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자
- 감독
- Robert Ellis Miller
- 제작년도
- 1988
오래전 인간은 손으로 사냥을 하고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도구를 찾기 전까지 오랜 시간 그랬다. 한 쌍의 포크와 나이프가 입과 손 사이를 벌려 그 안에 식탁이라는 문화의 공간을 형성하기까지 기나긴 세월이 흘렀다. 폭력과 야만을 본질로 하는 인간은 그렇게 천천히 문명화의 과정을 밟았다. 미술가 안규철은 「손, 인간의 조건」이라는 글에서 한 인간의 생애 역시 인류의 문명화 과정과 닮아있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젖을 떼고 처음 배우는 숟가락질은 사람 구실을 하며 살아가기 위한 첫 규범이 된다. 숟가락질은 학교에 들어간 후 글씨를 쓰고 셈을 하는 방법과 때리거나 훔쳐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학습하는 것으로 변주된다. 그 지난한 훈련의 과정을 거쳐 인간은 손과 입 사이, 몸과 세상 사이의 “여백”을 얻는 것이다. 여백은 당연히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양육자에게 아이란 무엇보다도 밀착해 먹여 키워야 할 과제로서 존재하는 대상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난항을 겪는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존재만으로 자연스레 양분을 공급받다가 모체로부터 떨어져나온 뒤부터 자력으로 생명을 유지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밥을 먹는 행위는 독립된 주체로 홀로 선다는 것의 가장 원초적인 은유인지도 모른다. <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은 이 행위를 매개 삼아 모녀라는 관계의 가깝고도 먼 거리를 조망하는 영화다. 십여 년 전, 열다섯 살 채영은 섭식장애 진단을 받고 병동에 입원했다. 치료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거식증이 지나가자 폭식증이 찾아왔다. 엄마 상옥은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병의 근원을 이해하고자 씨름하는 시간을 보냈다. 김보람 감독은 원래 섭식장애에 관심을 가지고 다수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리서치를 진행하다, 오랜 시간 섭식장애를 앓은 당사자인 채영을 만나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이어트와 외모 강박이라는 익숙한 문법으로 이 질환을 읽으려는 시도를 일찌감치 거둔다. 대신에 채영 스스로 말하는 몸의 역사와 마음의 변화에 집중하며, 딸 채영과 엄마 상옥 두 사람의 관계를 다루기로 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섭식장애라는 표면적 징후 대신에, 삶의 밑바닥에서 오랜 시간 축적되어온 내면의 문제, 즉 가족이라는 복잡한 실타래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채영과 상옥은 서로의 상처를 드러내는 데서 출발한다. 오랜 시간 서로 말하지 않고 묵혀두었던 감정들이 카메라 앞에서 우연히, 어쩌면 카메라 덕분에 비로소, 조금씩 꺼내어진다. 섭식장애를 처음 앓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채영은 당시에 두려움이나 고통보다는 온몸으로 확신을 느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음식을 거부하거나 폭식을 하거나 구토를 하는 행위를 가장 적극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행위로 여겼다는 것이다. 상옥은 놀라움을 숨기지 않는다. “각본을 수백 가지는 써봤는데 지금 네가 말한 각본은 참 뜻밖이네.” 젊은 시절 사회운동에 투신했던 상옥은 1990년 이후 더 이상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좌절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지역으로 이주해 대안학교의 사감으로 일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데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았다. 학교 특성상 그곳은 채영을 학교 구성원들과 함께 키우는 공동양육의 공간이기도 했다. 이 영화를 관람할 무렵 나는 우연찮게도 비비언 고닉이 쓴 『사나운 애착』을 읽고 있었다. 평생에 걸친 어머니와의 애증을 다룬 이 자전적 에세이는 뉴욕 브롱크스가에 위치한 가난한 이민자들의 다세대주택을 배경으로 한다. 저자가 일평생 보고 자란 것은 엄마를 포함한 이웃 여성들의 삶이었다. 