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뱀은 표범과 어떻게 싸웠을까?
- 감독
- 박정민, 장윤선
- 제작년도
- 1999
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 감독의 < 퍼스트 카우 >(2019)는 오프닝 타이틀 후 “The bird a nest, the spider a web, man friendship"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로 영화를 시작한다. “새에겐 새집이, 거미에겐 거미집이, 인간에겐 우정이”라는 한국어 번역은 자연스럽지만, ‘man’은 한국어로 번역할 때 그 함의를 옮기기 위해 고심하게 하는 단어이다. man이 인간이라면 남성으로서(만) 인간이며, man이 남성이라면 인간 대표로서 남성(만)이다. <퍼스트 카우>는 블레이크에게, 그리고 영화의 배경이 되는 1820년대 서부 개척지라는 시공간에게 아무런 모순 없이 당연했을 인간-남성이라는 전제를 문제시하고 해체하는 시도를 한다. 규범적 남성성 외부의, 즉 ‘인간’ 밖의 남성의 우정이 전면화 되고, 그 우정은 (개, 도마뱀, 올빼미, 고양이, 소와 같은) 동물과 여성, 즉 비남성-비인간들과 관계를 맺는다. <퍼스트 카우>는 “인간에겐 우정이”라는 진술을 긍정하지만 동시에 의심한다. 쿠키의 첫 등장은 단순하지만 다정하고 경쾌한 선율의 피아노 소리와 함께 버섯을 채집하는 섬세한 손으로 제시된다. 노란 버섯들 사이로 몸이 뒤집혀 노란색 배를 드러낸 작은 도마뱀을 조심스럽고 친절한 손길로 도와준다. 이 다정하고 충만한 분위기는 곧 외부의 사운드에 의해 깨진다. 쿠키는 떠돌이 모피 사냥꾼들의 무리에 고용된 요리사다. 사냥꾼들은 쿠키가 정성스레 채집한 버섯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동물들을 잡아서 먹을 것을 만들어 달라고 위협하듯 말하거나 툭하면 주먹 다짐을 한다. 쿠키가 이 ‘남자’들의 세계에서 환영 받지 못 하는 인물이라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쿠키 자신도 비규범적 남성으로서 자신을 비애적으로 대하거나 이 세계에 안달복달하며 적응하고자 하지 않는다. 우물쭈물하면서 소란을 피우는 남자들을 대충 따돌리고 자신만의 텐트로 숨어들거나 도망가버린다. 빈정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 부츠를 장만해 신고 남자-인간들의 미개척지를 걷는다. 한편, 쿠키와 우정을 나누는 킹 루는 상승을 향한 도전에 불타는 기업가 기질로 충만해 있다. 개척지의 남성으로 손색이 없어 보이는 성정을 갖추고 있지만, 인종적으로 남성-인간의 자격을 충족시키지 못 한다. 킹 루는 올빼미가 쿠키 일행의 텐트를 내려다 보는 날 밤 벌거벗은 채 나타나고, 쿠키로부터 온기와 먹을 것, 쉴 곳을 제공 받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연히 쿠키를 다시 만났을 때 자신의 작은 집으로 초대한다. 한참 숲길을 걸어 도착한 오두막에서 둘은 술을 나눠 마시고 킹 루는 장작을 패러 나간다. 오두막에 남겨진 쿠키는 잠시 어색해하다가 곧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쓴다. 이불을 털고 꽃을 구해와 오두막을 장식한다. 이후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이 둘의 이러한 작은 일상들이다. 같이 먹을 것을 채집하고 집을 돌본다. 한 명이 빨래를 하면, 한 명은 낡은 옷을 기운다. 서부 개척 시대 백인-남성-인간을 중심으로 이상적인 인간-남성성 구현의 실패나 그 폭력성과 야만성을 보여주는 영화는 이전에도 많다. 그러나 그 실패를 보여주는 과정은 종종 이상적 남성성에 대한 매혹이나 열렬한 열망, 그리고 실현될 수 없음에 대한 비애, 자기연민을 동시에 노출한다. <퍼스트 카우>는 결론적으로 실패든 비애든 그러한 이상적 인간-남성 규범을 통한 남성성 탐구에 관심이 없다. 영화는 이 두 남자의 이러한 필요에 의한 일상 노동으로 채운 시간을 보여주고, 애정 어린 다정함이 기반이 된 관계에 집중한다. 이 다정함의 관계는 인간- 남성의 규범적 관계를 전복하거나 감화시키기 보다, 즉 휴머니즘의 가치를 대체하기 보다 그 주변의 비인간적인 것들을 향한다. 