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학
- 감독
- 이반 I. 트베르도프스키
- 제작년도
- 2016
- 출연
- 나탈리아 파브렌코바, 마샤 토카레바, 드미트리 그로셰프
혼자 살던 집에 두 식구가 새로 들어온 게 벌써 재작년 일이다. 남자친구가 무턱대고 주워온 고양이 두 녀석. 남자아이는 콩이, 여자아이는 뚱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삼십대 중반을 넘기도록 집에서 동물 한번 키워본 적이 없고 고양이의 ‘고’자도 모르고 오히려 고양이에 대한 막연한 편견만 가지고 있던 나는 졸지에 두 아이의 엄마, 그것도 초보엄마가 되어 좌충우돌을 겪었다. 더욱이 아이들이 길에서 한 달을 살았던 만큼 건강상태나 발육이 그리 좋지 않았고, 특히 콩이는 ‘너무 못 먹어서’ 앙상한 몸에 회충과 설사로 고생하며 위험한 시기도 겪었다. 그리고 벌써 2년. 이제 다음 주에 2살이 되는 콩이와 뚱이는 동네 길고양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우람한 체격을 지닌 이른바 ‘돼냥이’로 자랐다. 이제 나도 나름 고양이에 대한 지식이 늘어 트위터에서 돌발상황에 당황해하는 서툰 초보엄마들에게 잘난 척하며 조언을 줄 수 있게 되었고, 늦게까지 술을 먹다가 혹은 출장을 갔다가도 아이들이 눈앞에 어른거려 귀가를 서두르고, 집 앞 골목을 다니는 길고양이들이 눈에 밟혀 대문 앞에 이따금 사료를 놓아주는 전형적인 ‘캣맘’이 되었다. 바뀐 것들이 또 있다. 사실 아이들을 키우기 전에는, 고양이 키우는 사람들의 삶을 블로그를 통해 슬쩍 들여다 볼 때마다 그들이 너무 과민하고 때로 히스테리컬하다고 생각했다. 소소한 것에 지나치게 분노나 감격을 표현하는 것도 유난스러웠고, 때로는 ‘살아있는 동물’을 상대로 “좀 비싼 취미를 누리는 듯한”, 나아가 그걸 기어코 과시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아이들을 기르는 데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사료나 모래 외에도 온갖 고양이 장난감, 혹은 캣타워 같은 것들을 ‘지른’ 인증사진을 올리며 호들갑을 떨거나 유난히 비싼 사료와 비싼 모래를 샀다고, 혹은 ‘생식’을 먹인다며 정성을 쏟는 모습이 요란스레 느껴졌고, 나아가 “내 아이에겐 최고만을!”을 외치는 광고 속 극성 엄마들의 모습을 떠올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런 식의 유난과 과민함이 실은 고양이를 향한 편견과 학대가 만연한 현실에서 유래한 일종의 자기방어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몰랐던 동물 학대, 특히 고양이 학대의 실상을, 아이들을 키우면서 알게 되면서 고양이를 키우고 아낀다는 것이 일종의 ‘소수자 정서’에서 유래한 것임을 느끼게 된 것이다. 당장 가까운 지인만 해도 고양이를 키운다니까 즉각적으로 “고양이는 요물인데...”라 반응하는 걸 보면서 얼마나 놀랐던가. 아이들은 내게 기쁨과 즐거움과 위안만 주지 않았다. 과연 ‘영물’과 ‘요물’의 단어 뉘앙스의 차이는 뭘까 생각하고, 동네 식당의 주인 아주머니가 손님이 먹고 남긴 음식을 길고양이들에게 주는 걸 보며 감격하고, 동물학대 사건을 좀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관심을 갖게 되고, 육식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그러나 육식성인 아이들을 보며 자연의 먹이사슬을 받아들이게 되고, 동물과 관련된 이슈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하게 되고, 개고기와 동물권을 둘러싼 논쟁을 보며 자료들을 찾아보게 되고... 아이들은 내가 모르고 있던, 혹은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묵직한 생각거리들을 바로 눈앞에 산처럼 쌓아주었다. 그리고 내 삶에서의 변화와 입장 정리, 그리고 실천을 요구받는 상황에 왔다. 독립영화가 내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도, 뚱이와 콩이가 내 인생의 일부가 된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창간호부터 99권을 꼬박 모았던 <키노>에서 처음 독립영화를 접하고 한독협과 인디포럼의 존재를, ‘서영집’과 ‘노뉴단’과 김동원 감독을 알게 됐지만, 오랫동안 독립영화는 내게 “그런 게 있다”는 정도의 존재였고 굳이 찾아가 접하기엔 어쩐지 두려운 대상이었다. 여러 ‘고전’ 독립영화들을 제목만 알았을 뿐 실제로 보지 못한 영화가 대부분었고, 내게 독립영화는 오랫동안 ‘정치적 주제에 너무 많이 집중하며 지나치게 선동을 주 목적으로 하거나,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지나치게 관념적인'' 영화였다. 