인들(<영상 B> 1분 24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7일, 제25보병사단 공연 장면. 추위에 입김이 나오는 모습 (<영상 C>, 5분 48초 지점) (왼쪽)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패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하며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마릴린 먼로 (<영상 B> 50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6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첫 공연장으로 향하기 위해 헬리콥터로 옮겨탄 모습. 이 순간에도 다리를 내밀고 포즈를 잡는 모습 (<영상 B> 5분 19초 지점) 마릴린 먼로의 다시 없을 순간 이번에는 마릴린 먼로의 입장에서 바라보자. 이 순간 마릴린 먼로가 미국의 배우이자 엔터테이너로서 국가를 위해 충성한 군인들을 위해 본분을 다 한 것이었다면 ‘프로’로서 존경할 만하다. 하지만 그녀의 때로는 지적이고 때로는 충동적인 발언들, 그녀에 관한 여러 전기들을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일은 아니다. 이런 시각은 어떨까? 그녀의 모든 발언은 늘 오해를 살 만 했다. 진심이 립 서비스로 받아들여지거나 화제성을 노린 발언으로 곡해되기 딱 좋은 유형의 사람이었다. 여의도공항에 도착해서 수백명의 군인들을 보고 한 유명한 발언, “내 평생 이렇게 많은 남자를 본 적이 없어요. 남편도 왔으면 좋았으련만.”은 자신의 관능적인 이미지를 활용한 의도적 발언으로 보이기 쉽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이번 여행은 여러모로 제 커리어의 정점이에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제가 영화 스타라고 느꼈어요.”라고 말한 것도 스타의 의례적인 발언처럼 들린다. 하지만 공적인 발언에 소심하게 내면의 결핍을 드러내곤 하던 그녀의 성향에 주목한다면 모두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가 지인들에게 한, 좀 더 내밀한 발언을 들어보자. “스타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그녀는 미국으로 귀환한 후 자신의 무용 선생인 로테 고슬라르(Lotte Goslar)에게 말했다. “정말 진심으로, 한국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 많은 젊은 친구들이 웃으며 나를 보는 것을 내려다보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내가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17] “7만여 명의 군인들이 내 앞에서 목이 터져라 환호하는데...” 먼로는 각본가이자 감독인 벤 헤크트(Ben Hecht)에게 말했다. “...그저 행복뿐이었어요. 집에 온 느낌처럼 .”(“I only felt happy. I felt at home.) [18]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에서 군인들과 즐거운 한 때. 다친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신혼여행 출발 때부터 남편의 폭행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19] (<영상 B>, 31초 지점) 이렇듯 가장 뜨거운 대중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여배우이면서도 관심과 애정을 갈구했던 28살의 젊은 마릴린 먼로에게는 어쩔 수 없이 혼란스럽고 비극적인 앞날이 겹쳐 보인다. 극단적 상황 속에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군인들이 보인 맹목적이면서 순수해 보일 정도의 격렬한 애정표현은 역설적으로 마릴린 먼로의 결핍된 정서를 보듬어 줬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기록영상에서는 성욕이든, 갈증이든, 관심이든 뭐든, 구분하기 어려운 혼란과 결핍상태에 놓여 있던 같은 처지의 군인들과 여배우가 이 짧은 며칠동안 서로를 위로했다고 느껴진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은 영상 중 한 슬레이트에서 ‘Marilyn Monroe + ME’라는 문구를 보고 촬영자가 벅차는 마음으로 ‘마릴린 먼로와 나(ME)’라고 적었을 것이라고 넘겨 짚었다. 