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
- 감독
- 이재원
- 제작년도
- 2024
- 출연
- 고도하, 설준수, 이금주
<그래도, 사랑해.> 중 /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1년간 관객을 찾은 영화들을 필자의 시선으로 돌아보며, 올 한 해 영화가 불러온 고민들을 정리합니다. “흔히 문화의 역할이란 지하철역 구내에 보다 세련된 의미있는 장식물이나 걸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우리네 삶에서 문화란 그런 작은 디테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보다 본질적인 것, 즉 사람과 사람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의 소통의 형식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이 곧 문화의 역할입니다.” - 이창동 , “처음 드리는 인사말”, 문화체육관광부 열린장관실, 2003년 3월 14일 영진위의 발표에 따르면 올해는 1,000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가 단 한 편도 없으며, 2004년 이래 최초로 연간 관객 수 1억 명 시대가 붕괴한 해다. 그야말로 한국영화의 종말 ...... 물론 이건 시장 얘기다. 업계에 발을 담그지 않은 나로서는, 그저 인상적으로 보았던 작품들을 주루룩 고른 다음, 개별 작품들로부터 몇몇 자질을 선별해 자율적으로 테마화한 뒤, 안온하게 정리해도 그만일 것이다. 그렇지만 비행기 타본 기억이 까마득한 토종 한국인이자, 비평가 이전에 관객일 수밖에 없는 나는 OTT가 새롭지 않은 이 시기에도 어두운 극장에서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인들이 한국어로 말하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모양새를 자막 없이 보고 듣는 일상의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다(애국자 아닙니다). 통계를 근거로 한 종합적인 분석과 전망이라면 이미 숱한 기사와 글이 많으니, 엄격한 틀은 내려놓되 몇몇 영화 안팎으로 사적인 근심과 관심을 조금 얹고 싶다. 올해의 한국영화들을 보며 헛웃음이 나거나 화가 나는 경우는 있었지만, 아니 많았지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보았던 영화는 김준석 의 < 그래도, 사랑해. > 뿐이다. 이 영화는 키아로스타미의 향기를 풍기며 사랑스럽고 여유롭게 걷는다. 올해 한국영화들이 내게 신통치 않았던 것은, 대개 상업영화라면 지독할 정도의 장르적 콘셉트가 부여되어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고, 한편으로 독립영화판에서는 형식적 장치에 과도하게 의존하거나 반대로 소재에 기대어 특정 환경에 놓인 인물의 처지를 강조하며 관객과 스크린 사이에 두툼한 방벽을 세웠기 때문이다. 최소한 내가 아는 선에서 <그래도, 사랑해.>는 2025년의 한국영화들 중 현실과 영화가 자연스레 길항할 수 있으며, 그 사진적 이미지에 기반한 20세기적 시청각 경험의 아름다움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한 거의 독보적인 사례다. 게다가 이 영화의 세계는 내가 쓰는 언어와 내가 갈 수 있는 장소와 내가 어쩌면 만날 수 있을 법한 사람들에 의해 전달되기에 친밀함마저 느끼게 된다. 지금 한국영화에 필요한 것은 난장과 자극이 아니라 이런 기복 없는 흐뭇함과 상쾌함이 아닐까? 물론 <이혼숙려캠프>(JTBC)가 인기 좋은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부부가 주인공인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욕지거리와 패악질의 향연이 아니라 우리네 삶 여기저기에 놓인 일상적 규모의 상황과 마음들이다. 관객은 우리를 닮은 영화 속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보며 미소 지을 권리가 있다. <그래도, 사랑해.>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 돌아보면 올해 세상은 그리 돌아가지 않았던 것 같다. 연초 우리네 봄날의 콘텐츠였던 ChatGPT 지브리풍 이미지 생성에서부터 10월 말 젠슨 황의 깐부치킨 회동에 이르기까지, 2025년을 지배한 키워드가 있다면 어딜 가도 들려오는 AI일 것이다. 영화계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영화제에서는 AI 관련 이벤트와 컨퍼런스가 열렸고, 극장가에도 적극적으로 AI를 활용한 시험작 < 중간계 >가 개봉하기도 했다. 