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베 킬러
- 감독
- 오일수
필자는 공공 복합문화기관에서 일하다 보니, 여러 문화 장르를 편견없이 수용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영화에 대한 선입견이 타 장르에 비해 상당히 강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종종 깨닫게 된다. 이러한 영화적 선입견은 사업계획을 세울 때부터 그 조짐이 보이더니, 규모와 예산을 확보해야 하는 단계에 들어서면 으레 ‘이건 영화진흥위원회에서 할 일이다.’, ‘영상자료원이 하고 있지 않냐?’, ‘여기는 부산이 아니다.’ 등의 정책 논리와 결합된다. 어떻게든 한고비 넘기고 나면, ‘크게 벌이지 말고 재밌는 영화 몇 편 골라서 상영해라’, ‘정치적 내용을 피해라’, ‘관객은 많이 들어올 수 있겠냐’ 등의 직접적인 압력으로 구체화된다. 이쯤 되면 결국 할 수 있는 것이란 타 전시 주제와의 연계 상영이나 계절에 어울리는 영화 상영과 같은 구색 맞추기 이벤트가 가장 안정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미술 영역에서는 크고 작은 지역마다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고, 저마다의 연구, 수집과 교육 행사 그리고 작품지원 프로그램까지 운영되고 있지만, 영화는 유독 공공의 영역보다는 멀티플렉스 형태의 민간 소비 영역에 과도하게 치우쳐져 있다. 국공립문화기관에서조차도 영화에 대한 공적 운영과 지원은 특정 기관의 역할로만 축소하면서 산업과 문화예술을 분리하는 이원적 태도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곳에서 몇 년 동안 적응하며 일해오고 있는 필자가 제도적 문제를 지적할 입장은 아니지만, 다른 장르와 비교할 때 예술장르로서의 영화가 지닌 불균형과 그에 대한 선입견은 영화 관련 사업들을 추진할 때마다 늘 장벽이자 한계로 작용한다. 필자는 이러한 과정들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두 가지 임무를 부여했다. 첫 번째는 한국의 예술운동 흐름에서 함께 논의될 수 있는 영화들을 수집하고 기록화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과거의 기록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작은 전시나 상영의 형태로라도 기념하는 것이다. 본 고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고전’이라는 의미가 ‘오래되었음에도 시대를 관통하는 미학적 성취’를 내포하는 것이라면, 결국 필자에게 있어서 ‘고전’은 현재 나의 관심이 작동되게끔 하는 일종의 근원이자, 과거의 기록들을 갱신하고 확장해나감으로써 정전이 아닌, 언제나 재구축이 가능한 살아있는 계보들로 존재한다. 기록 이전의 기록 필자가 지금 직장에서 처음 맡은 일은 아시아 문화예술 자료들을 연구하고 수집하는 작업이었다. 당시의 우리 팀은 아시아 문화에서 가장 큰 변곡점이 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예술 흐름을 주제별로 나누고 각 주제들 간의 관계 속에서 시각화할 수 있는 자원들을 모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필자는 그 안에서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를 맡았고, 현재 미술 안에서 ‘무빙이미지’로 묶이는 두 영역이 아시아 각 지역에서 어떻게 출발하고 조우하게 되었는지를 주요 작가들의 작품들과 자료들을 찾아 조사했다. 특히 실험영화 아카이빙 프로젝트는 전통적인 예술 안에서 영화의 유산을 찾기 위해 전략적으로 선택한 작업이었다, 상업영화 제작방식과는 다른 개인작업 또는 문화운동의 일환 또는 콜렉티브 형태를 취하고 있는 실험영화는 하나의 자료를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그 자료에서 파생되는 정보들은 매우 다양했다. 실험영화 아카이빙 프로젝트는 크게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로 나누어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한국 실험영화 자료들을 모으는 일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어렵고 더딘 작업이었다. 현재는 독립영화의 범주 안에서 실험영화, 실험다큐멘터리까지 다양한 비평작업들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1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영화 담론의 대부분은 상업영화 중심이었기 때문에 실험영화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는 단서들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는 당위성을 부여했고, 수집 이후 보존과 전시로 이어지는 다른 아카이빙 프로젝트와 달리 배급 시스템 보급까지 계획하면서 실험영화 초창기인 70년대 전후와 그 이후의 작품들로 외연을 확장하고자 했다. 또한 그럼으로써 관련 작업을 하고자 하는 창작자와 이용자를 지속적으로 연결하는 공공 상영과 배급 모델을 구상했었다. 각 나라마다 고전영화 베스트 안에는 그 나라의 아방가르드(혹은 언더그라운드) 전통을 계승한 작품들이 섞여 있다.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통해 더욱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었던 일본의 경우, 유럽의 아방가르드 영화부터 미국의 실험영화까지 그 맥을 같이 하며 그 안에서 1인 영화제작 시스템인 자주(自主)영화, 퍼포먼스, 음악 등과 결합한 인터미디어(Inter-media), 자국의 전통적인 언더그라운드, 비디오아트와 결합한 매체실험 등 다양한 분파들을 통해 하나의 일본 실험영화 지형도를 만들고 있었다. 어떠한 실험이든지 간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어렵다. 실험은 기존 영화의 미학적 탈구로부터 시작한다. 영화가 만들어지게 된 전후의 맥락,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적 맥락에서 비틀림이 시작된다. 예술에서의 실험은 이러한 맥락적 탐구가 필요하며, 그 안에 실험의 미학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미학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어 왔는지를 파악해가면서 실험영화의 계보를 추론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당시의 비틀린 영화, 비틀린 경향의 발견을 가져다준 영화, 즉 상업적 고전영화가 아닌, 마치 플럭서스처럼 커다란 한국실험예술운동의 맥락에서 출연한 영화적 실험은 어떤 것이었을까. 필자는 우선 한국에서 ‘실험영화’라는 용어가 등장한 시기를 기점으로 영화의 미학적 연구를 시도했던 동인회의 멤버와 자료들를 모으는 데서 출발했다. 구체적으로, 1960년대 ‘시네포엠’과 실험미술을 지칭하며 다양한 매체실험을 시도한 ‘제4집단’, 1970년대 ‘영상연구회’와 ‘카이두 클럽’, 독일과 프랑스문화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서영화연구회’와 ‘씨네클럽’, 그리고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의 ‘실험영화연구소(전신 ’뉴이미지그룹‘)’를 중심으로 활동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동인회에서 제작했던 작품들의 수집이 가장 중요했는데, 이는 대부분 개인소장이었고 필자의 소속기관은 개관 전이었기 때문에 감독들의 신뢰가 전적으로 필요했다. 운이 좋게도 필자는 카이두클럽의 한옥희 감독이 영화제 집행위원이었을 당시 프로그래머로 일한 경험이 있었고, 임창재 감독의 연출부로 잠시나마 있었던 인연으로 한국 실험영화 흐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두 감독의 작품들을 시작으로 순조롭게 수집 과정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이전에도 실험영화에 관심이 많았고, 관련된 박사논문을 쓰기도 했지만, 실제 실험영화의 고전과도 같은 작품들의 원본 필름을 직접 내 손으로 가지고 오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임창재 감독에게는 실험영화연구소에서 활동 당시 제작한 < 오그 >(1994), < 오버 미 >(1996)부터 < 눈물 >(1998), < 아쿠아 레퀴엠 >(1999)의 16mm 필름 원본과 콘티, 당시의 활동자료 그리고 이후의 디지털 작품들을 받았다. 특히 필자가 대학생 때 가장 좋아했던 책 중 하나였던 <뉴미디어 영상미학>의 저자이자 실험영화연구소 대표였던 권병순(필명 권중운)의 사진 몇 장이 섞여 있던 활동자료를 보면서 한국영화사 기록에 여전히 담기지 못한 역사들이 너무 많고, 그 안에서 실험영화 기술의 공백이 너무 크다는 것을 절감했다. 박사논문을 쓰는 동안 공동지도교수였던 최민 교수님이 “권병순이 지금 살아있다면 네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줬을거다”고 아쉬워했던 기억과 함께 아카이빙 작업에서 사진 몇 장, 메모 한 줄이 담긴 기록이 또 다른 기록으로 이어지는 즐거움이 공존했다. 임창재 감독에게 건네받은 자료들이 아카이빙 과정의 동기부여가 되었다면 한옥희 감독의 자료들은 아카이빙 이후의 동력과도 같았다. 한옥희 감독의 필름들을 받기 전까지 ‘카이두 클럽’의 작품을 본 것은, 한옥희 감독이 보여준 < 구멍 >(1973)의 디지털 파일과 초기 독립영화들을 담은 DVD ‘매혹의 기억, 독립영화 Vol.1 70-80년대’에 수록된 < 색동 >(1976) 두 편이었다. 감독님께 <구멍>을 포함한 < 중복 >(1974), < 2분 40초 >(1975), < 무제 77-A >(1977)의 16mm 필름 원본을 받았고 이듬해 디지털화 작업을 진행했다. 현재 필자에게 한국 고전영화 안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무제 77-A>라고 말할 것이다. 지가 베르토프의 < 카메라를 든 사나이 >처럼 16mm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세상을 향해 장전할 태세를 갖춘 한 여성은 인파가 모여있는 시내 한복판에 자신을 기이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을 포착한다. 