지금이야 그럴 리 없다, 이것이 군 오락(Military Entertainment)과 같은 다른 용어의 약어일 것이다, 등으로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 정도로 영상 속에서 군인들과 여배우의 소위 ‘케미’는 끈끈해 보인다. (왼쪽) 1954년 2월 16일, 제7보병사단의 탈의실 또는 대기실 입구에서. ‘마릴린, 총검사단의 연인(SWEETHEART of the BAYONET DIVISION).’ (<영상 A>, 3분 27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 슬레이트, ‘Marilyn + ME’ (<영상 A>, 16초 지점)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 무대에서. (왼쪽: <영상 A> 1분 25초 지점. 오른쪽: <영상 A> 1분 15초 지점) 1954년 2월 18일, 제2보병사단 무대 ‘Bulldozer Bowl’에서. (각각 <영상 C> 4분 1초, 3분 41초 지점) 그리고 여배우들의 인생선이 교차한 순간 마릴린 먼로의 이 역사적인 내한공연은 한국어 콘텐츠에서 보통 다음의 두 가지 꼭지로 소비된다. ‘세상에, 마릴린 먼로가 한국에 왔었다고?’ 아니면 ‘마릴린 먼로가 최은희 와 만났던 것 알아?’. 사실 두 나라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여배우들의 만남에 대해서는 어떤 맥락도 찾기 어렵다. 심지어 국내 신문에서도 딱히 보도된 기사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만남은 일정 마지막 날인 19일, 대구 동촌비행장(K-2 공군기지)에서 이뤄졌다. 이 순간은 <영상 A>에 기록돼 있는데, 이로부터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이 영상은 슬레이트 외에는 매우 어둡게 찍혀서 처음에는 인물이 잘 식별되지 않았다. 보통 이런 경우는 아무리 조명 부족 등의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실제로 새벽이나 늦은 저녁 등 어두운 시간대에 찍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럴 때 시간대를 반영하면서도 내용이 잘 식별되고 현실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색상을 보정하는 것이 바로 기록영상 색보정의 핵심이다. 색보정 후에 비로소 마릴린 먼로 양 옆에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보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영화배우 최은희, 연극배우 백성희 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바로 그 장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잘못 퍼져 있는 대표적인 정보 중 하나를 확실히 검증할 수 있게 됐다. 이 대구 장면은 이따금 잘못 안내되는 것처럼 최은희 등이 마릴린 먼로의 ‘입국’을 환영하기 위해 마중 나온 장면이 아니라, 마지막 일정을 앞두고 대구에 도착한 마릴린 먼로를 맞이하러 온, 크게 보면 수일 동안의 공연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환송의 의미로 나온 장면이다. 심지어는 이 장면의 장소를 여의도공항으로 오인하는 내용도 은근히 많이 보인다. 아마도 마릴린 먼로가 군 수송기에서 내리는 모습이 담겨 있어서 이 모든 오해가 시작됐을 듯 하다. 하지만 여러 소스를 교차 검증하고 전체 맥락을 살펴보면 사실이 명확해진다. 1954년 2월 19일, 대구 K-2 공군기지에서. 슬레이트(<영상 A> 4분 35초 지점) 및 세 배우가 함께 한 모습(<영상 A> 5분 18초 지점) 영상에서 마릴린 먼로는 군용기에서 내려와 카메라를 든 수많은 헌병에 둘러싸여 환대를 받는다. 그러고는 환영 인파에 포함돼 있던 두 배우를 만나 함께 팔짱을 끼고 촬영 시간을 가진다. 이때 관계자로 보이는 한국인 중년 남성이 둘 보이는데, 이중 하나가 마릴린 먼로에게 무어라 말하자 ‘Thank you’라고 말하는 입모양이 보인다. 아마도 한국의 두 배우가 마중 나왔다는 설명을 들었을 듯하다. 