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의 열혈남아 독고성
- 감독
- 진광교
- 제작년도
- 2000
- 출연
- 유봉희, 김윤미
임원식 감독의 대표작은 일제감정기에 순교한 주기철 목사에 관한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일 것이다. 임원식 감독이 연출, 제작한 작품 중 두 편이 상영중지를 당했는데 그 중 한 편이 이 작품이다. 이 영화는 명보극장 개봉 당일 중앙정보부의 지시로 간판이 내려졌는데 당시 옥중에 있던 사회운동가 문익환 목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그는 이에 항의해 중앙정보부 남산 대공분실에 갇히기도 했다. (사진1) 임원식 감독이 대표작으로 뽑은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포스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개봉 전 문공부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제작사인 합동영화사는 포상으로 외화수입쿼터를 받았다. 임원식 감독은 그 전해에 새마을정신을 구현한 영화 <어머니>(1976)를 연출해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다. 황해도 월남민 출신인 그는 남한에 대한 첫 인상으로 ‘육탄 10용사’의 용맹함을 꼽을 정도로 애국심 투철한 인물이었음에도 당시 정부의 강박증적인 검열 관행은 피할 수 없었다. 해방정국과 월남, 한국전쟁을 거치며 성장했고 한국영화의 황금기에 감독으로 데뷔해, 70,80년대 검열로 위기를 겪고 파산해서 재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은 줄곧 아이러니하고 우연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사건들은 때로는 예기치 않은 실패로, 때로는 뜻밖의 행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임원식 감독은 1932년 생으로 황해도 평산군 세곡면 누천리에서 태어났다. 구한말 의병 출신인 부친 슬하의 3남 2녀 중 막내로 자랐고, 곡창지대의 부농이었던 집안 덕에 일제 강점기는 큰 고통 없이 보낸다. 하지만 해방 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그의 가족은 월남을 결심한다. 먼저 월남한 서북청년단 특공대장인 큰 형님의 도움으로 1946년 12월 24일 38선을 넘어 서울 회현동 적산가옥에 자리 잡는다. 서울에 정착하기 위해 그는 얼마간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의약품을 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거리에서 장사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도왔고 경제적 안정을 찾을 무렵 서울 성도중학교에 입학한다. (사진2) 1948년 경 서울 성도중학교(현재 용문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임원식 감독 (사진3) 임원식 감독은 서울 성도중학교 시절 학도호국단 간부로 지냈다. 학도호국단 제복을 입고 있고 찍은 사진 중 오른쪽이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4) 학도호국단 제복을 입고 야외훈련 중인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전쟁 초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 잔류하게 된다. 징집연령이었던 그는 집에서 숨어 지내다 배고픔 때문에 결국 인민의용군에 입대한다. 하지만 전선으로 배치되기 직전 탈출해 누나와 함께 전주로 피난한다. 9.28 수복 직후 피난지 전주에서 임호 라는 예명으로 학도의용군에 지원한다. (사진5) 1950년 학도의용군 서북지구대가 전주에 주둔하던 당시 단체사진이다. 아래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6) 1950년 학도의용군 특공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찍은 것으로 오른쪽이 당시 특공위원회 특공대장으로 있던 임원식 감독이다. 그리고 학도의용군과 함께 대구로 이동한 후 전선에 배치되기를 기다리다, 대구에서 홀로 국민방위군에 입대한다. (사진7, 8) 1950년 19살의 앳된 나이에 국민방위군 즉 자신보다 나이 많은 민간인으로 구성된 대원 2천명을 인솔해 도보로 경남 사천에서 한산섬으로 이동시키는 임무를 맡았을 때이다. 완장을 차고 있는 이가 임원식 감독이다. 국민방위군에서 그는 대원 2천명을 경남 사천에서 한산도로 도보로 이동시키는 임무를 맡았고 다시 대구에서 벨기에 부대의 보급부대로 종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240명의 부대원과 240개의 지게를 기차에 싣고 대구를 출발, 고랑포에 도착해 벨기에 부대에 합류한다. (사진9) 1951년 임원식 감독이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 18중대 CTC부대 중대장으로써 함께 종군했던 29영국 여단 벨기에 부대의 군복으로 환복해 입은 모습이다. 이제 그는 국민방위군 18중대 CTC부대 중대장으로 벨기에 부대와 함께 전방에서 종군한다. 그는 고지에서 전투 중인 벨기에군에게 총탄을 조달하기 위해 지게에 총탄을 싣고 고지를 오르내리는 민간인 보급부대를 이끌었다. (사진10) 1951년 한국전쟁기 벨기에 부대 군복에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10대 후반의 앳된 얼굴이다. (사진11) 벨기에 부대와 배구를 하던 네트 너머로 천막으로 된 막사가 보인다. 오른쪽이 임원식 감독이고 왼쪽은 함께 종군한 국민방위군 18중대 취사병이다. 국민방위군은 벨기에군이 제공하는 부식과 벨기에 군인들이 주는 팁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전쟁은 길어지고 전투도 생활이 되어가자 국민방위군은 주둔지 주변의 주저 않은 집터를 뒤져 주인 잃은 쓸 만한 물건들을 내다 팔고 때로는 피난민들이 버리고 간 농작물을 거두어 팔아가며 생존을 이어갔다. 위험을 무릅쓰고 군인으로 위장한 뒤 외인부대가 있는 전방까지 들어온 양공주들 또한 그가 목격한 전쟁의 참혹한 일상이다. 전방에서 목숨을 걸고 외인부대와 함께 종군하는 국민방위군 부대원들은 적절한 대우와 보수가 주어지지 않자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원들의 불만에 공감한 중대장 임원식은 대구로 내려와 국민방위군 본부, 육군본부를 다니며 국민방위군의 권리와 보상에 대해 묻고 따졌지만 어느 하나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다. 소득 없이 부대로 복귀하기 직전 우연히 대구의 우체국에서 연락이 두절되었던 아버지를 만나 가족의 소재를 알게 된다. 그는 10대 후반의 어린나이에 겪은 전쟁을 통해 성장해갔다.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다양한 생존의 형태들을 목격하며, 요령 있게 살아 나가는 방법을 배우며 성숙해갔다. 그리고 감악산 전투 등 치열한 고지전을 치르고 난 뒤 국민방위군이 해체되는 시기에 가족들이 피난 중이던 제주도로 내려간다. 제주도로 내려온 그는 오현고등학교에 입학해 평범한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간다. (사진12) 1952년 제주도 피난 시기, 오현고등학교 재학 중 교복을 입고 제주도의 돌담위에 올라가 있는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13) 제주도 피난 시기, 오현고등학교 재학 중 부산으로 수학여행 가 찍은 사진으로 평범한 고등학생의 생활을 보여준다. (사진14) 제주도 오현고등학교에서도 임원식 감독은 자연스럽게 학도호국단 간부로 활동했다. 