하지만 창작 과정에서의 실제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올해의 한국영화들을 통과하며 AI 프롬프트의 예제본처럼 뻣뻣한 인간형이 여기저기서 출몰했다고 느낀다. 그 대표 주자라고 한다면, 초기에는 대안적 움직임으로 출발했으나 오늘날 상업영화와 함께 또 다른 제도로 딱딱하게 굳어진 독립영화라는 포지션을 기회주의적으로 활용한 연상호의 < 얼굴 >이다(이 영화는 KOBIS 상에서 ‘일반영화’로 분류된다). 2억의 제작비로 만들어졌다는 이 가성비 좋은 저예산 영화 속 유명 배우들의 몸짓과 얼굴에서 유연함과 여유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 기실 생성형 AI 이미지에 가까운 그 1차원적 자질은 시장주의에 입각하여 경제적 효율성의 늪에 빠진 동시대 이미지의 사멸적 풍경을 저절로 돌아보게 만든다. < 좀비딸 >, < 야당 >, < 히트맨2 >, < 보스 >, < 승부 > ...... 성급히 땜질하듯 만들어진 올해의 몇몇 한국영화들은 창작자의 존재 유무 자체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야기의 유기적인 흐름은 수시로 중단되고, 유튜브 숏츠 시대에 걸맞은 단발적 자극만이 연쇄적으로 나열되는 작중 내 세계에서 인물은 극단적으로 캐리커처화된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야단스럽게 선보이는 개인기 섹션의 한 토막처럼 위축되며 실재감을 완전히 상실한다. 이쯤 되면 실사는 그저 명목적 알리바이이며, 우리는 우연과 돌발의 가능성을 품은 사진적 이미지가 전면적으로 폐지된 AI 영화라는 미래를 이미 살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올해의 수많은 애니메이션 작품들의 흥행권 진입은 그 무의식에 대한 반영일까? <중간계>, <얼굴>, <좀비딸>, <야당> 중 / 사진: 네이버 영화( 1 , 2 , 3 , 4 ) 그런가 하면 이제는 한국영화의 기성세대권으로 진입한 두 아버지, 봉준호 와 박찬욱 의 인물들은 중심을 잃고 허둥댄다는 느낌이다. < 미키 17 > 속 인물들에게는 슬랩스틱과 삑사리의 미학으로 불리던 봉준호의 미시적이고도 생활밀착적인 신체의 율동과 액션이 온데간데없으며, 메인 빌런은 느긋함을 갖추지 못한 채 무대에 오른 초보 스탠드업 코미디언처럼 독재자의 전형적 모델을 대문자적으로 모방하며 허우적거릴 뿐이다. 인물의 결심과 행동 전개로 극이 진행되는 < 어쩔수가없다 >는 서로 간섭을 일으키는 메인 플롯과 서브 플롯이 긴장의 끈을 풀어버리기 일쑤이며, 인물의 내면적 특질은 구체적으로 조성되기보다 외삽적으로 제시된다. 적어도 외연적으로는 리얼리즘을 표방했음에도 인물들의 욕망과 주관은 앙금처럼 애매하게 남겨지고, 다소 과장스럽게 발생하는 코미디와 요란한 촬영과 편집 너머로 연출자의 불안만이 느껴질 뿐이다. 두 편 모두 블랙코미디라는 장르를 내세우고 있지만, 웃지 못한 내가 감지한 것은 화면 너머에 있는 조급함이었다. 게다가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로 이들은 개봉 전후로 방송인에 가까운 일정을 소화하며, 온갖 유튜브 채널과 TV 프로그램에서 프로모션을 진행하지 않았던가. 개봉 이후 좋지 않은 평가로 인해 박찬욱 본인이 직접 자신의 영화를 해설하는 <알려줄 결심>이 제작된 것은 갈 데까지 가 버린 올해의 한국영화계를 요약하는 한 단면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 관객이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른 무엇보다 이들을 ‘거장’으로 호명하는 일 아닐까? 왠지 무한히 재생되어 죽지 않는 복제 인간과 AI에게 대체될 위기에 놓인 인물이 이들 영화의 중심으로 설정된 것은 OTT가 스크린을 대체해가는, AI가 실사를 대체해가는 이 시기에 그저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올해의 한국영화들 중 시선, 거리, 말투 등 대화의 미시적인 결이 생생히 살아있는 이재원 의 < 두 시간 >, 서울의 달동네 풍경과 오래된 골목을 주름진 노인들의 육체와 함께 화면에 담은 < 사람과 고기 >가 사사롭게 다가온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미키 17>, <어쩔수가없다>, <두 시간>, <사람과 고기> 중 사진: MUBI , 네이버 영화 , 전주국제영화제 , 네이버 영화 기술이 발전하고 정서가 침잠함에 따라 신체도 변화해간다. 두 편의 미국 블록버스터를 보면서도 그 무의식적 징후가 스크린에 투영된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 >. 