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마라 두남매
- 감독
- 서석주
- 제작년도
- 1960
- 출연
- 황해, 이경희, 남춘역, 박노식, 이예춘, 도금봉, 박암, 성소민, 최성호, 이원철, 허장강, 추석양, 하지만, 독고성, 지용남, 박복남, 경윤수, 임선자, 신미미, 백현주, 김승호, 전옥
먼저 제목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다. < 둘째 어머니 >(1971)는 그 제목 때문에 첩, 혹은 소실, 별실, 여부인, (예전에는 이렇게도 불렀는데) 작은 댁, 그러니까 돈 많은 집안 남자들이 본부인이 있는 상태에서 조선시대 태조 이후로는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여러 이유로 따로 둔 또 한 명의 부인에 관한 이야기라는 선입견을 가질지 모르겠다. 이 불합리한 관습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그래서 1960년대까지 멜로드라마에서 이 관습으로 인한 서사는 조선시대 사극에 머물지 않고 전후 근대와 여전히 남겨진 봉건이 카오스처럼 뒤섞인 채 또 다른 비애극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둘째 어머니>에서 ‘둘째 어머니’는 두 남매를 둔 남자가 두 남매를 가진 여자와 재혼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제목은 ‘두번째 부인’이라는 표현이 올바를 것이다. 이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까닭은 단지 제목을 정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두 표현은 서로 완전히 다른 뜻이며, 그 맥락도 다르며. 그 말의 용법, 대상, 상황, 법적인 지위와 권리, 사회적인 시선에서도 다르다. 그런데 이야기 안에서 두 번째 어머니의 지위는 처음과 달리 점점 둘째 어머니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마도 그 대목에서부터, 그걸 어느 장면이라고 설명하기는 까다롭지만, <둘째 어머니>는 비애극이라고 멈출 수 있는 순간을 지나쳐서 점점 기괴해진다. 단지 비애의 정서가 과잉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일까.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그 장면들, 거기에 있는 감정의 표지들, 그것들이 지칭하는 대상의 반응, 그들 사이를 구성하는 비애의 형상들이 지나치게 정확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반성적 차원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일단 이 서사가 요구하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자 임권택 은 마치 그 문법에 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감정의 내면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내면 안으로 들어가서, 더 들어가서, 더 깊이 들어가면서, 기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어떤 심급이 작동하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둘째 어머니>가 임권택의 가장 이상한 영화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처음 볼 때도 그러했고 다시 볼 때도 그러했다. 그때 벌어지는 일은 이 영화 안에서 서사의 내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심급의 형식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걸 전도되었다, 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이상한 이야기를 먼저 소개하겠다. 아마도 장황하겠지만 참고 읽어주기 바란다. 그런 까닭은 감정의 변곡점이 지속적으로 출몰하면서 서사를 이리저리 구부러뜨리고 서로 다른 성질의 힘들이 여기저기로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객관적으로 (하지만 영화를 본 다음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나열해볼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 흥열은 어린 두 남매 형태와 형자와 함께 살고 있는 홀아비이다. 남옥은 어린 두 남매 윤호와 윤숙과 함께 사는 홀어미이다. 흥열은 남옥에게 구혼을 하고 두 사람은 결혼한다. 그런데 형태와 형자는 자신들의 집에 들어와 사는 윤호와 윤숙을 미워하고 괴롭힌다. 윤호와 형태가 싸움이 나자 말리러 온 엄마 남옥은 형태의 편을 들고 윤호를 나무란다. 그러자 윤호는 도망치듯 달아난다. 아버지 흥열이 밤거리 버스 종점에서 윤호를 찾고 둘은 함께 포장마차에서 다정하게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일요일에 흥열은 윤호만 데리고 사냥을 간다. 그런데 꿩 사냥을 하던 중 윤호가 실수로 벼랑에 매달리자 흥열은 윤호를 구하고 그 자신은 떨어져 죽는다. 여기서 일단 이야기가 중단된다. (영화가 시작하고 25분 46초) 그리고 십 오년이 흐른다. 형태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형자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 하지만 윤호는 아버지 흥열의 장례식 날 가출을 한 다음 가족과 소식을 끊고 서울 명동에서 건달로 살아간다. 윤숙은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집안일을 하면서 지낸다. 엄마 남옥은 남편 흥열이 세상을 떠난 다음 집안이 몰락했는데도 형태와 형자의 뒷바라지를 하기위해 쉬지 않고 삯바느질 일을 한다. 서울에 갈 때마다 오빠를 찾던 윤숙은 윤호를 만나지만 윤호는 엄마에게 자기를 만났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오빠를 만나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윤숙은 기차에서 그날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동오를 만난다. 윤숙에게 한 눈에 반한 동오는 그녀를 자신의 신붓감으로 생각하고 부모에게 소개하려고 한다. 동오는 건축기사를 꿈꾸는 부잣집 아들이다. 그런데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 온 형자가 우연히 동오를 보고 그를 유혹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형자의 학교 등록을 알아보기 위해 윤숙이 서울에 간 동안 약속장소에 대신 나간 형자는 동오에게 핑계를 만들어 데이트를 한 다음 섬에 가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관계를 가진다. 윤숙은 동오에게 실망하고 떠나고, 동오는 형자에게 키스를 거절하고 떠난다. 그런 다음 이 년이 지난 어느 날 형자는 갓난아이를 안고 고향에 돌아온다. 엄마 남옥은 그 아이가 동오와의 사이에서 낳은 것이라 짐작한다. 그때 동오가 찾아와서 형자에게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는 윤숙이라고 말한다. 그때 엄마 남옥은 동오에게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서 이모 집에 가서 윤숙을 만나보면 안다고 말한다. 고백을 하기 위해 윤숙을 방문한 동오는 형자의 아이를 돌보고 있는 윤숙을 보고 자기를 잊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고 오해하고 떠난다. 윤숙이 그건 오해라고 설명하려고 하자 엄마 남옥은 언니 형자를 위해서 네가 포기하라고 설득한다. 그리고 형자와 동오의 약혼식이 결정된다. 약혼식 날 윤숙은 음독자살을 한다. 형자와 약혼을 하기로 했다는 편지를 받고 여동생을 만나러 온 오빠 윤호가 윤숙을 발견하고 병원에 데려간다. 약혼식을 중단하고 병원에 엄마 남옥과 형자, 동오가 찾아온다. 엄마 남옥이 병실에 누워있는 딸 윤숙을 만나려하자 윤호가 막아서면서 거절한다. 그리고 엄마 남옥에게 자격이 없다고 꾸짖으면서 딸 윤숙에게 준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엄마 남옥이 아들 윤호의 뺨을 때리면서 나는 너희들에게 내 젊음을 주었다, 라고 시작하는 긴 항변을 한 다음 사과를 하고 떠난다. 그때 병실에게 깨어난 윤숙이 아직도 정신을 잃은 채 엄마를 찾는 것을 보고 윤호가 달려나와 엄마에게 사과한다. 엄마 남옥과 형자, 윤호와 윤숙은 동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서 형자 아이의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 형자와 아이, 그리고 그 아이의 아버지는 함께 떠난다. 아마도 소설처럼 읽었다면 중간에 내가 무언가를 빠트렸거나 혹은 착각을 일으켰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대목이 있었을 것이다. 똑같은 느낌을 나는 영화를 보면서 가졌다. 첫 번째 질문. <둘째 어머니>에는 이야기에 포함되어 있지만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사에서도 말끔히 지워진 두 명의 인물이 있다. 이 영화는 1972년 1월 13일에 개봉했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을 그 한 해 전, 1971년 현재라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동오가 형자의 유혹에 굴복하고 윤숙을 떠나간 것이 이년 전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1969년에 윤숙은 동오를 만났고, 두 사람은 사랑의 언어를 나누었으며, 어른이 된 오빠 윤호를 만났고, 그 해에 형자의 오빠 형태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을 것이다. 아직 셈이 끝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15년 전에 윤호를 대신하여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아버지 흥열과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이 있다. 1954년. 한국전쟁이 휴전을 한 그 해 다음의 해. 그런데 우리는 <둘째 어머니>에서 어떤 전쟁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휴전 직후 제작된 많은 영화들은 의도적으로 전쟁을 지웠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거기에 있지 않다. 남옥은 두 남매를 키우고 있고, 흥열도 두 남매를 키우고 있다. 두 집은 마치 거울처럼 마주보고 있다. 그 나이를 미루어 보건데 각자의 부모 아래 해방 직전, 혹은 직후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남옥의 남편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상하게도 윤호와 윤숙은 단 한 번도 자신들의 친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맞은 편을 향해서 똑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질문. 마치 같은 문장을 반복하는 것만 같은 구조. 흥열의 아내는 어디로 간 것일까. 마찬가지로 이상하게도 형태와 형자는 자신들의 친어머니를 단 한 순간도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아버지, 자신들의 어머니와 살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 평생 동안 말하고 (혹은 말하지 않고) 반응한다. (혹은 반응하지 않는다) 나는 구태여 <둘째 어머니>를 비애극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비극과의 구분을 벤야민에 따라 엄밀하게 나눈 것이 아니다. 여기서 구분은 서사의 무대 안와 외부에 있다. 이 서사로부터 한 걸음만 외부로 나가면 진짜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 해방 전후의 남한. 그리고 한국전쟁. 그것이 어떤 비극인지 임권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내내 그걸 찍은 영화감독이다. 임권택은 이 셈을 해보고 여기서 재빨리 안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비극과 비애극 사이의 울타리. 그 울타리 안에서 (그러므로 같은 말이지만 영화 안에서) 금지된 질문, 금지된 호명. 형태와 형자, 그리고 윤호와 윤숙은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둘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원형이 판본이다. 그때 <둘째 어머니>의 비애의 무대는 무언가를 발설할까 두려워하는 어떤 비밀의 전제조건을 품고 있는 것처럼 내게 느껴진다. 어떤 비밀? 진공상태에 놓인 시간. 갑자기 세계의 시간은 여기서 닫혔고, 그들은 예외 없이 그 안에서 활동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필사적으로 진짜 비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디에 갔느냐는 질문을 막기 위해서,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해방 직후에, 한국전쟁 중에 어떻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막기 위해서, 비애극에서 멈춘다. 지금 임권택에게 비애는 방어의 감정이다. 먼저 그걸 말해야 이 기이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는 도피의 장소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일 도피의 장소라면 <둘째 어머니>는 행복한 삶을 어떻게 해서든지 만들어내는 과정이 그 중심에 있어야 했다. 