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블린
- 감독
- Rick Rosenthal
- 제작년도
- 1992
- 출연
- Bryan Brown, Roma Downey
195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계 해방 이후 한국영화 제작 편수는 1948년부터 20편을 넘기는 등 점차 제작 환경이 안정되었고, 영화인들은 ‘한국’ 영화를 찾아가는 데 열중했다. 하지만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영화산업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민족상잔의 비극 앞에서 영화까지 만들 여유는 없었고, 촬영 현장에 있던 영화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은 1·4 후퇴 이후 진해, 대구, 부산 등 후방 도시의 군과 관으로 다시 모여 뉴스영화나 기록영화 제작에 참가하며 종군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사실 1951년 3월 시점에 38도선 부근에서 전선이 교착되어, 그해 7월부터는 본격적인 휴전 회담이 착수되었다.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타결될 때까지 피란 도시의 영화인들은 다시 극영화를 만들기도 했는데 신상옥의 데뷔작 <악야>(1952), 민경식의 데뷔작 <태양의 거리>(1952) 같은 작품들이 리얼리즘 화법으로 전시의 공기를 담아냈다. 열악한 환경에서 이런 무모한 시도가 전후 한국영화계가 곧바로 가동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954년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조치’라는 정책적 호재까지 더해졌고, 이규환의 <춘향전>(1955)에 2개월 장기 흥행이라는 열기로 관객들이 화답하면서, 한국영화는 다시 궤도에 올라선다. 1954년 18편, 1955년 15편 그리고 1956, 1957년은 매해 30편 이상의 제작 편수를 기록하게 되는데, 전후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의 시기를 한국영화 성장기로 일컫는 이유일 것이다. ‘조선’ 영화에서 ‘한국’ 영화로, 한형모의 역할 일제 말기에서 한국전쟁 시기를 거쳐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도약으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주목할 이는 바로 한형모다. 그는 1941년경 일본 도호(東寶) 영화에 입사해 촬영 기술을 배운 후, 일본에서 실시한 기능 시험에 합격해 정식 촬영기사가 되었고, 일제 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주로 최인규 감독의 영화에서 촬영기사로 활동했다. 감독 데뷔는 1949년 여순사건을 배경으로 한 <성벽을 뚫고>에서다. 그는 1950년 5월 다시 연출에 도전한 해군 홍보영화 <사나이의 길>을 촬영하다 전쟁 발발로 멈춘 후,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로 들어가 <정의의 진격>(1951~1952) 1·2부를 완성하는 등 종군 활동을 하다 휴전을 맞았다. 한형모는 조선영화에서 한국영화로 이행하는 바로 그 시기의 인물인 것이다. 1954년 6월 한형모는 윤인자, 이향 단 2명의 주연배우 위주로 경제적으로 촬영한 <운명의 손>에 착수한다. 이 영화는 반공으로 포장한 남북분단이라는 주제, 북한의 스파이인 여성과 남한의 특무장교인 남성이 서로의 신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으로 펼쳐지는 스릴러의 분위기, 그리고 둘의 사랑과 이별이 빚어내는 멜로드라마 정서를 키워드 삼아, 그해 10월 촬영을 마무리하고 12월 개봉하게 된다. <운명의 손>의 스토리를 보면 혹시 떠오르는 영화가 있지 않은가. 바로 1999년 개봉한 <쉬리>(강제규)의 원조 격으로 이 영화를 언급하는 이유다. 영화 스타일적 혼종성 한형모가 일제 말기부터 1950년대 대중영화 최전선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그의 영화에 일본영화의 화법과 할리우드영화의 스타일이 모두 공존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제 시기 일본에서 영화를 배웠던 조선인 감독들이 그랬듯, 그 역시 일본영화의 문법과 유사한 조선영화식 화법으로 식민지 조선인 관객들을 공감시켰고, 해방 이후에는 이를 기반으로 하되 남한으로 급격히 밀려들어온 할리우드영화의 화려한 스타일을 염두에 두게 된다. <운명의 손>에서 확인되는 대표적인 일제 시기 화법은, 영화 초반 마가렛의 방 장면에서 사용되는 인형 인서트 쇼트일 것이다. 인형이 무언가 알고 있다는 의미와 시간 경과를 동시에 노리는 쇼트 전략은 <미몽(죽음의 자장가)>(양주남, 1936)에서 마네킹의 인서트 쇼트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을 위해 구둣발과 반지를 낀 손만 보여주며 간첩단 우두머리(주선태)의 존재를 숨기는 것은 <군용열차>(서광제, 1938)에서 구둣발 쇼트로 스파이의 존재를 숨겼다 드러내는 방식과 상당히 유사하다. 또 인물과 배경이 모두 적절하게 담기는 풀 쇼트를 선호하고, 쇼트를 나누기보다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호흡을 길게 가져가는 방식으로 관객의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것도 그렇다. 