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쓰 프루프
- 감독
- 쿠엔틴 타란티노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커트 러셀, 쿠엔틴 타란티노, 로사리 도슨, 바네사 페리토, 조단 러드, 로즈 맥거완, 시드니 타미아 포이티어, 트레이시 토마스,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테드, 조 벨
1 인간은 영화관에 가는 동물이다. -조르조 아감벤 2 정상적인 관객은 자신이 욕망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기 위해 영화관에 가는 사람이며, 자신이 이미 인생에서 싫어하는 것을 영화관으로 보러 가지 않은 사람이다. -세르쥬 다네 3 일요일의 충무로는 처음이었다. 직접 차를 운전해서 간 것도 처음… 한때 매일같이 충무로에 가던 시절이 있었다. 충정로에 있던 회사에서 퇴근해 7011번 버스를 타고 매일경제본사 앞에서 내려 영한빌딩까지 걸어가 여자친구가 일을 마치기를 기다리던 20대 후반의 몇 년, 그리고 은평구에 있던 집에서 3호선을 타고 6번 출구로 나와 매일경제본사 맞은편에 있던 ‘동화삘딍’ 4층 사무실에서 아저씨들과 머리를 맞대고 한숨과 담배연기를 번갈아 내뱉으며 시나리오를 쓰던 30대 후반의 일 년.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다. 그때 충무로는 내게 해질 무렵의 골목, 커피와 생맥주, 닭꼬치, 돼지껍데기, 철판스테이크, 복지리, 통북어, 하루종일 가시지 않는 지독한 담배 냄새, 낡은 당구장, 서지 않는 택시 같은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영화였고(여자친구가 참여한), 그리고 영화였다(내가 연루된). 그리고 오늘, 40대가 되어 처음 가는 충무로 역시 영화가 될 예정이었다. 나를 모르고 나도 모르는 사람들의 영화. 영화들. 얼마나 다행인가? 내 영화가 아니라는 게… 4 영화란 무엇인가?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장 루이 뢰트라와 수잔 리앙드라 기그는 이렇게 요약한다. 코 앞에서 볼 수 있는 진정한 악마의 소굴, 왕관을 다투는 시장, 배움의 장소—말하자면 감정교육, 많은 사람들의 오락, 일부 사람들의 직업, 어떤 사람들의 열정, 여기저기서 채취해 온 1-2시간의 소재, 별 아래서 보내는 온종일, 대낮 같은 밤, 어두운 밤으로 빨려드는 불빛, 친구와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토론, 계속되는 이야기들, 역사의 단편, 움직임-지속의 덩어리, ‘현실’과의 아주 특별한 관계 설정(현실을 회피하시오, 그러면 현실이 당신을 따라가고, 현실을 따라가시오, 그러면 현실은 당신에게서 도망간다!), 위험할 정도로 서로가 닮아 있는 영화 속의 얼굴과 신체들, 진부하거나 기상천외한 대상들과 풍경들, 마치 우리가 항상 살았던 듯한 느낌을 갖는 상상 속의 저택과 또 다른 화려한 저택들, 일시적인 경험, 은밀하고 격렬한 열정이나 몸짓들, 나를 끌어들이고 빨려 들게 하는 방식, 또는 단숨에 혹은 한순간에 불확실하거나 형성중인 사고나 상상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방식, 사회, 사람들이 말한 것, 타인과 나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꿋꿋한 시선… 5 나는 이 목록에 두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브루스 윌리스와 니콜라스 케이지. 내게 영화는 브루스 윌리스다. 동시에 내게 영화는 니콜라스 케이지기도 하다.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 같다. 블록버스터와 컬트무비와 허섭쓰레기를 오가는 그들의 긴-긴 필모그래피에서 함께 출연한 영화가 단 한 편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라(그나마 브루스 윌리스가 출연한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 플래닛 테러 >와 쿠엔틴 타란티노의 < 데쓰 프루프 >를 ‘동시상영’으로 묶은 <그라인드 하우스> 중간에 삽입된 4편의 가짜 영화 예고편 중에서 롭 좀비가 연출한 <나치의 늑대여인Werewolf Women of the S.S.>에 니콜라스 케이지가 출연한 경우가 가장 근접함). 따라서 브루스 윌리스가 실어증으로 은퇴를 선언한 2022년 3월 31일은 영화가 죽은 날(the day the movie died)이다. 적어도 반쯤은 그렇다… 6 충무로를 다시 찾은 건 『마테리알』이 주최한 릴레이 발표대회 [오픈 스페이스: 영화를 가르는 패스]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아침 10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4월 16일과 17일 이틀에 걸쳐, 모두 여섯 명의 발표자가 발표를 한다고 했다. 토요일 한국 독립 영화 사운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 최지영(사운드 디자이너) 언제나 밝은 방에서 여러개의 창을 틀어놓고 / 윤원화(시각문화 연구자) 정당화하는 관점: 임흥순에 대한 불만 / 윤아랑(비평가) 일요일 비천한 영화를 위하여, 그 중에서도 한국 영화 / 함연선(마테리알 편집인) 문화로서 영화: 누가 도대체 진지한 표정으로 영화 이야기를 들을까? 당신도 / 강덕구(작가, 비평공유플랫폼 '콜리그' 운영자) 해적질과 영화 문화 / 한민수 모두 매력적인 주제들 가운데서 특히 내 눈을 잡아끈 것은 함연선의 ‘비천한 영화를 위하여, 그 중에서도 한국 영화’였다. 때마침 JD와 나는 봉준호, 홍상수, 이창동 같은 이름에 전적으로 기대지 않고, 관객수로 줄을 세우지도 않으면서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를 이야기하는 방법을 고민하던 참이었다. 우리는 그 모든 영화들이 없었던 것처럼 굴고 싶지 않았고, 누구도 모르는 영화를 우리가 ‘발굴’한 것처럼 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행사 안내 페이지를 캡쳐해서 JD에게 보냈다.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수학 학원 선생님의 질문에 "화산고"라고 대답한 학생은 망신을 당하고 맙니다. '차라리 <스파이더맨>이라고 말했다면 괜찮았을까...?' 수치의 순간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한 사춘기 청소년은, 결국 유사-스노브로 성장하고...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영화 경험의 근원에는 "비천한 영화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 원고를 위해 저는 여기에 가야겠어요, 그리고 어쩌면 임창정에 대해 쓸지도 모르겠네요, 쓰고 싶지 않지만요. 쏘옥, 소리와 함께 아이메시지가 전송되었다. 답장은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메시지를 작성 중이라는 말풍선조차 뜨지 않았다. 나도 구태여 오픈 스페이스 날짜가 원고 마감일 이후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원고 마감일을 어길 수밖에 없다는 말은… 7 왜 모든 영화 관련 이벤트(GV, 강연, 세미나, 기타 등등)는 내가 가기 힘든 시간만 골라서 열리는지 모르겠다. 