고닉은 타인들과 밀착된 그 어린 시절이, 그리고 벗어나고자 했으나 어느새 거울이 되어버린 엄마의 이미지가 자신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날카롭게 분석한다. 채영 또한 남달랐던 유년 시절의 환경을 의미심장하게 복기한다. 채영은 주변의 인물들을 통해서, 특히 그러한 공동체의 삶으로 자신을 이끈 엄마 상옥을 통해서 일찍이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법을 배우기에는 너무나 불안정한 환경이었다. 상옥은 주변을 돌보느라, 여성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에 집중하느라, 어린 채영의 곁에 있어주지 못할 때가 잦았다. 세월이 흘러 카메라 앞에 선 채영은, 엄마가 상정한 기준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막연한 불안이 자신을 오래 괴롭혔음을 털어놓는다. 당신의 삶이 실패였음을 인정하길 원했었다는 날선 말을 뱉은 후였다. 섭식장애를 앓는 환자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성별화된 질병이라는 점에서 이 현상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것이다. 『명랑한 은둔자』를 쓴 캐럴라인 냅 역시 자신의 삶을 추락시킨 알코올 중독과 섭식장애를 어머니와의 관계에 연결 지어 이야기한 바 있다. 이러한 서사와 종종 조우하는 것이 아마도 완전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 여성의 삶에서 매 순간의 선택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자기 선언의 표명이자 실패이기 때문이다. 채영과 상옥의 회고는 세대를 넘어 할머니의 시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돌이켜보면 몸과 마음을 억압당하는 시대를 살았던 채영의 할머니도 먹은 것을 스스로 게워내곤 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자기 몸 하나밖에 없어서였다. 환경과 시대는 달라도 세상과 불화하는 여성이 자신의 육체라는 최전선 위에서 부대끼고 고전하는 과정은 서로 닮아있다. 괴로운 기억도 날선 말들도 공동의 식탁 위에 올려지고 난 뒤에는 조금쯤 무게가 가벼워진다. 성인이 된 채영은 일을 하러 호주로 떠나고 상옥은 딸의 진정한 독립을 응원한다. 흥미롭게도 채영이 선택한 일은 타인을 위한 식사를 만들고 식탁을 준비하는 일이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누군가 낯선 이를 먹이는 일이고, 다른 존재가 무사히 일상을 유지하도록 돕는 일이다. 채영은 자신에게 요리란 조금 더 괜찮은 사람, 조금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준비운동’이라고 말한다. 그 일 앞에서 도전과 실패를 감행하며 삶을 다시금 써 내려가는 채영의 모습은, 회복의 과정이란 결코 자기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실감케 한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조용히 듣는 귀의 역할을 고수하기에 함부로 진단을 내리지도, 첨언하거나 평가하지도 않는 미덕을 지녔다. 그러나 고민과 결단의 순간들을 짐작하게 하는 편집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족사를 다루는 인물 다큐멘터리가 흔히 취하는 전략에 비추자면 이 이야기는 사적인 정보를 무척 적게 말한다. 다큐멘터리가 결국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지로 시선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그러한 선택과 집중이 이 영화를 여성들의 내면세계에 관한 보다 섬세하고 집요한 연구에 가깝게 만드는 것 같다. 재밌는 건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 어딘가 투명한 물음표가 계속 따라다닌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감독의 전작인 < 피의 연대기 >와는 무척이나 다른 형식과 화법을 가졌는데도 그 인상만은 두 작품이 궤를 같이하는 느낌이다. 그건 영화가 지닌 시선이 정제되고 흐트러짐 없는 ‘서술자’의 시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물을 대하는 카메라는 조용하지만 존재감이 꽤 있다. 대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때로는 갈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이야기를 듣는다. 신중한 호기심이라고 할까. 그 특유의 시선 때문에, 카메라가 관찰과 기록의 도구가 아니라 함께 질문하며 답을 구하는 ‘동행자’의 역할로 여겨지는 것이다. 