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잠
- 감독
- 홍선영
- 제작년도
- 2016
- 출연
- 장원형, 방은정
사진: <키노 프라우다> 제1호 중 (사진: “ KINO-PRAVDA ”, MUBI)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단순하게 설명할 수도 있다. 지가 베르토프, 1896년 제정 러시아 시기에 (지금은 폴란드 영토인) 비아위스토크에서 태어났다. 유대계 집안. 태어났을 때 이름은 다비드 아벨레비치 카우프만(David Abelevich Kaufman), 1918년에 데니스 아르카디에비치(Denis Arkadievich)로 개명했다. 문헌에 따른 소개. 1917년 11월 7일 볼셰비키 공산당을 이끄는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 아래 무장봉기를 일으켜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켰고 데니스 아르카디에비치, 그러니까 지가 베르토프는 키노 프라우다(Kino-Pravda, 영화-진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통해서 혁명의 진행 과정을 기록하였다. 기계적인 설명. 영화사의 문장을 옮겨쓰는 것은 ‘세계영화사의 순간(들)’ 연재의 목표가 아니다. 나는 순간(들)이 하늘의 별자리처럼 펼쳐져서 성좌(Kostellationen)를 이룰 뿐만 아니라 그 순간들이 서로 충돌하여 새로운 섬광을 만들어내면서 고정되었다고 생각한 자리들이 동요하기를 바란다. 상투적인 순간이란 없다. 상투적인 지식이 있을 뿐이다. 지가 베르토프는 언제 영화사의 지식 안으로 돌아왔는가. 서로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있다. 대부분의 설명. 레프 쿨레쇼프와 함께 러시아 혁명 시기에 아방가르드 미래주의자로 불렸으며, 영화의 기록이라는 성질에 관한 ‘이념적인’ 테제를 제시하였고, 그것을 실천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라는 설명에서 끝낸 다음 에이젠슈테인과 그의 세대에 관한 몽타주 이론과 작품들에 관한 설명으로 넘어갔다. 언제 다른 설명이 시작되었는가.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사 안에서의 좌표는 언제 이동하였는가. 1969년에서 1970년 언저리. 파리. 그 가운데에는 물론(!) 고다르가 있었다. 공식적인 발언은 고다르가 장-피에르 고랭, 제라르 마르탱, 나탈리 비야르, 아르망 마르코와 함께 마르셀 마르탱의 질문에 인터뷰하면서 선언하였다. 이 인터뷰는 1970년 12월 《시네마 70》 제151호에 실렸다. 고다르는 장-피에르 고랭과 함께 지가 베르토프 그룹을 결성하였다. 하지만 고다르만 지가 베르토프에게 눈을 돌린 것은 아니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1970년 5월-6월호, 220/221호 특집호에서 ‘20년대 러시아’ 영화를 다루었고, 이미 지가 베르토프를 에이젠슈테인보다 앞에 놓은 다음 영화사학자 조르주 사둘에게 재평가의 지면을 맡겼다. 한 해 뒤에 1971년 5월-6월호, 229호에서 지가 베르토프를 표지로 다룬 다음 베르토프의 글을 번역해서 실었다. 물론 1968년 5월이 끝나지 않았다는 정치적 입장이 포함된 것이었다. 그때 카이에를 이끌었던 편집장은 장-루이 꼬몰리와 장 나르보니였다. 마오주의에 경도된 극좌파. 그들은 파리에서 문화혁명이 가능할 것인가, 라고 질문했다. 누구에게 이 관점을 배운 것일까. 그때 그들은 루이 알튀세르를 열심히 읽었다.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은 마르크시즘이 1924년 1월 21일 ‘이후’ 소비에트에서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좌) 고다르와 고랭이 지가 베르토프 그룹 결성 후 제작한 < 동풍(Le Vent d’est) >(1969) (사진: “ Le Vent d’est ”, IMDb) (우) 카이에 뒤 시네마 1971년 5월-6월호(229호) (사진: “ 1971 CAHIERS DU CINEMA French Movie Magazine #229 FN+ 6.5 Dziga Vertov ”, ebay) 자, 알겠다. 고다르와 카이에는 먼저 역사의 좌표를 수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에이젠슈테인이 늘 맨 앞에 있었다. 