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 방해가 되는 않는 선
- 감독
- 신지훈
- 제작년도
- 2016
- 출연
- 박재현, 서유주, 김봉수, 최지영, 정민성
지난 2월 29일 88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으로 호명된 신예 브리 라슨. 이전까지는 레이더망에 포착된 적이 없는 배우다. 그간 배우로 또 가수로 20여 년간 연예계 경력을 쌓아 왔다고 하지만, 그녀를 수상작인 < 룸 >과 연결해 줄 단서는 단 하나였다. 바로 <룸>을 연출한 레니 에이버러햄슨 감독이 인터뷰마다 언급한, 그녀의 전작 < 숏 텀 12 >(2013) 였다. 에이버러햄슨 감독은 이 영화를 보고, 17살에 납치되어 무려 7년간 창고에 갇힌 채 성폭행당하고 출산을 하고, 그 아이를 키우며 지속적으로 학대를 당한 <룸>의 주인공 조이의 인생 역정을 연기할 배우로 브리 라슨을 점찍었다고 했다. 브리 라슨의 이전 필모그래피와 별다른 접점이 없는 진지한 드라마. 이 영화가 궁금해졌다. 작년 국내에서 개봉했지만 상영관이 거의 없었고, IPTV로 거의 직행하다시피 했으니 이 시점에서 다시 끄집어낼 이유가 충분히 더해졌다. < 숏 텀 12 >의 제목인 ‘short term 12’는 청소년 보호소를 뜻한다. 부모로부터 성적 학대나 폭력을 당한 아이들이 임시로 거처하는 집단 보호소다. ‘단기(short term)’라는 말을 아예 명명하고 있는 만큼, 이곳에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장기적인 계획 같은 건 없다. 그저 단순히, 보호 기간 만큼은 별 탈 없이 지내다 나가면, 기관으로서 해야 할 임무는 끝나는 셈이다. 문제는 아이들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상처를 입은 어린 영혼들은 날이 서 있고 제멋대로이며, 어른에게 적대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아이들과 직접 매일매일 대면하는 이들이 바로 숏텀 12의 관리직원이며, 그레이스(브리 라슨)는 그 직원들 중 한 명이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효과를 자아내기 위해, 영화는 시종일관 흔들리는 핸드헬드 화면을 고수한다. 시시때때로 탈출을 시도하는 소년 새미. 18살이 되어 곧 시설을 떠나야 하는 마커스 같은 보호소 아이들은 이 ‘건조한’ 화면 속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내던져진다. 그레이스 역시 소란을 일으킨 아이에게 “넌 한 단계 강등이야, 방으로 가!”라며 냉정하게 벌칙을 준다거나, 아이들 몰래 소지품 검사를 하는 감시자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부모도 상담사도 아닌’ 안전한 보호자로서 기능하던 그녀가 이 적정선의 거리 두기에 실패하는 건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해 이곳에 오게 된 15살 소녀 제이든(케이틀린 디버)과의 만남 이후다. (같은 관리직원으로 일하는) 남자친구와의 관계로 막 임신을 한 그레이스는, 과거 아버지로부터 같은 고통을 당해 아이를 낙태한 경험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그런 그레이스에게 제이든은 더 이상 보호소의 아이가 아닌, 자신처럼 아프게 성장하지 않길 바라는 보호해줘야 할 대상이 된다. 제이든(케이틀린 디버) < 숏 텀 12 >의 흥미로운 지점은, 이렇게 관리자이기에 앞서 피해자였던 한 여성이 이 부조리한 상황에 맞서면서 일종의 장르 영화로서의 구조가 확립된다는 점이다. 원장의 말처럼 관리직에게 “눈물 해석은 필요 없”으며, “성범죄자 부모를 (그들이 책임지고) 모두 고발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게 거의 자신이 겪었던 일과 유사하며 그 때문에 지금도 자신의 행복이 위협당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제 그녀는 아버지에게 다시 ‘끌려간’ 소녀를 위해 밤늦게 야구방망이를 들고 가택침입을 해서라도 보호해 줄 강인한 히로인으로 자처하기 시작한다. 요양원에 갇힌 수잔나(위노나 라이더)를 용감하게 이끌던 < 처음 만나는 자유 >(1999)의 카리스마 넘치던 리사(안젤리나 졸리)나, 더 나아가 연약한 여성 델마(지나 데이비스)를 보호해주는 < 델마와 루이스 >(1991)의 터프한 루이즈(수잔 서랜든)같은 여성들을 연상해 주게 해주는 장치다. 바로 미셸 파이퍼가 골칫거리 반항아들을 도맡고 소통하게 되는 < 위험한 아이들 >(1985) 같은 구조와 이 영화가 확연히 달라지는, 여성의 소통으로 이야기가 전환되는 지점이다. 다시 브리 라슨의 이야기를 꺼낼 시점이다. 이 아슬아슬한 지켜보기에 긴장을 더하는 건 그레이스를 연기하는 브리 라슨의 연기다. 흔들리는 카메라와 호흡을 같이 하는 아이들의 불안한 움직임과 달리, 유독 그레이스의 움직임은 고정되어 있다. 그들을 붙잡아 두려는 냉정한 시선이 익숙하다 싶었는데, < 룸 >에서 납치, 감금이라는 끔찍한 범죄의 희생자이기에 앞서, 비극을 인지하지 못하는 아이를 다그쳐 탈출을 꾀하는 엄마가 취한 그 차갑고 냉정한 그 시선이 이미 함축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쁘다는 수식어보다는, 강한 인상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마스크를 가진 그녀는 과장되게 꾸미지 않았지만, 잊기 어려운 강렬함을 내뿜으며 시종 시선을 사로잡는다. 비록 많은 관객에게 소개되지 않았던 인디영화지만 < 숏 텀 12 >를 통해 브리 라슨의 연기는 비평가들 사이에서 회자가 되었다. 데스틴 크리튼 감독이 B급 코믹물이나 하이틴물에서 고만고만한 연기로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브리 라슨을 극적으로 탈출시킨 셈이니 그 공로가 크다. < 숀 텀 12 > 장편(좌측), 단편 포스터 < 숏 텀 12 >는 원래 21분짜리 동명의 단편(2008)를 발전시켜 만든 작품이다. 데스틴 크리튼 감독이 대학원 졸업 작품으로 시나리오를 썼고, 그 작품이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고 다시 장편으로 제작됐다. 