사실 이 카메라의 미묘한 존재감은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중요한 요소로 배치된다. 촬영 초반 일대일 상담에 응한 채영은 아직 카메라의 존재가 어색하고 낯설다. 지금 감정이 어떠냐고 인터뷰어가 거듭 묻자 채영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불편함이 드러난다. 이 시퀀스는 의도했든 아니든 인물 다큐멘터리가 지닌 근본적인 고난, 상처를 지닌 타인의 삶에 깊숙이 개입해야 하고 환부를 들추어야만 하는 어려움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김보람 감독의 영화에는 그 어려움을 딛고 개진해 내는 힘 또한 있다. 영화를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사이에 좋은 질문이 있는 한 카메라도 있고, 이 카메라가 언젠가는 양쪽 모두에게 답을 줄 것이라는, 어떤 믿음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영화가 완성되고 공개된 이후, 채영은 GV에서 영화를 통해 깨달은 사실 하나를 이야기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상옥의 눈빛이 그렇게 애틋한 줄 처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평생을 보아왔지만 스크린을 통해 새롭게 자각하게 된 엄마의 시선이다. 딸은 그 시선을 경유해 자신의 얼굴 또한 새롭게 받아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중간에는 인서트컷으로 수영장 물속에 잠겨있는 채영의 얼굴이 잠시 등장한다. 이 이미지는 그가 최근 쓴 자서전 『이것도 제 삶입니다』의 표지로 사용된 사진이기도 하다. 눈을 감은 채영의 얼굴이 사뭇 편안해 보인다. 모녀 관계란 엄마의 뱃속에서 하나였던 두 몸이 별개의 개체로 분리된 직후부터 시작되는 분투의 여정이다. 채영은 이제 스스로의 삶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짐으로써, 새롭게 자각한 얼굴을 가짐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숨쉬는 법을 배우고 있는 듯하다. 영화의 엔딩은 채영과 상옥이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다. 간단하게 차린 제사상 앞에 앉은 두 사람은 술잔을 들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명복을 빈 뒤 상을 맞들고는 거실로 옮긴다. 죽은 부모를 위한 제사상은 살아있는 두 모녀의 아침식사를 위한 식탁으로 역할이 바뀐다. 이 식탁을 내리사랑의 은유로 읽어야 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대신에 식탁이, 어쩌면 둘 사이의 공간이, 그렇게 언제든 임시적인 거처일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가 그러하듯이, 식탁은 두 타인의 사이에 잠시 어떤 공간을 마련해준다. 너무 크고 거창하지만 않다면, 둘러앉은 이들이 이렇게도 차려보고 저렇게도 차려볼 여지가 있다면, 식탁은 예절과 격식의 자리만이 아니라 적당한 환대와 우정의 자리도 될 수가 있다. 네모난 식탁을 사이에 두고 채영은 상옥과의 관계에 대해 잠정적 결론을 내려본다. “평행성도 좋지, 나란히 가는 거니까.” 평행선이 그려지는 곳에서 두 존재는 억지로 겹치거나 지나치게 멀어지지 않을 것이다. 적당한 거리에 서로를 두고서 오랫동안 같은 방향을 향해 걸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비비언 고닉 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 믿음을 지탱해줄 튼튼하고 평평한 식탁 같은 것. 어떤 가족에게 필요한 건 대단한 사랑이나 헌신이 아니라, 바로 그런 중간지대의 존재다.
올해는 유독 배우들의 육체가 활동하거나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이 그 영화를 지정한다는 느낌을 받은 영화들이 많았다. 배우의 몸이 빚어내는 고요하거나 육중한 리듬, 마찰하거나 돌파하는 신체가 지녔던 파열음의 강도, 장르와 무관하게 육신의 움직임에서 비롯된 우스꽝스럽거나 숭고한 제스처가 우리를 압도하는 장면을 통해 영화들이 지금 무엇에 집중하고 있으며 결국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를 찾게 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가령 호아킨 피닉스의 둔탁한 어깨가 거친 호흡을 따라 오르내린다. 폭력으로 점철된 유년 시절과 떨쳐버릴 수 없는 전장의 기억, 죽음의 공포는 온몸에 난 흉터에 새겨졌고, 욱신거리는 어깨를 감싸고 앉아 있는 그의 등은 고통을 즉자적으로 지시한다. < 너는 여기에 없었다 >(2017)는 트라우마를 짊어진 피닉스의 육체가 매번 스크린이라는 면에 부딪히면서 우리를 향해 밀고 나오는 과정으로 보인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사뿐한 발걸음과 우아한 손짓은 공기보다 가벼워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유령처럼 집안을 부유한다. 