쿠키는 ‘첫 번 째 소’(영화의 타이틀 롤!)의 우유를 자신의 필요를 위해 매일 밤 짜러 가지만, 소를 지배하거나 착취하는 것이 아닌 의존하는 공존의 자세로 소를 대하고 둘 사이에 애착이 형성된다. 영화에서 관객이 제일 먼저 보는 생명체는 개이다. 그리고 그 개 옆에는 여자가 있다. 개가 가장 먼저, 그리고 다음으로 여자가 이 둘의 오래 된 과거의 물질적 증거를 발굴한다. 원작 소설에서는 소년들이었던 것이 (감독의 전작 <웬디와 루시>(2007)를 떠오르게 하는) 개와 여자로 바뀌었다. 영화는 종종 개와 소, 고양이, 올빼미와 같은 동물들이 무엇을 바라보는 눈이나 얼굴, 그리고 그들 시선의 반대편을 보여준다. 이야기의 진행과 전혀 상관은 없지만 인물들이 머무는 공간의 원주민 여성들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얼굴도 종종 포착한다. 즉, <퍼스트 카우>에서 보여지는 풍경들에는 동물들과 원주민 (여성들)의 시점이 포함되어 있다. 쿠키와 루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는 않지만, 영화에는 원주민 말을 하는 여성 두 명이 등장한다. 원주민 촌장의 아내와 영국에서 온 지역 권력자이자 ‘퍼스트 카우’의 소유자인 팩터의 아내이다. 두 여성은 서로 긴장 관계인 남편들 사이에서 말을 전달하는 도구거나 이국적 장식품처럼 기능하다가, 남자들이 방에서 사라지자 마자 자리를 옮겨 가까이 앉고 긴장이 전혀 없는 친밀하고 즐거운 얼굴로 대화한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번역되지 않는다. 그 둘 사이의 공기는 짐짓 대접하는 척하지만 허세와 과시, 긴장으로 가득 찬 남자들 사이의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퍼스트 카우>는 이러한 다정함 관계와 비인간-남성적 시선들을 결코 이상화하지 않는다. 서부 개척 시대의 시간을 정복이 아니라 다정한 공존의 관계 비인간-남성적 시선들로 채우지만, 이것은 곧 부서지며, 영화의 시작부터 예정되어 있다. 1820년대로 가기 전, 영화는 현대를 경유한다. 관객은 두 주인공의 시체를 미리 보고서야 1820년대의 시간으로 진입할 수 있다. 개가 시체를 발견하기 앞서, 제시되는 것은 넓은 강에 굉음을 내는 거대한 증기선이 지나가는 모습이다. 광활한 자연 속에 기차나 마차가 지나가던 풍경을 포착하는 오프닝은 감독의 전작들과 겹쳐지며, 또한 영화의 끝에 감독이 경의를 표했던 피터 허튼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이미지들은 자본주의 산업화에 의해 침범된, 조직된 자연이다. 그리고 ‘퍼스트 카우’가 배를 타고 지주 팩터의 소유지에 도착하는 모습은 이 증기선이 움직이는 모습과 겹친다. 쿠키가 공존과 애착의 관계를 소와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이 소는 등장할 때부터 개인의 사유재산, 가’축’으로만 의미를 가지며 소유권으로 통제된다. 킹 루의 동물과 자연에 대한 관점은 쿠키의 관점과는 달랐다. 비버를, 소의 우유를 가공하여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것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가공되지 않은 채로 있는 미개척 서부는 킹 루에게 아직 역사가 시작되지 않은 곳이다. 그렇지만 팩터를 비롯한 제국주의의 약탈권과 소유권은 보호되지만, 인종적 약자인 킹 루의 초기 자본축적을 위한 약탈은 결코 인정되지 않는다. 영토와 자원에 대한 독점 소유권과 강탈이 중요한 축을 이루는 초기 미국 개척 신화, 그리고 서부극과 다른 자리에서 서서 다른 시선들을 보여주지만, 역사의 진행에 대한 비관은 언제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리고 그 역사의 종착점은 개와 함께 떠도는, 최종적으로는 그마저 함께 할 수 없는 <웬디와 루시>의 삶이다. 초기축적에 있어 불평등한 관계로 출발했던 자본주의는 소유권과 그 침탈에 있어서는 “모두에게 규칙이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웬디와 루시>에서 웬디의 좀도둑질에 대한 마트 직원의 대사)며 웬디의 삶을 인간의 룰에서의 안착보다는 비인간 개와의 관계에서 애착으로 향하게 한다.