학도호국단 대대장 복장을 한 임원식 감독으로 배경으로 보이는 초가지붕들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때 그는 제주도 육군훈련소 군예대로 내려와 있던 문화예술인들이 주체가 되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벌인 연극경연대회에 참여하며 연극에 눈을 뜨게 된다. (사진15, 16) 한국전쟁기 제주도에 주둔했던 군예대가 주최한 학생연극경연대회에서 남자 학교에 배당되었던 <붉은 기 땅에 떨어지다>라는 연극의 한 장면이다. 임원식 감독은 제주도의 오현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상경해 고등학교 시절의 연극경험을 살려 서라벌예술대학 2학년으로 편입한다. (사진17) 1954년 남산 후암동 교사 시절 서라벌예술대학 본관 앞에서 찍은 연극영화과 학생들의 단체사진이다. 두 번째 줄에 서 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임원식 감독이고, 앉아있는 인물 중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연출가 김규대, 두 번째 줄에 서 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세 번째가 무용가 은방초, 앉아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첫 번째가 촬영감독 전조명이다. (사진18) 8.15 해방 기념 시가행진에 참여한 서라벌예술대학 사진으로 임원식 감독은 이때도 서라벌예대 학도호국단 대대장이었다. 서라벌예술대학 시절에는 대학연극경연대회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연출가 김규대 선생을 필두로 학생들과 함께 실험극단 창조극회, 원방각, 청협을 만들어 활동했다. (사진19, 20)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재학 시절 대학연극경연대회 참여 작 유치진의 <통곡>에 출연한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사진21) 1960년 극단 원방각의 연극 입센의 <유령> 공연모습이다. (사진22) 학생들이 주축이었던 젊은 극단인 창조극회의 멤버들이다. 아랫줄 왼쪽부터 임원식 감독, 황용하 감독, 성우 남성우, 연극배우 조광일, 윗줄 왼쪽부터 촬영감독 전조명, 연극배우 김광도, 연극연출가 장순환, 사진에는 없는 배우 김보애까지 더해져 창조극회가 탄생했다. 그러나 창조극회를 기성극단 청협으로 만들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서라벌예대 재학시절 제주도 출신 여성과 이미 결혼했던 임원식 감독은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HLKY 기독교방송에서 성우와 연출자로 활동했고 이광래 선생의 추천으로 육군본부 정훈감실로 옮겨가 대북방송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 극단과 방송에서는 임무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국방부 정훈국에서 제작한 김수용 감독의 군영화인 <윤 일등병>(1957)에 출연하기도 했다. (사진23) 김수용 감독의 <윤 일등병>(1957)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임원식 감독(미개봉 추정) 영화계로의 진출을 꾀하던 그는 일본 교포 출신인 유진식 감독의 <불멸의 성좌>(1959)와 <대원군과 민비>(1959)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하게 된다. 유진식 감독이 일본으로 돌아가자 그는 김수용 감독의 조감독으로 <연애전선>(1960), <부부독본>(1961)의 작품에 참여했다. 그리고 신필름에서 제작하는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의 조감독으로 참여하게 된다. <돌아온 사나이>에는 4.19 당시의 거리 장면이 등장하는데, 실제 신상옥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서 시위하는 군중을 촬영한 장면을 영화에 사용한 것이다. (사진24)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 촬영 당시, 4.19로 인해 촬영이 중단됐을 때 신필름이 있던 광화문 동아빌딩 옥상에서 스태프들이 시위현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장면이다. 오른쪽부터 편집기사 오성환, 그 옆이 임원식 감독, 왼쪽 첫 번째가 배우 정동일이다. <돌아온 사나이>의 조감독이었던 그가 스웨덴 대사의 집에서 촬영한 가든파티 장면 준비를 탁월하게 해내자 신상옥 감독은 그를 스카웃한다. 신필름에 입사하게 된 그는 신상옥 감독을 도와 신필름이 다작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데 일조한다. 신필름에서 여러 번의 감독 데뷔 기회가 있었으나 1965년 개봉한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나봉한)가 그의 데뷔작이 된다. (사진25)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나봉한, 1960)의 촬영장소였던 경복궁에서 민비를 연기한 최은희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실 임원식 감독의 초기 연출작 중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품은 <숙부인>(1966)이다. (사진26) <숙부인>(임원식, 1966) 포스터 당시 신필름의 제휴극장이었던 명보극장에 걸기로 한 영화에 문제가 생겨, 신필름에서는 열하루 만에 누군가가 작품을 완성해야 했다. 이때 임원식 감독이 <숙부인>을 9일 만에 완성시켜 검열을 받고 무사히 개봉 한 것이다. 신필름은 당시 전속 감독의 월급이 15만원이었는데 <숙부인>을 단시간에 무사히 완성하자 보너스로 15만원을 더 받았다고 한다. (사진27) <숙부인> 촬영현장의 임원식 감독 이후 그는 쇼브라더스와 신필름의 합작영화 <대폭군>(1966)의 연출을 위해 홍콩으로 건너간다. <대폭군>의 로케이션 촬영은 한국에서, 세트촬영은 중국에서 이뤄졌다. (사진28) 1966년 <대폭군>의 촬영을 위해 홍콩에 갔던 시기 쇼브라더스가 초대한 식사 자리이다. 서있는 왼쪽 끝 남자는 쇼브라더스의 엄준 감독이고 그 아래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엄준 감독의 부인이자 주연 배우인 리리화이다. 가운데는 묘장왕 역을 한 김승호가 앉아있고 서 있는 남자들은 오른쪽부터 장군역을 맡은 배우 성소민, 임원식 감독, 최경옥 감독이다. 앉아있는 오른쪽 끝 여자는 배우 고선애이다. 나머지는 쇼브라더스의 여배우들이다. (사진29) <대폭군>(1966)의 홍콩 촬영장의 모습으로 감독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뒤편에 안경을 쓴 이가 홍콩 측 프로듀서 미스터 주이다. 그 옆으로 미첼카메라를 잡고 있는 홍콩촬영감독과 조수가 보인다. 연출자가 신상옥 감독이 아니라는 이유로 홍콩 스태프들의 파업이 있었지만 신상옥 감독이 홍콩에 들려 무마시키고 임원식 감독이 스태프들과의 갈등을 극복하며 <대폭군>을 완성한다. (사진30) <대폭군>(1966)의 홍콩 촬영장에서 홍콩 여배우 리리화와 세트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의 배경에 있는 다리모형은 세트로, 한국의 팔당에서 찍은 강 장면에 이 다리를 합성하기 위해 무척 정교하게 촬영해야만 했다. 촬영현장에서의 갈등도 극복해야 하고, 대규모 촬영에 특수촬영까지 해야 하는 부담 속에서도 비자 갱신을 위해 들른 대만에서 <나는 매국노>(1966)까지 연출한다. 1년여를 홍콩의 쇼브라더스에서 머물며 대규모 합작영화를 연출한 것보다 그에게 의미 있는 것은 쇼브라더스의 라이브러리와 편집실에서 당시 유행하던 일본의 검객 영화들을 보며 연구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에 돌아와 <풍랑객>(1968), <영>(1968), <맹수>(1969) 등을 연출하며 검술액션영화의 유행을 이끌게 된다. 