단편에 출연했던 배우 중 단 한 명의 배우(랩을 즐겨하는 마커스 역의 키스 스탠필드)만이 다시 장편에 출연한다. 다큐멘터리적인 지점과 장르적인 스토리라인이 혼재되어 결론에 감정이 좀 과하게 이입되며, 영화가 조금 어수선한 면이 없지 않지만 장점은 뚜렷한 작품이다. 특히 영화에는 감독이 단편에서 장편이 되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발전시킨 견지해 온 대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이 잘 드러난다. 숏텀 12에서는 방문을 걸어 잠글 수 없는데, 자칫 아이들이 격해져 자살을 방지하기 위한 규칙이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방문이 ‘오픈’되어 있는 것과 달리, 아이들의 마음은 굳건히 닫혀있다. 영화는 아이들이 그 닫힌 문을 조금씩 여는 작업을 지켜보는데, 그 과정의 묘사의 온도가 따뜻하다. 랩을 좋아하는 흑인 소년은 랩으로 버림받은 자신의 심리를 적절하게 표현해 내는데, 관리직원들도 그런 그의 재능을 북돋아 준다. 떨어진 형제들과 가지고 놀던 낡은 인형을 빼앗긴 아이에게 다시 그 인형을 찾아다 되돌려 주는 관리직원의 마음 씀씀이도 아이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장치다. 그림과 글쓰기에 소질이 있는 제이든은 친구가 된 상어의 요구로 발을 하나씩 떼어줘 잡아먹힌 문어의 이야기로 자신의 다친 심경을 표현해 낸다. 첫 장면, 보호소를 탈출하던 아이로 시작된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대구법처럼 또다시 탈출을 감행하는 아이와 이를 잡으려는 관리직원들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으로 마무리되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건조한 단기 청소년 보호소에 작은 희망의 기운이 느껴진 건, 나뿐만이 아닐 거다.
오래 쉬고 다시 시작한다. 9월까지 ‘영예의 시대’를 중심으로 존 포드라는 거대한 세계의 일단을 둘러보았다. 이제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존 포드 영화라는 단순한 기준으로 여정을 계속하려 한다. 첫 번째 영화는 < 태양은 밝게 빛난다 The Sun Shines Bright >(1953)이다. 여러 인터뷰에서 포드는 이 영화를 < 젊은 날의 링컨 > < 웨건 마스터 > < 도망자 > 등과 함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았다. 감독 자신이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는 영화는 가장 좋은 영화라는 뜻이 아니라, 가장 그의 개인적인 영화라는 뜻일 것이다. 스튜디오 시스템 아래서 작업했고 성공했지만 존 포드는 개인적인 영화 만들기의 시도를 멈춘 적이 없다. <태양은 밝게 빛난다>는 그 시도가 낳은 한 정점이다. 1. 1900년대 초, 미국 켄터키 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죽은 창녀를 실은 영구 마차가 막 출발했다. 느리게 움직이는 마차에는 동료 창녀들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고 마차는 마을 초입에서부터 지방판사 선거가 진행 중인 마을 회관을 지나 장례가 치러질 교회에 이를 것이다. 영구 마차의 등장은 마을 전체를 긴장하게 만든다. 죽은 창녀는 전직 남군 장성 페어필드의 아들과의 사이에 오래전 딸을 낳았고, 그 아들은 불명예스럽게 죽었으며, 레이크 박사에게 입양돼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한 딸 루시는 최근에야 자신의 출생 비화를 알게 되었다. 프리스트 판사와 몇몇 노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근엄한 페어필드 장군은 루시가 자신의 손녀임을 부인해왔다. 병든 창녀는 죽어가면서 자신의 장례식을 제대로 치러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동료 창녀들은 전날 밤 프리스트 판사를 찾아와 장례식 추도사를 부탁했다. 재선을 노리는 프리스트 판사는 이 부탁을 들어주는 순간 자신이 낙선될 것임을 알고 있다. 이미 그는 술꾼으로 알려져 있고 영향력이 막강한 부인회가 창녀들을 마을에서 쫓아내려 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대답을 미룬다. 창녀들의 영구 마차는 서서히 마을 중심부로 다가온다. 길 가에 서 있던 프리스트 판사는 말없이 장례 마차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고 부인들은 질겁하지만 몸집 큰 한 부인도 무리에서 빠져나와 판사 뒤를 따라 조용히 걷는다. 늙은 의사와 목수도, 식료품점 주인도, 이름 없는 노인들 몇몇도 그들 뒤를 따라 묵묵히 걷는다. 선거를 치르느라 떠들썩하던 마을 회관 앞에 마차가 이르자 모두 침묵에 빠진다. 그를 지켜보던 죽은 창녀의 딸 루시는 마차에 올라타 창녀들 옆에 앉고, 그녀를 사랑하는 방탕하지만 순정적인 청년 애쉬비도 그 뒤를 따른다. 우드포드 노인은 집 앞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다 무언가 결심한 듯 집으로 들어간다. 고요한 장례 행렬은 그렇게 교회 앞에 도착한다. 이 영화를 본다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발자국 소리와 장례 행렬의 느린 움직임 외에는 대사도 배경음악도 없이 7분 가까이 지속되는 이 장면은 보는 이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흔든다. 이 장면 앞에서 나는 넋을 잃고 눈앞이 흐려져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여기에 무슨 말을 보탤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 자문해볼 수밖에 없다. 무엇이 이 장면을 그토록 감동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장례식 행렬 2. 