서사적으로 두뇌의 작동을 철저히 둔화시킨 이 영화는 눈과 귀의 즐거움에 올인할 뿐, 가족영화라는 설정임에도 일말의 정서적 울림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숏츠 시대에 걸맞은 무지성 블록버스터가 되었다. 이 영화를 함께 본 친구는 촌철살인으로 비평했다. “이 영화 속 사람들한테는 뼈가 없는 것 같다.” 그의 말마따나 일종의 지점토처럼 인체를 연성화하는 작업을 거쳐 리얼리티를 제거한 화면을 보며 관객은 스크린 속 사태와 전혀 연루되지 않은 채, 시원하게 깔깔댈 수 있다. 영화 속 인체는 연양갱이나 하리보 젤리보다도 말랑한 지방이인데, 이들은 거의 AI ASMR에서 엿볼 수 있는 액체괴물이나 필라델피아 크림치즈 비슷한 것이 되어 신나게 터지고 짓뭉개진다. 이에 반격하듯 아날로그 신체에 불굴의 책임의식을 강박적으로 수혈한 블록버스터 <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은 AI와 맞서는 에단 헌트, 아니 톰 크루즈의 눈물겨운 원 맨 쇼다. 여기서 그는 “세상을 구한다”라는 거창하지만 피상적 맥락 외의 사적인 욕망이나 목적이 제거되어 캐릭터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차력쇼의 단원이 된다.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잠수함 신은 숏츠 시대에 훈시하듯 대사마저 소거한 채 느린 호흡을 가져가는데, 여기에는 에단이 대적해야 할 상대도 없으며, 그에 따른 액션영화의 장르적 쾌감도 불투명하다. 영화는 잠수복을 벗고 알몸으로 헤엄치는 톰 크루즈의 몸짓을 고요한 바다 배경과 조명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팔다리를 태아의 형상처럼 구부려 ‘에단 헌트-톰 크루즈’라는 ‘인물-배우’를 거룩하게 비추지만, 어느 누구와도 합이 맞지 않는 듯한 이 영화 속 톰 크루즈는 마치 모든 것을 짊어지고 인간계를 떠나는 유령처럼 보인다. 시리즈 내내 “리얼한” 액션을 제 몸으로 수행해 온 그의 강박이 올해는 더욱 인상 깊게 다가왔다.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블러드라인> / 사진: IMDb , © 2025 Warner Bros. Entertainment Inc.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중 / 사진: IMDb AI가 도래한 마당에 내가 떠올리는 리얼리즘은 이런 것이다. 그곳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얼마간의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간격이 설정되는 세계이며, 실천적으로는 출퇴근길 과속과 욕설로 버스를 몰고 가는 어떤 중년 기사의 심통 맞은 얼굴을 떠올리며, 그의 깊게 팬 주름들 사이로 상상을 끼워보듯, 일상 속 적대와 부재, 거절을 맞대며 이해력과 상상력을 기르는 내면적 과정이 동반되는 장소다. 타자라는 낯섦과 불편함은 리얼리즘의 조건 중 하나였지만, 그것들이 편리함으로 제거되어가는 테크놀로지와 디스플레이의 시대에 리얼리즘은 이제 그 의미를 서서히 재정립해가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올해의 영화들 중 마이크 리의 < 내 말 좀 들어줘(Hard Truths) >가 딸려온다. 이 영화는 소통 불가와 심리적 불안이 일상화된 우리 시대의 수축된 시공을 에두르거나 외면하지 않고 길바닥과 노동자의 리얼리즘으로 정면 대결한다는 점에서 포스트 코로나 영화의 빛나는 사례가 되었다. 정답 없이 문제의 구체적인 양상만을 현미경처럼 충실히 제공하며 보는 이들의 마음을 감정적으로 내려치는 탓에, 마땅히 극장에 몸이 묶여 봐야 할 영화라는 고리타분한 생각이 들 정도다. 결말부 사각 프레임을 가득 채운 두 얼굴, 그들을 잇는 숏-역숏이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마음이 그렇게 된다. ...... 어쩌면 이건 다 옛날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일상 속 원격 만남과 딥페이크 범죄가 여전하고 이미지의 사실성이 의심받기 일쑤인 작금에, 인간의 얼굴이 신비와 기적을 발생시키는 특권적인 장소라던 벨라 발라즈의 말을 과연 언제까지 믿을 수 있을까? 그렇다. 지나치게 발전한 미래에서 한때의 리얼리즘은 환상이다. <내 말 좀 들어줘> 중 / 사진: IMDb 이광호(영화평론가) l 1996년생,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주변을 오가고 싶다. 2018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반연간지 《크리틱b》, 월간 서비스 ‘ 비평의 편지 ’ 필진.