이 남성들의 존재로 인해 이 만남이 배우들의 의사보다는 어떤 이유로 기획된 것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정 내내 처음 보는 군인들과 놀랍도록 친밀한 모습을 보였던 그녀도 이 순간에는 딱히 긴 대화를 나누지 않고 데면데면한 모습을 보인다. 이 짧은 장면 이후는 그녀가 주변의 전투기 날개에 올라 원래 그렇듯이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 촬영에 응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시기의 백성희 배우에 대해서는 의미 있는 정보를 찾을 수 없지만, 최은희 배우는 이때 자신의 여섯 번째 출연작인 신상옥 감독의 < 코리아 >(1954) 촬영이 끝났거나 막바지 단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리아>는 신상옥 감독의 두 번째 작품으로서, 한국의 각 명승지와 관련된 고사를 극화하여 엮은 문화영화였다. 신상옥 감독은 이 영화를 1952년부터 제작에 착수해 1954년 5월 1월에 개봉하게 되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1954년에 최은희와 결혼한다. 해방 공간에서 신예 영화인으로 주목받던 최은희는 전쟁기를 거치며 여러 가지 사건으로 배우로서의 경력과 개인사 모두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코리아>는 신상옥, 최은희 부부에게 앞으로 펼쳐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영화같은 인생 역정의 출발점이었다. 마릴린 먼로와의 뜬금없는 만남에 대해 구체적인 맥락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둘의 인생 역정에서 꽤나 비슷한 시기에 조우했다는 생각은 든다. *** [1] 마릴린 먼로의 마지막 인터뷰 중 발언이다. 원어로는 “ Please don’t make me a joke. ”로서,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나 선정적 이미지나 가십거리로 자신을 단순화하고 규정해 온 언론과 대중에 대한 마지막 호소로 읽힌다. [2] Liesl Bradner (2026. 2. 18), When Marilyn Monroe Interrupted Her Honeymoon to Go to Korea , HistoryNet Retrieved from https://www.historynet.com/when-marilyn-monroe-interrupted-her-honeymoon-to-go-to-korea/ [3] 컬렉션 사이트의 검색 필터 중 ‘미군위문협회(USO)’를 선택하면 이 영상들이 조회된다. [4] 원 소장처의 local ID로 구분하면, (A)는 111-LC-35128, (B)는 111-LC-35129, (C)는 111-LC-35130이다. [5] 제1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와 스틸사진들이 존재한다. [6] 제24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됐다. 24, 25보병사단의 방문 순서는 알 수 없다. [7] 제45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됐다. [8] 핀업걸(Pin-up girl)은 매력적인 여성을 촬영한 사진이나 여성을 묘사한 일러스트레이션 또는 이를 활용한 잡지나 달력 등을 말하며, 주로 벽에 핀으로 고정하고 감상하던 것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제2차 세계대전기부터 군인들을 중심으로 유행했으며, 이후에도 남성 중심의 작업장 등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마릴린 먼로는 미군 기관지 Stars & Stripes 에서 선정한 ‘1951년 미스 치즈케이크’(치즈케이크는 핀업걸의 은어임)였다. [9] 남성 중심의 군대에서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는 문화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나,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아키비스트가 실존하는 과거의 기록과 현상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윤색할 수는 없다. 