우선 이 장면에서 장례행렬에 가담하는 인물들의 결단 자체가 주는 감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선택을 윤리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왜 도덕이 아니라 윤리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선 얼마간의 우회가 필요할 것 같다. 여기서 도덕은 공동선의 규범과 실천의 영역을 지칭하는 단어로 한정해 사용한다. 도덕은 주체의 외부에서 주체 쪽으로 요구되는 준칙이다. 반면 윤리는 공동선이라는 공리적 판단이나 효용성과는 무관하게 주체의 내부에서 생성되는 자기 명령을 지칭한다. 존 포드가 그 장르의 대부처럼 여겨지는 서부극은 가장 도덕적인 장르로 간주되어 왔다. 공동체의 악과 그에 맞선 도덕적 영웅인 서부사나이의 대결 이야기.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에는 도덕적 대립 구도가 없다. 이 공동체에서 제거되어야 할 악은 특정한 실체로 등장하지 않으며, 한 에피소드의 소재인 인종주의 외에는 특정한 악덕도 지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도덕관념을 명확히 갖고 있는 주체는 부인회이며, 그들은 술과 창녀촌을 공동악이라고 생각한다. 프리스트 판사는 기묘한 존재다. 그는 판사이고 정치인이며, 전통을 중시하는 남군의 장교 출신으로 군인의 정체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판사, 정치인, 군인은 제도가 세속적 도덕의 실행을 위탁한 직업들이다. 우리는 그의 또 다른 정체성을 상정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의 이름(Priest)이 뜻하는 성직자다. 물론 그는 교회에 복무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성직자가 아니며 성직자 같은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수준 즉 종교적 수준의 선택이 요구되는 상황에 놓인다. 이 상황이 그를 다른 의미의 성직자로 간주하게 만든다. 창녀들이, 어떤 목사도 자기 앞길을 망칠 일을 하지 않을 게 뻔해, ‘친절한’ 프리스트를 찾아와 장례식 추도사를 요청했을 때, 판사, 정치인, 군인으로서의 프리스트는 이 난제에 답할 수 없다. 그의 난제가 걸려 있는 영역은 공동선의 도덕이 아니다. 도움이 필요했던 창녀는 이미 죽었고, 다른 창녀들은 조만간 추방될 것이며 프리스트는 부인회의 창녀 추방에 반대한 적이 없다. 곧 추방될 창녀들이 주재하는 장례 참여 여부라는 극히 사소한 행위는 공동선과 무관할 것이다. 그는 또한 직업적 성직자가 아니므로 교회 제도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교리 해석자가 될 수도 없다. 그러니까 그는 신의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자격이 없다. 달리 말하면 그의 행위가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보증이 그에게는 없다. 그를 성직자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가 대답 없는 신의 뜻을 어떤 보증도 없이 따른다고 간주될 때이다. 여기서 대답 없는 신의 뜻과 윤리의 자기 명령은 정확히 동격이다. 두 부류의 종교적 인간이 있을 수 있다. A는 이렇게 말한다. ‘신의 뜻이 이러하다. 그러므로 나는 신의 그러한 뜻을 따른다.’ B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신의 뜻을 모른다... 나는 신의 뜻을 따른다.’ 프리스트는 후자에 속한다. 윤리의 자기 명령도 같은 방식으로 이뤄진다. ‘나는 이것을 해야하는 다른 이유를 모른다... 다만 나는 그것을 해야하므로 한다.’ 프리스트의 선택을 윤리적이라고 말하는 건 이런 의미에서다. 행위의 동기를 어디에도 귀속시킬 수 없을 때, B의 경우라면 그 동기를 귀속시켜야 할 신의 뜻이 텅 비어있을 때, 그것은 온전히 자기 명령이 되며 우리는 그 행위를 윤리적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런 정의를 우리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교통사고의 위험에 처한 아이를 구한 사람에게 어떻게 자신도 크게 다칠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는 지금 질문에 정확히 답하고 있는 게 아니다. ‘왜 그랬느냐’는 질문에 ‘그래야 하니까 그랬다’라는 건 대답이 아니다. 자기 명령으로서의 윤리는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없다. 동기, 이유, 원인의 자리가 비어있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의 동기를 묻는 질문에 조리 있게 대답하는 사람보다 대답을 찾지 못해 난처해 하는 사람이 더 윤리적이라고 느껴진다면, 우리가 윤리의 중핵이 온전히 자기 명령에 있다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고전적 서부극이 도덕적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서사의 차원이고, 서부사나이는 오히려 윤리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의 준칙은 ‘남자는 할 일을 한다’는 것이고 일이 끝나면 말없이 뒤돌아서 떠나기 때문이다. 그의 과묵함은 단순한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그의 결단이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라는 윤리적 차원에 있음을 방증하는 표지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라는 이 단순하고 흔해빠진 표현이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법이다. “정언명법은 더 이상의 어떤 목적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서의 행위를 드러내는 것이다.”