물론 이러한 스타일은 할리우드영화의 영향을 받은 일본영화와 공유한 것이자 일정 부분 조선영화에서 토착화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운명의 손>의 영화적 리듬감은 1950년대 후반보다 일제 시기의 그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오명 Notorious>(1946)에서 힌트를 얻다 촬영기사 출신의 한형모는 195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기술 방면이라면 단연코 일인자였다. 할리우드의 스파이 스릴러 장르를 취한 <운명의 손>은 상업적인 흥행에는 비록 실패했지만, 당시 젊은 영화인들이 연출 기법의 교과서로 삼았을 정도로, 기재 운용과 스타일적 시도를 모두 포함한 의미의 기술적 수준에서 당대 일반을 뛰어넘는 작품이었다. 이후 세대인 김기덕 감독이 증언하듯이, 특히 한형모 감독의 조명 설계는 당시 한국영화 수준을 훌쩍 넘어서는 것이었다. 인물의 얼굴을 잘 보여주는 것에 급급하거나, 하이키(high key)로 인물의 얼굴을 무조건 밝게만 보이게 하는 조명 방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대화 장면에서, 마가렛의 얼굴을 반이나 가리는 그림자는 당대 한국영화에서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한형모는 두 인물의 비극적인 운명과 긴장감 어린 분위기를 조명으로 표현하며, 스릴러 장르의 미학을 적확히 소화하고 있다. <운명의 손>에서 보이는 할리우드영화 스타일의 정점은 바로 마가렛(윤인자)과 영철(이향)의 포옹 장면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1946년 작품 <오명>에서 엘리시아(잉그리드 버그만)와 데블린(캐리 그란트)의 러브신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로키(low key) 촬영으로 실루엣으로만 처리하는 세련됨을 보인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중 가장 단순한 구성으로 평가되는 <오명>을 두고 프랑수아 트뤼포가 “최소한의 요소로부터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다”고 평가한 것처럼, 이는 <운명의 손>에서 마가렛과 영철이라는 남녀 주인공으로만 극의 마지막까지 끌고 간 한형모의 연출 의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처럼 <운명의 손>은 할리우드영화의 스타일을 의도한 흔적이 곳곳에 보이는데, 이는 당대의 흥행 코드인 신파성을 벗어나 전반적으로 감정을 절제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이 영화는 <춘향전>(국도극장 개봉)과 같은 시기에 수도극장에서 개봉해 당시 관객들의 선택을 받지는 못했는데, 아마 이러한 화법이 흥행에 실패한 원인이었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일제 시기 조선영화와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가 극명히 달라지는 지점은 후자가 관객들을 위한 화려한 볼거리(spectacle)를 앞세운 것이다. <운명의 손>에 등장하는 양공주의 아파트 공간, 양품점의 쇼윈도, 마가렛과 영철의 데이트 코스(권투경기장, 경륜장, 골프장, 바, 댄스홀) 장면처럼, 관객을 위한 볼거리 혹은 대리 체험의 장을 디제시스(diegesis, 영화적 시공간)에 심어두는 것은 한형모의 특기였다. 특히 경륜장을 포함한 데이트 장면의 몽타주 시퀀스는, <오명>의 경마장 신에서 나치 조직의 세바스찬이 엘리시아와 데블린을 쌍안경으로 지켜보는 장면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한형모의 차기작 <자유부인>(1956)에서 양품점, 댄스홀, 레스토랑, 호텔 같은 상류층 공간이 등장하는 것 역시 할리우드 영화(혹은 미국식 문화)의 화려한 볼거리를 이식한 장면들로, 이후 그의 영화적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1950년대 한국 대중영화의 일인자 이처럼 한형모는 멜로드라마 <자유부인>의 흥행 성공으로 확실한 입지를 구축했고, 음악영화이자 코미디인 <청춘쌍곡선>(1956), 김내성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탐정스릴러 <마인>(1957), 박계주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멜로드라마 <순애보>(1957) 이후 김영수의 희곡 「여사장 요안나」를 각색한 로맨틱코미디 <여사장> (1959)까지, 화려한 스타일과 밀도 있는 연출로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며 1950년대 한국 대중영화의 격조를 높였다. 이후 한국영화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성장 가도를 달린다. 1958년 설립된 안양촬영소를 위시로 기술적 기반이 마련되었고, 1959년에는 100편의 제작 편수를 넘기며 중흥기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신파극과 멜로드라마, 코미디가 장르적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1960년대의 영화 제왕 신상옥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다. 전후 한국 사회를 네오리얼리즘의 분위기와 속도감 있는 스펙터클을 결합해 제시한 <지옥화>(신상옥, 1958)는 그 역시 주도하기도 한 멜로드라마의 틈바구니에서 1950년대 어떤 과감함을 상징하고 있었다.