서로 다른 두 남매는 화해를 하고 그들 부모의 뜻처럼 하나의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아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한 편의 드라마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둘째 어머니>는 형자와 윤숙, 혹은 형자와 엄마 남옥, 차라리 형자와 남옥 가족과의 화해의 드라마가 전부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은 마치 형자를 아이와 그 아이의 아버지와 함께 남옥의 가족으로부터 쫓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여기서 행복한 삶, 이라고 말한 것은 왜 그 삶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면 안 되냐는 것이다. 그들은 드라마의 셈을 끝내고 진정한 화해를 하자마자 행복한 삶을 기다리지 않고 영화를 끝낸다. 나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고 싶다. 아버지 흥열은 윤호의 마음을 열기위해 오로지 그와 시간을 보내면서 사냥을 한다. 아버지 흥열은 이 갈등에 권위를 갖고 있는 유일한 중재자였다. 말 그대로 아버지. 공정한 아버지. 자애로운 아버지. 하지만 임권택은 마치 이 행복에 저항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서 여기에 관여하기를 결심한 것처럼, 더 이상 행복해지지 않게 서둘러 균형을 깨트린다. 아버지 흥열은 가장 먼저 퇴장하는 인물이다. 이때 질문은 무엇인가. 그 저항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두 번째 질문. <둘째 어머니>는 보는 동안 종종 누가 주인공인지를 놓치게 된다. ‘둘째 어머니’ 남옥이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남옥은 그렇게 자주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종종 외곽으로 물러나버린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오히려 아버지 흥열이 죽고 난 다음 남매들이 어른이 되자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는 사람은 윤숙이다. 그런 다음 마치 이야기는 윤숙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처럼 이루어져 있다. 약간 관점을 바꾸면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다. 비애극의 주인공은 자기의 상황에 감옥처럼 갇혀있는 자이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이야기가 안겨주는 모든 시련을 견뎌야한다. 그때 그(녀)는 홀린 것처럼 그 상황을 떠나지 못한다. 그러면서 떠나지 못하는 이유에 관한 알리바이를 만들거나 혹은 운명처럼 받아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윤숙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시련은 어디서 오는가. 그녀에게 진정한 시련을 안겨주는 사람은 형자가 아니라 그녀의 친어머니 남옥이다. “윤숙아, 한 번만 더 참아라, 형자의 행복을 빌자” 윤숙은 반복되는 시련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행위에 이른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완전히 파괴하려는 결단. 만일 윤숙의 단 한 번의 시도가 성공했다면 모든 관계는 남김없이 파괴되었을 것이다. 어머니 남옥은 “반드시 너희들에게 밝은 앞날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다”는 알라바이를 말할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다. 동오는 남옥과 형자의 거짓된 약혼식을 파혼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오해하고 그 대상을 파괴한 것이 자기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남은 삶 전체를 지내야했을 것이다. 정확하게 반대의 자리에서 형자는 모든 것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죄책감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유일하게 사랑을 베푸는 대상인 여동생을 잃은 오빠 윤호는 어머니 남옥을 끝내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윤숙은 그렇게 시련을 받으면서 주인공이라는 자리의 특권을 얻게 된다. 하지만 왠지 이 설명이 영화를 보고 나면 충분하지 않다고 망설이게 된다. 왜 그러한가. 어머니 남옥은 자주 나오지는 않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어떤 결정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숙이 자살을 결심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어머니에 대한 유일한 저항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오빠 윤호가 집을 떠난 다음 폭력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잠시 보여주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고향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지 않은 까닭은 여전히 어머니가 무섭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왜 무서운가. 나는 동어반복의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남옥이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윤허가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옥이 아니라 어머니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끝내 저항하지 못한다. 형자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고 하면서 등록금을 유흥비로 써버리며 마치 계모인 남옥을 마음껏 착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가 아이를 낳은 다음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곳은 남옥이 기다리는 고향집이다. 남옥는 마치 이 모든 인물들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그 중앙에 있으며 끝까지 그 힘을 잃지 않는다. 그 힘은 어디서 오는가. 한 번 더 같은 말을 하겠다. 남옥이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라는 자리의 힘. 이때 여기서 그 힘은 두 배가 된다. 왜 그러할 수 있는가. 아버지의 자리가 비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리까지 남옥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질문, 윤숙은 사랑의 대상이다. 그녀는 마치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사랑을 받는다. 나는 단지 지금 동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동오보다 더 윤숙을 사랑하는 사람은 오빠 윤호일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근친상간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 둘 사이에 드리워지지는 않는다. (서로 배다르기는 하지만) 임권택의 영화에서 남매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생겨나는 것은 <서편제>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윤숙과 윤호 사이에서 이상할 정도로 서로를 잡아당기는 어떤 힘을 본다. 두 사람이 어른이 된 다음에 처음 만나는 장면. 서울에 올라온 윤숙은 명동의 사교 클럽을 돌아다니면서 윤호를 수소문한다. 윤호가 한 걸음 늦게 여동생 윤숙이 자기를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밤거리를 찾아다닌다. 이때 윤호가 윤숙을 알아보는 장면은 그 둘 사이에 어떤 사랑의 정감이 감도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어느 거리에서 그저 우연처럼 마주치는 대신 윤호는 어두운 밤거리에서, 불빛도 충분하지 않은데, 윤숙이 등을 돌리고 불 꺼진 양장점의 옷을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을 보고도 오랜 동안 보지 못한 여동생이라는 걸 알아본다. 아무 장소, 아무 시간, 심지어 등을 돌리고 있어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 오랜 동안 보지 못한 내 동생, 나는 너를 언제든지 알아볼 수 있단다. 그저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존재. 윤호는 내내 여동생 윤숙을 마음속에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뒷모습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만들어내는 어떤 기호들. 그걸 알아보는 건 그 기호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이 가능한 일이다. 혹은 그 기호를 신호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전달되는 어떤 힘들. 그 힘은 무엇인가.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 다음 그 둘은 반가움에 남매라고 하기에는 과잉할 정도로 껴안는다. 형식적인 시선의 교차로부터 육체적인 몸의 터치에로의 이행. 하지만 그 둘은 자신들의 반가움 사이에 무언가 과잉하고 있다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 장면을 기차 통로에서 동오와 윤숙이 마주치는 순간과 비교해보라. 기차 통로에 서 있는 윤숙을 그날 제대한 동오는 부딪치고 지나가면서 “실례 합니다”라고 인사한다. 그때 재빨리 임권택은 두 사람 사이에서 시선이 오가는 걸 보여준다. (shot_reverse shot) 시선이 무엇을 건드렸는지는 알지 못한다. 형식적인 교차로부터 심리적인 터치에로의 이행. 하지만 이 시선의 교환이 윤숙의 무언가를 건드렸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동오를 잃어버리는 대신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까지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동오도 도덕적 수치 때문에 잠시 동안 윤숙을 포기하지만 결국 돌아와서 다시 윤숙에게서 사랑을 기대한다. 물론 윤호와 동오가 윤숙을 사이에 두고 사랑의 대결을 벌이지는 않는다. 반대로 윤호는 부탁을 받은 것도 아닌데 무려 이 년 동안 수소문 끝에 동오를 찾아와 윤숙이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배달자의 역할을 기꺼이 맡는다. 자신이 배달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건 윤호가 사랑의 대상을 바라보는 대신 자기 자신을 사랑의 순환 안으로 밀어 넣는 행위이다. 둘 사이의 차이. 윤호와 윤숙 사이의 거리. 지나치게 가깝지만 그러나 끝내 좁혀지지 않는 거리. 이때 오빠의 자리는 사랑의 대상에 다가가는 것을 도와주는 척 하면서 계속해서 밀어내는 호명이다. 윤호는 동오를 만나서 윤숙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줄 때 윤호는 자발적으로 자기의 자리를 사랑이 진행되는 전체 퍼포먼스의 일부로 옮겨간다. 그렇게 해서 이 사랑의 과정이 중단하지 않고 계속 진행될 수 있게 돕는 비결정상태의 역량의 일부, 좀 더 친절하게 사랑의 실현을 위해 활동하는 갑작스러운 도약의 계기, 말하자면 사랑이 이루어지는 제작방식에 뛰어든다. 어떤 방식? 사랑의 네트워크를 이어나가는 가능한 실행. 여기서 윤호가 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단순한 대답. 동오를 윤숙에게 발송하는 것이다. 역설적인 보충. 이때 윤호는 윤숙이 동오에게 발송하지 않은 편지이다. 나는 단지 비유적으로 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장면. 동오는 윤숙을 만나러 오기 전에 먼저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낸다. 그런데 그 편지는 윤숙에게 한 번은 도착하고 다음 한 번은 도착하지 않는다. 첫 번째 편지는 동오가 떠나면서 보낸 편지이다. 그런데 두 번째 편지는 돌아올 것을 약속하는 편지이다. 다시 시작하자는 다짐의 편지. 사랑의 편지, 하지만 이 편지는 도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엄마 남옥이 그 편지를 우체부에게서 받아본 다음 발신자를 확인하고 그 내용을 먼저 열어보기 때문이다. 행방불명된 편지. 나는 이야기를 다시 조금 앞 쪽으로 되돌리겠다. 네 번째 질문, 여기서 윤숙과 동오의 가장 이상한 장면은 (이 말을 주의 깊게 읽어주기 바란다) 있어야 할 장면이 없다는 것이다. 무언가 사라진 장면. 생략한 것이 아니라 들어올 틈이 없는 장면. 윤숙과 동오는 서로 시선을 교환한 다음 다시 만날 약속을 한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남에서 동오는 윤숙을 자신이 부모에게 소개하겠다고 다시 약속한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약속을 한 날에 엄마 남옥이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고 윤숙은 병실을 지켜야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동오는 윤숙을 찾아와 남옥에게 인사를 한 다음 세 번이나 작별인사를 하면서 그 자리에 머물면서 자기를 소개한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윤숙과 동오의 데이트 장면의 전부이다. 무엇이 거기에 없는가. 동오가 윤숙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시간이 없고, 윤숙이 동오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이 없다. 