(「실천이성비판」) 가언명법은 반대로 “다른 어떤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행위를 드러내는 것이다. 칸트는 윤리의 자기명령이라는 차원을 가혹할 만큼 엄격하게 정식화한다. 윤리(도덕적 가치)는 정언명법에 따라 “오직 의무로부터” 행위할 경우에만 인정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직’은 공리적 판단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정념을, 심지어 우리가 보통 선하다고 간주하는 감정인 연민과 동정심마저 배제한다. 만일 아이를 구한 의로운 사람이 ‘남을 돕는 것은 기쁜 일이므로’, 혹은 ‘아이가 불쌍해서’라고 대답한다 해도 칸트는 그 행위에 ‘도덕적 가치’가 없거나 부족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에게 윤리는 ‘순수 형식’이다. 칸트의 정언명법으로서의 윤리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물론 많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정언명법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은 실은 사회적 규범이 내면화된 초자아가 아닌가(프로이트). 순수 형식이 어떻게 행위를 촉발하는 동기라는 질료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결국 욕망 혹은 충동의 문제가 아닌가(라캉). 칸트의 의무는 결국 선험적으로 식별될 수 있는 악을 전제한 뒤 그것의 반대편에 자리잡은 자명한 규범들의 체계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바디우). 이런 질문들에 답하려는 치열한 사유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 사유가 진리의 윤리학으로 귀결되지 않기란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 진리(혹은 실재, 사건)에의 충실성이 윤리라면, 윤리라는 영역이 따로 설정될 필요가 있을까. 달리 말해, 진리가 총체적이거나 규범적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사건적(혹은 위반적)이며 열린 지평으로 개시되는 것이라면 윤리의 내용은 이미 진리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닐까. 또한 정신분석학자들의 논변 혹은 진리의 윤리학이 흔히 인용하는, 자기 눈을 찌르는 오이디푸스의 사례에서처럼 상징계의 의미가 완전히 소진되고 실재와의 대면이라는 무시무시한 순간에 이르러서야 윤리가 드러난다면, 일상적 영위에서 윤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상정되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런 반문은 이론적인 수준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에서 프리스트의 행위를 진리-사건-실재의 영역에 위치 짓지 않고도 윤리적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방금 구운 빵을 대접하는 빵집 주인의 행위는 진리나 미의 추구와 무관한 지극히 단순한 선의에서 비롯된 윤리적 행위가 아닌가. 혹은 TV 드라마 <유나의 거리>에서 곧 요양원으로 보내져야 하는 치매 노인을 콜라텍으로 데리고 가서 마지막 춤을 추게 도와주는 창만의 행위를 윤리적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우리를 종종 감동케 하는 건 그 순간의 충만함 외에는 어떤 효용도 어떤 깊이도 없는, 카버 소설의 제목대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런 단순한 선의의 행위가 아닌가. 우리는 프리스트와 빵집 주인과 창만에게 행위의 동기를 듣지 못했고, 그들의 행위를 자기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물론 말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정념적 동기가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일 것이다. 그 행위가 그것을 목격하는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도 일정한 기쁨과 만족감을 준다는 사실을 그 텍스트들은 감추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칸트의 정언명법에 동의한다 해도, 일체의 정념 배제라는 차원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어려우며, 윤리와 정념의 관계가 매우 엄격한 사유를 요구하는 까다로운 의제임을 뜻한다.(이것은 라캉의 욕망이론으로 칸트의 윤리를 재해석하려는 「실재의 윤리」(알렌카 주판치치)의 중심 의제이기도 하다.) 사소한 선의의 행위를 윤리와 연관 짓는 것은 사실상 엄격한 사유로부터 퇴각하는 것이다. 윤리에서 선의의 정념을 배제하지 않으며 진리-사건-질재의 영역까지 밀고 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이 지향한다고 가정되는 진, 선, 미의 영역을 어느 정도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선을 ‘(진리의) 깊이도 (공동선의) 효용도 없는 자기충족인 선의’라는 선험적인 명제로 받아들여 이것을 윤리의 내용 가운데 하나로 삼는 절충적인 사고이다. 이것은 사실상 진리의 윤리학과 (공동선이 아닌) 선의 윤리학을 동시에 긍정하는 엄격하지 않은 지적 태도다. 그것이 자기명령인 한 주체의 수만큼 많은 윤리학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며, 윤리가 일반 명제의 주어가 아니라 개별 진술의 술어 자리에 놓여야 함을 뜻한다. 사소한 선의의 행위를 윤리적이라고 말하기 위해, 이런 퇴각과 절충이 불가피해졌다. 