독고성을 주인공으로 한 검객 영화 <영>은 사무라이액션과 <장고>(세르지오 코부치, 1966)같은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를 참고해 만든 작품으로 평단에서는 비현실적이고 만화 같다는 혹평을 받았지만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사진31) <영>(1968)에서 요동 실향민 마을에 등장한 주인공 영(독고성)의 모습이다. (사진32) <영>(1968)에서 마적단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이다. (사진33, 34) <영>(1968)에서 독고성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그는 후속작으로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남정임을 협객으로 출연시킨 <풍랑객>을 직접 제작하려고 했으나 신상옥 감독의 설득으로 제작을 양보하게 된다. (사진35) <풍랑객>(1968)에서 남정임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모습인데 그는 남정임에게 액션시범을 보이다 다리가 부러져 보름간 촬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충무로에서 액션을 바탕으로 한 장르영화의 연출력을 인정받은 임원식 감독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는 신필름 파견 감독으로 대양영화사와 세기상사에서 여러 작품을 연출한다. 제작자 한갑진의 요청으로 대양영화사에서 액션영화 <심야의 대결>(1969)과 액션사극 <의적 홍길동>(1969)을 연출했고 세기상사에서는 오수미 주연의 멜로드라마 <벌거벗은 태양>(1970)을 시작으로 검술액션사극 <민비와 마검>(1970), 공포영화 <춘색한녀>(1971), <설야의 여곡성>(1972), 에로틱사극 <대감신랑>(1971), 액션영화 <분노의 세얼굴>(1972) 등을 연출한다. (사진36) <설야의 여곡성>(1972)의 촬영현장으로 분장을 한 신인 여주인공 윤세희의 모습이 보인다. 윤세희는 당시 유명한 워커힐 카지노 딜러 출신으로 세기상사의 국쾌남 사장이 발굴한 배우이다. 1970년대 중반 임원식 감독은 신필름에서 충무로로 나와 프리랜서 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하는데, 그가 선택한 첫 작품은 삼영필름의 우수영화인 <아리랑>(임원식, 1974)이다. (사진37) <아리랑>(1974)의 촬영현장으로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이가 임원식 감독이다. 제작비 절감을 위해 테크니스코프로 촬영되었다. 그는 나운규 감독의 원작을 동아일보 해직기자인 장윤환과 시나리오 작가 장천호 형제가 야심차게 각색한 각본을 보고 반해 이 작품을 선택했다. 참의원 출신 부호의 아들 영진이 영화 <아리랑>을 보고 감화되어 광화문에서 만세운동을 벌이자 일본 경찰이 그를 박해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원작을 왜곡했고 선동적이라는 이유로 문공부 시나리오 사전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제작기간이 늘어지자 제작사는 원작대로 각본을 수정하도록 권했고 제작비가 들지 않는 방향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길 바랬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임원식 감독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못한데다 테크니스코프로 촬영되어 그에게 아쉬운 작품으로 남게 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삼영필름은 외화수입쿼터를 받게 된다. 임원식 감독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한국교구에서 안수를 받은 장로였다. 어느날 이사례 여사가 찾아와 이기풍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순교보>라는 영화의 연출을 그에게 의뢰한다. 그러나 그는 유신 초기, 사회운동을 활발하게 벌이던 기독교계를 예의주시하는 정부의 분위기를 고려해 교회전도용 영화로 만들자 설득해 이 작품을 16미리로 연출한다. 이 영화는 후에 그가 종교영화로 재기하는데 교두보가 된다. 1975년에는 몇몇 영화계 인사들과 함께 새마을연수원 지도자교육을 받는다. 이신명, 변장호, 최하원, 고영남, 임권택 감독 등이 임원식 감독과 함께 새마을연수원에 입소했다. 연수원에서 교육받는 동안은 술, 담배를 끊어야 했기에 고영남과 임권택 감독은 금단현상 때문에 퇴소한다. 새마을연수원의 교육내용에 감동받은 임원식 감독은 정부에서 영화계에 의뢰한 새마을영화의 연출자로 선택된다. 이때 받은 교육을 바탕으로 상이군인에게 시집온 여성이 아이를 키우며 자주적으로 마을을 재건한다는 내용의 영화 <어머니>(1976)를 감독협회 기획, 합동영화 제작으로 연출하게 된다. (사진38) 새마을영화 <어머니>(1976)의 한 장면이다. 상이군인(이순재)에게 시집 온 여성(윤연경)이 아이를 키우며 자주적으로 마을을 재건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관객수 10만이 넘으면 홈런이라고 여기던 시절 16만이 넘는 관객이 들어 흥행에도 성공하고 15회 대종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포함해 3개 부문의 상을 수상한다. 그 후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를 합동영화사에서 연출한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다룬 종교영화로 이 작품은 문화공보부의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합동영화사는 외화수입쿼터를 받는다. 그러나 개봉 당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상영중지가 내려진다. 상영중지에 항의하는 임원식 감독은 남산 정보부에 갇히는 고초를 겪었지만,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유신시대에 탄압받고 있던 종교지도자를 떠올려 민심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중앙정보부의 설득에 그는 결국 상영중지를 받아들인다. (사진39) 주기철 목사의 순교를 다룬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의 촬영 현장이다. 977년 상영중지를 당했으나 1981년 재개봉되어 그해 한국영화 관객동원 3위를 기록한 작품이다. 1981년 이 작품의 해금이 풀려 재개봉되자 20만 1천명의 관객이 들어 그해 한국영화 관객동원 3위를 차지한다. 그 덕에 1982년에 그는 영화인협회에서 흥행영화 감독들에게 주는 할리우드 연수여행 포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77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개봉이 중지되고 고초를 겪다보니 그의 작품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합동영화사에 들어가 전무이사 겸 기획실장으로 5편의 작품을 기획했고, 2년 뒤에는 화풍흥업의 기획실장으로 4편의 작품을 기획하며 영화계활동을 이어갔다. 1980년에는 김태수 대표의 제안으로 태창흥업의 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외화는 김태수 대표가 맡고 한국영화는 임원식 감독이 책임지는 구조였다. 