2015년 KMDb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는 제목 가나다 순서대로 꼽았다. 보고 나서 잠을 설쳤지만 명단에 넣지 못한 영화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고, 보고 싶었지만 놓친 작품들이 아쉽다. 무엇보다, 가장 기대했던 두 여성 감독의 신작을 보지 못했다. 쿠웨이트 태생 팔레스타인계 작가 바스마 알샤리프의 작품을 기회가 닿는 대로 챙겨보았지만, 신작 <깊은 잠Deep Sleep>(2014) 상영을 놓쳤다. 그런가 하면 샹탈 아커만의 < 노 홈 무비No Home Movie >(2015)는 학수고대했지만 국내에서 볼 기회가 없었다. < 뉴스 프롬 홈News from Home >(1977) 이나 <레터스 홈Letters Home>(1986) 등을 잊을 수 없기에, 그녀의 영화는 늘 ‘집에서 온 소식’과 같았다. 한데, 최근작이 유작이 되고 그 제목이 ‘집이 없는 영화’라니. 아직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지금은 폐간된 영화잡지 「키노」에 기고한 인터뷰를 위해 2003년에 방문했던 파리 서쪽 끝 그녀의 작은 집을 기억하며, 새해에는 <노 홈 무비>를 꼭 보려 한다. 2015년 영화관에서 가장 황홀했던 순간은 오쿠야마 준이치의 < 휴먼 플릭커 >를 본 날이었다. 1975년 야스다 홀에서 초연했다는 이 작품은, 각각 뜬 눈과 감은 눈 이미지를 스크린에 투사하는 두 대의 영사기 앞에 양손에 부채를 든 감독이 서서 왼쪽과 오른쪽의 영사기 렌즈를 번갈아 가리며 영화의 광학적 원리를 일깨우는 필름 퍼포먼스다. 깜빡이는 눈이 영사되고 있는 스크린 위에서 ‘인간 셔터’가 된 오쿠야마 감독의 그림자가 나비처럼 춤추는 광경을 체험하는 찰나, 빛과 그림자가 직조하는 이미지의 비의에 가닿는 듯했다.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는 많은 평자들이 다룬 바 있다. 그중 사막에 숨어있는 샘 같은 영화의 어떤 기원source을 더듬어 찾는 유운성 평론가의 글(‘사막은 보이지 않는다: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인문예술잡지 F」 18호)을 읽으시길 권한다. 고전과 현대 영화의 아름다움이 한 몸에 거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 스파이 브릿지 >도 적잖이 놀라웠다. 이러니 올해도 할리우드에 경배를 바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스위스 연방이 주는 영화상을 받게 된 장 뤽 고다르는, 수상 소감을 대신하여 만든 단편 < 인사말: 스위스상(賞) / 나의 사의(謝意) / 생사를 막론하고 >(mubi.com에서 불어·영역 대본과 영화를 함께 볼 수 있다.)에서 스위스 영화는 필름일 뿐 시네마가 없고, 미국 영화는 시네마라고 말한다(그렇다면 한국 영화는? 다니엘 슈미트, 알랭 타네 등이 버티는 스위스 영화의 무게를 상기하노라면, 이 질문을 피할 도리가 없다). 시상식 불참 사유로 건강 핑계를 대면서도 <오른쪽에 주의하라Soigne ta droite>(1987)에서 필름 통을 안고 바닥을 굴렀던 자신의 연기를 온몸을 던져 재연하는 노 거장의 슬랩스틱 코미디는, 한편으로 스위스 역사가 흘린 피를 머금고 있다. 또 하나의 ‘만년의 양식’은, 고다르보다 세 살 적은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근작 < 코뮤니스텐 >이다. 지금은 지구 위에서 사라진 독일민주공화국 국가였던 노래, 한스 아이슬러가 작곡하고 요하네스 로베르트 베허가 가사를 쓴 ‘폐허로부터 부활한Auferstanden aus Ruinen’이 흐르는 검은 화면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두 독일 공산주의자가 나치에게 고문을 당하고 귀향하는 1934년을 담은 앙드레 말로 작 「모멸의 시간Le temps du mepris」의 일부를 2014년에 연출한 장면과 더불어, 다니엘 위예와 공동 연출한 과거 작품 <노동자, 농민>(2001) < 너무 일찍, 너무 늦게 >(1981) <포르티니/시나이의 개들>(1976) <엠페도클레스의 죽음>(1986) <검은 죄>(1988) 일부 장면을 발췌 편집했다. 해방 전후의 이탈리아, 공장을 나서는 이집트 노동자들의 식민해방투쟁, 나치가 민간인을 학살한 아푸아네스 산맥의 1967년 풍경들 사이에 존재하는 검은 화면의 심연은 ‘폭력의 예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횔덜린의 ‘새로운 세계’를 말하는 고(故) 다니엘 위예의 출현과 함께 ‘겨우 선 결심’이라는 표제가 붙은(‘그래야만 하나? 