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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국제영화제 한국 영화 집중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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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 ‘로맨틱 헤븐’ 굴욕 스코어 흥행 적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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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내 맘대로 베스트 7] 컴백이 반가운 감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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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연재를 시작한지 2년이 되었고 완성은 커녕 시작도 제대로 못한 오디오 비주얼 에세이를 마무리 지을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보다 더 쏜살 같은 건 우리 자신이며 한국영화고 시네마 그 자체다. 사실 시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 우리는 시간을 볼 방법이 없다. 움직이는 초침을 보거나 스마트폰의 숫자를 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세계를 관찰할 수 있다. 첫 연재 분에서 금정연과 나는 서교동의 콜마인이라는 카페에서 대화를 나눴다. 연재를 위한 기획회의 자리였다. 그리고 지금 카페 콜마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카페 직원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고 폐업했으며 그 자리엔 오버트라는 이름의 다른 카페가 들어섰다. 그 사이 니콜라스 케이지가 부활의 신호탄을 알린 영화 < 미친 능력 >이 개봉했고(졸작) 최동훈의 야심작 < 외계+인 1부 >가 개봉했고(ㅠㅠ) 장 뤽 고다르와 장 마리 스트라우브가 죽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서울 아파트 집값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루나코인의 권도형은 도망자가 됐으며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를 샀고 윤석열이 해외 순방을 다니고 문재인이 추천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한 친구에 의하면 문재인과 윤석열은 오바마와 트럼프의 거울쌍이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그림자처럼 질질 끌고 다닌다. 완전히 다르지만 완전히 같은 존재,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인 곳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가 픽션처럼, 이미지의 세계 속에서 우리를 조종하고 예견하고 습격한다. 2022년이 끝나가는 지금, 극장에 걸려있는 한국 영화는 < 압꾸정 >, < 데시벨 >, < 올빼미 >, < 인생은 아름다워 >, < 동감 >, < 우수 > 등이다. 내 주변에 이 영화들을 본 사람은 없고 보러갈 사람도 없다. 한국 영화는 괴멸한 것처럼 보이지만(내 주변에서) 잠시 그렇게 보일 뿐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 청룡영화상에서 박찬욱의 < 헤어질 결심 >이 상을 독차지한 것을 생각해보라. 1960년대 TV의 습격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영화는 십년 후 블록버스터 군단으로 세계 문화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OTT도 게임도 두려워할 것 없다. 전 세대의 거장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우울해할 것도 없다. 그보다 더한 거인들도 일찍이 명을 다했지만 영화는 끄덕하지 않았다. 영화는 영웅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영화는… 영화는……. 지그프린트 지린스키는 과거의 영화를 임대업으로 간주했다. 영화의 본질은 돈을 받고 2시간 동안 특정 공간의 좌석을 대여해주는 것이다. 그에 반해 TV는 사람들이 기계를 소유할 수 있다는데 방점이 찍힌다. 그러므로 TV는 가구이며 인테리어 업종이다. 디지털 이후에는 문학적인 텍스트에만 해당했던 선택적인 명령과 속도, 중단 가능성, 반복에의 의지, 표시와 보관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영화 그 자체가 소유되고 이용되기 시작했다. 시청각의 서적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우상 파괴의 도구로 미디어 이론만큼 유용한 게 없다. 이러한 관점은 경주마처럼 작품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경향을, 과도한 감정 이입을 막아준다. 극장이 중심인 영화가 임대업이라는 생각으로 돌아가보자. 