그 이름을 끌어내리고 베르토프로 수정한 다음 몽타주의 개념을 다시 질문하자고 제안했다. 정확하게 같은 방법을 되풀이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고다르(와 고랭)는 베르토프의 몽타주를 다시 검토하였다. 성공과 실패의 여부는 이 자리로 되돌아왔을 때 따져 물어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가 베르토프는 에이젠슈테인의 곁에 있는 이름이 되었다. 다시 소비에트의 1920년대로 돌아가자. 지가 베르토프는 이미 레닌의 지시로 러시아 전역에서 진행되는 혁명을 인민들에게 전하는 프로파간다 순례 열차를 타고 ‘키노 네델리아(주간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1] 지가 베르토프는 이 방법을 좀 더 밀고 나가기를 원했다. 그래서 자신의 동생인 촬영기사 마하일 카우프만과 그의 아내이자 편집자인 엘리자베스 스빌로바와 함께 볼셰비키 공산당의 일간지인 《프라우다》의 영화 신문인 <키노 프라우다>를 제안하였다. ‘프라우다(Pravda, Правда)’는 러시아어로 ‘진리’라는 뜻이다. 《프라우다》는 1912년 5월 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 기관지로 창간되었고, 1918년에 모스크바로 편집국을 옮긴 이후 소비에트 공산당 공식 기관지가 되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1922년 5월 21일 《키노 프라우다》 1호가 제작되었다. 첫 호는 혁명에 성공한 인민들을 위한 여흥과도 같은 것으로 내용을 구성했다. <키노 프라우다> 제1호 중 (사진: “ KINO-PRAVDA NO. 1 ”, MUBI) 하지만 지가 베르토프는 혁명이 진행되는 지금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배워나갔다. 무엇보다도 그는 학습효과를 통해서 제작하는 순간마다 성장했다. 에이젠슈테인이 이론에 몰두하고 있었다면 지가 베르토프는 끊임없이 새로운 개념을 발명해 나갔다. <키노 프라우다>가 진정한 ‘키노 프라우다’가 된 것은 5월 26일의 <키노 프라우다>가 제작되었을 때였다. 혁명 지도자 레닌은 1918년 8월 30일 모스크바에서 공장 연설을 마치고 나오다가 볼셰비키 숙청에 반발한 좌파 사회혁명당원 파니 카플란의 암살 저격 총에 맞았다. 파니 카플란은 체포되어 총살형을 당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좌파 사회혁명당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34명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모두 총살형 판결을 받았다. 지가 베르토프는 이 재판을 촬영하였다. 이 촬영 과정에서 베르토프는 기록에서 멈추지 않고 영화와 당파성이라는 문제, 그리고 기록과 편집의 관계에 관해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놓치면 안 된다. 이 질문과 대답은 그 자체로 지가 베르토프의 투쟁이었다. 공산당 내에서 토론이란 사상투쟁이며, 이 투쟁은 패배하면 자기비판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계속해서 사상을 검증받아야 했다. 레닌은 영화가 인민을 위한 ‘교육(pedagogy)’이 되어야 한다고 교시했다. 지가 베르토프는 그 말을 단순히 세상에서 벌어지는 뉴스를 통한 혁명의 교육에서 멈추지 않고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혁명적으로 교정하는 교육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키노 프라우다>는 수명이 짧았다. 모두 23편이 제작되었고, 매호 상영시간은 20분 정도였다. 매번 구성이 바뀌긴 했지만 대부분 3개 정도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베르토프는 점점 더 <키노 프라우다>에 기술적인 실험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인민의 일상생활을 전달하는 뉴스라기보다는 실험영화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키노 프라우다>는 1925년에 끝났다. 하지만 지가 베르토프가 <키노 프라우다>를 만들면서 발표한 1922년 선언문은 어떤 영화가 상영되는 어떤 자리에 가서 낭독하고 싶어진다. “부르주아 연애소설로 만든 영화들은 문둥병에 걸린 것이다. 