그 대신 <둘째 어머니>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퀀스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오가 윤숙을 만나러 간 자리에 대신 나와 있는 형자와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다. 아마 이 장면들은 임권택의 모든 영화들 중에서 가장 예외적이라고 할 만큼 이상한 리듬과 자유간접화법의 시선으로 갑자기 세계가 팽창하듯이 펼쳐진다. 여기에 이야기가 도착할 때까지 <둘째 어머니>는 몇 개의 장소, 남옥의 집과 몇 개의 방, 제한적인 장소에서 계속해서 마치 여기서 나가면 저기로 나오듯이 반복해서 되돌아왔다. 그런데 형자가 동오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 나무들이 늘어선 것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공허하리만큼 텅 비어있는 한 겨울의 교외로 옮겨갔을 때 마치 이 장소는 이제까지 진행하던 영화의 답답하리만큼 비좁은 네트워크들로 서로 촘촘히 이어진 무대로부터 탈출하여 바깥 세계로 나온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래서 심지어 이 시퀀스 전체가 윤숙이 중심에서 잠시 벗어난 틈을 이용해,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영화가 잠시 잠든 틈을 이용해 드러난 꿈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갑자기 장면은 강 위에 떠 있는 작은 보트를 타고 가는 동오와 형자에게로 옮겨간다. 우리가 내내 본 것은 남옥이 살고 있는 고택(古宅)의 전경과 그 실내의 이 방과 저 방, 그리고 이따금 방문하는 서울의 그 해 겨울의 건조하고 무질서한 건물들의 풍경이 전부였기 때문에 강 위에 흘러가는 보트에로 데려왔을 때 마치 영화 안에 있기는 하지만 이야기 바깥으로 나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말하자면 이제까지 이 사랑의 네트워크 사이에 자리한 심리적인 갈등과 가족으로 만들어진 위계질서가 비가시적인 드라마를 만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여기서 형자와 동오의 데이트가 시작하는 강 위에 떠 있는 보트의 장면은 수수께끼처럼 보일만큼 회화적인 운동이 화면을 압도한다. 임권택은 그걸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강위에서 운동은 수평으로 진행된다. 강이라는 표면. 그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작은 보트. 보트의 수평 운동. 그런 다음 갑자기 형자와 동오가 보잘 것 없게 보일 정도로 하늘을 향해 높이 치솟은 나무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이때 이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수직의 선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하지만 임권택은 수평의 운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때 매우 이상한 운동이 나온다. 갑자기 텅 빈 화면에서, 정확히 말하면 나무들만 보이는 풍경에서, 일정한 거리만큼 물러나있는 카메라는 수평으로 왼쪽에서 (travelling_shot) 오른 쪽으로 이동한다. (S#_1) 그러면 그 수평 이동의 끝에 형자와 동오가 멀리 보인다. 이제까지 인물들에게 카메라가 달라붙어있었던 것만 같았기 때문에 이 운동은 마치 떨어져 나온 것처럼 자유롭게 느껴진다. 형자와 동오는 나무들 사이를 걷는다. 그때 걸어가는 형자와 동오를 수평으로 세워진 나무들 저 편에서 이번에는 그 반대 방향으로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이동하면서 멀리서 쳐다본다. (S#_2) 이 이상한 운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정한 거리만큼 물러나있던 형자가 다가와서 말을 하며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하지만 동오는 어색하게 걷는다. 그때 두 사람과 아무 상관도 없이, 그저 난데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강위 수면을 따라서 카메라가 수평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갑자기 나온다. (insert_shot) 텅 빈 강의 수면. 거기에 볼 것이라곤 카메라의 이동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다. 동오가 시선을 돌린 것도 아니다. 형자는 옆에 있는 동오에게 관심을 집중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이 난데없는 장면은 무엇인가. 어색하긴 하지만 단 한 가지 설명만이 가능하다.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고 있는 보트의 운동, 형자는 내리자마자 동오 몰래 보트를 묶어놓은 밧줄을 풀어버렸다. 동오와 형자로부터 멀어지는 보트. 그래서 보트는 지금 떠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이 떠내려가는 보트의 쇼트는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동오가 형자에게 이제 늦었으니 돌아가자고 말한 다음 한 번 더 나온다. 물론 동오와 형자는 그 보트를 발견하지 못한다. 떠내려가는 보트의 쇼트는 동오와 현자의 동선과 완전히 독립된 것이다. 두 개의 운동, 두 개의 보트의 쇼트. <들째 어머니> 안에서 특이한 사건이라고까지 부르고 싶은 이 장면들은 무엇을 향한 것일까. 여기서 내가 주의 깊게 본 것은 두 개의 운동, 두 개의 보트의 쇼트 사이의 공통점이 대상에서 멀리 떨어져있다는 것이다. 어찌 해볼 수 없을 만큼 떨어져있는 거리. 여기 있어야하는 데 여기에 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물론 그건 윤숙이다. 이때 윤숙 대신 갑작스럽게 풍경을 수평으로 이동하고 대화 사이에 끼어들듯이 지나가는 보트의 쇼트는 동오와 형자를 바라보는 도덕의 시선이다. 어찌해볼 수 없을 만큼 멀리 있지만 그러나 그 시선은 지금 여기서 바라보고 있다. 형자와 동오의 데이트 시퀀스 앞과 뒤에 윤숙의 씬이 마치 감싸듯이 놓여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제 이 질문들에 대해 대답할 차례이다. <둘째 어머니>에서 등장인물 모두를 괴롭히는 것은 누구도 끝내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대상 앞에서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누군가는 전부를 누군가는 부분을 포기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완전한 만족을 얻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인 것처럼 우울한 상태가 된다. 형자는 동오를 얻는데 실패하고, 그 과정에서 동오는 윤숙에게 도착하지만 아마도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할 것이며, 윤숙은 동오가 자기에 안겨준 죄의 이면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윤호는 제 할 일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확하게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상태로 시작해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상태로 돌아간다. 그리고 ‘둘째 어머니’ 남옥이 남는다. 이 이야기의 수수께끼. 모든 순환은 번번이 남옥에게 이르면 갑자기 불투명한 상태가 되거나 목표를 잃거나 방향을 바꾸거나 대상이 부서진다. 우리는 매번 이 순환이 남옥을 올바르게 통과한다는 기분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남옥에게 도착하면 갑자기 불안을 맛보게 된다. 왜 그런 기분을 갖게 되는가. 남옥에게 도착하면 매번 무언가를 거기서 잘라내는 절단과 마주하게 된다. 무엇을 무엇으로 잘라내는가. 두 개의 장면. 첫 번째 장면. 어린 윤숙의 곰 인형에 대한 사랑. 어린 형자는 이 곰 인형을 뺏어간다. 그러자 엄마 남옥은 새 인형을 사줄 테니 언니에게 주렴, 하면서 달랜다. 그러자 오빠 윤호가 엄마 남옥에게 화를 내면서 말한다. 이 공 인형은 친 아버지가 사준 선물이에요. 물론 형자는 그걸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걸 남옥이 모를 리가 없다, 두 번째 장면. 엄마 남옥은 윤숙이 동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또한 동오가 윤숙을 사랑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남옥이 입원한 병원에 동오가 병간호를 하는 윤숙을 찾아와 밤 열한시까지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고 가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행복한 시퀀스이다. 그런데 형자가 동오를 원하자 엄마 남옥은 윤숙을 포기시키기 위해서 거의 모든 수단을 사용한다. 잘 알고 있는 남옥,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남옥은 번번이 친딸 윤숙대신 의붓딸 형자의 편에 서는 것일까. 객관적인 공정성에 따른 이해의 관점. 그때 그 둘의 선택은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다. 곰 인형은 윤숙의 것이었고, 형자는 그것을 강제로 빼앗은 것이다. 그런데 남옥은 그 곰 인형을 언니 형자에게 양보하라고 요구한다. 동오는 윤숙을 사랑하고 윤숙도 동오를 사랑한다. 그 둘 사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 사이에 들어온 형자이다. 그런데 남옥은 윤숙에게 동오와의 결혼을 형자에게 양보하라고 요구한다. 남옥은 윤숙에게 정확하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 여기서 남옥이 윤숙에게 동오를 형자에게 양보하라고 요구하는 장면과, 그런 다음 윤숙이 음독자살을 시도해서 병원에 실려간 다음 남옥과 윤호가 나누는 대화는 다소 길지만 인용할만한 가치가 있다. 첫 번째 장면. 윤숙은 자신이 엄마 남옥의 함정에 빠져 동오가 자신을 포기하고 형자에게 가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오씨만은 못 뺏기겠어요. 나를 짓밟고 형자 언니를 위하는 것도 한도가 있어요. 너무해요, 정말 모두 너무들 해요” 그러자 남옥은 마치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이 말한다. “글쎄, 왜 그러니” 하지만 윤숙은 선언하듯이 말한다. “동오씨 만나겠어요. 그리고 애기를 언니 애기라고 분명히 말 하겠어요” 그리고 돌아서서 방을 나가려고 한다. 그러자 남옥은 “윤숙아”라고 부른 다음 돌아보는 윤숙의 뺨을 때린다. 그런 다음 말한다. “너 언제부터 이렇게 됐니, 너 언제부터 이렇게 엄마 앞에서 이렇게 도도해졌냐 말이다. 어서 가서 말해라. 언니는 애기가 누군 줄도 모르는 아이를 낳은 불순한 여자이니 언니를 버리고 너하고 결혼하자고 말이야, 그럼, 형자는 어떻게 하니, 그러면 형자는 집을 뛰쳐나가 또 다른 애비를 모르는 자식을 낳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오겠지, 그 꼴을 봐야겠어. 엄마가 그 꼴을 봐야겠느냐 말이다. 윤숙아, 넌 엄마의 친딸이야. 누가 뭐래도 난 친엄마야. 하지만 형자는 아무도 없지 않니. 지 오빠는 미국에 가 있고, 형자는 외로운 아이다, 그래서 타락한 거야, 이번에 우리 힘으로 구해줘야 하지 않겠니. 한 번만 더 참아라, 형자의 행복을 빌자” 그러자 윤숙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동오에게 가는 대신 자기 방으로 돌아온 다음 울면서 말한다. “전 못해요, 죽으면 죽었지 못해요” 남옥이 한 가지 몰랐던 것은 윤숙의 이 말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자살을 시도하는 선언이었다는 것이다. 윤숙은 약을 먹는다. 두 번째 장면. 병실에 윤숙이 누워있을 때 약혼식장에서 엄마 남옥이 달려온다. 그러자 윤호가 병실을 막아서고 엄마 남옥이 병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이 방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자 의사가 윤호에게 묻는다. “자네는 윤숙에게 무얼 해주었나?” 윤호가 대답한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남옥을 가리키며) 이 분도 윤숙에게 준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의 어머니들이 다 주는 그 흔한 모정마저도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 부끄럽게 얼굴을 숙이고 있던 남옥이 윤호의 뺨을 때리면서 긴 대사를 한다. “괘씸한 놈, 준 게 없다고? 받은 게 없다고? 난 너희들에게 내 젊음을 주었어. 너희들 때문에 젊음이 시들어가는 걸 보고도 아까운 줄 몰랐다. 내가 재혼을 한 것도 너희들 때문이고 형태나 형자를 위한 것도 너희들 때문이었다. 난 형태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 가문이 몰락했을 때, 우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최씨 가문을 지키는 게 내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게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에미, 내게 희생을 강요하고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아왔다. 그러면 반드시 너희들에게 밝은 앞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게 에미가 너희들에게 줄 수 있는 애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되다니, 사과 하마,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말아 주거라. 