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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manii]BELKIN Dash Backpack 벨킨 대시 백팩 외형 및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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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인져러스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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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있는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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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맨(RENAISSANCE MAN)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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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aissance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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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aissance Man-Hans Zi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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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영화 심의신청서(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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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루리스 영화의 복제허가 및 심의필증 추가발급에 관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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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영화심의확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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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로 푸는 한국영화사 미스터리] 어두운 극장에 <산배암>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취향에 맞는 영화라는 것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이미 정전으로 기록된 작품 목록의 외부를 끊임없이 훑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지영 감독의 이력에서 데뷔작인 <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 >(1982)나 대표작으로 꼽히는 < 남부군 >(1990), < 하얀전쟁 >(1992)을 아는 사람들은 많아도, < 산배암 >(1988)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당대의 영화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다음과 같이 보았다. “이 작품 <산배암>의 광고 문안이나 포스터를 보면, 바로 그런 류의 한탕 영화라는 짐작을 하게끔 만든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그러한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오히려 ‘벗기기’와 ‘지방 장사’가 기피하는 사회현실의 반영과 약간의 정치의식마저 담고 있기 때문 이다. 필자는 이 작품이 중견 정지영 감독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요즘 나온 영화 중 장선우 감독의 < 성공시대 >와 더불어 사회성 영화로 퍽 드물게 성공한 예에 속한다고 보았다.” - 정재형, “[영화평] 한국영화가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 정지영 감독의 <산배암>”, 《스크린》 1988년 10월호(통권56호), 284쪽. “4년여의 긴 공백 끝에 만든 < 거리의 악사 >는 검열로 인해 부분적인 사회묘사마저 생략됨으로써 평범한 멜로드라마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으며 화제작이었던 < 위기의 여자 >는 과다한 나눠찍기에 의한 편집이 거슬리는 1930년대 할리우드의 여성관객용 멜로드라마의 재판이었다. 