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칼라스: 세기의 디바
- 감독
- 톰 볼프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마리아 캘라스, 화니 아르당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으로 인한 거리두기는 영화 산업의 존립을 위협했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이 매체의 가장 본질적인 체험 행위를 덜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극장의 위기에 부쳐 내 경우만 고백하자면,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 동안 나는 극장에 채 열 번도 가지 않았다. 2020년은 열두 살 이후의 내 인생에서 가장 극장에 안 간 해가 되었다. 교회에 절대 안 가는 기독교인은 자랑스러운 일면조차 있지만, 극장에 통 안 가는 시네필이 그렇지는 못할 것이다. 위기가 왔을 때 말이 아니라 육체로 증명할 수 없다면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나의 뜨뜻미지근한 사랑은 그 사실을 절대로 들켜선 안 되는 바로 나 자신에게 뽀록났다(‘뽀록나다’는 속된 표현이나, 엄연한 표준어다). 나는 시네필로 자각할 자격을 상실했다. 지난 봄, 방역 상황을 주시하며 시네마테크와 멀티플렉스의 예매와 취소를 반복하던 중, 설마 확진자와 접촉해 감염되는 한이 있더라도 봐야만 하는 영화가 나타났다. 마침내 나를 극장으로 다시 불러들인 영화는 조지 A. 로메로의 < 시체들의 새벽 >(1978)이었다. 40여 년간 국내 개봉한 적이 없었던, 모든 현대 좀비 장르물의 원본이 하필이면 “이 시국에” 극장에 걸렸다. 이 영화에 대한 내 오랜 사랑과 강박(커버에 “안녕하시었어요?”가 적힌, 출시 제목 <이블 헌터>의 비디오로 접한 이후, 인생이 어떻게 망했는지 글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7855 (오독의 라이브러리, 2017-08-03, cine21)을 쓴 적 있다) 때문에,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극장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상한 조바심에 사로잡혔다. 같은 작품의 DVD가 판본별로 있고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뇌내(腦內) 재생할 수도 있지만 꼭 극장이어야 했다. 4월 15일, 나는 전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한 상황에 거의 텅 비다시피 한 쇼핑몰의 극장에서 <시체들의 새벽>을 보았다. 극장엔 개봉 취소나 연기된 영화들의 선전물만 덩그러니 놓인 채 관객은 커녕 표를 확인하는 직원조차 보이질 않았다. < 오메가 맨 >(1971)의 찰턴 헤스턴처럼 객석에 홀로 앉아 “이제 이런 영화는 안 만드는 모양이군!” 읊조릴까 했는데, 나를 포함해 총 네 명의 관객이 들어왔다. 좀비 떼를 피해 아무도 없는 쇼핑몰 안에 숨어드는 영화 속 주인공도 딱 네 명이다. 극장이 선전한 리클라이너가 편안했고, 방역이 아니라 방해받지 말라고 만들어놨던 칸막이가 있는 관람은 쾌적했다. 영화가 끝나고, 똥땅거리는 쇼핑몰 음악과 함께 좀비들이 지상에서 뒤뚱거리며 엔드 크레딧이 오르자 깨달았다. 나는 영화를 보러 왔다기보다 영화를 현실에 재현하러 온 관객이었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는 말은 옳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 기침 소리가 들리자 나의 나들이는 심리적 자해처럼 느껴졌고, 픽션은 현실의 고민이 되었다. < 우주전쟁 >(2005)의 말미에 허망하게 고꾸라지던 외계인들처럼 인간이라는 종도 겨우 바이러스에 함락되는가. 세상이 망하기 전에 영화부터 사라질까. 그럼 다 같이 종말을 맞이할 때까지 나는 뭘 먹고 사나? 또 언제 극장에 올 수 있을까? 극장이 이렇게 망할 줄이야. 친구의 영화가 결국 극장 개봉 대신 OTT를 택했을 때, 강제 넷플릭스 진출을 축하한다며 주고받은 메시지는 그나마 다행이란 위로에서 어떤 우려로 남았다. 극장이 아니라면 내가 만들고 싶어 하는 영화는 영화일까? 극장 밖에서 영화는 진정으로 존재할까? 혹시나 만약에 정말로 극장이 사라지더라도, 물론 영화까지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이미 영화는 어디에든 넘칠 정도로 있다. 손아귀의 디바이스, 책상 위 모니터, ‘언택트’ 시대를 맞아 거실에 “거거익선”으로 장만한 4K 디스플레이 속에 극장만큼 충분히 친숙하고 또렷하고 거대하게 존재한다. 거의 극장에 있는 것 같은 환경을 구현해주는 VR 어플까지 있다. 영화는 아날로그(필름)가 아니라 생성될 때부터 디지털(파일)이고, 네트는 광대하며 스트리밍은 빠르다. 