하지만 독립영화에 좀더 가까이 가 무작정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때, 내가 갖고 있던 편견이 얼마나 빙산의 일각만을 보는 왜곡된 시선에 불과했는지 알게 됐고, 독립영화가 일반적인 상업영화와는 또 다른 차원의 거대한 세계라는 걸 깨닫게 됐다. 독립영화를 통해 이루어진 ‘발견’은 새로운 기쁨과 새로운 미학의 탐구 가능성을 안겨주었고, 이는 영화를 보는 눈과 영화를 향한 내 사고의 차원을 한 뼘 더 넓혀주며 새로운 영화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걱정과 근심까지 받아안게 되었다. 독립영화를 둘러싼 환경과 지난한 문제들, 그리고 정책과 시장에 대한 고민들, 그리고 영화가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성찰과 통찰 같은 문제들 말이다. 이를테면 내가 가장 딜레마로 생각하며 고민하는 것들엔 이런 것들이 있다. 적은 돈으로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무보수로, 혹은 적은 돈으로 일할 수밖에 없는 스탭들은 또 다른 형태로 서로 노동을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 자본에 대한 일정한 경계와 때로 독립을 주장하며 만들어지는 독립영화가 사람들과 널리 교감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시장에서 어필해야 하는 상황, 혹은 시장에서 성공했을 때 겪게 되는 또 다른 문제들, 기존 자본에 기댈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다양한 형태의 국가 및 공적 보조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다시 국가나 공공기관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등등. 만들어진 영화를 그저 보는 입장에서도 고민하게 되는 이런 것들을, 일선에서 직접 독립영화를 만들고 제작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뼈저리게 느끼며 매일매일 고민할까. 사실 인디포럼도 한독협도 그리고 인디스토리와 시네마 달과 같은 독립영화 전문 배급사도, 독립영화전용관과 디지털 영화 제작의 붐도 이러한 고민의 산물이었다. 공동체 상영도, 독립영화 전문 온라인 배급사도, 블로그와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이용한 마케팅도, 모두 당대 독립영화와 시대를 붙잡고 고민과 토론을 거듭한 끝에 거머쥔 산물이다. 그렇게 찾은 것들을 시도하며 얻은 성공과 실패의 경험, 새로이 안게 된 고민으로 또다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독립영화다. 최근 들어 새로이 시도되고 있는 ‘공공제작’ 혹은 ‘사회적 제작’의 형식도, 어렵사리 극장개봉을 한 독립영화 감독과 배우들이 혹독하리만치 빡빡한 일정의 GV를 자청하며 계속해서 직접 관객을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화의 위상이 예전만 같지 않고 영화를 둘러싼 환경이 급박하게 변하는 한편 자본은 두드러지게 양극화로 편제되고 있다. 충무로에서 재미없는 영화들만 그야말로 ‘양산’되고 있는 이때, 독립영화는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신 비약과 도약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더 큰 싸움을 준비하며 더욱 고단하고 암울한 상황, 그리고 새로운 차원의 고민을 맞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내가 독립영화를 보고 독립영화를 지지하며 독립영화를 둘러싼 고민에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치열하게 독립영화를 고민하고 독립영화를 만들며 싸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되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러나 글 쓰는 이로서 느끼는 의무감 역시 새로운 차원의 것이 된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이를 위해 최근 나는 한독협 비평분과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앞으로 내가 쓰는 글이 더 이상 ‘주변인’ 혹은 ‘관객’으로서 한발 물러서 있는 글이 아니라, 함께 싸우고 함께 고민하며 함께 나아가는 과정의 글이 됐으면 좋겠다.