195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계 해방 이후 한국영화 제작 편수는 1948년부터 20편을 넘기는 등 점차 제작 환경이 안정되었고, 영화인들은 ‘한국’ 영화를 찾아가는 데 열중했다. 하지만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영화산업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민족상잔의 비극 앞에서 영화까지 만들 여유는 없었고, 촬영 현장에 있던 영화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은 1·4 후퇴 이후 진해, 대구, 부산 등 후방 도시의 군과 관으로 다시 모여 뉴스영화나 기록영화 제작에 참가하며 종군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사실 1951년 3월 시점에 38도선 부근에서 전선이 교착되어, 그해 7월부터는 본격적인 휴전 회담이 착수되었다.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타결될 때까지 피란 도시의 영화인들은 다시 극영화를 만들기도 했는데 신상옥의 데뷔작 <악야>(1952), 민경식의 데뷔작 <태양의 거리>(1952) 같은 작품들이 리얼리즘 화법으로 전시의 공기를 담아냈다. 열악한 환경에서 이런 무모한 시도가 전후 한국영화계가 곧바로 가동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954년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조치’라는 정책적 호재까지 더해졌고, 이규환의 <춘향전>(1955)에 2개월 장기 흥행이라는 열기로 관객들이 화답하면서, 한국영화는 다시 궤도에 올라선다. 1954년 18편, 1955년 15편 그리고 1956, 1957년은 매해 30편 이상의 제작 편수를 기록하게 되는데, 전후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의 시기를 한국영화 성장기로 일컫는 이유일 것이다. ‘조선’ 영화에서 ‘한국’ 영화로, 한형모의 역할 일제 말기에서 한국전쟁 시기를 거쳐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도약으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주목할 이는 바로 한형모다. 그는 1941년경 일본 도호(東寶) 영화에 입사해 촬영 기술을 배운 후, 일본에서 실시한 기능 시험에 합격해 정식 촬영기사가 되었고, 일제 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주로 최인규 감독의 영화에서 촬영기사로 활동했다. 감독 데뷔는 1949년 여순사건을 배경으로 한 <성벽을 뚫고>에서다. 그는 1950년 5월 다시 연출에 도전한 해군 홍보영화 <사나이의 길>을 촬영하다 전쟁 발발로 멈춘 후,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로 들어가 <정의의 진격>(1951~1952) 1·2부를 완성하는 등 종군 활동을 하다 휴전을 맞았다. 한형모는 조선영화에서 한국영화로 이행하는 바로 그 시기의 인물인 것이다. 1954년 6월 한형모는 윤인자, 이향 단 2명의 주연배우 위주로 경제적으로 촬영한 <운명의 손>에 착수한다. 이 영화는 반공으로 포장한 남북분단이라는 주제, 북한의 스파이인 여성과 남한의 특무장교인 남성이 서로의 신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으로 펼쳐지는 스릴러의 분위기, 그리고 둘의 사랑과 이별이 빚어내는 멜로드라마 정서를 키워드 삼아, 그해 10월 촬영을 마무리하고 12월 개봉하게 된다. <운명의 손>의 스토리를 보면 혹시 떠오르는 영화가 있지 않은가. 바로 1999년 개봉한 <쉬리>(강제규)의 원조 격으로 이 영화를 언급하는 이유다. 영화 스타일적 혼종성 한형모가 일제 말기부터 1950년대 대중영화 최전선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그의 영화에 일본영화의 화법과 할리우드영화의 스타일이 모두 공존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제 시기 일본에서 영화를 배웠던 조선인 감독들이 그랬듯, 그 역시 일본영화의 문법과 유사한 조선영화식 화법으로 식민지 조선인 관객들을 공감시켰고, 해방 이후에는 이를 기반으로 하되 남한으로 급격히 밀려들어온 할리우드영화의 화려한 스타일을 염두에 두게 된다. <운명의 손>에서 확인되는 대표적인 일제 시기 화법은, 영화 초반 마가렛의 방 장면에서 사용되는 인형 인서트 쇼트일 것이다. 