씨네필들은 가정이 없나? 아니면 가정이 없는 것처럼 가정하고 살아가거나… 다네는 말한다. “영화 팬은? 헛되이 두 눈을 크게 껌뻑거리는 사람이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사람이며, 프로다운 ‘영화 팬(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는 삶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는 행위들이다.” 뢰트라와 기그는 여기에 축제가 아직도 진행중이라고 믿는 표정을 지으면서 최대한 아주 늦게 도착하는 것이 틀림없이 사람들이 영화 팬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이라고 덧붙인다. 물론 나는 영화-어쩌고가 아니며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영화 팬의 핵심을 수행하긴 했는데, 짧게 이야기하면 이렇다. 내가 차를 몰고 갔다는 사실은 앞서 말했다. 오픈 스페이스를 마치고 처갓집으로 아내와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철거된 동화빌딩과 매일경제본사 사이에 있는 노상공영주차장(주말과 공휴일에는 무료개방)에 주차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빈자리가 없었고 그래서 (저렴한 금액으로) 주차할 곳을 찾아 빙글빙글 돌다보니 시간이 흘렀다. 결국 (구)극동빌딩 (현)남산스퀘어빌딩에 차를 세우고 오픈 스페이스가 열리는 대한극장 뒷골목의 서울지역영화교육허브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30분도 더 늦은 시간이었다. 문앞에 선 채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일정에 따르면 첫 번째 발표에는 2시간이 배정되어 있었고, 그래서 나는 축제가 아직도 진행중이라고 믿는 표정 을 지으면서 발표회장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설상가상, 빈자리가 없어 발표자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맨 앞자리까지 빽빽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으며… 8 한숨을 채 돌리기도 전에 발표가 끝나버렸다. 스탠리 카벨은 누구나 자신이 지금 여기 있다는 것, 자신의 인생이 이 시간과 장소라는 지점에 이르게 된 것, 자신의 역사가 펼쳐져서 이 방에, 이 길에, 이 곳에 이르게 된 것을 잠깐이나마 기이하게 여긴 적이 있을 것이라고 썼는데, 그때 내가 그랬다. 질의응답이 시작되었지만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졌다는 생각에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문윤기를 보았고—나와 그는 JD를 통해 알게 된 사이였다—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현실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실은 나와 ‘트친’인 영화평론가이고, 그밖에도 이 좁은 장소에 내가 타임라인에서 보아 왔던 사람들이 득시글하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기이함the uncanny은 영화에서는 보통의 경험이다, 라고 스탠리 카벨은 계속해서 쓴다. 도주, 구출, 우연의 만남이나 근처에 있는 탓에 인생이 변모해버리는 것—이러한 우연과 만남은 영화의 모든 장르를 지탱해주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연한 만남은 우연한 만남일 뿐 인생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는 건 또 아닌데, 모든 만남은 크건 작건 우리 안에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위대한’ 영화가 우리의 인생을 바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수백 편의 ‘비천한 영화’는 우리의 인생을 바꾼다, 제법 높은 확률로… 9 카벨은 음악이나 문학과 달리 영화의 경우에는 보통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높은 레벨의 영화를 진정으로 좋아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전형적인 영화를 모른다면 높은 레벨의 영화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보통의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 말하느냐다. 카벨 스스로 이미 ‘보통의 영화’와 ‘높은 레벨의 영화’를 구분 짓고 있는 판에 하물며 ‘비천한 영화’는 또 어떻게 말할 것인가? 질의응답 시간에 이어진 것도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2000년대 초중반에 몰려 있는 비천한 영화들, 혹자는 OCN 영화들이라고도 부르는 그것들이 영화 경험의 근원에 있다고 해도 그것을 굳이 복원시킬—비평적 공론장으로 끌어올릴—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나왔고, 현재의 영화 담론이 특수한 세대적 경험을 보편으로 인준하는 시스템 속에서 작동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영화들을 비평의 언어로 끌어들여 담론장에 균열을 낼 필요가 있다는 반론이 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나를 놀라게 하고 두렵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00년생이어서, 02년생이어서, 90년대 후반생이어서 오늘 언급된 < 달마야 놀자 >, < 신라의 달밤 >, < 두사부일체 >, < 조폭 마누라 > 같은 영화를 한 편도 보지 못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여기서 내가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인가? 다행히 그건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마 나는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10 항상 12살 짜리가 있는 법이고 그들에게 맞는 책이 역시 있는 법이다. 스탠리 카벨은 말한다. 하지만 영화는, 걸작이 아닌 다음에야, 예전 그대로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어지는 카벨의 목록: 찰스 로튼과 클라크 게이블의 <전함 바운티>, <십자군>, <유니온 퍼시픽>, <새벽의 성찰>, < 캡틴 블러드 >, <알제리>, <찰리 챈>, <폭풍의 언덕>, < 스텔라 달라스 >, <킹스 로우>, <교수와 미녀>, 로날드 콜만의 < 젠다성의 포로 >, < 마음의 행로 >, < 잃어버린 지평선 >, <후아레즈>, <데드 엔드>, <모히칸족의 최후>, <부러진 화살>, <장군, 새벽에 죽다>, <밀드레드 피어스>, <오페라의 유령>, < 스트라이크 업 더 밴드 >, <비에 노래하며>, < 캣 피플 >, <환상의 여인>, <도시의 절규>, <안녕, 내 사랑>, <화이트 히트> 등 그밖에 백 여편의 다른 영화들. 