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운
- 감독
- 프란체스코 마셀리
- 제작년도
- 1991
- 출연
- 나스타샤 킨스키, 마시모 다포르토
<만다라>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스튜디오가 인플루언서들의 극찬을 수집할 수 있다면 누가 영화평론가를 필요로 할까요?” 2023년 7월, 《가디언》에 실린 기사의 도발적 제목은 영화 저널리즘이 직면한 현실을 꼬집는다. 평론가 마누엘라 라직은 < 바비 >(그레타 거윅, 2023)의 런던 시사회 경험을 크게 두 가지 풍경으로 일축했다. 축제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인플루언서들 사이에 합류한 기자에게도 각종 굿즈를 건네주는 안내원. 그리고 이어지는 독려. “긍정적인 느낌을 공유해주세요!” 프리랜서 크리틱인 그는 자기 계정에 무슨 말을 쓰려다 말고 개봉 이틀 전에야 엠바고가 해제된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당황했다고 쓴다. 기사는 가뜩이나 영화 매체의 대중문화적 위상이 위기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에 이와 같은 문제 제기가 무슨 소용인지 자조하는 모순적 자기검열로 마무리된다. 올해 칸 기자회견장 옆자리에서 통성명한 《인디와이어》 에디터에게 용기 내 이 기사를 본 적 있냐고 물었을 땐 심드렁한 답변이 돌아왔다. “뻔한 소리, 요샌 부정적 평가를 미리 예측해서 특정 비판은 하지 말아 달라는 식의 가이드도 오는데요 뭘.” 비평가를 위한 친절한 가이드라. 선댄스발 코미디 영화 제목 같다고 생각했다. 취재 기자의 실무는 산업적 관점에 자주 노출되고 그래서 홍보, 마케팅 환경에 질식하기도 쉽다. 잡지사의 생리는 작품의 시의성이나 신속한 이슈를 중시할 수밖에 없는데, 어떤 영화는 너무 성급히 말하게 되고 어떤 영화에 대해서는 말할 기회를 놓친다. 다각의 요구와 마감 시한, 닥쳐오는 개봉작들을 포용하는 이 일은 자기 감식안의 모서리를 ‘업계’의 비바람 속에 놓아두는 일이다. 극장에서 상영관을 확보하는 영화들은 중·저예산의 참신한 기획을 내건 작품들조차 아찔할 정도로 안전해지고 있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맞서지 않고 있다가는 예리해지긴커녕 시시각각 풍화될 가능성이 크다. 행여 영화기자의 호러라는 장르가 생긴다면 명대사는“그래, 그래도 이 정도면 좋은 영화지”일 것이다. 취재의 특권은 비평 앞에서 언제나 양날의 검이다. 그보다 본질적으로는 분열하고 충돌하는 내면의 목소리들이 가끔 시끄럽다. 이 일은 자연스럽게 필름메이커들의 속내와 고충을 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과물로서의 작품 이전에 만드는 과정과 방식을 관찰하는 일도 중요해진다. 걸작이든 범작이든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의 전심전력을 다했(다고 말한)다. 주관적 진실 속에서 창작자의 자부심과 소통하는 저널리스트의 객관성은 늘 자기 의심의 대상이다. 현장 비평을 향한 열의가 때로 거의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겠다는 실의를 동반한다. 매주 지면 안팎에서 줄다리기가 열린다. 감독, 창작자, 제작진의 예술적 비전을 정확히 전달하고 해설하는 중간자의 본분이 한쪽에, 작품 본연의 의도보다 평자의 패러다임이 선명한 창조적 쓰기가 다른 한쪽에서 실랑이하는 형국이다. 잡지계의 악명 높은 평론가 폴린 카엘에 관해 《뉴요커》는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반대자(contrarian)”라고 정의한 바 있다. 카엘의 탁월한 반대는 역설적으로 발굴과 호명으로 이어졌다. 그는 지금은 고전이 된 < 보니 앤 클라이드 >(아더 팬, 1967)를 구해내어 할리우드가 그 명성을 스스로 재창조하도록, 아메리칸 뉴 시네마를 독려한 인물로 기억된다. 걸출한 반대자의 식견, 호전성, 무시무시한 헌신과 성실함을 동경하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가 않다. 문제는 지금 여기에 선 사람의 막막한 과제다. <만다라> 중 법운과 지산 번뇌 앞에서 임권택 감독의 < 만다라 >(1981)를 되짚어본다. 