이런 영화들을 멀리하라, 이런 영화들을 보지 마라, 이런 영화들은 생명에 위험하다. 전염에 주의하라. 그런 영화를 만나면 도망쳐라!” 지가 베르토프 (사진: “ DZIGA VERTOV ”, Collection at the Austrian Film Museum, MoMA) *** [1] ‘세계영화사의 순간들’ 연재에서 이 순간을 이미 다루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1918년 8월 13일 로 되돌아가기를 권한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이 글을 접하는 누구나 한 번쯤은, 일상의 답답함과 울적함을 주체할 수 없어서 기차를 타거나 마실을 나가는 것으로 어떻게든 해 보고자 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그러한 일상에서 비일상으로의 탈출이 본질적인 해답은 되지 못하곤 한다.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훌쩍 떠나간다 해도 완전히 야반도주라도 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머지않아 반드시 본래의 거처로 돌아와야 하며,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일상과 마주해야만 한다. 바로 귀로(歸路)에 서야 하는 것이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 < 귀로 >(1967)는 바로 이런 현대인의 고뇌를 서울과 인천이라는 두 도시 간의 이동을 통해 명징하게 드러낸 수작이다. 지금까지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 연재에서는 당대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1960~80년대의 여러 한국영화를 돌아보았지만, <귀로>와 같이 주인공의 심경과 처한 상황이 두 도시 간의 반복적인 이동(통근과 통학이라는 ‘일상’이 아닌)을 통해 비유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은 드물었다. 이미 많은 비평에서 <귀로>를 ‘멜로드라마 최고의 걸작’ 혹은 ‘세월의 흐름을 타지 않는 세련된 구도’ 등으로 호평하고 있는 만큼, 본 연재에서는 본 작품의 또 하나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공간적 배경에 대해 주목해 보고자 한다. 주인공 지연( 문정숙 )은 한국전쟁의 상이군인으로, 하반신 마비로 인해 성불구자가 된 남편 최동우( 김진규 )와 14년째 그 어떤 것도 만족되지 않으며 족쇄와 같은 결혼 생활을 인천의 어느 양옥집에서 이어 나가고 있다. 지연에게 있어서 족쇄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는 남편의 신문 연재소설 원고를 서울 서소문의 신문사에게 전달하러 가는 시간뿐이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이러한 지연의 인천(지연의 집)-경인선 열차 3등 칸-서울역-서소문(신문사 소재지)을 오고 가는 이동 동선을 반복적으로 비춘다. 집을 떠나 인천역에서 경인선 디젤동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서 서소문으로 향했다가, 잠시 남산 중턱에서 시내의 경치를 내려다본 후 다시 서울역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열차에 올라타는 행적의 시퀀스를 되풀이해 목도하다 보면, 마치 지연의 일탈을 몰래 지켜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카메라는 1967년의 서울-인천 간의 이동을 세련되게 잡아낸다. 지연의 궤적을 뒤쫓아가며, 주목할 만한 공간적 배경을 짚어보도록 하자. 경인선 열차 지연은 서울에 원고를 전달하러 오고 갈 때마다 항상 경인선 열차, 3등 칸을 이용한다. 이 시기 경인선은 복선화가 완료되어(1965년), 시간당 1편의 열차가 운행되었으며 차내 모습은 극 중에서도 비치듯이 긴 의자에 손잡이가 달린 사실상 지금의 수도권 전철과 유사한 분위기를 띠었다. 지연은 열차를 타는 본인의 심경을 딱 한 번 대사로 읊는데, “지나가는 기차를 보면 시원스러워서 타고 싶은데 막상 타고 나면 답답해요(36:52경)”가 바로 그것이다. 