1. 이 영화는 단 한 명의 인물만 등장하는 영화다.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해역에 위치한 세이블 섬에서 40여 년간 살아온 환경보호 활동가 조이 루커스가 그 주인공이다. 미술을 전공하던 대학원생 시절 이 작은 모래섬의 흑백 사진을 보고 매료된 루커스는 1974년 세이블 섬의 바다표범을 연구하는 팀에 자원해 현장 보조원 겸 요리사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후 유실되어가는 사구를 복원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섬과 육지를 오가다, 1982년부터는 아예 거처를 옮겨 대부분의 시간을 섬에서 보내게 된다. 루커스는 섬의 생활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동료들이 모두 철수한 뒤에도 혼자 남아 세이블 섬의 거주자로 오랫동안 살아왔다. 루커스의 일상은 여러가지 반복적인 일들로 채워져 있다. 파도에 쓸려온 해양쓰레기를 수집해 분류하고, 동물의 똥에 든 이물질의 성분을 분석하고, 죽은 말의 발굽이나 곤충의 표본을 채집해 박물관에 보내기도 한다. 섬에는 500여 마리의 야생마가 서식하고 있는데, 루커스는 야생마들을 구분하려고 공책에다 말의 얼굴을 하나하나 그려 넣었다. 그려 넣고 보니 얼굴이 모두 달랐다. 이름 없는 야생마들이지만, 이들은 루커스의 공책 속에서 하나하나 고유한 개체로 호명된다. 공들여 관찰하고 기록한 덕분에, 섬의 말이 없어지면 대번에 알아차릴 수가 있다. 어느 구역으로 이동했는지, 왜 이동했는지도. 성큼성큼 거닐며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는 루커스의 행동은 마치 손바닥 속을 헤아리듯 섬을 낱낱이 알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이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자연, 무모한 도전들로 이루어진 낮, 낮이 물러간 뒤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외로운 밤, 고립을 자처하기 위해 포기해야 했을 삶의 또 다른 부분들. 그러나 영화는 그 모든 과정에 대한 회고 또한 생략한다. 조이 루커스는 그저 과거의 어느 날 섬에 당도했고, 섬에 적응하며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존재한다. 내가 첫 문단에 쓴 내용들도 대부분 나중에 구글링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이다. 사실 카메라가 호기심을 가지고 비추는 것은 인물의 생애나 환경보전의 당위적 서사보다는 섬의 현재를 이루고 있는 순간들, 루커스의 손이 빚어내는 일상의 이미지들이다. 이를테면 햇살 좋은 날 창문에 걸어 놓은, 쓰레기 조각들로 만든 예쁜 모빌 같은 것. 2.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영화는 쓰레기에 관한 영화다. 세이블 섬의 해안으로는 매일 수많은 쓰레기가 파도에 실려온다. 루커스는 해변에 나가 수거해온 쓰레기를 깨끗이 씻고 햇볕에 말려 종류별, 소재별, 브랜드별, 색깔별로 분류한다. 루커스가 수행하는 연구는 북대서양에 떠 있는 이 외딴 섬의 느리고 미세한 변화를 체험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먼 곳에서부터 해안가로 밀려오는 자본주의적 삶의 파편들을 관찰하고 집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고무풍선에 인쇄된 이름과 문구, 깡통과 플라스틱 뚜껑 따위에 달린 라벨, 각종 파티 및 행사의 흔적과 평범한 가정의 소비 품목들은 어느 지역에서 어떤 색깔과 소재가 유행하고 있고, 어떤 단어가 지갑을 열게 만들며, 무엇이 사람들을 즐겁게 또는 슬프게 만드는지 시시콜콜 이야기해줄 것이다. 얼마 전 나는 김지혜 환경과학연구자의 논문 「해양쓰레기와 함께 세계 짓기」를 읽으면서 다시금 < 고독의 지리학 >이 내게 남긴 파문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최근의 해양쓰레기 연구는 해양쓰레기에 대해 조금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없애야 할 문제적 사물 혹은 단순한 골칫거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세계를 구성해 나가는 삶의 일부로 보는 것이다. 인류세 이후의 이 ‘얽혀 있는 삶’ 속에서, 인간은 인간 이외의 것들과 작든 크든 혼종의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간다. 