이 글은 ‘바람직함’에 대한 논고가 아니라 시대적 맥락 속에서 미군과 마릴린 먼로가 어떤 결핍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서로를 어떻게 바라봤는가에 대해 주목한 것임을 밝힌다. [10] 미 육군의 TV시리즈 The Big PIcture 중 < USO - Where ever We Go >는 USO의 탄생 배경과 취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군인이 자신이 속했던 민간사회(old civilian)와의 연결을 유지하는 것이 사기를 위해 중요한 것임을 미군 당국도 알고 있습니다”, “USO는 고향의 사람들이 당신을 잊지 않았으며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군인과 민간의 삶을 연결지어 주는 곳입니다.” [11] Liesl Bradner, 앞의 글 [12] The Daily Record . (Dunn, NC), Feb. 23 1954. [13] 필자 개인의 인상이 포함됐으며 어쩌면 ‘군인과 꽃’ 클리셰를 바라보는 시각과 유사한 안이한 해석일 수도 있다. [14] 정확히 말하면 끈 없는 드레스(strapless dress)는 아니다. 얇은 끈의 드레스를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5] The Daily Record . (Dunn, NC), Feb. 17 1954. [16] The Key West citizen . (Key West, FL), Feb. 18 1954. [17] Liesl Bradner, 앞의 글 [18] Liesl Bradner, 앞의 글 [19] Spoto, Donald. 2001. Marilyn Monroe: The Biography . New York: Cooper Square Press. Originally published New York: Harper Collins, 1993. p.262.
일본에는 B급 영화의 전통이 선명하다. 메이저영화사가 아닌 소규모의 영화사에서 만들어낸 영화들을 주로 칭하지만 불황이었던 1970년대에는 도에이, 니카츠, 신도호 등의 메이저에서도 기묘한 영화들을 양산했다. 이시이 테루오의 <공포기형인간> <망팔무사도>와 스즈키 노미후리의 <도쿠가와 섹스 금지령> <성수 학원> 같은 ‘불량성감도’영화를 만든 도에이가 선두였다. 그중에서도 도에이의 여반장 시리즈와 공포여자고교 시리즈, 사소리 시리즈 등은 ‘핑키 바이올런스’라고 불렀다. ‘불량’ 여자들의 세계를 그린 야하고 폭력적인 영화들이었다. 80년대에 V시네마로 이어진 B급영화의 전통은 지금도 <라이브>와 <데드스시>의 이구치 노보루, <헬 드라이버>와 < V 소녀 대 F 소녀 >의 니시무라 요시히로 등의 감독들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미츠다케 쿠란도의 < 건 우먼 >은 일본 B급 영화의 흐름에 놓인 영화다. 벌거벗은 여인이 등장하여 잔인한 살육을 벌인다. 제목만 보았을 때는, 여성의 팔에 총을 장착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 이블 데드 > 시리즈의 애쉬처럼 팔에 전기톱을 단 소녀가 등장하는 <머신 걸>이라는 영화도 있었고, 팔에 사이코건을 달고 싸우는 우주해적 코브라도 있다. <건 우먼>의 일본 제목은 ‘여체총(女?銃)’이었다. 그런데 여체가 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체에 총을 집어넣는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에서 제임스 우즈가 배에 총을 집어넣는 장면이 있다. 그 몽환적인 장면이 실제로 가능하다면 어떻게 될까? 이렇듯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이상한 몽상처럼 흘러가는 괴이한 영화가 <건우먼>이다. 재벌의 아들인 하마자키는 수많은 여성을 강간, 살해했다. 그에게 아내를 잃은 의사 마스터마인드는 복수를 하기 위해 인신매매 조직에서 마유미를 데려온다. 마약중독에서 벗어난 마유미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적을 제압할 수 있도록 사격과 격투술을 배운다. 미국으로 도망 온 하마자키는 늘 보디가드에 둘러싸여 있다. 유일한 기회는 더 룸이라 불리는 곳이다. < 호스텔 >의 그곳처럼, 부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파라다이스 혹은 지옥. 시체애호증인 하마자키는 더 룸에서 변태적 욕망을 해소한다. 보디가드가 따라가지 못하지만 마유미도 무기를 가져갈 수 없고, 경비에게 무기를 빼앗아도 지문 인식이기에 사용이 불가능하다. 벌거벗은 채 시체로 위장해 들어가야 하는 마유미가 총을 가져갈 방법은 단 하나다. 