인형이 무언가 알고 있다는 의미와 시간 경과를 동시에 노리는 쇼트 전략은 <미몽(죽음의 자장가)>(양주남, 1936)에서 마네킹의 인서트 쇼트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을 위해 구둣발과 반지를 낀 손만 보여주며 간첩단 우두머리(주선태)의 존재를 숨기는 것은 <군용열차>(서광제, 1938)에서 구둣발 쇼트로 스파이의 존재를 숨겼다 드러내는 방식과 상당히 유사하다. 또 인물과 배경이 모두 적절하게 담기는 풀 쇼트를 선호하고, 쇼트를 나누기보다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호흡을 길게 가져가는 방식으로 관객의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것도 그렇다. 물론 이러한 스타일은 할리우드영화의 영향을 받은 일본영화와 공유한 것이자 일정 부분 조선영화에서 토착화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운명의 손>의 영화적 리듬감은 1950년대 후반보다 일제 시기의 그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오명 Notorious>(1946)에서 힌트를 얻다 촬영기사 출신의 한형모는 195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기술 방면이라면 단연코 일인자였다. 할리우드의 스파이 스릴러 장르를 취한 <운명의 손>은 상업적인 흥행에는 비록 실패했지만, 당시 젊은 영화인들이 연출 기법의 교과서로 삼았을 정도로, 기재 운용과 스타일적 시도를 모두 포함한 의미의 기술적 수준에서 당대 일반을 뛰어넘는 작품이었다. 이후 세대인 김기덕 감독이 증언하듯이, 특히 한형모 감독의 조명 설계는 당시 한국영화 수준을 훌쩍 넘어서는 것이었다. 인물의 얼굴을 잘 보여주는 것에 급급하거나, 하이키(high key)로 인물의 얼굴을 무조건 밝게만 보이게 하는 조명 방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대화 장면에서, 마가렛의 얼굴을 반이나 가리는 그림자는 당대 한국영화에서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한형모는 두 인물의 비극적인 운명과 긴장감 어린 분위기를 조명으로 표현하며, 스릴러 장르의 미학을 적확히 소화하고 있다. <운명의 손>에서 보이는 할리우드영화 스타일의 정점은 바로 마가렛(윤인자)과 영철(이향)의 포옹 장면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1946년 작품 <오명>에서 엘리시아(잉그리드 버그만)와 데블린(캐리 그란트)의 러브신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로키(low key) 촬영으로 실루엣으로만 처리하는 세련됨을 보인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중 가장 단순한 구성으로 평가되는 <오명>을 두고 프랑수아 트뤼포가 “최소한의 요소로부터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다”고 평가한 것처럼, 이는 <운명의 손>에서 마가렛과 영철이라는 남녀 주인공으로만 극의 마지막까지 끌고 간 한형모의 연출 의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처럼 <운명의 손>은 할리우드영화의 스타일을 의도한 흔적이 곳곳에 보이는데, 이는 당대의 흥행 코드인 신파성을 벗어나 전반적으로 감정을 절제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이 영화는 <춘향전>(국도극장 개봉)과 같은 시기에 수도극장에서 개봉해 당시 관객들의 선택을 받지는 못했는데, 아마 이러한 화법이 흥행에 실패한 원인이었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일제 시기 조선영화와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가 극명히 달라지는 지점은 후자가 관객들을 위한 화려한 볼거리(spectacle)를 앞세운 것이다. <운명의 손>에 등장하는 양공주의 아파트 공간, 양품점의 쇼윈도, 마가렛과 영철의 데이트 코스(권투경기장, 경륜장, 골프장, 바, 댄스홀) 장면처럼, 관객을 위한 볼거리 혹은 대리 체험의 장을 디제시스(diegesis, 영화적 시공간)에 심어두는 것은 한형모의 특기였다. 