6년의 수행에도 여전히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자조 속에서 고뇌하는 승려 법운( 안성기 )은 술 취한 탕아 행색이 더 어울리는 행자 지산( 전무송 )과 스치고 헤어지길 반복한다. 법운은 지산에게서 구도의 가능성을 본다. 그의 야생성은 안쪽에 자리한 단호함과 순수를 동경하게 만든다. 그러나 법운의 갈망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지는 끝내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신당의 불상 점안식을 도운 뒤 마을 어귀에서 술에 의지하던 지산은 불탑 아래 엎드리며 기도하는 자세 그대로 얼어 죽는다. 지산을 발견한 법운은 그동안 자신이 찾아 헤맸던 깨달음을 하나의 형상으로 발견한 사람처럼 슬피 운다. 혹한의 날씨에 불상 앞에 납작 엎드린 자세로 굳어버린 수행자를 기리는 마지막 의식이 곧 법운의 몫이 된다. 지산의 죽음 이후 법운의 행적에 어떤 망설임도 없어 보이는 것이 신기하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처럼 움직인다. 임권택 감독, 송길한 작가, 정일성 촬영감독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통과하며 청년들의 죽음이 들려오는 시절의 수치와 공허를 절감하는 중에 <만다라>를 만들었다. 지금 돌아보기에 <만다라>는 시대를 감당하기 힘든 이들의 흔들림이 걸어갈 수 있는 하나의 길, 우회로를 터 내는 영화다. 말미에 이르러 법운은 승려라기보다 매개자로 변모한 모습이다. 암자에 불을 붙여 다비를 마친 후, 법운은 지산이 잊지 못했던 여인 옥순( 방희 )을 찾아간다. 지산의 유품, 그가 직접 조각한 매우 고통스러운 얼굴을 한 불상을 전하러 간 것이다. 이어서 법운은 오랫동안 외면했던 어머니를 찾아가 더 이상 자신을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담히 전한다. 직접 불붙인 암자의 화마를 잠자코 지켜본 뒤 여관방과 다방을 향한 법운은 혼란을 거두고 세속의 안쪽을 통과한다. 유품을 건네고 어머니(들)에게 (대신) 안부한다. 이 뜻밖의 행로에서 법운은 자기 안에 지산이, 또 다른 죽음들이 들어찬 사람같이 부지런하다. <만다라>의 마지막에는 먼 길을 걸어가는 매개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다시 방향을 뒤집어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움직임이다. 중심에서 바깥으로 그는 멀어진다. 물론 되돌아오기도 할 것이다. 불탑 앞 기도하는 자세의 지산 / 암자에 불을 붙인 법운 속세와 구도의 경계에서 겁먹은 수행자의 클로즈업이 종내에 아득한 롱쇼트로 바뀌어 갈 동안 나는 극장에 앉아서 짐짓 딴생각을 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말을 전하고 의식을 치르는 매개자의 역할이 품을 수 있는 쓸모 같은 것을 궁리했다. 창작자와 관객, 예술과 산업, 비평과 저널리즘 사이에서 각각의 형식과 규격, 정당성 같은 것을 찾고 또 찾는 것이 아니라 영화 매체의 본래적 지향과 그것을 만들고 보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태계에 제각기 충실할 수 있다면. 영화를 만드는 데 바탕이 되고, 이미 만들어진 영화가 관객에게 가는 경로를 터 낼 수 있다면. 한 주에 80페이지가 훌쩍 넘어 과연 어느 성실한 독자가 다 소화하고 있는 것인지 근심하게 되는 지면에 틈새를 더 파내어 보기로 한다. 이상할 정도로 말해지지 않는 영화들 쪽으로 조금 더 움직여보기로 한다. 슬며시 머릿속에 내게 주어진 길 하나를 그려본다. 직업적 특권 아래 남보다 조금 일찍, 그리고 조금 더 많은 영화와 영화 안팎의 사람들이 지나가게 하는 길. 이 길이 안녕하냐고 물어올 때 드리우는 암울한 직업적 자의식을 거둬내고 나면 답은 간명하다. 저널리즘과 비평가를 위한 가이드가 주어지는 현실은 동시대 영화 매체가 처한 메마른 환경부터 극명히 가리킨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중심에서 바깥으로 다시 밖에서 안으로 황무지를 횡단하는 시도의 필요를 믿어볼 때다. 영화 안팎의 안부를 그러모으는 매개자의 눈과 손이 겁을 떨쳐내기를. 말끔히는 어렵더라도 부단히, 부단히. <만다라> 중 김소미(영화기자) l 영화주간지 《 씨네21 》 취재팀장. 책 『불이 켜지기 전에』(2025)를 썼다.