세계가 바다로 연결되어 있기에 해양쓰레기가 특정 지역의 문제일 수 없듯이, 세이블이라는 작은 영토 위에서도 생명체들은 잎맥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동식물 모두가 플라스틱 쓰레기, 유출된 석유, 침식작용과 같은 지형의 변화와 함께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조이 루커스도 이제 그 일부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섬에 흘러 들어왔다가 섬과 함께 나이가 들어 어느새 할머니가 된 그의 머리칼은 바람에 나부끼는 섬의 억새와 똑같은 은빛이다. 어떤 장면들은 아무 대사도 없이 그저 이 은빛의 일렁임과 반짝임만을 담고 있다. 바람과 태양은 섬 안의 모든 것에 공평한 손길을 준다. 화면이 한 컷 한 컷 넘어갈 때마다 섬이 살아 숨쉬는 하나의 생태계라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 보인다. 죽은 말의 몸 위로 바람이 분다. 루커스가 그 사체를 해변에 묻어준다. 그러면 토양으로부터 양분을 얻어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그 풀을 또 다른 말이 뜯어먹는다. 영화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드러내고 들리지 않던 것들을 들리게 하는 데에 공을 들인다. 딱정벌레가 걸어가는 소리. 달팽이가 기어가는 소리. 평소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사실은 계속 존재하고 있었던 그 소리들이 ‘영화음악’의 지위를 부여받고 무대에 오른다. 달팽이가 기어가는 소리를 작곡한 것은 달팽이라는, 그 귀엽고도 엄연한 사실. 카메라는 섬 위에 존재하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소중하게 담는다. 그러니 이 영화에 한 사람만 등장한다는 말은 고쳐 쓸 필요가 있다. 해초, 달팽이, 회색 바다표범, 수달, 박쥐, 야생마, 야생마의 똥, 잔디, 언덕, 해안의 모래알, 어둠이 내리면 검은 모래 장판 위로 쏟아질 듯 빛나는 별들, 그리고 삶과 죽음, 모든 것의 순환을 품고 있는, 언젠가는 그 자신도 흔적으로 돌아갈 모래섬. 이들 모두가 이 섬의 주인이고, 따라서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3.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는 오물을 “자리에서 이탈한 존재”라 불렀다고 한다. 쓰레기란 그 형태와 성질이 그대로이더라도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거나 함께여야 할 존재들과 함께 있지 않는 순간부터 쓰레기로 규정되는, 이질적인 상태의 사물인 것이다. 그런데 세속의 관점에서 보자면 조이 루커스 역시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한 존재다. 멀쩡한 대학 시간 강사 일까지 그만두고 혈혈단신 섬으로 들어가 평생을 모래 위의 동식물들과 함께 보낸다는 게 평범한 삶의 경로는 아닐 테니 말이다. 이상하게도 지난해 본 영화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에 관한 영화가 유독 마음에 남았던 것 같다. 사로잡힌 사람. 무언가에 천착하다 못해 그 대상에 자신의 삶이 거의 겹쳐지다시피 한 사람. 이를테면 얼어붙은 설산으로 돌진하다 실종된 사람(알피니스트: 마크-앙드레 르클렉), 또는 폭발하는 용암을 쫓아다니다 화산재에 뒤덮여 죽은 사람(불 속의 연인: 카티아와 모리스 크래프트를 위한 진혼곡). 빙벽, 설산, 파도, 용암, 번개에 대한 제어할 수 없는 매혹은 사실 같은 게 아닐까? 그런데 위험이 도사리고 있거나 대단히 위용 넘치는 경관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세이블 섬에서도 나는 비슷한 종류의 이끌림을 느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건 죽음이라고 하는, 언어로 내뱉고 나면 너무나 간단해지고 마는, 우리 삶에 내재한 비밀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존재도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침식작용 같은 것을, 짐작건대 루커스는 섬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홀리듯이, 혹은 저항하듯이, 그 세계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을 것이다. 영화에서 두 개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대비 또한 인상적이다. 해안 가까이에서 비교적 빠른 속도로 일어나는 순환 속에 계속해서 새롭게 나타나는 인공물질과 분해 불가능한 플라스틱들이 있다면, 섬 안쪽에는 시간의 비질을 고스란히 받으며 천천히 소멸해가는 사물이 있다. 