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수
- 감독
- 김효천
- 제작년도
- 1972
- 출연
- 박노식, 임지성, 허장강, 최재호, 추석양, 최준, 장훈, 라정옥, 김문주, 황인철, 임운학, 이정애, 정미경, 임예심, 이창식, 조춘, 한명환, 임철우, 마도식, 조영수, 박동룡, 남성국, 박예숙, 박병기, 남충일, 추봉, 김세라, 박일, 황민, 박순봉, 박달, 손승문, 김지영, 손전, 양일민, 김승남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토끼가 부러워. 고민이 없거든. 자기라는 것이 없고 그저 토끼라는 것밖에 몰라.” - < 바보사냥 >(김기영, 1984) 중 토끼를 부러워하는 세 남녀가 토끼섬을 찾아 떠나고 있다. 이게 웬 깜찍한 발상인가 싶은데 실상은 꽤 심오하다. 세 주인공 중 두 남자 강식( 배규빈 )과 홍익( 김병학 )은 정신병동에서 이제 막 탈출한 사람들이고, 한 여자 석호( 엄심정 ) 역시 만만찮게 특이하여 통상적 대화가 잘 안 통하는 인간이다. 여하튼 세 사람이 왜 토끼섬을 찾느냐 하면 그곳이 이들의 이상적인 대안 세계인 탓이다. 강식은 공해 공포증으로 인해 인간의 손이 닿은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완연한 원시의 자연 사회를 원한다. 그 방법이라 하니 무인도에 벌과 토끼만 풀어 놓고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생태계를 자생시킨단 것이다. 사회에 살면서 자살 강박에 시달리던 홍익은 강식을 따라 토끼섬을 쫓고, 탄광 마을에서 아버지를 잃은 석호도 둘을 따라나선다. 이 괴기한 여정과 인물들의 특이함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영화평론가란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영화기자로서 영화평론가란 분들을 자주 만난다. 아마 대한민국의 모든 직업 중에 영화평론가들과 가장 자주 이야기하고 만나는 직무이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래서 ‘비평, 안녕하십니까’에 연재를 청탁받았나 싶기도 하다. 청탁을 덥석 물어버리고 “영화비평가의 일상과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는 ‘비평, 안녕하십니까’의 기획 의도를 들은 뒤엔 꽤 놀라버렸다. 지난해 12월 무렵인가에 영화평론가들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기획해 본 적 있는 탓이다. 평소 자주 만나는 영화평론가께 이 다큐멘터리의 시놉시스를 얘기하자마자 “그런 걸 왜 만들어요···”라며 아주 작은 반발을 듣긴 했으나 지금도 그 꿈엔 변함이 없다. 그들의 일상이 개인적으로 너무 궁금하다거나 그들에게 기막힌 사연이 있어 보여서는 아니다. 자고로 영화는 재밌어야 하는데 그들의 일상을 찍는다면 분명히 재밌는 무언가가 나올 것 같단 확신이 있었을 뿐이다. 영화평론가들이라 하여 모두가 항시 재밌는 사람이라는 등 완전한 공통점을 갖고 있진 않다. 모든 편의점 점주님이 똑같은 사람은 아니듯 모든 영화평론가를 하나로 묶기는 다소 어렵다. 굳이 공통점을 도출해 보자면 대개 자차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정도일까. 그들이 <바보사냥>의 강식처럼 극심한 공해 공포증에 시달려서는 아닐 것이고, ‘비평, 안녕하십니까’에서 박예지 , 이광호 평론가가 먼저 밝혔듯 다소간의 현실적인 생활상에 결부한 문제일 순 있겠다. 또 굳이 찾아보자면 수상할 정도로 카톡 답장이 느리고 전화를 안 받는단 정도일까. 특히 원고 마감에 관한 연락이라면 더욱더···. 또 영화평론가들은 각자의 의견이나 취향에 꽤 강고한 편이다. 겉으론 조용조용, 다소 유순해 보이며 실제로 아주 친절하신 평론가조차도 맘속의 칼을 갈아 글 쓸 때가 많다. 놀랄 때가 잦다. 이 강고함에서 평론가 개인 간의 지극한 차이가 나타나고, 이것이 바로 진정 재밌는 지점이다. 이를테면 치킨집에서 간단한 술자리를 가졌다고 칠 때 평론가 A는 절대 닭고기를 먹지 않는다며 양배추샐러드만 우걱우걱 먹고 평론가 B는 무조건 바삭한 게 좋다며 치킨의 껍질만 뜯어 먹는다. 당황한 영화기자 한 명은 결국 닭의 맨살만 먹게 된다. 눈치를 보던 B가 “기자님 이거 맛있으니까 드셔보세요”라며 치킨 껍질을 주섬주섬 건네준다. 그래서 잘 받아먹고 맛있다고 대답하면 막상 상대가 실망해 버리는, 그런 신묘한 일을 종종 겪어본 적이 있다. “그런 걸 왜 만들어요···”라니.