* 본 글에는 < 연애소설 >과 < 텔 미 썸딩 >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한국 장르영화에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성소수자들의 가시화가 갑작스럽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한정된 시공간에 허용된 젊은 여성들의 낭만적 동성애는 대중적 정서를 크게 위협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움을 가미해줄 수 있는 장르적 도구로 종종 사용되었다.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김태용, 민규동, 1999)와 <텔 미 썸딩>(장윤현, 1999)이 그 시작이었다. 두 영화는 2000년대 장르영화에 등장한 레즈비언 캐릭터들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학교라는 억압적 시스템과 어린 여성들의 사랑, 우정, 질투, 불안, 분노 등의 복잡한 감정을 공포영화의 장르적 약호로 그려내 컬트팬을 양산했다. 이 영화에서 여성 동성애는, 그들 관계의 주 무대가 되는 학교 옥상이라는 열려 있지만 비밀스러운 공간처럼, 불안정하고 비규범적인 저항 가능성의 지점이 된다. 그러나 십대와 학교라는 특정 시공간에 한정된 여성 동성애의 초상이 ‘여고괴담 시리즈’와 이후 유사 영화들에서 반복되면서 역설적으로 여성 동성애에 대한 상상력이 제한되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이러한 반복된 재현은 여성 동성애가 강력한 규범 체제에 대한 십대 사춘기의 반항이자 안정된 이성애 체제로 편입되기 위한 일시적 통과의례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여성 동성애는 학교 밖에서는 불가능하거나 허용되지 못한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시은(이영진)과 동성애 관계에 있던 효신(박예진)의 자살 후 아이들은 전염병처럼 귀신에 들린다. 여기서 동성애 욕망은 쉽게 감염되고 임시적이고 제의적인 것이며 그래서 정체성으로는 기입할 수 없다. 엔딩에 등장하는 학교 지붕을 덮칠 정도로 거대해진 효신의 유령은 아이들이 학교라는 공간을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아니면 효신은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고 지속하기 위해선 유령이라는 형상으로라도 학교에 남아야 하는 것일까? 학교를 떠나지 못하는 레즈비언 유령은 이후 ‘여고괴담 시리즈’에서 반복된다. 동성애 관계가 2세대에 걸쳐 등장하는 < 여고괴담 4-목소리 >(최익환, 2005)처럼 말이다. 심지어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동성애 욕망을 재자각하기 위해서는 교사로서 학교로 돌아와야만 한다. 그들은 레즈비언이 되기 위해 그 공간을 떠나지 못한다. 한편 스릴러 장르인 <텔 미 썸딩>은 캐릭터와 서사에 여성 동성애가 기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비밀로 꽁꽁 숨겨놓다가 연쇄살인의 전모가 마침내 밝혀질 때 핵심적 실마리로서 폭로된다. 사실 남자 주인공인 조형사(한석규) 입장에서나 폭로이지 채수연(심은하)과 그녀를 사랑해 남자연쇄살인을 도운 오승민(염정아)은 영화 내내 진실을 말한다. 여기서 관객들은 그 관계를 진작 상상할 수 있었던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로 나뉘게 된다. 영화는 분명 타겟 관객을 조형사에 동일시되어 동성애 관계를 알아채지 못한 이들로 상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성애가 반전으로 작동할 수 없다. 냉철한 추리력으로 정평이 난 조형사도 여성 동성애는 상상력 밖에 있다. 채수연은 승민과의 동성애 관계를 조형사에게 여러 번 흘린다. 심지어 수연은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받던 자신의 집에서 승민을 처음 만나던 순간을 자세하게 진술한다. 그 아이가 승민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여기서 플래시백이 삽입되고 아이의 성별이 남자인 것처럼 묘사되면서 의도적 오인을 유도한다. 그래서 그 주관적 플래시백이 수연의 것인지, 아니면 수연의 이야기를 듣고 상상한 조형사(와 동일시된 관객)의 것인지 모호하다. 여자 둘과 남자 한명의 관계 속에서 여성 동성애 관계를 숨겨놓았다가 뒤늦게 폭로하는, 그래서 동성애는 과거의 비밀이 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서사구도는 2000년대 영화들에서 종종 발견된다. <연애소설>(이한, 2002), <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이무영, 2002), < 주홍글씨 >(변혁, 2004), < 끝과 시작 >(민규동, 2009)이 그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 역시 결국은 이성애 관계가 서사를 추동시키는 큰 틀이 되면서 ‘여고괴담 시리즈’처럼 여성 동성애를 한 때의 ‘순수한 감정’으로 보존하는 동시에 대상화한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들에서 여성 동성애는 과거의 것이고 변하지 않기 때문에 순수의 결정체로서 대상화 되지만 그래서 궁극의 진정성을 갖게 되고 언제든 내부로부터 서사를 불안정하게 만들 잠재성을 갖는다. 