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미
- 감독
- 임익호
- 제작년도
- 2024
- 출연
- 차희, 윤다혜, 안시윤
4분할 폐쇄회로 모니터 안에서 지하철 역사(驛舍)들의 이모저모가 보인다. 서울 곳곳의 지하철 플랫폼을 찍은 저화질 흑백 이미지들이 둔탁한 리듬의 편집으로 나열되는 모니터에서는 열차들이 도착한 뒤 통근자들이 타고 내리고 터널 안에서는 다음 열차의 불빛이 빛난다. 서로 다른 지점을 비추는 네 개의 프레임과 한 프레임을 확대한 이미지가 번갈아 배치되다가 체류 외국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트랙으로 내려가고 그의 마지막 순간이 열셋이나 열넷 또는 열다섯 프레임일 수도 있는 착란적인 이미지로 제시된다. 그리고, video off... 어두운 색깔의 점퍼를 입은 남자의 최후를 기록한 이 CCTV 이미지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창생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태양 아래로 카메라가 틸트 다운하면 스모그에 뒤덮인 서울의 빌딩 숲이 드러난다. 곧이어 한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건너뛰면서 라디오 채널의 잡다한 목소리들이 겹치고 도시 경관 위로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조언이 흘러나온다. “이번 한 달, 올 한 해를 진정 성공하려면 나의 성과를 냉철하게 보는 지혜의 눈이 필요하겠죠?”, “웃을 일이 있을 때는 소리 내어 즐겁게 웃도록 하십시오. 많이 웃는 사람은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에 걸릴 염려도 없다고 합니다.” 상냥한 충고와 맞물린 이미지들의 전환은 무뚝뚝하고 가차 없다. 교통체증, 지하철역의 승하차객들, 연체동물 형상의 인쇄기, 무표정한 노동자의 얼굴, 펄럭이는 구인광고, 증기를 내뿜는 다리미, 재봉틀과 박카스 따위의 사물과 행위들이 일상과 산업 공간을 흘러 다닌다. 그 즈음 일상적 생활사의 세목들 위로 별안간 건조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끼어들어 최근 한국인의 사망 원인에 대한 통계자료를 읽어 내려간다. 미세먼지와 황색포도상구균 등의 미생물, 암이나 뇌혈관질환, 심장질환 같은 병증에 이어 고의적 자해로 인한 사망이 4위에 올랐노라고, 내레이터는 말한다. 다시 죽음이라는 의제로 돌아와 이 메마른 통계들의 꺼풀을 벗겨내면 그 아래에서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 파산의 기술 >은 프롤로그에 제시되었던 잊히지 않는 죽음의 내막을 탐사하는 비선형 복합 내러티브 다큐멘터리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혼란스러운 지형을 매핑하는 이 영화는 4개 챕터로 구성된 느슨한 플롯을 취하는데, 서로 다른 기원과 출처에서 발췌한 이미지 자료들을 배치하고 이미지들의 좌표와 접촉면을 확장하여 형성된 문맥이 서사의 핵심이 되도록 한다. 형식과 의미 질서의 구속성을 무시하여 일견 두서가 없는 듯 보이는 서사는 디스토피아적인 도시 경관과 경제적 재난, 긴축 위기에 직면한 남녀들의 증언을 통해 1990년대 말부터 한국 사회에서 시작된 파산의 물결이 개인에게 미친 여파를 추적한다. 말과 언어, 이미지, 정보의 충돌을 전개하는 기술 방식은 번영의 뒤에 도사린 위기, 신자유주의 질서 하에서 은폐되는 착취와 고갈, 살인에 대한 총체적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일상적인 확신의 목소리 위에 파산의 풍경들을 대비하는 충돌의 미학을 내세우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충돌의 이미지들이 앞을 막아선다. 불명료한 카메라의 표면 위에 철문을 두드리는 소음이 얹힌다. 채무 변제를 종용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잦아들면 전원이 켜지고 카메라는 십자가와 단란한 가족사진들이 벽에 걸린 좁은 집을 스캔한다. 