중견영화사인 태창흥업의 사장으로 처음 제작한 영화는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조용필을 주인공으로 한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0)이다. (사진40) 임원식 감독이 태창흥업 사장으로 취임한 뒤 처음으로 제작한 작품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0)의 포스터이다. 일류 배우의 개런티가 2백만 원이던 시절 그는 조용필에게 5백만 원의 출연료와 추가로 2백만 원의 작곡료를 주고 캐스팅해 화제가 되었다. 그는 과도한 개런티로 영화인들의 빈축을 사 영화인협회에서 제명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작 전에 이미 제작비의 두 배가 넘는 지방 투자자들의 투자금이 몰려들었고 완성 후 흥행에도 성공해 큰 수익을 가져다 준 작품이다. 두 번째 제작 작품은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이다. 첫 제작 작품의 상업적 성공 이후 인권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그는 『기름밥』이라는 논픽션 단편에서 영감을 받아 버스안내양의 실상에 대한 각본을 작가 김승옥에게 맡긴다. 무사히 잘 완성되고 문공부 우수영화로 선정되었으나 이 작품은 개봉 후 위기를 맞게 된다. (사진41) 임원식 감독이 태창흥업에서 두 번째로 제작한 작품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의 한 장면이다. 자동차노조와 한국노총의 상영중지 요청이 제기된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삥땅검사, 알몸수색, 운전기사와 안내양의 부적절한 관계, 노조를 어용화해 묘사한 점 등이 운수노동자들의 인격을 모독했다는 이유였다. 결국 이 작품은 상영 7일 만에 자진해서 간판을 내리게 된다. 영화계에는 이 사건에 대해 노동부와 문공부가 노동자들의 상영중지 여론을 종용했다는 의혹이 떠돌았고 영화인들은 소재선택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4군데 장면을 자르고 1군데 장면을 재촬영해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을 다시 받은 후 1982년 6월에 재개봉을 했지만 흥행은 요원했다. 결국 임원식 감독은 지방 흥행사들의 이어진 손해배상 소송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고 재기불능 상태로 제주도로 낙향하게 된다. 제주도에서 영화계와는 거리를 두고 지내던 중, 그는 교계에서 만든 종교영화제작소로부터 선교영화 연출을 제안 받는다. 그가 연출한 선교영화는 곧 교인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게 되고 그 즈음 비디오문화가 확산되어 그가 제작한 종교영화 비디오테이프 판매 또한 급증했다. 1990년대 중반 케이블텔레비전이 등장하던 때에는, 기독교방송국의 초대 전무이사 겸 방송본부장을 역임하게 된다. 그리고 방송국을 퇴직하고 난 뒤 1999년부터 8년 동안 20대, 21대 영화감독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춘사영화제를 재개하고 스크린쿼터 투쟁을 벌이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고 이러한 활동을 인정받아 2001년에는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사진42) 1999년부터 8년간 한국영화감독협회 제20, 21대 회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의 임원식 감독 모습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제주도에서 지내며 제주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을 지냈고 제주 4.3항쟁에 관한 현기영의 소설을 영화화 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임원식 감독의 구술은 어린시절 고향인 사리원의 풍경, 청소년기 월남민으로 한국사회에 적응해갔던 경험, 한국전쟁기 국민방위군으로 종군한 경험, 학창시절 학도호국단 활동 등 한국현대사의 다양한 면을 살필 수 있는 경험들로 가득하다. 또한 영화계에 입문한 뒤에는 거대 영화 기업 신필름의 체계와 쇠락, 한홍합작영화 경험, 유신시기 영화검열의 폐해 등에 관해 의미 있는 증언이 확인할 수 있다.
구봉서는 1945년 악극단의 악사이자 배우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반세기가 넘는 긴 시간 동안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에서 활약하면서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삶 자체가 한국 코미디의 역사였던 우리 시대 최고의 코미디언이다. 구봉서는 1945년 태평양악극단에서 데뷔하는데, 임시 악사였던 구봉서는 김대봉의 대역으로 코미디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훤칠한 외모와 능청스러운 말솜씨로 코미디와 쇼 무대에서 사랑을 받았던 구봉서는 악극단에서 눈에 띄는 스타로 성장하게 된다. 전쟁기 구봉서는 종군연예인으로 약 5년간 활동했으며 같은 시기 라디오 방송에도 진출하여 홀쭉이 양석천과 함께 <홀쭉이와 길쭉이> 등의 프로그램과 대북방송을 진행했다. 1956년 문화성 감독의 <애정파도>로 영화계에 데뷔할 때, 구봉서는 이미 포스터 한쪽에 코믹한 장면을 연기하는 모습이 들어갈 정도로 잘 알려진 스타였다. (사진2) <애정파도>(문하성, 1956) 포스터. 오른쪽 아래 코믹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구봉서와 박옥초 구봉서를 명실상부한 코미디 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권영순 감독의 <오부자>(1958)였다. 이 영화에서 그는 이종철과 복혜숙 부부의 아들 넷(양훈, 양석천, 김희갑, 구봉서) 중 막내로 출연, 연애담을 중심으로 하는 노래와 코미디를 선보였다. (사진3) <오부자>(권영순, 1958) 포스터. 왼쪽부터 구봉서, 양석천, 이종철, 양훈, 김희갑. 아버지 이종철과 네 형제 영웅호걸의 이야기 중 구봉서는 ‘막둥이’ ‘걸’ 역할을 맡았다. 포스터 상단에 '뮈직칼 코메듸' 라는 장르명칭이 부각되어 있다. 이 영화는 당시 개봉관인 국도극장의 입장수익만으로도 제작비를 다 충당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이 영화의 성공은 코미디영화 제작의 활성화라는 산업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구봉서는 이 영화를 통해 '막둥이'라는, 평생을 따라다닌 애칭을 얻게 되었다. (사진 4) <오부자>(권영순, 1958)의 한 장면. 상사병으로 앓아누운 호(김희갑)를 진찰하러 온 의사와 그를 둘러싼 가족들. 왼쪽부터 어머니 역할의 복혜숙, 걸(구봉서), 웅(양석천), 아버지(이종철), 영(양훈) (사진 5) <오부자>(권영순, 1958)의 한 장면. 구봉서와 상대역 최지희 이후, 1970년대까지 다수의 영화에서 주조연으로 출연하면서 대표적인 코미디 배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구봉서는 1970년대 초반까지 약 4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이어지는 코미디영화 열풍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백만장자가 되면>(정일택, 1959), <구봉서의 벼락부자>(김수용, 1961),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박종호, 1964), <단벌신사>(김기풍, 1968), <남자식모>(심우섭, 1968), <남자 미용사>(심우섭, 1968)와 같은 원톱 영화들에서 뿐 아니라 (사진 6) (사진 7) <단벌신사>(김기풍, 1968) 포스터(위)와 <단벌신사>(김기풍, 1968)의 한 장면(아래). 복권이 든 양복을 찾아 좌충우돌하던 구봉서와 서영춘이 우연히 쇼단체의 무대 위에 서게 되었다.