그렇게 생각하면 OTT가 기승을 부려도 시네마와는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신체의 부동성을 강제하는 임대 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극장에 간다. 나윤이 아버지인 금정연씨와 정원이 아버지인 오한기씨가 극장에 갈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TV용 영화가 큰 의미없이 사라진 이유도 여기 있고 OTT 콘텐츠의 질이 떨어지는 이유도 여기 있다. OTT는 개별 콘텐츠가 아닌 리스트의 문제다. 개별 작품은 빨리 감기나 건너 뛰기로 감상하면 된다. 중요한 건 내가 영원히 보지 않더라도 무엇을 볼 가능성이 있느냐다. 선택되지 않은 잠재성, 가능세계가 OTT의 우주를 이룬다. 우리는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것을 소유한다. 반면 극장은 지금 당장 행동하고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서두르지 않으면 용산 아이맥스는 매진되고 영화는 내려갈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시간성에서 중요한 건 러닝타임이 아니라 상영 기간이다. 영화는 점점 더 이벤트화 되고 이 이벤트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OTT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닌자처럼 통장에서 구독료를 가져가게 허락만 해준다면 가능세계는 언제나 당신의 곁에서 당신의 존재론적 불안을 잠재워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넷플릭스를 보며 시간을 때울 수 있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언젠가 < 수리남 >을 볼 것이다. 언제 볼진 모르겠지만… 그러므로 종말은 없다. 시네마에는 새로운 시작 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원했던 방향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미디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미디어가 우리를 사용하는 것이므로. 금정연은 말했다. 한국 사람이 한국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한국영화가 한국 사람을 만든다고. 영화 이전의 나는 목적도 의미도 불분명한 떠돌이 개에 불과하지만 영화 이후에야 비로소 K정연이 될 수 있었다고, 그게 바로 존 포드가 말한 픽쳐의 의미라고 말이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2005년, 정성일은 씨네21에 신설된 코너 《전영객잔》에 들어갈 글을 청탁받으면서 당시 편집장인 남동철에게 “꼭 영화에 관한 평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첨언을 들었다. 남동철은 “이제 영화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을 전영객잔의 소개에 덧붙인다. 정성일은 2005년에 쓴 이 글을 2010년에 책으로 묶으면서 5년 동안 상황이 어떻게 후퇴했는지 돌아본다고 쓴다. 아마 영화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봤을 그의 책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의 첫 꼭지에 실린 글이다. 제목은 “영화비평에 대한 근심과 다시 시작한다는 것.” 이제 영화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재밌는 말이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분야에나 반복되는 후렴구이기 떄문이다. 이제 문학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제 시를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제 전시를 진지하게... 이제 브릿팝을 진지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이 후렴구가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문학비평의 경우에는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많은 시대가 분명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영화는? 영화에 대한 담론, 영화 글이 진지하게 소비되고 이야기된 시기는 언제일까? 그런 시대가 있었나. 만약에 있었다면 그것은 영화에 대해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남동철이 한탄한 바로 그 시절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 아무도 안 읽어! 라고 말할 수 있을 때는 아직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책을 읽고 분노하고 절망할 때라는 것이다. 정말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정말 아무도 읽지 않는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그때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2005년에 글을 쓴 정성일은 왜 영화비평에 관한 해묵은 수사에 동의한 걸까. 그는 이렇게 쓴다. “위대한 영화를 쓸 때 우리는 위대한 생각을 해야한다. 