절충주의를 돌파할 수 있는 또 다른 사유의 길을 탐색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과 내 능력 밖에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의심은 지워지지 않는다. 혹시 사소한 선의에 대한 이런 열중이 일종의 도피주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진리의 개시, 해방의 정치에 대한 체념과 반지성적 염세주의가 ‘투쟁의 형식’으로서의 윤리가 아니라 사소한 선의에 몰두하게 만든 건 아닐까. 혹시 절충이라고 말하면서 내심으로는 진리의 윤리학을 사실상 포기하고 이젠 사소한 선의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의 서부사나이는 더 이상 ‘남자는 할 일을 한다’가 아니라 이제 ‘남자는 (사소한 선의의 행위 외에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요컨대, 21세기의 관객인 내가 프리스트의 선택에 감동받는 건 이런 도피의 차원과 연관되어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이 질문을 짊어지고 있을 뿐 그것에 정확히 답할 수 없다. 다만 이 질문이 존 포드 서부극의 근본적 질문 가운데 하나라는 점만 상기하고 싶다. 단지 ‘서부’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만 빼면 여타 서부극과 무관해 보이는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존 포드의 서부극으로 부를 수 있다면 그 질문 때문이다. 그 질문을 말하기 위해 하나의 도식을 제시하고 싶다. 3. 고전적 서부극에서 남자는 할 일을 한다. 그 일은 공동악을 제거하는 것 즉 공동선으로서의 도덕적 행위이다. 도덕적으로 자명한 일을 서부 사나이는 윤리적으로 행한다. 하지만 여기서 도덕과 윤리의 일치는 사후적인 것일 뿐 선험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전적으로 임의적이고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것이다. 소설 「칼의 노래」에서 김훈이 서술하는 이순신의 태도도 이것이다. 이순신을 움직이는 건 왕에 대한 충심도 애국심도 아니다. 다만 그가 ‘해야할 일’이 충과 애국에 결과적으로 부합했을 뿐이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적의 적’이라는 이미 주어진 자리였을 뿐이다. 그는 이렇게 독백한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 내 무와 충이 소멸해주기를 바랐다.” 도덕과 윤리의 동반은 임의적이고 불안정하다. 존 포드의 서부극은 그 임의성과 불안정성을 노출한다. 포드 서부극에서도 남자는 할 일을 한다. 그런데 그 일은 ‘우연히’ 공동선이다. < 역마차 >의 링고 키드는 죽은 형제의 복수를 위해 플러머 형제를 처단한다. 그런데 마침 그들은 공동체의 악이었다. < 수색자 >의 이산 에드워즈는 형의 가족의 복수와 납치된 조카 데비의 구출을 위해 코만치 일당을 추격한다. 그런데 마침 코만치 일당은 공동체의 위협이었다. 링고와 이산은 공동체에 근본적으로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다. 링고는 탈옥수이자 범법자로서 결국 공동체를 떠나며, 이산은 자신의 복수 시도가 공동체에 더 큰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는 마을 사람들의 경고를 무시한다. < 황야의 결투 >에서 와이어트 업은 자신의 소 떼가 도둑맞지 않았다면 툼스톤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포드 서부극에서 도덕과 윤리는 위태롭게 연대하거나 간혹 대립한다. 어느 경우에도 공동선의 도덕은 자명한 것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영웅의 사적 복수와 공동선의 사후적 일치의 서사 조작술은 오늘의 대중영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동선을 사적 복수라는 정념으로 보충하는 데 그친다. 공동선의 도덕은 질문되지 않은 채 다만 사적 복수라는 공동선 외부의 동기로부터 정념의 에너지를 공급받는 것이다. < 택시 드라이버 >(마틴 스콜세지, 1976)는 이 임의적 일치의 가장 냉소적 패러디 가운데 하나이며, 미국 TV드라마 < 덱스터 >는 가장 영리한 패러디 가운데 하나이다. < 데쓰 프루프 >(쿠엔틴 타란티노, 2007)는 임의적 일치 여부를 놓고 벌이는 교활한 게임이다. 하지만 많은 대중영화의 영웅서사에서 그 일치의 임의성은 감춰진다.)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의 공동체에는 공동악이 등장하지 않으며 복수 서사도 작동하지 않는다. 남군 문화와 북군 문화, 백인과 흑인, 부인과 창녀의 차이가 갖가지 갈등을 빚어내지만, 공동체 전체의 생존이 걸려있던 다른 서부극에 비하면 이런 갈등들은 사소한 것이다. 이 사소한 갈등들을 정돈할 수 있는 공동선의 도덕적 규범은 불투명하다. 창녀들의 장례식에 참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갈등들 중에서도 가장 사소한 것이다(예컨대 창녀들의 생존권이 걸려 있는 창녀 추방 여부보다 훨씬 사소하다). 가장 사소한 의제에 프리스트 판사의 명예와 사회적 지위 전부가 걸려 있다. 포드는 여기서 도덕과 윤리의 불안정한 관계로부터 오직 윤리만이 문제 되는 상황으로 이행한다. 존 포드의 서부극은 도덕의 서부극이 아니라 윤리의 서부극이다. < 역마차 >의 주정뱅이 의사 닥 분은 “내가 누구라고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겠어”라고 중얼거리는데, 포드의 영웅들은 대개 그렇게 생각하는 듯,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는다.