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인간
- 감독
- 조지 와그너
- 제작년도
- 1941
- 출연
- 클라우드 레인스, 론 차니 주니어, 에블린 앵커스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IMDb 나는 게임을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어떤 게임에는 마음이 많이 붙들린다. 십여 년 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를 할 때도 그랬다. 피시방에서 나는 고민과 불만이 많은 청년 예술가이기를 잠시 멈추고 무쇠 갑옷을 입은 늑대인간으로 변신했다. 로그인을 하고 가상의 세상으로 진입하면 잠깐이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물론 그 안에도 현실 세상과 비슷한 생존의 법칙이 존재했다. 미션을 수행하고, 전략을 짜고, 경쟁이나 싸움에서 이겨야만 능력치가 올라가고 돈도 많아졌다. 하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게임 속 마을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그래픽 풍경을 구경하곤 했다. 그리핀 등에 올라타고 날아다니는 게 가장 좋았다. 던모로에서 엘윈 숲까지, 엘윈 숲에서 모단 호수까지, 쓸데없이 이동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아니면 스크롤을 상하좌우로 돌리면서 호젓한 호숫가를 마냥 거닐었다. 사람들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려고 게임에 몰입한다는데, 나는 화면 속에서 게임으로부터도 도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름의 위안을 얻었다. 레벨업도 제대로 못(안) 하고 그만둔 게임이지만, 나에게도 한 시절의 추억이 남은 터였다. 와우를 다룬 다큐멘터리라고 하니 안 볼 도리가 없었다. <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벤자민 리, 2024)을 홍보하며 넷플릭스는 여러 개의 공식 포스터를 띄웠는데, 그중 한 포스터가 영화의 핵심을 절묘하게 함축하는 듯해 눈길을 끌었다. 포스터를 가득 채운 것은 영화의 주인공인 노르웨이 청년 마츠의 얼굴인데, 절반은 현실의 얼굴이고, 나머지 절반은 픽셀이 깨어지듯 애니메이션으로 변환된 게임 속 캐릭터의 얼굴이다.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IMDb 마츠는 희귀 질환을 가지고 태어났다. 뒤셴 근이영양증이라는 퇴행성 질환으로, 근육이 서서히 줄면서 신체 기능을 잃어가는 병이었다. 또래보다 발달 속도가 느리고 자주 넘어지는 아이였던 마츠는 하나씩 보조 장치가 늘어가다 열 살이 되기도 전에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누릴 수 있는 것이 얼마 없던 어린 시절, 마츠의 부모님은 게임을 마음껏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준 게임이 바로 와우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어려워진 스물다섯 살의 어느 날, 마츠는 조용히 숨을 거둔다. 마츠의 가족은 그가 운영하던 블로그에 짧은 부고를 올린다. 그러자 놀랍게도 수많은 친구로부터 애도의 메시지가 쏟아진다. 그들은 마츠를 ‘이벨린’이라는 캐릭터 이름으로 불렀다. 스크린 너머에는 마츠의 가족이 전혀 모르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와우와 같은 롤플레잉 게임은 길드라고 불리는 커뮤니티에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게임을 하는데, 마츠는 자신의 길드에서 늘 사람들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문제가 있으면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해결사라 불렸고, 로맨티스트라고도 불렸다. 마츠 스테인, 아니 이벨린 레드무어의 활약담을 들으며, 마츠의 부모는 놀라워한다. 육체의 한계 속에 고립된 아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을 늘 안타깝게 여겨왔는데, 스크린 너머에서는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달리고, 우정을 쌓고, 연애하고, 다투기도 하며 살았던 것이다.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IMDb 영화는 게임을 해로운 것으로 손쉽게 규정하는 세상의 편견에 정면으로 응답한다. 중증 장애인은 물론이고 사회와의 대면에서 다양한 종류의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게임은 분명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출입문이 될 수 있다. 