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인
- 감독
- 이경태
- 제작년도
- 1974
- 출연
- 고선애, 이예성, 손창민, 조덕성, 태윤, 김승남, 전혜경, 고은아, 최은희, 김진, 남궁원, 이순재, 염마리, 서미경, 이일웅, 허장강, 한은진, 서승현, 진봉진
이상한 영화다. 이완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 < 누에치던 방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상 수상)말이다. 영화를 처음 보고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과거와 현재가 병치돼 있는데다 현재의 시간대에 꿈이었을 장면이 불쑥 들어오기도 하고 또 갑작스럽게 ‘이벤트’에 가까운 장면의 난입도 있다. 영화는 이 당혹스러운 많은 것들을 제 안에 넣어두고는 관객에게 요리조리 퍼즐을 맞춰보라고 하는 듯했지만 정작 관객이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싶어 하는 지점들에선 일절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부정확한 것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길 영화는 정말로 바라는 것 같았다. 아직도 <누에치던 방>에 대해선 많은 것들이 의문인 채로 남아있다. 서사는 덜컹댔고 매끄럽지 않게 나아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두 번째로 다시 영화를 봤을 때 나는 그 덜컹대는 이야기의 마디마디에서 서로를 껴안아 주는 여자들이 보였다. 마음이 아팠다. 아픈 그녀들의 마음을 지켜보는 일로 이 덜컹댐을 견뎌보게 됐다. 영화의 과거와 현재는 이상한 방식으로 만난다. 그 기이한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두 여자가 있다. 현실 속 미희( 이상희 )와 현실 속 소녀( 김새벽 )다. 소녀는 지하철 승객들에게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자신에게 한마디를 부탁한다며 종이와 펜을 건넨다. 미희는 소녀를 보자마자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회피하고 싶은 뭔가가 있다는 듯 받아든 종이와 펜을 서둘러 자신의 가방에 넣고는 눈을 질끈 감는다. 왜 그랬을까. 잠실나루역에서 내리는 소녀를 따라 가보던 미희는 누군가의 집 앞에 홀리듯 이른다. 성숙(홍승이)의 집이다. “미안해. 그런데 우리 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였잖아.” 느닷없이 찾아온 낯선 여자 미희의 이 말에 성숙은 의아해하지만 피하지 않는다. 미희가 진짜 친구인 양 편히 대해준다. 하지만 다음 신에서 성숙은 자신의 동거인이자 미희가 말한 단짝 친구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익주(임형국)에게 말한다. “어떤 모르는 여자가 집에 찾아왔어.” 성숙은 어째서 완벽한 타인인 미희를 내치지 않고 집에 들였을까. 이어서 성숙은 익주에게 이름 하나를 말한다. 유영(김새벽)이었다. 고교 시절, 유영과 성숙( 이주영 )은 단짝이었다. 유영은 학교를 그만두고 싶고, “억압돼 있는 걸 표현” 하고 싶어서 글을 쓰며, 세상을 향해 투사처럼 달려들고도 싶다. 자신 앞을 가로막고 선 것들이 죄다 거추장스럽다. 하지만 그녀는 그 시절을 지나오지 못한 채 죽었다. 그러니 유영은 오직 과거의 시간에만 출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재의 성숙 앞에 나타난 미희는 유영일 수가 없는 일이다. 미희도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인 척) 사칭한 적 없다”고. 그렇다면 미희는 어쩌려고 처음 보는 성숙에게 그런 말을 한 걸까. 미희가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한때는 시집을 읽고 연극도 보러 다니던 미희였지만 지난 10여 년간 세상과 단절된 채 낙담할 일들만 겪어왔다. 영화에 등장하는 고교 시절의 미희에게서는 이미 신경질적이며 강박적인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때 미희 역시도 단짝 친구 근경(정원)과 단절을 경험했다. 아픈 미희가 성숙을 보자마자, 혹은 지하철에서 소녀를 보자마자 과거의 근경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또는 미희의 즉흥적인 속내를 내치치 않고 받아들인 성숙의 태도에 관해 말해 볼 수도 있겠다. 생판 모르는 미희가 불쑥 자신의 과거(더 정확히는 유사 과거)를 끄집어 들고 왔을 때 그 예상치 못한 침입/방문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성숙의 기질과 성정에 기댄 일일 수 있다. 그 짧은 순간, 성숙은 미희를 내치지 않고 품어버린다. 홍승이라는 배우가 그걸 가능하게 했다. 이어서 모든 걸 다 말하는 것과 모든 걸 다 말하지 않는 것 중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인가를 두고 미희와 성숙이 나누던 대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안 주려면.” 성숙의 이 말은 그대로 미희를 다독이는 말이 되었다가 미희를 향한 바람이 되기도 한다. 두 사람은 미희의 방에서 나란히 누워 성숙이 미희를 안아주고 미희가 아픈 성숙의 보호자로서 달려가고 있다. 연고 없던 두 사람 사이에는 신기하게도 미더운 연이 생겨나 있다. 시제의 오고감 속에서 관객을 당황스럽게 하는 또 하나는 유영과 소녀의 동일한 얼굴이다. 김새벽 배우가 1인 2역으로 등장한다. 영화 속 인물들의 삶과 관객의 머릿속에 유령처럼 따라붙던 유영이라는 과거의 인물이 현재 실존하는 인물로 출현할 때마다 보는 이는 긴장이 된다. 서로 다른 인물을 어떻게든 연결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미끄러지는 것 같아 애가 탄다. 성숙과 익주의 과거 속에 존재하는 유영보다도 현실 속 소녀의 존재가 더 미스터리하다.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유영을 대신해 현재에 진짜 살아있는 유영의 얼굴을 보는 일은 귀기가 느껴지는 서늘한 일이다. 이 소녀는 대체 무슨 말을 듣고 싶었을까. 영화의 후반, 소녀의 마지막 한마디 앞에서 느끼는 또 한 번의 당혹이란. 관객은 이 소녀를 어떤 존재로 봐야 할까. < 누에치던 방 >은 다 지나 가버린 과거를 끈덕지게 붙들고서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얘기다. 