본인을 옥죄는 가정에서 벗어나 서울행 기차를 타지만, 그곳조차도 완전한 도피가 되지는 못하는 상징으로서 경인선의 디젤동차 열차가 등장한 것이다. 인천역에서 서울역으로 향하는 경인선 디젤동차의 내부 모습 경인선 열차를 타는 이유를 강 기자에게 털어놓는 지연 서울역과 인천역 인천역은 지연에게 있어서 족쇄와 같은 일상을 상징하는 공간일 것이다. 반면에 서울역은 그러한 일상에서 조금이나마 물리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관문이자, 동시에 그마저도 남편의 원고를 전달해야 한다는 일상의 연장선상이라는 점에서 지연에게 경인선 열차와 유사한 공간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작중에서 서울역과 그 앞 지하도는 총 네 차례 등장하는데, 처음 두 번은 지연 혼자서, 세 번째는 지연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강 기자( 김정철 )와 함께, 그리고 네 번째는 강 기자 혼자서 지하도의 계단을 오르내린다. 자연스럽게 지하도가 지연의 원치 않았던, 하지만 거스를 수 없었던 일탈의 상징적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셈이다. 나아가 서울역의 1번 플랫폼 또한, 지하도와 유사하게 지연의 일탈과 포기(혹은 체념)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으로서 비친다. 서울역 1번 플랫폼에 도착한 경인선 열차. 현재 이 플랫폼에서는 천안행 1호선 급행열차가 발착한다. 서울역 지하도를 올라가는 지연의 뒷모습. 일부러 사선 구도를 취함으로써 6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어색함이 전혀 없다. 서소문 건널목과 서소문 고가차도 서울 도심 유일의 기차 건널목인 서소문 건널목을 이렇게까지 중요한 공간적 배경으로 담아낸 영화는 아마 본 작품이 유일할 것이다. 나아가 당시에 갓 준공되었던 서소문 고가차도(당시엔 ‘서소문 육교’라고도 불렸다)도 함께 등장함으로써 단절(건널목)과 소통(고가차도), 혹은 고즈넉한 인천의 집과는 다른 복잡한 근대도시 서울을 효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서소문 건널목은 작중에서 지하도와 마찬가지로 총 네 차례 등장한다. 처음 두 차례는 서울역과 서소문의 신문사를 오고 가는 지연 혼자서, 세 번째는 지연을 무작정 뒤쫓는 강 기자의 갈팡질팡하는 시선(1:01:01경)으로, 네 번째는 다시 지연 혼자서 건널목 앞에 멈춰 서는 시퀀스에서 서소문 건널목은 등장인물들의 막막한 심정을 대변하듯이, 마치 단절을 의도한 것 마냥 육중한 기관차가 스크린을 가로지른다. 지연을 무작정 뒤쫓는 강 기자의 시선에 서소문 육교와 사방으로 향하는 도로 안내판이 담긴다. 아마도 지연에게 마음을 빼앗겨 갈팡질팡하는 강 기자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인천의 집까지 쫓아온 강 기자 앞에서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직후, 지연은 서소문 건널목 앞에서 육중한 화물열차에 길이 가로막힌다. 참고로, 작중에서 딱 한 번, 지연이 서소문 건널목이 아니라 그 위를 가로지르는 서소문 고가차도를 도보로 건너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나 지금이나 서소문 고가차도는 자동차 전용 도로로서, 보행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서소문 고가차도 보행 장면은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한형모, 1966)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데, <귀로>에서의 해당 씬은 <워커힐에서 만납시다>의 그것과 거의 유사한 위치에서 촬영되었다. 물론 맥락과 의도는 두 영화가 완전히 다르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1년 간격으로 똑같은 씬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여러 의미를 고려하게 만든다. <워커힐에서 만납시다>에 등장한 서소문 고가차도 보행 씬 본 작품에서 유일하게 서소문 건널목이 아닌 고가차도를 건너가는 시퀀스. 오른쪽 뒤편으로 중앙일보 사옥, 대한빌딩 등이 관찰된다. <귀로>는 대사량이 그렇게 많은 영화가 아니다. 