1988년에 만들어진 두 편의 영화 < 여자가 숨는 숲 >과 <산배암>은 정지영 감독의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최악의 작품이었다. 정신분석학적 접근과 계급의식이 배제된 이 두 편의 여성 심리를 다룬 영화들은 충무로의 장르영화에 불과하다 .” - 전양준, “젊은 평론가가 본 한국 영화감독 10인 (5) 정지영”, 《한겨레》, 1990년 7월 1일자 11면 기사. 음? 어떻게 이렇게 상반된 평가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위의 글이 <산배암>의 사회현실 반영과 정치의식(이 글의 뒤에서 이를 계급의식이라고 보충한다)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반면, 아래의 글은 ‘계급의식이 배제된’ 영화로, 심지어 정지영 감독 작품 중 최악의 영화로 평가한다. 당연히 하나의 영화에 대한 평가는 보는 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같은 지점에 대해 전혀 다르게 보는 경우는 흔치 않다. 도대체 <산배암>은 어떤 영화인가? 탄실이는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뱀도 잡고 벌레도 잡는 이 구역의 최상위 포식자이자 순박한 산골소녀이다. 그러나 집은 가난하고 산골에는 일자리도 마땅치 않기에 탄실이는 소개를 받아 부잣집으로 들어간다. 마을 사람들은 떠나는 탄실의 뒤에서 ‘식모살이’를 가게 되었다고 수군대고, 일을 소개해 준 사람은 펄쩍 뛰며 ‘건강이 안 좋은 부잣집 사모님을 돌봐주는 일’이라고 정정해준다. 실제로 탄실이가 도착한 부잣집은 이미 나이 든 식모가 일을 봐주고 있으며, 탄실에게는 사모님의 휠체어를 밀어주거나, 목욕을 시켜주는 정도의 일이 주어진다. 오히려 사모님은 자신의 비싼 옷을 탄실에게 주며 앞으로 자신의 것은 모두 탄실의 것이기도 하다는 다정한(?) 말도 해준다. 하지만 이들의 평화로운 나날을 깨뜨리는 인물이 나타나니 이 집의 주인인 사장님이다. 사장님은 수상한 여자로부터 반복적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피하고, 사모님은 자꾸만 사장님과 탄실 둘만 방에 남을 기회를 만들려고 한다. 그렇다. 탄실이는 사실 불구가 된 사모님을 대신하여 씨받이가 되기 위해 이 집에 온 것이다. 이 영화가 개봉하기 1년 전에 < 씨받이 >(임권택, 1986)가 국내 각종 영화상을 휩쓸었을 뿐만 아니라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강수연 이 여우주연상을 탄 이후라 이러한 소재가 그다지 낯설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아, 또 뻔한 이야기겠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묘미는 이 다음에 있다. 탄실은 결국 아기를 빼앗기고 집에서 쫓겨난다. 이런 상황에서 탄실은 무엇을 원할까? 복수? 우리의 탄실이는 이래 봬도 산골에서 뱀도 잡고 벌레도 잡고 놀던 건강한 소녀이다. 그녀는 복수에서 더 나아가 이 집의 최상위 포식자가 되고자 하고, 그 과정이 영화 속에서 반전에 반전을 더하며 펼쳐진다. ‘산배암’이 된 탄실이는 독으로 상대를 단박에 물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시커멓게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천천히 숨통을 조이며 이 집안에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나머지는 영화를 통해 직접 확인하도록 하자. 그래도 명색이 ‘구술로 푸는 한국영화사 미스터리’가 아닌가. 구술에 대한 이야기 한 마디 하지 않은 채 끝을 낼 수는 없다. 그럼 이제 한 집안을 집어삼키려는 ‘산배암’보다 더욱 어둡고 음습하고, 찝찝한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여러분 이 영화 한 번만 봐주세요 정지영과 1988년 정지영 감독은 여러모로 1988년 한 해 동안, ‘뱀’과 인연이 많았다. <산배암>은 8월 27일 코리아극장에서 개봉했다. 그리고 한 달 뒤, 미국 직배영화 < 위험한 정사 >(아드리안 린, 1987)가 한창 상영되고 있던 신영극장과 코리아극장에 영화감독 장길수 와 조감독 최진식 이 뱀을 풀며 소란을 피웠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업무방해혐의로 체포했다. (“미영화 직배 반대 시위 두 영화감독 즉심 넘겨”, 《동아일보》, 1988년 9월 27일자 14면 기사) 사건이 그렇게 끝나는 건가 싶었는데, 1년 뒤인 1989년 9월 4일 정지영 감독은 포항에서 <남부군> 촬영 도중 경찰에 체포되었다. 혐의는 코리아극장과 신영극장에 뱀을 집어넣도록 사주했다는 것이다. 나머지 이야기는 정지영 감독에게 직접 들어보자. UIP 직배반대시위 (사진: 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정: 매일 코리아극장하고 신영극장 양쪽에, 그때 미국영화 직배가 상영될 때니까. 남: <위험한 정사>. 정: 어어. 그래 양쪽에 가서 매일 데모를 하면서 저녁에 들어와서 회의를 하고 헤어지고, 매일을! 그랬어요. (중략) 그런데 그렇게 데모를 할… 그때 88올림픽을 앞두고 어느 구역 안에서는 일체의 시위가 금지돼 있었다구. 근데 그거를 우리는 무시하고 한 거거든? 근데 신문에 안 나. (웃음) 신문에 단신으로 “영화인들이 이렇게 데모하고 있다” 나오고. (중략) 그래 그것이 쌓이다가 사람들이 지쳐가고 그러니까 누가 뱀 얘길 꺼낸 거지. “언제까지 이렇게 싸울 거냐” 정부에서 무슨 반응이라도, ‘자, 보자. 