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성춘향>(신상옥, 1961), <맹진사댁 경사>(이용민, 1962), <또순이>(박상호, 1963),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1963)과 같은 영화에서도 비중 있는 조연으로 확실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였다. (사진 8) <성춘향>(신상옥, 1961)의 한 장면. 춘향을 잡으러 가는 포졸 역할의 김희갑(좌)과 구봉서 (사진 9)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1963)의 한 장면. 부대의 막걸리 회식 장면에서 좌중을 즐겁게 하는 구일병 역할의 구봉서 그런가하면, <수학여행>(유현목, 1969)처럼 코미디가 아닌 영화의 주연으로서도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사진 10) <수학여행>(유현목, 1969) 포스터. 구봉서와 문희. 구봉서는 낙도의 어린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수학여행을 간 선생님의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는 제4회 테헤란국제아동영화제 그랑프리 및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양석천과 양훈이 1950년대 후반 가장 먼저 영화계를 석권했던 코미디 배우였다면, 구봉서는 가장 긴 시간, 가장 많은 코미디영화에서 주연을 도맡았던 경우라 할 수 있다. 양석천과 양훈이 1950년대 이후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나 김희갑이 더 많은 영화에 출연했으나 단독 주연을 맡았던 작품보다는 공동 주연이거나 비중 있는 주연급 조연을 맡은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과 비교해 볼 때, 구봉서는 비슷한 시기에 영화로 옮겨왔던 악극단 스타들 중에서도 10년 넘게 주연 배우로 활약한 드문 경우였다. 1950년대 후반은 구봉서가 악극단에서 영화계로 활동 범위를 넓혀가던 시기로, 이 시기에 제작된 코미디 영화에서 구봉서는 단독 주연보다, 공동주연 혹은 비중 있는 조연의 역할을 맡으면서 내러티브의 중심인물을 보조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실제로 구봉서 코미디의 특성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은 1960년대 후반 코미디라고 볼 수 있다. 1950년대로 유효시기가 다한 양석천, 양훈의 코미디와 달리 1960년대까지, 그리고 영화를 넘어 텔레비전으로 영향력을 확대했던 1970년대와 80년대까지 구봉서의 코미디는 일정한 경향을 띠고 지속되었다. 이 글은 구봉서 코미디의 '일정한 경향'을 하나의 “'장르'로서의 구봉서 코미디”가 갖는 특성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이는 첫째, 내러티브적으로는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과제를 해결하는 구성을 띤다는 점, 둘째, 내용적으로는 ‘명랑’하고 ‘건전’한 중산층의 윤리를 대변한다는 점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과제 먼저, 1950년대 후반 출연작들에서 구봉서가 맡은 역할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첫째, <오부자>(권영순, 1958)나 <오형제>(김화랑, 1960), <구혼결사대>(김수용, 1959) 등 다중주연 영화에서 공동주연을 맡아 좌충우돌하다가 제 각기 연애에 성공하는 '막둥이' 캐릭터. 이때, 연애서사는 공동주연을 맡은 인물들 각자에게 가장 중요한, 그리고 유일한 내러티브가 된다. 영화의 엔딩은 합동결혼식이나 그에 준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둘째, <삼인의 신부>(김수용, 1959), <청춘배달>(김수용, 1959), <부전자전>(강대진, 1959), <복도 많지 뭐유>(백호빈, 1959) 등도 다중주연 영화에 속하지만, 주인공들은 시골에서 상경하여(혹은 실직 상태에서) 사랑과 취업 두 가지를 모두 추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여기서는 연애서사와 취업을 위한 노력 두 가지가 주요 내러티브 사건이 되며, 첫 번째 경우와 마찬가지로 합동결혼이나 그에 준하는 장면이 엔딩으로 제시된다. 마지막으로 <공처가>(김수용, 1958)에서의 곰탕집 사위이자 아내에게 꼼짝 못하는 캐릭터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생활인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이 유형에서 구봉서는 주연보다 조연에 가까운 역할을 맡았으며, 1950년대 코미디보다는 타 장르의 영화나 1960년대 이후의 코미디에서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이라 하겠다. (사진 11) <복도 많지 뭐유>(백호빈, 1959) 포스터. 좌측부터 김희갑, 주선태, 구봉서 이상의 분류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즉 구봉서가 주연배우로 등장하는 코미디영화로 대상을 한정해서 구봉서 코미디의 특징을 살펴보자. 양석천, 양훈 코미디가 뒤죽박죽 얽히고설킨 내러티브 속에서 그 혼돈과 해결 불가능성을 즐기는 것이라고 할 때, 구봉서가 등장하는 코미디들은 연애 혹은 연애와 취업이 주 해결과제로 주어지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그것(들)에 성공하는 내러티브 구성을 보여준다. 준수한 외모 덕에 구봉서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영화는 로맨틱한 요소들을 띠는 연애서사가 전면에 배치되었고, "건전하고 명랑한 소시민"이라는 페르소나에 힘입어 그의 캐릭터들은 '취업'과 '결혼'을 통해 주류 사회로 진입하는 지상과제에 집중했던 것이다. 보다 강렬하고 스펙터클한 코미디를 보여주던 양석천과 양훈이 빠른 속도로 소비되어 가는 동안, 1950년대 출연작들에서 구봉서는 거의 3인~5인의 주인공 중 한 사람 몫을 담당하는 정도에 머무르면서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늘렸다. 이 시기부터 비교적 일관성을 가지고 다루었던 연애와 취업이라는 두 가지 모티프와 그것을 이루어가는 내러티브 구성은 196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구봉서 코미디 내러티브의 핵심적인 구성요소가 되었다. 1960년대 초반, 양석천이 실연무대에 전력을 다하고 양훈이 사업 실패와 이혼 등의 개인적인 문제들로 영화출연이 뜸해진 동안, 구봉서와 김희갑은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코미디 배우로 입지를 굳혔다. 특히 구봉서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더욱 친숙한 대중스타가 되었는데, 그가 매일 아침 8시 고정으로 진행하던 동아방송의 라디오 프로그램 <안녕하십니까>는 '건전한 소시민'의 시각에서 사회를 풍자하는 것이었다. 영화 외의 대중매체들- 라디오와 텔레비전, 신문 등-을 통해 굳혀지고 다시 영화와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강화되었던 구봉서의 '건전하고 상식적인 생활인'으로서의 스타 페르소나는 구봉서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일조했으며, 1960년대 초반에는 "한국에서 가장 바쁜 사나이"(《동아일보》, 1963. 10. 15.)