그래야만 한다’라는 악보의 부기로도 유명한) 베토벤의 마지막 현악사중주 16번 Op.135로 영화를 마무리하는 스트라우브는 아직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감독의 뜻대로, 2분 길이의 단편 < 알제리 전쟁La guerre d’Algerie >(2014)와 함께 상영했더라면 더 좋았겠다). 파트리시오 구즈만도 여전하다. 아타카마 사막 천문대를 배경 삼았던 전작 <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 >(2010)에 이어, < 자개 단추 >에서는 카웨스카 족과 함께 물길을 타고 파타고니아까지 내려와 깊은 바닷속에 잠겼던 궤조강軌條鋼에 붙어있는 자개 단추를 건져 올린다. 이 단추는 먼 은하계의 소용돌이를 거쳐, 이를테면 대한민국 경상남도 거창 어느 골짜기에서 발굴된 양복 단추와도 공명한다. 그들보다 젊은 왕빙도 한결같다. < 세 자매 >(2012)를 찍으며 감독이 알게 된 또 한 사람의 ‘아버지’가 일하는 공장 숙소에서 지내는 ‘아들’들의 2014년 2월 2일 일과를 기록하며 시작된 < 아버지와 아들 >은, 나흘 뒤 공장주가 촬영을 중단시키며 마무리되었다. 세간이라곤 화덕과 침상 하나뿐인 거처에서 오락기와 TV를 유일한 낙으로 삼는 일가의 생활을, 카메라는 꼼짝 않고 종일 함께한다. 북경영화아카데미에서 촬영을 전공하기 전에 미술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했던 왕빙은, <아버지와 아들>의 시간과 공간을 사진으로도 기록하고 전시했다. 비디오 아트 페스티벌 ‘비디오릴레이 탄산’ 프로그래머로도 활동하는 강정석의 < 시뮬레이팅 서페이스 A >(작가의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다)에도 비슷한 사연이 있다. 처음 취업한 친구의 출근길을 아침마다 배웅한 7개월 동안의 영상 기록을 편집한 이 작품은, 친구가 해고당하면서 촬영이 종료됐다 한다. 친구의 삶과 노동에 보내는 우정과 지지의 정동은, 지하철을 타고 오가며 작가가 스마트폰으로 찍은 서울 풍경의 표면 위로 미끄러져 내린다(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상영할 때엔, ‘서페이스’의 더욱 본격적인 ‘시뮬레이션’인 B면 <시뮬레이팅 서페이스 B>와 출판 작업 ‘Converted (CMYK) Normal Maps from 2012~2014’가 함께 보여졌다). (태국어 표기법을 따르자면 따이끼 삭삐싯이라 표기해야 할) 타이기 삭피싯의 < 불안의 시기 >는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무시무시한 작품이었다. 근대 국민국가 형성을 여전히 상상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의 원념이 플리커로 번뜩이는데, 궁중사극 호러 장르가 리얼리즘이 되어가는 상황은 아시아에선 태국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사시나무처럼 떨며 볼 수밖에 없었다. 동병상련의 상념은, 국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라브 디아즈의 < 에레미아스, 1권: 도마뱀 공주의 전설 > 말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풀들을 보며 되살아났다. 감독의 신작 < 아 프리오리 >에서 목도하듯, 살육에 맞서 고개 드는 인간의 오연함이 더욱 긴급한 시절일 테지만, 그저 바람 속을 걸어 사라져 간 에레미아스의 ‘두 번째 책’이 전할 이야기가 하릴없이 기다려졌다. 이 기다림에 응해준 작품이 미겔 고미쉬의 < 천일야화 >였다. 특히 3부 ‘마법에 걸린 자’의 마지막 장면은 <에레미아스, 1권> 대단원 롱숏에 담겨있던 바람의 감각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천일야화> vol 1, vol 2, vol 3 미겔 고미쉬는 해직자를 포함한 기자들로 팀을 만들어, 경제 위기가 깊어진 포르투갈에서 벌어진 근년의 사건을 모아 현장 조사를 마치고 < 천일야화 > 시나리오를 사건별로 나누어 개발했다 한다. 