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물론 실화를 바탕으로 퍽 과장한 우화이지만 이 우의의 골자야말로 영화평론가란 업의 중요 조건을 설명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왼쪽부터 강식(배규빈), 석호(엄심정), 홍익(김병학) 1970~80년대를 거쳐온 유명 시네필 한 분(평론가 C)의 주위로 젊은 영화평론가 몇몇이 모인 자리에 있던 적이 있다. C 선생님은 영화평론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강고한 ‘베팅’임을 역설하셨다. 특정 영화에 대한 지지와 비판을 확고히 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자신이 틀렸다면 판돈을 모두 잃을 결사의 각오로 임해야 한다. 한번 닭고기를 안 먹기로 했다면 아무리 입에 집어넣어도 안 먹어야 한다. 살면서 처음 듣는 의견이 아닌 데다가, 독립 영화잡지를 출판했을 때 영화 저널리즘의 본질은 비판과 발굴 두 개뿐이라고 말하고 다닌 전적도 있기에 아주 신선한 논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의 말씀으로 들었을 땐 감상이 남달랐다. 원래 알고도 안 하는 것이 가장 나쁜 법이다. 혼자 반성하던 때와 직접 혼났을 때의 차이가 극명했고, 이 ‘베팅론’의 현재적 가능성을 속으로 남몰래 타진해 보기도 했다. 이 가능성의 타진이 혼자만의 고민은 아닌 듯싶다. 송경원 씨네21 편집장은 팟캐스트 ‘ 조용한 생활 ’을 통해 말했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것의 완성도에 주목하는 시네마의 시대는 지났고,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사이의 해석 과정이 가장 중요”해졌단 것이다. 강덕구 평론가를 필두로 모인 팟캐스트 ‘ 회랑 ’에서도 엇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제는 어떤 영화나 예술을 대하는 원본성의 경험이 자기 자신에게만 남아있다. 내가 느낀 경험만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배경에서 모든 비평가의 글은 점차 에세이로 변할 것”이란 맥락이다. 요컨대 이광호 평론가의 말처럼 “취향은 이제 가능성의 벡터를 상실”했다. 타인에게 자신의 영화적 취향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이 취향을 글과 이론으로 견고하게 정제해 특정 영화를 정전으로 수출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워진 시대다. 그러나 위와 같은 한계를 거꾸로 매달아 바라볼 수도 있겠다. 영화평론가들의 자아란 C 선생님의 말씀처럼 여전히, 심지어 더욱더 비대해질 필요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객관적으로 남을 설득하기가 아주 무용한 상황일 때, 본인의 생각과 세상의 여론이 서로를 너그러이 흡수할 수 없을 때야말로, 모호한 타협을 요구하기보단 외려 세상을 매질하는 비평적 태도를 견지해야 할 수도 있겠단 뜻이다. 누군가를 크게 해치는 일만 아니라면야 지나치게 그리고 그럴듯하게 자기 말만 하는 강식과 홍익과 석호들의 비평적 에세이가 읽고 싶달까. 천국과 지옥이 한꺼번에 있는 곳 이쯤에서 <바보사냥>의 두 남자를 재론할 수 있을 법한데, 두 남자의 기행이 전술한 비평적 태도와 매우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강식과 홍익은 토끼섬에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돈벌이에 매진한다. 한 번은 포장마차를 열었는데 식자재 거래처가 병아리를 참새라고 속이며 납품한 일을 알게 된다. 거래처 사장이 “요즘 시대에 어떻게 참새를 잡냐?”라며 다들 이렇게 장사한다고 넌지시 설득하지만, 삐약거리는 병아리의 목을 차마 비틀 수 없던 둘은 “병아리를 죽일 바엔 병원에 다시 들어가자!”라며 포장마차를 부수고 만다. 이 상황이 머릿속에서 변주돼 반가운 모습으로 재생된다. 요즘은 이런 게 영화라며 속삭이는 남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을 때, 버럭 화내며 극장에나 다시 들어가자고 외치는 불통 영화평론가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다. 두 남자의 돈벌이는 더 비극적인 상황을 마주하기도 한다. 