그리고 암실로 들어가 그 필름들을 몸에 휘감으며 행복해하는 듯 하지만 마지막엔 갈기갈기 오려버린다. 엔딩크래딧에 한옥희 감독이 직접 등장하며 가위를 들고 카메라를 향해 “컷!”을 외치는 짧고도 강렬한 순간은 최고의 마지막 장면이다. 왜 이 필름이 여태까지 감독의 방 안에 있었을까. 이 귀한 필름들을 통해 전해오는 울림은 이것을 또 어떻게 공유해야 할지가 무거운 과제로 동시에 다가왔다. 13개 주제의 아시아 예술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통해 동시대 예술담론을 생산해내는 플랫폼이 되고자 했던 우리팀의 포부는 안타깝게도 기관의 개관과 함께 수장이 바뀌면서 중단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는 필름앤비디오 아카이브로 묶여 간헐적으로나마 현재까지 수집이 이어지고 있다. 한옥희(카이두 클럽)의 <무제 77-A> 스틸이미지 기록 이후의 기록 필자가 아카이빙 프로젝트에 잠시 휴식기를 갖는 동안, 영화 프로그래밍 업무를 주로 맡게 되었다. 관객이 찾지 않는 프로그램만 기획한다는 잦은 지적으로 소심해졌을 당시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마이너한 것과 전투적인 것은 다르다”는 말을 필자에게 건네주었다. 그의 말은 필자가 하고 싶지만 망설였던 몇 가지 기획을 실행할 동력을 실어주었다. 과거의 작품들이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기술되면 ‘고전’이라 불리게 된다. 아주 멀지 않은 과거더라도 가치 있는 작품은 모던 클래식, 즉 ‘현대 고전’이 되기도 한다. 2019년 한국영화100주년에 앞서 여기저기서 이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들을 준비하고 있었고 필자도 조그맣게나마 이에 동참하고 싶었다.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 한국영화는 세기의 걸작을 배출하고, 국내영화의 높은 관객점유율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필자는 한국영화사 안에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검열 내지는 삭제당해야만 했던 작품들을 나열해보고 싶었고, 어찌보면 이 작품들이야말로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고전이라고 생각했다. 필자는 한국영화사에 도전적 작품으로 살아남은 혹은 사라진 영화들을 소환하여 10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 나쁜영화 100년>을 기획해보고자 했다. 문화적 관습과 제도에 타협한 영화들을 그 시대의 ‘착한’ 영화들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불러모으고자 하는 영화들은 그야말로 ‘나쁜’ 영화들이다. 모은영, 신은실 평론가가 함께 기획하고 인디포럼과 한국영상자료원 그리고 광주독립영화관과 광주극장이 협력한 이 행사는 나름 성공적으로 진행됐고, 행사에 초대된 감독들도 ‘나쁜’ 영화 감독들로 소개되는 역설적 상황을 기꺼이 만끽했다. 특히 100주년 기념 모든 행사를 고사하면서도 유일하게 이 행사에는 얼굴을 비친 장선우 감독의 깜짝 등장은 영화제의 화룡점정이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나쁜영화 한두 편을 고른다는 것은 너무 힘들었고, 고심 끝에 < 서울예수 >(1986), < 나쁜영화 >(1997), 그리고 < 거짓말 >(2000) 세 편을 선정하였다. 개막작 역시 매우 중요했는데, 우리다운 행사에 포문을 열어줄 수 상징적인 작품이 필요했고, 신은실 평론가는 < 상계동 올림픽 >(1988)을 제안했다. 이는 지금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기록되어 있는 사실들을 재조명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지만 이미 기록된 것들에 빈틈을 메꾸고 정보들을 두텁게 만드는 작업은 필자가 보람을 느끼는 일 중의 하나다. 아카이빙 작업에 전적으로 시간을 들일 수는 없었지만, 상영이나 전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취득하는 정보와 자료들이 있다. 노동자뉴스제작단(노뉴단)의 30주년을 기념한 <내가 뉴스다!> 행사를 기획하면서 전시를 위해 필요했던 그동안의 노뉴단의 영상들과 비디오 표지들, 그리고 얄라셩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유운성 평론가와 기획한 <여럿 그리고 하나-얄라셩에서 서울영화집단까지>를 준비하면서 만나볼 수 있었던 김홍준, 박광수, 문원립 감독의 구술자료부터 당시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활동자료들은 한국영화사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안적 영화문화의 중요한 기록들이다. 비록 더디긴 하지만 이 자료들은 현재 정리작업 중이며, 완성될 즈음에는 출판물을 비롯하여 풍성한 기념행사와 함께 한국 독립영화 연구에 지속적인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좌> 노동자뉴스제작단 30주년 기념전시 포스터 이미지 , <우> 얄라셩 40주년 기념 온라인 전시 메인페이지 이미지 수집된 작품과 자료들을 정리하는 후속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의미있는 소식들이 조금씩 들려오고 있다. 한옥희 감독의 필름들을 디지털화한 후 해외영화제와 미술관 등에 조금씩 소개하면서 국내외 평론가, 연구자, 큐레이터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2018년 오버하우젠국제단편영화제 ‘아카이브’ 섹션에 한옥희 감독의 작품이 초청되었고, 당시에 아시아 실험영화의 고전들을 소개하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필자는 한국 작품으로 김구림의 <24분의 1초의 의미>와 한옥희의 <구멍>을 대표작으로 선정하여 상영했다. 이미 미술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김구림 작가의 작품도 주목을 받았지만, 해외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한옥희와 카이두 클럽의 이름은 작품 공개와 함께 관심이 집중됐다. 이후 같은 해 토론토국제영화제 ‘파장’ 섹션에 또 다른 작품 <2분 40초>가 초청되었고. 캐나다 영화잡지 ‘시네마스코프’에는 특집기사가 실렸다. 이후 싱가포르 내셔널 갤러리, 바르샤바현대미술관, 독일 HKW 등의 주요한 미술관과 영화제를 넘나들며 한국영화 회고전, 세계여성예술가 특별전 등에 대표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다. 해외의 연구자들이 논문을 쓰기 위해 자료들의 요청이 늘어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약 5년 사이에 일어난 이와 같은 변화는 카이두 클럽의 활동과 한옥희 감독의 작품이 가지는 미학적 가치는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봉준호, 박찬욱이 이룬 성과의 동력에 대한 호기심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국의 영화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계보와 동력을 찾고 있다. 개인들마다 ‘고전’의 기준은 다 다르겠지만 결국 필자에게 있어 고전이란 ‘고전적’ 관습을 탈피하고자 했던 선구적 작업이다. 수집된 자료들은 정리를 마치고 나면 완성된 기록으로 남는 것이 아닌 수시로 살을 붙여가면서 어느 순간 자료들끼리 자연스러운 지형도가 그려지는 상상을 해본다. 이러한 작업은 이미 미술사 안에서는 끊임없이 이루어지면서 다양한 자료수집과 비평, 전시들을 통해 정전화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비대중적인 것을 대중화하고, 비제도적인 것들을 제도화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예술의 스펙트럼을 넓혀주고 있다. 영화도 포스트시네마의 시대로 전환해가면서 혼종 장르로 변모해가고 있다. 어느 때보다 미술과의 접점이 가까운 이때, 좀 더 다양한 실험적, 운동적 영화의 역사들이 경계를 넘어 상호 접합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필자 역시 한국 실험영화와 실험미술 운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또 다른 새로운 자료들을 찾아가고자 한다.
① 황금관 1913년 1월 1일 개관한 황금관은 대장성 관료 출신으로 러일전쟁 당시 조선에 건너온 다무라 기지로(田村義次郞)가 세웠다. 위치는 지금의 을지로 4가인 황금정 4정목에 있었는데 루나파크(Luna Park)인 황금유원(黃金遊園) 내 활동사진관으로 시작되었다. 설립 초기 황금관은 필름 수급의 어려움과 운영상의 미숙으로 고전하였으나 대정관 매점을 운영하던 하야카와 마쓰타로(早川增太郞)가 운영을 맡게 되면서 크게 성장하게 된다. 하야카와는 대정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질이 낮은 영화를 상영했음에도 조선 내 일본인 관객들에게 가장 큰 인기가 있던 변사 유모토 교하(湯本狂波)와 여자 변사 아시자와 하쓰에(蘆澤初江) 등을 고용하여 많은 관객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황금관은 하야카와의 이름을 딴 하야카와연예부(早川演藝部)를 통해 운영되었다. 1914년 하야카와연예부는 텐카츠(天活, 천연색활동사진회사의 약칭)의 선만대리점으로 텐카츠에서 수입, 제작한 2색 칼라영화인 키네마칼라를 본격적으로 상영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서울의 우미관을 비롯해 인천의 표관, 평양의 평안극장 등 지방의 영화관에 필름을 공급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필름 값이 폭등하게 되자 일반 영화보다 필름을 두 배 더 사용하는 키네마칼라 필름을 대신하여 활동사진의 일부를 변사들의 실연으로 보여주는 연쇄활동사진을 도입해 경영상의 어려움을 극복했다. 하야카와연예부의 영향력은 당시 조선의 영화산업을 주도하던 대정관의 닛다연예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황금관은 1915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시정5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를 위해 만들어진 연예관(演藝館)을 사들여 기존 건물 옆에 옮겨지은 후 1916년 6월 10일 새로운 건물로 확장 이전하였다. 