그러니 둘 중에 하나만 영영 잃어야 한다면,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은 극장의 죽음이다. 만국의 시네필들이여 선택하라. 그러나 이렇게 외치고픈 충동이 울컥할 것이다. 아뇨, 극장에서가 아니면 그건 결코 영화가 아니에요. 영화는 오로지 극장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내 망막에 눈부시게 빛으로 쏟아질 때만 영화예요. 이 빛과 어둠의 예술은 극장에서만 기적을 일으킨단 말입니다. 객석에서 모두와 함께 울고 웃으며 다 같이 탄식할 때만! 시네마테크를 향한 내 예전 간증을 지금 다시 적노라니 가슴이 뜨끔하다. 그 믿음은 유효합니까? 6월, 여름 시즌에 내야 할 영화들이 줄줄이 훗날을 기약하고 뒤로 밀리며 눈치만 볼 때 한 영화가 매를 맞아보겠다는 듯 용감히 개봉했다. 극장에 같이 가려 동행을 구했지만 누구도 나서질 않고, 코로나 때문이 아니어도 내가 고립된 인간임을 직시하며 혼자 < #살아있다 >( 조일형 , 2020)를 보러 갔다. 체온을 재고 연락처를 남긴 다음 극장 안으로 들어와, 테이핑으로 간격을 띄워놓은 좌석에 앉으니 이 정도면 극장은 오히려 전에 없이 쾌적한 상태로 지속할 수 있을 걸로 보였다. 처음 이 영화의 정보를 접하고, 미국 작가가 쓴 시나리오지만 한국판 리메이크가 아니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같은 시나리오로 두 편의 영화가 동시에 제작되며, 감독의 연고지도 미국 기반이라고 했다. 나는 괜히 영화사들이 이제부터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외국에서 사오고 모국어만으로는 업계에서 버틸 수 없게 되는 상상을 했다. 캐릭터와 플롯만 정확하게 보고, 모호하게 문장력으로 눙치는 시나리오는 솎아지는 날이 오는 거다. 퇴출 확정이군. 아무튼 티저를 보고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틱톡 시대에 도래한 SNS 맞춤 좀비 스릴러일까 싶었는데, 시의적절한 아이템이 시국에 맞춤인 결과로 나왔다. 심지어 감독 역시 코로나 때문에 입국을 못하고 미국에서 화상을 통해 원격 편집과 마스터링을 했다니 거의 언택트 시대의 산물 같은 영화다. 좋든 나쁘든 원하건 말건 간에 세상에 의해 현실이 되는 픽션이 있고, 이 영화도 그렇다. 하루아침에 바깥세상이 망해 집 안에 꼼짝없이 갇힌 남자( 유아인 )가 고립 끝에 별 수 없이 나도 망할까, 하다가 맞은편에 사는 여자( 박신혜 )와 소통하고 함께 살아남고자 서로 돕는다. 좀비 떼를 피해 둘이 도망갈 수 있는 세상의 가장 멀고 높은 곳이란 겨우, 아파트 옥상이다. 이 세팅은 지금 현실과 닮았다. 팬데믹으로 집에 갇힌 우리는 마스크를 끼고 밖으로 나서는 일에 종말이 온 듯 호들갑을 떤다. 이 영화 속 캐릭터의 생존 투쟁도 절박하기보다 호들갑 같다. 영화를 보면서 걸리는 개연성은 이제 나 같은 직업병자 아니면 위키에 비판 항목을 적는 사람에게만 문제일 것이다. 관객 눈에 즉각 보이지 않는 맥락과 읽히지 않는 의미부여 대신, 상황에만 집중해서 단순명쾌하게 콘셉트만 끝까지 밀고 가는데 의외로 산뜻하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나는 이렇게 공권력을 긍정하는 좀비 아포칼립스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국가가 해시태그(#)를 검색해 당신이 SNS에 남긴 생존 증명만으로 헬기에 특수부대원을 태워 구하러 온다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타났는데 어째 그다지 촌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이걸 문제 삼고 싶은 내가 촌스러운 것 같았다. 영화는 무리 없이, 딱 아파트 옥상까지만 도달했고, 살아남았다. 나는 무리를 보길 기대했었다. 영화란 만드는 과정도 그 결과물의 내용도 온통 무리하는 것이라 믿어 왔는데, 그 무리한 욕망을 관객에게 납득시키는 게 영화 아닌가? 이제 다들 그런 영화는 안 만드나? 개인적인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를 긍정하기로 했다. 극장을 나서는 순간 깨끗이 잊히게끔 만든, 딱 그 정도의 적당한 야심을 품은 영화가 주는 미덕을 생각했다. 이런 하이 콘셉트 영화를 더 많이 더 잘 만들 수 있게 된다면, 언젠가는 뒤통수를 후려치는 기분을 선사하는 현실의 우화 같은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인 나로선, 다만 그 수준에 도달한 시나리오가 또 어느 미국인이 영어로 쓴 책이 아니도록 애쓰면 될 일이다. <#살아있다>는 코로나 상황의 박스오피스에서 선전하여 초여름의 극장가가 잠시나마 지탱할 수 있도록 견인한 공이 있다. 극장이 살아있고 다녀간 관객이 무탈함을 세상에 알려줬던 것이다. 8월 중순 2차 대 확산이 발생하여 다시 극장이 셧다운을 거듭하는 동안에는 넷플릭스에서 월드와이드 영화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산 콘텐츠 중 최초 기록이라니, 팬데믹 상황의 전 세계 구독자들이 꽤 공명한 것 같고, ‘K-좀비’라는 모호한 장르도 존재감을 확인했다. K-좀비라니, < 괴시 >( 강범구 , 1981) 이후 이런 날이 다 왔다. 