몸을 갈라 총을 집어넣고는 다시 꿰매는 것이다. < 건 우먼 >은 시종일관 비장하다. 그들이 처한 상황, 그들이 하는 행동 모두가 처절하다. 그러나 현실을 연상시키는 리얼리티는 없다. 지극히 과장된 상황과 연기만이 있다. 마유미의 스토리를 들은 킬러가 말한다. “그거 일본 만화에나 나오는 거잖아. 뤽 베송 영화나.”영화 속 캐릭터조차도 딱히 현실이라고 믿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들은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마유미가 자신의 몸을 갈라 총을 꺼낸 후 버틸 수 있는 시간은 22분이다. 그 이상이면 출혈 과다로 죽게 된다. 점점 몽롱해져 가는 상황에서, 온몸을 적신 피가 유니폼이 된 마유미가 악당들과 격투를 벌이는 장면은 박력이 넘친다. 적을 바라볼 때의 마유미의 눈은 강렬하게 불타오른다. 너무나 비현실적이지만 마유미가 펼치는 액션은 에너지가 넘쳐 보는 사람을 들끓게 한다. 물론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만 마유미도, 마스터마인드도 모든 것을 걸었다. 마스터마인드는 마유미를 각성시키기 위해 많은 이를 죽였다. 때로 무고한 이도. 하지만 마스터마인드는 말한다. ‘복수를 끝내고 나면 나는 지옥으로 갈 거야.’자신이 나락으로 빠질 것을 알면서도 복수를 해야만 할 때가 있다. 마유미는 그의 도구로 시작했지만, 기꺼이 자신의 의지로 킬러가 된다. < 건 우먼 >의 영상도, 음악도, 마유미를 연기하는 아사미도 모두 70년대의 ‘핑키 바이올런스’를 연상시킨다. ‘핑키 바이올런스’는 단지 여성을 관음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다. 남자를 압도하면서 그녀들은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길로 나아간다. <건 우먼>의 마스터마인드도 그런 말을 한다. “남자는 피의 1/3만 흘려도 죽지. 여자는 2/3을 잃어도 아직 살아 있어. 신은 남자보다 여자를 정교하게 만들었어.” 마유미를 보고 있으면 <여수 701호 사소리>를 비롯해 ‘핑키 바이올런스’의 그녀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누드모델로 시작한 아사미는 AV 배우와 영화배우를 겸업했다. 그러다 만난 이구치 노보루 감독에게 ‘핑크 바이올런스’의 여배우들을 닮은 마스크라는 말을 들었고, 주로 미소녀 스타일을 보여줬던 아사미는 점차 액션계열 배우로 이미지를 바꾸게 된다. 2009년에는 AV를 은퇴했고 <고스 로리 처형인> <헬 드라이버> <데드 스시> < 아이언 걸 > 등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 건 우먼 >을 만든 1973년생인 미츠다케 쿠란도 감독은 고등학교 때 단신으로 미국에 건너가 대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졸업 후 미국에서 방송과 영화판에서 일하다가 2004년 <몬스터즈Monsters Do not Get to Cry>로 감독 데뷔를 한다. 영화에 뛰어든 계기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격돌Dual>과 미스미 겐지의 < 아들을 동반한 검객 >였다고 한다. 2008년에는 스승으로 여기는 오카모토 키하치에게 바치는 <사무라이 어벤져>의 주연, 각본, 연출, 제작을 했다. 2013년 작인 <건 우먼>은 유바리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고, 2015년 일본영화감독협회 신인상 후보에 올랐다. <사무라이 어벤져>에서 검, <건 우먼>에서 총을 다룬 미츠다케 쿠란도는 신작인 < 가라데 킬 >에서는 인간의 육체를 무기로 쓰고 있다. 미츠다케 쿠란도는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했으면서도 지극히 일본적인 영화를 만든다. 그것도 B급의 잔혹하고 뒤틀린 영화를. 그걸 일본에서는 ‘에로 그로 넌센스 & 바이올런스’라고도 한다. 말도 안 되는 조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는 1930년대 일본에 형성된 오랜 전통이다. <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를 쓴 미리엄 실버버그의 말에 따르면 ‘에로 그로 넌센스라는 말은, 정당 정치에 대한 고발이나 거리에 팽배한 호전적 분위기를 무시한 채 감각적 쾌락이 빚어내는 퇴폐에 심취한 것처럼 보였던 데카당트로 표현되는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건 우먼 >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런 전통이 100여 년 가까이 흐르면서 ‘저패니즘 익스트림’으로 변형되었고 확장되었다. <건 우먼>은 그런 전통의 연장선에 놓인 기묘한 영화다.