카벨은 계속해서 말한다. 이 영화들과 보낸 시간은 정말 전율의 시간이나 나날이었다. 중대한 순간이었지만 아주 일순간이었다. 기억과 회상에서만 포착 가능한 시간으로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다. 지금 당신이 이 영화들을 처음 본다면 재미있게 볼 뿐 아니라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결코 그 당시 내가 알았던 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오해하면 안 된다. 카벨은 지금 정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지식이나 교양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개인의 영화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렇다: < 동감 >, < 번지 점프를 하다 >, < 친구 >, < 엽기적인 그녀 >, < 킬러들의 수다 >, < 공공의 적 >, < 결혼은, 미친짓이다 >, < 후 아 유 >, < 라이터를 켜라 >, < 연애소설 >, < 광복절 특사 >, < 품행제로 >, < 클래식 >, < 동갑내기 과외하기 >, < 선생 김봉두 >, < 와일드 카드 >, < 싱글즈 >, < 오! 브라더스 >, < 황산벌 >, < 그녀를 믿지 마세요 >, < 어린신부 >, < 효자동 이발사 >, < 늑대의 유혹 >, < 바람의 파이터 >, < 시실리 2km >, < 알포인트 >, < 슈퍼스타 감사용 >, < 귀신이 산다 >, < 말아톤 >, < 잠복근무 >, < 혈의 누 >, < 사랑니 >, < 광식이 동생 광태 >, < 태풍 >, < 작업의 정석 >, < 싸움의 기술 >, < 흡혈형사 나도열 >, < 음란서생 >, < 달콤, 살벌한 연인 >, < 사생결단 >, < 구타유발자들 >, < 천하장사 마돈나 >, < 미녀는 괴로워 >, < 1번가의 기적 >, < 좋지 아니한가 >, < 이장과 군수 >, < 즐거운 인생 >, < 스카우트 > 기타 등등… 이것은 내가 왓챠피디아에 평가한 1499편의 영화 중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를 구작순으로 필터링한 것 중에서 봉, 홍, 박, 이 등의 작품과 여기에 제목을 쓴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작품을 빼고 나열해본 것이다. 모든 영화가 내게 전율을 줬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한두 장면이라도 재미를 느낀 부분이 있었다고 말해야겠다. 나 역시 빙크스 볼링처럼 “못 만든 영화라도 일단 빠져들면 무척 행복”한 관객이기 때문이다. 11 다시. 문제는 이런 영화를 어떻게 말하느냐다. 카벨은 모든 시대의 12살에게 맞는 공통의 책들이 있는 반면, 서로 다른 시대의 12살에게는 그때그때의 영화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걸작 리스트는 공유가 가능하지만 어쩌면 평범하거나 비천한 영화들의 리스트는 공유 불가능한 게 아닐까(“지금 당신이 이 영화들을 처음 본다면 재미있게 볼 뿐 아니라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결코 그 당시 내가 알았던 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사진에 대한 바르트의 구분처럼, 걸작은 문화적으로 구성된 스투디움의 영역이지만 비천한 영화는 보는 사람의 주관에 달린 푼크툼 같은 게 아닐까? 여기에는 다양한 층위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을 위해서는 또 다른 자리가 필요할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만이 (여전히) 남아 있다. 걸작을 나열하지도, 천만 영화 목록을 훑지도 않으면서. 다시 한 번,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우리는 한국 사람… 12 우리가 하려는 게 비평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둬야겠다.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내게 필요한 건 책이 아니라 카메라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겠다. 오픈 스페이스에서 나왔던 이야기를 곱씹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 것도 물론 좋지만, 그보다는 오픈 스페이스 현장을 찍는 편이 나았을 거라는 말이다. 에세이 필름을 만들어야 하니까. 늘 그랬던 것처럼 영화 그 자체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니콜라스 케이지가. 최근 케이지는 < 참을 수 없는 무게의 미친 능력 >에서 한때 잘나가던 슈퍼스타였지만 이제는 빚더미에 올라 아무 영화나 막 찍는 ‘닉 케이지’를 연기했다. 그가 자신의 광팬이자 억만장자 마약왕인 페드로 파스칼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다가 예기치 못한 소동에 휘말리는 이야기라는데 내가 본 건 트위터에 돌아다니는 짧은, 그러나 영감으로 넘치는 클립이다. 으리으리한 페드로 파스칼의 집. 파스칼이 소파에 앉아 있는 케이지에게 와인을 따라준다. 케이지 고마워. (사이) 말 좀 그만 돌리고 대답해봐. 세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가 대체 뭐야?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파스칼, 결심한듯 내뱉는다. 파스칼 패딩턴 2 . 비명을 지르며 잔을 내려놓는 케이지. 케이지 뭐?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이랑 <패딩턴 2>?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 말은, 잘난 척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파스칼 영화 보는 내내 울었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영화였다고. 케이지 야, X까! 장면 바뀌면, 화면을 바라보며 코를 훌쩍이는 케이지의 모습. 나는 JD에게 링크를 보내고, 기다린다. 여전히 답이 없다. 말풍선도… *다음 책들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다. [영화를 생각하다](장 루이 뢰트라.수잔 리앙드라 기그, 김영모 옮김, 동문선, 2005) [눈에 비치는 세계](스탠리 카벨, 이두희.박진희 옮김, 이모션북스, 2014)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 본 토마호크 >라는 영화가 재미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호러영화, 고어를 좋아하는 지인들이었다. 그런데 서부극이었다. 서부에서 식인 부족을 만난다는 이야기. 이상하지는 않다. 공포영화 장르에서, 외딴곳에 사는 식인종이나 괴물을 만나는 것은 익숙한 관습이다. 