특히 경륜장을 포함한 데이트 장면의 몽타주 시퀀스는, <오명>의 경마장 신에서 나치 조직의 세바스찬이 엘리시아와 데블린을 쌍안경으로 지켜보는 장면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한형모의 차기작 <자유부인>(1956)에서 양품점, 댄스홀, 레스토랑, 호텔 같은 상류층 공간이 등장하는 것 역시 할리우드 영화(혹은 미국식 문화)의 화려한 볼거리를 이식한 장면들로, 이후 그의 영화적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1950년대 한국 대중영화의 일인자 이처럼 한형모는 멜로드라마 <자유부인>의 흥행 성공으로 확실한 입지를 구축했고, 음악영화이자 코미디인 <청춘쌍곡선>(1956), 김내성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탐정스릴러 <마인>(1957), 박계주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멜로드라마 <순애보>(1957) 이후 김영수의 희곡 「여사장 요안나」를 각색한 로맨틱코미디 <여사장> (1959)까지, 화려한 스타일과 밀도 있는 연출로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며 1950년대 한국 대중영화의 격조를 높였다. 이후 한국영화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성장 가도를 달린다. 1958년 설립된 안양촬영소를 위시로 기술적 기반이 마련되었고, 1959년에는 100편의 제작 편수를 넘기며 중흥기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신파극과 멜로드라마, 코미디가 장르적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1960년대의 영화 제왕 신상옥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다. 전후 한국 사회를 네오리얼리즘의 분위기와 속도감 있는 스펙터클을 결합해 제시한 <지옥화>(신상옥, 1958)는 그 역시 주도하기도 한 멜로드라마의 틈바구니에서 1950년대 어떤 과감함을 상징하고 있었다.
90년대 말. 영화적 테크놀로지가 극대화되자 할리우드엔 다시 재난영화의 바람이 불었다. 70년대 재난물이 화려한 올스타 캐스팅에서 오는 캐릭터들의 재미였다면 90년대 말에 불어 닥친 재난물의 주인공은 단연 비주얼이었다. 가공할만한 시각효과와 압도적인 입체음향으로 그 어떤 아날로그 효과로는 구현할 수 없던 영상과 소리를 얻게 되자 재난영화는 날개를 달았다. 1995년 역사에 기록된 우주적 재난을 다룬 < 아폴로 13 >을 필두로, 96년엔 토네이도의 위력을 실감 나게 묘사한 < 트위스터 >와 람보가 터널로 들어간 < 데이라잇 >이, 97년엔 두 편의 화산 영화 < 볼케이노 >와 < 단테스 피크 >, 그리고 흥행 기록을 다시 쓴 < 타이타닉 >이 개봉됐다. 98년엔 소행성이 두 번이나 지구를 찾아 < 딥 임팩트 >와 < 아마겟돈 >이 쌍끌이 흥행을 기록했으며, 폭우를 다룬 < 하드 레인 >과 산불을 다룬 < 파이어 스톰 >이 제작되며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유행에 불을 지피고 확실한 인장을 찍은 건 1996년 전미/세계 박스오피스 1위에 빛나는, 외계인 침공의 SF 재난영화 < 인디펜던스 데이 >였다. 90년대 각종 재난영화들 영화는 크게 외계인의 침공을 받는 7월 2일, 반격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마는 7월 3일, 해결책을 찾아내고 최종 결전에 나서는 7월 4일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어윈 앨런표 고전 재난물처럼 여러 인물들과 상황에 포커스를 맞춰 고난에 맞서 싸우고 극복하는 모습들을 담아낸다. 그러나 팍스아메리카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날짜와 제목에, 외계인을 맨손으로 때려잡는 조종사와 닭살 돋는 연설을 늘어놓고 직접 전투기를 몰고 출격하는 미국 대통령, 맥OS와 호환되는 외계인 컴퓨터에 바이러스를 침투시켜 방어체계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이나 너무나도 흔해빠진 음모론 로스웰사건까지 난입하며 황당무계하고 게으른 설정과 오글거리는 캐릭터들로 재난 영화에 필수 덕목으로 자리 잡은 희생정신과 감동스토리는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채, 멍청하고 한심한 영화, 미 패권주의 영화로 낙인찍히고 놀림 받는다. 