왜 그러냐. 너네들 만나나 보자’ 이런 반응도 없고. 기자들이 와서 취재도 안 하고. “이거 어떡할 거냐.” 그래서 누군가가 “이거 사고 치지 않으면 신문에 안 납니다.” (웃음) 그래서 “사고를 어떻게 치냐” 그랬더니, “사고를 곱게 치는 법이 하나 있다. 지금 <위험한 정사>를 하고 있는 극장에 뱀을 놓으면은… 물론 독 없는 뱀을 놓으면은, 사람들은 놀라겠지만 그걸로 크게 신문에 나면 극장은 며칠간 문을 닫고, 그럼 그건 사고다. 기자들이 안 다룰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됐는가를. 그걸 해야 된다.” 이렇게 주장을 하는데, 그 주장을 한 사람은 옛날에 그런 사건이 있었대요, 충무로에. 어느 극장에 뱀을 넣어서 며칠 뭐 ‘일주일간의 휴관을 했다’ 이런 게 있었대. (136~137쪽) ‘뱀 얘기’를 제안한 사람의 “어느 극장에 뱀을 넣어서 휴관을 했다”라는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이 사건도 매우 재미있으니, 이야기가 나온 김에 살펴보고 가면 좋을 듯하다. 1958년, 충무로 극장 주변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깡패끼리 백주에 집단폭행이 일어나더니 그 보복을 하기 위하여 극장 관람석에다 뱀까지 집어넣어 관객들이 한때 혼란을 일으키고 다시 복수전을 전개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중략)… 지난번 29일 낮 11시경 세기극장 주변의 주도권을 빼앗으려고 극장 주변에 모였던 소위 명동파와 종로파 간에 패싸움이 벌어져서 …(중략)… 2일 밤에는 세기극장 관람석에다 뱀 두 마리를 집어넣어 관객들이 일대혼란을 일으킨 일이 있으나 이 뱀은 어느 파에서 집어넣은 것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다. - “새로 개관한 세기극장에 뱀 소동”, 《조선일보》, 1958년 6월 5일자 2면 기사. 이전에 “ 한국영화 야인시대 ”에서 한 번 다룬 적이 있지만, 1958년에는 임화수 로 대표되는 종로파와 이화룡 으로 대표되는 명동파를 통하지 않고는 극장의 운영이 불가능했다. 이정재라는 든든한 뒷배를 갖고 있던 명동파는 틈만 나면 종로파와 세력 다툼을 벌였는데, 여기에 영화계에 갓 뛰어든 세기상사의 ‘세기극장’이 애꿎게 세력 결투의 장이 된 것이다. 사실 이 시기 명동을 중심으로 한 영화산업의 흐름은 조용히 충무로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건달 세력들이 자리를 잡고 있던 명동도, 종로도 아닌 ‘충무로’에 사업가 출신의 영화제작자(수입업자)들이 새로운 터전으로 잡고 모여들면서 시작되었다. 최근 진행하고 있는 신창영화사의 전석진 대표의 구술을 살짝 스포하자면, ‘화성영화사(이화룡)-한흥영화사( 최관두 )-대원영화사( 원선 )-한성영화사( 정진모 )’는 명동을 중심으로 하는 ‘명동파’의 대표들이었다. 이들은 각각의 회사인 듯 보이지만 하나의 쩐주를 통해 굴러가는 한 덩어리였다고 한다. 이를 깨고 나오기 시작한 것이 무역을 통해 크게 성장한 기업가들이었다. 세기상사가 그랬고, 이우석 이 영화계에 뛰어든 것도 이 시기였고(아직 동아수출공사는 설립 전이다), 불이무역이나 동양영화사와 같은 영화사들이 모두 무역업으로 시작해 충무로에 극장을 세우고 영화계로 들어왔다. 이 이야기는 그 나름으로 크고 재미있는 얘기니까 이쯤에서 접어야겠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다루어볼 것이다. 아무튼 저 ‘뱀 소동’의 이면에는 이러한 충무로 vs 명동의 세력 다툼이 배경에 있었다는 사실만 알아두자. 직배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극장에 ‘뱀을 넣자’라고 제안한 사람은 무려 30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기억해내고 의견을 낸 것인데, 이는 다시 말해 그가 1988년 직배저지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당시 영화계 원로의 위치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한 번만 더 스포를 하자면, 역시 올해 진행하고 있는 주제사의 구술자인 정병각 감독은 이 시기 직배저지투쟁과 스크린쿼터사수투쟁을 떠올리며, “원로영화인들의 참여가 매우 활발했다”라고 회고했다. 당시 영화계에서 원로영화인들은 딱히 일거리를 찾지 못해 그 지위가 매우 약해진 상황이었는데, ‘직배’라는 거대한 적을 앞에 두고 자신들의 역할이 생긴 것에 내심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직배저지투쟁이나 이후 이어진 스크린쿼터사수투쟁과 영화진흥법 투쟁은 겉으로 보기에는 ‘미국영화 직배’라는 외부 세력과의 투쟁인 동시에 기존 충무로 세력과 새로 유입된 충무로 신진 인력들 사이의 세력 투쟁 또한 내재하고 있었다. 세력 다툼엔 역시 ‘뱀’이 등장하기 마련인가보다. 뱀은 사라졌지만… 다시 1988년으로 돌아오자. 저 뱀 제안을 듣고 회의가 진행 중이던 장내에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정지영 감독은 공식적으로는 저 의견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 정: 내가 말은 나왔지만 이것은 공식화 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여러분들이 박수를 쳤지만은 이것이 실현될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사고를 어떻게 칩니까. 