젊은 엄마는 어린 딸에게 더 큰 집으로 이사할 거라는 밝은 미래를 약속하지만 웬일인지 딸은 “무섭다”고 말한다. 순간 암전, 강제집행을 고지하는 목소리를 따라 불이 켜지면 압수품에 붙은 붉은 딱지들이 보이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다. 저들의 꿈은 어떻게 살해당했는가? 말과 목소리, 이미지의 충돌을 모체로 이어지는 다음 시퀀스에서 다종다기한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은 일상 업무와 부채의 증가, 직업의 조건 따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 중 일부는 얼굴을 숨기고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 또는 눈두덩이로만 나타난다. ’붉은 입술들‘이 생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신용과 부채에 의존하는 사정에 대해 말하는 동안 세계경제포럼에서는 말쑥한 비즈니스 맨들이 샴페인을 들고 어슬렁거린다. 한때 아파트 건물이 있던 공간은 크레인으로 철거되고 있으며 부서진 콘크리트 슬라브가 심란하게 흩어져 있다. 붉은 입술들의 대화는 그들의 생존 투쟁에 대해 계속 이야기한다. 모닝커피, 출근 준비, 통근, 어린이집, 월세, 여가 시간을 즐기는 방법 따위의 생존 루틴들이다. 포크레인의 집게발이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철근 뭉치를 뽑아내면, ‘붉은 입술들’은 카드 돌려막기로 연명해야 하는 채무의 굴레를 한탄하고, 가족들은 집에서 쫓겨난다. IMF 이후 기업의 파산과 구조 조정이 계약 관행의 조정, 실업, 인플레이션, 대출, 개인 파산으로 이어졌던 고통의 지도가 순식간에 그려진다. 동시에 텔레비전 모니터에서는 선거 승리를 축하하는 운동가들의 감격적인 연설이 흘러나온다. 텔레비전 안에 박제된 이미지를 제외한 주변은 모두 어둡다. <파산의 기술>은 리드미컬하고 아이러니한 몽타주, 감독 자신의 무감동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사회에서 개인을 증발시킬 위기에 처한 파산의 공기를 시적인 게릴라 영상으로 전환한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혁신을 기도한 감독 이강현은 행과 불행, 희망과 절망, 승리와 패배에 대한 반성적 시각을 가지고 고단한 노동의 조건과 일상, 거대한 대부 경제의 무게 아래 짓눌린 채무자들의 생존 투쟁, 승리의 확신이 무색한 죽음의 기운들을 능숙하게 대조한다. 승리를 공표하고 환호하는 사람들, 누가 이긴 것인가? 무엇이 우리를 여기로 데리고 왔는가? 사태의 본류와 지류가 분별되지 않는 혼돈의 지도 안에서 생활사의 분주함, 부채의 압력, 웅장한 공공프로젝트의 역사, 노동조합주의의 쟁취, 선거의 승리, 오염된 콘크리트 도시에 대한 느낌들이 스스로 말하도록 함으로써 <파산의 기술>은 진정한 사회적 고통과 불안을 묘사하려 한다. 이 지점에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우리들의 접하는 이미지의 두께를 이야기한다. 이미지의 표층과 심층에 쌓인 시간의 두께는 서울 영등포 어느 뒷골목 벽에 붙은 너저분한 포스터를 찍은 이미지에 대한 독해로 해설된다. 한몫에 보이지 않는 이 이미지 더미 안에는, 국제결혼을 알선하는 포스터와 사금융 대부업체 전단, 초고속 인터넷 회사의 광고, 룸 가라오케를 선전하는 포스터, 그리고 이 모든 이미지의 뒤에 쌓인 시간의 퇴적층들이 공존한다. 내레이터의 말대로, 우리는 오랜 시간을 가지고 이미지들의 안과 밖을 살펴야 한다. 한 맥락에서 이강현은 재현과 재현의 장치를 동시에 또는 번갈아 보여준다. TV 모니터, 비디오 캠 이미지는 현실과 재현의 구분을 강조한다. TV 모니터 안의 이미지와 바깥의 현실 사이에는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있고, 우리들은 이미지 바깥에 서 있다. 영화에 주석을 달고 정리해야 하는 에필로그는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1987년 시민항쟁을 기념하는 집회로 이동한다. 