라는 타이틀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구봉서의 벼락부자>(김수용, 1961), <구봉서의 인생출발>, <이거 됩니까 이거 안 됩니다>(박종호, 1964)와 같이 아예 구봉서의 스타성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을 비롯하여, <사장 딸은 올드미쓰>(김응천, 1963), <남자는 안 팔려>(임권택, 1963), <죽자니 청춘 살자니 고생>(권철휘, 1964) 등 흥행작의 성공을 이끌면서 구봉서는 1960년대 전반기 동안 단독 주연이 가능한 코미디 배우로서 가능성을 입증하게 하게 되었다. (사진12) <사장 딸은 올드미쓰>(김응천, 1963) 포스터. 구봉서와 상대역 방성자가 가장 크게 자리하고, 왼쪽은 곽규석과 남미리, 아래 좌측부터 양훈과 황정순, 주선태과 백금녀, 독고성과 주란지 (사진 13) <남자는 안 팔려>(임권택, 1963) 신문광고. 여장을 한 구봉서(우)와 이대엽(좌)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이강원, 1963)처럼 스릴러코미디를 표방한 영화, <구봉서의 벼락부자>나 <이거 됩니까 이거 안 됩니다>처럼 사회풍자의 성격이 가미된 영화 등 1960년대 초반에는 코미디형식의 다양한 변화를 꾀한 작품들도 시도되었다. (사진 14) <구봉서의 벼락부자>(김수용, 1961) 샐러리맨 구봉서와 직장 상사 양훈(우). 구봉서의 두 번째 주연작으로 구봉서는 이 영화에서 한국전쟁 때 목숨을 구해줬던 미국인의 유산을 받아 벼락부자가 된 샐러리맨으로 출연했다. (사진 15)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박종호, 1964)의 신문광고. 구봉서가 진행했던 라디오프로그램의 유행어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를 제명으로 한 풍자 영화 그러나 무엇보다 구봉서가 코미디영화의 전성기를 이끌기 시작했던 것은 심우섭 감독과 만나 본격적인 '구봉서식 코미디'를 꽃피우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남자 시리즈와 팔푼이 시리즈 등 인기 출연작들에서 구봉서는 1950년대 코미디에서 본인이 가지고 있던 캐릭터와 서사를 유지한다. 즉, 이 영화 속에서 구봉서는 여전히 시골에서 갓 상경하거나 실직을 함으로써 직업을 구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으며, 그 과정에서 진정한 사랑을 만나게 되는 내러티브 사건을 겪는다. 그리고 여러 가지 소동에 휘말리거나 스스로 소동을 벌이면서, 그 속에서 홀로 중심을 잡고 여타 등장인물들에게 훈계를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예컨대, <남자와 기생>(심우섭, 1969)에서 그(태호)는 여성스러운 성격 탓에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여동생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기생 산월이로 변장하는데, 산월이는 요릿집에서 만난 기생 정미를 보호하며 자신에게 반한 옛 상사 허사장을 골탕 먹인다. 태호는 정미에게는 '희망을 가지고 살 것'과 허사장에게는 '가정에 충실할 것', 허사장의 부인에게는 '남편에게 서비스를 잘 해서 기생집에 가지 않도록 할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정미와 로맨스를 이루면서 자신의 남성성을 회복한다. (사진 16) <남자 식모>(심우섭, 1968) 포스터. 구봉서의 ‘남자 시리즈’ 중 첫 번째 영화. 이 영화의 성공으로 남자 시리즈가 연달아 두 편 더 제작되었다. (사진17) <남자와 기생>(심우섭, 1969)포스터. 원제는 <남자기생>이었으나 경박하다는 검열관의 지적에 의해 ‘남자와 기생’으로 제명이 변경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필름에는 변경된 제명이 반영되어 있으나 포스터는 원제 그대로 남아있다. (사진 18) <남자 미용사>(심우섭, 1968) 신문광고. ‘블란서’ 유학을 마친 유명 미용사 ‘앙드레’로 변장한 구봉서가 주연을 맡았다. 실직 이후 "장난"으로 시작했던 기생 일을 하며 허사장을 비롯한 남성들의 허위의식과 바람기를 꼬집고,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자신의 남성성을 회복하게 된 태호는 로맨스의 완성과 취업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게 된다. 엔딩 신에서 태호의 여동생 태숙은 허사장의 아들과 결혼을 하게 되고, 태호는 허사장의 회사에 과장으로 진급하여 재취업하게 되며 정미와의 사랑도 이루게 된 것이다. 한편, <팔푼이 사위>(심우섭, 1968)에서 구봉서(구만복)는 시골에서 올라와 직장을 구하던 중, 부잣집 사위로 '취직'하게 된다. 연애결혼을 했으나 '잘난' 첫째 사위의 외도로 부부간 불화가 잦을 날 없던 첫째 딸 내외 때문에 다소 바보스럽더라도 진실한 사위를 구하겠다고 결심한 장인 덕에, 구만복은 부잣집 둘째 딸과 결혼하게 된다. 서울의 근대적이고 서구화된 생활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그가 벌이는 소동을 코믹하게 그려내던 영화는, 오히려 그가 기지를 발휘하여 난봉꾼-악처인 큰 딸 내외를 '고치고', 마지막으로 허영심 많고 남편을 깔보던 둘째 딸의 '버릇을 고침'으로써,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진 19) <팔푼이 사위>(심우섭, 1968)의 한 장면. 우연히 부잣집 사위로 ‘취직’하게 된 구봉서의 ‘팔푼이’ 웃음 이렇게 볼 때, 1960년대 후반 구봉서의 코미디영화들은 1950년대 구봉서 주연 코미디 서사의 확대,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다. 즉, 1950년대 후반에 30대 초중반의 나이였던 구봉서는 근대화의 물결과 이촌향도 현상으로 서울에 떠밀려 와 하숙집을 전전하며 직업을 구해야 하거나(<삼인의 형제>, <청춘배달>), 혹은 이미 직업이 있더라도 황당무계한 직장(<오형제>에서 잠자리 날개 기름과 달팽이 이빨 가루로 만든 미래 우주식품을 연구하는 무역상사)을 가진 주인공이었다. 이 영화들 속에서 구봉서(와 친구/형제들)는 꿈에도 그리던 여성을 만나거나(<구혼결사대>), 이미 있었던 애인과 결혼에 성공하거나(<오형제>), 새로운 애인을 만드는(<삼인의 신부>, <청춘배달>, <부전자전>) 등 '연애와 결혼'의 서사 중심에 놓인다. 연애와 결혼을 통해 그(들)은 부모님의 소원을 이뤄드리기도 하고(<삼인의 신부>, <오형제>), 진실한 사랑을 깨닫고 새 출발을 다짐(<청춘배달>, <부전자전>, <구혼결사대>)하기도 하면서, 합동결혼식 혹은 결혼약속을 통해 중산층-가부장제 사회로 진입하게 됨을 시사한다. (사진 20) <부전자전>(강대진, 1959) 포스터. 아버지 역의 김희갑과 구봉서(위), 걸인 친구 역할의 양석천과 양훈(아래) 10년의 시차를 두고 제작된 1960년대 후반, 이제는 40대 초중반이 된 구봉서의 코미디영화들은 여전히 도시로 밀려왔거나 실직을 당함으로써, 다시 구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번에는 여동생의 뒷바라지(<남자기생>), 남동생의 실험비용 마련(<남자식모>), 고향 개간(<남자 미용사>) 등 가족을 위해서 취직을 해야 하는 좀 더 절체절명의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이들은 변장을 하거나(남자 시리즈) 결혼을 함(<팔푼이 사위>, <팔푼이 부부>)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시 진실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능력과 남성성을 발전시켜 "번듯한" 직장을 구하게 됨으로써 중산층-가부장제 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한다. 1950년대 코미디 속 구봉서가 시골에서 올라온 주인공(혹은 '덜' 근대화된 인물)을 맡아 구직과 연애 활동을 통해 근대 사회와 가부장제에 다가간다면, 1960년대 후반 코미디에서 구봉서는 이미 시작부터 가부장이었으며, 여러 가지 위기 속에서 가부장으로서의 면모를 더욱 굳건히 하게 되면서 위기에 놓인 이들을 통합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는 점에서 주제의식이 강화된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21) <팔푼이 부부>(심우섭, 1969)의 한 장면. 