일단 이건 없던 걸로 합니다. 회의록에도 지웁니다.” 이렇게 하고 헤어지고난 다음에 그 아이디어를 제안했던 사람을 불렀어, 내가. “어떻게 뱀을 넣냐?” (모두 웃음) “뱀을 어떻게 넣냐. 누가 넣냐, 도대체?” “아니 이거 사람 사서 넣으면 되는 거지 우리가 어떻게 넣냐” “그러면 뱀은 어디?” “아이, 청계천 가면 뱀 많다.” (웃음) 그래서 그 사람을 통해 시켜서 청계천 가서 꽃뱀 사 가지고, 사람 사 가지고 뱀을 넣었지. 그러나 ‘뱀들은 극장 안에 있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차갑고 거친 시멘트 위에서 독이 올라 몽글몽글 자기들끼리 엉킨 채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라고 한다( 2022년 주제사 1권 <김형종> 2차 구술채록문 , 90~91쪽 참조). 결국 뱀의 출현은 다소간의 소요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대세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한 채 조용히 지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그사이 싸움의 방향이 바뀌었다. 영화인들은 ‘직배’가 영화산업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외교의 문제이기 때문에 저항을 한들 그 거대한 흐름 자체는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직배저지’가 아닌 ‘스크린쿼터사수’와 ‘영화진흥법 제정’ 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런데 앞서도 말한 대로, 이 사건은 1년 후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남부군> 촬영 현장. 이 사진의 뒷면에는 ‘이 장면을 찍고 밤에 서울로 연행 당함’이라는 메모가 적혀있다. (사진: 정지영 기증) 정: 그러다가 어느 날 포항에서 촬영을 하고 있는데 형사들이 갑자기 와 가지고 나를 연행해 갔지. 여기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있는 건데, 내가 한참 촬영을 하는데 형사들이 왔다고. 계곡 위에서 찍고 있는데 형사들이 계곡까지 올라왔어요. 올라와 가지고 “왠일이냐?”고 그랬더니 “감독님, 서울로 올라가셔야 되겠는데요” 그래. “아니 서울은 왜 갑자기 올라가느냐?”고 내가 그랬더니 신문을 딱 주는데 보니까 거기에 ‘정지영 감독 구속’으로 돼 있어. 나는 여기서 지금 촬영을 하고 있는데 《조선일보》에 ‘정지영 감독 구속’ (1989년 9월 3일자 15면 기사-편집자 주) 그래서 “이게 무슨 소리냐?” 그랬더니 “아 글쎄 말입니다” 그래. “근데 왜 나를 연행해 가냐?” 그랬더니… 재밌다고, 이게. “아니 여기 구속으로 돼 있는데 감독님 여기 있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말이 돼? 그렇게 한심한 시대였다는 거지, 말하자면. (웃음) 그러니까 신문에 ‘구속’으로 돼 있으니까 나는 구속돼 있어야 된다는 얘기 아니야? 신문의 오보를 내가 몸으로 실현해 주라는 거 아니야, 그건? (웃음) 남: 아, 그러면 그거는 어디서 정보를 미리 제공받아서 나온 기사가 아니라 오보가 난 거였던 거네요? 정: 오보를 일부러 쓴 거지. 나를 잡아오려고 일부러 오보를 낸 거지 . 물론 본인을 잡기 위해 일부러 오보를 냈다는 것은 정지영의 추측이다. 그러나 오보를 실현시키기 위한 구속이든, 구속을 위해 일부러 정보를 흘린 것이든 둘 다 어이가 없는 이유이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정지영 감독은 1989년 <남부군> 촬영 도중 체포되어 UIP영화 상영 극장에 뱀을 풀어 영업을 방해한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구치소에서 석방된 날, 정지영 감독(2열 좌2)과 정회철 감독(2열 우2)의 모습 (정지영 기증) 어쨌든 시작은 이렇게 과격하고 무모했지만, 이후 투쟁은 대학가에서 문화운동을 주도하던 새로운 세대의 합류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렇다고 1980년대 후반의 ‘직배저지투쟁’이 완전 실패라고는 볼 수 없다. 정지영은 이 시기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스스로 평가를 내렸다. 정: 우리가 이 운동을 통해서 ‘우리 영화는 우리가 살려야지 누가 보호해 주는 게 아니다’란 생각을 한 거지. 왜냐면은 직배저지투쟁할 때 극장 앞에서 막 데모를 할 때 관객들이 표를 사 가지고 들어가요. 영화인들이 와서 데모 하고 있는데 표 사 가지고 들어가. 누군가가 이제 “관객 여러분, 이거 직배영화입니다. 영화 구경하지 마세요!” 그랬을 때 뭐라고 대답을 들었냐면, “당신들이 영화 잘 만들어 봐. 우리가 한국영화 보지 왜 미국영화 보겠어, 이 사람들아. 영화나 똑바로 만들어!” 그러고 들어갔다구. 그만큼 한국영화가 관객들한테 우습게 보였을 때란 말이지. 그것이 나한테 자극을 줬는데 다른 사람한테 자극을 안 줬겠어? ‘우리한테 책임이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그래서 그런 것들이 모두 자극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 운동이 모든 영화인들에게 (사이) 용기도 만들어 주고. 