성공적으로 운영되던 황금관은 1917년 황금관 소유자인 다무라와 하야카와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유락관으로 그 본거지를 옮긴 하야카와연예부를 대신하여 낭화관의 운영자 니시다 가조(西田嘉三)를 급하게 운영자로 섭외한다. 하지만 니시다는 영화관 운영 경험이 없었기에 영화관이 운영될 수 있게 틀만 잡아 두고 아라키 다이스케(荒木大助)에게 운영권을 넘기게 된다. 아라키가 운영하던 시기 황금관의 가장 큰 성과는 극영화를 제작했다는 점이다. 1919년 2월 21일 상영한 부산의 출정군인 나가부치 센타로(中淵仙太郞) 일가의 비참한 삶을 그린 <누의 가(淚の家)>가 바로 황금관에서 제작한 극영화이다. 이 영화는 경성일보사 기자의 지도하에 제작되었으며, 각본은 황금관 운영자인 아라키가 썼다. 이 영화는 조선거주 일본인들이 만든 최초의 극영화로 부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재조선 일본인들의 삶을 소재로 삼았기에 경성의 일본인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사진] 황금관이 인수한 조선물산공진회 연예관 1919년 텐카츠가 해산되어 국제활영주식회사(國際活映株式會社, 곳카쓰[國活])로 바뀌면서 황금관에서는 곳카쓰(國活) 영화를 상영했으나 고전하게 된다. 1921년 말, 황금관은 유니버설 영화만을 상영하는 서양영화 전용관으로 전환되었다. 당시 서양영화전용관으로 전환하는데 앞장선 이가 새롭게 황금관을 운영하게 된 황금관 전무인 변사 난고 기미토시(南鄕公利)였다. 그는 서양영화의 설명에 능한 인물로 한때 서양영화전용관으로 운영되던 유락관에서 근무하다가 황금관으로 옮겨온 바 있다. 황금관은 1922년 9월 다이카츠 쇼치쿠와 계약을 맺고 쇼치쿠 계통의 영화관으로 운영되다가 1924년 1월부터는 새롭게 등장한 제국키네마(帝國キネマ) 조선 봉절장으로 있었다. 1925년 9월부터 다시 하야카와 마스타로가 운영을 맡았다. 그러나 1926년 2월에 하야카와 마쓰타로가 조선에서의 활동을 접으면서 마키노키네마(マキノキネマ), 도아키네마, 제국키네마 등이 직영하게 된다. ②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 1928년 4월에는 신문기자 출신으로 외화 수입업자로 활동하던 도쿠나가 구마이치로(德永熊一郞)가 황금관의 운영권을 인수하여 도아키네마(東亞キネマ) 직속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는데 도아키네마 영화뿐 아니라 다른 중소회사의 영화들도 상영했다. 동아구락부의 운영자 도쿠나가 구마이치로는 규슈 출신으로 1920년대 초반 대구로 건너와 흥행업에 뛰어 든 이후 1920년대 중반 서울로 근거지를 옮겨 외국영화 수입회사인 덕영상회(德永商會)를 설립하고 고베의 동서영화주식회사(東西映畵株式會社)가 권리를 가지고 있는 워너브러더스와 FBO영화사의 영화를 수입 배급했다. 덕영상회에서는 외화 수입 외에 도아키네마를 비롯해 중소 규모 영화회사의 필름을 상영했고 덕영프로덕션을 통해 영화제작도 했다. 덕영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영화로는 토성회와 함께 제작한 이규설 연출, 복혜숙 주연의 <홍련비련>과 <순정은 신과 같다>와 같은 관청 납품용 교육(문화)영화들이 있다. 동아구락부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이 인기 있는 작품들이 아니어서 저렴한 입장료를 매기는 대신 자주 프로그램을 바꾸면서 많은 관객을 불러 모았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 사이 동아구락부는 일본인 상설관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하던 극장이었다. 1930년부터 조선에서 토키영화가 본격 상영되기 시작하자 닙튼 영사기를 구비하여 토키영화를 상영하였다. [사진] 1936년 신축되어 1999년 사라진 국도극장(1961년 경, 출처: 국가기록원) ③ 쇼치쿠좌(松竹座) 1934년 3월 말로 계약이 끝나는 쇼치쿠 영화에 대한 대정관의 독점권을 두고 서울의 극장들이 쇼치쿠 개봉관이 되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이때 주도권을 쥔 것이 동아구락부였다. 동아구락부에서는 쇼치쿠 개봉관의 지위를 얻게 되자 이를 기회로 극장 이름도 동아구락부에서 쇼치쿠좌(松竹座)로 바꾸었다. 1934년 7월 13일이었다. 쇼치쿠좌는 정원이 1,033명이 들 정도로 거대한 극장으로 보통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으로 불리었다. 하지만 시설이 낙후하여 1935년 6월 토키영화관으로 신축이 결정된다. ④ 황금좌(黃金座) 쇼치쿠좌와 그 뒤 과거 광무대가 있었던 곳을 합하여 총 600평의 부지에 건설비 30만원에 무대장치 완비하여 건설되었다. 개관 당시 쇼치쿠의 흥행권이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마키노영화를 상영하게 되자 극장 이름을 쇼치쿠좌에서 황금좌로 바꾸었다. 개관일은 1936년 11월 15일이었고 정원은 1,136석이었다. 도쿠나가가 운영하던 황금좌는 1937년 12월 도와(東和)상사 조선지사의 고인문(高仁文)으로 운영자가 바뀌게 된다. 파라마운트를 비롯해 각종 외화를 수입하는 도와상사가 황금좌를 운영하게 되면서 황금좌는 서양영화를 비롯해 조선영화의 상영장으로 자리 잡게 된다. 특히 최남주의 조선영화사는 공식적으로 황금좌를 자사의 봉절관으로 정하게 된다. 당시 외국영화와 일본영화를 함께 상영하도록 했기에 도와상사가 운영하던 황금좌에서는 닛카쓰 영화를 상영하며 닛카쓰 개봉관이 된다. 전통적으로 닛카쓰영화를 개봉하던 희락관은 2번관으로 바뀌게 된다. ⑤ 경성보총극장(京城寶塚劇場) 할리우드영화에 대한 수입제재가 장기화되면서 도와상사의 고인문은 황금좌 운영에서 손을 뗀다. 황금좌 소유자 다무라 미네(다무라 기지로의 미망인)는 황금좌의 운영권을 회수하여 요시모토 흥업과 보총극장이 제휴한 주식회사 경성보총극장에 넘긴다. 황금좌는 1940년 5월 1일부터 이름을 경성보총극장으로 바꾸었다. 주식회사 경성보총극장은 극장 운영을 위해 자본금 85만원의 주식회사를 성립하게 된다. 주식회사 경성보총극장의 진용은 사장 하타 도요키치(秦豊吉, 동보), 전무 하야시 히로타카(林弘高, 요시모토), 취체역 나와 미쓰마사(那波光正, 동보), 하야사 쇼노스케(林正之助, 요시모토), 감사역 온다 다케이치(恩田武一, 요시모토), 마나베 야치요(眞鍋八千代, 동보측)이었으며 실무는 지배인 우메미야 사부로(梅宮三郞)가 맡았다. 1940년대 경성보총극장은 성보극장이라는 약칭으로 불렸다. 이 영화관은 조선영화의 개봉관으로 이용되었는데 <집 없는 천사>(1941), <복지만리>(1941), <창공>(돌쇠의 개제)(1941), <그대와 나>(1941), <신개지>(1941) 등이 경성보총극장에서 개봉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연예를 통한 선전활동이 강화되면서 1942년 9월 20일 경성보총극장 직속의 성보연예부가 신설된다. 연예보국의 영역을 확장키 위해 만들어진 성보연예부에서는 동보연예배급사 요시모토흥예배급부(吉本興藝配給部)의 지원과 만주연예협회와의 연락을 통해 내지 연극연예단을 조선에 소개하고 조선의 연극연예의 배급과 흥행을 맡았으며 그 산하에 성보이동연예봉사대를 조직하여 각종 위문연예를 제공했다. 경성보총극장은 1943년 7월 30일 조선흥행연합회에서 1급에서 11급까지 등급을 나누었을 때 서울의 영화관 중 명치좌와 약초극장과 더불어 1급관으로 80전의 입장료를 받을 수 있었던 대표적인 영화관이었다. 해방 직전 화재로 인해 문을 닫은 성보영화극장은 해방 이후 내부를 수리하며 재개관하게 되는데 이때 이름을 국도극장(國都劇場)으로 바꾸었다. 국도극장은 1999년까지 운영되었다가 폐관하였다. 현재 극장이 있던 자리에는 호텔이 들어서 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김태현,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김계자,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 [사진](상단). 황금유원 설립자 다무라 기지로(『京城府之卷』, 京城府) [자료] ≪경성일보≫,1919.02.21. 淚の家 全五卷 當館封切 黃金館 京城日報記者指導 黃金館主 荒木大助 脚色 釜山出征軍人 中淵仙太郞氏の家族 ▲夫の出征後妻は貧0の身に又一兒を産み産後の患ひより遂に歸らぬ旅0 の人となる、頑是なき七人の子は飢に泣き水よ飯よと取0る0他の見ろ 目 0實に哀れ悲慘の淚なり ●六人の子は飢に泣き妻は臨月の腹を抱つて病床に臥す出征軍人の大 悲慘なる家族、 噫々薄命なる勇士 ●0の難を見て惻隱の情を勤かすは仁の端と云ふ大方の士御觀覽の上一 掬御同情あらん事を43)(0은 판독불가-인용자) [자료] ≪경성일보≫, 1919.02.23. 初日 二日 滿員 黃金館 荒木大助 脚色 事實悲劇 淚の家 ▣ 當館特別撮影 大阪樂天地に京都京座に名古屋新守座に於て連日大盛況の本0は劇以上 に出色せしめたる實に現在釜山にある大悲慘事 此哀れなる寫眞を見られて誰れか泣かれぬ方ありや 本日 晝夜 開演 黃金館45)(0는 판독불가-인용자) [자료] "연기관의 대소요, 연극 즁에 큰 소동, 일반 연극의 주의" 《매일신보》, 1913.2.22. 십구일 오후 십시에, 남부 산림동(山林洞) 황금유원 안 연기관에셔, 한 소요 일이 잇셧 , 연기관에 , 혁신단 림셩구(林聖九) 일 이, 신파연극을 흥 즁, 그 시각에, 그곳에셔 고용 , 광도현인 포 신조(廣島縣人 蒲生信造) 삼십륙셰된 쟈가, 왼편 손에 연극에 쓰 , 폭발약을 만히 쥐고 셧다가, 그릇 불이 이러나, 굉쟝 형셰로, 젼부가, 폭발되얏슴으로 그 근쳐에 잇던, 흔 고용인, 즁셔, 쇼숑, 쇼뎐(中西, 小松, 小田) 등, 삼인도 즁샹을 입어, 젼귀 명을, 즉시 그 부근 지샹의원(池上醫院)으로, 메여다가 치료 즁인 , 그 즁 포 은, 왼편 손이, 젼부가 파괴되얏슴으로, 지샹씨의 집도로, 대슈슐을 시작 야, 팔을 버혓 , 지금 형샹으로 , 명에 , 관계가 없슬 듯 나, 눈망울과 기타 크게, 화샹 곳이 만아, 보기에 우 참혹 다더라. [자료] 《매일신보》, 1918.07.05. 日本天然色活動寫眞株式會社 技術部 新案 米國式 스데-지 기네오라마 應用 事實劇 船長의 妻 黃金館은 新築二週年 記念 特別 大大興行으로 右 天活會社 技術部員 拾數名을 招 야 七月五日부터 公開 다 歐洲戰亂以來 敵 潜航艇으로 因 야 商船의 遭難이 不... 바 昨年 我 日本最初의 武裝船 ○○會社 ○○丸도 其 慘禍에 罹 얏더라 今回 黃金館은 其 巨大 舞臺 一面에 前記 天活會社 獨得의 「스데-지 기네오라마」를 應用 고 電氣仕掛로써 當時의 實況을 看客 諸君에 示코져 今 基 光景을 略述 지면 英國 包台 不飽히 探照燈을 照 야 獨히 潜航艇 並 飛行機의 襲來를 監視 月은 皎皎 야 海 照 고 金波 銀波 靜動中에 我 ○○丸은 警戒 中 航行 天候 俄然히 變 야 數千의 星은 急히 其 光을 沒 야 一天은 忽然 暗黑 敵艇 及 飛行機 其 機를 乘 야 「 버」海峽에 馳來 야 我 ○○丸을 發見 고 .....水雷를 發射 고 又 爆彈을 投下 ○○丸 其 ....의 活躍인 實로 慘劇 其 物을 目擊 에 不異 고 誰何든지 科學의 進步 光學 應用의 巧妙 에 驚치 안이치 못 이라 「스데-지, 기네오라마」에 就 야 內地에 旣히 定評이 有 고 今 玆에 ....言을 不要 고 黃金館은 鮮人 各位의 觀覽에 供 기 爲 야 特히 此 一團을 招聘 얏더라 米國 단호자會社 作 連續 二十三編 四十六卷 連續 大活劇 百萬弗의 秘密 第一 第二篇 上場 臨時觀覽料 特等 七十錢 一等 五十錢 二等 三十錢 軍人學生各等半額 黃金館.