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서부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서부’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의 불안정한 동반에서 오직 윤리만이 문제되는 상황으로의 이행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포드 서부극의 윤리의식이 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프리스트 판사는 공동선으로 보충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는 윤리의 실행자라는 점에서 포스트 서부사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리스트가 사는 세상은 이런 것이다. 적이 사라지거나 비가시화하면 적의 적이라는 나의 자리도 확정되지 않는다. 세상은 여전히 나쁘지만 희생양(강간범의 누명을 쓴 흑인 소년)을 가상의 적으로 삼아 분노를 해소하려는 것은 집단적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일상의 진부함과 그 진부함을 버텨내는 기교만 남아 있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지 않으면 심장박동이 회복되지 않으며 적의 적으로 싸웠던 시절의 향수에 젖는 것 외엔 낚시와 춤과 소란, 로맨스의 대리만족에 몰두한다. 이 모든 건 프리스트의 증상이다. 그러다 죽은 한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 가장 사소한 요청에 응하기 위해선 목숨을 제외한 자신의 모든 걸 걸어야 한다. 그 사소한 행위야말로 이 늙은 서부사나이에게 남겨진 마지막 윤리이다. 그의 선택이 감동적이라면 그 감동은 승리의 쾌감이라기보다는 이 사소성에 새겨진 거대한 퇴각의 흔적이 불러일으키는 운명적 비애감에 가깝다. 마지막 장면 4. 상황과 선택이라는 서사적 요소만으로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말하는 것은 충분치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 아름다움은 포드의 다른 걸작들이 그러하듯 질서와 소란, 심판과 축제, 이성과 도취, 비극과 유머의 종잡을 수 없는 배열이 빚어내는 천의무봉한 합주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례행렬 장면은 다른 점에서 특별한 것 같다. 프리스트는 말없이 걷기 시작한다. 그는 이 작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자였고 권력과 법의 인간이었지만 이제 권력도 법도 없이 그냥 걷는다. 작고 늙은 그가 걷는 형상은 마을의 모든 사람에게 내려다보인다. 카메라는 접사도 앙각도 없이 대개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으로 이 왜소한 노인의 걸음을 보여준다. 그는 행진 장면의 어느 쇼트에서도 프레임을 물리적으로 장악하는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사소한 피사체로 아니 그저 피사체들의 하나로 느리고 조용히 움직인다. 행렬을 따라 걷는다는 이 사소한 동작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프리스트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걷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기에 걷는다. 장례행렬은 마을의 큰 길을 따라 창녀촌이라는 가장 비천한 곳에서 출발해 마을 사람들의 생활공간 그리고 정치와 사교의 공간인 마을 회관을 거쳐 교회라는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세속적 삶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횡단 운동이다. 존 포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말이 달리는 모습과 커플이 왈츠를 추는 모습”이라고 말했고, 실제로 그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찍은 사람이다. 그가 말하진 않았지만 포드가 좋아한 또 다른 모습은 행진이다. 한 감독의 영화에서 그처럼 많은 행진 장면이 등장하는 다른 사례를 기억해내기 힘들다. 행진이 일상인 전쟁영화나 유사 전쟁영화들을 제외해도 포드 영화에서 행진은 때로 승리의 자축연으로(< 저지 프리스트 >), 때로 죽음 같은 공포의 형상으로(<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 때로 그 자체가 거대한 축제로(< 조용한 사나이 >), 때로는 삶 자체의 율동으로(< 도노반의 산호초 >) 빈번하게 등장한다. 행진이 시작되면 마치 행진 스스로 저 자신의 생동에 도취되어 서사를 잊어버린 듯 하염없이 지속된다. 존 포드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도 이런 순간이다. 하지만 어느 것도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의 행진과 같지 않다. 이 행진은 창녀촌에서 교회로의 이동이라고 해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혹은 세속에서 숭고로, 혹은 죄에서 대속으로의 은유적 이행이 아니다. 오히려 그 모든 차이를 행진의 느리지만 강력한 운동성으로 일거에 무화시키는 움직임이다. 오직 하나의 운동이 존재한다. 이 운동이 시작되면 어떤 다른 방향의 움직임도 상상될 수 없다. 장례 행렬이 출발하고 프리스트가 그 뒤를 따라 걷는 순간 누구도 이 움직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즉각 알아차릴 수 있다. 조용하고 느린 걸음에 한 노인의 생애 전체 어쩌면 그보다 더 거대한 것이 걸려있어 어떤 힘이 그를 멈춰 세우려는 순간, 그가 폭파되든 세상이 폭파되든 둘 중 하나다. 그 운동의 힘이 서사 안에서 무엇을 이루었는가, 라고 이제 물을 수 없다. 이 기적 같은 운동은 더 이상 서사적 탐문의 대상이 아니며, 오직 그것에의 감화를 요청한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행진에 이어진 장례와 선거가 이 영화의 결말이다. 행진 장면의 기적과도 같은 힘을 생각하면 결말은 오히려 느슨한 후일담처럼 느껴진다. 프리스트가 마지막으로 투표하고 단 한 표 차이로 승리한다는 만화 같은 설정은 차라리 유머에 가깝다. 잊혀지지 않는 건 마지막 쇼트다. 선거 승리를 축하하는 무리들이 집 앞을 지나갈 때 프리스트는 물끄러미 지켜보다 돌아서 집 안으로 들어간다. 그의 뒷모습은 어둠에 잠겨들고 문이 닫힌다. 사건 전개와는 무관하게 장례 행진의 운동은 바로 이 쇼트로 맺어진다.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며, 그는 이제 어둠 속에 머물 것이다. 세속적 승리와 은유적 죽음 사이. 무슨 차이가 있으랴. 대체될 수 있는 사건과 결말은 관심을 둘만큼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좀 전에 대체될 수 없는 절대적인 영화적 순간을 이미 경험해버렸다.(계속)