토비 후퍼의 <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 >(1974)과 웨스 크레이븐의 < 공포의 휴가길 The Hills Have Eyes >(1977)부터 롭 슈미트의 < 데드 캠프 Wrong Turn >(2003)로 이어지는 살인마 계보도 있고, 루게르 데오다트의 <카니발 홀로코스트>(1991)처럼 오지의 야만인을 찾아가는 유형도 있다. <카니발 홀로코스트>를 리메이크한 일라이 로스의 < 그린 인페르노 >(2013)는 한창 개발이 되고 있는 아마존에 살고 있는 식인 부족의 기괴한 풍습을 전시한다. < 본 토마호크 >는 공포영화의 관습을 투영시킨 서부극이다. 서부 개척시대, 시골 마을인 브라이트 호프에서 사람들이 납치된다. 의사인 사만사와 보안관 조수. 보안관인 헌트는 그들을 구출하기 위한 팀을 꾸린다. 나이 든 보안관 조수인 치코리, 사만사의 남편인 아서, 한때 사만사를 짝사랑했고 사격술이 뛰어난 브루더. 겨우 네 명이다. 하지만 식인 부족도 인원이 많지 않다. 황무지에서 살아가는 식인 부족은 겨우 종족을 보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원주민들에게는 끔찍한 적일 수밖에 없고, 식인만으로 살아가기에 식량도 부족하다. 심심할 수밖에 없다. 단 네 명이 나섰는데, 아서는 지붕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상태다. 하나는 노인이고, 하나는 거동이 불편하고,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둘뿐이다. 적들도 계속 나오는 게 아니다. 부족이 살고 있는 영역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별다른 사건도 없다. 좀도둑들이 나타나 말을 훔쳐가려는 정도. 너른 서부를 달려가니 마주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중에 들러 작은 에피소드를 보여줄 마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네 명의 소소한 갈등이 벌어질 뿐이다. 시나리오 작가이며 촬영도 했던 S. 크레이그 찰러는 < 본 토마호크 >가 연출 데뷔작이다. 러닝타임도 짧지 않다. 무려 2시간 12분이다. 그런데도 크게 지루하지 않고, 적절한 긴장을 유지한다. 인물의 개성이 뚜렷하고, 갈등의 지점도 날이 서 있다. 커트 러셀이 연기하는 헌트는 거의 도인 같은 풍모를 보여준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모든 것을 헤아리며 해결책을 찾는다. 누구에게도 굽히거나 아부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치코리는 말이 많다. 생각도 많고, 말도 많고, 겁도 많지만 선을 넘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은 분명하게 한다. 그가 해야 할 일이 별로 없기는 하지만. 아서는 사만사를 사랑한다. 하지만 다리가 부러진 상태다. 소를 몰고 먼 길을 오고 가는 카우보이인 아서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사만사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 성격이 급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할 줄 아는 남자다. 브루더는 수염을 멋지게 기른 신사다. 수백 명의 원주민을 죽였다고 말하는 남자. 하지만 그 사실이 결코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이어 말한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순진하지만 다혈질인 아서와 자주 충돌하지만 팀으로서의 그들은 잘 어울린다. 크레이그 찰러는 헌트, 치코리, 아서, 브루더를 적절하게 활용하며 작은 긴장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 < 본 토마호크 >는 결코 과장하거나 대단한 스펙터클로 눈길을 끌려 하지 않는다. 고어 마니아들이 좋아할 만한 장면은 분명히 있다. 머리 가죽을 벗기고, 몸을 둘로 갈라내고, 팔다리가 잘리는 장면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한다. 사람이 죽는 것도 별 게 아니다. 이곳은 공정한 결투가 벌어지는 공간이 아니다. 부족은 식량을 얻기 위해 사냥을 하는 것이고, 헌트와 동료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어쩔 수 없이 서로 죽여야만 한다. 대단한 일도 아니고, 심각하게 고민할 일도 아니다. 그런 고어 장면들이기에 오히려 눈에 확 들어온다. 일라이 로스가 < 그린 인페르노 >에서 의도적으로 식인의 풍경을 전시했던 것과는 반대다. 이곳에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식인 부족은 단지 먹는 것만이 아니라 여성을 대하는 야만의 풍습 등 모든 면에서 끔찍하다. 그들에게 소위 ‘인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남고, 종족을 유지하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존재 이유다. 그런데 인간은 어떨까? 소위 ‘인간성’을 갖고 있는 인간은 과연 그들과 다를까? < 본 토마호크 >의 첫 장면은 무법자들이 야영을 하는 사람들의 목을 베는 장면이다. 지나가는 이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의 돈과 소지품을 가로챈다. 그런 살인자들이 도망을 치다가 식인 부족의 신성한 표식을 건드리고, 하필 살아남은 이가 브라이트 호프로 들어오게 된다. 그들을 쫓아온 부족들에게 함께 있던 의사도 납치되고. 식인 부족의 행태는 아주 끔찍하지만, 가장 야만적인 행태로 드러난다는 것 이외에는 문명인들의 행태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 본 토마호크 >는 배우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헌트 역의 커트 러셀은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배우다. 존 카펜터의 < 뉴욕 탈출 >(1981), < 괴물 >(1982), < 빅 트러블 >(1986)의 커트 러셀은 최고였다. 싸구려 장르영화의 주인공으로 딱 어울리는 역할을 연기하면서도 커트 러셀은 품위가 있었고, 과장되지 않았다. 그런 커트 러셀의 캐릭터를 가장 잘 이해한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였다. 그리고 < 데쓰 프루프 >와 < 헤이트풀8 >에서의 커트 러셀은 다시 한 번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본 토마호크>는 저예산 장르영화의 공식을 따라가면서도 자신만의 개성과 호흡으로 긴장을 유지하는 수작이다. 서부극으로서도, 공포영화로서도 애매하지만 둘을 적절하게 결합시켜 보기에 좋은, 순간 짜릿하기도 한 수작.