에미는 한 번도 에미를 위한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그것만은 믿어줘” 형식적으로만 말하면 이 대사 장면은 김지미의 (그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더빙이긴 하지만) 가장 훌륭한 연기중의 한 순간이다. 임권택은 이 장면의 대사를 나누지 않고 하나의 쇼트로 찍었다(long_take) 여기까지 이야기를 따라왔다면 이 대사가 얼마나 불합리한 지 누구라도 알 것이다. 그런데 기괴하다고 밖에 달리 말할 도리가 없는 이 장면에서 김지미는 (나는 의도적으로 배역이 아니라 배우의 이름을 쓰고 있다) 자신의 표정으로 그걸 설득해내고 있다. 이 장면은 그저 임권택의 김지미에 대한 믿음이라는 표현 말고는 달리 말할 수 없는 쇼트이다. 이 두 개의 장면, 엄마 남옥이 윤숙에게 요구하는 장면과 병실 앞에서 윤호에게 자신을 설명하는 장면은 서로 연결된 하나의 세계이다. 어떤 세계? 회계 장부의 세계. 남옥은 계속해서 계산을 한다. 외로운 형자의 불행에 비하면 윤숙아, 너는 얼마나 행복하니. 친엄마가 곁에 있지 않니. 그러니 우리 힘으로 형자를 구해주어야 한다. 고개를 돌려 윤호에게 말한다. 너희들은 내 젊음을 가져갔어. 그런데 준 게 없다고, 받은 게 없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희생을 강요했고 그게 내 의무라고 생각했어. 이 계산 앞에서 윤숙과 윤호는 어머니의 희생을 알지 못하는 배은망덕한 자식이 된다. 당신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이 계산이 어떻게 성립하나요. 이때 남옥의 결정적인 말, “(중략) 내 의무라고 생각했다” 의무, 라는 무시무시한 말. 남옥은 자식들을 희생시키는 그 자리에 가서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을 의무라는 명령 아래 수행하는 중이다. 왜 그런 의무의 자리에 가야하나요. 이때 남옥의 계산은 이중장부가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머니의 장부이지만 그 장부의 행간에는 두 명의 어머니가 서로 다투고 있다. 얼핏 보면 이 두 명의 어머니가 윤호와 윤숙의 어머니와 형태와 형자의 어머니로 보이지만 여기서 진정한 인정투쟁은 남옥과 (형태와) 형숙의 친어머니 사이에서 벌어지는 중이다. 남옥이 얻고 싶어 하는 진정한 자리는 (미국에 간 다음 영화에서 완전히 사라진 형태와) 형숙의 친어머니의 권위이다. 남옥은 그걸 얻을 수 있다면 친딸 윤숙을 희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왜 이런 이상한 장부가 생겨난 것일까. 이때 이 기괴한 이야기를 성립시키는 요구의 동사, 그래서 그 자리를 차지하는 활동의 순환이 복종하는 힘은 남옥의 욕망이 아니라 의무에서 온 것이다, 어떤 의무? 남옥이 말을 빌리면 “최씨 가문을 지키”라는 명령. 그게 왜 의무가 되나요. 그걸 지키는 동안은 남옥은 최씨의 아내 자리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옥이 견딜 수 없는 것은 자신이 그 누구의 아내도 아닌 상태의 미망인이 되는 것이다. 그게 왜 견딜 수 없나요. 그렇게 되면 윤호와 윤숙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되기 때문이다. 이 이상한 순환의 논리. 그래서 남옥은 형태와 형자를 위해 “한 번 더 참아라”라고 요구하면서 그 행위가 “너희들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본 적이 없다”는 희생의 논리를 완성시킨다. 물론 이 논리의 허구를 지적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알겠어요, 어머니. 그런데 제 자리는 어디에 있나요. 윤숙의 반문. 하지만 윤숙은 반문하는 대신 자살의 행위를 택한다. 여기서 내가 궁금한 것은 남옥의 자리에서 이 수수께끼를 성립시키는 의무의 논리이다. 남옥의 희생이 통상적인 모성애에 관한 멜로드라마 판본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이 의무의 논리가 남옥이라는 개인보다 더 큰 어머니의 자리에서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위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옥은 동오를 사이에 놓고 동오와 윤숙, 그리고 동오와 형자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 동오와 형자의 항을 선택했다. 이때 남옥의 의무가 바라보는 자리에서 그 선택은 (우리가 바라보기에는)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 사이에서 나쁜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나쁜 선택과 더 나쁜 선택 사이에서 나쁜 선택을 한 것이다. 왜 윤숙과 동오가 더 나쁜 선택인가. 형자가 남옥 곁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은 남옥에게 상징적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포기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친어머니로서 윤숙에게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나쁜 편이 어머니로서 의무를 포기함으로써 상징적 어머니의 자리가 말소되는 더 나쁜 선택보다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남옥은 상징적 어머니의 자리가 폐제된 다음 그 장소가 텅 빈 상태의 공백으로 남겨지는 공허를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때 난처한 상황은 무엇인가. 남옥의 의무에 따른 행위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은 그녀 자신 안에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남옥이 차지한 자리가 어머니의 장소이기 때문에 이 세계의 질서에 관한 거의 절대적인 권리를 갖는다. 이때 이 의무의 행위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징적 어머니의 순환 회로를 고장 나게 만드는 것뿐이다. 윤숙은 자살을 시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순환은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하지만 이것은 위험한 내기이다. 이 시도는 언제나 절반은 성공할 가능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마주치는 가장 우울한 순간은 이 중단이 그 누군가의 절망적인 자기 파괴의 시도 다음에야 도착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우리를 내내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은 의무가 아니라 이 의무의 행위를 중단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무엇이 무엇을 잘라내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그 의무의 행위를 끊임없이 지치지 않고 시도하는 상징적 어머니의 자리로부터 남옥을 잘라내는 유일한 시도로서 순환회로를 부수기 위해 그 회로를 성립시키는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분리의 순간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다행히도 윤숙의 시도는 실패한다. 그런 다음 이야기 안의 약속의 장치들은 등장인물들 모두를 재빨리 장르의 안전한 마지막 잠면, 그러니까 해피엔딩으로 되돌려 보낸다. 하지만 임권택은 그 결말에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영화가 끝난 그 다음 장면에서 어떤 해피엔딩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형자와 제 시간에 맞춰 나타난 남자는 그들의 아이와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년 동안 자신의 아이와 함께 사라진 자신의 아내 형자에 대해서 언제 질문을 던질까. 정확하게 같은 의미로 동오와 결혼한 윤숙은 언젠가 형자와 보낸 밤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 동오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형자가 떠나간 다음 남옥은 이제부터 자신의 공백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침묵은 언젠가 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균열을 내장하고 있는 엔딩에 아무 것도 보충하지 않는다. 그 대신 <둘째 어머니>에서 어머니에 관한 악순환의 이면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준 다음 물러난다. 아직 충분히 대답하지 않았다. 임권택은 어머니, 라는 자리에로 계속해서 되돌아올 것이다. 커다란 순환. 그러므로 나는 몇 번이고 다시 어머니, 라는 의무의 악순환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에... (계속)
이종기 는 감독으로 데뷔한 1963년에 무려 다섯 편의 영화를 찍었다. 덕혜옹주 전기영화인 < 백년한 >, 제목만 봐도 내용을 알 수 있는 < 광야의 왕자 대 징기스칸 >과 < 율곡과 그 어머니 >, 멜로드라마인 < 대전발 영시오십분 > 그리고 추리물인 < 범인은 너다 >. 요새 기준으로 보면 거의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성취지만 당시 영화 제작 속도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이상한 정도는 아니다. 이들 중 필름이 남아 있는 작품이 단 한 편도 없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지만 역시 이상한 일은 아니다. (KMDb에 따르면 이종기의 감독작 중 지금 필름이 남아 있는 것은 단 한 편, 1969년에 찍은 < 이별의 모정 >뿐이다.) 나는 종종 단 한 편의 영화도 필름으로 남기지 못한 수많은 60년대 감독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 대다수는 어차피 필름이 있어도 잊혔겠지만. 이야기는 점점 애잔해진다. 이제부터 그가 각본까지 쓴 추리물 < 범인은 너다 >를 소개할 텐데 솔직히 시나리오를 읽어도 이 작품을 굳이 영화로 볼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소개하는 이유는 지금은 대부분 멸종한 과거 이야기꾼 습관들이 신기할 정도로 많이 남아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포스터 포스터를 보고 내용을 추리해보자. 영화가 다루는 건 소녀유괴사건이고 주인공은 은퇴를 앞둔 노형사인 모양이다. < 범인은 너다 >라는 제목을 쓴다면 이건 추리물이고 그 ‘범인’은 영화 내내 범인이 아닌 척 굴면서 주변을 맴돌며 음모를 꾸미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야 형사가 악당을 가리키며 “범인은 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으니까. 신기하게도 감독 이종기 는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옛날 한국 장르 영화가 현대 관객들에게 종종 이상하게 보이는 이유는 대부분 당연함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우리가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인물은 금성전업이라는 회사에 다닌다는 신시우라는 청년이다. 그는 지나가는 차를 세우고 교통사고를 당한 윤옥이라는 병원으로 데려간다.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그가 주인공인 노형사 신철호 주임의 아들이고 금성전업 사장의 딸인 수미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 칼럼을 쓰느라 옛날 영화 시나리오를 뒤지면서 눈치챈 것이 하나 있는데, 60년대 영화에는 유달리 자기보다 높은 계급의 여자와 결혼을 앞둔 남자들이 많이 나온다. 거의 요새 연속극의 신데렐라 수준이다. 단지 여기서 연애 과정은 수상쩍을 정도로 제거되어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이들은 이미 약혼한 상태이다. 두 사람이 만난 이유도 여자의 아빠인 보스가 남자주인공을 좋게 보았기 때문인 경우가 많고, 데릴사위 이야기도 은근히 많이 나온다. 이런 영화에서 남자주인공에게 결혼은 로맨스의 결과가 아니라 신분상승의 과정이다. 60년대에 주인공이었던 이들이 세월이 흐르면 연속극 악당이 되는데, 나에겐 이게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보인다. 이종기 는 신철호 주임의 집안 장면을 통해 신철호의 직업이 경찰이고 자식들에게 엄격한 아버지라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넣는다. 영숙: 아유 기분 나뻐! 나 오늘 아버지 땜에 학교에서 애들하구 싸웠어! 철호: 공부는 안하구 미친년처럼 뭣하러 싸워! 영숙: 아버지의 그 날카로운 눈초리 때문이죠, 뭐! 김부인: 너도 내년이면 대학에 갈 애가 뭔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철호: 고등학교 이상은 안돼! 부엌일이나 하다가 시집이나 가! 영숙: 가래두 안가요. 쨔브의 딸이 대학에 가서 뭘해요? 철호: 뭐 쨔브? 영숙아 너 그 말 어디서 배웠니? 영숙: 학교애들이 쨔브의 딸이라고 놀리니까 배웠죠! 가족의 화목한 대화는 집에 걸려온 전화로 중단된다. 철호는 르발 다방 사건으로 불리는 유괴사건을 수사 중인데 그만 유괴된 아이가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수사본부의 형사들은 호들갑 떤 언론을 비난하지만 그래도 주인공인 철호는 최종책임이 경찰에게 있다는 걸 안다. 경찰서에서 철호는 막 접수된 ‘악질운전수’ 사건의 증인이 그의 아들 시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어지는 경찰서 장면과 회사 장면에서 시우가 얼마나 반듯하고 잘 났고 운도 좋은 청년인지 알려주는 대사들을 끝도 없이 들어야 한다. 두 번째 유괴사건이 일어난다. 다들 예상했겠지만 이번에 유괴된 사람은 곧 철호의 사돈이 될 윤 사장의 딸 수영이다. 