최근 개봉한 < 집으로 가는 길 >을 봤다. 안타까운 사연에 눈물도 많이 났지만, 다른 면으로는 우리나라 영화도 해외 로케이션이 많이 자연스러워졌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파리, 마르티니크 섬이 서울 쪽 연출과 어색하지 않게 연결이 되고 있었다. 프로덕션의 방식과 과정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겠고 연출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영화가 있었으니, 한국 최초의 파리 올 로케이션 영화 < 몽마르뜨 언덕의 상투 > 다. 제목부터... 살벌하다. 곱슬거리는 정동환 의 수염 상투를 튼 정동환 이 피리를 불고 있다. 그런데 그의 입 주변에 난 수염이 뭔가 살바도르 달리스럽기도 하고 하여간 조선사람 몸에서는 안 나올 듯한 꼬불꼬불한 수염이다. 뒤에 바라보는 외국인 부자(어쩌면 모자일지도 모른다)의 미묘한 표정은 또 뭔가. 이 한 장의 이미지가 < 몽마르뜨 언덕의 상투 >를 대변한다.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은 일반 시민들에겐 요원한 이야기였다. TV, 영화를 통해 접하는 해외의 모습이 전부였을 것이다. 영화 제작 시 해외로케이션에 대한 열망은 당연하다고 느껴진다. 올림픽을 목전에 둔 1987년, 세계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채비를 갖추던 한국인. 우리와는 생김새가 다른 외국들의 땅에서 활보하는 대한 남아(혹은 여아)의 모습을 당당하게 스크린에 담아 오겠다는 야심! <몽마르뜨 언덕의 상투>는 그런 생각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작자는 거기 갈 생각만 했지, 가서 뭘 할지는 충분히 생각하지는 못한 것 같다. 제목이 < OK 목장의 결투 >를 닮았지만 별로 비슷한 구석은 없는 영화다. 1987년에 개봉된 강대진 감독(제작자로 유명한 강대진 감독과는 동명이인이다.)의 < 몽마르뜨 언덕의 상투 >는 앞서 말했듯 ‘한국 최초의 파리 올로케이션’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지금까지 안방극장의 지지않는 해로 존재하는 정동환 과 < 애마부인 > 하나로 모든 것을 평정했던 안소영 이 투톱으로 출연한다. 정동환 과 안소영 . 딱히 이 영화의 스틸컷은 아님. 아마도 빈센트 미넬리의 < 파리의 미국인 >을 느슨하게 가져오지 않았나 싶은 이야기다.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위해 파리 유학을 떠난 진호( 정동환 )는 그곳에서 개인전을 여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다. 하지만 그의 파리 생활을 첫 도착부터 순탄치가 않다. 그가 신세를 지기로 한 황 화백의 집에서, 과거 미대 동기이자 연인이었던 희정( 이진경 )이 반라의 차림으로 나오는 것을 본 그는 파리에서의 첫 번째 좌절을 경험한다. 그녀는 돈 많은 재일교포이자 상업 작가인 황 화백의 재력과 박력에 넘어가 그와 함께 파리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호는 이에 실망하고 곧 혼자 레스토랑 서빙을 하면서 그림 작업에 몰두한다. 그의 열정은 ‘다다이즘 거장’ 삐숑 선생님의 마음을 열게도 하는데, 한 달에 한 번 자신의 그림을 평가해달라는 진호의 부탁을 거절하자 그는 외친다.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러니 삐숑 선생님의 가정부가 감동하고 3초 만에 설득하여 그의 청을 받아주게 된다.(다다이스트들이란!) 이제 곧 개인전을 열 것 같이 꿈에 부푼 진호는, 아르바이트하는 레스토랑에서 만난 윤 여인( 안소영 )에게도 호감을 가진다. 그녀에게 모델을 제안하자, ‘사생활에 대해선 절대 묻지 말라’며 조건부로 제안을 수락한 윤여인은 급기야 누드모델까지 허락하지만, 술 취해 그녀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그에게 다시는 연락 말라며 매몰차게 내친다. 그렇게 두 번째 좌절. 이후로는 좌절의 연속이다. 아니, 그냥 외국인 부랑아라고 해도 좋다. 이 부분에 대한 연출이 꽤 재미있는데, 진호는 파리 내의 관광 명소들을 골라가며 방황을 한다. 