오래 쉬고 다시 시작한다. 9월까지 ‘영예의 시대’를 중심으로 존 포드라는 거대한 세계의 일단을 둘러보았다. 이제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존 포드 영화라는 단순한 기준으로 여정을 계속하려 한다. 첫 번째 영화는 < 태양은 밝게 빛난다 The Sun Shines Bright >(1953)이다. 여러 인터뷰에서 포드는 이 영화를 < 젊은 날의 링컨 > < 웨건 마스터 > < 도망자 > 등과 함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았다. 감독 자신이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는 영화는 가장 좋은 영화라는 뜻이 아니라, 가장 그의 개인적인 영화라는 뜻일 것이다. 스튜디오 시스템 아래서 작업했고 성공했지만 존 포드는 개인적인 영화 만들기의 시도를 멈춘 적이 없다. <태양은 밝게 빛난다>는 그 시도가 낳은 한 정점이다. 1. 1900년대 초, 미국 켄터키 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죽은 창녀를 실은 영구 마차가 막 출발했다. 느리게 움직이는 마차에는 동료 창녀들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고 마차는 마을 초입에서부터 지방판사 선거가 진행 중인 마을 회관을 지나 장례가 치러질 교회에 이를 것이다. 영구 마차의 등장은 마을 전체를 긴장하게 만든다. 죽은 창녀는 전직 남군 장성 페어필드의 아들과의 사이에 오래전 딸을 낳았고, 그 아들은 불명예스럽게 죽었으며, 레이크 박사에게 입양돼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한 딸 루시는 최근에야 자신의 출생 비화를 알게 되었다. 프리스트 판사와 몇몇 노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근엄한 페어필드 장군은 루시가 자신의 손녀임을 부인해왔다. 병든 창녀는 죽어가면서 자신의 장례식을 제대로 치러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동료 창녀들은 전날 밤 프리스트 판사를 찾아와 장례식 추도사를 부탁했다. 재선을 노리는 프리스트 판사는 이 부탁을 들어주는 순간 자신이 낙선될 것임을 알고 있다. 이미 그는 술꾼으로 알려져 있고 영향력이 막강한 부인회가 창녀들을 마을에서 쫓아내려 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대답을 미룬다. 창녀들의 영구 마차는 서서히 마을 중심부로 다가온다. 길 가에 서 있던 프리스트 판사는 말없이 장례 마차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고 부인들은 질겁하지만 몸집 큰 한 부인도 무리에서 빠져나와 판사 뒤를 따라 조용히 걷는다. 늙은 의사와 목수도, 식료품점 주인도, 이름 없는 노인들 몇몇도 그들 뒤를 따라 묵묵히 걷는다. 선거를 치르느라 떠들썩하던 마을 회관 앞에 마차가 이르자 모두 침묵에 빠진다. 그를 지켜보던 죽은 창녀의 딸 루시는 마차에 올라타 창녀들 옆에 앉고, 그녀를 사랑하는 방탕하지만 순정적인 청년 애쉬비도 그 뒤를 따른다. 우드포드 노인은 집 앞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다 무언가 결심한 듯 집으로 들어간다. 고요한 장례 행렬은 그렇게 교회 앞에 도착한다. 이 영화를 본다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발자국 소리와 장례 행렬의 느린 움직임 외에는 대사도 배경음악도 없이 7분 가까이 지속되는 이 장면은 보는 이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흔든다. 이 장면 앞에서 나는 넋을 잃고 눈앞이 흐려져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여기에 무슨 말을 보탤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 자문해볼 수밖에 없다. 무엇이 이 장면을 그토록 감동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장례식 행렬 2. 우선 이 장면에서 장례행렬에 가담하는 인물들의 결단 자체가 주는 감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선택을 윤리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왜 도덕이 아니라 윤리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선 얼마간의 우회가 필요할 것 같다. 여기서 도덕은 공동선의 규범과 실천의 영역을 지칭하는 단어로 한정해 사용한다. 도덕은 주체의 외부에서 주체 쪽으로 요구되는 준칙이다. 반면 윤리는 공동선이라는 공리적 판단이나 효용성과는 무관하게 주체의 내부에서 생성되는 자기 명령을 지칭한다. 존 포드가 그 장르의 대부처럼 여겨지는 서부극은 가장 도덕적인 장르로 간주되어 왔다. 공동체의 악과 그에 맞선 도덕적 영웅인 서부사나이의 대결 이야기.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에는 도덕적 대립 구도가 없다. 이 공동체에서 제거되어야 할 악은 특정한 실체로 등장하지 않으며, 한 에피소드의 소재인 인종주의 외에는 특정한 악덕도 지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도덕관념을 명확히 갖고 있는 주체는 부인회이며, 그들은 술과 창녀촌을 공동악이라고 생각한다. 프리스트 판사는 기묘한 존재다. 그는 판사이고 정치인이며, 전통을 중시하는 남군의 장교 출신으로 군인의 정체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판사, 정치인, 군인은 제도가 세속적 도덕의 실행을 위탁한 직업들이다. 우리는 그의 또 다른 정체성을 상정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의 이름(Priest)이 뜻하는 성직자다. 물론 그는 교회에 복무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성직자가 아니며 성직자 같은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수준 즉 종교적 수준의 선택이 요구되는 상황에 놓인다. 이 상황이 그를 다른 의미의 성직자로 간주하게 만든다. 창녀들이, 어떤 목사도 자기 앞길을 망칠 일을 하지 않을 게 뻔해, ‘친절한’ 프리스트를 찾아와 장례식 추도사를 요청했을 때, 판사, 정치인, 군인으로서의 프리스트는 이 난제에 답할 수 없다. 그의 난제가 걸려 있는 영역은 공동선의 도덕이 아니다. 도움이 필요했던 창녀는 이미 죽었고, 다른 창녀들은 조만간 추방될 것이며 프리스트는 부인회의 창녀 추방에 반대한 적이 없다. 곧 추방될 창녀들이 주재하는 장례 참여 여부라는 극히 사소한 행위는 공동선과 무관할 것이다. 그는 또한 직업적 성직자가 아니므로 교회 제도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교리 해석자가 될 수도 없다. 그러니까 그는 신의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자격이 없다. 달리 말하면 그의 행위가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보증이 그에게는 없다. 그를 성직자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가 대답 없는 신의 뜻을 어떤 보증도 없이 따른다고 간주될 때이다. 여기서 대답 없는 신의 뜻과 윤리의 자기 명령은 정확히 동격이다. 두 부류의 종교적 인간이 있을 수 있다. A는 이렇게 말한다. ‘신의 뜻이 이러하다. 그러므로 나는 신의 그러한 뜻을 따른다.’ B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신의 뜻을 모른다... 나는 신의 뜻을 따른다.’ 프리스트는 후자에 속한다. 윤리의 자기 명령도 같은 방식으로 이뤄진다. ‘나는 이것을 해야하는 다른 이유를 모른다... 다만 나는 그것을 해야하므로 한다.’ 프리스트의 선택을 윤리적이라고 말하는 건 이런 의미에서다. 행위의 동기를 어디에도 귀속시킬 수 없을 때, B의 경우라면 그 동기를 귀속시켜야 할 신의 뜻이 텅 비어있을 때, 그것은 온전히 자기 명령이 되며 우리는 그 행위를 윤리적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런 정의를 우리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교통사고의 위험에 처한 아이를 구한 사람에게 어떻게 자신도 크게 다칠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는 지금 질문에 정확히 답하고 있는 게 아니다. ‘왜 그랬느냐’는 질문에 ‘그래야 하니까 그랬다’라는 건 대답이 아니다. 자기 명령으로서의 윤리는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없다. 동기, 이유, 원인의 자리가 비어있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의 동기를 묻는 질문에 조리 있게 대답하는 사람보다 대답을 찾지 못해 난처해 하는 사람이 더 윤리적이라고 느껴진다면, 우리가 윤리의 중핵이 온전히 자기 명령에 있다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고전적 서부극이 도덕적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서사의 차원이고, 서부사나이는 오히려 윤리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의 준칙은 ‘남자는 할 일을 한다’는 것이고 일이 끝나면 말없이 뒤돌아서 떠나기 때문이다. 그의 과묵함은 단순한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그의 결단이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라는 윤리적 차원에 있음을 방증하는 표지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라는 이 단순하고 흔해빠진 표현이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법이다. “정언명법은 더 이상의 어떤 목적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서의 행위를 드러내는 것이다.”(「실천이성비판」) 가언명법은 반대로 “다른 어떤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행위를 드러내는 것이다. 칸트는 윤리의 자기명령이라는 차원을 가혹할 만큼 엄격하게 정식화한다. 윤리(도덕적 가치)는 정언명법에 따라 “오직 의무로부터” 행위할 경우에만 인정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직’은 공리적 판단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정념을, 심지어 우리가 보통 선하다고 간주하는 감정인 연민과 동정심마저 배제한다. 만일 아이를 구한 의로운 사람이 ‘남을 돕는 것은 기쁜 일이므로’, 혹은 ‘아이가 불쌍해서’라고 대답한다 해도 칸트는 그 행위에 ‘도덕적 가치’가 없거나 부족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에게 윤리는 ‘순수 형식’이다. 칸트의 정언명법으로서의 윤리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물론 많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정언명법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은 실은 사회적 규범이 내면화된 초자아가 아닌가(프로이트). 순수 형식이 어떻게 행위를 촉발하는 동기라는 질료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결국 욕망 혹은 충동의 문제가 아닌가(라캉). 칸트의 의무는 결국 선험적으로 식별될 수 있는 악을 전제한 뒤 그것의 반대편에 자리잡은 자명한 규범들의 체계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바디우). 이런 질문들에 답하려는 치열한 사유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 사유가 진리의 윤리학으로 귀결되지 않기란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 진리(혹은 실재, 사건)에의 충실성이 윤리라면, 윤리라는 영역이 따로 설정될 필요가 있을까. 달리 말해, 진리가 총체적이거나 규범적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사건적(혹은 위반적)이며 열린 지평으로 개시되는 것이라면 윤리의 내용은 이미 진리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닐까. 또한 정신분석학자들의 논변 혹은 진리의 윤리학이 흔히 인용하는, 자기 눈을 찌르는 오이디푸스의 사례에서처럼 상징계의 의미가 완전히 소진되고 실재와의 대면이라는 무시무시한 순간에 이르러서야 윤리가 드러난다면, 일상적 영위에서 윤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상정되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런 반문은 이론적인 수준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에서 프리스트의 행위를 진리-사건-실재의 영역에 위치 짓지 않고도 윤리적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방금 구운 빵을 대접하는 빵집 주인의 행위는 진리나 미의 추구와 무관한 지극히 단순한 선의에서 비롯된 윤리적 행위가 아닌가. 혹은 TV 드라마 <유나의 거리>에서 곧 요양원으로 보내져야 하는 치매 노인을 콜라텍으로 데리고 가서 마지막 춤을 추게 도와주는 창만의 행위를 윤리적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우리를 종종 감동케 하는 건 그 순간의 충만함 외에는 어떤 효용도 어떤 깊이도 없는, 카버 소설의 제목대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런 단순한 선의의 행위가 아닌가. 우리는 프리스트와 빵집 주인과 창만에게 행위의 동기를 듣지 못했고, 그들의 행위를 자기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물론 말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정념적 동기가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일 것이다. 그 행위가 그것을 목격하는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도 일정한 기쁨과 만족감을 준다는 사실을 그 텍스트들은 감추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칸트의 정언명법에 동의한다 해도, 일체의 정념 배제라는 차원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어려우며, 윤리와 정념의 관계가 매우 엄격한 사유를 요구하는 까다로운 의제임을 뜻한다.