그가 걷거나 앉는 섬세하고 신경질적인 동작에 이어 병상에 누워 허공을 바라보다가 급기야 여인의 무르팍에 엎드리는 무력함으로의 이행은 한 사람의 삶이 사랑과 집착, 광기와 허무로 인해 허물어지는 순간을 바라보도록 만든다. < 팬텀 스레드 >(2017)는 맹렬하게 달리는 자동차의 가속도로 인해 흔들리고 팽창하는 가시적인 세계와 스크린에서 서서히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는 쇠약한 몸짓의 대비를 통해 지독한 사랑의 파멸을 목도한다. 노래는 기막히게 잘 부르지만 잔악하고 경박하기 이를 데 없는 카우보이는 영혼이 되어서도 노래를 부르며 하늘로 올라가 프레임 안을 떠나지 못하고, 사지가 절단되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청년의 신체는 아름다운 낭독 솜씨에도 불구하고 닭보다 못한 효율성 때문에 폐기처분된다. 온갖 풍파를 겪은 노인은 처진 뱃살과 늘어진 근육을 동원해서 끈덕지게 금광을 파헤친다. 땅을 파는 행위만으로 고단한 운명을 넘어서는 불멸의 순간이 제시되고, 유령마차의 탑승객과 같은 인물들이 안개 자욱한 집으로 들어서면 그들의 육체 또한 폐쇄된다. < 카우보이의 노래 >는 노래를 하고 사막을 횡단하고 이야기를 들을 사람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서부라는 장소보다 그곳에 머무는 다양한 신체들이 몰두하는 행동으로 인해 몹시 분주하고 재미나면서도 적막하고, 쓸쓸하면서도 장엄하다. 당당한 걸음으로 활보하는 톰 행크스와 머뭇거리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메릴 스트립의 보폭이 같아지던 순간은 < 더 포스트 >(2017)에서 거대한 인쇄소로 들어오는 빛, 신문이 생산되는 과정, 정렬된 활자판과 문장으로 조합하는 행위, 그것을 가능케 하는 숙련공들의 빈틈없는 노동과 마주하는 장면이다. < 풀잎들 >(2017)에서 카페를 들어서고 나가는 배우들의 걸음걸이와 느긋한 정도, 골목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 쪼그리고 앉아 대야에 심긴 잎사귀를 바라보는 각자 다른 웅크림의 정도와 몸의 기울기는 끊임없이 말을 이어가고 엿듣고 기록하고 상상하는 공간에 지금, 이곳의 애처롭고도 스산한 삶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다큐멘터리의 카메라 앞에 선 육신은 시간의 흐름 안에 놓인 존재임을 매번 일깨워준다. 사라졌거나 곧 사라질 공간을 기억하는 행위는 타인의 말을 듣고 카메라에 담아내는 끈기와 인내, 마을과 사람들의 얼굴을 찾아다니면서 함께 걷는 발걸음, 혼령을 달래기 위해 헤매는 몸짓들이 된다. 왕빙의 < 사령혼 >(2018)에서 감동적인 순간은 3부에 등장한다. 노인들이 앉아서 지난 삶을 증언하는 데 대부분을 할애한 이 영화에서 한 노인이 자리를 벗어나 집 안을 돌아다닐 때 꼿꼿한 노인들의 자세와 말이 흐트러지게 된다. 놀라울 정도의 기억력이나 죽음 직전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의 시간과 무관한 것처럼, 어쩔 줄 모르는 노인의 서성거림으로 인해 <사령혼>은 진혼에 멈추지 않게 된다. 원한조차 비켜 나갈 것처럼 음산하고 무시무시한 땅, 수습되지 못한 채 뒹굴고 있는 인골보다 서슬 퍼런 것은 증언자가 누구이건 동일한 경험과 기억으로 육화된 증언의 내용이다. 흐트러짐 없이 카메라를 향해 앉아 있던 그들이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엔 어김없이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으로 변해있거나 사망했다는 자막이 등장할 때, 우리는 그들의 청청하던 눈빛과 품위를 잃지 않은 자세를 떠올리게 된다. 이 모든 영화들이 각별하지만, < 녹차의 중력 >(2018)과 < 백두 번째 구름 >(2018)에서 발견한 임권택 의 손과 <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2017)에 등장하는 바르다의 발은 낯설기 때문에 끈질기게 떠오르는 신체기관이 되어버렸다. 백 두 편의 영화를 만든 임권택의 손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사실과 바르다의 손은 그녀의 영화에 종종 등장했지만, 발이 스크린을 채운 것은 처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대한 그녀의 발 사진과 어떻게 놓아도 불편해 보이는 임권택의 깍지 낀 손을 보면서 노년의 예술가가 창조한 세계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넘어서는 감동을 느낀 것이다. 