또 열심히 해야겠다는 어떤 자세를, 사명감 이런 걸 만들어 주지 않았겠는가. 나는 직배운동이나 스크린쿼터투쟁이나 검열 투쟁 이런 것들이 그냥 ‘표현의 자유 문제를 우리가 지적한다’ 이런 차원이 아니고, 그 운동 자체가 영화인들 개개인에게 ‘우리가 우리 영화를 잘 만들어야 사랑을 받을 수 있어’ 이런 어떤 사명감 같은 걸 심어주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해요. 2023년 『1980년대 한국영화: ‘서울의 봄’부터 코리안 뉴웨이브까지』 중 ‘구술로 보는 1980년대 한국영화’ 챕터를 쓸 때도, 이 ‘뱀 소동’은 무조건 넣는다는 일념으로 글을 구성했었다. 개인적으로 이 ‘극장에 나타난 뱀’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상당히 무모하긴 하지만, 한편으로 굉장한 시대적 위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디아나 존스 >가 상영 중인 극장에 뱀을 풀었으면 완전 4D 체험이 가능했을 텐데’ 같은 상상을 해보면 정말 재미있지 않은가!). 한국 영화시장을 집어삼키기 위해 (질적으로나 물량적으로 한국영화와 비교도 되지 않는) 미국영화들이 물밀듯 밀려들어올 때, 한국의 영화인들은 뱀을 내세워 이를 물리치려 했다. 마치 거대한 폭풍 앞에 부채 한 장을 들고 서 있는 형세였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다시 <산배암>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해볼까 한다. 정지영 감독(우3)과 <산배암> 출연 배우들. (《스크린》 기증) 위 사진 속 집과 마당은 묘하게 < 기생충 >(봉준호, 2019)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 <산배암>과 <기생충>은 ‘계급’과 ‘계단’이라는 모티프에서 매우 유사함을 갖고 있다. 1988년 도덕적으로 타락한 상류층 가정에 들어간 순진한 산골소녀는 자신이 가진 건강한 생명력까지도 착취하려는 이들에게 ‘산배암’이 되어 저항했다. 그리고 지금 3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 계급에 대한 인식은 ‘뱀’에서 ‘기생충’으로 바뀌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언제든 자신이 받는 억압에 대해 ‘뱀’으로 돌변해 상대를 위협할 수 있었던 이들이, 이제는 숙주에게 붙어 사는 기생충이 되었다. 기생충은 숙주가 없이는 살 수 없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숙주에게 붙어 그 체계 안에서 피와 고름 같은 것을 먹으며 살아남든가, 아니면 공멸하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생존방식은 제3의 길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든다. 오늘날의 한국영화 안에, 그리고 극장 안에 다시 ‘뱀’이 나타날 수 있을까?
국가대표 멀티플렉스 극장: 메가박스 코엑스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이미지 클릭 시 유튜브 영상으로 이동) 메가박스 코엑스는 멀티플렉스 메가박스의 1호점으로 2000년 5월 13일, 서울시 강남구 코엑스몰 지하에서 우주 콘셉트로 16개관, 4,336개석 규모로 문을 열었다. 현재 메가박스를 대표하는 플래그십 지점으로 일반 상영관뿐만 아니라, 국내 최초의 돌비 시네마, MEGA | MX4D, 더 부티크 스위트, 프라이빗관 등 모든 특별관을 운영하고 있다. 본격적인 대형 멀티플렉스 시대가 메가박스 코엑스의 등장 이후 열렸다고 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 개관 다음 해인 2001년 7월에는 하루 최다 관객 3만 명이 넘는 기록을 했다. 1990년까지는 뉴스에서 영화관 풍경을 취재할 때 서울의 종로나 충무로를 보여줬지만 이후로는 대부분 메가박스 코엑스를 촬영해 자료로 사용해왔을 만큼 한국 영화산업의 대표적인 장소로서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메가박스’라는 브랜드 이름 자체가 영화관이라는 네모난 공간 안에 모든 것을 무한대로 담는다는 의미로 공간을 찾는 관객들에게 영화 외의 콘텐츠는 물론 오락, 카페 등 다양한 공간 경험을 제공하려는 멀티플렉스의 목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코엑스점 역시 카페, 패스트푸드점, 오락실, 키즈카페, 피규어샵 등이 입점되어 있다. 메가박스는 자체 제작하는 굿즈에 많은 정성을 기울이는데 티켓이 굿즈 역할을 하던 시대가 끝나고 이제는 영화산업에서 굿즈가 가진 역할이 매우 크다는 것을 입증하기도 했다. 특히, 영화의 포스터나 스틸컷이 단순히 활용되는 것을 넘어서 영화 장면과 캐릭터 해석을 통해 만들어지는 ‘오리지널 티켓,’ ‘드로잉 카드’가 영화 팬들에게 호응을 받았으며 특정 영화의 메가박스 굿즈는 따로 구매를 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다른 멀티플렉스들에 영향을 끼쳤다. 메가박스 코엑스 드로잉 카드 굿즈 20개의 상영관: 한국 멀티플렉스의 상징 2024년 기준으로 20개관, 3,384석이며 전체적인 콘셉트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영관별로 각 기능과 목적에 맞게 특화되어 있으며 부대시설 등을 포함한 근무 인원만 하더라도 100명 안팎이다. 