(이것은 라캉의 욕망이론으로 칸트의 윤리를 재해석하려는 「실재의 윤리」(알렌카 주판치치)의 중심 의제이기도 하다.) 사소한 선의의 행위를 윤리와 연관 짓는 것은 사실상 엄격한 사유로부터 퇴각하는 것이다. 윤리에서 선의의 정념을 배제하지 않으며 진리-사건-질재의 영역까지 밀고 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이 지향한다고 가정되는 진, 선, 미의 영역을 어느 정도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선을 ‘(진리의) 깊이도 (공동선의) 효용도 없는 자기충족인 선의’라는 선험적인 명제로 받아들여 이것을 윤리의 내용 가운데 하나로 삼는 절충적인 사고이다. 이것은 사실상 진리의 윤리학과 (공동선이 아닌) 선의 윤리학을 동시에 긍정하는 엄격하지 않은 지적 태도다. 그것이 자기명령인 한 주체의 수만큼 많은 윤리학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며, 윤리가 일반 명제의 주어가 아니라 개별 진술의 술어 자리에 놓여야 함을 뜻한다. 사소한 선의의 행위를 윤리적이라고 말하기 위해, 이런 퇴각과 절충이 불가피해졌다. 절충주의를 돌파할 수 있는 또 다른 사유의 길을 탐색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과 내 능력 밖에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의심은 지워지지 않는다. 혹시 사소한 선의에 대한 이런 열중이 일종의 도피주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진리의 개시, 해방의 정치에 대한 체념과 반지성적 염세주의가 ‘투쟁의 형식’으로서의 윤리가 아니라 사소한 선의에 몰두하게 만든 건 아닐까. 혹시 절충이라고 말하면서 내심으로는 진리의 윤리학을 사실상 포기하고 이젠 사소한 선의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의 서부사나이는 더 이상 ‘남자는 할 일을 한다’가 아니라 이제 ‘남자는 (사소한 선의의 행위 외에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요컨대, 21세기의 관객인 내가 프리스트의 선택에 감동받는 건 이런 도피의 차원과 연관되어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이 질문을 짊어지고 있을 뿐 그것에 정확히 답할 수 없다. 다만 이 질문이 존 포드 서부극의 근본적 질문 가운데 하나라는 점만 상기하고 싶다. 단지 ‘서부’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만 빼면 여타 서부극과 무관해 보이는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존 포드의 서부극으로 부를 수 있다면 그 질문 때문이다. 그 질문을 말하기 위해 하나의 도식을 제시하고 싶다. 3. 고전적 서부극에서 남자는 할 일을 한다. 그 일은 공동악을 제거하는 것 즉 공동선으로서의 도덕적 행위이다. 도덕적으로 자명한 일을 서부 사나이는 윤리적으로 행한다. 하지만 여기서 도덕과 윤리의 일치는 사후적인 것일 뿐 선험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전적으로 임의적이고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것이다. 소설 「칼의 노래」에서 김훈이 서술하는 이순신의 태도도 이것이다. 이순신을 움직이는 건 왕에 대한 충심도 애국심도 아니다. 다만 그가 ‘해야할 일’이 충과 애국에 결과적으로 부합했을 뿐이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적의 적’이라는 이미 주어진 자리였을 뿐이다. 그는 이렇게 독백한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 내 무와 충이 소멸해주기를 바랐다.” 도덕과 윤리의 동반은 임의적이고 불안정하다. 존 포드의 서부극은 그 임의성과 불안정성을 노출한다. 포드 서부극에서도 남자는 할 일을 한다. 그런데 그 일은 ‘우연히’ 공동선이다. < 역마차 >의 링고 키드는 죽은 형제의 복수를 위해 플러머 형제를 처단한다. 그런데 마침 그들은 공동체의 악이었다. < 수색자 >의 이산 에드워즈는 형의 가족의 복수와 납치된 조카 데비의 구출을 위해 코만치 일당을 추격한다. 그런데 마침 코만치 일당은 공동체의 위협이었다. 링고와 이산은 공동체에 근본적으로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다. 링고는 탈옥수이자 범법자로서 결국 공동체를 떠나며, 이산은 자신의 복수 시도가 공동체에 더 큰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는 마을 사람들의 경고를 무시한다. < 황야의 결투 >에서 와이어트 업은 자신의 소 떼가 도둑맞지 않았다면 툼스톤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포드 서부극에서 도덕과 윤리는 위태롭게 연대하거나 간혹 대립한다. 어느 경우에도 공동선의 도덕은 자명한 것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영웅의 사적 복수와 공동선의 사후적 일치의 서사 조작술은 오늘의 대중영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동선을 사적 복수라는 정념으로 보충하는 데 그친다. 공동선의 도덕은 질문되지 않은 채 다만 사적 복수라는 공동선 외부의 동기로부터 정념의 에너지를 공급받는 것이다. < 택시 드라이버 >(마틴 스콜세지, 1976)는 이 임의적 일치의 가장 냉소적 패러디 가운데 하나이며, 미국 TV드라마 < 덱스터 >는 가장 영리한 패러디 가운데 하나이다. < 데쓰 프루프 >(쿠엔틴 타란티노, 2007)는 임의적 일치 여부를 놓고 벌이는 교활한 게임이다. 하지만 많은 대중영화의 영웅서사에서 그 일치의 임의성은 감춰진다.)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의 공동체에는 공동악이 등장하지 않으며 복수 서사도 작동하지 않는다. 남군 문화와 북군 문화, 백인과 흑인, 부인과 창녀의 차이가 갖가지 갈등을 빚어내지만, 공동체 전체의 생존이 걸려있던 다른 서부극에 비하면 이런 갈등들은 사소한 것이다. 이 사소한 갈등들을 정돈할 수 있는 공동선의 도덕적 규범은 불투명하다. 창녀들의 장례식에 참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갈등들 중에서도 가장 사소한 것이다(예컨대 창녀들의 생존권이 걸려 있는 창녀 추방 여부보다 훨씬 사소하다). 가장 사소한 의제에 프리스트 판사의 명예와 사회적 지위 전부가 걸려 있다. 포드는 여기서 도덕과 윤리의 불안정한 관계로부터 오직 윤리만이 문제 되는 상황으로 이행한다. 존 포드의 서부극은 도덕의 서부극이 아니라 윤리의 서부극이다. < 역마차 >의 주정뱅이 의사 닥 분은 “내가 누구라고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겠어”라고 중얼거리는데, 포드의 영웅들은 대개 그렇게 생각하는 듯,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는다.