현실의 불투명함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고는 하나, 완결된 시나리오가 없어 이야기 전개를 알지 못한 채 장면을 나누어 촬영을 진행하며 배우와 제작진이 불안해 할까 봐 현장에서의 부담도 늘어갔다고 고미쉬는 여러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급기야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쳐버리는 감독으로 직접 분한 그는, 셰에라자드가 아버지와 관람차를 타는 놀이공원 장면에서 옛 아라비아 의상을 입고 다시 등장하지만 여전히 담배만 피울 뿐이다. 줄행랑을 놨다가도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 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그는 이야기하는 자의 숙명을 사는 것일 테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천일하고도 하룻밤 동안 이야기를 계속하는 셰에라자드를 자신의 영화를 위한 복화술사로 불러들여, 고미쉬는 포르투갈의 현재라는 ‘사태’와 「천일야화」라는 ‘픽션’을 섞는다. 셰에라자드는, 이야기가 인간의 욕망과 공포에서, 죽은 자들과 도래할 자들에게서 온다고 말한다. 때로 거짓말이기도 한 이야기가 진정 우리를 생존하게 해준다고 여기는 그녀는, 고미쉬의 전작 <타부>(2012)의 벤투라처럼 이야기 속 이야기, 영화 속 영화를 짓는다. 「천일야화」원작에서 셰에라자드는 밤마다 새로운 화자를 새워 이야기를 끊임없이 이어갔다. “그러니까 두 번째 탁발승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리하여 영화 <천일야화>에도 많은 내레이터가 등장한다. 벌을 치는 양봉업자,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도주 중인 탈주범, 딸의 가정생활을 보살피는 판관에게 진술하는 소, 새를 길들여 노래를 가르치는 남자와 마주친 그물에 갇힌 사내, 여행을 왔다가 경찰을 만나 임신한 중국 여인, 법정에 서는 닭…. 이야기는 인간에게서 동물에게까지 뻗어 가며 새로운 이야기를 낳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동안 이미지 속에서는 다른 영화가 태어난다. 미겔 고미쉬는 세 편인 동시에 한 편인 < 천일야화 >의 이야기가 성부-성령-성자의 삼위일체와 같다고 칸 영화제 때 수차례 밝혔다. 돌이켜보면 고미쉬의 장편 영화들은 늘 둘 이상의 이야기를 안고 있었다. <천일야화>도 각기 고유한 리듬과 소제목을 지닌 세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이 작품인 공동제작국인 프랑스에서는, 칸 영화제가 끝난 뒤 세 편을 나누어 약 한 달 간격으로 순차 개봉했다. 1부는 2015년 6월 24일, 2부는 7월 29일, 3부는 8월 26일에). 1부 ‘불안해하는 자’는 포르투갈 중공업을 대표하던 비아나두카스텔루 조선소 폐업 때 촬영했다. 작금의 포르투갈이 처한 위기 속에서, 살아있는 존재들이 물질과 연결되어 있는 양상은 경제 문제에만 머물지 않고, ‘민주주의’를 다시 묻고 역사를 되새긴다. 고미쉬에 따르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개별자들만이 아니라 ‘공동체’이기도 하다. 2부 ‘비탄에 잠긴 자’는 법정, 아파트 등 실내를 주 무대로 삼는데, 연극적 장치와 조명을 채용하여 야외 촬영이 많은 1부보다 어둡다. 이야기도 그렇다. 원형극장에 세워진 법정은 조정하는 힘을 잃었고, 저소득 임대 아파트 주민은 돈이 없어 죽음을 택한다. 한데, 주인과 거처가 잇달아 바뀌어도 개 딕시만은 근심이 없다. 3부 ‘마법에 걸린 자’에는 변두리에서 되새를 길들여 노래를 가르치며 소일하는 남자들이 나온다.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지는 일상의 매끈한 표면은 매우 현실적이지만, 내레이터가 들려주는 그들의 사연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우화인지 실화인지 알 도리는 없다. 