그들의 과거는 과거가 됐기에 낡고 쇠락했으며 쓸모 하나 없는 것으로서 고루하다고 말해진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게 다 낡아 버리고 빛이 바랬다 해도 중요한 건 중요한 것 그대로라고 말한다. 세련될 수 없는 일이다. 그 촌스러움이 아프다. 그런 아픔을 민감하게 감지하며 사는 이들을 용감하게 안아주려는 사람이 있다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다. 불현듯 꿈에서 미희가 소녀에게 건넸던 메모지의 말이 생각난다. ‘용기를 가지고 살자.’ 텅 빈 메모지를 돌려받았던 소녀에게 미희의 이 말은 전달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메모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희에게 수신됐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2018년 1월 개봉 예정이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에서 독립한지 올해로 10년째가 되어 간다. 그 기간 동안 총 3개의 집을 거쳐 갔다. 원룸이 한번, 오래된 연립이 한번, 그리고 조금 덜 오래된 연립이 지금의 집이다. 아무래도 내가 집의 유일한 거주자이다 보니, ‘집’이라는 것이 예전에 부모님과 함께 살던 때와는 조금 다른 개념처럼 느껴지곤 한다. 단순히, 피곤한 내 한 몸 고이 누일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동거인’과 같은 개념으로서 느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행이나 영화 촬영처럼 오랫동안 집을 비우거나 소홀히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마치 토라진 여자 친구마냥 차가운 기운만 내뿜는다. 왠지 휑하고 썰렁한 그런 기운 말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집에 머물며 정성어린 손길과 관심을 쏟아 주면 냉랭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토라진 마음을 돌리는 조금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다면 바로 가구 배치를 바꿔주는 일이다. 생활 패턴이나 계절 변화 등의 이유로 가끔씩 가구 배치를 바꿔주면 왠지 어린 자식 목욕탕에 데려가 목욕과 이발을 동시에 시키고 난 기분이 든다. 집 역시 나에게 목욕 후 요쿠르트를 먹는 것과 같은 상쾌한 기운으로 답례해준다. 내가 집에 대해 더 많이 신경 쓰고 보듬어줄수록, 그 에너지가 포근한 기운으로 반사되어 나오는 느낌이랄까. 실제로 내가 아는 한 작가님은 새 집에 이사를 오게 되면, 그 집 구석구석뿐만 아니라 집 앞의 풀과 나무와도 인사를 하고 하나하나 손으로 쓰다듬어준다고 말씀 하셨다. 그 스킨십이 공간과 사람 사이에 친화력을 만들어내고, 그 친화력에서 애정이 생겨나며, 그 애정은 좋은 기운의 형태로 다시 사람에게 돌아온다는 말씀이셨다. 그만큼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생명체와도 같은 존재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이런 긴 서론을 주저리주저리 쓴 이유가 있다. 바로 오는 5월, 독립영화의 ‘집’이 생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의 노력 끝에, 또 많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민간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가 광화문에 있는 ‘미로 스페이스’에서 개관을 하게 된 것이다. 너무 기쁜 일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라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집에 이사를 왔으니, 이제부터는 ‘인디스페이스’라고 하는 소중한 공간과 어떻게 친해질 수 있는지를 고민해 봐야할 것 같다. 인디스페이스가 ‘독립영화인들만의 집’으로서가 아니라 보다 많은 관객들을 함께 포용할 수 있는 조금 더 넓은 의미의 집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또한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는 딱딱한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관객과 함께 독립영화를 호흡할 수 있는 일종의 ‘동거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부산에 있는 독립예술 영화전용관인 ‘국도예술관’이 좋은 예인 것 같다. 작년 <혜화,동> 개봉 당시 몇 차례 방문했을 때, 가장 놀라웠던 것은 관객들이 극장의 주인처럼 느껴졌다는 점이었다. 관객이 GV의 사회를 보고, 관객이 주도하여 뒤풀이 자리를 만드는 등의 모습을 보며, 이 극장이 단순한 ‘공간’을 넘어 사람들과 함께 살아 숨 쉬는 느낌을 받았다. 주인과 객의 구분이 없고, 영화와 공간이 함께 어우러지는 느낌. 물론 이는 단시간 내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도예술관의 경우도 오랜 시간 온라인 까페를 통한 활발한 교류와 ‘올빼미 상영회’같은 이 극장만의 신선한 기획들이 쌓여져 만든 결과이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를 발굴하고, 새롭고 신선한 기획들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관객들을 내 식구로 만들고, 보다 많은 이들이 지속적인 관심을 쏟는 것. 이러한 것들이 바로 집을 만지고, 집 앞의 나무를 만지는 행위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작고 소중한 스킨십들이 쌓이고 쌓이면 새로 개관하게 될 ‘인디스페이스’라는 공간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물론 직접적인 의미의 ‘스킨십’도 잊지 말자. 5월! 새로 개관하게 될 인디스페이스에 가게 되면, 극장 건물과 나눔 자리 이름으로 새겨진 좌석과 스크린의 끄트머리들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첫 인사를 나누고, 우리의 애정과 기운을 듬뿍 불어넣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