소에게 억지로 물을 가득 먹인 뒤 한껏 매질하여 소의 살이 불게 만들어야 한다. 도축할 때 고깃값을 더 받기 위해서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둘의 질문에 작업 현장의 선배가 “이게 기술이고 예술이야!”라며 일갈하고, 소의 눈망울을 보며 부모님을 떠올린 홍익은 ‘어머니 죄송합니다. 당장 저녁 먹을 돈이 없어 두들깁니다.’라며 속으로 한탄한다. 어디에선가 본 상황 같다. 영화란 늘 기술과 예술의 경계에서 몸체를 불려야 하는 매체이며 필연적으로 양쪽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다. 그 간극 속의 영화평론가들은 저녁 먹을 돈을 위해서 타자를 흠씬 두들겨 성미에 맞지 않는 글을 써야 할 상황에 들어서기도 한다. 그러면서 고해하듯이 뇌까리지 않을까. ‘시네마여 죄송합니다. 전 오늘 몇만 원의 고료를 위해 싫어하는 영화를 무난하다고 썼습니다···’ 포장마차를 부수고 매질해야 하는 송아지를 바라보다가, 탄광에 다다른 강식과 홍익 강식과 홍익은 병아리의 경우와 비슷하게 결국 소의 매질을 그만둔다. 대신 소를 때리라고 시킨 사람들을 흠씬 두들겨 팬 뒤에 탄광 마을에 가서 광부 일을 시작한다. 그들이 들어간 어두운 무저갱은 흡사 극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탄광 마을의 한 아저씨가 이곳을 “천국과 지옥이 한꺼번에 있는 신비”의 공간이라 말하는데 이 선언이 신묘할 정도로 극장의 비유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비단 물리적 극장이 아닐지라도 영화광 각자가 뿌리내린 영화의 공간, 그곳이 독립예술영화관이든 골방의 컴퓨터 앞이든 멀티플렉스든 시네마테크든 비밀스러운 그들만의 온라인 커뮤니티이든 간에 그 어둠의 장소는 영화평론가들에겐 천국이자 지옥이 되기 마련이다. 이곳은 자신의 영화적 취향을 만끽하며 그것을 글로 재생산할 수 있는 유토피아이자, 자신이 좋아하는 바를 끊임없이 세상에 설명하며 끊임없이 거부당해야 하는 디스토피아이기도 한 것이다. “토끼가 부러워. 고민이 없거든. 자기라는 것이 없고 그저 토끼라는 것밖에 몰라”라는 석호의 귀여운 싫증엔 다음과 같은 홍익의 맞장구가 이어졌다. “그에 반해 사람은 자기의식이 있고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아니까 한없이 불행하군.” 그렇다. 영화를 향한 자기의식이 너무도 뚜렷하여 되려 불행을 마주하는 족속, 다시 비유하자면 억지로라도 닭의 살이 아니라 껍질만을 원해야 하는 사람들, 하여 자유로운 토끼를 은근히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이 속성이 바로 영화평론가들의 주요 조건이자 가장 뚜렷한 공통점일 듯하다. 이 모순 속의 긴장에서 번지는 찌릿함을 다들 끊기 어려워한단 것 역시 비슷할 테다. <바보사냥>의 결말, 잦은 고초에도 홍익은 결국 토끼섬을 찾아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선다. 이 항해는 과연 타의 없이 자아와 자생만이 존재하는 곳을 향해 간 구원의 발로일까, 혹은 그저 타의에 떠밀려 도망치는 자의 흔들흔들 피난길일까. 둘 중 무엇이 됐든 우리도 결국은 섬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 토끼가 부럽다. 이우빈(영화기자) l 친구가 없어서 영화 보러 다닌 1997년생. 《 씨네21 》 기자. 2023년 《 쿨투라 》 영화평론 신인상. 독립 영화잡지 《 섭씨 233 》 편집장. 비평 웹진 《 코아르 》 필진 등.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늑대-여자들 어떤 영화로 리뷰를 쓸까 고민하며 올해 뽑은 나의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를 한참 노려보다 특정 형상이 떠올랐다. 그건 세대도, 국적도, 상황도 다른 ‘늑대-여자’의 형상이었다. 