그러니까 시우의 약혼녀 수미의 동생인 것이다. 유괴범의 협박편지가 날아들고(“돈이 필요해서 댁의 수영이는 내가 맡아 있오. 경찰에 알리면 수영이가 어떻게 된다는 건 알아서 처리하시오.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진 조용하게 기다리시요.”) 당연히 가족은 경찰에 알린다. 아이의 안전보다 철호를 개입시킨다는 스토리의 논리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형사가 사돈 집안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이니 좀 맥이 풀리긴 해도 이 뒤의 수사 묘사는 군더더기 없고 진행도 빠른 편이다. 윤 사장이 김남규라는 직원을 최근에 해고했고 르발 다방 사건의 협박 편지와 이번 편지의 필체가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한 경찰은 르발 다방 주인에게 김남규의 사진을 보여주고 그의 본명이 김영일이며 자주 온 단골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하지만 체포하고 보니 그는 알리바이가 있고 그의 죄라고는 위조증권을 팔려 했다는 것밖에 없다. 이때 철호에게 협박전화가 걸려온다. “당신이 명수사관이라고는 하지만 이번 유괴사건의 수사는 중단하시오. 당신의 아들도 하나의 범죄자요. 이상 더 수사를 계속하면 나는 당신의 아들의 죄상을 폭로하겠오!” 여기서 나는 협박범을 연기하며 “당신의 아들도 하나의 범죄자요” 같은 대사를 읊어야 했던 당시 성우의 고충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 시우에게 뭔가 있기는 하다. 유괴사건과 아무 상관도 없는 교통사고 이야기로 영화를 시작한 것도 그렇고, 그 뒤에도 교통사고 피해자 윤옥 주변을 얼쩡거리는 걸 보면. 철호는 아들에게 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수사는 진행된다. 전화추적을 통해 공중전화로 윤 사장에게 협박을 한 서대문 꽃제비 용이라는 남자가 잡힌다. 그는 자기가 심부름만 했을 뿐이고 주범은 박영기라는 남자라고 자백한다. 하지만 영기는 아이와 함께 사라졌고 이번엔 시우에게 아버지의 수사를 중단시키라는 쪽지가 날아든다. 여기까지가 현대 관객들이 일반적인 유괴사건 영화의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종기가 < 범인은 너다 >를 쓰면서 진짜 ‘내용’이라고 생각했던 건 다음에 나온다. 알고 봤더니, 뺑소니를 치고 달아난 ‘악질운전수’는 시우 자신이었다. 협박 편지에 겁먹고 죄의식에 시달린 시우는 수미와 일단 파혼을 하고 사고로 한쪽 팔을 못 쓰게 된 윤옥과 결혼하려 한다. 윤옥에겐 이미 김군이라는 약혼자가 있는데도! 철호는 자수하라고 권유하지만 시우의 대답은 대충 이런 것들이다. “아버지는 위선자예요. 자기 독단의 정의감 때문에 우리들의 행복을 이렇게 짓밟아도 괜찮아요?” “아버지는 자식이야 어떻게 되건 말건 비겁할 정도로 자기만 정당한 위치에 서실려구 해요. 순간의 앗차 실수로 한 평생을 한 여성에게 바치겠다는 눈물의 호소는 들리지도 않으세요?” 그럼 자기가 차로 당신을 치어서 미안하니 결혼해달라고 우기는 남자를 보는 윤옥의 입장은 생각이나 해봤니? 여러분은 여기서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계속 이어질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천만에. 갈등은 여기서 끝이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 이미 시우는 아빠에게 떠밀려 자수를 했고 아빠는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과장에 따르면 사표는 상부에서 ‘보이코트’당했고, 철호에 따르면 자백을 들은 윤옥과 윤옥의 오빠 윤식은 다 용서했단다. (“자식놈을 감옥에 보내면 자기들 두 남매가 당국에 호소하겠다나요.”) 감동한 과장은 철호에게 말한다. “그게 다 신주임이 착한 탓이오. 이번 신주임 부자지간의 아름다운 얘기는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고 나는 자부하고 싶소.” 아무래도 이 양반은 ‘아름다운’이라는 단어를 나와 다른 의미로 쓰나 보다. 자백한 뒤에도 시우는 윤옥과 결혼하겠다는 망상을 버리지 못한다. 약혼자가 있다고 분명 밝혔는데도 심지어 이제 사랑하게 되었다고 애걸복걸한다. 이 정도면 스토커 수준이고 수미 입장에선 결혼 전에 약혼자가 이런 남자인 걸 알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 하겠는데, 이 영화의 세계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심지어 꽃까지 들고 윤옥의 병실에 찾아와 “두 분의 애정이 진실하다면 저도 후원을 애끼지 않겠어요” 따위의 소리나 하고 있다. 동생이 살인범에게 유괴되어 목숨이 위태롭다는 건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지? 하여간 윤옥이 계속 거절하자 이 모든 소동은 없었던 일이 되고 모든 게 마무리된다. 아, 참. 유괴사건. 알고 봤더니 박영기는 시우의 중학교 동창이었고 우연히 교통사고를 목격해서 협박용으로 쓴 것이다. 여기서부터가 클라이맥스여야 할 텐데 각본상에서는 영 허술하다. 약속장소에 나온 영기는 수미에게서 10만 원 받고 수영을 돌려준다. 하지만 이미 경찰이 포위하고 있어서 그는 곧 체포된다. 자신의 협박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 그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 따위는 생각해 본 적도 없나 보다. 물론 작가 이종기는 시우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범인을 체포하고 아이를 구출하는 건 그냥 형식적인 결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겠지. 인물 관계도
< 만추 > ( 이만희 , 1966) 우리들이 함께 영화를 보는 공동체라면 영화의 역사가 상상의 시네마테크인 것처럼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다. (적어도 한국영화에서, 우리들에게) 1966년은 이만희 의 < 만추 >의 해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1966년 12월 3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이만희의 영화. 물론 나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몇 차례이고 한국영화의 대가들을 만나면서 같은 질문을 했다. 한 여름의 무더운 날 오후 수박을 사들고 가서 김기영 감독님을 만나 한참 인터뷰를 한 다음 마지막에 질문하였다. 감독님에게 한국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어떤 작품이었습니까. 잠시 나를 보더니 별로 생각하지 않고 내뱉듯이 별다른 수식을 더하지 않고 대답했다. “<만추>” 아직 대학생이었던 시절 동서영화그룹 친구들과 유현목 감독님을 모시고 가진 술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하였다. 약간 눈을 가늘게 뜨시면서 잠시 생각을 한 다음 대답했다. “ 나운규 의 < 아리랑 >, 이규환 의 < 임자 없는 나룻배 >, 이만희의 <만추>” 라고 하신 다음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이만희 그 놈은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어” 임권택 감독님과 긴 인터뷰를 진행하다가 같은 질문을 하였다. “나한테는 < 하녀 >와 <만추>요, 그건 내가 만들 수 없는 영화요” 그런 다음 그 영화는 한국영화사에서 사라졌다. 임권택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사람이 아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유일한 예외는 펠리니의 < 길 >뿐이다. 어쩌면 다시 보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사라졌다. 하여튼 <만추>는 임권택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다. 영향은 예술에서 다루기 까다로운 개념이다. 여기에는 미학적 감흥이라는 관계와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흔적이 주변을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통과하지 못하고 거기 남겨진 실패한 지연. 물론 나는 <만추>를 보지 못했다. 그 영화는 도대체 어떤 영화였던 것일까. 그해, 그러니까 1966년 임권택 은 네 편의 영화를 찍었다. < 전쟁과 여교사 >, < 나는 왕이다 >, < 법창을 울린 옥이 >, 그리고 < 닐니리 > 그 중 <닐니리>는 필름이 분실되어 지금은 볼 수가 없다. 나는 여기서 임권택과 이만희 , 혹은 < 만추 >와 1966년의 영화를 서로 과도하게 가까이 다가오게 할 생각은 없다. 여기서 내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다만 이런 질문을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투를 빌려) 다소 잔혹하게 해보고 싶다. 임권택은 그해 겨울 <만추>를 보면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는 임권택의 영화들 사이에 세워진 선에 계속해서 칸막이 친 다음 거기서 전술적으로 빈틈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렇게 잠시 멈춰 세우고 그 안에서 예언되는 것에 귀 기울이면서 지금부터 전개되고 있는 것을 쳐다볼 수 있는 기회를 엿볼 것이다. 그렇다. 기회의 도래만이 사건의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형상. 각자의 정당성. 그것이 내가 노리는 것이다. 그때 어떻게 칸막이를 세울 것인가. 우리들의 삶은 예기치 않게 반복적으로 전과 후로 나뉜다. 그때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은 자리를 바꿀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이 순순히 이뤄지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는다. 종종 자리 바꾸기라는 잘못된 환원에 이끌려 희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운명이라는 자유. 자유처럼 보이는 운명. 하지만 매개 없이 우리가 어떻게 도약을 할 수 있겠는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자. 나는 몹시 위험하게 말하고 싶다. <만추>는 어떻게 출현한 것일까. 1960년대의 남한이 겪은 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 빈곤과 혼란은 영화를 찍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만추>는 오직 단 한 번, 거기서 나온 영화라고 나는 믿는다. 그때 거기 있었던 공통의 환경. 함께 주어진 조건. 매일 아침 바라보는 같은 풍경. 하여튼 임권택은 거기 있었다. 나는 약간 소설처럼 써보고 싶다. 그리고 그해 겨울 어느 날 극장에 가서 <만추>를 보았을 것이다. 고유한 현실성. 거기서 이만희는 낯선 장면을 출현시켰다. 세상의 비참함을 함께 살아내면서 <만추>는 갑자기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기호의 체계를 1966년이라는 현실 안에서 창조해냈다. 가능해진 새로운 이미지의 동작들. (후렴구처럼) 다시 한 번. 극장 안의 객석에서 그걸 구경하는 임권택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거기서 결핍된 그 무엇에서 생겨난 공감의 틈. 나는 <만추>가 그때 임권택에게 무언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던 (영화사 속에서 사라져버린!) 이 영화를 그렇게 오랫동안 기억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즉각적으로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만추>라는 경험은 그의 영화 안에서 (몹시 양보를 해서 말한다면, 수많은 영화중의 하나로서의) 증환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언제 활동을 개시하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의미를 만들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마 그 자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와 그것을 보는 사람 사이에는 부름의 관계가 있다. 누가 누구를 부르는지 알 수 없게 서로 부르면서 그에 대해서 대답을 할 때 벌어지는 예술적 감응의 프로그램은 끝내 겹치지 않는 평행선 사이에서의 강도가 만들어내는 공명의 이접적 종합이다. 소유하려는 유혹. 맹렬한 저항. 그 사이에서의 각자의 인정투쟁. 종종 부서지는 방어선. 이때 우리는 상황을 생각해야 한다. 다시 한 번 1966년 12월 3일. 그건 1954년 9월 7일 <이탈리아 여행> 다음날과 같은 의미에서이다. 가까스로 한국전쟁의 풍경이 지워져가고 있던 시간. 최인훈 이 <광장>을 썼고, 김수영이 시에게 침을 뱉었으며, 김승옥 이 무진에 여행을 다녀온 다음 1964년 서울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다른 사내들과 함께 그해 겨울 어느 날을 하릴없이 보냈다. “버스에 올라서 창으로 내어다보니 안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는 눈을 맞으며 무언지 곰곰이 생각하며 서있었다” 1966년, 말하자면 그 언저리의 시간. 그 해 17살 소녀 황옥순은 학교도 그만 두고 어머니와 세 동생의 학비와 생계를 위해서 공장 일에 매달리지만 반복되는 빈혈과 빚에 시달리면서 자살을 결심한다. 함께 수면제를 먹은 두 동생은 죽고 살아남은 그녀는 법정에 선다. 임권택은 황옥순의 이야기를 영화로 찍었다. 나는 다소 이상하게 이 영화를 다시 불러보고 싶다. 임권택은 <법창을 울린 옥이>를 <만추>를 보기 직전에 찍었다. 다시 첫 번째 길로 되돌아오자. 우리들은 영화에서 정감을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할까. 이 문제를 건드리는 것에 대해서 비평은 항상 창백한 표정을 짓곤 했다. 