물론 주인공 지연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외마디 비명처럼 내뱉는 중요한 대사가 삽입되어 있지만, 러닝타임의 상당 시간은 지연의 뒷모습(어떤 비평에서는 문정숙을 ‘뒷모습이 아름다운 배우’라 칭하기도 했다)을 비추며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음악과 공간적 배경만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연출 덕에, 처한 상황이 지연과는 다소 다를지라도 1967년 공개 당시는 물론이요, 거의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귀로>를 보며 지연의 심경에 공감하거나 나아가 감정 이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귀로>를 보고 난 후, 시청 앞과 서소문 일대를 거닐며, 철거 공사 중인 서소문 고가를 올려다보고 그대로 서울역으로 향해서, 경인선 열차에 올라타 인천역에 내려보는 일종의 <귀로> 성지순례 체험을 해 보는 것 또한, 본 작품을 온전히 즐기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 그만큼 현대인에게 주는 울림이 큰 작품이니 말이다. 김영준(도쿄대학 특임연구원) 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
비장의 OST가 연재되고 거의 십년이 지나 시즌2를 앞둔 지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의례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코로나라는 팬데믹 상황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던 극장가와 더불어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의 약진은 문화산업의 지형도를 크게 변화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영화들은 제작되고 있고, 새로운 감독들과 스타들도 어김없이 탄생한다. 영화음악도 마찬가지. 돌아오는 비장의 OST 시즌2에선 이제 막 신인의 티를 벗고 활발히 활동하는 젊은 영화음악가들에게 눈을 돌려, 그들의 비장의 OST들을 소개해보려 한다. < 클로버필드 10번지 >의 독특한 점은 영화에 참여했던 그 어떤 누구도 이 영화가 8년 전 깜짝 히트한 파운드 푸티지 방식의 ‘클로버필드’ 프랜차이즈가 될 줄 몰랐다는 사실이다. 각본을 쓴 작가 조시 캠벨과 맷 스투큰, 연출을 맡은 댄 트라첸버그는 물론, 주연 배우들마저도. 할리우드에선 종종 전혀 상관없는 원작을 들고 와 속편으로 뜯어고치는 경우가 있긴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월터 웨이저의 스탠드 얼론 소설 <58시간>은 < 다이하드 2 >가 되었고, 조너선 헨즐리가 쓴 ‘사이먼 세즈’란 각본은 < 다이하드 3 >로 탈바꿈되었다. 하지만 <클로버필드 10번지>는 영화가 제작되던 중간까지도 ‘the Cellar’라는 각본을 바탕으로 한 소규모 스릴러가 될 예정이었다. 최연소 오스카 감독상에 빛나는 데이미언 셔젤은 이 히트리스트에 올랐던 각본을 각색하며 연출까지 고려했는데, 그가 고친 부분이 바로 지상에 나온 후 펼쳐지는 뒷부분, 이른바 반전의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셔젤은 애초 계획대로 < 위플래시 >의 기회를 거머쥐었고, 댄 트라첸버그 감독에게 바톤이 넘어간 이 프로젝트는 제작자인 J. J. 에이브럼스가 클로버필드와의 연관성을 떠올리며 프로덕션 중에 세계관 확장(?)이라는 놀랄만한 방향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베어 맥크레리 이에 당황한 건 영화 촬영 전부터 참여해 후반을 앞두고 있던 영화음악가 베어 맥크레리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그는 TV쪽에서 꽤 잘 나가던 것과 달리 영화 쪽에선 호러나 스릴러, SF 등 b급 장르에서 행보를 이어온 신인에 가까웠는데, 모처럼 손 내민 파라마운트라는 메이저 스튜디오와 J. J. 