< 만추 > ( 이만희 , 1966) 우리들이 함께 영화를 보는 공동체라면 영화의 역사가 상상의 시네마테크인 것처럼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다. (적어도 한국영화에서, 우리들에게) 1966년은 이만희 의 < 만추 >의 해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1966년 12월 3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이만희의 영화. 물론 나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몇 차례이고 한국영화의 대가들을 만나면서 같은 질문을 했다. 한 여름의 무더운 날 오후 수박을 사들고 가서 김기영 감독님을 만나 한참 인터뷰를 한 다음 마지막에 질문하였다. 감독님에게 한국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어떤 작품이었습니까. 잠시 나를 보더니 별로 생각하지 않고 내뱉듯이 별다른 수식을 더하지 않고 대답했다. “<만추>” 아직 대학생이었던 시절 동서영화그룹 친구들과 유현목 감독님을 모시고 가진 술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하였다. 약간 눈을 가늘게 뜨시면서 잠시 생각을 한 다음 대답했다. “ 나운규 의 < 아리랑 >, 이규환 의 < 임자 없는 나룻배 >, 이만희의 <만추>” 라고 하신 다음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이만희 그 놈은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어” 임권택 감독님과 긴 인터뷰를 진행하다가 같은 질문을 하였다. “나한테는 < 하녀 >와 <만추>요, 그건 내가 만들 수 없는 영화요” 그런 다음 그 영화는 한국영화사에서 사라졌다. 임권택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사람이 아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유일한 예외는 펠리니의 < 길 >뿐이다. 어쩌면 다시 보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사라졌다. 하여튼 <만추>는 임권택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다. 영향은 예술에서 다루기 까다로운 개념이다. 여기에는 미학적 감흥이라는 관계와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흔적이 주변을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통과하지 못하고 거기 남겨진 실패한 지연. 물론 나는 <만추>를 보지 못했다. 그 영화는 도대체 어떤 영화였던 것일까. 그해, 그러니까 1966년 임권택 은 네 편의 영화를 찍었다. < 전쟁과 여교사 >, < 나는 왕이다 >, < 법창을 울린 옥이 >, 그리고 < 닐니리 > 그 중 <닐니리>는 필름이 분실되어 지금은 볼 수가 없다. 나는 여기서 임권택과 이만희 , 혹은 < 만추 >와 1966년의 영화를 서로 과도하게 가까이 다가오게 할 생각은 없다. 여기서 내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다만 이런 질문을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투를 빌려) 다소 잔혹하게 해보고 싶다. 임권택은 그해 겨울 <만추>를 보면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는 임권택의 영화들 사이에 세워진 선에 계속해서 칸막이 친 다음 거기서 전술적으로 빈틈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렇게 잠시 멈춰 세우고 그 안에서 예언되는 것에 귀 기울이면서 지금부터 전개되고 있는 것을 쳐다볼 수 있는 기회를 엿볼 것이다. 그렇다. 기회의 도래만이 사건의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형상. 각자의 정당성. 그것이 내가 노리는 것이다. 그때 어떻게 칸막이를 세울 것인가. 우리들의 삶은 예기치 않게 반복적으로 전과 후로 나뉜다. 그때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은 자리를 바꿀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이 순순히 이뤄지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는다. 종종 자리 바꾸기라는 잘못된 환원에 이끌려 희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운명이라는 자유. 자유처럼 보이는 운명. 하지만 매개 없이 우리가 어떻게 도약을 할 수 있겠는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자. 나는 몹시 위험하게 말하고 싶다. <만추>는 어떻게 출현한 것일까. 1960년대의 남한이 겪은 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 빈곤과 혼란은 영화를 찍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만추>는 오직 단 한 번, 거기서 나온 영화라고 나는 믿는다. 그때 거기 있었던 공통의 환경. 함께 주어진 조건. 매일 아침 바라보는 같은 풍경. 하여튼 임권택은 거기 있었다. 나는 약간 소설처럼 써보고 싶다. 그리고 그해 겨울 어느 날 극장에 가서 <만추>를 보았을 것이다. 고유한 현실성. 거기서 이만희는 낯선 장면을 출현시켰다. 세상의 비참함을 함께 살아내면서 <만추>는 갑자기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기호의 체계를 1966년이라는 현실 안에서 창조해냈다. 가능해진 새로운 이미지의 동작들. (후렴구처럼) 다시 한 번. 극장 안의 객석에서 그걸 구경하는 임권택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거기서 결핍된 그 무엇에서 생겨난 공감의 틈. 나는 <만추>가 그때 임권택에게 무언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던 (영화사 속에서 사라져버린!) 이 영화를 그렇게 오랫동안 기억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즉각적으로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만추>라는 경험은 그의 영화 안에서 (몹시 양보를 해서 말한다면, 수많은 영화중의 하나로서의) 증환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언제 활동을 개시하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의미를 만들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마 그 자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와 그것을 보는 사람 사이에는 부름의 관계가 있다. 누가 누구를 부르는지 알 수 없게 서로 부르면서 그에 대해서 대답을 할 때 벌어지는 예술적 감응의 프로그램은 끝내 겹치지 않는 평행선 사이에서의 강도가 만들어내는 공명의 이접적 종합이다. 소유하려는 유혹. 맹렬한 저항. 그 사이에서의 각자의 인정투쟁. 종종 부서지는 방어선. 이때 우리는 상황을 생각해야 한다. 다시 한 번 1966년 12월 3일. 그건 1954년 9월 7일 <이탈리아 여행> 다음날과 같은 의미에서이다. 가까스로 한국전쟁의 풍경이 지워져가고 있던 시간. 최인훈 이 <광장>을 썼고, 김수영이 시에게 침을 뱉었으며, 김승옥 이 무진에 여행을 다녀온 다음 1964년 서울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다른 사내들과 함께 그해 겨울 어느 날을 하릴없이 보냈다. “버스에 올라서 창으로 내어다보니 안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는 눈을 맞으며 무언지 곰곰이 생각하며 서있었다” 1966년, 말하자면 그 언저리의 시간. 그 해 17살 소녀 황옥순은 학교도 그만 두고 어머니와 세 동생의 학비와 생계를 위해서 공장 일에 매달리지만 반복되는 빈혈과 빚에 시달리면서 자살을 결심한다. 함께 수면제를 먹은 두 동생은 죽고 살아남은 그녀는 법정에 선다. 임권택은 황옥순의 이야기를 영화로 찍었다. 나는 다소 이상하게 이 영화를 다시 불러보고 싶다. 임권택은 <법창을 울린 옥이>를 <만추>를 보기 직전에 찍었다. 다시 첫 번째 길로 되돌아오자. 우리들은 영화에서 정감을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할까. 이 문제를 건드리는 것에 대해서 비평은 항상 창백한 표정을 짓곤 했다. 혹은 이론은 자신의 영역 바깥에 내버려두곤 했다. 하지만 정감은 감각과 함께 영화와 세계가 서로 접촉할 때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경이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분석에 앞서 거기에 있는 것. 그것 그대로의 체험을 말하는 중이다. 이때 우리들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오류. 할리우드에서 작성된 시나리오 기계들은 그것을 여러 가지 규칙에 따라 조직한 다음 눈물의 형태로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때 가장 이상한 것은 아직 영화의 촬영이 시작도 되기 전에 정감을 건드릴 수 있다는 전제이다. 그렇다면 촬영 ‘이후’의 영화의 ‘제작’ 과정은 정감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 것일까. 반대로 정감은 자율적으로 활동한다고 철학자들은 주장한다. 이때 두뇌는 어떻게 활동하는 것일까. 나는 이 질문을 여기서 실험해보고 싶다. 단순하게 말하면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줄거리를 먼저 읽은 사람들에게 다소 당혹스러울 만큼 슬프지 않다. 