기억(記憶) 그리고 각인(刻印) :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단편애니메이션 ‘아버지와 딸’ 필자는 일찍부터 감성이 발달해 있었던 모양이다. 감성과 관련한 기억에 관한 것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림과 관련한 기억들이 특별하다. 그래서 이번 추천애니메이션은 ‘기억’으로 화두를 열고자 한다. 아직도 나룻배가 있던 낙동강 하류 을숙도에서의 기억은 정확히 나이 7살 때이다. 쌍둥이 남동생에게 갑자기 찾아온 맹장염으로 우리형제는 남들이 농담으로 얘기하는 ‘유치원을 중퇴’하게 되었고, 퇴원 후 바람도 쏘일 겸해서 부산에서 멀지 않은 갈대밭으로 유명한 을숙도의 연못 딸린 조그만 공원을 찾았다. 공원 가운데는 여러 갈래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분수와 황금빛 능금색 비단잉어들이 여유롭게 노니는 제법 근사하게 가꾼 연못이 있었는데, 그 주변에서 남자 중학생 2명이 야외이젤을 펴고 연못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화판에 그려진 수채화를 처음 본 순간, 투명하게 살아 움직이는 맑은 그림에 현기증을 느꼈고, 밀려오는 감동으로 넋을 잃고 한참동안 자리를 뜨질 못했다. 또한 한 손에 팔레트를 끼고, 다른 한 손에 있는 붓이 움직일 때마다 사진과는 또 다른 생기를 더해가는 사생화 작업 과정은 지금도 잊지 못할 어린 시절의 감성적, 문화적 충격이었고 내 머리와 가슴에 뚜렷하게 각인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동물학자 데즈몬드 모리스의 ‘털 없는 원숭이’이라는 저서에서 ‘기억’들 중에서 강하게 인식되어 오랫동안 남아 있는 기억을 ‘각인(刻印)’이라고 했다. 모리스는 이 책에서 기억과 각인에 대한 내용과 아울러 동물학의 입장서 본 인간의 행태를 여러 가지 예시들로 흥미롭게 풀이하고 있다. 필자는 을숙도 소풍이후 그림을 늘 그렸고, 시간 나는 대로 미술을 접하면서 50십 줄이 되어가는 지금도 디지털 콘텐츠라는 새로운 문화 예술 산업 트렌드에 발맞추면서 어릴 적 좋아했던 그림과 관련된 업(3D 애니메이션)을 가지고 다행(多幸)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러 차례의 해외여행 중에서 ‘프랑스’ 하면 생각나는 것들 중에는 와인에 궁합 잘 맞는 살라미 햄, 느끼한 ‘퐁듀’, 잿빛 대리석 고건축물이 즐비한 파리 시내, 초록바다에 쪽빛 하늘을 담고 있는 피카소 미술관 앞의 앙티브 바닷가와 만개한 웃음들이 넘치는 미술관 뒷골목 재래시장, 멀건 카레국물에 생선살을 발라 만든 값비싼 ‘부이야베스’와 상대적으로 너무나도 값싸고 신선한 단 맛이 나는 체리가 부둣가 노점상 수레 위에 수북했던 마르세이유 항구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필자에게 찐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프랑스행 비행기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며 보았던 마이클 두독의 단편애니메이션 ‘아버지와 딸’이라고 할 수 있다. 2005년 프랑스 안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을 위한 출장으로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파리 드골공항을 경유, 스위스 제네바공항까지 약 14시간의 긴 여정을 위해 여러 권의 책과 영화, 애니메이션 등을 준비해서 비행기에 올랐다. 기내에서 제공하는 작은 화이트 와인 한 잔을 받아 노트북 앞에 놓고 마이클 두독 드 비트(Michael Dudok De Wit)의 작품들 중에서 안시와 관련된 작품을 볼까하면서 작가의 세 번째 단편애니메이션인 ‘아버지와 딸(Father and Doughter)’이라는 제목에서 엔터키를 눌렀다. 고공공포에 대한 두려움과 좁은 이코노믹 좌석에 대한 불편함은 사이다 섞은 막걸리 맛과 비슷한 화이트 와인 맛에 기분이 한결 좋아졌고, 잔잔히 흐르는 아코디언 음률로 시작되는 오프닝은 작품에 대한 적절한 기대감을 주었다. 