한데 무슨 영문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바그다드가 바다에 면했던 시절을 살며 사막화를 근심하는 셰에라자드의 옛이야기보다 현대 포르투갈 교외에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지내는 이들의 일상이 지극히 초현실적으로 여겨지고, 새 노래 경연 대회가 종교나 정치 결사체의 비밀 회합처럼 보인다. 35mm와 16mm 필름으로 이 영화를 촬영한 사욤부 묵디쁘롬은, < 징후와 세기 >(2006) <나부아의 유령들>(2009) < 엉클 분미 >(2010) 등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대표작을 찍었던 태국 촬영감독으로, < 천일야화 > 제작을 위해 리스본에 1년 정도 살았다 한다(그와 고미쉬는 70mm로 촬영할 것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예산과 기동성 등 몇 가지 문제로 포기했다는 후문이다). 부산영화제에서 러닝타임이 381분인 <천일야화>를 본 날, 이웃한 상영관에서 연이어 < 찬란함의 무덤 >을 보았다. 사욤부 묵디쁘롬이 <천일야화>를 찍은 것도 <찬란함의 무덤>을 디에고 가르시아가 촬영한 것도 모른 채, 같은 날 상영하는 두 영화의 표를 우연히 구했다. 역시 우연이겠지만, 두 작품에는 모두 동물이 여럿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종들 외에, <천일야화> 1부에는 고래도 나온다. 해고자 루이스는 고래 뱃속에서 심장을 치료받고, 바닷가에서는 고래 심장이 폭발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고래가 해변으로 나오는 건 실수가 아니라 아파서인 경우가 많은데, 바다로 밀어 넣어도 대개 다시 나와 죽는단다. 인간이 바다에 버린 쓰레기를 먹은 고래 몸속에는 중금속이 쌓이는데, 보통은 지방층에만 축적되어 문제가 없지만 먹이를 제대로 못 먹는 상황에서는 지방을 에너지로 쓰는 대사가 일어나 온몸에 독이 퍼진다. 물속에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피하지방을 유지해온 고래가 빈사 상태로 물 밖에 나오면, 온 몸이 열로 펄펄 끓다 급기야 내장이 밖으로 터져 나온단다. 뱃속 같은 이야기의 심층에서 불안으로 윙윙대기만 하던 ‘사태’들의 소음도, 임계점을 넘으면 표면을 뚫고 나오는 목소리, ‘사건’이 된다. <천일야화>가 전하는 이야기의 표면에는 포르투갈의 현재는 물론, 과거와 미래 인류의 수런거림이 모이고, 의미가 뚜렷하지 않은 사건들·인물들·동물들이 공존하는 셰에라자드의 시공은 무한히 나뉜다. 이들이 모여 내는 목소리는, 인간의 언어보다는 되새의 노래에 가깝다. 들풀을 흔드는 바람 속에 새들의 노래가 들리던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극장에서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이란, 이라크, IS, 핵폭탄 등 전쟁과 테러의 공포가 하루가 멀다 하고 전 세계 뉴스의 전파를 타고 있다. 프랑스의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는 ‘전쟁 공포, 핵 공포에 의한 균형은 우리 삶의 모든 틈새 내부 구석구석에 주입된, 존재하지 않은(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일방적으로 판단을 강요하는 체계의 한 극단적인 단면일 따름이다.’ 라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 삶의 자유를 마비시키는 것은 전쟁이나 원자폭탄에 의한 파괴라는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며, 불안감 속에서 선택을 강요당하는 것이 우리 삶을 병 걸리게 하는 것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이 위협의 사실성을 믿는 척한다. 사회의 불안감 속에서 이뤄진 선택의 강요란, 극도의 시스템 정체상태에 이르거나 함몰 중인 시스템들의 정체되지 않으려는 정치적 폭력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더 이상 공포, 불안감의 주체도, 상대도, 전략도 없다고 보았다. 전쟁이 가져오는 객관적인 결과는 종족적인, 공동체적인, 전기-자본주의적인 구조들, 모든 상징적 교환, 언어, 조직의 형태들, 바로 이것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바로 이것의 살해가 전쟁의 대상이고, 전쟁은 과도한 죽음 속에서 사회의 안정에 대한 테러적인 합리화(공포, 불안, 선택의 강요) 과정의 중개자일 따름이다. 또한 공산주의에 속하느냐 자본주의에 예속되느냐는 중요치 않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바로 적대자들 간의 적대성이며 적대적인 운동들의 사실성이며 전쟁에 대한 심각한 이데올로기라고 다루고 있다. 