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서부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서부’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의 불안정한 동반에서 오직 윤리만이 문제되는 상황으로의 이행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포드 서부극의 윤리의식이 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프리스트 판사는 공동선으로 보충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는 윤리의 실행자라는 점에서 포스트 서부사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리스트가 사는 세상은 이런 것이다. 적이 사라지거나 비가시화하면 적의 적이라는 나의 자리도 확정되지 않는다. 세상은 여전히 나쁘지만 희생양(강간범의 누명을 쓴 흑인 소년)을 가상의 적으로 삼아 분노를 해소하려는 것은 집단적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일상의 진부함과 그 진부함을 버텨내는 기교만 남아 있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지 않으면 심장박동이 회복되지 않으며 적의 적으로 싸웠던 시절의 향수에 젖는 것 외엔 낚시와 춤과 소란, 로맨스의 대리만족에 몰두한다. 이 모든 건 프리스트의 증상이다. 그러다 죽은 한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 가장 사소한 요청에 응하기 위해선 목숨을 제외한 자신의 모든 걸 걸어야 한다. 그 사소한 행위야말로 이 늙은 서부사나이에게 남겨진 마지막 윤리이다. 그의 선택이 감동적이라면 그 감동은 승리의 쾌감이라기보다는 이 사소성에 새겨진 거대한 퇴각의 흔적이 불러일으키는 운명적 비애감에 가깝다. 마지막 장면 4. 상황과 선택이라는 서사적 요소만으로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말하는 것은 충분치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 아름다움은 포드의 다른 걸작들이 그러하듯 질서와 소란, 심판과 축제, 이성과 도취, 비극과 유머의 종잡을 수 없는 배열이 빚어내는 천의무봉한 합주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례행렬 장면은 다른 점에서 특별한 것 같다. 프리스트는 말없이 걷기 시작한다. 그는 이 작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자였고 권력과 법의 인간이었지만 이제 권력도 법도 없이 그냥 걷는다. 작고 늙은 그가 걷는 형상은 마을의 모든 사람에게 내려다보인다. 카메라는 접사도 앙각도 없이 대개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으로 이 왜소한 노인의 걸음을 보여준다. 그는 행진 장면의 어느 쇼트에서도 프레임을 물리적으로 장악하는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사소한 피사체로 아니 그저 피사체들의 하나로 느리고 조용히 움직인다. 행렬을 따라 걷는다는 이 사소한 동작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프리스트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걷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기에 걷는다. 장례행렬은 마을의 큰 길을 따라 창녀촌이라는 가장 비천한 곳에서 출발해 마을 사람들의 생활공간 그리고 정치와 사교의 공간인 마을 회관을 거쳐 교회라는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세속적 삶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횡단 운동이다. 존 포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말이 달리는 모습과 커플이 왈츠를 추는 모습”이라고 말했고, 실제로 그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찍은 사람이다. 그가 말하진 않았지만 포드가 좋아한 또 다른 모습은 행진이다. 한 감독의 영화에서 그처럼 많은 행진 장면이 등장하는 다른 사례를 기억해내기 힘들다. 행진이 일상인 전쟁영화나 유사 전쟁영화들을 제외해도 포드 영화에서 행진은 때로 승리의 자축연으로(< 저지 프리스트 >), 때로 죽음 같은 공포의 형상으로(<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 때로 그 자체가 거대한 축제로(< 조용한 사나이 >), 때로는 삶 자체의 율동으로(< 도노반의 산호초 >) 빈번하게 등장한다. 행진이 시작되면 마치 행진 스스로 저 자신의 생동에 도취되어 서사를 잊어버린 듯 하염없이 지속된다. 존 포드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도 이런 순간이다. 하지만 어느 것도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의 행진과 같지 않다. 이 행진은 창녀촌에서 교회로의 이동이라고 해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혹은 세속에서 숭고로, 혹은 죄에서 대속으로의 은유적 이행이 아니다. 오히려 그 모든 차이를 행진의 느리지만 강력한 운동성으로 일거에 무화시키는 움직임이다. 오직 하나의 운동이 존재한다. 이 운동이 시작되면 어떤 다른 방향의 움직임도 상상될 수 없다. 장례 행렬이 출발하고 프리스트가 그 뒤를 따라 걷는 순간 누구도 이 움직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즉각 알아차릴 수 있다. 조용하고 느린 걸음에 한 노인의 생애 전체 어쩌면 그보다 더 거대한 것이 걸려있어 어떤 힘이 그를 멈춰 세우려는 순간, 그가 폭파되든 세상이 폭파되든 둘 중 하나다. 그 운동의 힘이 서사 안에서 무엇을 이루었는가, 라고 이제 물을 수 없다. 이 기적 같은 운동은 더 이상 서사적 탐문의 대상이 아니며, 오직 그것에의 감화를 요청한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행진에 이어진 장례와 선거가 이 영화의 결말이다. 행진 장면의 기적과도 같은 힘을 생각하면 결말은 오히려 느슨한 후일담처럼 느껴진다. 프리스트가 마지막으로 투표하고 단 한 표 차이로 승리한다는 만화 같은 설정은 차라리 유머에 가깝다. 잊혀지지 않는 건 마지막 쇼트다. 선거 승리를 축하하는 무리들이 집 앞을 지나갈 때 프리스트는 물끄러미 지켜보다 돌아서 집 안으로 들어간다. 그의 뒷모습은 어둠에 잠겨들고 문이 닫힌다. 사건 전개와는 무관하게 장례 행진의 운동은 바로 이 쇼트로 맺어진다.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며, 그는 이제 어둠 속에 머물 것이다. 세속적 승리와 은유적 죽음 사이. 무슨 차이가 있으랴. 대체될 수 있는 사건과 결말은 관심을 둘만큼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좀 전에 대체될 수 없는 절대적인 영화적 순간을 이미 경험해버렸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