선언과 주장, 추억, 공염불, 낄낄거림이 교차하는 그곳에서 카메라는 연사가 아닌 군중을 비추고 있다.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웃음을 흘리는 해사한 군중들 사이에서 투쟁가에 고양된 한 남자는 외롭게 주먹을 치켜올린다. 장면이 전환되고 흐린 하늘 아래 복면을 두른 노동자들의 집회를 시발로 하여 아파트에서 누군가의 유품을 정리하는 여인의 비디오 영상이 흐른다. 화면 위에 찍힌 날짜는 2003년 10월 17일이다. 붉은 이불이 둘둘 감겨 있는 사람은 고공 크레인 농성을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프롤로그의 폐쇄회로 영상에서 보았던 남자의 죽음으로 돌아간다. 주검을 향한 통곡과 이어지는 격문, “나의 목숨을 내놓으라 하면 너의 심장을 찔러주겠다.” 승리를 기념하는 사람들의 맞은편에서 죽창을 든 노동자들은 공격을 위한 채비에 나섰다. 우리들은 이미 철거와 퇴거, 쏟아지는 절망, 그리고 지하철에서 생을 마감한 남자를 보았다. 영화의 앞과 뒤에 평행하게 놓인 죽음은 어떻게 서로를 향하는가? 상투적인 인과론의 오류를 넘어 <파산의 기술>은 간단히 정의될 수 없는 사회학적 현상으로 이 죽음들의 지도를 그린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 쇼생크 탈출 > < 미져리 > < 미스트 > < 캐리 > < 돌로레스 클레이븐 > < 하트 인 아틀란티스 > < 그린 마일 > <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Apt Pupil > < 샤이닝 > < 스탠 바이 미 >... 스티븐 킹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중 보편적으로 관객들의 지지를 받았거나 상업적 성공, 혹은 비평적 성과를 얻어낸 작품을 대략 생각나는 대로 적어 봤다. 10편이다. 셰익스피어를 제외하고 어느 소설가가 10편 이상의 ‘성공적 영화화’라는 결실을 얻어 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븐 킹에게는 ‘망한 영화가 많은 원작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물론 그렇다. 비교적 근래에는 < 셀: 인류 최후의 날 >과 사이파이 채널의 드라마 <헤이븐>이 있었고 <공포의 별장>이라는 제목 등으로 세 번이나 만들어진 「세일럼스 롯 Salem’s Lot」들도 신통치 않았다. 더 옛날로 가 보면 수많은 똥망작들이 도사리고 있는데 < 옥수수밭의 아이들 > 시리즈 중 1편을 제외한 모든 작품들이 그러하며 < 괴물 Graveyard Shift > 등 온갖 희한 야릇한 영화들로 필모그래피가 더럽혀져 있다. 이건 다작을 하는 작가의 숙명이다.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거나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작품들 중에서도 스티븐 킹의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들은 적지 않다. < 초능력 소녀의 분노 Firestarter >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초능력 소녀의 분노>라는, 시놉시스를 제목화 해버린 번역제의 1984년 영화 < Firestarter >가 있다. < 캐리 >를 감명 깊게 본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는 ‘유년판 과학 소설 풍 캐리’라는 측면에서 박수를 보낼 수 있다. 특히 번역제에 나와 있는 바로 그 ‘분노’ 시퀀스가 지니고 있는 후련함과 은근한 공포는 나에게 30년 이상 뚜렷하게 각인 돼 있다. 사실 스티븐 킹 원작 영화들이 독특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대부분 베스트셀러임에도 불구하고 B급 상상력으로 도배돼 있는 바람에 B무비로 직행한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지금은 거장이 돼 버린 크로넨버그의 < 초인지대 Dead Zone >가 그랬고 메리 램버트의 < 공포의 묘지 Pet Sematary >라던가 호러의 제왕 존 카펜터의 < 크리스틴 > 역시 1980년대 B무비를 사랑한 이들이라면 꼭 거쳐 간 작품이기도 하다. 