무정부주의적 에코 페미니스트인 노년의 늑대-여자, 수의대 신입생 통과의례로 날고기를 먹은 후 낯설지만 강력한 자신의 힘을 지각하게 된 식인 늑대-여자, 돌연변이 유전자 실험으로 태어나 초능력을 지닌 십 대의 늑대-여자. < 스푸어 >(아크네츠카 홀란드, 2017)의 두셰이코, < 로우 >(줄리아 듀콜뉴, 2016)의 쥐스틴, < 로건 >(제임스 맨골드, 2017)의 로라가 바로 그들이다(늑대가 아닌 다른 동물로 더 확장해 논의하면 <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일디코 엔예디, 2017)의 주인공으로, 소 도축장 품질검사관이자 사슴이 된 마리어까지 포함할 수 있겠지만 지면의 한계 상 제외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종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이접, 혼종, 합종하며 인간성, 더 정확히는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제 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인간성에 실존적이고 윤리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인간은 이 상태로 존재해도 되는가?’이다. 그러나 두셰이코, 쥐스틴, 로라는 인간성을 질문하기 위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깊게 파고 들어가며 또다시 인간 중심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방식을 비껴간다. 오히려 폭력적인 악당으로서의 인간은 캐리커처화되고 종을 횡단해 동물성을 탐험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 동물성이 아니라 동물이 되어 감각하는 동물성이다. 인간은 그 스스로도 동물의 일부면서 특히 자신 내부의 야만성, 폭력성, 자기중심적 욕구충족, 비성찰성, 폐쇄성, 생존을 위한 이기심과 무한경쟁 등을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묘사하기 위해 ‘동물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왔다. 그러면서 인간을 동물에서 분리해 예외적 특권을 가진 존재로 가정한다. 이러한 위치선점은 인간의 지구 지배를 정당화하고 여타의 동물을 타자화한다. 그러나 < 스푸어 > < 로우 > < 로건 >의 늑대-여자들은 늑대와 혼종하며 동물성을 다르게 감각한다. 그녀들은 절대적 공감, 기존의 기표에 포섭되지 않는 소수자의 욕망, 경계와 고정관념을 흐리며 배치를 다르게 만드는 공동체, 자율과 야성성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소수자를 지지하는 연대를 특징으로 한다. 늑대-여자들은 아웃사이더이며 순응적이지 않고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고립되지 않고 불가능할 것 같은 공동체를 형성한다. 때문에 ‘짐승 같은 야만성’을 강조하는 남성들의 영화가 늘 떼로 몰려다녀도 결국은 반복적으로 ‘고독한 늑대’로 결론 맺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를 갖는다. 늑대-여자들이 주인공인 이 세 영화에서 기성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남성과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에 반격하는, 그래서 살인과 식인도 서슴지 않는 동물성은 소수자의 욕망이다. 두셰이코Duszejko “블랙코미디 요소를 지닌 무정부주의적인 페미니스트의 범죄 이야기”라고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이 스스로 정의내린 이 영화는 리벤지 스릴러, 미스터리, 액션,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가 섞여 있어 때때로 영화가 덜컹거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 덜컹거림, 그 이종적이고 이질적인 것들의 혼종이 바로 이 영화의 주제이고 미학이며 즐거움이다. 그 혼종성은 이 영화의 포스터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커다란 늑대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한쪽 눈은 인간의 눈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재미를 위해 잔인하게 동물을 사냥하고, 제도, 법, 종교가 그 폭력을 승인하는 사회(법은 계절별로 사냥 가능한 동물을 지정하고, 종교는 사냥꾼을 축복한다)에 두셰이코는 늑대가 되어 복수를 감행한다. 사냥꾼들은 단지 동물만 죽이지 않는다. 여성과 아이 등 사회의 소수자들에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고 폭력을 가한다. 즉 사냥은 인간의 동물성이 아니라 권력과 위계의 문제다. 서사적으로 보면 이 복수는 사계절에 걸쳐 일어난다. 