그러나 나는 한국산 좀비 영화의 경향에 신체를 물어뜯고 내장을 쏟아내고 그것들을 먹는 직접적인 묘사를 여간해선 하지 않는 것에 의구심을 갖는다. 내가 고어(gore)를 요구하는 건 좀비 영화의 윤리 때문이다. 굳이 보여주지 않을 윤리가 있다면, 마땅히 보여야 할 윤리도 있다고 생각한다. 옛날 좀비 영화에 대한 근본주의를 품은 사람의 무리한 요구일 뿐이려나? 뭐 이제 그런 영화는 안 만드는 모양이니까. 암담한 거리두기의 시간을 지나 1단계로 돌아왔지만, 극장의 위기는 여전히 녹록하지 않다. 기대했던 많은 영화들이 끝내 극장을 포기하고 OTT로 돌아서고 있다. 왜 영화를 마땅히 극장에 걸지 않느냐며, 손해를 감수하라고 강요할 순 없다. 영화는 결국 돈을 벌어야 지속할 수 있고, 극장은 믿음이 굳건한 몇몇 시네필에게만 의존하기엔 지나치게 크고 구태의연한 산업이다. 이 구태의연한 행위가 영화를 경험하기에 가장 옳은 양식(樣式)이기에 나는 OTT의 영화 독식도 극장의 명예로운 죽음도 언택트와 뉴 노멀 어쩌고 하는 대단한 변화도 원하지 않는다. <시체들의 새벽>을 극장에서 보며, 앞으로 인류가 지독히도 재수가 없다면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보는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괜찮네? 나다운데,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이런 감상적인 호들갑보다 <#살아있다>를 보고 극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분으로 극장은 안전해, 다음에 무슨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을까? 생각하는 쪽이 훨씬 나았다. 영화의 구원과 극장의 부활에 대한 소박한 믿음을 요상한 맹신의 종교적 호들갑이 하루아침에 막막하게 만들 줄 그땐 몰랐다. 다시 그런 상황이 오는 건 사양한다. 종말, 멸망, 아포칼립스란 그렇게 떠들썩하지 않고 오히려 조용하고 쓸쓸할 거라 생각한다. 집에 갇힌 채 홀로 훌쩍이는 일이 진짜 종말에 가깝다. 이 상황을 탈출해도 별로 대단한 미래는 없겠지만, 그래도 예전의 평화로운 일상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행운을 빈다. 그 행운이 너무 힘들게 멀리 있지 않고, 우리가 갇힌 집에서 아파트 옥상 정도의 거리에 있기를.
격동하는 역사를 온전히 자기 삶으로 감내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를 현미경으로 보듯 자세히 눈여겨보고 기록하는 자. 다큐멘터리 영화에선 이야기를 하는 자와 듣는 자, 기록되는 자와 기록하는 자의 긴장 관계에서 다양한 의미가 배태되곤 한다. 영화학자기도 한 김소영 감독은 2014년부터 유라시아 대륙으로 흩어진 고려인의 발자취를 찾아 다큐멘터리 영화로 담아왔다. < 눈의 마음:슬픔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 >(2014)에선 고려인 2,3세의 삶을, < 고려아리랑:천산의 디바 >(2016)에선 고려인의 상실을 노래로 위로해온 고려극장의 디바 방 타마라와 이함덕의 예술 세계를 조명했다. 한국전쟁 당시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로 유학을 떠났던 여덟 청춘의 이야기를 담은 < 굿바이 마이 러브NK:붉은 청춘 >은 ‘유라시아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해방된 지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당시 조국을 떠나야 했던 망명자들의 삶을 고집스럽게 뒤쫓은 기록을 만나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다. 이 기록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냉전과 분단 등 국가주의 세계관으로는 보지 못한 역사의 이면, 그 안에서 이뤄진 개인의 선택. 김소영 감독의 세 작품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충분히 조명 받지 못한 디아스포라 역사를 미시적으로 접근해 재정립한 결과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최전선에서 싸운 북한 청년들이 있었다. 20대 초반, 어렸지만 혁명을 향한 부푼 꿈을 안고 싸운 이들은 “알짜 빨갱이”로 인정받아 유학길에 올랐다. 이들의 행선지는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 최국인 감독, 김종훈 촬영감독, 작가 한대용(이후 한진), 허웅배 등 여덟 명의 유학생은 말도 다른 타지에서 조국을 향한 신념으로 살아나갔다. 하지만 1956년 김일성의 주체사상 종파사건을 일어나며 모든 게 달라졌다. 