방성자와 구봉서. <팔푼이 사위>의 성공에 힘입어 제작되었던 ‘팔푼이 시리즈’ 중 한 편인 ‘팔푼이 부부’ 따라서 구봉서 코미디의 가장 큰 특징은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과제를 수행하고, 성공하는 주인공을 보여줌으로써 '질서'를 잡고 '통합'하는 내러티브를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구봉서의 페르소나와 외형적 특징(준수한 외모, 정확한 표준어를 구사하는 저급하지 않은 화법, 그와 어울리지 않는 가느다란 목소리 등)은 이러한 내러티브에 적합한 캐릭터를 구현하였으며, 이는 영화 외의 매체를 통해 구성된 구봉서의 스타성과 상호작용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건전한 중산층의 "명랑한 윤리" 1962년 10월 9일 《경향신문》에 '공처가 클럽'이 '홈 서비스 데이'를 맞이하여 야유회에 나섰다는 기사가 실렸다. "우리 집은 걱정 없어요"라고 말하는 영화인 가정의 대표로, 공처가 클럽의 회원인 황해, 구봉서, 곽규석, 신영균이 부인, 자녀와 함께 동반 나들이한 것을 기사화한 것이다. "가정에서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출연한 코메디를 못 보게 하는 엄한 아버지"이자 "아내에게는 자상한" 구봉서의 면면은 "건전하고 명랑한 가정생활"을 하는 평범한 가장의 이미지로 신문지상에 종종 소개되곤 했다. 당시 인기 배우들의 스캔들이 신문에 적나라하게 소개되고 이에 대한 각 사회 인사들과 신문독자, 관객들의 논평이 이어지는 가운데, 구봉서를 '명랑가정'을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스타로 거론한 이 기사는 "명랑하고 건전한 소시민"이라는 그의 스타 페르소나에 잘 들어맞는 기획이었다. 이런 페르소나에 알맞게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내는 결말로 수렴되어 가는 구봉서 코미디는 '질서'와 '통합'을 이뤄낸다. 구봉서의 캐릭터들은 전도된 남녀관계를 회복하고, 파탄에 이른 가족관계를 복구하며, 허영심에 들뜬 여성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1950년대 코미디에서 이러한 경향이 암시적으로 드러나거나 내재해 있었다면, 1960년대 코미디에서는 훨씬 노골적인 대사들로 전달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구봉서 코미디가 추구하는 건전한 중산층의 "명랑한 윤리"라는 주제를 설파한다는 점에서는 일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진 22)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의 한 장면. 유학파 미용사 ‘앙드레’로 변장한 구봉서와 사장 최지희 (사진23)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의 한 장면. ‘블란서’식 계란 마사지를 시술하는 구봉서 (사진 24)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의 한 장면. ‘최신 유행하는 머리 스타일’을 만들고 있는 구봉서 이러한 내러티브와 주제 위에서 구봉서의 캐릭터는 무능력한 사회부적응자의 모습에서 과장된 남성의 능력과 우월함을 전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우스꽝스러움을 극복하고 지배력을 회복하여 용기 있는 자아상을 구성하게 된다(Henry Jenkins, 구봉서 코미디의 장점은 무능력함을 드러내는 코믹한 장면들과 '취업'과 '연애'에서의 성공을 이끌어내는 이상적 자아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탁월함에 있다. 예를 들어 <남자와 기생>에서 구봉서(태호)는 지나친 여성성이 문제가 되어 직장에서 쫓겨나게 된다. 근무 시간에 용돈 벌이로 바느질이나 빨래를 대신 해 주다가 허사장에게 발각되어 실직을 하게 된 그는 우연히 여장을 하게 되고 기생으로 오해를 받게 된다. 그런데 오히려 기생 산월 노릇을 하면서 태호는 뭇 남성들을 훈계하고 남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되는 과정을 겪는다. #73 그 일실(밤) 많은 손님들이 교자상 앞에 길에 앉아 저마다 기생들을 끌어 안은 채 술을 마신다. (중략) 태호 가야금을 엉터리로 켜며 목청을 돋군다. 태호: 에헤야 에헤야 디야 어허랑 어허랑.. 모두들 내 노래가락 귀담아 들어라. 이 노래가락은 요즘 새로 유행되는 금주의 인기 베스트 원이다. 어허랑 어허랑 네놈들 돈 많다고 자랑하러 여기 왔다. 집에 가면 쌀도 없고 연탄도 없는 것들이 이런 곳에 와서는 돈을 물쓰듯 쓰는구나. 어허랑 어허랑 이 녀석들아. 냉수먹고 속 차려라. 여기서 쓸 돈이 있으면 자식 새끼들 운동화나 사 주고 고생하는 만누라의 속옷이나 사 입혀라. 어허랑 어허랑 급기야 춤을 춘다 태호: 한심하다 한심해. 네 놈들 때문에 우리들이 밥을 먹고 살지만 그러나 너희들은 정신을 차려 국가를 위해 무언가 일을 할 생각이나 해라. 어허랑 어허랑. 이처럼 '건전하고 상식적'이면서 '명랑한' 페르소나를 갖는 구봉서라는 스타 코미디언은 코믹한 무능력함을 전시하는 영화 초반부에서 이상적 자아로 향하는 후반부로 가면서 항상 성공적으로 그 경계를 넘어섬으로써, 관객들의 응원 속에서 근대적 중산층 가부장제 사회의 주류로 편입하게 된다. 구봉서가 그려낸 세계는, '상식'과 '능력', 그리고 '건전한 정신'으로 신분의 사다리를 '수직상승'할 수 있는 이상화된 세계였던 셈이다. 1962년 영화법 개정과 코미디영화에 대한 검열 및 제반 장르영화의 정착, 196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홈드라마의 영향, 그리고 '아버지의 법'을 등에 업은 채 진행되었던 사회적 억압의 기제는 대중영화의 주제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쳐, 196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반대급부로서의 '이상화된 세계'에 대한 열망은 커져갔다. 변장이나 가장을 통해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생존해 내고자 했던 구봉서의 캐릭터들은, 그들의 '가부장'성과 그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정상적'인 방식인 취업과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게 된다. 묘령의 여인이나 회사의 직원, 하숙집 딸과 같은 중산층 서민과 연애를 했던 1950년대의 구봉서는 1960년대에는 회사 사장의 딸과 연애를 하거나 사장의 사돈이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중산층'의 윤리를 획득하게 된다. '정상성'과 '비정상성'이 구분되고 연애하는 상대의 사회적 계층을 인식하게 되며 '통합'이라는 주제가 강화되는 1960년대 코미디 속 구봉서는 1950년대 코미디 속 구봉서와 같은 내러티브 목표를 추구하지만, 좀 더 속악해지고, 좀 더 ‘질서 잡힌’, 억압적 세계 속의 '구봉서'가 된 것이다. 1960년대 후반, 구봉서코미디를 비롯한 코미디영화가 다수 제작되었던 시기는 어쩌면 스크린코미디 전성기를 마감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영화 검열이 한층 강화되던 흐름과 맞물려, 1969년에는 MBC TV 방송국이 개국했고,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이 활성화되면서 텔레비전은 급격히 영화의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사진 25) <당나귀무법자>(안일남, 1970) 포스터. <셰인>을 비롯한 서부영화를 패러디한 영화 (사진 26) <삼인의 검은 표범>(김응천, 1971) 포스터. 