근무 부서는 크게 운영 파트, 부티크 파트, 영사 파트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운영 파트는 각종 행사와 단체 대관, 매표소, 매점 등을 맡고 있고, 부티크 파트는 ‘더 부티크 특별관’ 등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영사 파트는 코엑스에서 상영하는 모든 영화와 전 지점에서 개봉하고 있는 대부분의 영화의 시영 정보를 담당하고 있다. 이 외에도 시설팀, 미화팀, 코엑스 지점에 입점해 있는 부대사업 관리 업무 인원 등이 영화관에서 근무하고 있다. 현재 메가박스 코엑스는 총 20개 상영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하 2층과 지하 1층에 나누어져 있는데 실제로는 각 층이 분절된 느낌이 아니라 중앙에 있는 계단으로 이어져 있는 형태이다. 먼저, 지하 2층에는 일반 상영관 2개, 다양한 타입의 관람 환경을 제공하는 컴포트 상영관 7개와 예술영화 전용 상영관인 스크린 A/B 총 2개, 메인 특별관인 ‘돌비 시네마’와 ‘MEGA | MX4D’ 상영관과 매표소와 매점이 있다. 지하 1층에는 ‘더 부티크’로 스위트 5개 상영관과 코엑스점에만 있는 ‘프라이빗’ 2개 상영관이 있는데 프라이빗 전용 카페와 스위트 라운지가 함께 마련되어 있다. 멀티플렉스답게 영화 관람 이외에도 고객들이 머무르고 즐길 수 있도록 카페와 패스트푸드점, 오락실, 키즈카페, 피규어샵 등도 같이 입점되어 있다. 계단에서 로비를 내려다본 광경 중앙의 로비에 있는 대형 계단은 현재는 메가박스 코엑스의 상징과 같은데, 무대처럼 만들어져 있다. 이는 2023년 소파를 정리하면서 리모델링한 것으로, 계단에 앉아서 보이는 화면과 좌측에 긴 스크린에 영화 예고편과 광고 등이 나오고 있으며 영화를 기다리면서 관객들이 쉬는 공간으로 활용하거나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공간이 크고 이동 동선이 편리해서 영화 행사에 적절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계단은 관객석으로, 전광판은 행사를 생중계해주는 대형 모니터로 활용되고 배우들이 무대로 나오기 전에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개봉 영화의 무대 인사 같은 경우에도 여러 개의 상영관이 지하 2층 한 층에 연결되어 있어서 배우와 제작진이 효율적으로 한 번에 상영관을 돌 수가 있다. MX4D관과 돌비 시네마관을 통한 특별한 경험 메가박스 코엑스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중에서도 특별 상영관이 가장 중요한 영화관이다. 메가박스 최초 4D 상영관인 ‘MEGA | MX4D’와 ‘돌비 시네마’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MEGA | MX4D’는 메가박스가 AAM(Arts Alliance Media)의 한국지사 AMPA와 MX4D 도입에 관한 파트너십을 맺고 2024년 2월 코엑스점에 처음으로 오픈했다. 메가박스의 ‘MEGA | MX4D’ 상영관은 영화 속 장면에 따라 움직임, 진동, 물, 바람, 향기, 안개, 눈, 비 등 9가지의 모션 효과와 6가지의 환경 효과로 표현된다. 그야말로 대형 멀티플렉스이기 때문에 운영할 수 있는 대표적인 상영관이다. 돌비 시네마는 2020년 7월 이곳 코엑스점에 1호점을 오픈했다. 현재 돌비 시네마 상영관 같은 경우 전 세계 14개 국가에서 290개 이상의 지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현재 오직 메가박스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이다. 메가박스 코엑스 돌비 시네마관 객석 이외에도 메가박스 코엑스는 여러 개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데, 개관 첫해인 2000년도에 세계 최단 기간(85일) 내 누적 관객 100만 명을 돌파했으며, 2004년에는 ‘아시아 최고의 영화관’에 선정되었다. 관객 수와 관련한 기록은 꾸준히 이어 갔는데, 2005년에 연간 관객 수 619만 명으로 월드레코드에 등재되었고, 다음 해인 2006년에는 1일 관객 33,235명으로 신기록을 기록했다. 또한 오픈 이래 14년 연속 연간 관객 수 400만 명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관객 기록은 ‘한국영화 시장의 양극화’라는 숙제를 보여주기도 한다. 메가박스에서는 ‘소사이어티 프로그램’이나 ‘라이브 뷰잉’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 장르를 보여주거나 새로운 전달 방식의 포맷을 도입하고 확산하는 등으로 국내 영화산업의 다양성 제고에도 기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메가박스 코엑스 지하 2층 매점 앞 전경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24 2) 설립일 : 2000년 5월 13일 3) 대표자 : 점장 고혜경 4) 규모 : 지하 1·2층의 전용면적 21,487㎡, 6,500평 5) 극장 구성 - 1관(Laser) [Dolby Cinema] : 378석 - 2관(Laser) : 432석 - 3관(Laser) [COMFORT] : 348석 - 4관(Laser) : 332석 - 5관(Laser) [COMFORT] : 281석 - 6관(Laser) [COMFORT] : 285석 - 7관(Laser) [COMFORT] : 285석 - 8관(Laser) [COMFORT] : 255석 - 9관(Laser) [MEGA | MX4D] : 192석 - 10관(Laser) [COMFORT] : 166석 - 11관(Laser) [COMFORT] : 166석 - 12관(Laser) [THE BOUTIQUE SUITE 101호] : 32석 - 13관(Laser) [THE BOUTIQUE SUITE 102호] : 36석 - 14관(Laser) [THE BOUTIQUE SUITE 103호] : 36석 - 15관(Laser) [THE BOUTIQUE SUITE 104호] : 36석 - 16관(Laser) [THE BOUTIQUE SUITE 105호] : 36석 - 17관 [screen A] : 36석 - 18관 [screen B] : 30석 - 19관 [THE BOUTIQUE PRIVATE 1관] : 8석 - 20관 [THE BOUTIQUE PRIVATE 2관] : 10석 6) 운영시간 및 정기휴무 : 09:00~03:00 연중무휴 7) 조직도 및 조직 구성 - 중앙그룹 계열 - 제작업 기업의 콘텐트리중앙 - 자회사 메가박스중앙(주) - 메가박스 코엑스 - 메가박스 코엑스 - 운영팀, 영사팀, 부티크팀, 자체 시설관리팀과 미화팀 운영 8) 구성원 : 운영, 부티크 파트에 BOX, CON, USHER, CS, MR 업무 담당자들로 구성 9) 주요 장비(영사 장비, 음향) : 레이져 영사기, 돌비 비전, 돌비 애트모스 취재 일자: 2024년 9월 10일 글/인터뷰 진행: 김문경 사진: 허 성
[한국영화걸작선]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8월의 영화 Ⅱ
많은 감독이 소설을 영화화 하지만 생각보다 이 작업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서사를 따라가는 관객들에겐 '아는' 이야기를 참고 보게 만드는 힘이 있어야 하고, 원작의 아우라를 즐긴 독자들에겐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보다 더 매력적인 장면들이 필요하다. 물론 그 작품을 선택한 감독의 영화적 '야심'도 (영화의 성패와는 무관하게) 끊임없이 출몰한다. 여기에 원작과의 비교에서 자유롭지 못한 건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의 숙명처럼 보일 지경이다. 원작이 단단할수록 영화가 짊어져야 할 무게는 자연 더욱 무거워진다. 그러니 1987년 발표된 소설가 이문열의 중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영화화한 박종원 감독의 결심도 남다른 것이었으리라. 게다가 자유당 정권 말기라는 시대적 배경에, '국민학교'로 옮겨오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독재 권력이 생성-유지되는 역학(dynamic)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야기 구조는 90년대 초, 검열이라는 문제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난관뿐인 듯한 이 선택에서 박종원 감독이 보여준 몇몇 지점은 꽤 흥미롭다. 12살 '한병태'( 고정일 )는 서울에 살다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시골 학교로 전학 온다.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는 병태지만, 반 아이들은 이상할 정도로 '급장'인 '엄석대'( 홍경인 )의 말에만 복종하며 병태를 적대시한다. 병태를 더 놀라게 만든 건 석대가 반에서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선생님들조차 암묵적으로 인정해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부조리한 상황을 전복시키기 위해 병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석대에게 도전하지만 단 한 번의 승리도 거두지 못한 채 좌절을 반복하고 만다. 결국 '살기 위해' 병태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석대의 '부하'로 충성을 맹세하기로 한다. 하지만 석대의 세상은 아이들의 이상한 분위기를 의심하다 석대의 모든 비행을 알게 된 신규 부임 교사 ‘정원’( 최민식 )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소설과는 다르게 영화는 정원을 병태의 '현재' 시점에 다시 한번 등장시킨다. 이제 성인이 된 아이들은 전 담임교사( 신구 )의 장례식에서 재회하게 되는데, 정원 역시 이 자리를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비굴한 태도로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모습에선 진실과 자유를 가르치며, 엄석대의 권력 앞에서 숨을 죽이는 아이들을 다그치던 패기는 찾아볼 수 없다. 결국 영화는 엄석대의 권력 앞에서 저항하다 무릎을 꿇고 말았던 병태의 모습과 이런 정원의 모습을 병치시켜 놓음으로써 병태의 '실패'가 결코 병태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이 태도는 진실과 자유라는 이상을 호기롭게 논하던 그를 과거 속에 그대로 놓아둠으로써 독자들에게 일말의 희망의 여지를 남겨두었던 소설의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그리고 현재 시점으로 엄석대를 불러내는 방식에서도 차이를 만들어낸다. 