에이브럼스라는 거물과의 협연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대학 시절 할리우드 영화음악 레전드인 앨머 번스타인에게 사사 받고, 영화음악가 리처드 깁스 밑에서 견습 생활을 했는데, 리처드 깁스가 스케줄 충돌로 인해 TV시리즈 <배틀스타 갤럭티카>에서 물러나게 되자 그의 대타로 메인 음악가로 들어가게 되며 작곡가 인생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후 <휴먼 타겟>과 < 터미네이터: 사라 코너 연대기 >, <유레카>, < 워킹 데드 >, <쉴드 오브 에이전트>, <아웃랜더> 등 손대는 작품마다 반향을 일으키며 TV시리즈 음악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과 행보를 이어왔는데, 이런 광폭적인 업자들의 인기에 대해 선수 중에 선수인 제작자 쌍제이 에이브럼스도 모를 리 없었다. 베어 맥크레리는 매주 반복되는 TV를 넘어 더 큰 스케일에 도전을 원했고, 갑작스런 클로버필드 세계관으로의 편입은 그래서 그에게 터닝 포인트가 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 점에서 베어 맥크레리가 <클로버필드 10번지>에 온갖 정성과 야심을 갈아 넣은 건 당연했다. 자신이 좋아하던 제리 골드스미스와 버나드 허먼이라는 불세출의 영화음악가가 들려줘왔던 장르의 토대를 자양분 삼아 그는 고전 할리우드 장르 스코어가 가진 장기와 미덕이 <클로버필드 10번지>에서도 십분 발휘되길 원했다. 영화 후반이 프로덕션 과정에서 변경되긴 했어도 여전히 주된 무대가 되는 건 벙커였고, 그는 여기서 음악 색채에 대한 전체적인 모티브를 얻었다. 촬영이 진행되는 뉴올리언스의 벙커 세트장에 방문해 며칠을 보냈고, 어두운 통풍구, 답답한 콘크리트 감방, 비좁은 복도 등을 경험하며 그 공간 안에서 나올 소리들에 집중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운드 팀을 동원해 양철 쓰레기통, 환풍기소리, 전동기구 고주파, 벽돌, 유리, 톱, 체인, 징, 에어로졸 스프레이, 각종 기계 등 다양한 소리들을 채집해 샘플링하고 왜곡·변형하며 음악 전반에 효과로, 타악기로, 그리고 엠비언트로 상당수를 녹여냈다. 이 사운드 디자인이 가미된 스코어는 벙커 안에 벌어지는 세 주인공들의 불안한 심리 싸움은 물론, 벙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상황을 상상하게끔 만들며 들려주는 것보다 더 무시무시한 스코어의 확장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독특한 소리들이 <클로버필드 10번지> 스코어의 근간이 되었지만, 베어 맥크레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특별히 더 주안점을 둔 지점이 있었으니, 바로 벙커라는 공간 그 자체를 들려줄, 아니 바로 그 공간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블래스터 빔’이란 악기와 주인공 미셸의 캐릭터를 형상화하기 위해 동원된 터키의 민속악기 ‘야일리 탐부르 yaylı tambur’다. 제리 골드스미스가 <스타트렉: 극장판>에서 사용해 충격과 명성을 안긴 블래스터 빔은 페달 스틸기타를 큼지막이 확장시킨 것과 같은 대형악기(길이가 무려 3-5m에 이른다)로, 수많은 와이어가 연결된 본체를 손가락이나 막대, 활, 파이프 혹은 타피 같은 물체로 치거나 문지르거나 튕기며 연주한다. 이름만큼이나 어둡고 불길하며 환상적인 특유의 깊은 음색으로 SF나 호러 장르에서 사랑을 받았고, 제리 골드스미스의 뒤를 이어 제임스 호너가 <우주의 7인>에서, 존 배리가 <블랙홀>, 모리스 자르는 < 드림스케이프 >에서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7-80년대 인기를 끌었지만 최근 20년간은 어느 영화에서도 사용된 적이 없다는 이 독특한 악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새 생명을 부여했다. 그랜드 피아노나 업라이트 베이스, 콘트라 바순의 가장 낮은 음보다 훨씬 더 깊은 아래의 저음을 으르렁 울리며 저돌적으로 휘몰아치는 긴장감 넘치며 파워풀한 소리는 가히 이 스코어의 백미로, 지하라는 공간을 더 실감나게 표현하는 동시에 빠져나갈 수 없는 벙커 안에서 느껴지는 답답함과 무력감, 그리고 지상의 인류 전멸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는데 큰 일조를 한다. 반면 야일리 탐부르의 깊고 신비스러우며 풍부한 음색은 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흐르는 ‘장조와 단조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섯 노트 주제부’와 결부되며 주인공 미셸의 미묘한 심리를 표출하는데 큰 공헌을 한다. 