허웅배는 1957년 11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재조선 유학생대회에서 북한의 1인 독재 체제를 비판했고 이 사건으로 대사관에 구금됐다가 58년 소련에 망명을 요청했다. 허웅배와 친구들은 모스크바에서 40여km 떨어진 모니노 숲에서 천막을 치고 소련의 답을 기다렸다. 그 때 허웅배는 “참사람이 되자는 뜻으로 여덟 명 모두 같은 이름 ‘진’을 쓰자”고 제안하며 결의를 다졌다. ‘모스크바 8진’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후 망명을 받아들인 소련은 이들을 소비에트 각 지역으로 흩뿌렸다. 한대용은 서부 시베리아에서 러시아 여성 지나이다 이바노브다(이하 지나)와 결혼했고, 김종훈은 러시아 북서부에서, 최국인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살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는 8진의 마지막 생존자 김종훈, 2014년 김소영 감독이 알마티에서 만난 최국인, 그리고 한진의 미망인 지나다. 이들 말 속엔 혁명을 향한 신념과 조국에 대한 아쉬움, 동료에 대한 뜨거운 우정과 사랑이 알알이 박혀있다. 김종훈은 조국에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존경하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갈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최국인은 카자흐스탄의 공훈 감독으로 활약했지만 “조국을 위한 영화를 만들지 못한 내 인생은 비참하다”고 돌이킨다. 지나는 ‘국적 부재’라 쓰인 여권을 가진 한진과 결혼을 하던 때를 떠올린다. “누가 이 고려인과 결혼하도록 강요했냐”는 공무원에게 “이 세상에 사랑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고 되묻던 기억을, 백발의 지나는 격정적인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사랑과 우정, 신념이 삶의 가장 값진 가치였던 시절. 풍족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았던 인생에서 꽃피운 아름다운 가치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흥미로운 건 이들의 이야기를 유연하게 개입하고 재구성하는 연출이다. 한진이 쓴 글을 극영화 방식으로 연출한 영상이 등장하거나 한진이 가족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김소영 감독이 직접 읽기도 한다. 촬영 중 최국인 감독이 작고한 소식을 김 감독이 전하는 장면도 나온다. 감독이 단순히 이들 삶을 기록하는 것 이상으로, 이미 그 세계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듯 보인다. 다른 시공간을 살아온 모스크바 8진과 이를 끈덕지게 쫓아온 다큐멘터리 감독, 즉 찍는 대상과 찍는 주체가 수평적으로 연결된 상태가 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화 말미 김 감독은 내레이션으로 “왜 우리들에게 관심을 갖느냐”고 물은 김종훈에게 ‘영화로 다른 세상을 보고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한 사실을 전한다. 긴 시간 영화로 주류 역사 이면을 끊임없이 탐구해온 영화 작가 김소영이 역사에 묻혀있던 찬란한 청춘과 조우한 방식은 역시 영화였다. <굿바이 마이 러브 NK:붉은 청춘>은 영화가 역사를 새롭게 구성하고 탐구할 수 있는 기록의 매체라는, 명징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김소영 감독의 고려인 삼부작 중 첫 작품 < 눈의 마음: 슬픔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 >(2014)(<김 알렉스의 식당: 안산-타슈켄트>의 감독판)은 그야말로 슬픔을 위한, 애도를 위한 영화였다. 일제 강점기, 살기 위해 목숨 걸고 이주해 간 연해주. 그곳에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기차 화물칸에 실려 중앙아시아 여기저기에 버려진 고려인들. 이들에게는 차라리 죽음이 삶보다 가까이 있었다. 영화는 이 비극적 역사와 더불어 감독의 마음을 아프게 한 몇몇 죽음들을 마주하고 이를 애도한다. 이러한 죽음과 슬픔 속에서도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 >는 그 고통스러운 삶을 지탱하게 해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아가는 영화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걸출한 두 명의 고려인 디바를 만난다. 