대부분의 리벤지 스릴러는 최종 보스를 만나는 장면에서 가장 스펙터클하게 액션을 감행하며 억압되어 있던 분노를 터트리는 식으로 진행되지만, 이 영화는 반대다. 복수는 천천히 이뤄진다. 이러한 서사는 동물과 여성에게 가해왔던 폭력이 그만큼 길고, 오래, 일상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속되어왔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 폭력은 한 명의 남성 악당이 아니라 남성 중심 네트워크가 조직적이고 구조적으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형식의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에서 동물을 보여주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동물은 단순히 풍경이 되지 않는다. 총성이 울릴 때 동물들이 도망치는 인서트에서 흔들리는 카메라는 사냥하는 쪽의 액션이나 스릴이 아니라 도망치는 쪽의 위급함과 다급함을 재현하며, 살인현장에 나타난 늑대와 사슴들은 그들의 시점 쇼트를 갖는다. 그것은 쇼트와 역쇼트의 형식에서 비가시적이었던 시점이다. 동물의 시점 쇼트는 늑대가 되어 복수를 감행했던 두셰이코와 마찬가지로 관객들로 하여금 종을 가로질러 사슴이나 늑대가 되게 하고 그들의 정념을 감각하게 한다. 쥐스틴Justine < 로우 >는 장르적으로 < 캐리 >나 < 진저스냅 > 같은 공포영화의 전통에 닿아 있다. 이 공포영화들은 10대 중후반 소녀의 섹슈얼리티를 위험하고 비규범적인 것으로 규정하며, 그 은유로 주인공 여성이 초능력이나 이질적인 정체성을 지각하게 한다. <로우>는 이 서브 장르를 차용하면서도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혐오하는 클리셰를 반복하지 않고 가장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정치학으로 향한다. 부모, 언니가 모두 수의사이고 엄격한 채식주의자이자 모범생으로 자랐던 쥐스틴은 수의대 신입생 통과의례로 강제로 토끼의 생간을 먹게 된다. 그녀가 경험한 수의학과는 동물을 존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위계가 심한 남성 중심적인 문화로 가득한 곳이다. 여자들은 성적 희롱의 대상이 되고, 게이인 남성은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 와중에 이상한 허기 속에 쥐스틴은 날고기를 먹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충족감을 느낀다. 영화는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사이의 경계와 금기를 거부하고 비체적인 피부 발진, 머리카락, 날고기, 물어뜯기, 오줌 싸기, 토하기 등을 보여주며, 여성의 몸에 대해 질문한다. 날씬한 몸을 위한 식이통제, 가랑이 털을 밀어버리는 비키니 왁싱(자매의 비키니 왁싱 장면은 공포영화사에 남을 명장면이다!)은 무엇을 위한 고통인가. 이것은 정말 인간적인가. 자신의 식인 욕망이 모계로부터 왔다는 것을 안 쥐스틴은 윤리적 선택에 직면한다. 엄마처럼 엄격한 채식주의자로 살 것인가, 언니처럼 자신의 욕망을 풀어놓고 사회의 심판을 받을 것인가. 그러나 부계 혈통의 < 늑대아이 >와는 달리 이 선택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쥐스틴은 여성으로서 어떠한 곳에 맞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감정을 먼저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식인 정체성뿐만 아니라 여성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신의 어두움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야 윤리적 선택도 가능하다. 쥐스틴과 같은 젊은 여성이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할 때 느끼게 되는 일상적 폭력, 불쾌함, 분노는 잔인한 유머와 함께 클로즈업과 롱테이크, 촬영 속도를 변화시키며 흐르는 듯한 움직임과 거리를 둔 으스스한 금욕적 설정 쇼트를 오가는 카메라를 통해 우아하게 구현된다. 로라Laura 전통적인 남성 장르로 여겨졌던 서부극과 슈퍼 영웅 액션의 혼종인 < 로건 >은 고독한 ‘늑대-남자’의 죽음이자 새로운 종(트렌시젠) ‘늑대-여자’의 시작을 그린다. 