경쟁이나 현실 도피가 아닌 주체적 개입과 나눔으로서의 게임, 몸의 확장으로 기능하는 가상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게임의 사회적 가치나 치유의 능력을 그저 입증하는 것, 그보다는 훨씬 복잡다단한 질문들 속에 마츠(혹은 이벨린)의 세계는 놓여있었다. 이 영화에는 여러 종류의 스크린이 등장한다. 먼저, 마츠의 죽음 이후 촬영된 가족과 지인의 인터뷰 영상이 있다. 현재 시점의 이 영상들은 창가의 액자 속 사진으로 남은 마츠의 얼굴, 정지된 마츠의 삶을 과거형으로 서술하는 회고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마츠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1989년 어느 날로부터 시작하는, 과거 영상의 인용이 있다.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는 아기 마츠의 모습, 조랑말 인형을 선물 받는 모습, 종종걸음으로 걷다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 조금 느려진 걸음으로 등교하던 모습, 수영장에서 아버지의 등에 업힌 모습, 가족여행이 있던 날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 이 화면들은 대부분 가족이 촬영한 홈비디오로, 마츠의 짧은 인생을 찬찬히 훑는다. 애정과 근심이 묻어나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거칠게 요약되는 것은 점차 움직임이 없어지고 무기력해지는 퇴행성 근육 질환 장애인의 생애이다. 한편, 이 다큐멘터리는 남겨진 ‘데이터’를 통해 카메라가 찍을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을 마츠의 시선으로 재구성한다. 마츠가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온라인에서 보낸 시간은 약 2만 시간에 달한다. 그는 블로그에 많은 일기를 남겼고, 그가 속한 길드 ‘스타라이트’는 4만 2천여 쪽에 달하는 게임 내 채팅과 유저 로그 기록을 보관하고 있었다. 영화는 주인공 사후에 제작되는 인물 다큐멘터리가 지닌 한계와 가능성의 새로운 국면을 실험한다. 온라인상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게임 그래픽 애니메이션으로 고스란히 ‘재연(再演)’될 때, 그 가상의 ‘재현(再現)’이 가져오는 구체성과 생동감은 실로 감동적이다. 그렇게, 마츠는 자신의 이야기를 새로이 쓸 수 있었다. 더불어 그 다시-쓰기는 영화가 제시하는 다른 화면들을 다시-읽게끔 만든다. 마츠가 남긴 일기로 재구성된 내레이션은 홈비디오 화면 속 말 없는 마츠의 속마음을 훑는다(그는 얼마나 위트 넘치는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마츠가 얼마나 다정하고 용감한 사람이었는가를 들려주는 온라인 친구들의 이메일 내용만큼이나, 그 컴퓨터 스크린에 비친 마츠 부모님의 얼굴에 집중하게 된다. 스크린들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 사이, 인물과 인물 사이로 틈입하며, 서로 간섭을 일으킨다. 겹겹의 진실이 우리 삶의 무대를 구성하고 있음을 드러내며, 영화는 ‘진짜 삶’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IMDb 마츠는 근육이 퇴화하는 와중에도 특별히 주문 제작한 장비 덕분에 게임을 할 수 있었다. 낙관적인 사람이라면 이 다큐가 기술에 대한 경외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의 제공과 기술에의 의지가 누구나의 삶에서 양립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며, 접근 가능한 기술 위에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획득한 것은 마츠 스스로의 노력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고작 0과 1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데이터의 더미 속에서 누군가는 범죄를 도모하지만, 또 누군가는 어떻게든 삶이라는 것을 구성해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것은 분명 자신의 생애가 어떤 기록으로 쓰일 것인가를 마츠가 미리 고민한 결과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낀 시점에, 마츠는 블로그 비밀번호를 남기고, 비밀리에 방안에다 카메라를 설치하도록 요청했던 것 같다. 