혹은 이론은 자신의 영역 바깥에 내버려두곤 했다. 하지만 정감은 감각과 함께 영화와 세계가 서로 접촉할 때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경이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분석에 앞서 거기에 있는 것. 그것 그대로의 체험을 말하는 중이다. 이때 우리들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오류. 할리우드에서 작성된 시나리오 기계들은 그것을 여러 가지 규칙에 따라 조직한 다음 눈물의 형태로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때 가장 이상한 것은 아직 영화의 촬영이 시작도 되기 전에 정감을 건드릴 수 있다는 전제이다. 그렇다면 촬영 ‘이후’의 영화의 ‘제작’ 과정은 정감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 것일까. 반대로 정감은 자율적으로 활동한다고 철학자들은 주장한다. 이때 두뇌는 어떻게 활동하는 것일까. 나는 이 질문을 여기서 실험해보고 싶다. 단순하게 말하면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줄거리를 먼저 읽은 사람들에게 다소 당혹스러울 만큼 슬프지 않다. 아니, 차라리 이 가련한 소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도 보는 사람을 거의 울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 영화는 비극이지만 슬픔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 말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슬픔을 불러일으키는데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불러일으킬 생각이 없(는 것처럼 영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아이러니를 동원한 희극으로 슬픔을 조롱하거나 역설적으로 고양시키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그냥 하나의 세계가 있다. 1966년의 남한. 그런 다음 거기서 긴장상태를 내내 유지하면서 영화가 그것을 견딘다. 만일 슬프다면 그건 이 영화가 그것을 견디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서도 하여튼 무시무시한 무게로 짓누르는 세계의 비참한 중력 아래서 간신히 자신의 시청각적 기호들을 동원해서 자기가 품은 생명을 유지시켜나가는 모습 때문일 것이다. 실내장면을 찍은 세트 안에서의 몇 개의 씬을 제외하면 이례적일 만큼 대부분의 장면을 길거리나 공장, 이리저리 이어진 골목길, 그 주변의 가게들, 때로는 (내가 영화를 보면서 명백히 알 수 있었던 장소인)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진행되는 <법창을 울린 옥이>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영향 아래 놓여있으면서도 그걸 스스로 알지 못한 채 다소 멀리 놓여있는 영화이다. 때로는 그게 너무 희미해서 종종 끈을 놓쳐버린 것만 같은 느낌을 주면서 상투적인 드라마에 빠지려들다가도 현실이 부여하는 실재의 어떤 순간에로 재빨리 돌아오곤 한다. 이때 영화는 기괴한 모순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임권택 은 더도 덜도 없이 여기서 비참한 세계의 조건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황옥순과 그녀의 가족을 그저 마주본다. 물론이다. <법창을 울린 옥이>를 보고 있으면 다른 목표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물론 이 가족은 1966년의 남한에서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부서지고 있는 가족. 수 없는 자살. 그런데 거기서 단순하게 그저 하나의 사례라는 차원에로 환원될 수 없는 황옥순의 사건 앞에서 임권택은 이 이야기 안의 무언가가 잘 진행되지 않는 순간들과 반복적으로 마주친다. (나는 다소 바쟁같은 말투로 다시 말하고 싶다) 영화로 잘 옮겨지지 않는 현실의 표면. 그때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 생겨난 곡선 사이를 영화는 자기의 점근선으로 계산해야 한다. 위치의 함수. 체자레 자바티니의 경고. 여기서 영화는 세계를 은유의 방법으로 다루면 안 된다. 쳐다볼 때는 아무 모순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서 질문을 시작하자마자 이 세계는 표면 아래 있었던 종종 기괴하고 음산하며 때로는 도착적인 대답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단순하게 보이는 이 사건은 거기서 단지 가난 때문에 생겨난 자살이라는 원인을 초과하는 대상의 과잉과 마주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자살은 영화라는 드라마가 만들어낸 허구적 결과가 아니라 반대로 (실패한) 자살이라는 현실 안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영화라는 드라마가 동원된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 저편에서 나타난 정감과 감각의 위기. 이때 임권택은 이 과잉을 어떻게 견뎌야 할 것인가,라는 힘겨운 문제를 만난다. 사건의 개요, 혹은 재빠르게 요약된 줄거리. 옥이는 어머니와 중학교에 다니는 남동생, 그리고 그보다 더 어린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는 남동생과 여동생을 거의 먹여 살리다시피 한다. 어머니는 식당이 팔리면서 일을 잃었고 집세를 내지 못해 그나마 있던 판잣집에서 쫓겨난다. 직장에서도 제대로 먹지 못해 생긴 빈혈로 종종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진다. 게다가 매달 빌린 돈을 받으러 아줌마들이 찾아와 아귀처럼 괴롭힌다. 그녀는 남자친구 철이를 군대에 보낸 다음 날 수면제를 사서 음독자살한다. 하지만 그녀가 먹는 걸 보고 맛있는 군것질 거리라고 생각한 동생들이 함께 먹은 다음 어린 두 명의 동생이 죽고 그녀는 살아남아서 법정에 선다. 황옥순 이야기의 시작은 맨 뒤에서, 그러니까 법정에 선 옥이에서 시작한다. 나는 이 구조가 단지 플래시백으로 이루어졌다는 데서 멈추는 것보다 더 멀리 밀고 나아가고 싶다. 여기서 시간은 단지 이야기의 경제성 안에 머물지 않고 반대로 우리에게 질문하기 시작한다. 처음은 어디인가요? 그런 다음 중간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리고 마지막 결정의 순간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나요? 옥이는 오로지 자신의 행동으로 그것을 차례로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 매 단락마다 생명은 질문할 것이다. 그때마다 생명의 정감. 그리고 삶의 감각.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가 찍을 수 없는 것들. 비가시적인 선들의 매듭. 그러나 임권택 은 그것을 다루어야만 한다. 좀 더 단순하게 설명해보자. 신문에서 이 사건의 기사를 읽었을 때 그녀가 어떤 법정형을 언도받을 것인가 보다는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그런 결심을 한 다음 행동에 옮겼을까, 를 먼저 질문할 것이다. 황옥순은 어린 두 동생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자신만 살아남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법의) 판단이 아니라 (행동의) 과정이 궁금해진다. 말하자면 삶과 자살 사이의 틈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때 우리들의 귀납적 호기심은 영화의 구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처음에는 법정에서 사건의 개요를 알려준 다음 플래시백으로 맨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원래의 자리까지 진행된다. 말하자면 영화는 이 과정의 반복이다. 이때 핵심은 검사와 변호사가 서로 반대의 입장에서 그녀의 죄를 기술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가 궁금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남은 것은 황옥순의 변론이다. 그러나 영리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설명하는 대신 플래시백을 이용해서 그녀의 기억의 연대기 안으로 들어간다. 법정에서 황옥순을 지켜보던 이들은 사건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물론 결론은 나쁜 효과일 것이다. 자살이라는 행동. 그때 그녀에게 무엇이 명령을 내렸을까. 여기서 임권택에게 남은 것을 별로 없다. 단 하나로 귀결되는 행동. 피하고 싶지만 무슨 수를 써도 피할 수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까지 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시청각 기호들.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과정의 방법을 보는 영화이다. 플래시백의 첫 장면. 법정에 선 옥이를 위해 변호사가 재판장과 검사에게 선처를 호소할 때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서 본다. 그때 그녀가 떠올리는 것은 함께 수면제를 먹고 죽은 두 명의 동생이 아니라 요란한 소리를 내는 기름을 잔뜩 친 콘베어 벨트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톱니바퀴이다. 다소 기괴하게도 그런 다음 영화는 옥이의 슬픈 감정을 지은 표정을 보여주는 대신 종종 소스라치는 듯한 두려움에 질린 그녀의 이 표정(close_up)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녀의 놀란 표정은 다시 한 번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짓는 두려움처럼 보인다. 두 번의 자살. 혹은 자살의 반복. 임권택 은 지금 그 일을 수행해야만 한다. 나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임권택의 영화, 아니 < 잡초 > ‘이전’이라고 말해도 괜찮은데, 이상할 정도로 볼 때마다 그 세계가 어두침침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그 ‘이후’의 영화가 환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인상이라는 부정확한 말로 설명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그런 ‘다음’에는 점점 임권택의 영화는 그 어둠 속에서 빛의 모델을 찾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어두침침하고 게다가 그 빛은 가냘프고 종종 거의 꺼져가는 것 같거나 희미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비로소 시간들이 가시화되기 시작했고 역사가 이미지로 떠돌기 시작했다. 나는 그 빛을 임권택이 움켜쥐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빛들이 두 개, 혹은 세 개, 그렇게 점점 많아질수록 임권택의 영화 안의 어둠은 점점 중성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임권택의 영화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세계에 잠겨있는 밤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생명의 빛이 꺼져가는 밤, 그런데 아직 살아있다. 이보다 더 두려운 밤이 있을까. 그때 임권택 이 이 어둠 속에서 견디는 방법은 옥이를 동정하는 대신 (대부분의 영화들은 그렇게 한다) 이 상황에서 느껴보는 옥이의 정감을 약간 기괴하게 쳐다본다. 이 참담한 상황의 수면 아래 옥이가 느껴보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를 물어볼 때 현실은 이상하게 비틀려 보인다. 이야기는 진행되다 말고 플래시백 속에서 다시 플래시백이 한 번 더 나온다. 공장에서 일을 하던 옥이는 화창한 점심 휴식 시간에 운동장에서 다른 직공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벽에 기대어 서서 드럼통에 담긴 물에 작은 돌을 던진다. 수면에 파문이 일어나면 좋은 시절의 시간 안으로 들어간다. 전형적인 시간의 입구. 옥이가 아버지와 함께 부유한 집에서 보냈던 행복했던 시간. 여기서 의미의 흐름에 주목을 해주기 바란다. 이때 이 장면은 단지 기억라고 부르기에는 이상한 배열을 보여준다. 마치 옥이의 작은 돌을 집어 던지는 행동에 감응이라도 한 것처럼 온 가족이 모여서 홍난파가 작곡한 ‘퐁당퐁당’을 부른다.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냇물아 펴져라, 멀리 멀리 퍼져라, 건너편에 앉아서 나물을 씻는 우리 누나 손등을 간질여 주어라” 나는 약간 좀 전의 말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이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옥이의 세 명의 동생들이다. 물론 그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세 명의 동생들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서 옥이를 향해서 마치 그녀에게 그 노래를 바치듯이 부른다. 아버지는 그녀 곁에 서서 그 노래를 아코디온으로 반주하고 있다. 온 가족의 중심. 그때 옥이는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자수를 놓으면서 그 노래를 음미한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환기시키고 싶다. 옥이는 그 노래를 따라 부를 생각이 없다. 그저 그들의 행동이 지닌 의미를 잘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때 어머니는 어디로 간 것일까. 옥이는 마치 그 아이들의 어머니이기라도 한 양, 마치 곁에 선 남자의 아내이기라도 한 것처럼 보인다. 