영화에 입문하게 된 전설적인 계기나 오랜 시간 영화와 더불어 살아가면서 겪었던 체험의 위대함, 명민하고 섬세하거나 과격할 만큼 고집스레 지켜온 연출의 태도와 그들의 손과 발의 활동을 연관 지어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더욱이 바르다는 여전히 카메라를 지닌 채 활동하고, 임권택은 소강상태에 빠진 시간을 견디는 중이라는 사실도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녹차의 중력>은 영화감독 임권택에서 출발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임권택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시간을 버텨 내는가로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달빛 길어올리기 >(2011)를 마치고 < 화장 >(2015)의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 약 4년 남짓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학교에서 강의하고,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김동호 의 < 주리 >(2012) 촬영현장을 찾는 것으로 집약된다. 임권택에게 작용되는 강제성이 이 시간의 핵심이고, <녹차의 중력>은 생산하지 못하는 무위의 시간은 그저 버틸 도리밖에 없음을 체득한 임권택의 제스처와 손, 얼굴을 떠나지 않는다.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시간을 견뎌내는 임권택과 그의 곁에서 그의 모든 것을 찍겠다는 정성일 모두가 무력함이나 조바심을 잊는 사람들처럼 무심하게 제자리를 지킨다. 기차 창에 기댄 임권택의 오랜 잠보다 기차 대합실에서 커피를 만지작거리는 손이나 세례를 받을 때 어정쩡하게 깍지를 낀 손에서 현재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도래하지 않은 영화의 행위를 상상하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그는 잠에서 이미 영화를 만드는 행위에 닿아 있을지 모르고,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현장의 모습을 그의 손을 통해 불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손의 활동은 몇 신에서 두드러지는데, 첫 번째가 녹차를 대접하기 위한 행동이고 둘째가 세례를 받는 장면이다. <녹차의 중력>은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에서 시작한다. 노래 ‘봉선화’가 흘러나오는 프롤로그에 이어 등장하는 것은 녹차를 대접하는 임권택의 모습이다. 그의 손은 어김없이 떨리고 있고, 그 때문에 달그락거리는 다기의 소리는 녹차를 덜어내거나 물 따르는 소리, 주전자를 탁자에 놓는 소리보다 강렬하게 들린다. 그 공간은 소리의 움직임으로 채워진다. 떨리는 손으로 인한 소리들과 고요함의 이어짐이 곧 말수가 적고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임권택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이자, 이 영화가 처음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임권택이란 사람의 시간이다. 특히 세례식은 고단할 정도로 반복되는 제식 행위(앉고 일어서고, 같은 구절을 반복적으로 낭송하고, 줄지어 서고, 감사를 표하고, 인사한다.)에 피곤함을 느꼈을 법한 임권택의 무심한 표정보다 가지런히 손을 모으지 못한 그의 구부정한 손가락 마디가 먼저 눈에 띈다. 또 그보다 연배가 낮은 대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는 행위나 영성체를 받기 위해 길게 줄지어 서서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잠재우고 있는 그의 우물쭈물한 자세가 그의 시간을 대변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아내가 권유했을 것 같은 예식은 모종의 강제성을 띠고 있지만, 그는 불편하고 어색한 감정을 애써 숨기는 것 같다. 예식 내내 손가락을 풀면 큰일 나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깍지를 끼고 있던 그의 손에 비해 세례를 받은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뒷짐을 진 그의 손이 오히려 편안하고 자유로워 보인다. 정성일 은 두 손이 행하는 동작을 보여줌으로써 평소 같으면 집과 영화 촬영장 외의 장소를 찾을 일 없는 그의 예외적인 순간을 바라보도록 만든다. 마지막으로 <주리> 현장을 찾은 임권택의 모습이다. 이 현장에는 감독이 넘쳐나도록 많고 카메라도 많다. 연기하는 배우나 조감독도 감독들이고, 김형구의 카메라와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카메라, 정성일의 카메라까지 현장을 기록하는 중이다. 