이 작품은 2000년 네덜란드 애니메이션페스티벌 대상, 제 73회(2001년) 아카데미상 단편애니메이션상, 2001년 안시 애니메이션페스티벌, 그리고 오타와, 자그레브, 히로시마 애니메이션페스티벌 등 4대 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으면서 세계 각국의 주목을 끌었고 우리나라 PISAF에서도 초청 되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엇이 그토록 여러 나라의 관심을 가지게 했고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대상의 영광을 마이클 두독에게 돌렸을까? 작품의 도입부는 애잔한 기억을 담을 의지로 와트만 수채화용지에 갈색 잉크로 수묵 기법을 적용시켰는데 미루나무가 길게 자란 강변의 너른 들판을 아버지와 딸이 자전거를 타고 가로지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버지는 강을 건너기 위해 배로 가려다가 언덕위로 올라와 사랑스런 딸을 한동안 다시 보듬고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사라져 간다. 이 장면에서 사랑과 헤어짐에 대한 ‘에피소드’의 영상언어를 풀어가는 작가의 재치, 예리한 관찰과 예민한 감각을 읽을 수 있는데, 강가의 배로 바로 가지 않고 다시 언덕을 올라와 딸을 안아주는 애틋함과 앞날의 비애를 암시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에피소드’에 대한 아이로니컬한 예시가 되겠지만 최근 코미디방송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의 ‘발레리NO’라는 코너에서 남자의 거시기가 두드러지는 발레복과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관객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발레리노들의 애로(隘路)를 일련의 에피소드 형식으로 재미있게 연출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어린 딸의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의 귀환에 대한 기대와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작가는 자전거에 딸린 기억의 편린들을 엮어 딸의 유년기와 청소년기, 연애와 결혼, 자녀 양육, 중년기, 노년기에 접어들어 힘없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항상 아버지와 헤어진 강변의 그곳을 자전거로 찾다가, 결국 오지 않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말라버린 강으로 직접 찾아 나서고 마침내 저세상의 아버지를 죽음을 통해 만나게 된다는 내용으로 한 여자의 성장과정과 일대기를 짧고 빠르게 이어가고 있다. 왜 이렇게 짧은 작품이 울음을 견디기 힘들게 하고 필자의 기억에 생생할까? 어린 시절 자전거와 얽힌 아버지에 대한 강한 인상(각인)은 자전거를 동행한 변함없는 딸의 기억과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 그리고 동경으로 일관하고 있다. 과연 일생을 바쳐 아버지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기다릴 수 있을까? 아버지를 기다리는 애잔한 감정을 작품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자전거와 관련한 에피소드로 연속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객은 보편적인 이야기 속에 좀 더 몰입하게 되고, 특별한 딸의 감정이 점증적으로 이입 된다. 아버지와 딸과의 사랑, 그리고 아버지의 귀환에 대한 기대와 그리움을 담은 스토리는 1924년 일본 도쿄제국대(지금의 동경대) 우네노 히데사부 교수와 그의 충견 ‘하치’의 변함없는 신뢰와 우정과도 비견하다. 