아니, 차라리 이 가련한 소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도 보는 사람을 거의 울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 영화는 비극이지만 슬픔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 말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슬픔을 불러일으키는데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불러일으킬 생각이 없(는 것처럼 영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아이러니를 동원한 희극으로 슬픔을 조롱하거나 역설적으로 고양시키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그냥 하나의 세계가 있다. 1966년의 남한. 그런 다음 거기서 긴장상태를 내내 유지하면서 영화가 그것을 견딘다. 만일 슬프다면 그건 이 영화가 그것을 견디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서도 하여튼 무시무시한 무게로 짓누르는 세계의 비참한 중력 아래서 간신히 자신의 시청각적 기호들을 동원해서 자기가 품은 생명을 유지시켜나가는 모습 때문일 것이다. 실내장면을 찍은 세트 안에서의 몇 개의 씬을 제외하면 이례적일 만큼 대부분의 장면을 길거리나 공장, 이리저리 이어진 골목길, 그 주변의 가게들, 때로는 (내가 영화를 보면서 명백히 알 수 있었던 장소인)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진행되는 <법창을 울린 옥이>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영향 아래 놓여있으면서도 그걸 스스로 알지 못한 채 다소 멀리 놓여있는 영화이다. 때로는 그게 너무 희미해서 종종 끈을 놓쳐버린 것만 같은 느낌을 주면서 상투적인 드라마에 빠지려들다가도 현실이 부여하는 실재의 어떤 순간에로 재빨리 돌아오곤 한다. 이때 영화는 기괴한 모순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임권택 은 더도 덜도 없이 여기서 비참한 세계의 조건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황옥순과 그녀의 가족을 그저 마주본다. 물론이다. <법창을 울린 옥이>를 보고 있으면 다른 목표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물론 이 가족은 1966년의 남한에서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부서지고 있는 가족. 수 없는 자살. 그런데 거기서 단순하게 그저 하나의 사례라는 차원에로 환원될 수 없는 황옥순의 사건 앞에서 임권택은 이 이야기 안의 무언가가 잘 진행되지 않는 순간들과 반복적으로 마주친다. (나는 다소 바쟁같은 말투로 다시 말하고 싶다) 영화로 잘 옮겨지지 않는 현실의 표면. 그때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 생겨난 곡선 사이를 영화는 자기의 점근선으로 계산해야 한다. 위치의 함수. 체자레 자바티니의 경고. 여기서 영화는 세계를 은유의 방법으로 다루면 안 된다. 쳐다볼 때는 아무 모순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서 질문을 시작하자마자 이 세계는 표면 아래 있었던 종종 기괴하고 음산하며 때로는 도착적인 대답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단순하게 보이는 이 사건은 거기서 단지 가난 때문에 생겨난 자살이라는 원인을 초과하는 대상의 과잉과 마주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자살은 영화라는 드라마가 만들어낸 허구적 결과가 아니라 반대로 (실패한) 자살이라는 현실 안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영화라는 드라마가 동원된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 저편에서 나타난 정감과 감각의 위기. 이때 임권택은 이 과잉을 어떻게 견뎌야 할 것인가,라는 힘겨운 문제를 만난다. 사건의 개요, 혹은 재빠르게 요약된 줄거리. 옥이는 어머니와 중학교에 다니는 남동생, 그리고 그보다 더 어린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는 남동생과 여동생을 거의 먹여 살리다시피 한다. 어머니는 식당이 팔리면서 일을 잃었고 집세를 내지 못해 그나마 있던 판잣집에서 쫓겨난다. 직장에서도 제대로 먹지 못해 생긴 빈혈로 종종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진다. 게다가 매달 빌린 돈을 받으러 아줌마들이 찾아와 아귀처럼 괴롭힌다. 그녀는 남자친구 철이를 군대에 보낸 다음 날 수면제를 사서 음독자살한다. 하지만 그녀가 먹는 걸 보고 맛있는 군것질 거리라고 생각한 동생들이 함께 먹은 다음 어린 두 명의 동생이 죽고 그녀는 살아남아서 법정에 선다. 황옥순 이야기의 시작은 맨 뒤에서, 그러니까 법정에 선 옥이에서 시작한다. 나는 이 구조가 단지 플래시백으로 이루어졌다는 데서 멈추는 것보다 더 멀리 밀고 나아가고 싶다. 여기서 시간은 단지 이야기의 경제성 안에 머물지 않고 반대로 우리에게 질문하기 시작한다. 처음은 어디인가요? 그런 다음 중간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리고 마지막 결정의 순간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나요? 옥이는 오로지 자신의 행동으로 그것을 차례로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 매 단락마다 생명은 질문할 것이다. 그때마다 생명의 정감. 그리고 삶의 감각.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가 찍을 수 없는 것들. 비가시적인 선들의 매듭. 그러나 임권택 은 그것을 다루어야만 한다. 좀 더 단순하게 설명해보자. 신문에서 이 사건의 기사를 읽었을 때 그녀가 어떤 법정형을 언도받을 것인가 보다는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그런 결심을 한 다음 행동에 옮겼을까, 를 먼저 질문할 것이다. 황옥순은 어린 두 동생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자신만 살아남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법의) 판단이 아니라 (행동의) 과정이 궁금해진다. 말하자면 삶과 자살 사이의 틈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때 우리들의 귀납적 호기심은 영화의 구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처음에는 법정에서 사건의 개요를 알려준 다음 플래시백으로 맨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원래의 자리까지 진행된다. 말하자면 영화는 이 과정의 반복이다. 이때 핵심은 검사와 변호사가 서로 반대의 입장에서 그녀의 죄를 기술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가 궁금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남은 것은 황옥순의 변론이다. 그러나 영리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설명하는 대신 플래시백을 이용해서 그녀의 기억의 연대기 안으로 들어간다. 법정에서 황옥순을 지켜보던 이들은 사건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물론 결론은 나쁜 효과일 것이다. 자살이라는 행동. 그때 그녀에게 무엇이 명령을 내렸을까. 여기서 임권택에게 남은 것을 별로 없다. 단 하나로 귀결되는 행동. 피하고 싶지만 무슨 수를 써도 피할 수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까지 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시청각 기호들.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과정의 방법을 보는 영화이다. 플래시백의 첫 장면. 법정에 선 옥이를 위해 변호사가 재판장과 검사에게 선처를 호소할 때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서 본다. 그때 그녀가 떠올리는 것은 함께 수면제를 먹고 죽은 두 명의 동생이 아니라 요란한 소리를 내는 기름을 잔뜩 친 콘베어 벨트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톱니바퀴이다. 다소 기괴하게도 그런 다음 영화는 옥이의 슬픈 감정을 지은 표정을 보여주는 대신 종종 소스라치는 듯한 두려움에 질린 그녀의 이 표정(close_up)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녀의 놀란 표정은 다시 한 번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짓는 두려움처럼 보인다. 두 번의 자살. 혹은 자살의 반복. 임권택 은 지금 그 일을 수행해야만 한다. 나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임권택의 영화, 아니 < 잡초 > ‘이전’이라고 말해도 괜찮은데, 이상할 정도로 볼 때마다 그 세계가 어두침침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그 ‘이후’의 영화가 환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인상이라는 부정확한 말로 설명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그런 ‘다음’에는 점점 임권택의 영화는 그 어둠 속에서 빛의 모델을 찾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어두침침하고 게다가 그 빛은 가냘프고 종종 거의 꺼져가는 것 같거나 희미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비로소 시간들이 가시화되기 시작했고 역사가 이미지로 떠돌기 시작했다. 나는 그 빛을 임권택이 움켜쥐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빛들이 두 개, 혹은 세 개, 그렇게 점점 많아질수록 임권택의 영화 안의 어둠은 점점 중성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임권택의 영화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세계에 잠겨있는 밤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생명의 빛이 꺼져가는 밤, 그런데 아직 살아있다. 