하지만 임권택의 카메라와 그의 배우들과 그의 영화는 여기에 없다. 분주하고 복잡한 현장에서 연기를 한 후, 모니터를 보고 있는 김동호의 뒤편으로 임권택이 앉아 있다. 그는 상념에 잠겨 있거나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저 거기 앉아 영화를 찍고 있는 다른 감독의 현장을 견디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의 눈에 맺혀 있는 보이지 않는 영화를 가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임권택만 혼자 동떨어진 존재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그의 손마저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프레임 바깥에 있을 손을 상상하는 우리가 더 숙연하고 비통한 기분에 빠져들게 된다. 우리에게 바르다의 손은 익숙하다. < 낭트의 자코 >(1991)에서 자크 드미의 등을 따라 움직이거나 <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2000)에서 감자를 줍고 거대한 그림의 끝을 잡고 있거나 카메라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을 봤기 때문이다. 그녀의 손이 직접 등장하지 않더라도 야위고 검버섯으로 덮인 드미의 손을 쓸어내리거나 옅어져 가는 눈동자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무성한 수풀과 같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카메라의 움직임에서 그녀의 손길을 가늠할 수 있다. <아녜스의 해변>(2008)에서 바닷가를 걷거나 뒷걸음으로 퐁데자르를 지나가는 것뿐 아니라 <다게레오 타입>(1976), <벽, 벽들>(1981) 등을 통해 자신이 살던 거리부터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이르는 장소를 무수히 걸었던 그녀의 행위를 떠올릴 수 있다. 그녀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로부터 쿠바, 이란, 미국을 오가는 동안 카메라에 담긴 풍경과 사람들의 얼굴과 행동들을 기록했고, 이 영화들은 타인을 만나기 위해 어디든 이동하는 그녀의 생생한 표정과 경쾌한 걸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도 이와 유사한 궤적을 보이지만, 몇 가지에서 차이점이 발견된다. 그녀가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진 것과 멈추어 서거나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녀가 걷는 행동이 조금씩 줄어든 만큼 차를 타고 이동하는 거리는 늘어가고, 동행자도 생겨났다. 사진작가 JR과 포토트럭을 타고 마을을 방문하고 주민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거대한 사진으로 집의 외벽을 덮는 과정을 지켜본다. 또 JR은 바르다의 소원을 들어주기도 한다. 휠체어를 타고 루브르 미술관을 활보하면서 그녀가 사랑하는 그림들을 보고 스위스에 살고 있는 고다르를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한다. 활기와 웃음과 사소하고도 재미있는 수다로 가득 찬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의 모습이 처음엔 낯설다가 둘의 대화에 익숙해질 무렵, 바르다가 점점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문득 떠오른다. 그녀는 여전히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호기심이 많고, 카메라를 통해 누군가를 기억하거나 자신의 삶을 믿고 있는 타인들의 표정을 지켜본다. 하지만 그녀의 걸음은 더욱더 느려질 것이고, 계단을 다 오르지 못하고 멈춰 서게 될 것이다. JR은 그녀의 발과 강제로 확장된 눈의 사진을 기차에 붙임으로써 그녀의 온 생애에 깃든 행동을 기념하는 것 같다. 동공이 확장된 눈과 동그란 발가락은 자유롭고 거침없이 행했던 걸음과 봄과 들음을 위한 멈춤의 순간에 새겨진 오랜 시간의 흔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수술을 위해 찍은 눈은 바르다가 볼 수 없는 순간이고, 그녀의 맨발도 스스로 찍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모습이기 때문에 JR의 적극적인 행위가 개입되어야 한다. 게다가 거대한 크기로 인해 거대한 형상은 움직이는 기념비가 된다. 즉 JR이 바르다와 함께 하는 순간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는 방식이자, 선로를 따라 프랑스 곳곳을 활보할 발과 마주칠 사람들에게나, 영화를 통해 기차와 더불어 이동하는 바르다를 마주할 우리들에게도 각인될 표지가 될 것이다.