이 모습에는 어떤 결핍도 없이 그 자체로 완성된 가족의 모습처럼 보인다. 이 장면이 나올 때 만일 동생들만 아니었다면 나는 그만 옥이가 결혼해서 행복한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이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야 부엌에서 어머니는 과일을 모두 깎은 다음 접시에 받쳐 들고 나온다. 사과는 구태여 부엌에서 깎아야 할 이유가 없는 과일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한 것은 이 장면에서 노래를 부를 때 어머니를 포함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왜 그런 동선이 필요해진 것일까. 영화는 두 번 다시 이 행복한 시간에로 돌아오지 않는다. 약간의 해석. 물론 이 플래시백은 옥이의 주관적 기억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동시에 행복한 기억 속으로 침범한 현실을 본다. 이때 이 현실은 일종의 의무라는 명령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약간만 앞으로 되돌아가보자. 우리는 여기까지 보다말고 갑자기 옥이가 왜 이다지도 열심히 가족을 위해서 희생적으로 일을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여기서는 단지 가난을 넘어서서 아직 미성년자인 그녀가 거의 죽음을 무릅쓰고 일을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일을 하다 말고 쓰러지고 의사가 더 이상 일을 하는 것은 생명에 위험이 올 수 있다고 경고를 하고 있는데도 제발 일을 하게 해달라고 매달린다. 그런데 이 생명을 건 하소연은 그녀의 자유로운 의지의 결정이었을까. 그녀에게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아무도 명령하지 않는다. 누가 그녀에게 그런 의무의 명령을 내리는 것일까. 나는 옥이의 플래시백에서 그녀가 가족 안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 자리가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이 장면은 행복한 시간으로 변장하고 나타나서 황옥순에게 내리는 (유교라는 이름의) 장남(長男)의식의 명령에 다름 아니다. 마치 이 플래시백 장면에 맞대응이라도 하는 것만 같은 현실의 장면이 나온다. (둘째이지만 장남인) 중학생 남동생이 나쁜 친구들의 꼬임에 빠져 소매치기를 하다가 경찰에 붙잡힌다. 담임선생님과 함께 경찰서로 간 옥이는 남동생이 훈방 조치된 것을 보고 다시 공장에 돌아갔다가 (남자친구와 짧은 데이트를 한 다음)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온다. 남동생이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냐고 묻자 어머니는 어쩐 일이냐고 반문한다. 그러자 옥이는 그날 낮의 이야기를 한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갑자기 역정을 내면서 그녀를 꾸짖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대사) “아니, 그 지경이 된 아이를 혼자 보냈단 말이냐, 네가 데리고 오면 다리가 썩는다더냐, 허리가 휜다더냐” “공장 시간에 늦는데 제가 어떻게 데리고 와요” “하루 좀 쉰다고 떼돈을 놓치겠니, 실직을 당하겠니, 그 자식이 어떤 자식인데 그렇게 소홀히 한단 말이냐,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는 이런 꼴 못 본다, 못 봐” “소홀히 하긴 누가 소홀히 한다고 그러세요” “경찰서까지 갔다 온 아이를 홀홀히 보내고, 어쩌니 저쩌니 해도 조상 제사 볼 놈은 그 놈뿐이다. 늘그막에 의탁할 놈은 그 놈 뿐이란 말이다” 사실상 이 집은 이미 거의 부서진 가족의 모습으로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다. 영화에는 단 한 번도 조상 제사를 치르는 장면이 나오지 않으며 어머니의 친정과 시댁 식구들, 혹은 친척들이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가까이 살고 있)는데도 그들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물론 그들도 가난으로 남을 돌볼 겨를이 없어서일 것이다. 이때 어머니가 옥이를 야단치는 말 속에서 지금 집안을 간신히 버티게 일을 하는 옥이는 갑자기 미래의 시간 속에서 괄호 쳐진다. 이 두 개의 장면 사이의 차이에는 명령을 수행하는 옥이의 행복한 시간을 기억하는 플래시백과 현실의 네트워크 안에서 호명하는 어머니의 진술 사이에서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의 심연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구태여 그 호명을 플래시백에서 이미 완결된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 과잉의 잉여처럼 나타난 어머니가 한다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명령 속에서 기다리는 최후의 구원을 약속하는 시간은 결국 오지 않을 것이다.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몇 차례를 반복해서 보아도 언제 옥이가 자살을 결심했는지가 분명치 않다. 단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장면만이 있다. 임권택 은 그 결심의 장면을 찍지 않았다. 물론 상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옥이는 무심결에 13일에 밀린 빚을 갚겠다고 매일처럼 집이고 공장이고 찾아와서 괴롭히는 이웃 아줌마들에게 약속을 했고 그날이 다가왔을 때 약속을 이행할 수 없자 자포자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자살을 해서 이 빚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그 몫은 고스란히 가족에게 넘겨진다. 그런데 지금 그걸 누가 갚을 수 있을까. 결국 결론은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여기에는 이제까지 옥이가 짊어져야한다고 믿었던 책임에 대한 포기가 있다. 이제 그 자리는 빈자리에요. 텅 빈 장남의 자리. 서로 다른 두 개의 층위의 네트워크의 교차. 물론 그 장면에서도 자살의 결심은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찍지 않았다 할지라도 옥이는 어느 순간에 결심했을 것이다. 나는 그 결심의 순간이 어머니가 옥이에게서 갑자기 의무를 빼앗아가는 이 장면이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희생이 무의미하다고 선언할 때 그것은 그녀에게서 의무의 명령이 철수한다는 것을 뜻한다. 옥이는 그 순간 자신을 세상 안에서 버티게 만들어주었던 유일한 초자아의 버팀목이 사라져버리고 갑자기 어둠 속으로 던져졌을 것이다. 혹은 어둠 안으로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S#1 S#2 이제 남은 것은 옥이의 자살이라는 행위뿐이다. 이때 자살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여기서 비로소 자기에게 내려진 명령에서 벗어나 자기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행동이 옥이의 동선을 작동시키고 있다. 모든 인연과 결별하는 행위. < 법창을 울린 옥이 >의 마지막 시퀀스 전체는 작은 빛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임권택 의 모든 영화중에서 가장 어둡지만 (몹시 기괴하게도) 동시에 거의 유일하게 기독교적인 구원에 귀 기울이고 있다. 군대로 떠나는 철이와 마지막 밤을 보내고 난 다음 새벽에 두 사람은 버스 정류장으로 함께 천천히 거의 멈출 듯이 걸어온다. 아, 제발 멈춰 주세요. 당신은 지금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약간 높은 데서 내려다보듯이 멀리서 보이는 두 사람. (high_angle_long_shot) 그때 멀리서 난데없이 교회에서 새벽 종소리가 들린다. 자살은 하느님 앞에서 하는 모든 행위 중에서 가장 나쁜 행위이다. 우리는 지금부터 옥이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다. 명백히 이 동네에 살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영화는 교회 종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나는 지금 옥이라고 써야 할 자리에 영화라고 잘못 쓴 것이 아니다. 이때 간절하게 교회는 종을 치면서 옥이의 죽음에 간섭하려고 한다. 아직 이른 길거리는 한산하고 그들이 걸어온 길은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있다. 두 사람의 발걸음. (close_up) 이상하게 두 사람은 약속한 것이 아닌데도 서로 발을 맞춰 걷는다. 말하자면 두 사람의 마음의 쇼트. 어떤 투명성. 하지만 그들은 지금 헤어지기 위해 걸어가는 중이다. 그런 다음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쇼트가 나온다. 갑자기 남자들이 얼어붙은 듯이 거리에 서 있다. 그래서 옥이와 철이가 그들 사이에 들어가서 함께 설 때 마치 정지된 화면 사이로 들어서는 것만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다시 한 번 멀리서 들리는 종소리. 멈춰 서버릴 것만 같은 세상.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영화는 그녀의 행동을 멈추기 위해서 무언가 필사적이 된다. 나는 임권택이 생명을 소홀히 다루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그저 소멸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반복적으로 보았다. 꺼져가는 빛. 사라져가는 세상. 그때 화면 안으로 침범하는 버스 때문에 서 있는 그들이 출근하기 위해 거기 기다리고 서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버스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올라타지만 철이는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 마치 출근하는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아니 차라리 그들이 곁에 존재하지 않기라도 하듯이 옥이와 철이는 서로 마주본다. (shot_reverse shot) 그때 철이는 (다소 뜬금없이) 옥이에게 마지막 인사처럼 간곡하게 말한다. “마지막 부탁이 있는데, 건강해줘” 우리는 이제부터 옥이가 할 일을 알고 있다. 물론 이 말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철이의 작별인사이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 종소리에 이어서 옥이의 자살을 말리는 두 번째 시도이다. 이때 이 말은 동시에 여기서 정반대로 기능한다. 이제까지 완전히 잊고 있던 사실, 옥이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만들면서 이제 문득 그 시간이 왔음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버스가 도착하고 철이가 떠나갈 때 두 개의 쇼트를 교환한다. 하나는 버스에 올라타서 철이가 바라보는(point_of_view) 옥이의 멀어져가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옥이가 바라보는 멀어져가는 버스의 모습이다. 멀어져가는 옥이와 멀어져가는 버스의 비대칭. 하지만 이 설명에는 놓친 것이 있다. 이때 단순하게 멀어져가는 옥이와 멀어져가는 버스로 교차시키지 않고 갑자기 카메라가 옥이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그런 다음 옥이가 버스를 쳐다보았을 때 이미 그 버스는 사라지고 난 다음이다. 이 쇼트의 교환은 매우 기괴하게 보인다. 철이는 멀어져가는 옥이를 보았지만 옥이는 멀어져가는 철이를 보지 못했다. 이때 그 둘 사이에 개입해서 다가가는 카메라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사이에 낀 자율적인 운동. 그녀를 본다기보다는 다가간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는 동작. 하지만 이때 철이는 멀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마치 반작용처럼 다가간 카메라. 마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는 듯한 이 운동이 일깨우는 것은 정반대로 둘 사이의 텅 빈 공집합의 효과이다. 여기에는 어떤 교환도 없으며 그래서 이 운동은 다가간다기보다는 차라리 밀쳐내는 듯한 반작용의 힘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진다. 하지만 운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제부터 옥이가 자살로 향하는 짧은 발걸음을 함께 한다. 옥이는 이 영화에서 몇 번이고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그러나 매번 멀리서 지켜보거나 그 앞을 지나쳐가거나 이미 지나친 옥이를 쳐다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처음으로 옥이의 발걸음을 따라 함께 걷는다. 그 발걸음이 멈추는 것은 그녀가 약국으로 들어섰을 때이다. 이때 영화는 자기의 무능력에 대해서 앙상해진다. 교회의 종소리. 철이의 마지막 작별인사. 그저 카메라는 그녀와 동행할 뿐 그녀를 막을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 대신 할 수 있는 마지막 침묵을 지킨다. 영화는 옥이가 수면제를 사는 장면을 찍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약국 앞에서 서성거리지도 않는다. 그 대신 그 시간에 집에 어린 두 남매를 남겨놓고 무언가 저녁 찬거리를 위해 채소라도 얻으려 시부모 댁으로 나서는 어머니에로 옮겨간다. 어머니가 막 집 문을 나설 때 옥이는 반대편에서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으로 들어온다. 