승리나 패배의 사실성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전쟁은 이러한 외양들 훨씬 위에서 기승하며 진행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평화화는 전쟁과 평화의 너머에 있다고 장 보드리야르는 「시물라시옹」(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인공물)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 컨퓨전 스루 샌드 >는 이러한 국가 간의 시스템을 전쟁을 통해 정상화하려는 과정에 참여한 공간 속에서 개인이 경험하는 공포감과 긴장감을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매든 감독의 작품 < 컨퓨전 스루 샌드 >(2013)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한 고교 친구들의 경험담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작품의 저변에는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과 개인 공포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영화의 배경은 누런색의 이미지이며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제목에서처럼 모래바람이 부는 것으로 볼 때 중동의 어느 한 지역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순찰 경계 근무 중인 한 군인이 미로와 같은 지역을 돌면서 보이지 않는 적군과 싸우는 긴장감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투박한 그림의 스타일이 전쟁에서 거친 일상을 보내는 군인과 잘 어울린다는 평을 들었다. 시작과 함께 긴박한 헬기 소리가 들린다. 아래로 드리워진 검정색 줄이 보이며 그것을 타고 군인으로 보이는 실루엣이 빠르게 움직인다. 날이 밝아지며 도시 같은 곳을 경계하는 군인들이 수신호를 하며 어디론가 움직인다. 잠시 후 급습한 곳엔 아무것도 없다. 순간 긴장감은 어색함으로 변한다. 적막하고 폐허와 같은 공간에 또 다시 사방을 경계하는 군인들이 나타난다. 그들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다음 컷, 어떤 군인의 발밑에 있는 도마뱀 한 마리. 잠시 후 도마뱀이 사라지며 오는 긴장감, 하지만 염소가 뛰어가며 긴장감은 또다시 허무해진다. 이렇게 긴장감과 허무함이 계속 이어지며 교차한다. 허무함 속에 긴장감도 판단도 흐려지는 순간 한발의 총알이 날아오고 잠시 후 건물밖에 보이지 않는 배경 속에서 군인 한 명이 수색을 한다. 긴장감 속에 골목 너머로 보이는 어린아이 등을 보고 잠시 생각에 잠길 때 또다시 총알이 날아온다.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대응 사격을 하며 집안으로 들어간다. 어두운 공간 폭발물이 보이고 집을 탈출하니 곧 폭탄이 터진다. 폭발에 의해 쓰러져서 헤매는 병사의 손이 뭔가를 찾아 더듬는다. 쏟아지는 총격에 대응 사격을 한다. 적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공포와 긴장감은 더욱 높아진다. 그리고 정신없고 불안함을 동반한 공포감 속에서 사방을 향해 총을 발사하는 병사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적은 보이지 않는다. 고향이 미국 조지아 주인 매든 감독은 베트남전 참전 용사인 이웃의 이야기를 듣고 이 작품을 기획했다고 한다. 매든 감독의 이웃은 베트남전 당시 극도의 공포와 긴장감으로 순찰 중이던 소대원들이 벌떼 공격을 마치 적군의 매복 공격으로 오인해 혼비백산한 사례를 매든 감독에게 들려줬다고 한다. 그래서 매든 감독은 “단순히 언어와 문화적인 차이뿐만 아니라 군인이 전쟁터라는 낯선 환경에서 겪는 혼란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이야기 했다. 이 작품은 6,500장 분량의 그림을 종이에 직접 그렸고, 초당 12프레임으로 애니메이션 영상을 제작했다.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Confusion+Through+S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