아키다 견 ‘하치’는 주인의 죽음 후에도 10년간 시부야역 앞에서 주인을 기다렸다고 한다(이 실화는 리처드 기어 주연의 ‘하치 이야기’로 각색되어 2009년 개봉되었다). 그리고 군더더기를 덜어낸 작가 마이클 두독 더 비트 특유의 갈색 모노톤 수묵 표현기법과 캘리그라피 필법은 함축적이면서도 스토리의 집중력을 더해준다. 전깃줄도 자동차도 없는 곧게 뻗은 강둑길, 조용하게 바람에 흔들리는 키 큰 미루나무, 낭만과 여유를 함께하는 자전거 타기, 찰랑거리는 잔물결소리가 들려오는 강가, 어두운 밤길에 기러기 알보다 길게 비친 자전거 조명등, 충만한 황혼의 요란한 참새 떼 등 유기농 같은 영상들을 엮은 몽타주 기법을 통해 표현한 영상언어는 작가의 다양한 경험과 기억들의 반영이라고 판단한다. 또한 작가는 천천히 흐르는 어두운 분위기를 개성 있는 캐릭터들의 움직임과 변화 있는 화면구도로 긴장과 이완을 유지시키고, 빠른 시간 전개와 정확한 훅업, 매치 컷 등 다양한 연출로 느슨한 분위기의 속도에 대한 완급을 적절하고 조화롭게 맞추어 간다. 특히, 자연과 물리적 현상에 대한 작가의 세밀한 관찰과 묘사, 그리고 정확한 동작과 개성 있는 캐릭터의 움직임에 대한 섬세한 표현은 유럽 문화와 예술인들이 갖는 한끝 차이의 문화적 우위에 대해 ‘모짜르트의 천재성에 대한 살리에르식 보리(Bodhi)’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지난 영상자료원의 칼럼 ‘그림 없는 글자 책’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창의적인 생활과 다양한 경험들을 토대로, 필요하다면 0.5Cm의 축석까지도 만들어 쌓는 섬세한 근성들이 모여 문화 대국을 만들 것이라 확신한다. 영어와 수학학원이 넘치는 도시에 우리나라 인구의 80%가 모인 이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적 헤게모니에 대해 여유와 낭만, 느린 변화와 사색의 패러다임에 대한 욕구불만이 ‘아버지와 딸’을 보던 필자를 더욱 슬프게 했던 것은 아닐까? 8분의 짧은 상영시간 동안 나는 몇 번의 터지는 울음소리를 참으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고, 한 잔 와인의 알콜 기운이 사라질 즈음에야 턱에 고인 울음을 감출 수 있었다. 이 작품의 감독 마이클 두독 드 비트는 1953년 네덜란드에서 출생하여 스위스와 영국에서 미술을 공부하였고, 1978년 영국 웨스트 서리 예술대 졸업 작품으로 첫 단편애니메이션 ‘인터뷰(The Interview)’를 제작하였다. 1992년 ‘청소부 톰(Tom Sweep)’을 통해 본격적인 독립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하였고, 1994년 아카데미상 단편애니메이션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수도승과 물고기(The Monk and Fish)’를 제작한 필모그래피를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나룻배로 강을 건너던 풍경과 낙동강 하류 근처 을숙도의 고즈넉한 작은 연못가의 중학교 형들의 사생 작업에 대한 필자의 어린 시절 기억이 다뉴브 강변의 잔물결(배경음악 ‘사의 찬미’는 원래 루마니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변의 잔물결’의 앞부분이고, 한편 이곡은 요한시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의 영향을 받았다)을 배경으로 아버지와 함께 타던 자전거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그립게 기다리는 애틋함에 대한 기억들이 교차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울음과 찐한 감동을 창조한 마이클 두독 드 비트의 ‘아버지와 딸’에 찬사를 보내면서, 성인 독자들에게는 와인 한 잔을 곁들여 감성적으로 한 번 보시고, 관련학과 대학생들이시라면 술이 깬 뒤 아름다운 영상에 대해 차근히 한 번 더 분석해볼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