위의 영화들 중 이십대 초반의 여성 두 명과 남성 한 명이 주인공인 <연애소설>은 오랜 투병생활로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십대들을 보는 것 같은 풋풋함을 그리고 여성 동성애라는 비밀의 폭로가 영화 전체의 서사구조를 뒤흔드는 측면에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와 <텔 미 썸딩> 모두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프닝부터 프레임 속 프레임으로 창문 밖 풍경을 비춰주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사진을 주요한 소재이자 주제적 메타포로 사용한다. 사진은 순수했던 순간을 결정화하는 동시에 그 프레임 바깥에 있는 맥락이나 다른 진실을 지워버린다. 서사구조에 있어서도 프레이밍은 중요한 장치가 된다. <연애소설>은 영화 전체가 지환(차태현)의 지속적인 플래시백, 즉 지환의 주관적 프레이밍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영화가 시작하는 시점에서 20대 후반인 지환은 택시기사를 하며 등록금을 벌어 어렵게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어린 시절 순수하게 좋아했던 사진도 그만두었다. 그러던 중 직접 찍은 흑백사진에 하얀색 물감으로 쓰인 편지 한 장을 받는다. 주소도 이름도 없지만 짐작 가는 이가 있다. 사진은 과거를 상기시키고 이때부터 지환의 플래시백이 시작되며 영화는 현재와 5년 전을 오고간다. 5년 전 지환은 아르바이트하던 카페에서 수인(손예진)을 보고 한 눈에 반해 뒤따라가 고백하지만 곧 거절당한다. 이후 수인과 늘 함께 다니는 경희(이은주) 그리고 지환은 절친한 친구가 된다. 지환은 처음에는 청순하고 조용한 스타일의 수인에게 반하지만 이내 활발하고 명랑한 경희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경희는 처음부터 지환을 좋아했기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일만 남게 된다. 그러나 어린 시절 내내 몸이 아파 늘 조심하며 살았던 수인과 경희가 일생의 일탈처럼 지환과 여행을 갔다 온 이후 수인과 경희는 연락이 끊기고 지환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채로 홀로 남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요약된 서사는 지환의 관점에서 기술된 것이다. 이 영화에는 두 개의 비밀과 폭로가 등장한다. 하나는 수인의 첫 사랑이 경희로 첫 만남부터 죽을 때까지 경희를 사랑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인과 경희가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불러왔다는 것이다. 즉 수인의 본명은 경희이고, 경희의 본명은 수인이다.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지환은 현재 시점에서 수인과 경희를 수소문할 때 경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게 된다. 그러나 곧 (경희가 본명인) 수인(손예진)이 죽었다는 진실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상상 가능한 일부 관객들은 여성 동성애의 비밀을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게 하면서도 대부분의 관객들에게는 비밀이 폭로되지 않도록 의도적인 오인 장치들을 흩뿌린다. 그것은 스테레오타입을 뒤집는 것이다. 긴 생머리, 프릴 달린 흰색 블라우스와 치마, 기운 없는 목소리, 얌전하고 의존적인 태도를 가진 수인은 겉보기에는 이성애 남성의 관습적인 이상형을 구현해 놓은 모습을 갖고 있다. 반면 짧은 머리에 늘 바지를 입고 히피 스타일의 장신구를 착용하며 직설적이고 크게 웃는 경희는 상대적으로 더 병약한 수인을 챙긴다. 경희는 전형적인 톰보이다. 전형적인 스테레오타입에 따르면 수인은 이성애자이고 경희는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정작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는 수인이고 경희는 지환을 사랑하는 이성애자(혹은 양성애자)이다. 영화는 수인과 경희가 이름을 바꿔 부르고 지환의 사랑이 수인에서 경희로 바뀌는 것처럼 관계와 욕망을 지속적으로 부인하고 불안정하게 만든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지환의 주관적인 플래시백으로 구성되지만 유일하게 지환의 것이 아닌 플래시백 장면이 있다. 수인과 지환이 단둘이서 각자의 첫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수인은 경희와의 첫 만남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 아이가 경희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는다. 플래시백에서 경희는, 분홍색 환자복을 입고 머리가 긴 수인과 비교해 파란색 환자복을 입고 민머리를 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남자아이로 오인되게 만든 이 장면에서 <텔 미 썸딩>의 조형사처럼 지환에게 동일시된 관객은 수인의 플래시백을 관람하게 된다. 