그러나 이전까진 볼 수 없었던 화끈하게 터져나가는 백악관과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거기에 하늘을 뒤덮는 장관의 거대 우주선과 외계인과 지구인 간의 공중전, 도시의 아비규환 등을 담은 다양한 볼거리로 단순한 플롯과 바보 같은 설정을 마취시키며, 미국에서만 3억 불, 전 세계적으로 8억 불이 넘는 흥행을 기록해 롤랜드 에머리히의 지구파괴 미학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후 그는 < 투모로우 >와 < 2012 >에 이르며 더 강렬하고 큰 스케일로 지구를 초토화시키며 이 분야의 독보적인 대가로 자리 잡았다. 물론 애국심을 잔뜩 고취시키는 장엄한 음악으로 영화 보는 동안이나마 논리적인 사고를 마비시킨 데이비드 아놀드의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데이비드 아놀드 1993년 학창시절 친했던 대니 캐논 감독의 요청으로 < 영 아메리칸 >의 음악을 맡아 데뷔한 데이비드 아놀드는 그 사운드트랙에서 같이 작업한 브욕의 ‘Play Dead’로 UK차트 12위까지 오르며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런 그의 탁월한 멜로디 솜씨를 주목한 롤랜드 에머리히와 딘 데블린 콤비는 자신들의 첫 번째 협업작 < 스타게이트 >를 위해 데이비드 아놀드를 픽업했고, 마치 < 아라비아의 로렌스 >에 < 스타워즈 >를 섞은 듯한 이국적이고 장엄한 에픽 사운드로 찬사를 이끌어내며 새로운 스타탄생을 알렸다. 실패한 서부극이지만 역시나 웅장하고 서정적인 스코어로 숨은 걸작 사운드트랙이란 평을 받은 < 라스트 도그맨 >을 거쳐 다시 에머리히/데블린 콤비와 뭉친 <인디펜던스 데이>은 포스트 존 윌리엄스라는 극찬을 안기며 그를 성공적으로 메이저에 안착시켰다. 단 네 작품 만에, 3년이란 단기간에 그가 이룩한 업적이었다. 이어 18번째 007시리즈 < 네버 다이 > 음악에 전격적으로 기용, 존 배리가 빠져나간 빈자리를 전통적인 사운드에 신세대적인 감각을 덧입혀 훌륭하게 메꿨으며, 비록 흥행엔 실패하고 말았지만 음악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던 < 고질라 >를 담당해 ‘사이즈의 영화음악’의 진수를 펼쳐 보였다. 그러나 너무 일찍 터트린 샴페인이었던 걸까. 그는 그 이후 인상적인 결과물을 낳지 못했다. 5편의 007 시리즈와 존 싱글턴과 마이클 앱티드 감독과의 유대, 에드가 라이트 같은 젊은 피와의 작업을 통해 다양한 사운드 지평을 넓혔지만, 데뷔 초기 그가 보여줬던 놀라운 임팩트에 비하면 현재의 필모가 다소 주춤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다만 최근 BBC 드라마 < 셜록 >의 성공과 30회 런던올림픽의 개·폐막식 음악 감독을 맡으며 역량을 다시금 뽐내고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다. <인디펜던스 데이>의 음악은 전통적인 할리우드 스코어의 규범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다. 데이비드 아놀드는 최대한 신디와 일렉트릭 악기를 배제한 채 100인조에 이르는 풀 오케스트라와 46인조의 코러스를 대동해 압도적인 고전 심포닉 사운드의 위용을 펼쳐 보인다. 마치 존 윌리엄스로 대표되는 70년대 재난물과 80년대 블록버스터의 기운을 모두 한데 합쳐놓은 이 엄청난 스코어의 박력은 지구를 박살 내는데 혈안이 된 에머리히의 비주얼적 야심에 못지않다. 그는 특히나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3개의 인상적인 라이트모티프를 가지고 인간과 외계인들 간의 혈전에 집중하는데, 가장 귀에 쉽게 들리는 건 <인디펜던스 데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 테마, 애국심을 팍팍 고취시키는 영웅적인 팡파르다. 승전보를 알리는 듯 희망적이고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이 곡조는 외계인들과의 전투에서 승리의 단초를 발견했을 때, 전쟁의 주도권을 거머쥐었을 때 얇고 높은 피콜로와 마칭 스네어를 곁들어 군악대스러운 편곡으로도 사용되는데, 브라스와 혼, 퍼커션이 한데 어우러지며 진격의 나팔을 힘차게 불던 과거 전쟁영화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예로부터 전쟁영화음악에 있어 말콤 아놀드나 존 에디슨, 론 굿윈과 벤자민 프랑켈 등 걸출한 작곡가가 많았던 영국이기에 그에 대한 간접적인 영향력도 무시할 순 없을 듯하다. 두 번째 모티브 세 번째 모티브 두 번째 모티브는 휴머니즘을 강조하고 등장인물들의 고뇌와 사연을 풀어내던 멜로드라마적인 테마로 스트링이 주가 되어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선율로 숨 가쁘게 달려온 영화에 여백과 여운을 불어넣는다. 