마찬가지로 하찮은 영화를 쓸 때 우리는 하찮아진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위대함과 하찮음을 점점 구분하지 못한다. 혹은 하찮은 영화 앞에서 자기만 위대한 척한다. 눈이 멀어 갈 때 점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보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영화비평을 읽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비평이나 리뷰를 쓰긴 쓰고 읽긴 읽는데 거기에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사실,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지 못하고 기준과 권위가 사라지고 하찮음이 위대함으로 둔갑한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내가 종종 농담 삼아 어둠의 정성일이라고 칭하는 임재철 역시(두 분 모두에게 심심한 사과를) 금정연과 내게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했다. 지금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시대라고, 영화도 아닌 걸 영화라고 한다고 말이다(인용은 정확하지 않음). 그러면서 그가 우리에게 건네준 책은 V. F. 퍼킨스의 「영화로서의 영화」(1972)였다. 영국의 영화비평가 빅터 퍼킨스의 유일한 단행본인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책은 영화를 판단하는 데 있어 필요한 기준(표준)criteria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러나 정성일, 임재철 두 선생님의 훌륭함과 무관하게 나와 정연씨가 하려고 했던 것은 그와 정반대의 것이었다. 처음 작가로 활동할 때부터 그랬고 영자원 연재를 시작하고 한국영화에 대한 오디오 비주얼 에세이를 만들기로 결심한 순간에도 그랬다. 우리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이 단지 교란, 전복, 위반, 철폐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 기준과 규칙, 권위, 규범 이후에도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개별의 특수성들이 특수성인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공통의 무언가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를 원했다. 취향, 상호존중 따위로 퉁 쳐지는 것이 아닌, 새로운 영화경험. 쑨거에 따르면 1950년대 말 미국 지리학자들 사이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각 지역의 독특한 상태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 모든 지역이 공유하는 지리적 특징을 수집해야하는지 여부였다. 이 논쟁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불러왔다. “특수성의 상태로 재현된 대상이 일반적 규칙으로 다듬어지거나 추상화되지 않은 채 여러 사람을 연결하는 고리가 될 수 있을까요?” 이때 리처드 하트숀은 유사성에 대해 인습과 다른 정의를 내리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가 정의하는 유사성은 “서로 비슷한 지엽적인 부분을 쳐낸 후 남은 주요 차이”였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유사성은 “서로 비슷한 성질”인데, 유사성이 바로 차이라니 이게 무슨 말일까. 어떻게 특수성들 속의 차이가 우리를 연결하는 보편적 고리가 될 수 있을까. 좋고 나쁨, 옳음과 그름을 구분하고 분별하지 않는 기준이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얼마전에 만난 강보원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요즘 심심해서 Dbpia에서 금정연과 정지돈이 과거에 쓴 글을 보는데요, 아니 이 사람들이 자꾸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있더라구요. 거기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이미 다 지난 일이지만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이러는 거죠. 아니, 자꾸 그러지마, 그걸 왜 열어, 이사람들아.” 글쎄, 그걸 왜 열까. 하지만 중요한 건 이 말을 하는 강보원이 웃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테마연재]<블루아워> 주의! 포스터에 속지 마세요!