성룡의 < 취권 >(1978)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 정무문 >(1972)으로 대표되는 이소룡 영화의 비장미는 이른바 ‘코믹 쿵푸’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 변화의 물결은 유하 감독의 < 말죽거리 잔혹사 >(2004)의 마지막 장면에 잘 드러난다. ‘아뵤~’ 하며 쌍절곤을 휘두르던 아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비틀비틀 취객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 이후 성룡은 < 사형도수 >(1978)까지 연달아 성공시키며 이른바 ‘소자’(小子) 장르를 굳건히 안착시켰다. 말썽만 피우던 철부지 아들이 가문의 복수를 위해 마음을 고쳐먹고 결국 승리하고야 만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이소룡의 <정무문>이 그러했던 것처럼 성룡의 <취권>도 무수히 많은 아류작들을 양산했다. 성룡 역시 <취권>을 스스로 패러디하여, 웃음보가 터져서 깔깔대며 상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는 결정타를 날리는 소권(笑拳)을 소재로 한 < 소권괴초 >(1979)를 만들 정도였다. < 복권 >, < 원권 >, < 소권 > 이소룡 사후 본고장인 홍콩만큼이나 수많은 ‘짝퉁 이소룡’이 등장했고, 심지어 홍콩으로 수출까지 했던 ‘세계 2위의 무술영화 생산 국가’ 한국도 그 아류의 대열에서 빠질 수 없었다. 애무와 체위를 권법에 응용하여(하지만 관객 정서와 검열문제 등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진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던) 사랑을 해야 잘 싸울 수 있는 이형표 감독의 < 애권 >(1980)을 시작으로 가공할 배치기를 선보인 김정용 감독의 < 복권 >(1980)과 원숭이의 동작을 응용한 < 원권 >(1980), 성룡의 ‘소권’보다 더욱 강력하게 상대를 웃겨 버리는 이혁수 감독의 < 소권 >(1980), ‘근육질의 짝퉁 이소룡’으로 명성을 날린 거룡과 함께 한 김시현 감독의 < 매권 >(1980)과 < 뇌권 >(1983), 영상자료원에 시나리오만 남아 있고 일체의 정보가 없는 남기남 감독의 <희권>도 있었다. 이미 제목들만 나열해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당시에는 무슨 아무개 ‘권’만 붙이면 어지간히 흥행이 되던 시절이었기에 그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래서 당시 「경향신문」은 “국산영화 중 가장 문제가 많은 것은 홍콩무술영화 아류와 저질유행어에서 따온 것들로 예술적 감각이나 함축성이 전혀 없다”며 “해괴하고 엉뚱한 영화제목들이 늘어만 가고 있다. 얼토당토않은 조어들이 판을 치면서 언어순화의 사회적 차원은 물론 시민들의 의식구조에도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이런 무질서한 풍토와 제살 깎아먹기 경쟁을 준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 신애권 >, < 소애권 >, < 요사권 > 졸지에 시민들의 의식구조에 악영향을 끼치는 대표 감독이 돼버렸지만, 무려 서울대 영문학과 출신의 이형표 는 < 서울의 지붕 밑 >(1961) 등을 통해 소시민의 애잔한 삶과 일상을 정감 넘치게 그려온 감독이었다. 어쨌건 그는 당시 < 애권 >의 속편인 < 신애권 >(1982), < 여애권 >(1982), < 소애권 >(1983)을 차례로 만들며 그 흐름을 주도했다. 심지어 <여애권>의 서영란과 함께 일종의 스핀오프 격인 < 요사권 >(1980)을 만들기도 했다. 역시 다른 <애권>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타락한 무도인들로 들끓던 만주를 배경으로 한 <요사권>의 포스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분홍색 하트 ♥ 그래픽과 함께) 어느 날 갑자기 무림에 나타난 홍일점! 희한한 내용, 요상한 재주, 유별난 스타일의 액션도원경!” 그러니까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남들이 보기에 희한하고 요상하게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우리는 즐긴다!’는 그들만의 B급 공감대가 있었던 것이다. '흙바람 몰아치는 만주 비슷한 곳' 신나는 도입부 음악과 함께 < 애권 >이 시작하면 “1940년, 흙바람 몰아치는 만주 비슷한 곳”이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국경지대의 성문이 등장한다. 만병통치약을 파는 약장수가 등장해 사기를 치고, 주인공 황석불( 강용석 )은 그들을 꼬나본다. 이때부터 뻔한 컨벤션과 장난스런 키치의 미학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분명 남한산성 어디일 텐데 사람들이 버젓이 중국옷을 입고 국경을 넘나든다. 주변에서 꿀차와 번데기를 파는 아줌마를 즉석 캐스팅했는지, 뽀글뽀글 싸구려 파마머리를 한 아줌마가 주인공의 활약상을 지켜보며 “어머! 어머!” 