이보다 더 두려운 밤이 있을까. 그때 임권택 이 이 어둠 속에서 견디는 방법은 옥이를 동정하는 대신 (대부분의 영화들은 그렇게 한다) 이 상황에서 느껴보는 옥이의 정감을 약간 기괴하게 쳐다본다. 이 참담한 상황의 수면 아래 옥이가 느껴보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를 물어볼 때 현실은 이상하게 비틀려 보인다. 이야기는 진행되다 말고 플래시백 속에서 다시 플래시백이 한 번 더 나온다. 공장에서 일을 하던 옥이는 화창한 점심 휴식 시간에 운동장에서 다른 직공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벽에 기대어 서서 드럼통에 담긴 물에 작은 돌을 던진다. 수면에 파문이 일어나면 좋은 시절의 시간 안으로 들어간다. 전형적인 시간의 입구. 옥이가 아버지와 함께 부유한 집에서 보냈던 행복했던 시간. 여기서 의미의 흐름에 주목을 해주기 바란다. 이때 이 장면은 단지 기억라고 부르기에는 이상한 배열을 보여준다. 마치 옥이의 작은 돌을 집어 던지는 행동에 감응이라도 한 것처럼 온 가족이 모여서 홍난파가 작곡한 ‘퐁당퐁당’을 부른다.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냇물아 펴져라, 멀리 멀리 퍼져라, 건너편에 앉아서 나물을 씻는 우리 누나 손등을 간질여 주어라” 나는 약간 좀 전의 말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이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옥이의 세 명의 동생들이다. 물론 그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세 명의 동생들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서 옥이를 향해서 마치 그녀에게 그 노래를 바치듯이 부른다. 아버지는 그녀 곁에 서서 그 노래를 아코디온으로 반주하고 있다. 온 가족의 중심. 그때 옥이는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자수를 놓으면서 그 노래를 음미한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환기시키고 싶다. 옥이는 그 노래를 따라 부를 생각이 없다. 그저 그들의 행동이 지닌 의미를 잘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때 어머니는 어디로 간 것일까. 옥이는 마치 그 아이들의 어머니이기라도 한 양, 마치 곁에 선 남자의 아내이기라도 한 것처럼 보인다. 이 모습에는 어떤 결핍도 없이 그 자체로 완성된 가족의 모습처럼 보인다. 이 장면이 나올 때 만일 동생들만 아니었다면 나는 그만 옥이가 결혼해서 행복한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이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야 부엌에서 어머니는 과일을 모두 깎은 다음 접시에 받쳐 들고 나온다. 사과는 구태여 부엌에서 깎아야 할 이유가 없는 과일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한 것은 이 장면에서 노래를 부를 때 어머니를 포함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왜 그런 동선이 필요해진 것일까. 영화는 두 번 다시 이 행복한 시간에로 돌아오지 않는다. 약간의 해석. 물론 이 플래시백은 옥이의 주관적 기억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동시에 행복한 기억 속으로 침범한 현실을 본다. 이때 이 현실은 일종의 의무라는 명령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약간만 앞으로 되돌아가보자. 우리는 여기까지 보다말고 갑자기 옥이가 왜 이다지도 열심히 가족을 위해서 희생적으로 일을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여기서는 단지 가난을 넘어서서 아직 미성년자인 그녀가 거의 죽음을 무릅쓰고 일을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일을 하다 말고 쓰러지고 의사가 더 이상 일을 하는 것은 생명에 위험이 올 수 있다고 경고를 하고 있는데도 제발 일을 하게 해달라고 매달린다. 그런데 이 생명을 건 하소연은 그녀의 자유로운 의지의 결정이었을까. 그녀에게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아무도 명령하지 않는다. 누가 그녀에게 그런 의무의 명령을 내리는 것일까. 나는 옥이의 플래시백에서 그녀가 가족 안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 자리가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이 장면은 행복한 시간으로 변장하고 나타나서 황옥순에게 내리는 (유교라는 이름의) 장남(長男)의식의 명령에 다름 아니다. 마치 이 플래시백 장면에 맞대응이라도 하는 것만 같은 현실의 장면이 나온다. (둘째이지만 장남인) 중학생 남동생이 나쁜 친구들의 꼬임에 빠져 소매치기를 하다가 경찰에 붙잡힌다. 담임선생님과 함께 경찰서로 간 옥이는 남동생이 훈방 조치된 것을 보고 다시 공장에 돌아갔다가 (남자친구와 짧은 데이트를 한 다음)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온다. 남동생이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냐고 묻자 어머니는 어쩐 일이냐고 반문한다. 그러자 옥이는 그날 낮의 이야기를 한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갑자기 역정을 내면서 그녀를 꾸짖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대사) “아니, 그 지경이 된 아이를 혼자 보냈단 말이냐, 네가 데리고 오면 다리가 썩는다더냐, 허리가 휜다더냐” “공장 시간에 늦는데 제가 어떻게 데리고 와요” “하루 좀 쉰다고 떼돈을 놓치겠니, 실직을 당하겠니, 그 자식이 어떤 자식인데 그렇게 소홀히 한단 말이냐,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는 이런 꼴 못 본다, 못 봐” “소홀히 하긴 누가 소홀히 한다고 그러세요” “경찰서까지 갔다 온 아이를 홀홀히 보내고, 어쩌니 저쩌니 해도 조상 제사 볼 놈은 그 놈뿐이다. 늘그막에 의탁할 놈은 그 놈 뿐이란 말이다” 사실상 이 집은 이미 거의 부서진 가족의 모습으로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다. 영화에는 단 한 번도 조상 제사를 치르는 장면이 나오지 않으며 어머니의 친정과 시댁 식구들, 혹은 친척들이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가까이 살고 있)는데도 그들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물론 그들도 가난으로 남을 돌볼 겨를이 없어서일 것이다. 이때 어머니가 옥이를 야단치는 말 속에서 지금 집안을 간신히 버티게 일을 하는 옥이는 갑자기 미래의 시간 속에서 괄호 쳐진다. 이 두 개의 장면 사이의 차이에는 명령을 수행하는 옥이의 행복한 시간을 기억하는 플래시백과 현실의 네트워크 안에서 호명하는 어머니의 진술 사이에서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의 심연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구태여 그 호명을 플래시백에서 이미 완결된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 과잉의 잉여처럼 나타난 어머니가 한다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명령 속에서 기다리는 최후의 구원을 약속하는 시간은 결국 오지 않을 것이다.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몇 차례를 반복해서 보아도 언제 옥이가 자살을 결심했는지가 분명치 않다. 단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장면만이 있다. 임권택 은 그 결심의 장면을 찍지 않았다. 물론 상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옥이는 무심결에 13일에 밀린 빚을 갚겠다고 매일처럼 집이고 공장이고 찾아와서 괴롭히는 이웃 아줌마들에게 약속을 했고 그날이 다가왔을 때 약속을 이행할 수 없자 자포자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자살을 해서 이 빚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그 몫은 고스란히 가족에게 넘겨진다. 그런데 지금 그걸 누가 갚을 수 있을까. 결국 결론은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여기에는 이제까지 옥이가 짊어져야한다고 믿었던 책임에 대한 포기가 있다. 이제 그 자리는 빈자리에요. 텅 빈 장남의 자리. 서로 다른 두 개의 층위의 네트워크의 교차. 물론 그 장면에서도 자살의 결심은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찍지 않았다 할지라도 옥이는 어느 순간에 결심했을 것이다. 나는 그 결심의 순간이 어머니가 옥이에게서 갑자기 의무를 빼앗아가는 이 장면이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희생이 무의미하다고 선언할 때 그것은 그녀에게서 의무의 명령이 철수한다는 것을 뜻한다. 옥이는 그 순간 자신을 세상 안에서 버티게 만들어주었던 유일한 초자아의 버팀목이 사라져버리고 갑자기 어둠 속으로 던져졌을 것이다. 혹은 어둠 안으로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S#1 S#2 이제 남은 것은 옥이의 자살이라는 행위뿐이다. 이때 자살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여기서 비로소 자기에게 내려진 명령에서 벗어나 자기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행동이 옥이의 동선을 작동시키고 있다. 모든 인연과 결별하는 행위. < 법창을 울린 옥이 >의 마지막 시퀀스 전체는 작은 빛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임권택 의 모든 영화중에서 가장 어둡지만 (몹시 기괴하게도) 동시에 거의 유일하게 기독교적인 구원에 귀 기울이고 있다. 