‘클리셰’는 어떻게 결합되느냐에 따라 진부함을 넘어 전혀 다른 결을 만들어낸다. 호주 영화 < 다윈으로 가는 마지막 택시 >(이하 <마지막 택시>)가 그런 경우다. 새로운 건 없다. 전형적인 로드 무비이며 죽음을 앞둔 노인의 모습에선 < 버킷 리스트 >(2007)가 연상된다. 여행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거대한 풍광 앞에서 경이감을 느끼는 것 역시 이 장르의 관습이며, ‘삶에 대한 긍정’도 수많은 영화가 품었던 테마다. 그럼에도 새롭다면, 욕심부리지 않고 차분하게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가는 제레미 심스 감독의 기본기 충실한 연출 때문이다. 캐릭터의 관계를 통해 이야기의 깊이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 정공법. 결국엔 울림 있는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삶에 대한 성찰, 로맨스, 유머와 페이소스. 영화의 스토리를 이루는 이러한 기본 요소들이 매끈하게 봉합되어 어우러지기가 의외로 어려운데, < 마지막 택시 >는 쉽게 해낸다. 원작은 레지널드 크립의 희곡이다. 호주의 작가이자 배우인 그는 제레미 심스 감독과 10년 전에 처음 만났다. 그 역시 배우였던 심스는 연출을 시도하며 데뷔작으로 크립의 희곡 <더 리턴>를 각색해 <프레오로 가는 마지막 기차>(2006)를 만들었다. 기차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우연히 함께하게 된 승객들이 주인공인 스릴러로, 배우들의 호연과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평단의 관심을 끌었다. 심스의 두 번째 작품 < 비니스 힐 60 >(2010)은 전쟁 영화로 기술적 측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세 번째 작품인 < 마지막 택시 >는 평단의 호응도 호응이었지만, 주인공 렉스 역을 맡은 마이클 케이턴의 인생 영화이기도 하다. 73세(1943년생)인 이 배우는 1969년에 데뷔해 TV를 중심으로 40년 넘게 거의 호주에서만 활동했다. 화장실 유머 ‘덕후’라면 < 애니멀 >(2001)에서 로브 슈나이더에게 동물의 장기를 이식하던 미친 의사를 기억하실지도. 바로 그가 케이턴인데 <마지막 택시>를 만나 생애 처음으로 ‘남우주연상’이라는 걸 거머쥐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린 한 노인의 비루한 삶을 만난다. 호주 남부의 뉴 사우스 웨일즈에 있는 작은 도시 브로큰 힐. 택시 운전을 하는 렉스(마이클 케이턴)는 가족 없이 홀로 살아간다. 매일 저녁 바에서 만나는 몇 명의 술친구들과, 길 건너편에 사는 뚱뚱한 원주민 여성 폴리(닌갈리 로포드)가 인간관계의 전부다. 어느 날 그는 암으로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다. 단호하게 입원을 거절하는 렉스. 이때 우연히 뉴스 하나를 접한다. 북부의 다윈 지역에서 호주 최초로 존엄사가 법으로 허용되었다는 것이다. 닥터 파머(재키 위버)는 자신이 개발한 기계를 체험할 첫 지원자를 찾고 있었고, 렉스는 곧장 전화한다. 장장 3,000㎞가 넘는 여정은 이렇게 시작된다. 여기까지 놓고 보면 < 마지막 택시 >는 죽음을 앞둔 한 노인의 선택에 대한 ‘실존적 영화’처럼 보이지만, 길이 펼쳐지면서 서서히 ‘풍경의 영화’로 바뀐다. 플린더스 산맥과 우드나다타를 경유해 내셔널 하이웨이를 달리는 길은 ‘죽기 위한 여정’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아름답다. 그는 황야에서 일몰을 보고, 세월을 알 수 없는 고목 밑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들고양이들을 매단 나무를 보며 잠시 죽음의 현실을 잠깐 떠올리지만, 그것마저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관광엽서에 담길 이미지가 된다는 걸 깨닫는다. 거의 평생을 브로큰 힐이라는 작은 마을에 갇혀 살았던 렉스는, 죽음 직전이 되어서야 세상의 아름다움을 조금씩 깨닫게 되는 셈이다. 아이러니다. 이때 동행자가 등장한다. 틸리(마크 콜스 스미스)라는 원주민 청년이다. 결혼해 두 아이까지 있지만, 그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떠돌이다. 프로 풋볼팀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성격과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은 그를 계속 표류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여정의 1/2쯤 되는 앨리스 스프링스를 거쳐 2/3쯤 되는 달리 워터스에 도착한다. 이 지역 술집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줄리(엠마 해밀턴)는 영국에서 온 전직 간호사. 자유로운 삶을 찾아 이곳까지 흘러들었다. 렉스의 외로운 여행길과 풍경을 담던 영화는 어느새 세 사람의 로드 무비가 된다. 