몽마르뜨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려다가 쫓겨나기도 하고, 센 강 인근에서 술을 마시며 방황을 하며, 길거리에서 정치, 문화를 이야기하는 청년들에게 한국인의 세계사 지식을 뽐내기며 먹을 것은 얻어먹기도 한다. 진호의 방황을 핑계로 파리의 관광코스를 쭉 훑은 영화는 급기야 그를 프랑스인들의 새해 행사인 성 실베스트리의 날에 등장시켜 들뜬 사람들 사이에 혼자 심각하게 서서 술을 들이키게 한다. 그런 그의 방황은 한 창녀에게 이끌려 갔다가 바지가 벗겨지면서 끝난다. 이건 아니야! 이래선 안 돼! 바지춤을 부여잡고 창녀의 집을 나서면서 본인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순간, 진호는 자신의 방황에 대해 반성하고 정신을 차리지만, 영화를 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탄식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그림 그리기 그런 방황 중 우연히 버스킹을 하는 거리 예술가들을 본 진호는 기발한 생각을 해내게 된다. 몽마르뜨 언덕에 위치한 계단에서 한국 전통의 의상과 악기를 통해 색다른 문화를 선보이며 호객을 해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이를 통해 유명해진 진호는 파리에서 화랑을 운영하는 사람에게 개인전 의뢰를 받게 되고, 성공적인 데뷔를 하게 된다. 이에 때맞춰 희정도 황 화백을 떠나 진호에게 돌아오고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 개인전은 사실 윤 여인이 뒤에서 진호를 위해 기획한 것이었다. 근본도 알 수 없는 한국인 미술대생의 개인전을 개최하기 위해 윤 여인은 화랑 주인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던 것이다.(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윤 여인은 화랑 주인에게 눈물을 흘리며 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진호는 윤 여인의 집을 수소문해 찾아가 충격적인 장면을 본다. 윤 여인이 사생활에 대해 알리기를 극구 꺼린 것은 장애인 남편을 수발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휠체어에 앉아 선글라스를 낀 남자를 수발하는 윤 여인을 멀리서 바라보던 진호는 눈물을 흘리고 만다. 그랬군요. 그랬었군요. 멀찌감치서 그녀를 보던 진호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한다. 그때, 윤 여인은 진호를 불러 세우고, 둘은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 영화는 유럽에 대한 예술적인 동경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멜로 영화다. 물론 그 만듦새가 탄탄하다거나 그렇지는 않다. 이 영화는 주인공 진호가 그렇듯 일단 외국에 나가긴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이야기는 중구난방이고 인물들은 저마다 심리적이든 물리적이든 모두 헤맨다. 비밀을 가진 듯 행동하는 윤 여인의 사정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이해가 안 되는 수준이고 영화의 라스트씬에 가면 저 여자는 뭐하는 여자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말하자면, 80년대 우리가 ‘외국’, 특히 ‘유럽’을 생각하면 떠오를만한 이미지들을 대충 엮고 그 위에 ‘한국의 미술 대학생’을 쑤셔 넣은 영화가 < 몽마르뜨 언덕의 상투 > 되겠다. 그래서 그 충돌이 재미있다. 이 글 초반에 올라가 있는 사진처럼, 미묘하게 안 어울려 충돌하는 이미지와 행동들이, 세계에 편입되고 싶은 대책 없는 욕망이 끓어오르던 80년대 중후반의 당시의 모습을 비춰주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어거지가 만든 두 세계의 이상한 만남. 이후로 세계는 급속히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인다. 진짜로 그렇게 되고 있는지는 뭐 잘 모르겠습니다만. 정동환 안소영 감독: 강대진 각본: 박철민 개봉극장: 스카라 관람인원: 4,618(서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