이 영화에서 로라를 비롯해 실험실에서 태어난 뮤턴트 아이들은 위의 두 영화에 등장한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 우리에 갇혔다. 이제 늙고 병든 울버린보다 힘이 센 로라는 포스트페미니즘 시대에 걸 파워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아빠 딸 Daddy’s Girl‘이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을 유지할 수 없는 남성들은 딸들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힘을 여전히 확인하는 방식은 그 딸의 힘이 엄마가 아닌 자신에게서 왔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건>이 흥미로운 슈퍼 영웅 액션 영화인 것은 거기서 더 나아간다는 것이다. 로라는 울버린이 포기하고 프로페서 엑스가 망쳐버린 뮤턴트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는다. 여전히 ‘고독한 늑대’로 서부극의 남성 멜로드라마를 만드는 울버린과 달리, 그의 죽음 후 로라는 다른 뮤턴트 아이들을 이끌고 함께 떠난다. 모가장의 공동체를 이루었던 두셰이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법을 고민하는 쥐스틴, 억압받는 이들의 공동체를 재건하는 로라, 늑대-여자들은 홀로 떠나지 않는다. 모계를 강조하고 부계와의 단절을 말하는 이 영화들은 사실 세 세대의 페미니즘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60대 여성인 두셰이코의 페미니즘은 급진적 변화를 원했던, 즉 혁명적 비전을 가졌던 이들의 것이다. 그녀들은 기성 시스템을 말 그대로 꺼버리고 무정부주의적 혁명을 원한다. 세계는 다시 변화할 것이고 새로운 사이클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것을 기다린다. 그래서 < 스푸어 >에서 모든 버려지고 배제된 존재들이 모여 있는 환상적인 공동체는 사적인 소망성취라기보다는 아직 오지 않은 현재다. 쥐스틴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몸이 고정관념과 편견 속에서 얼마나 억압되고 비인간적으로 통제되고 있는지를 비판하는 2세대 페미니즘의 전통에 있다. 가부장제, 규범성으로부터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해방시키는 것은 여성들에게 엄청난 힘을 돌려줄 것이다. 로라는 여성 또한 강한 힘을 갖고 리더가 될 수 있다고 보는 포스트페미니즘의 걸파워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거침이 없으며 타고난 재능과 힘을 주저하지 않고 발휘한다. 이 세 세대의 페미니즘은 연대기적이지 않다. 이 다양한 페미니즘은 소위 ‘페미니즘 리부트’ 속에서 함께 공존한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동물 종을 가로지르며 그동안의 인간성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되어 왔는지를 비판한다. 또한 부계의 전통하에 있던 장르들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모계화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전히 폭력과 살인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소수자의 욕망을 위해 사용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가끔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고, 되게 훌륭한 뭔가를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꽤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 내게 홍재희 감독의 < 암사자(들) >은 그런 영화 중 한 편이다. 마장동 우시장을 배경으로 폭력에 대한 짧은 우화를 들려주는 이 영화는 섬뜩함과 기묘한 웃음기를 동시에 가진 영화다. 우시장에서 도축업을 하고 있는 정희는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여자다. 매일 도박으로 시간을 때우며 집안일은 돌보지 않는 남편 탓에 아이의 미래가 아예 블랙홀이라 홀로 병원에 가 낙태 시술까지 받을 정도로 인간적인 면에서 핀치에 몰려있다. 