렉스의 건강은 점점 악화된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렉스는 자살하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힘들군. 목숨 끊는 게….” 결국 세 사람은 함께 다윈으로 향하고, 영화는 힐링의 국면으로 접어든다. 운전을 하기 힘들 정도로 지친(하지만 결코 운전대를 놓지 않는) 렉스는, 틸리와 줄리의 보살핌을 받으며 계곡의 옥빛 물에 몸을 담근다. 난생처음 바다를 보는 렉스는 다윈의 해변에서 줄리에게 말한다. “아름답군.” 하지만 이젠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시간이다. 원칙적으론 여기서 영화가 끝나야 한다. 렉스는 자신이 선택한 방법으로 잠들 듯 죽어가고, 남아 있는 자들은 그 죽음을 추모해야 한다. 하지만 < 마지막 택시 >는 여정의 끝에서 다시 시작한다. 죽음을 앞둔 그는 전화로 고백을 시작한다. 고백의 대상은 앞집에 사는 폴리다. 그녀에게 청혼하려 했지만 단념한 적이 있었던 렉스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자신의 과거와 가족과 하고 싶던 이야기들을 전한다. 그리고 다윈에서 브로큰 힐로 돌아가는 긴 여정에 오른다. 홀로 떠났듯 홀로 돌아가는 길이 끝나고, 렉스는 폴리와 만난다. “당신 살 냄새가 좋네… 이젠 안 아파….” 렉스는 폴리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든다. ‘죽음’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시작한 영화는 잔잔한 로맨스로 저문다. 그런데 < 마지막 택시 >가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인종 화합의 메시지다. 렉스가 죽음의 충동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일종의 구원으로 본다면, 구원자는 다름 아닌 원주민 여성 폴리다. 그녀 역시 홀로 살고 있으며, 까칠해 보이지만 렉스를 품어 주는 유일한 여성이다. 영화는 렉스와 폴리가 깍지를 끼며 잡은 손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데, 이 신은 이 영화에서 가장 따뜻한 순간이다. 렉스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상속했고, 결국은 돌아와 그녀 옆에 앉는다. 폴리는 렉스에게 가족을 선사하는 셈이며, 그녀 덕분에 렉스는 가족의 품에서 삶을 마감할 수 있다. 렉스가 길 위에서 만나는 틸리도 역시 원주민이다. 그는 렉스에게 삶의 활기를 불어넣으며, 렉스는 그가 풋볼 선수로 살아갈 수 있게 격려하고 돕는다. 틸리는 렉스에게 아들 같은 존재인 셈이다. 게다가 틸리는 백인인 ‘영국 여성’ 줄리와 연인이 된다. 영국은 호주에게 역사적으로 ‘본국’과도 같은 나라다. 그곳에서 온 백인이 호주의 원주민과 로맨틱한 관계를 맺는다는 설정은, 줄리가 자유분방한 성격이라는 설정을 통해 영화에선 대수롭지 않게 표현되지만 사실은 파격적인 것이다. 렉스와 폴리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나이 많은 백인 노인이 원주민 중년 여성과 관계를 맺는다는 건, 호주 사회에선 꽤나 조심스럽다. 영화 초반부, 폴리는 매일 차를 가져와 렉스에게 대접하고, 두 사람은 함께 의자에 앉아 다정한 시간을 가진다. 이때 옆집의 ‘백인’ 중년 여성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자 렉스는 잡고 있던 폴리의 손을 슬며시 놓고 일어선다. 마치 들켜선 안 되는 관계처럼 말이다. < 마지막 택시 >는 인종 문제에 대해 절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미시적인 시선을 통해 그것이 분명히 존재하는 호주 사회를 보여준다. 그리고 로맨스를 통해, 즉 충돌이 아닌 융화의 방식으로 사회적 모순을 누그러트리는 ‘휴머니즘’의 시선을 보여준다. 다른 인종 사이의 인간적 관계가 먼저 형성되었을 때 본격적인 문제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브로큰 힐을 떠나 다윈으로 향했던 렉스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렉스는 줄리에게 틸리가 유부남임을 이야기하고, 망설이던 줄리는 틸리 곁을 떠나 자신의 일터로 돌아간다. 줄리와 이별한 틸리는 다윈에서 풋볼 선수 생활을 하며, 방치했던 가족을 다시 찾는다. < 마지막 택시 >는 길 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면서 끝난다. 그리고 아들과 딸 같았던 틸리와 줄리를 떠나 보낸 렉스는, 아내와 같은 존재인 폴리에게 의지한다. 이 영화가 결국 선택하는 종착지는 ‘가족주의’인 셈인데, 이 단어에서 흔히 ‘화목함’이나 ‘포근함’ 같은 뉘앙스가 떠오른다면, <마지막 택시>의 ‘가족주의’는 일종의 ‘연민’이다. 죽어가는 자에겐 죽음을 지켜보는 가족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렉스가 긴 여정에서 깨달은 유일한 진리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 그의 곁엔 폴리라는 ‘가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