스티븐 킹 자신 역시 B무비의 광팬이라는 사실은 「죽음의 무도」만 읽어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킹은 꾸준히 B무비와 어울리는 스토리들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무생물의 반란’이다. < 맥시멈 오버드라이브 > 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들 중 대중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소재들이 예의 ‘무생물의 반란’이다. 그중에서도 기계들이 인간을 해친다는 내용의 영화들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 써스펙트 >라는 제목으로 국내 출시됐던 1995년 작 <맹글러 The Mangler>에서는 세탁 공장의 대형 프레스 다리미를 비롯한 기계가 인간을 학살한다. 2016년작 < 셀: 인류 최후의 날 >은 핸드폰의 전자파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설정이었고, < 크리스틴 >은 저주받은 자동차의 이야기다. 이렇게 하드웨어가 인간을 공격한다는 소재는 그야말로 B급 영화를 위해 최적화돼 있다. 진짜 사물을 배치하고 약간의 장치만 하면 되니까 아트 디렉션에서도 큰돈이 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단편 「트럭」은 1980년대와 90년대에 두 번이나 영화화됐는데 그중 먼저 만들어진 < 맥시멈 오버드라이브 >는 킹이 직접 각본과 감독을 맡았고, 전문가 평가와 박스오피스 성적 모두 실패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이클 크라이튼이 < 웨스트월드 >나 < 코마 > 등에서 감독으로서의 재능 역시 증명한 것과 비교되곤 한다. 하지만 언제나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사들의 안정적 간택을 받을만한 정서로 무장했던 마이클 크라이튼에 비해 스티븐 킹은 스스로 B급 정서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 <맥시멈 오버드라이브>는 한마디로 러스 마이어의 그라인드하우스 영화들, 로저 코먼이나 조지 A 로메로의 저예산 호러들과 그 맥락을 함께 한다. 그 유명한 콜라 자판기의 공격 신이라던가 신체 절단 장면들은 스티븐 킹이 이 영화를 어떤 태도로 만들었는지 증명하는 부분이다. 충격적인 장면을 무표정하게, 때로 잔혹 유머로 버무리는 애티튜드는 킹이 소설을 집필하는 자세와도 동기를 이룬다. <맥시멈 오버드라이브>의 가장 후련한 부분은 바로 음악이다. 작가들만으로 이뤄진 밴드 ‘Rock Bottom Remainders’의 멤버이기도 한 스티븐 킹은 AC/DC의 노래들로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채웠다. 특히 주제곡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Who Made Who’의 호방함은 이 영화가 지닌 자세와 격을 함께 한다. 그렇게 할리우드의 평범한 감독이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길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은 대단했지만 안타깝게도 배우를 보는 눈과 다루는 방법에서 미숙함을 드러내는 바람에 이 작품은 나 같은 변태들만 좋아하는 컬트영화가 돼 버렸다. 스티븐 킹의 영화들이 매력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의 원작으로 누구나 좋아하는 영화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좋아하지는 않는 영화도 만들 수 있고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영화가 나온다고 해도 하나도 놀랍거나 안타깝지 않다. 그 무한한 의외성. 그래서 언제나 스티븐 킹의 영화를 기다리게 된다.