덕분에 죽음에 가까워지는 몸으로 마츠가 살아낸 컴퓨터 앞에서의 마지막 생애 또한 기록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스크린 너머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에 부치는 경배이면서, 동시에 ‘마츠의 비범한 인생’에 관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비범함과 평범함이라는 관념의 줄다리기 속에서 주인공을 영웅화하지도 연민의 대상으로 만들지도 않는 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그럼에도, 마츠가 게임에 접속한 다음 늘 30분가량 정해진 코스를 달렸다는 대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먹먹해진다. 그건 그냥 산책길이 아니다. 꽃사슴과 회색늑대와 익룡이 함께 노니는, 영원히 닳지 않는 길이다. 마츠는 영원히 늙지 않는 몸으로, 지치지 않는 다리로 그 길을 달렸다. 하지만 그 길에 진입하기 위해 화면을 켜고, 정성 들여 만든 이벨린의 삶으로 로그인하는 매일의 루틴을, 어떻게 가상이라는 한 마디 단어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마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건 “단순한 스크린”이 아니었다.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영혼이 향하는 “하나의 관문”이었다. 와우 개발팀은 마츠를 기리기 위해 ‘레벤 꾸러미’라는 아이템에서 생기는 수익 전액을 근이영양증 환자 지원 단체인 큐어뒤셴에 기부하고 있으며, 게임 안에 이벨린의 묘비를 설치했다. 이벨린은 그가 자주 가던 엘윈 숲에 위치한 수정 호수에 묻혀 있다. 와우 유저라면 누구나 참배할 수 있다. 좌표는 49, 65, 7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속 아이템 레벤과 마츠(이벨린) 추모비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A Life Rich with Community and Connection through World of Warcraft ”, Cure Duchenne 김영글(미술작가) l 텍스트와 이미지, 영상과 출판을 아우르며 활동한다. 허구와 사실의 관계,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에 집중하며, 주로 이야기를 새롭게 직조하면서 역사적ㆍ사적 자료의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를 시도하는 작업을 해왔다. 『사로잡힌 돌』(2024), 『노아와 슈바르츠와 쿠로와 현』(2021), 『모나미 153 연대기』(2019) 등의 책을 썼고, 주요 영상 작업으로 < 파란 나라 >(2019), <해마 찾기>(2016)가 있다.
<변신> 올 여름에는 < 변신 >( 김홍선 , 2019)과 < 암전 >( 김진원 , 2018), 한국 공포영화 2편이 개봉했다. 8월 21일 개봉한 <변신>은 29일까지 100만명이 넘는 관객이 들며 좋은 성적을 냈고, 8월 15일 개봉한 <암전>은 10만명의 관객이 아쉽기는 하지만 정통 공포영화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매년 여름마다 공포영화 2, 3편이 개봉하고 적어도 한 편 정도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호시절이 돌아오는 것일까? 아직 판단은 힘들지만 공포영화가 이전보다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암전> 최근 몇 년간 한국은 물론 해외의 공포영화들이 좋은 흥행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시작은 2013년 제임스 완의 < 컨저링 >이었다. 이후 애너벨 시리즈와 <더 넌> 등으로 확장된 컨저링 유니버스의 출발인 <컨저링>은 한국에서 226만명의 관객이 관람했다. 보통 5백만은 넘어야 히트작이라고 보겠지만 공포영화의 경우는 다르다. 한국에서 공포영화는 한국이나 해외 작품 가리지 않고 마이너 장르다. 한때 < 여고괴담 >( 박기형 , 1998), < 장화, 홍련 >( 김지운 , 2003) 등의 히트작이 나오기는 했지만 지속된 흐름으로 정착되지는 못했다. 4, 5편의 공포영화가 경쟁하던 여름도 있었지만 시류에 맞춰 조잡하게 만들어낸 작품은 관객의 실망으로 이어졌다. 공포영화에 관심이 없고, 좋아하지도 않는 프로듀서와 감독이 저예산으로 관객의 관심을 끌기 위해 급조된 작품이 많았다. 공포영화의 ‘스릴’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정교한 테크닉이 필요할 뿐 아니라 ‘공포’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 무서운 분장과 깜짝 효과만으로는 공포영화를 만들 수 없다. <컨저링>이 성공한 후 2014년 < 애나벨 >(존 R. 레오네티)은 92만명, 2016년 < 컨저링 2 >(제임스 완, 2016)는 192만명의 관객이 들었다. 