루커스가 정착 초기에 나무를 잘라 짓고 그 안에서 살았던 옛집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낡고 거의 무너져내려 지금은 뼈대만 남은 쇠락한 풍경이 되었다. 폐허를 훑는 카메라의 시선에 몇 줄기의 바람이 걸린다. 텅 빈 집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바람은 말없는 증언자, ‘문명’이라는 세계 또한 유한하다는 사실을 이따금 상기시켜주는 존재 같다. 세이블 섬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영화란 그런 것 아닐까? 언젠가는 소멸할 무언가를 붙잡아 기록하겠다는 환상. 그 진심. 4. 그래서 다시 쓰자면, 이 영화는 시선에 관한 영화다. <고독의 지리학>을 한평생 환경 보존에 헌신한 여성의 이야기로 읽으면 영화는 아주 건전한 두 시간짜리 자연(혹은 인물) 다큐멘터리가 된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매혹당한 두 인간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로 읽는 편이 더 좋다. 그러면 이 고요한 산책과도 같은 시간 속에 소리없이 들끓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 또한 보인다. 러닝타임 내내 화면에는 루커스의 앞모습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최대한 조용히 뒤를 따를 뿐 앞지르거나 섣불리 말을 걸어 돌려세우지 않는다. 그러다 딱 한 번 정면으로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순간이 있다. 루커스가 아직 20대였던 시절, 누군가의 캠코더로 촬영된 과거의 한 순간이다. 모래가 유실되어가는 섬을 지켜야 한다며 열정적으로 발언을 하던 젊은 루커스는 인터뷰어로부터 어떤 질문을 받았는지 잠시 카메라를 응시하다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 섬을 사랑합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장면이 있다. <고독의 지리학>이 전주영화제에서 국내 첫 상영되었을 때, 영화가 시작하기 전 젊은 여성의 얼굴이 스크린에 떴다. 재클린 밀스 감독이 보내온 인사 영상이었다. 감독은 말했다. “이 영화는 정말 애정으로 만든 작업입니다.” 두 개의 하릴없는 고백을 지구 반대편에서 수십 명이 컴컴한 동굴에 모여 앉아 지켜보고 있는 광경. 그건 확실히 조금 이상한 감동이었다. 재클린 밀스 감독은 네 살 때 뉴스를 보고 루커스와 섬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고, 그들을 담은 영화를 일평생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무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영화들을 볼 때마다 매혹 그 자체만이 아니라, 매혹당한 사람에게 매혹당한, 기록자의 생에 대해서도 곱씹어보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삶을 부지런히 쫓고 수집하고 잘라서 정성스레 이어붙이는 작업에 대해서. 직접 돌진하는 대신에, 몇 겹의 렌즈와 필터와 녹음기를 경유해 이 불가해한 세상을 대면하고 이해하려 하는 삶의 한 방식과 태도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앞에 선 한 무리의 ‘우리’에 대해서. 여기에 이르면 <고독의 지리학>이라는 난해한 제목도 모종의 설득력을 얻는다. 고독은 외따로 떨어진 홀로의 감각이고 전혀 지리적인 것이 아니지만, 그 감각과 조우한 영화는 필연적으로 어딘가로 향한다. 섬을 구석구석 훑고, 섬을 한 바퀴 돌고, 이윽고 섬을 떠나, 스크린의 표면을 뚫고, 영화의 바깥으로 기나긴 별자리를 만든다. 그 허구의 지표 위에 잠시라도 머물렀던 사람은 별자리를 구성하는 하나의 점이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때의 점들은 이상하게도 전혀 고독하지가 않은 것이다.
<햇볕을 볼 시간>을 연출한 이다영 감독은 제작일지를 통해 이 작품이 “2021년 여름, 6명의 동료와 함께 찍은 단편영화”라고 적었다. 이보다 더 간결하고 명징한 작품 소개가 있을까. 감독은 작품의 이야기를 포장할 수 있는 미사여구를 쓰는 대신 작업 과정을 사실적으로 압축하는 방식을 택했다. 또 제작일지에는 제작 동기를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도 있다. “한 달 동안 시간에 쫓기지 않고 우리끼리 즐기면서 영화 찍으면 재밌겠다.” 