종종 숭고하고 거룩한 합창대의 목소리를 빌어 더 강력하게 감정선을 자극하지만, 주로 단독으로 쓰이기보다 애국적이고 영웅적인 팡파르와 유기적으로 결합해 극적인 효과를 노리거나 다양하게 파생·변주돼 가족애 및 캐릭터들의 상호 연대감을 복돋아 주는데 주력한다. 마지막 모티브는 외계인 침공을 암시하는 어둡고 무거운 혼돈의 사운드로 울부짖는 혼과 질주하는 브라스를 전면에 배치해 압도적인 힘과 공포감을 느끼도록 설정했다. 마치 존 윌리엄스의 ‘임페리얼 마치’나 홀스트의 행성 중 ‘화성’을 듣는 듯 고전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위압감을 선사하는데, 다양한 퍼커션과 드럼을 활용해 침공에 대한 긴박감과 스케일을 극대화시켰다. 그들의 절대적인 힘 앞에서 무기력하게 당하고 마는 나약한 인간들의 참상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큐이기도 하다. 편곡자이자 지휘자인 니콜라스 도드의 솜씨가 두드러지는 부분으로 이 3개의 주된 선율은 서로 교차하고 충돌하며 얄팍하기 그지없는 영화에 입체적인 깊이와 실감 나는 무게감을 던져주었다. 데이비드 아놀드는 이 사운드트랙으로 그해 그래미상을 거머쥐었다. 사운드트랙은 96년 영화 개봉에 맞춰 BMG에서 발매되었지만 온전한 음원을 다 담은 건 아니었다. 팬들의 성화가 빗발치자 2010년 라라랜드 레코드에서 5,000매 한정으로 CD 2장, 총 130분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완전판을 발매했다. 데뷔 초기 번뜩이던 데이비드 아놀드의 위력적인 사운드와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롤랜드 에머리히는 최근 방한한 자리에서 차기작으로 <인디펜던스 데이> 후속편을 찍겠다고 공언했다. 2015년 7월 3일로 개봉일마저 공개한 상태다. 2000년 <패트리어트> 부터 공동 작업이 불발된 이후 에머리히는 같은 독일 태생의 영화음악가 해롤드 클로저와 호흡을 맞추고 있는데, 부디 제발 <인디펜던스 데이> 후속편에선 그들이 다시 재회하길 기대해본다. Victory Track List DISC ONE 1.1969: We Came In Peace 2.S.E.T.I.-Radio Signal 3.Mysto Bridge/Satellite Collision/ Destroyers Disengage/Russell Casse-Pilot 4.First Sighting/AWAC·Attack 5.The Darkest Day 6.Moving Day/Countdown 7.Cancelled Leave 8.Commence Lift-off/Parabolic Indenwhat? 9.Evacuation 10.Firestorm 11.Aftermath 12.Base Attack 13.Marilyn Found 14.Area 51/The Big Tamale/Formaldehyde Freak Show 15.El Toro Destroyed 16.Slimey Wakes Up 17.Target Remains/Rescue 18.The Death of Marilyn/Dad’s A?Genius 19.Alien Ship Powers Up 20.International Code 21.Wedding 22.The President’s Speech DISC TWO 1.Just In Case/Attacker Fires Up 2.The Launch Tunnel/Mutha Ship/Virus Uploaded 3.Hide!/Russell’s Packin’ (The Day We Fight Back) 4.He Did It 5.Jolly Roger 6.Victory 7.End Credits BONUS TRACKS 8.1969: We Came In Peace ?Alt. 9. Destroyers Disengage (No Choir) 10. Cancelled Leave -Alt. 11. Commence Lift-off -Alt. 12. Base Attack (Segment-Film Version) 13. Marilyn Found (No Choir) 14. Target Remains/Rescue -Alt. 15. Dad’s A?Genius -Alt. 16. Attacker Fires Up (Original Version-No Choir) 17. Virus Uploaded -Alt. 18. The Day We Fight Back (Original Version) 19.Jolly Roger -Alt. 20. End Credits (Segment, No Cho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