호러영화의 전통적인 스타일을 현대적으로 리메이크한 ‘컨저링 유니버스’는 젊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2015년에는 장재현 감독의 < 검은 사제들 >이 544만명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사제복을 입은 미남이라는 컨셉을 앞세운 트렌디한 영화였고, 공포의 문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였다. 장르적 완성도가 높았다. 2017년에는 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조던 필 감독의 < 겟 아웃 >이 213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해외에서 화제를 끌기는 했지만, 무명 감독 연출에 흑인들이 주연을 맡은 <겟 아웃>의 성공은 놀라운 일이었다. < 애나벨:인형의 주인 >(데이비드 F. 샌드버그>도 193만명의 관객이 들었다. 전작의 2배가 넘는 흥행이었다.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둔, 스티븐 킹 원작의 < 그것 >(앤드레스 무시에티)이 88만명이라는 아쉬운 성적이기는 했지만, 한국에서도 화제성을 가진 공포영화라면 대중성이 있음을 증명했다. 2018년에는 다양한 공포영화가 선보였다. 실화 괴담을 소재로 한 < 곤지암 >( 정범식 )을 267만명의 관객이 봤고, 컨저링 유니버스에 속하는 <더 넌>이 101만명이었다. 공포만이 아니라 예술영화의 범주로도 가능한 < 유전 >(아리 에스터)은 17만명이 들었다. 페이크 다큐 형식으로, 실재했던 곤지암의 폐건물을 찾아가는 내용인 <곤지암>은 한국 공포영화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특별한 스타나 화제 없이도 관객들은 흥미로운 공포영화를 선택한다. 또한 공포 장르는 중독성이 높아 한 번 좋아하게 되면 지속적으로 장르를 소비한다. <사바하> 올해는 <검은 사제들>의 장재현 감독의 신작 < 사바하 >가 239만명, < 겟 아웃 >의 조던 필 감독의 신작 < 어스 >가 147만명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애나벨 시리즈 3번째 영화인 < 애나벨 집으로 >(게리 도버먼)도 48만명이 들었다. 모두 관객은 전작보다 줄었지만, 전작보다 약한 화제와 임팩트에도 이 정도의 거둔 것은 평가할 수 있다. 다음 작품의 완성도가 이 감독들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다. 공포영화는 메이저에서 성공을 거두기가 쉽지 않은 장르다.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 늑대인간 등이 등장한 유니버설 호러의 성공 후에도 호러는 서브컬처의 영역에 속했고, B급영화로 주로 만들어졌다. 호러가 메이저로 복귀한 것은 윌리엄 프리드킨의 < 엑소시스트 >(1973)가 대성공을 거둔 덕이었다. 그리고 1980년대 <할로윈>, < 13일의 금요일 >, < 나이트메어 > 등 10대 관객이 좋아하는 슬래셔 호러가 인기를 끌었다. 90년대 들어 주춤하던 할리우드 호러는 슬래셔 호러를 변주한 웨스 크레이븐의 < 스크림 >(1996), < 링 >(나카다 히데오, 1998)과 < 주온 >(시미즈 다카시, 2002)이 주도한 J호러가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되면서 잠깐 주목을 받았다. 최근 공포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공포영화가 선전하고 있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의 영향이기도 하다. 할리우드는 물론 동남아에서도 요즘 공포영화는 약진하고 있다. 제임스 완 감독의 컨저링 유니버스가 대성공을 거두었고, <겟 아웃>과 <유전> 등 예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호러영화가 선전했다. 케이블 채널과 넷플릭스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는 9시즌까지 나온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를 비롯하여 넷플릭스의 <힐하우스의 유령>, 스티븐 킹 원작의 <제럴드의 게임> 등 저예산의 공포영화와 드라마가 탄탄한 인기를 과시한다. 또한 동남아인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대만 등에서 공포영화가 그 해 흥행 1위나 높은 순위에 오르는 등 인기를 끌고 있다. 전통적 호러 강국인 태국에 이어 <사탄의 숭배자>와 <드레드 아웃>의 인도네시아, <마신자> 시리즈와 <카르마>의 대만 그리고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에서도 활발하게 호러영화가 만들어지고 흥행에서도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 저예산이 가능하면서 확실한 마니아를 거느리는 호러영화는 다큐멘터리와 함께 21세기 들어 제작편수가 가장 많이 늘어난 장르이며 인기 장르가 되었다.