제작일지에 적힌 이 두 문장은 영화 만들기가 어떤 목적을 위해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닌 영화 만들기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햇볕을 볼 시간>은 영화 만들기에 빠져든 영화인들을 위한 그리고 그들이 만든 세계에 빠져들 관객을 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것은 불완전한 상태를 가진 사물 또는 사람이다. 여주인공 재경은 독립영화에 출연하는 배우이다. 그녀는 출연이 예정된 작품의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외바퀴 자전거를 타는 연습에 몰두한다. 영화 속 주요 소품 중 하나인 외바퀴 자전거는 재경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그녀의 자질과 가능성을 두루 비추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외바퀴 자전거는 바퀴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로 인해서 그것을 운전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를 불안하게 만든다. 재경은 미숙하게나마 외바퀴 자전거를 탈 수 있지만, 그녀가 연기해야 할 캐릭터는 그녀보다 더 능숙하게 외바퀴 자전거를 탈 수 있어야 한다. 배우와 캐릭터의 불일치 그리고 배우의 현재와 배우가 꿈꾸는 미래의 불일치. 이러한 이유로 재경에 대한 문자적 묘사는 ‘아직’이라는 부사와 어떤 사실을 부정하는 ‘아니다’ 혹은 어떤 상태를 부정하는 ‘없다’라는 형용사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예컨대, 그녀는 아직 그녀가 꿈꾸는 배역이 갖추어야 할 어떤 자질이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재경과 동거하고 있는 현수 또한 불안한 현재를 사는 것으로 묘사된다. 현수는 일상 곳곳에서 소리를 수집하여 음악을 만드는 일을 즐겨 하고 있지만, 정작 그가 생계유지를 위해 하는 일은 사운드 엔지니어이다. 만약 현수가 음악가로서의 꿈을 꾸고 있다면 그가 소망하는 미래는 현재 그의 직업적인 일로 인해서 지연될 가능성이 크다. 재경은 현수의 음악과 그의 재능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에게 유튜브를 해보라고 권하지만, 그런 재경의 제안에 현수는 “모르는 것은 하고 싶지 않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현수는 자신의 현재가 불안정하다고 해서 자신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내기를 걸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한편, 현수의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그것은 현수가 사는 집의 계약 기간이 만료될 시점이 가까워지자 집주인이 월세를 올리겠다고 통보하면서부터 시작되는 불안이다. 이 일로 현수와 재경의 삶에는 잔잔한 파문이 일어난다. 두 사람은 가까운 미래에 정든 공간을 떠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과거와 미래는 현재 안으로 스며들고 있다.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 또한 재경과 현수의 일상에서 불현듯이 감지되는 과거의 어느 순간 또는 미래의 어느 순간과 마주할 수 있다. 여기서 두 가지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영화는 어떻게 현재를 묘사할 수 있을까? 영화는 어떻게 현재라는 시간이 과거나 미래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햇볕을 볼 시간>은 일상을 지배하는 시간의 기묘함을 드러내기 위해 신체에 습관의 형태로 각인된 감각을 시각화하는 방식과 함께 특정 대상이 시간의 영향을 받아서 변화하는 상태를 묘사하는 방식을 두루 활용하고 있다. 먼저 전자의 경우로는 신체와 몸짓을 통해 시간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장면들이 있다. 재경이 출근, 퇴근, 외출 등을 할 때 외바퀴 자전거를 타는 모습, 현수가 녹음실에서 자판을 보지도 않고 키보드를 다루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재경과 현수가 의례적인 몸짓으로 가벼운 신체 접촉과 함께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온 재경과 현수가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함께 분리수거를 하는 모습 등이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이 장면들 모두 재경과 현수가 직업적으로나 일상적으로나 반복된 행동 양식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장면에서 배우들의 몸짓은 그들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과거, 즉 영화가 애써 다 보여주지 않은 캐릭터의 과거의 누적된 경험을 관객이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다음으로 후자의 경우로는 특정 대상이 시간의 영향을 받아서 변화하는 상태를 묘사하는 장면들이 있다. 