군대로 떠나는 철이와 마지막 밤을 보내고 난 다음 새벽에 두 사람은 버스 정류장으로 함께 천천히 거의 멈출 듯이 걸어온다. 아, 제발 멈춰 주세요. 당신은 지금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약간 높은 데서 내려다보듯이 멀리서 보이는 두 사람. (high_angle_long_shot) 그때 멀리서 난데없이 교회에서 새벽 종소리가 들린다. 자살은 하느님 앞에서 하는 모든 행위 중에서 가장 나쁜 행위이다. 우리는 지금부터 옥이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다. 명백히 이 동네에 살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영화는 교회 종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나는 지금 옥이라고 써야 할 자리에 영화라고 잘못 쓴 것이 아니다. 이때 간절하게 교회는 종을 치면서 옥이의 죽음에 간섭하려고 한다. 아직 이른 길거리는 한산하고 그들이 걸어온 길은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있다. 두 사람의 발걸음. (close_up) 이상하게 두 사람은 약속한 것이 아닌데도 서로 발을 맞춰 걷는다. 말하자면 두 사람의 마음의 쇼트. 어떤 투명성. 하지만 그들은 지금 헤어지기 위해 걸어가는 중이다. 그런 다음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쇼트가 나온다. 갑자기 남자들이 얼어붙은 듯이 거리에 서 있다. 그래서 옥이와 철이가 그들 사이에 들어가서 함께 설 때 마치 정지된 화면 사이로 들어서는 것만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다시 한 번 멀리서 들리는 종소리. 멈춰 서버릴 것만 같은 세상.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영화는 그녀의 행동을 멈추기 위해서 무언가 필사적이 된다. 나는 임권택이 생명을 소홀히 다루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그저 소멸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반복적으로 보았다. 꺼져가는 빛. 사라져가는 세상. 그때 화면 안으로 침범하는 버스 때문에 서 있는 그들이 출근하기 위해 거기 기다리고 서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버스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올라타지만 철이는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 마치 출근하는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아니 차라리 그들이 곁에 존재하지 않기라도 하듯이 옥이와 철이는 서로 마주본다. (shot_reverse shot) 그때 철이는 (다소 뜬금없이) 옥이에게 마지막 인사처럼 간곡하게 말한다. “마지막 부탁이 있는데, 건강해줘” 우리는 이제부터 옥이가 할 일을 알고 있다. 물론 이 말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철이의 작별인사이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 종소리에 이어서 옥이의 자살을 말리는 두 번째 시도이다. 이때 이 말은 동시에 여기서 정반대로 기능한다. 이제까지 완전히 잊고 있던 사실, 옥이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만들면서 이제 문득 그 시간이 왔음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버스가 도착하고 철이가 떠나갈 때 두 개의 쇼트를 교환한다. 하나는 버스에 올라타서 철이가 바라보는(point_of_view) 옥이의 멀어져가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옥이가 바라보는 멀어져가는 버스의 모습이다. 멀어져가는 옥이와 멀어져가는 버스의 비대칭. 하지만 이 설명에는 놓친 것이 있다. 이때 단순하게 멀어져가는 옥이와 멀어져가는 버스로 교차시키지 않고 갑자기 카메라가 옥이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그런 다음 옥이가 버스를 쳐다보았을 때 이미 그 버스는 사라지고 난 다음이다. 이 쇼트의 교환은 매우 기괴하게 보인다. 철이는 멀어져가는 옥이를 보았지만 옥이는 멀어져가는 철이를 보지 못했다. 이때 그 둘 사이에 개입해서 다가가는 카메라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사이에 낀 자율적인 운동. 그녀를 본다기보다는 다가간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는 동작. 하지만 이때 철이는 멀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마치 반작용처럼 다가간 카메라. 마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는 듯한 이 운동이 일깨우는 것은 정반대로 둘 사이의 텅 빈 공집합의 효과이다. 여기에는 어떤 교환도 없으며 그래서 이 운동은 다가간다기보다는 차라리 밀쳐내는 듯한 반작용의 힘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진다. 하지만 운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제부터 옥이가 자살로 향하는 짧은 발걸음을 함께 한다. 옥이는 이 영화에서 몇 번이고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그러나 매번 멀리서 지켜보거나 그 앞을 지나쳐가거나 이미 지나친 옥이를 쳐다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처음으로 옥이의 발걸음을 따라 함께 걷는다. 그 발걸음이 멈추는 것은 그녀가 약국으로 들어섰을 때이다. 이때 영화는 자기의 무능력에 대해서 앙상해진다. 교회의 종소리. 철이의 마지막 작별인사. 그저 카메라는 그녀와 동행할 뿐 그녀를 막을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 대신 할 수 있는 마지막 침묵을 지킨다. 영화는 옥이가 수면제를 사는 장면을 찍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약국 앞에서 서성거리지도 않는다. 그 대신 그 시간에 집에 어린 두 남매를 남겨놓고 무언가 저녁 찬거리를 위해 채소라도 얻으려 시부모 댁으로 나서는 어머니에로 옮겨간다. 어머니가 막 집 문을 나설 때 옥이는 반대편에서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으로 들어온다. 그때 옥이는 집을 나서는 어머니를 구태여 부를 필요가 없는데도 그녀를 부른다. 여기서 예기치 않게 어머니를 향해서 다시 한 번 가볍게 카메라가 다가간다. 아니 차라리 옥이의 목소리에 실려서 어머니에게 다가가 그녀를 잡으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마치 그 순간 어머니가 무언가 낌새를 알아채고 옥이를 말렸다면, 아니 최소한의 위로를 했다면, 혹시나 완전히 버렸을 자기에게 주어진 명령을 일깨워주기만 했더라면 지금 하려는 행위를 멈추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저 무심하게 오늘 공장에는 왜 나가지 않았냐고 물어본 다음, 하루 쉬어야겠다고 대답하자,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그래, 라고만 말하고 힘없이 돌아서서 가던 길을 재촉한다. 그녀가 살 수 있는 두 번째 기회, 혹은 자살을 포기할 수 있는 기회. 여기서 걸어가는 어머니를 보는 옥이를 보는 카메라는 두 여자의 등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등으로 바라보는 이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덧없어 보인다. 어머니는 왼쪽 골목으로 들어서려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서 옥이 쪽을 돌아본다. 그게 어떤 제스처인지는 분명치 않다. 옥이가 한 대답에서 어떤 낌새를 느낀 때문인지, 아니면 공장도 쉬겠다고 말한 딸이 가엽고 미안한 마음인지, 그도 아니면 그저 멀리서 자기를 지켜보는 딸을 문득 쳐다본 것인지를 달리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멈칫 거리는 동작은 이상할 정도로 보는 사람의 마음의 파문을 일으킨다. 어머니가 골목을 돌아서서 사라지자 옥이는 이 불효막심한 딸을 용서하세요, 라는 마지막 작별인사를(voice-over_narration) 한다. 이때 이 인사는 몹시 이상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미 어머니는 골목으로 사라진 다음이다. 그러므로 이 인사는 텅 빈 골목을 향해 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아직도 남아있을 어머니의 발걸음의 흔적을 향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자 마치 어머니가 돌아보기라도 하듯이 골목에서 옥이를 쳐다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아니, 마치 골목이 옥이를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이상한 비인칭의 시선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비인칭으로 느껴보는 정감, 그리고 비인칭으로 건드릴 듯이 다가가는 운동의 감각. 우리는 이미 철이를 태운 버스가 떠나버린 텅 빈 거리가 옥이를 바라보는 장면을 보았다. 옥이는 누군가를 보는데 그녀가 보는 상대방은 그녀를 보지 않은 대신 길거리, 혹은 골목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그녀의 자살을 막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는 상황. 그때 영화는 옥이의 동선을 따라가는 대신 몇 번이고 다시 영화를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 번째 시작, 혹은 중단된 동선. 여기서 쇼트가 바로 이어지고 있는데도 옥이가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따라가는 대신 다음 장면은 두 마리의 병아리를 데리고 놀고 있는 두 어린 남매를 보여준다. 혹은 좀 더 정확하게 병아리를 보여준다. 옥이에서 병아리로 그냥 넘어온 두 개의 연속된 쇼트는(S# 1_S# 2) 옥이를 가여운 병아리처럼 보이게 한다. 어린 남동생은 병아리를 잡으려다가 그만 죽여 버리고 만다. 