그때 옥이는 집을 나서는 어머니를 구태여 부를 필요가 없는데도 그녀를 부른다. 여기서 예기치 않게 어머니를 향해서 다시 한 번 가볍게 카메라가 다가간다. 아니 차라리 옥이의 목소리에 실려서 어머니에게 다가가 그녀를 잡으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마치 그 순간 어머니가 무언가 낌새를 알아채고 옥이를 말렸다면, 아니 최소한의 위로를 했다면, 혹시나 완전히 버렸을 자기에게 주어진 명령을 일깨워주기만 했더라면 지금 하려는 행위를 멈추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저 무심하게 오늘 공장에는 왜 나가지 않았냐고 물어본 다음, 하루 쉬어야겠다고 대답하자,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그래, 라고만 말하고 힘없이 돌아서서 가던 길을 재촉한다. 그녀가 살 수 있는 두 번째 기회, 혹은 자살을 포기할 수 있는 기회. 여기서 걸어가는 어머니를 보는 옥이를 보는 카메라는 두 여자의 등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등으로 바라보는 이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덧없어 보인다. 어머니는 왼쪽 골목으로 들어서려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서 옥이 쪽을 돌아본다. 그게 어떤 제스처인지는 분명치 않다. 옥이가 한 대답에서 어떤 낌새를 느낀 때문인지, 아니면 공장도 쉬겠다고 말한 딸이 가엽고 미안한 마음인지, 그도 아니면 그저 멀리서 자기를 지켜보는 딸을 문득 쳐다본 것인지를 달리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멈칫 거리는 동작은 이상할 정도로 보는 사람의 마음의 파문을 일으킨다. 어머니가 골목을 돌아서서 사라지자 옥이는 이 불효막심한 딸을 용서하세요, 라는 마지막 작별인사를(voice-over_narration) 한다. 이때 이 인사는 몹시 이상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미 어머니는 골목으로 사라진 다음이다. 그러므로 이 인사는 텅 빈 골목을 향해 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아직도 남아있을 어머니의 발걸음의 흔적을 향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자 마치 어머니가 돌아보기라도 하듯이 골목에서 옥이를 쳐다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아니, 마치 골목이 옥이를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이상한 비인칭의 시선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비인칭으로 느껴보는 정감, 그리고 비인칭으로 건드릴 듯이 다가가는 운동의 감각. 우리는 이미 철이를 태운 버스가 떠나버린 텅 빈 거리가 옥이를 바라보는 장면을 보았다. 옥이는 누군가를 보는데 그녀가 보는 상대방은 그녀를 보지 않은 대신 길거리, 혹은 골목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그녀의 자살을 막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는 상황. 그때 영화는 옥이의 동선을 따라가는 대신 몇 번이고 다시 영화를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 번째 시작, 혹은 중단된 동선. 여기서 쇼트가 바로 이어지고 있는데도 옥이가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따라가는 대신 다음 장면은 두 마리의 병아리를 데리고 놀고 있는 두 어린 남매를 보여준다. 혹은 좀 더 정확하게 병아리를 보여준다. 옥이에서 병아리로 그냥 넘어온 두 개의 연속된 쇼트는(S# 1_S# 2) 옥이를 가여운 병아리처럼 보이게 한다. 어린 남동생은 병아리를 잡으려다가 그만 죽여 버리고 만다. 어이없는 죽음. 그때 옥이는 죽은 병아리를 보면서 마치 자기의 시체를 미리 보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옥이는 자기 시신을 거두듯이 그 병아리를 집 앞 멀리 모래사장에 작은 구덩이를 파서 묻어준다. 그때 오늘 새벽에 떠나간 철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voice_over) 이 병아리를 키워서 닭이 되면 다시 병아리를 낳게 될 것이며 금방 오백 마리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그 병아리는 옥이의 꿈을 무럭무럭 키워줄 거야, 라고 말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옥이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는 그 병아리를 모래 무덤에 덮어주는 것이다. 혹은 지금 꿈을 모래 무덤에 묻고 있는 중이다. 그런 다음 방에 앉아 옥이는 어머니에게 남기는 유서를 쓰기 시작한다. 임권택 은 여기서도 동일한 태도를 취한다. 유서를 쓰는 옥이를 바라보는 대신 재빨리 그 시간에 군것질을 하러 나간 어린 남매를 따라간다. 이때 우리는 매우 잔인한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어린 남매는 군것질을 하라고 준 동전으로 무엇을 사먹어야 할 지 망설이는 중이다. 이 아이들은 지금 거의 먹은 것이 없어서 몹시 허기진 상태일 뿐만 아니라 거의 군것질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오빠는 동전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하마터면 그 귀한 동전을 하수도 맨홀에 빠트릴 뻔 한다. 깜짝 놀란 오빠는 동전을 집어 들고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여동생에게 무얼 먹고 싶은지 묻자 번데기라고 대답한다. 오빠는 그러면 번데기를 산 다음 남은 돈으로 자기가 먹고 싶은 만나를 사겠다고 한껏 여유를 부리면서 말한다. 하지만 그 순간 다시 한묍영오活?떨어트려 이번에는 하수구를 덮어 놓은 맨홀의 구멍 속으로 정확하게 떨어진다. 거의 잃어버릴 뻔한 것을 되돌려준 다음 다시 그것을 빼앗아 갈 때 어린 남매는 잃어버릴 뻔 했던 것을 되찾은 기쁨 자체를 잃어버린다. 이제 어린 남매는 집에 돌아오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 손에 쥐어주었던 동전은 맨홀이 집어삼켰고 배고픈 아이들에게 어쩌면 오랜만에 일찍 들어온 옥이가 허기를 달랠 수 있는 무언가를 해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때 막 옥이는 수면제를 먹는 중이었다. 어린 두 동생은 제 시간에 도착했다. 왜 그 어린 두 동생은 그보다 좀 더 일찍, 아니면 차라리 (끔찍하게도 자살한 옥이의 모습을 보아야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행히 살아서 볼 수 있는 자리에 남아있을 수 있게) 늦게 도착하지 않은 것일까. 같은 말의 다른 질문, 어떻게 주인공 옥이의 죽음을 가로 막고 그들은 대신 죽음을 선택한 것일까. 비극적 상황 속에서의 비극적 도착. 그런 다음 두 개의 자리를 바꿔치운다. 죽음과 삶. 이때 이 신비로운 도착은 반대의 방향에서 다시 질문해보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두 동생의 도착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옥이는 병아리의 죽음을 본 다음 그 시체를 매장하면서 이미 자기의 죽음을 경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이 죽음의 과정 자체가 필요 없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때 이 세상에 남겨진 유일한 얼룩은 그녀의 어린 두 동생들뿐이다. 순결한 얼룩.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비참함을 알지 못한다. 여기서 유일하게 어린 두 동생만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벌어진 차이가 주는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럼으로써 이 비참한 조화를 어지럽히는 순결한 존재의 소멸을 목표로 했다면 이보다 더 정확하게 의도하지 않고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달리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이미 벌어진 사건의 메시지를 과도하게 밀고 나아갈 때 우리는 예기치 않은 외설적 지식의 이면과 힘겹게 다투어야 할 것이다. 원래의 광경. 그 모습을 본 막내 여동생이 방안으로 뛰어들면서 “언니 뭐 먹어”라고 묻는다. 이미 약을 먹은 옥이는 수면제에 취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저 비몽사몽간에 “아무 것도 안 먹어”라고 대답하지만 그 말은 배고픈데다가 이미 군것질 할 동전을 잃어버린 어린 두 남매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맛있는 거 있으니까 혼자 먹으려고 그러는 거지”라며 두 남매는 옥이의 손에 한 움큼 쥔 수면제를 빼앗기 위해서 함께 달려들어 손아귀를 벌린다. 이미 약에 취한 옥이는 허기진 두 남매로부터 수면제를 지킬 만한 힘을 빼앗긴 다음이다. 이때 거의 잠들어가는 옥이는 정반대로 마치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하듯이 눈을 커다랗게 뜬다. 그녀가 바라보는 두 명의 어린 동생들은 마치 아귀처럼 달려들어서 그녀의 손에서 수면제를 뺏으려고 한다. 죽어가는 옥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모습은 이미지 전체가 기형적으로 휘어서(mirror_focus) 마치 영화 전체의 얼룩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걸 바라보는 옥이는 두 동생을 가련하게 보는 대신 우리가 영화 맨 첫 장면에서 보았던 바로 그 표정, 그 커다랗게 떠진 눈, 두려움에 가득차서 바라보는 얼굴이 된다. 그때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환청처럼 들려오는 목소리들의 침입. 그런 다음 똑같은 기형적인 이미지로 그녀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모두들 옥이에 대한 원망으로 넘쳐나고 있다. 여기에는 환각이라기보다는, 환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투적인 이미지 뒤에 차라리 어떤 각성의 시선이 있다. 죽어가는 그 순간에조차 갑자기 현실이라고 불리는 환상의 장막을 찢고 그 틈새 사이로 얼핏 모습을 드러낸 진실이라는 외설. 가여운 옥이에게 자살은 거의 마지막 피난처였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이 산산조각 나고 난 다음 무의미해진 세상에서 그녀는 의무의 네트워크와 관계를 끊으려고 하지만 이번에는 예기치 않게 대신 두 명의 동생을 죽인 다음 죄의식을 안겨주고 다시 되돌려 보낸다. 그러므로 옥이는 두 번째 삶을 의무보다 더 무거운 죄의식으로 이제부터 살아가야 한다. (의무의) 감옥에서 출소하는 옥이는 지금 (죄의식의) 감옥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현실은 저 바깥에 동일한 것으로 머물러 있는 중이다. 옥이는 하여튼 그 안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이때 임권택 은 옥이의 삶을 다루는 대신 자살이라는 행위의 과정을 통해서 거기서 말하여지는 네트워크를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 그때 무언가 완강하게 그걸 거절하는 것과 마주치고 있다. 그건 직접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그 자리에 불려나온 황옥순의 자리이다.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무언가를 계속 보여주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무언가 절반만을 본 것만 같은 결여에 시달리고 있다. 그때 똑같은 무게로 임권택은 이 이야기가 주는 과잉과 마주쳐서 시달린다. 네오리얼리즘이 부여한 현실과 영화 사이의 부등가 교환의 법칙. 그때 중심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대답은 황옥순이라는 간편한 대답을 취하는 대신 그 중심의 안이 사실은 텅 빈 공집합이며 단지 그것이 부서지지 않게 가까스로 유지시키는 힘들의 상태 속에서 정감과 감각이 번갈아 나타난다는 사실만을 영화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불안정한 균형. 아니, 어쩌면 이건 균형이 아닐 지도 모른다. 중심이 검은 구멍이라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중심인 줄 알았던 얼룩을 지우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임권택에게 정감이라는 구멍과 그것을 느껴보기 위해 얼룩을 둘러싸는 감각의 활동은 점점 까다로운 질문이 될 것이다. 이 둘 사이의 간극. 그 사이의 공백 속에서 임권택은 느닷없이 맹렬하게 주체를 세워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어렴풋이 어느 순간, 아마도 내 생각에는 자살을 행동으로 옮겨가는 그 마지막 장면 전체에서, 사건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체가 도래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임권택은 느껴본다. 나는 거의 지워질 듯한 어둠 속에서 오로지 이 장면 안에서만 희미하지만 분명한 빛을 보았다. 알 수 없을 정도로 시적인 감흥을 느끼면서 영화의 기호들은 황옥순의 행위에서 분명하게 주체가 자기의 정감을 드러내 보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영화의 감각을 새롭게 일깨우는 힘을 따라 활동하기 시작한다. 몇 번이고 이 장면을 다시 보고 싶다. 분명히 임권택도 몇 차례이고 이 순간에로 되돌아오곤 했을 것이다. (계속) 1966년 100분 흑백 2.35 감독 임권택 아성영화사 각본 이종택 각색 이연진 촬영 김연욱 조명 이한찬 편집 김희수 음악 전정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