2012년 유바리판타스틱영화제의 그랑프리는 폭력 전문 감독 이시하라 타카히로의 <오사카 폭력 사건>에게 돌아갔다. 심사위원 대상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도 상영된 바 있는 스즈키 타이치의 <네 멋대로 해라!>였다. 가장 큰 대중적 호응을 얻은 관객상은 작년에 한국에서도 개봉되었던 < 울트라맨 사가 >였다. 하지만 영화제 내내 평론가와 관객들이 “그 영화 봤어?”라며 수군거렸던 영화는 따로 있었다. 오하타 하지메라는 신인 감독이 만든, 단편이라고 하기엔 길고 장편이 되기엔 부족한, 53분짜리 중편 영화 < 기묘한 사랑 >이다. 원제는 ‘へんげ’(?化). ‘원래의 모습을 바꾸어 나타남’, ‘괴물’, ‘요괴’ 등의 뜻을 지닌 ‘헹게’라는 제목은 매우 직접적이며 정직하지만, 중의적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요시아키(아이자와 카즈나리)는 괴물로 변해간다. 제목 그대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진짜로 끊임없는 변이를 보여주는 사람은 감독인 오하타 하지메다.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러닝 타임 안에서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호러 관련 인덱스를 끊임없이 펼쳐간다. ‘어느 부부의 사랑 이야기’라는 부제로 시작하는 영화는 어느 병원 기록 화면을 보여준다. 2008년에 촬영된 영상엔 구속복을 입은 요시아키가 있다. ‘최면 요법 및 관념 운동’이라는 제목의 영상 속에서 요시아키는 바닥을 뒹굴며 극도의 발작 증세를 보인다. 카메라는 뒤로 빠지면, 그 장면을 모니터로 보고 있는 요시아키가 있다. 과거 자신이 받았던 모습을 마치 추억을 되새기듯 다시 보는 남편이 케이코(모리타 아키)는 불만스럽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과거를 떠올리지 말라며, CD를 부숴 버린다. 그렇다면 요시아키는 완치된 걸까? 아니다. 후배이자 의사인 사카시타(노부쿠니 테루히코)는 정기적으로 방문해 병세를 체크한다. 요시아키는 여전히 3일에 한 번씩은 발작을 하며, 제대로 된 외출을 못 한 지 2년이 넘었다. 그리고 수많은 벌레 같은 것이 자신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는 어떤 상태인 걸까? 발작의 원인은 무엇이며, 그의 정신세계에 대한 정확한 의학적 진단은 무엇일까? 하지만 < 기묘한 사랑 >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의외의 행보를 보여준다. 어느 날 밤, 갑자기 발작을 일으킨 요시아키의 한쪽 발이 괴물처럼 변한다. 저예산 영화인지라 조악한 특수 분장으로 한눈에 합성수지로 만든, 마치 고릴라 가면 같은 고무 질감이 느껴지는 가짜 발임을 한눈에 알 수 있긴 하지만, 그의 변신은 예상치 못했고 자못 충격적이다. 여기서 우린, 혹시 이 영화의 모티브가 카프카의 「변신」은 아닌가 살짝 의심하게 된다.(게다가 요시아키는 벌레가 자신의 의식을 지배한다고 말하지 않던가!).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의 침울한 톤과 카프카가 만난 영화? 그런데 영화는 예상을 빗나간다. 다음 날 사카시타가 방문해 최면 요법을 걸자 요시아키는 소리를 지른다. “이소니레가니마레아모!” 그러자 유리잔이 깨지고, 요시아키는 발작을 일으키며 오른팔의 변이를 일으킨다. 결국 다시 병원에 격리되는 요시아키. 이후 의사 사카시타는 케이코를 찾아와 이상한 말을 한다. 요시아키가 내뱉은 말이 인간과 동물의 의사소통 언어라는 것이다(이 단어의 의미는 이후 ‘세계의 총의(總意)’, 즉 인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의 의식으로 밝혀진다). 동물과 인간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기의 존재로 회귀하는 인간? 여기서 갑자기 영화는 오컬트 장르나 < 캣 피플 >(폴 슈레이더, 1982) 류의 호러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병원에서 탈출한 요시아키는 괴물로 변해 밤에 사람들을 해치는 연쇄살인마가 된다. 사람을 죽여 인육을 먹는 그의 모습은 좀비와 다를 바 없으며, 밤에 변한다는 점에서 늑대인간을 떠올리게 한다. 집으로 찾아온 요시아키. 