이 이질적이고 이국적인 소리는 모든 상황에서 도망만 다니던 피동적인 모습에서 점차 적극적으로 의지를 드러내며 위기를 극복하려는 진취적인 자세로 변해가는 성장형 캐릭터의 이중적인 면모를 담아내기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앨머 번스타인은 영화가 시작될 때 비주얼도, 스토리도 진행되지 않을 찰라 음악만이 관객들의 모든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며 영화를 대표하는 악기의 중요성을 언급했는데, 베어 맥크레리는 이 조언을 충실히 받아들여 배급사와 제작사 크레딧이 뜨는 동안 야일리 탐부르의 기묘한 소리로 연주되는 테마를 통해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뒤로 갈수록 두텁고 큰 스케일의 관현악이 합류하고, 이른바 ‘미스터리 스트링’이라 이름 붙인 여덟 노트의 휘몰아치는 오스티나토(어떤 일정한 음형을, 악곡 전체에 걸쳐, 같은 성부에서 같은 음고로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가 덧입혀지며 벙커 안의 긴장감 넘치는 주도권 싸움과 탈출 과정의 빌드 업을 묘사해 가는데, 영화 내내 단 3명의 등장인물과 하나의 공간만이 나오는 단출한 구성임에도 다이내믹하며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마력을 선사한다. 오케스트레이션에도 다양한 시도와 고전적인 방식을 교차로 활용했는데, 영화 초반의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지던 불안한 상황에선 현악 콰르텟 편성을 위주로 디테일한 지점 묘사에 신경 쓴다면, 중반부에 이르러선 벙커의 깊이감이나 풍부한 미스터리함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무력감을 묘사하기 위해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전혀 없는 30대의 첼로와 8대의 업라이트 베이스만 편성해 저음 위주의 공격적이고, 강력한 무게감으로 관객들을 압도한다. 그리고 지상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모든 비밀들이 밝혀지는 영화 후반에 이르러선 90인조 풀 관현악단을 활용해 전통적인 할리우드 스케일의 영화음악으로 대장정을 마친다. 새로운 시도를 펼쳤던 < 혹성탈출 >과 < 에이리언 >, <스타트렉>의 제리 골드스미스와 긴장감 넘치는 현악으로 대표되는 < 싸이코 >와 < 현기증 >의 버나드 허먼에게 경배를 바치는 이 놀라운 작업물은 베어 맥크레리를 단순한 TV시리즈에서 활약하던 일개 젊은 작곡가 유망주에서 단숨에 차세대 할리우드 영화음악을 이끌 다크호스로 평가받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클로버필드 10번지>는 베어 맥크레리가 현재 위치까지 오게 된 초석이자 가장 야심 있고 강력한 비전을 발휘해냈던 승부수이자 비장의 OST였다. 그는 계속해서 <클로버필드 패러독스>와 < 해피 데스데이 > 시리즈, <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 > 등 메이저 영화 작업을 이어가는 동시에, <콜 오브 듀티: 뱅가드>나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 등 인기 게임은 물론, 코로나로 인해 OTT 세상이 도래한 현재 가장 비싼 드라마 중에 하나인 아마존의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와 애플TV+의 <파운데이션>, 넷플릭스의 <위쳐: 블러드 오리진> 등 새 미드에서도 꾸준히 음악을 만들며 눈코 뜰 새 없는 활약을 보이고 있다. Track List 1. Michelle 2. The Concrete Cell 3. Howard 4. A Bright Red Flash 5. At The Door 6. Two Stories 7. Message From Megan 8. Hazmat Suit 9. A Happy Family 10. The Burn 11. Up Above 12. Valencia 13. The New Michelle 14. 10 Cloverfield La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