이 플래시백 역시 수인의 주관적 플래시백인지 지환이 수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각화한 것인지는 모호하다. 하지만 여기서 지환이 그 아이를 남자아이로 오인하고 있으며 수인의 첫 사랑이 경희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분명하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로맨스 이야기는 대부분 둘 다 사랑하는 여자를 교환하는 것으로 남성 동성관계를 공고히 한다. 그러나 지환은 교환되지 않는다. 수인은 지환을 욕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수인과 지환 모두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경희가 교환되는 것도 아니다. 경희는 초반에는 수인과 지환이 서로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지환의 사랑을 깨달은 후에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랑은 오인의 과정에 놓이고 결국은 실패로 끝난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발화하는 유일한 관계는 수인과 경희다. 수인은 경희에게 죽기 전 분명하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경희도 수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죽음으로 결부되고 서로의 이름을 바꿔가며 생존을 격려했던 둘의 사랑은 이성애적 사랑을 초과한다. 심지어 수인은 지환에게 자신의 사랑인 경희를 부탁하는 러브레터를 보낸다. 그 편지엔 경희가 좋아하는 것들이 적혀 있다. 아마도 잡지에 나와 있는 성격운세가 말했던 것처럼 수인은 한 사람에게 집착하는 성향이기 때문에 시한부가 아니라면 경희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수인과 경희를 시한부로 만들면서 여성 동성애 관계의 가능성을 한정시키는 한편, 시한부로 인해 역설적으로 그 욕망을 단단하고 숨김없이 드러낼 수 있게 한다. 오히려 가장 실패하고 가능성 없고 끝까지 무지에 빠져있는 것은 지환의 이성애적 욕망이다. 이 영화에서 여성 동성애는 가장 진정하고 순수한 사랑으로 이성애가 도달하지 못한 혹은 개발해야 할 (영화학자 레이 초우가 개념화한) ‘원시적 열정’의 장소가 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더 선명하게 가시화될 수 있는 조건에 놓이게 된다. 두 여자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겨루거나 혹은 우정 때문에 양보하는 삼각 구도로 보였던 영화는 수인의 사랑의 대상이 경희라는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서사를 재구성하게 만든다. 언제 서사를 재구성하게 되느냐는 관객마다 다를 수 있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서 지환의 주관적인 플래시백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 영화를 관객들 역시 다시 쓰게 된다. 지환은 그 새로운 정보를 끝까지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지환에게서 벗어나 가장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레즈비언인 수인의 시점을 갖게 된다. 관객들은 수인의 레즈비언 편집술에 동화된다. 이 영화에는 시계바늘을 돌리는 행위가 반복되어 등장한다. 지환은 첫 눈에 반한 수인에게 고백 후 거절당하고 관계를 우정으로 새롭게 정의하기 위해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퍼포먼스를 수행한다. 경희는 수인이 죽은 후 장례식장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후회와 슬픔에 벽에 걸린 시계의 바늘을 되돌린다. 수인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시계바늘을 되돌리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수인이 분명하게 자기 욕망을 발화하고 응답을 들은 인물로 후회 없는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 그 자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성애 지배적인 사회에서 늘 자기만의 편집술을 육화할 수밖에 없는 동성애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기 주변의 서사와 이미지를 그대로 수용할 수 없는 수인은 이 삼각관계에서 가장 많이 아는 자로(지환과 경희의 욕망, 그리고 자신의 욕망) 주어진 것들을 재편집해 사용하는 것이 일상이다. 그래서 수인은 지환의 플래시백으로 구성된 이 영화에 오인의 가능성을 품은 채로 자신만의 플래시백을 트로이 목마처럼 침투시킨다. 어떤 면에선 자기만의 (레즈비언) 편집술을 일상화하고 육화한 수인은 시계 그 자체가 되어 있기에 물리적으로 시계바늘을 돌릴 필요가 없다. <연애소설>은 결말에서 지환과 경희의 재회를 서사화하면서 뒤늦게 이성애 프레임으로의 봉합을 시도하지만, 이미 레즈비언 편집술의 역량을 경험하게 한 작은 플래시백의 침투는 의심과 실패 속에서 서사의 솔기가 끊임없이 뜯어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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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게재글은 17-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교육 프로그램 ‘2021 청소년을 위한 영화 글쓰기 키트’의 최종 선정작입니다. 