지난 1년 동안, 개인적으로 가장 열심히 지지하고 옹호한 국내 단편 애니메이션은 김고은 감독의 < Her >이다. < Her >를 주목한 출발점은 이 작품의 주인공이 (적어도 한국 애니메이션에서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유형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인은 외롭다. 그리고 연인을 원한다. 사내의 사랑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자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는 다시 그리워한다. 뻔하다고? 뻔한 사랑, 뻔한 집착, 뻔한 그리움을 진부하지 않게 하는 건 그녀의 행동과 표정과 침묵의 말투, 그리고 그 저변에 깔린 정서이다. 무표정하다. 말이 없다. 일말의 탄식이나 신음도 없다. 과잉이 아니라 극도의 절제된 이미지 속에서 움직인다. 그녀의 몸가짐은 마치 살진 암고양이의 걸음걸이처럼 우아하게 관능적이다. 사랑을 갈구할 때는 한없이 여린 것 같지만, 배신당했을 때는 거침없다. 사내의 거죽(!)을 세탁기 속에 돌리고는 다리미로 밀어버린다. 그러나 잔혹하지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은유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분노의 다림질이 아니라, 지극 정성이 담긴 다림질이다). 여인의 표정은 사내와의 관계 속에서 부여된다. 키스로 붉은 입술이 묻어나고, 붉은 피로 눈동자가 찍힌다. 이러한 설정은 팜므 파탈이나 욕망이라는 뻔한 비평용어를 불러들일 수 있다. 하지만 < Her >는 욕망이 아니라 욕정에 대한 작품이다. 사회문화적 권력이 작동하는 욕망이 아니라, 생명체가 지닌 원초적인 욕정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욕망은 문화 권력적 코드를 통해 작동하면서 허위적인 만족과 충족으로 나가지만, 욕정은 찰나적 절정과 영원한 갈망을 무한 반복한다. 욕망은 관념 속에서 운동하지만, 욕정은 육체 속에서 꿈틀댄다. < Her >의 그녀는 욕정 덩어리이다. 상대남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굳이 팜므 파탈이라는 성적 구분을 집어넣는 건 난센스다. 욕정을 전면에 내세움에도 불구하고 < Her >는 외설스럽지 않다. 강렬한 색상 설정, 육감적인 곡선, 관능적인 움직임은 우아하기 그지없다. ‘쎈 언니’처럼 보이지만 욕을 달고 살거나 난폭하게 폭주하지 않는다. 쎈 척하기 위해 상스럽거나 천박하지 않다 (올해는 한국 단편 애니메이션도 욕배틀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자기애라는 미명 아래, 관념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지도 않는다 (이제껏 자기 학대에 가까운 자기 연민을 내세운 작품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미지는 종종 예기치 않게 대담히 표현되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태연하다. 서두르지도 망설이지도 않고, 그저 묵묵하게 그리고 묵직하게 펼쳐진다. 강렬하면서도 정제된 욕정, 농염하지만 우아한 관능, < Her >가 선보이는 미덕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욕정에 대해 다루는 태도, 욕정에 대해 갖는 정서가 이 작품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뜨거운 기운을 차갑게 다루는 방식에서 < Her >는 그 진가를 드러낸다. 옳고 그름의 가치에서 벗어나고, 낭만적 휴머니즘 따위는 가볍게 던져버린다. 어차피 욕정은 영구히 충족될 수 없다. 그렇다고 초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순간을 맞이하고, 그 순간만큼은 자신을 내던져야 하고, 언제가 될지 모를 그다음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빨랫줄에 걸려 축 늘어진 사내의 껍데기를 바라보며, 여인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불완전한 충족이 한없이 되풀이될 것이라는 점, 결코 사내가 (사랑을 통해)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점, 그럼에도 자신은 상대의 죄 (혹은 여인의 몫까지 짊어진 대리자의 고난)를 씻어내야 한다는 점 (어쩌면 세탁 통의 회전/순환은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벗어날 수 없는 욕정의 굴레이기도 하다) 등등. 이토록 복잡미묘한 심정을 담고 있는 여인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하다. 이 표정과 태도와 심리와 정서는 이제껏 한국 애니메이션이 요구한 관객의 정서적 연령대에 도전한다. 순수함이라는 서정성이 아니라 살아본 만큼의 성숙함을 관객에게서 불러내려 한다. 그리고 이 작품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선정하고, 선별하고, 선택하거나 배제하려는 자 (이 리뷰를 쓰는 나 자신을 포함한 평가자들)가 지닌 비평의 용어와 평가의 어휘에 대해서도 도전한다. 우리는 < Her >, 그녀를 제대로 품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