이 장면들은 대체로 가까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의 상태를 의식적으로 개선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재경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의 배역을 따내기 위해 외바퀴 자전거를 타는 연습을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또 다른 예로는 재경이 문화센터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로 구연동화를 하는 장면들을 거론할 수 있다. 재경은 아이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그리고 아이들이 즐거워하기를 바라면서 구연동화의 시연 방식을 조금씩 바꾼다. 재경은 자신의 구연동화를 듣고 바라보는 아이들의 미래, 즉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여러 시도를 한 것이다. 또한, 이사를 앞두고 재경과 현수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사소한 언쟁을 벌이는 모습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처럼 이 작품에는 반복과 습관을 통해 과거가 현재로 지속되고, 기대와 예측을 통해 현재가 미래로 연장되는 순간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두 개의 시간, 즉 과거가 새어 들어오는 현재와 미래가 새어 들어오는 현재는 질적으로 달라 보이지만, 실상 두 경우 모두 시간의 속성이 인간이 의식적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에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에서 썼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시간이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는 그런 상태를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분명 뒤엉킨 시간의 질서는 우리를 조급하고 불안하게 만들겠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시간의 기묘한 성격으로부터 도리어 위안을 찾으려고 한다. 만약 우리가 시간을 의식적으로 다스릴 수 없다면 우리는 무기력해질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나 되돌릴 수 없는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불안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좌절, 무기력, 패배,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경험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비가 오고 난 뒤에 따사한 햇살과 말간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삶은 우리에게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뜻하지 않은 행복과 위로를 전해주기도 한다. <햇볕을 볼 시간>에서 그런 우연은 재경이 산 중고 캠코더 안에서 발견된 누군가가 찍어 놓은 동네 풍경 또는 재경과 현수가 함께 하는 여러 소소한 일상들 안에서 보석처럼 반짝인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일상을 구성하는 여러 다른 시간적 경험이 일정한 패턴을 이루고 그것이 다시 하나의 리듬을 구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삶의 흐름이 만들어낸 하나의 교항곡과 같다. 음악의 리듬을 듣고 느끼는 것이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듯이 누군가의 삶의 리듬을 보고 느끼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