신분을 초월한 세 사람의 우정 영화를 여러 번 보다 보면 처음에는 눈에 안 들어왔던 것들이 보인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는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관계만 집중하느라 알아채지 못했던 소피와 엘로이즈 마리안느 이 셋의 관계가 그랬다. 백작 부인이 없는 동안 그 세 사람은 신분을 초월한 여성들의 연대를 보여준다. 생리나 임신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서로 돕는다.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에게 “우린 똑같은 위치에 있어요”라고 하는 대사가 있다. 나는 이 대사가 세 여자들의 관계를 잘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이 셋은 예술가와 뮤즈, 귀족과 하녀가 아닌 친구로 지낸다. 나는 그것을 셋이서 함께 있는 장면에서 많이 느꼈다. 소피가 십자수를 하는 동안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모습이나 셋이 함께 약초를 캐는 장면, 카드 게임을 하는 장면 등 여러 번 그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처음에는 카드 게임을 하는 장면에서 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분위기가 편안하고 즐거워 보이기 때문인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촬영 기법 때문이었다. 세 사람을 똑같은 위치에서 하나의 쇼트에 넣는다든지 단독 쇼트에서도 카메라 앵글의 크기를 같게 함으로써 마리안느, 소피, 엘로이즈가 평등하게 공존하는 것을 보여주려는 카메라의 의도가 돋보인다. 계급사회가 배경인 영화들을 많이 봐왔는데 귀족과 하녀가 가까이 지내는 것은 봤어도 이렇게까지 평등한 위치해 있는 것은 못 본 것 같아 새로웠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인터뷰 중에 이에 대해 ‘평등한 사랑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계급을 넘어선 하인 소피와의 우정, 욕망과 열망을 지닌 백작부인과의 대화 같은 것들. 인물들 간의 연대와 정직함을 원했다.’고 말했다. 완전한 여성 서사 이 영화 속의 페미니즘과 여성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영화 러닝 타임인 120분에서 남성이 나오는 장면은 58초가 끝이다. 소피 아이의 아빠나 엘로이즈가 결혼할 남자, 엘로이즈의 아버지 등 남자들의 서사는 물론 얼굴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 왠지 모르게 새로움과 신선함을 느꼈던 이유인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오롯이 여성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영화를 본 적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여성 서사 영화가 많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대화 중에서 여성 화가로서 활동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마리안느는 ‘여성 화가의 활동은 제한되어 있고, 중요한 주제들도 전부 여성을 비껴간다’며 직접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한다. 찾아보니 마리안느가 미술을 가르치는 학생들이 모두 여성이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 18세기에는 여성 화가들이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여성 예술가들의 권리가 조금씩 신장되던 시기였지만 여성 화가의 작품은 전시에 출품할 수 없었다. 마리안느가 전시에 작품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낸 것처럼, 여성 작가들 또한 글을 남성의 이름으로 냈다고 한다. 대를 잇는 정략결혼과 억압의 역사 정략결혼이라는 소재를 통해 그 당시에 여성이 억압받던 시대상을 잘 드러냈다. 엘로이즈의 언니가 원치 않는 결혼 대신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에 엘로이즈가 대신 결혼하게 된 것도 상징적인 부분인 것 같다. 엘로이즈가 언니의 대체품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엘로이즈의 어머니도 그랬듯이 언니와 엘로이즈도 정략결혼을 하게 되는 것이 대를 이어 전해지는 여성 억압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이 원해요?’ 임신 중단이라는 소재가 쓰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영화들과 달리 이 소재를 담담하게 그려낸 것도 인상 깊다. 