아내는 퇴마사를 불러 남편 안에 있는 악령을 내쫓으려 하고, 영화는 갑자기 < 엑소시스트 >(윌리엄 프리드킨, 1973) 같은 퇴마 호러가 된다. 여기서 방심하면 안 된다. < 기묘한 사랑 >의 콘셉트는 앞으로도 서너 번은 더 변해가며, 후반부엔 급기야 도시 재난 영화와 괴수 영화와 만난다. 초반부에 순진하게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렸던 관객을 무색하게 만드는, 과격한 결말인 셈이다. 데뷔작을 맞이하는 오하타 하지메 감독의 태도는 쿨하면서도 야심 차고 진실하다. 이 영화에서 발작이나 변이 같은 현상은 맥거핀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요시아키가 어떤 외부적인 초현실적 존재에 의해 사로잡혀 이런 증상을 드러내는 것처럼 냄새를 피우지만, 솔직히 감독은 그 이유를 밝히는 것 따위엔 관심 없어 보인다. 대신 그에게 중요한 건 눈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다리가 변하고, 팔이 변하고, 온몸이 변해 괴물처럼 되고, 사람을 죽여 시체를 뜯어 먹고, 얼굴이 뭉그러지고, 괴수가 되고…. 이 과정에 따라 영화는 ‘호러 판타지’라는 테두리 안에서 미친 듯이 요동치고, 관객은 빠른 걸음으로 따라가야 한다. 부족한 제작비 안에서 최선을 다한 특수효과와 특수촬영이 가상하고, 너무 티 나는 컴퓨터 그래픽이 조금 안쓰럽기도 하지만, 장르적 역동성이라는 콘셉트만 놓고 본다면 < 기묘한 사랑 >을 능가하는 영화는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 그러면서 영화는 일본 영화의 장르적 전통과 B 무비의 유산을 소중히 계승한다. 우린 < 기묘한 사랑 >을 보면서 이 영화가 한 부부의 러브 스토리라는 걸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극단적 사랑 이야기’라는 일본 영화 특유의 정서는 <기묘한 사랑>에서 진정한 극단을 만난다. 영화 첫 장면, 케이코는 뭔가 악몽을 꾸는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자신의 몸을 더듬고 있다. 욕구 불만 상태다. 그녀의 욕망은 남편이 괴물이 된 후에 해소된다(직접적인 섹스 신을 보여주진 않지만). 그러면서 영화는 < 킹콩 >이나 < 미녀와 야수 > 같은 괴물-여성의 순애보 성격을 띠기도 하며, 케이코는 밤거리에서 남자를 유혹해 집으로 데려와 남편에게 ‘먹이’로 주기도 한다. 곤란한 정도로 뒤섞인 결합이며, 심각한 장르적 오지랖이다. 츠카모토 신야의 < 철남 >(1989)를 떠올리는 것도 그다지 무리는 아니다. <철남>이 사이버 펑크의 테마 안에서 저예산 영화의 상상력을 드러낸다면, < 기묘한 사랑 >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부터 카프카의 소설과 오컬트 무비와 괴수 영화를 가로지르는 신체 변형의 이야기다. 여기서 오하타 감독은 그 신체에, “현대 일본 사회의 병폐” 운운하며 사회적 의미를 담는다거나, “존재의 타자성” 등을 들이대며 철학적 화두를 던지는 무리수를 두진 않는다. 대신 괴물이라는 크리처를 각종 클리셰의 격전지로 만들고, 오로지 그 결과물과 장르적 쾌감 속에서 만족한다. 오타쿠의 과시적 욕구? 혹은 아날로그적 B 무비의 상상력에 대한 오마주다. 장르 영화의 매끈하고 판타스틱한 이미지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 기묘한 사랑 >의 어두운 화면과 조잡한 특수효과가 불편하고 낯설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겨우 53분이며, 이 시간만 투자하면 당신은 근래 들어 가장 ‘경제적인’, 홈 쇼핑 용어로 바꾼다면 ‘구성이 알찬’ 호러 한 편을 만나게 될 거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 이 영화는 내내 호러인 척 하지만, 감독은 서두부터 이 영화가 ‘어느 부부의 사랑 이야기’임을 못 박았고, 다소 기묘하긴 하지만 영화는 이 선언에서 단 한 순간도 이탈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린 믿는다. 그들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임을. 케이코의 사랑을 통해 언젠가는 요시아키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임을. 그렇게 그들은 영원히 행복할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