새벽은 태양이 뜨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는 시간이다. 동이 틀 때를 기다리는 풀과 나무, 소음을 내기 시작하는 도로와 각자의 하루를 시작하려 하는 사람들. 기대와 호기심으로 가득 찬 시간은 무엇이든지 시작할 수만 있을 것 같다. 반대로 해가 막 지고 밤이 오기 직전의 하늘 또한 마찬가지이다. 소모했던 에너지들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고 고요함과 고독을 기다리는 상태로 돌아간다. 움직이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 본다면 푸른 하늘의 빛은 곧 아침이 오는 것인지 밤이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런 혼란과 혼돈은 약간의 광기를 동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미친듯이 뜀박질이 하고 싶다거나 깊숙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 아무도 찾지 않고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지게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모순적인 시간을 블루아워라 칭한다. 전혀 만나지 않을 것 같은 양극단의 두 시간이 언젠가는 하나로 겹쳐지는 시침과 분침처럼 마주치는 순간이 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서른살의 CF감독 스나다(카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지쳐간다. 재미없는 남편과의 결혼과 촬영 현장에서의 스태프와의 연애, 조용하게 넘어갈 날 없는 하루. 하지만 스나다는 술만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기요우라(심은경)를 만나게 되고 고향으로 오라는 엄마의 말에 무작정 함께 떠나게 된다. 스나다의 고향은 이바라키의 작은 시골마을로 보이는 것은 산과 밭, 그리고 그다지 달갑지 않은 가족뿐이었다. 스나다는 이런 고향을 좋아하지 않는다. 촌스러움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반면 기요우라는 이바라키의 모든 것이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마치 아이처럼. 비가 많이 오던 날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스나다의 본가에서 하루를 보내게 된다. 엄마는 수다스럽고 아빠는 퉁명스럽다. 오빠와는 거의 남과 같다. 맥주를 찾으러 부엌의 냉장고를 열었을 때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삼각김밥 무더기를 보고 스나다는 표정이 일그러진다. 여기서부터 스나다가 고향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양가감정이 조금씩 드러난다. 스나다는 분명 따뜻한 밥과 된장국이 먹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차가운 삼각김밥은 따뜻한 기대를 무너뜨렸다. 진심을 말해야 하는 순간은 고통이 뒤따른다. 우선 그 진심이 좋든 나쁘든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어른스럽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어른스럽지 못한 사람은 회피한다. 거기서 도망쳐버린다. 잠깐은 안심이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 도망쳤던 자신을 마주해야 된다는 불안이 엄습할 것이다. 스나다는 도망을 택했다. 그리고는 근처의 한 술집으로 기요우라와 도망쳤다. 불을 보고 뛰어드는 나방처럼 마을의 남성들은 그곳 여성들에게 야한 농담을 해댔다. 시끄러운 노래 소리와 웃음 섞인 음담패설을 듣고 있는 스나다는 이곳마저 벗어나고 싶어했다. 만나고 있던 스태프와 문자를 주고 받으며 견디고 있었다. 핸드폰만 바라보며 웃는 스나다에게 술집 주인은 한 마디 한다. “정말? 그래서 웃는 거야? 난 그런 웃음 별로던데. 솔직히 싫어. 다들 예쁘다고 하나본데 습관 되니까 조심해. 사실 추하거든.” 주인은 유일하게 스나다를 꿰뚫어보는 사람이다. 시골은 구질구질하고 도시는 쿨하고 이바라키는 추하고 도쿄는 세련됐다고 생각하는 스나다에게, 자신을 속이고 연기를 하고 있던 스나다에게 조금 더 솔직해지라고 연기는 그만하고 억지 웃음을 버리라고 이야기 한다. 그렇지만 스나다는 여전히 두렵기만 하다. 자신과는 다르게 기요우라는 마이크를 잡고 촌스러운 노래도 곧잘 불러서일까. 다음날 새벽 스나다는 운동화를 신고 어렸을 때처럼 동네 산길을 걷기 시작한다.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 아침인지 밤인지 모르는 빛과 어둠 사이에서 뜀박질을 시작한다. 그러다 문득 자리에 멈춰선다. 뒤로 돌아보았을 때 손을 흔들고 있는 기요우라가 보인다. 머뭇거리는 스나다에게 손짓을 한다. 스나다는 그토록 미워하던 고향과 점점 가까워지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좁혀지는 마음의 거리를 은유하는 것은 바로 스나다가 신은 운동화이다. 첫번째로 도쿄에서의 운동화. 여기서 운동화는 깨끗하다. 회식 후 길거리 벤치에서 잠이 들어 굴러 떨어지고 풀린 운동화 끈도 신발 속으로 아무렇게나 욱여넣는다. 하지만 고향집에 도착하자 내리치는 비 때문에 운동화는 호졸근히 젖어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산길에서의 뜀박질 때문에 운동화는 흙투성이가 된다. 비와 흙으로 물들어가는 운동화는 스나다가 고향에 대한 마음을 조금씩 열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어느 순간 어른이 되어있는 것처럼 스나다도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고향에 물들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더러워진 운동화로 보일 수 있다. 비와 흙이 묻은 신발은 예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이 전부가 아니다. 스며든 비와 흙 속에는 과거의 기억과 과거의 내가 있다. 