원작에서 병태는 기차에서 형사에게 체포돼 끌려가는 석대와 우연히 마주친다. 일류대학을 나왔지만 결국 이도 저도 잘 되지 않고 실업자나 마찬가지의 생활을 하게 되자 병태는 석대가 군림했던 그 시절을 문득 떠올린다. 소설은 이렇게 묘사한다. "실업자가 되어 한발 물러서서 보니 세상이 한층 잘 보였다. 내가 갑자기 낯선, 이상한 곳으로 전학 온 듯한 느낌이 들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전 학교에서의 성적이나 거기서 빛났던 내 자랑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그들만의 질서로 다스려지는 어떤 가혹한 왕국에 내던져진 느낌. 그리고 거기서 엄석대는 아득한 과거로부터 되살아났다. 이런 세상이라면 석대는 어디선가 틀림없이 다시 급장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단정했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급장'으로 존재해주길 바랐던 석대가 형사에게 무력하게 잡혀가는 모습을 본 병태는 더 큰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그날 밤 나는 잠든 아내와 아이들 곁에서 늦도록 술잔을 비웠다. 나중에는 눈물까지 두어 방울 떨군 것 같은데, 그러나 그게 나를 위한 것인지 그를 위한 것이었는지, 또 세계와 인생에 대한 안도에서였는지 새로운 비관에서였는지는 지금에조차 뚜렷하지 않다.") 상당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던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하는 건 병태가 석대(가 군림했던 시기)를 그리워한다는 사실보다 그가 '실업자'로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났을 때 석대를 떠올렸다는 사실일 것이다. 병태는 결국 못난 것 하나 없는 자신이 제대로 사회(학교)에서 '반짝반짝' 성공한 사람(급장)이 되지 못했던 건 내 탓도, 사회의 탓도 아닌 '석대'의 탓이라고 원망하는 데 그치고 만다. 하지만 영화는 어떠한가? 석대가 온다는 무성한 소문 속에 병태는 마지막까지 그를 기다린다. 하지만 결국 그는 나타나지 않고 엄석대의 이름이 새겨진 커다란 근조화환만 등장한다. 단정할 순 없지만, 이 화환은 석대가 어떤 형태든 병태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성공' 했음을 암시한다. 석대를 무너뜨렸던 새 담임 교사 정원은 '변질' 돼 버렸고, 사회는 석대를 버젓한 성공의 대열로 올려놓았다. 소설 속 병태의 허무감은 그 화살의 일부가 병태 자신을 향해 있는 반면, 영화 속 병태의 패배감은 오롯이 여전히 부조리한 사회를 향한다. 이때 영화는 병태가 '석대의 세상'으로 편입하는 순간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살아남기 위해 병태는 석대에게 무릎을 꿇고 그가 세워 놓은 규칙을 따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병태가 석대의 세상에 편입되는 것은 석대의 시험 부정 사실을 담임에게 이르려고 했다가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서고 만 순간부터일 것이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담임 앞에 용기를 내 선 병태를 '줌아웃 트랙인'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촬영하게 되면 화면 속의 병태의 크기는 동일하게 유지되지만, 배경은 화면 뒤로 물러가는 듯한 묘한 효과를 얻게 되는데, 그 덕분에 석대의 잘못을 누구 보다 견디지 못했던 병태가 현실과 부딪쳐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현실에서 유리(遊離)되어 버리는 듯한 느낌마저 불러일으킨다. 이 장면은 병태가 거리에서 학생들이 벌이는 ‘독재반대시위’ 행렬에 휘말릴까 골목에 숨어 있다 도망치는 모습과 맥을 같이 한다. 현실에 눈을 감기로 한 병태는 끝내 그 열패감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소설과 영화가 나온 지 약 3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이제 ‘석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걸까? 당신은, 아니 우리는 ‘병태’가 아니라고, 석대의 시험을 대신 봐주며 물을 떠다 바치던 친구들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마치 예언처럼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이렇게 시작한다. “벌써 삼십 년이 다 돼 가지만, 그해 봄에서 가을까지의 외롭고 힘들었던 싸움을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때처럼 막막하고 암담해진다. 어쩌면 그런 싸움이야말로 우리 살이(生)가 흔히 빠지게 되는 어떤 상태이고, 그래서 실은 아직도 내가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받는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영화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