위에서 언급했건 것처럼 소피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 언급하지도 않고 괴로워하는 여성의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다. 소피가 낙태 시술을 받는 장면에서 소피의 옆에 아기를 둔 연출도 기억에 남는다. 소피가 아기에게 위로를 받지만 임신 중절을 한 것에 대해 죄책감은 가지지 않고 그저 소피의 선택임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애초에 그 당시에 하녀는 출산을 당연하게 해야 하는 존재였을 수도 있는데, 마리안느가 소피에게 아이를 원하냐고 질문한 것이, 또 원하지 않는다는 간단한 대답에 소피를 도운 것이 출산에서의 여성의 선택을 존중하는 장면인 것 같다. 소피와 아기를 함께 둔 것이 잔인하다는 사람의 글을 보았는데, 임신 중절을 단순히 살인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술 모습을 그리려는 장면도 기억에 남았다. 마리안느는 보기 힘들었는지 고개를 돌리지만 엘로이즈는 그 모습을 보라고 한다. 여성에게 금기된 행위를 부정적으로 여겨 지우려고 하지 않고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이 확실히 다른 영화에서 다루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여성이 보는 여성 간의 사랑 셀린 시아마 감독은 여성 성소수자로서 여성들 간의 사랑을 섬세하고 현실적으로 다뤘는데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서 그게 보였다. 타오르는 영화의 초상 gv에서 가장 많이 나왔던 질문 중에 하나가 ‘둘은 언제 사랑에 빠졌나’라고 한다. 실제로 영화 <캐롤> 에서 나오는 것처럼 첫눈에 반한다거나 하는 말 그대로 ‘영화적인’ 설정이 없다. 관객들은 언제부터 둘의 사랑이 시작되었는지, 엘로이즈가 처음으로 마리안느에게 키스하고 싶었던 순간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둘이 점점 더 사랑에 빠지고 있다는 것은 눈에 잘 보인다. 처음의 엘로이즈는 분노가 늘 이긴다며 잘 웃지 않았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어머니에게 그녀가 좀처럼 웃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웃음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 포즈를 취할 때 마리안느에게 환하게 웃어 보이는 모습을 보며 둘은 확실히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굉장히 현실적으로 여성 간의 사랑을 보여주는 장면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싸우는 장면이다. 영화를 볼 때는 이 장면의 감정선을 잘 따라가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의 글을 보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만약에 남성과 여성인 상황이었으면 이 장면이 의아하지 않고 자연스러웠을 것이라는 글이었다. 연인이 갑자기 감정이 격해져 싸우는 장면은 사실 아주 많이 봐온 모습인데 둘 다 여성인 연인의 모습을 많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느꼈던 이질감인 것이다. 이것을 알고 나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들처럼 여성에 대한 대상화도 없고 보기 편안한 여성 서사 영화를 많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재회 결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 영화를 보고 가장 궁금했던 것은 ‘정말 엘로이즈가 마리안느를 못봤을지’였다. 마지막에 본 엘로이즈의 모습이 사실 마리안느의 환영이라는 의견도 보았다. 계속 시선이 평등하게 오고 가는 편집에서 갑자기 극적인 줌인이 어색했고, 마리안느가 이전에 보았던 엘로이즈의 환영이 복선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또 엘로이즈가 혼자 올 리가 없는데 혼자였다는 것도 근거가 되었다. 이 의견도 정말 재미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에게 혼자 있으면 자유롭다고 해주었는데, 마리안느는 사계 여름 3악장의 뒷부분을 듣기 위해, 마리안느를 생각하며 자유를 느끼기 위해 혼자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영화를 봤는데 이렇게 다양한 의견이 나온다는 곳은 항상 참 재미있는 것 같다. 마지막에 엘로이즈가 카메라와 눈이 마주치고 끝나는 결말이었다면 어땠을까. 오히려 이야기의 끝을 매듭짓는 느낌이 아니었을 것 같다. 원래의 결말이 관객들에게 생각할 만한 여지를 주고 오랫동안 줌 인을 하는 것도 긴 시간이었는데 지루하다거나 그런 느낌 없이 내내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좋았다. 이 영화는 혼자 생각하고 상상할 부분이 많았고, 나는 그런 영화를 좋아한다. 소피는 두 사람 관계를 눈치챘을지 같은 사소한 부분부터 마지막 장면에서 엘로이즈는 정말 마리안느를 보지 못했는지, 둘은 어떤 방식으로 평생 동안 그 5일간의 기억을 추억할지 같은 오래 생각할만한 부분까지 궁금한 점도 많았기에 여러 번 보며 곱씹고 싶은 영화 중에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