그리고 그 신발을 현재의 내가 신고 미래로 달려나간다. 그게 혼란스럽고 모호한 블루아워라고 해도 말이다. 스나다가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 하나가 고향이라면 다른 하나는 동물에 대한 거라고 할 수 있다. 스나다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기요우라에게 들려준다. 오빠와 함께 곤충의 날개를 떼서 장난친 것, 차에 치일 뻔 한 강아지를 대수롭지 않아 한 것. 반대로 돌봐주던 길고양이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자 분노한 일 따위를 들려준다. 스나다는 그때 느꼈던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상대가 기요우라여서 가능한 일이었을까. 기요우라는 어떤 사람일까. 기요우라의 첫인상은 발랄하고 명랑한 사람이었다. 어딘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웃고 말했다. 어른의 행동이라기엔 어딘가 이상했다. 아이들을 생각하니 그 의문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겁은 나지만 하고 싶은 걸 해보고 때로는 착한 거짓말로 상대가 상처받지 않게 배려한다. 스나다와 엄마의 대화 중에서 엄마는 스나다에게 너는 어느쪽 사람이냐 묻는 장면이 있다. 기요우라는 도시 사람의 티가 많이 난다고 했다. 그렇다면 기요우라는 도시 쪽 사람일까. 아니다. 스나다는 이바라키와 도쿄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기요우라는 그런 스나다를 도와주고 위로해 줄 어린 스나다인 것이다. 공책 속에 그려진 그림처럼 스나다는 기요우라 같은 친구를 원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자신이다. 어렸을 때의 감정이 무뎌진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기요우라는 나타난 것이다. 스나다가 진짜 스나다로 성장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결국 부정하고 싶었던 과거를 스나다는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내일 먹을 빵을 사오라는 남편의 문자에 전화를 걸어 “나 말이야. 아침은 밥이 좋아. 된장국도 있어야 된다고! 콩도 좋아해! 콩도 좋아한다고!”라고 외친다. 마법 같은 순간이다. 이제 스나다를 도와 줄 친구는 사라져버린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스나다는 어른이 된 것이다. 블루아워는 다 지났다. 대신 노을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혼란스러운 마음도 끝이 보이는 걸까. 스나다는 어린 자기의 목소리의 작별인사를 받는다. 바이바이. 눈물을 참을 수 없다. 눈물은 나지만 입으로는 웃어 보인다. 시골 싫어! 촌스러워!라고 소리지르면서. 이에 기요우라는 말한다. “진짜 바보네요. 스나 씨 원래 촌스러워요. 촌스럽다는 거 괜찮지 않아요? 진짜 살아 있는 것 같고. 난 스나 씨 고향에 와 보길 잘한 것 같아요. 사람들 말하는 거 절반은 뭔 말인지 못 알아들었지만 역시 시골은 스릴 있네요.” 촌스럽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초이스]산다
믿음 없는 세계의 믿음 정철의 조카 하나는 “기도해 봤자 소용없다”고 말하는 어린 소녀다. 주인공 장철의 삶 또한 그러하다. 사고로 인해 집은 무너져 내렸고, 부모님은 이 사고로 돌아가셨다. 사고 이후 누이 수연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이고, 그는 매번 집을 나간다. 수연을 찾아 정철은 수연의 딸이자 조카인 하나와 함께 찾아 나선다. 정철의 희망은 무너진 집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이곳에 누이와 조카 그리고 여자 친구인 진영과 함께 살고 싶다. 하지만 그가 감당해야 하는 현실은 반대다. 아무리 일을 해도 돈은 모이지 않는다. 일자리를 알선한 친구는 돈을 갖고 도망을 치고, 자신이 모은 일꾼들은 정철을 의심한다. < 산다 >( 박정범 , 2014)의 첫 장면은 무너진 집을 세우려고 애쓰는 모습이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일에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형상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시포스를 떠올리게 한다. 영리하다 못해 교활하기까지 했던 신화의 주인공 시시포스는 신들을 농락한 죄로 사후에 형벌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밀러 올린 바위는 산꼭대기에 머물지 못하고 매번 떨어져 내린다. 그가 받은 형벌은, 매번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정상까지 올려야 하는 영원한 형벌이다. 이 짧은 글에서 박정범 감독의 영화가 신화적이라고 접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형상은 박정범 영화를 이루는 하나의 형상을 생각해 보게 만들어 준다. 전작 < 무산일기 >(2010)의 승철 또한 아무것도 가질 수 없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시시포스적 인물이다. 2008년에 선보인 단편 < 125 전승철 >에서도 그러했던 것처럼 박정범 감독이 연기하는 일련의 인물들은 분주하게 일상을 살아가지만 탈북자라는 이유로(<무산일기>), 가족들이라는 짐 때문에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힌다(<산다>). 