하는 과도한 리액션까지 선보인다. 그때 ‘이 약을 먹으면 칼도 배를 뚫지 못 한다’는 얘기에 석불이 “내가 한 번 해 보겠소”라는 얘기와 함께 약장수의 배를 칼로 찌른다. 하지만 약장수가 배에 두툼한 책을 숨겨놓은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예전에 < 황야의 무법자 >라는 영화를 봤는데 배에 솥뚜껑이 있더라구!”라며 느닷없이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 영화의 실제 장면을 느닷없이 언급하는 황당함이란! 바로 ‘스파게티 웨스턴’의 장대한 시작을 알렸던 셀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1964)에서 솥뚜껑을 방패삼아 총을 맞아도 아무렇지 않았던 장면이, 시대와 국경을 넘어 한국의 ‘김치 무협’ 영화에서 패러디됐다고나 할까. 바로 석불은 죽은 아버지의 원수 옥달평을 찾아 만주로 온 것이다. 옥달평은 돈벌이가 목적인 살인 무술대회를 열어 무림을 어지럽히는 장본인이다. 강직한 일도관의 청담사부( 이강조 )는 옥사부에게 ‘무도는 마음부터 닦는 것’이라 충고하지만, 청담사부의 눈 밑에 짙게 드리워진 다크 서클은 그가 곧 살해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렇게 무림은 옥사부의 세상이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찾아간 스승 화삼유( 배수천 )는 술주정뱅이 폐인이 돼 있다. 그래도 석불은 화삼유의 딸 쇼냥( 윤상미 )이 마음에 들어 그들과 함께 지내게 된다. 한편, 옥달평은 예정대로 무술대회를 개최하려 하고 전국 각지에서 (누가 봐도 용인 민속촌으로 보이는) 흑룡여관으로 고수들이 몰려든다. 그중에는 ‘흐르는 별’이라 불리는 유성(遊星)권의 달인도 있다. 헤어스타일부터 동작까지 ‘짝퉁 성룡’이라 할 수 있는 석불은 아버지의 원수를 찾는 와중에도 ‘작업’을 포기하지 않는다. 늘 책을 가까이 하는 쇼냥의 마음을 얻기 위해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 운운하며 “저도 시를 참 좋아합니다”라고 접근한다. 쇼냥이 들고 있는 책을 향해 ‘마음의 양식’이 아닌 “책은 양식의 마음이죠”라는 썰렁한 대사까지 서슴지 않는다. 나중에 적들과 싸울 때는, 적의 무기를 피해 조롱하면서 “삐빠빠룰라~ 멀리 기적이 우네~”라며 이은하의 ‘밤차’를 부르기도 한다. 만주를 배경으로 아무리 포스트모던하게 시공간을 뒤섞었다지만 잠시도 ‘자투리 개그’를 쉬지 않는다. 그저 보다 보면 자연스레 적응되는 경지까지 가게 되니, 그냥 마음 편히 당대 오락영화의 능청스런 풍경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석불이가 놈에게 잡혔소. 내일 구하러 가야겠소. 사랑해 주시오.' 좀 다른 얘기지만, 남기남 감독의 < 영구와 땡칠이 >(1989)의 도입부를 기억하는가. 닫힌 문을 배경으로 성우가 “어린이 여러분, 우리 함께 영구를 불러보기로 해요. 하나, 둘, 셋! 영구야~ 목소리가 너무 작아요. 자, 다시 한 번 불러볼까요? 하나, 둘, 셋!”이라 말하고 어린 관객들이 일제히 “영구야~”하고 부르면 심형래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러니까 관객과의 인터랙티브를 시도하는 그런 의도적인 조악함이 당시에는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굳이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들먹이고 싶진 않지만, 원래 그것은 원본이라 할 수 있는 < 취권 >에서도 빠지지 않는 설정이었다. <취권>에서 성룡의 스승인 소화자(원소전)도 마지막 대결에 느닷없이 “영화에서 이런 중요한 장면에 내가 빠질 수 없지!”라고 외치며 등장했으니까. 게다가 술병을 달고 사는 화삼유는 누가 봐도 소화자를 패러디한 것 아닌가. 1~6번 순서로 편집되어있는 애권 의 다양한 권법들 하지만 알고 보니 화삼유는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폐인 행세를 한 것이었다. 석불이 악당들에게 잡혀 가자 “석불이를 구하러 가야겠소. 어서 나를 사랑해 주시오”라며 대놓고 화류계의 여자를 만나 애권을 점검하기 시작한다. ‘애무난무권’이니 ‘일심충천권’이니 ‘양인상상권’이니 하는 이름을 갖다 붙이긴 했지만, 관객이 보기에 그저 똑같이 여자 몸을 탐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아무튼 구조된 석불도 본격적으로 쇼냥과 함께 애권을 익히고, 결국 흐르는 별과 최후 대결을 벌이게 된다. 갑자기 싸우다 말고 포옹과 키스를 하려 하니 흐르는 별은 당연히 징그러워 질색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석불은 마치 적과 함께 탱고를 추듯 “이것이 바로 만주의 마지막 밤의 탱고다!”라며 애권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정체불명의 애권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흐르는 별의 마지막 대사가 압권이다. “사랑이 날 죽이는 구나~” 그렇게 먹구름이 낀 무림은 홍콩 사람들도 듣도 보도 못한 애권으로 인해 평화를 찾게 된다. 애권이 독특한 것은 그 애권의 최대 적이 체력의 감퇴도 아니요, 의지의 부족도 아닌 바로 주인공의 권태기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 신애권 >에서는 급기야 장인인 화삼유가 복수를 위해 사위의 외도를 용인하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이제 더 이상 아내를 보면서는 애정이 생기지 않으니까 말이다. 말하자면 예나 지금이나 ‘막장 드라마’는 장르를 초월하여 존재했던 것 같다. 정말이지 기발하다고 하기에는 뭔가 어설프고 조악한, 대체 이런 현기증 나는 권법이 어디 또 있었던가. / 글: 주성철 (씨네21 기자) 강용석 배수천 이강조 윤상미 김정란 감독 이형표 각본 이일목 촬영 양영길 개봉극장 아세아극장 개봉일 1980-04-24 관람인원 61,286(서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