어이없는 죽음. 그때 옥이는 죽은 병아리를 보면서 마치 자기의 시체를 미리 보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옥이는 자기 시신을 거두듯이 그 병아리를 집 앞 멀리 모래사장에 작은 구덩이를 파서 묻어준다. 그때 오늘 새벽에 떠나간 철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voice_over) 이 병아리를 키워서 닭이 되면 다시 병아리를 낳게 될 것이며 금방 오백 마리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그 병아리는 옥이의 꿈을 무럭무럭 키워줄 거야, 라고 말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옥이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는 그 병아리를 모래 무덤에 덮어주는 것이다. 혹은 지금 꿈을 모래 무덤에 묻고 있는 중이다. 그런 다음 방에 앉아 옥이는 어머니에게 남기는 유서를 쓰기 시작한다. 임권택 은 여기서도 동일한 태도를 취한다. 유서를 쓰는 옥이를 바라보는 대신 재빨리 그 시간에 군것질을 하러 나간 어린 남매를 따라간다. 이때 우리는 매우 잔인한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어린 남매는 군것질을 하라고 준 동전으로 무엇을 사먹어야 할 지 망설이는 중이다. 이 아이들은 지금 거의 먹은 것이 없어서 몹시 허기진 상태일 뿐만 아니라 거의 군것질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오빠는 동전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하마터면 그 귀한 동전을 하수도 맨홀에 빠트릴 뻔 한다. 깜짝 놀란 오빠는 동전을 집어 들고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여동생에게 무얼 먹고 싶은지 묻자 번데기라고 대답한다. 오빠는 그러면 번데기를 산 다음 남은 돈으로 자기가 먹고 싶은 만나를 사겠다고 한껏 여유를 부리면서 말한다. 하지만 그 순간 다시 한묍영오活?떨어트려 이번에는 하수구를 덮어 놓은 맨홀의 구멍 속으로 정확하게 떨어진다. 거의 잃어버릴 뻔한 것을 되돌려준 다음 다시 그것을 빼앗아 갈 때 어린 남매는 잃어버릴 뻔 했던 것을 되찾은 기쁨 자체를 잃어버린다. 이제 어린 남매는 집에 돌아오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 손에 쥐어주었던 동전은 맨홀이 집어삼켰고 배고픈 아이들에게 어쩌면 오랜만에 일찍 들어온 옥이가 허기를 달랠 수 있는 무언가를 해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때 막 옥이는 수면제를 먹는 중이었다. 어린 두 동생은 제 시간에 도착했다. 왜 그 어린 두 동생은 그보다 좀 더 일찍, 아니면 차라리 (끔찍하게도 자살한 옥이의 모습을 보아야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행히 살아서 볼 수 있는 자리에 남아있을 수 있게) 늦게 도착하지 않은 것일까. 같은 말의 다른 질문, 어떻게 주인공 옥이의 죽음을 가로 막고 그들은 대신 죽음을 선택한 것일까. 비극적 상황 속에서의 비극적 도착. 그런 다음 두 개의 자리를 바꿔치운다. 죽음과 삶. 이때 이 신비로운 도착은 반대의 방향에서 다시 질문해보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두 동생의 도착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옥이는 병아리의 죽음을 본 다음 그 시체를 매장하면서 이미 자기의 죽음을 경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이 죽음의 과정 자체가 필요 없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때 이 세상에 남겨진 유일한 얼룩은 그녀의 어린 두 동생들뿐이다. 순결한 얼룩.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비참함을 알지 못한다. 여기서 유일하게 어린 두 동생만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벌어진 차이가 주는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럼으로써 이 비참한 조화를 어지럽히는 순결한 존재의 소멸을 목표로 했다면 이보다 더 정확하게 의도하지 않고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달리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이미 벌어진 사건의 메시지를 과도하게 밀고 나아갈 때 우리는 예기치 않은 외설적 지식의 이면과 힘겹게 다투어야 할 것이다. 원래의 광경. 그 모습을 본 막내 여동생이 방안으로 뛰어들면서 “언니 뭐 먹어”라고 묻는다. 이미 약을 먹은 옥이는 수면제에 취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저 비몽사몽간에 “아무 것도 안 먹어”라고 대답하지만 그 말은 배고픈데다가 이미 군것질 할 동전을 잃어버린 어린 두 남매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맛있는 거 있으니까 혼자 먹으려고 그러는 거지”라며 두 남매는 옥이의 손에 한 움큼 쥔 수면제를 빼앗기 위해서 함께 달려들어 손아귀를 벌린다. 이미 약에 취한 옥이는 허기진 두 남매로부터 수면제를 지킬 만한 힘을 빼앗긴 다음이다. 이때 거의 잠들어가는 옥이는 정반대로 마치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하듯이 눈을 커다랗게 뜬다. 그녀가 바라보는 두 명의 어린 동생들은 마치 아귀처럼 달려들어서 그녀의 손에서 수면제를 뺏으려고 한다. 죽어가는 옥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모습은 이미지 전체가 기형적으로 휘어서(mirror_focus) 마치 영화 전체의 얼룩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걸 바라보는 옥이는 두 동생을 가련하게 보는 대신 우리가 영화 맨 첫 장면에서 보았던 바로 그 표정, 그 커다랗게 떠진 눈, 두려움에 가득차서 바라보는 얼굴이 된다. 그때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환청처럼 들려오는 목소리들의 침입. 그런 다음 똑같은 기형적인 이미지로 그녀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모두들 옥이에 대한 원망으로 넘쳐나고 있다. 여기에는 환각이라기보다는, 환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투적인 이미지 뒤에 차라리 어떤 각성의 시선이 있다. 죽어가는 그 순간에조차 갑자기 현실이라고 불리는 환상의 장막을 찢고 그 틈새 사이로 얼핏 모습을 드러낸 진실이라는 외설. 가여운 옥이에게 자살은 거의 마지막 피난처였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이 산산조각 나고 난 다음 무의미해진 세상에서 그녀는 의무의 네트워크와 관계를 끊으려고 하지만 이번에는 예기치 않게 대신 두 명의 동생을 죽인 다음 죄의식을 안겨주고 다시 되돌려 보낸다. 그러므로 옥이는 두 번째 삶을 의무보다 더 무거운 죄의식으로 이제부터 살아가야 한다. (의무의) 감옥에서 출소하는 옥이는 지금 (죄의식의) 감옥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현실은 저 바깥에 동일한 것으로 머물러 있는 중이다. 옥이는 하여튼 그 안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이때 임권택 은 옥이의 삶을 다루는 대신 자살이라는 행위의 과정을 통해서 거기서 말하여지는 네트워크를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 그때 무언가 완강하게 그걸 거절하는 것과 마주치고 있다. 그건 직접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그 자리에 불려나온 황옥순의 자리이다.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무언가를 계속 보여주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무언가 절반만을 본 것만 같은 결여에 시달리고 있다. 그때 똑같은 무게로 임권택은 이 이야기가 주는 과잉과 마주쳐서 시달린다. 네오리얼리즘이 부여한 현실과 영화 사이의 부등가 교환의 법칙. 그때 중심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대답은 황옥순이라는 간편한 대답을 취하는 대신 그 중심의 안이 사실은 텅 빈 공집합이며 단지 그것이 부서지지 않게 가까스로 유지시키는 힘들의 상태 속에서 정감과 감각이 번갈아 나타난다는 사실만을 영화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불안정한 균형. 아니, 어쩌면 이건 균형이 아닐 지도 모른다. 중심이 검은 구멍이라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중심인 줄 알았던 얼룩을 지우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임권택에게 정감이라는 구멍과 그것을 느껴보기 위해 얼룩을 둘러싸는 감각의 활동은 점점 까다로운 질문이 될 것이다. 이 둘 사이의 간극. 그 사이의 공백 속에서 임권택은 느닷없이 맹렬하게 주체를 세워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어렴풋이 어느 순간, 아마도 내 생각에는 자살을 행동으로 옮겨가는 그 마지막 장면 전체에서, 사건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체가 도래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임권택은 느껴본다. 나는 거의 지워질 듯한 어둠 속에서 오로지 이 장면 안에서만 희미하지만 분명한 빛을 보았다. 알 수 없을 정도로 시적인 감흥을 느끼면서 영화의 기호들은 황옥순의 행위에서 분명하게 주체가 자기의 정감을 드러내 보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영화의 감각을 새롭게 일깨우는 힘을 따라 활동하기 시작한다. 몇 번이고 이 장면을 다시 보고 싶다. 분명히 임권택도 몇 차례이고 이 순간에로 되돌아오곤 했을 것이다. (계속) 1966년 100분 흑백 2.35 감독 임권택 아성영화사 각본 이종택 각색 이연진 촬영 김연욱 조명 이한찬 편집 김희수 음악 전정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