그런데, 이처럼 고단하고 반복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이상하게도 승철(<무산일기>)이나 정철(<산다>)은 노동의 행위를 중단하는 적이 없다. 주인공들은 미련해 보일정도로 소임에 충실하다. 이러한 태도는 무기력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기이한 것은 일에 대한 인물의 집착과 사소한 열정을 넘어서는 소명의식(calling)과도 같은 숙명적인 태도가 엿보인다는 점이다. 반복되는 현실이지만 그에 충실한 것. 이 모습이야말로 시시포스 신화의 본질 중 하나다. 알제리 출신의 소설가 알베르트 까뮈는 [시시포스의 신화]라는 저서에서 바위가 또 다시 굴러 떨어질 것임을 알면서도 다시 올리는 삶의 부조리함을 읽어낸다. 삶은 반복되는 부조리함의 연속이지만 시시포스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밑바닥에서 다시 바위를 끌어 올린다. 카뮈는 부조리에 맞서는 인물로 시시포스를 예찬한다. 무한한 반복이지만 오늘도 바위를 밀어올리는 시시포스의 근육을 예찬하면서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임을 설파하였다. 박정범 감독의 영화의 에너지이자 영화를 통해 얻게 되는 지독함과 기이한 열정은 이러한 실존적 에너지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박정범 영화에 대해 아무런 흥미를 못느끼는 것은 삶의 부조리함을 보여주는 영화의 접근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범 영화의 실존적 태도 속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가면서 또 하나 발견하게 되는 것은 주인공이 느끼는 죄의식이다. 이 죄의식은 승철의 경우처럼 탈북자를 지칭하는 주민등록증의 ‘125’라는 가리키는 사회적 주홍글자일수도 있고, 정철의 경우처럼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명감일 수도 있다. 그런데, <산다>에서는 달라진 지점들이 있다. 죄의식과 책임감을 넘어서 정철은 조카 하나를 지키고자 하는 태도를 충실히 보여준다. 이 점은 여자 친구인 진영을 향해서도 발휘된다. 특히, 하나에게 피아노를 사주기로 약속하고 매번 함께 하려는 정철의 모습에서 박정범 영화의 전환점이 일어난다. 순수성을 지키려고 하는 것, 욕을 할 때마다 하나의 귀를 막도록 하는 것은 정철이 순수성을 지키려고 하는 파수꾼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순수성에 대한 집착은 스스로를 무너뜨리기도 하는데, 정철은 일과 돈만이 하나의 피아노와 자신의 무너집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 집착은 된장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어느새 사장의 하수인이 되어 버린다. 끝내, 그들로부터도 배신당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면서도 다른 일꾼들을 내쫓고, 스스로 무너져 버린다. 정철의 집착은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기반이 된다. 이 점은 전작 <무산일기>와도 다른 점이다. 사회적 소수자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승철과는 달리 정철은 명훈을 비롯한 주변인들을 압박하기도 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옥죄는 다채로운 탐구로 나아간다. 박정범의 영화가 변화를 이루고자 했던 야심찬 시도는 세 시간에 육박하는 길이 속에서 이야기의 사슬들을 퍼뜨려 나간다. 하지만 충분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느 자리에선가 감독판을 편집한다면 네 시간이 넘는 버전을 선보이고 싶다고 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박정범 감독이 영향을 받아왔던 것처럼 설명되어 온 다르덴의 영화가 아니라 그 위에 폴 토마스 앤더슨을 겹쳐놓은 것이다. < 데어 윌비 블러드 >(2007)나 < 마스터 >(2012)처럼 죄의식과 집착 그리고 그 위에 구원을 향한 여정이 펼쳐지면서 강원도 어느 산골의 방대한 서사시를 꿈꾸고 있다. 인생의 부조리함 위에서, 조카를 지키고 싶은 파수꾼의 열정을 따라 정철은 오늘도 가로등을 달고, 내일도 일을 할 준비를 한다. 그것은 기꺼이 타락할 수도 있는 세계이다. 명훈에게 자신을 돕는 것은 마트에서 무를 훔치는 것과 같은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삶을 버틸 수 있냐고 질문하는 정철에게 밝은 미래는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박정범의 영화가 서 있는 자리다. 구원없는 구원, 희망 없는 희망을 써 내려가면서 공동체의 몰락 속에서 개인의 무기력한 고군분투기를 그려낸다. 무엇보다 이러한 인물이 등장하는 순간 박정범의 영화가 시작된다. 절반의 분노와 절반의 순수함과 절반의 미숙함과 절반의 열정을 담아. 움직이면서 인물들은 느릿느릿 시간의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쉽게 도래하지 않는 그 곳을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