세 시기의 영웅들을 다룬 옴니버스 영화. 서영춘, 허장강, 구봉서가 각각 주연을 맡았다. (사진 27) <타잔 한국에 오다>(김화랑, 1971) 포스터. 악극단 레퍼토리 중 하나였던 ‘타잔’ 패러디극을 악극단 작가이자 연출자였던 김화랑 감독이 영화화했다. MBC 방송국의 개국 프로그램이었던 <웃으면 복이 와요>를 시작으로, 스크린의 코미디 스타들은 방송국으로 주요 활동무대를 옮겼다. 구봉서는 서영춘, 배삼룡, 곽규석 등 걸출한 코미디언들과 함께 각 방송사들의 개국 프로그램을 섭렵하면서 코미디 연기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이들은 스크린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것처럼 TV코미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70년대 초까지 구봉서는 다양한 하위 장르의 코미디영화에 출연하며, 스크린과 브라운관의 코미디를 연결시켰다. 구봉서는 영화뿐 아니라 대중문화계전반에 걸쳐 코미디 장르의 형성과 전성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며 우리 시대의 웃음을 주조했다. (사진 28) <막동이 신혼 10개월>(심우섭, 1969)의 한 장면
최근 <슈퍼맨이 돌아왔다>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준우, 준서의 외할아버지이자 배우 장현성 의 장인으로 언급되는 배우가 있다. 많은 대중에게 코믹한 이미지로 기억되는 배우 양택조 가 바로 그다. 2012년 진행된 구술을 통해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한국 연극영화계의 모습이었고, 예술을 사랑하는 ‘슈퍼맨’들의 치열한 창조 과정이었다. 배우 양택조 는 1939년 연극배우이자 극작가, 연출가이던 아버지 양백명 과 당대 최고의 연극배우이던 어머니 문정복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님께서 전국은 물론 만주와 상하이로까지 공연을 다닌 탓에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한 시간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대신 사랑으로 품어주시던 할머니와 집에 쌓여 있던 클래식 명반, 수많은 책, 주로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 아버지의 대본들이 그를 감수성 짙은 소년으로 키웠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대구로 피난 갔던 양택조 선생의 가족들은 대구극장 사장의 배려로 극장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이미 대기실은 단성사 사장 가족들, 박구 감독과 반도가극단, 코미디언 이종철 과 동료들, 김차봉 대표와 청춘극장 식구들 등 먼저 내려온 사람들의 차지였고, 양택조 선생 가족들은 대구극장의 큰 무대 구석에 세트처럼 방을 들여 그곳에서 지냈다. 양택조 선생은 당시 보았던 신파조의 악극은 물론 <싱고아라> <라 쿰파르타> 등 프랑스와 아르헨티나를 배경으로 한 작품, 플라멩코 같은 스페인 춤에 이르기까지 당시 공연의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에 대해 장면을 재현하며 설명해주었다. 또한 아버지가 대본을 쓰고 연출한 <환도성의 봄> <그리운 황성> 같은 작품의 내용과 공연 모습, 아버지 스스로 맡은 배역을 위해 생니를 뽑고, 절름발이 역할을 하기 위해 세 시간이 넘는 공연 시간 동안 다리를 뒤로 접어 꽁꽁 묶어두었던 열정 등을 이야기하며 당시 무대 배우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해주었다. 그리고 무대의 수준이 떨어지면 공연 중에도 가차 없이 독설을 날리던 관객들의 행태까지 묘사하며 당시의 공연 문화에 대한 다층적인 연구가 더 깊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뜻도 밝혔다. 양택조 선생이 예술계로 본격 진출한 것은 이 직업에 대한 동경이나 꿈 때문이 아니라 집안 사정 때문이었다. 한양공대에 재학 중 군대를 제대하고, 유학을 준비하던 중 아버지가 병에 걸리고 가세가 기울면서 생활 전선에 나서야 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당장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은 어릴 적부터 보아오던 연극이었다. 드라마센터에 입학해 6개월 만에 안톤 체호프의 <청혼>이라는 작품을 통해 관객과 만나게 되었고, 그때 느낀 배우로서의 희열이 배우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 연극은 영화에 밀려나고 있었고, 이모이던 배우 문정숙 의 도움으로 이만희 감독의 조연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964년부터 이만희 감독의 조연출로 활동하며 연출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웠지만, 당시 연출부의 삶은 생계를 해결해주지 못했고, 아직 제대로 펼치지 못한 배우로서의 꿈도 양택조 선생을 조연출로만 묶어놓지 못했다. 성우가 된 배우, 다시 스크린으로 1960~70년 한국영화계는 후시녹음의 시대였다. 당장 배우가 되는 대신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성우였다. 1966년 TBC 4기 성우로 시작해 조연출 생활과 성우 생활을 병행하다가 1970년 조연출 생활을 그만두고 성우의 길로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한국영화와 외국영화를 막론하고 1000여 편의 작품 녹음에 참여했다. 특히 중국 무협영화가 유행하던 당시 진성, 라유 등의 목소리를 전담했으며, 한국배우 중에서는 독고성 의 목소리를 맡아서 했다. 또한 조연출 시절의 역량을 알아봐준 감독들 덕에 도급업을 시작해 역할에 맞는 목소리의 성우를 찾아 작품을 꾸리기도 했다. 1983년 임권택 감독의 작품 < 불의 딸 >에서 김희라 의 목소리를 연기했는데, 김희라가 그해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상을 받은 것은 감사한 일이었지만, 성우들의 노력은 어디에서도 보상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때마침 영화계에서 동시녹음이 본격적으로 도입돼 연기력이 뒷받침되는 배우들이 필요했고, 양택조 선생도 배우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초반에는 주로 악역을 맡았고, 텔레비전으로 진출해 MBC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이간질하는 중국 사신 심유경 역할을 맡아 얄미운 연기로 시청자의 미움을 받았다. 그러다가 < 투캅스 >( 강우석 , 1993)의 다혈질 경찰서장 역할로 이미지 변신을 하게 되고, 1997년 <그대 그리고 나>의 최불암 친구 역할로 코믹한 이미지의 친숙한 배우가 되었다. 배고픈 시절, 모든 것이 여의치 않던 시절 그의 배고픔을 잊게 해준 것은 작품에 대한 열정이었으며, 그를 채워준 것은 관객들과의 교감이었다. 배우 양택조는 조연출 시절 2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해 영화화하기도 했고, 아버지의 작품을 현대 감각에 맞게 수정 보완해 <안중근과 이등박문>(2005)이라는 제목으로 공연을 올리기도 하는 등 연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연극배우, 조연출, 시나리오 작가, 성우, 영화배우에 이르기까지 연극과 영화계를 종횡무진했던 ‘슈퍼맨’ 양택조 선생은 그 누구보다 연기에 대해 늘 고민하고, 자신만의 캐릭터를 창조하는 배우로서 살아가는 현재진행형 ‘배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