이는 주변 상인들에게도 알려져 있는 사실이라, 다른 가게의 아주머니들은 정희를 동정하지만 그렇다고 이렇다 할 도움을 주기도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옆 가게 내장집 아지매는 고기를 싫어하는 정희에게 소의 골로 만든 요리를 내밀며 “고기 파는 년이 고기를 싫어해서 어떻게 해. 강해지려면 육식을 해라. 육식을 해야 사자 맹키로 힘이 나는기라.”라고 말한다. 이 말이 신경 쓰이는 정희는, 그 날부터 고기를 먹기 시작한다. 고기를 먹은 정희가 갑자기 힘이 나서 남편을 때려눕히고 ‘아싸 좋구나’ 하는 건 아니다. 그녀는 먹지 않았던 ‘고기’를 먹으면서 해보지 않았던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하우스에서 탈탈 털리고 돌아와 아내를 향해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모아놓은 돈 없느냐고 묻고, 기어코 주먹을 휘두르는 남편을 거대한 소의 뒷다리 뼈로 대가리(이런 놈은 굳이 ‘머리’라고 부르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를 박살 내며 외친다. “나는 년이 아니라 정희야. 김! 정! 희!” < 황해 >의 면정학보다 2년 앞서 ‘뼈’가 가진 무기로서의 박력을 맘껏 보여준 뒤, 그녀는 당황하지 않는다. 오히려 표정은 편안해 보인다. 집에 가던 길에 정희를 보러 들른 내장집 아지매는 이 광경을 목격하고 시장의 친한 동료들을 부른다. 마장동 우시장 외길인생을 보내온 이들이 모여서 할 일은 무엇인가? 에이 알면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화두가 된 것은 한두 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한 개그맨의 망언으로 ‘여성혐오’와 ‘페미니스트’가 또 한 번 쟁점이 되기도 했다. SNS를 필두로 한 넷상에서는 꽤 활발하게 논의가 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넷을 벗어나면 오히려 ‘지들끼리 한 얘긴데’라며 두둔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님에도, 대충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 개그맨은 가장 하차 요구가 컸던 단 하나의 프로그램에서만 하차했고, 나머지에는 꾸준히 출연하는 중이다. 발언의 강도를 생각한다면 나름 편해 보이는 조치다. 반성은 했을까? 글쎄. 사과문을 읽어보면 좀 아리송한 기분도 든다. 연예인을 ‘공인’으로 보지는 않지만 본인의 발언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아니 공인이고 뭐고를 떠나 옆집 아저씨가 한 이야기라 해도 ‘저 아저씨 이상하다. 말 섞지 말자’ 라고 할 만한 수위이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 암사자(들) >이 떠올랐다. 말을 해도 못 알아듣고, 안 듣고, 맥락을 파악 못 하는 사람이 꽤 많은 상황을 보면서 어쩌면, 이치에 맞고 합리적인 논쟁보다는 오히려 ‘니들 자꾸 그러면 정형해버린다! ㅋㅋㅋ’ 하는 이런 식의 이야기가 더 눈높이에 맞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크레디트가 올라가며 나오는 마장동 인간정형 4인방의 호쾌한 콩트에는 “이놈 꼬추는 내가 잘랐다! 이걸 꼬추라고 달고 다녔냐 으이그” 하는 식의 구수한 대사들이 들어있다. 앞으로 아파트의 어린이들에겐 ‘너 자꾸 쿵쾅거리면 마장동 아줌마가 꼬추 떼어간다?’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잘 먹힐지도 모르겠다. 뭐 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하면 그저 생각나는 대로 떠들지 말고, ‘왜’ 그런지 좀 더 넓은 견지에서 생각하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홍재희 감독은 2012년에 < 아버지의 이메일 >이라는 다큐멘터리로 좋은 평가를 얻고 차기작을 준비 중인 것 같다. 낯선 공간과 익숙한 이야기가 만나 미묘한 재미를 준 < 암사자(들) >같은 작품을 기대해 본다. P.S : 이 영화는 단편영화 전문 온라인 상영관 유에포(youefo.com)에서 볼 수 있다. http://youefo.com/film/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