영화는 전반부에서 고려극장 1대 춘향이자 고려인 최초 카자흐스탄 인민배우였던 이함덕의 삶을, 후반부에서 우아하면서도 위엄있는 목소리로 고려인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았을 방 타마라의 삶을 조명한다. 이함덕의 시대에 살았던 누구나가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 이함덕에 대한 인상적인 구술은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있는 고려인 노인단에서 만난 한 할머니로부터 전해졌다. 이함덕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단박에 그녀를 기억해낸 할머니는 “아아, 이함덕. 잘 놀았소.”라고 한다. 배우에게 이보다 더 큰 칭찬이 있을까. 그녀는 훌륭한 스승이자 선배이기도 했다. 3대 춘향이었던 최 타찌아나는 반년 동안 이함덕의 집에 머물며 그녀로부터 한글과 춤을 배웠던 일화를 들려준다. 고려극장의 음악 감독 출신인 한 야곱은 두 번이나 극장을 뛰쳐나갔던 자신을 번번이 붙잡아준 이함덕을 기억한다. 다행히도 이함덕의 노래와 춤이 담긴 푸티지를 통해 생전 그녀의 몸짓과 육성을 들을 수 있다. 영상 속 이함덕의 모습은 젊은 시절의 그녀를 기억하는 동료의 말처럼 곱고, 녹음된 그녀의 노랫소리는 청아하고 구슬프며 간드러진다. 이함덕의 부분이 끝나면, 이함덕의 것과는 정 반대편에 위치한, 어떤 사연도 담아낼 듯 넓고 풍부한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또 한 명의 전설적인 디바, 방 타마라가 걸어온다. 그녀가 들려준 한 일화는 그녀가, 고려극장이, 아리랑가무단이 고려인들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한다. 시베리아 타이가 지역에 있는 군사기밀구역에 공연을 갔다. 거기서 그녀는 “거대한 하늘”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의 내용은 이러했다.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었다.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군인은 탈출하는 대신 비행기를 사람들이 없는 도시 외곽으로 몰고 갔다. 그는 죽었지만, 그 죽음으로 더 많은 이들을 살렸다.’ 노래가 끝나자 꽃다발이 그녀의 무릎까지 차올랐고 그곳에 있던 모두가 울었다. 그녀의 공연이 있기 바로 전, 비행기가 두 대가 추락하는 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고려극장이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중앙아시아의 혹독한 기후, 고된 노동, 고향에 대한 그리움, 무수한 죽음과 슬픔을 견뎌낼 힘과 위안을 준 것이다. 방 타마라. 그녀에게는 고려인이 겪어야 했던 모진 역사 외에도 가족사적인 비극이 있었다. 이미 오래전 일이고 담담하게 이를 털어놓는 그녀이지만 뒤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녀가 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게 한다. 그녀는 “극장에서 교회로 넘어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말한다. 이제 그녀가 노래하는 곳은 신의 앞인 예배당, 자신을 불러주는 소수의 사람들 앞이다. 영화 끝에 다다라서야 들을 수 있는 현재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풍성하고 넓으며, 여기에 더하여 생의 고통과 모순을 끌어안는 깊이와 평안함이 깃들어 있다. 젊은 시절, 열정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연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손가락 부상과 이로 인한 5년여의 공백을 딛고 작년,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앨범을 냈다. 이후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신앙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과연 연주회장에서 마주한 그녀의 모습은 음악의 신을 빙의한 것 같던 젊은 시절의 모습이 아니라, 기도를 올리는 구도자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이러한 정경화의 모습이 어느 병원에서 평안한 표정으로 “백만 송이 장미”를 부르던 방 타마라의 모습과 겹쳐진다. 영화에는 이 두 디바의 이야기 외에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우슈토베 고려인 노인단에서 우연히 만난 마리아 코발렌코의 딸. 마리아 코발렌코는 우크라이나 여성으로, 김소영 감독의 고려인 3부작에 영향을 준 고려인 2세 송 라브렌티 감독의 <고려사람>이라는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고려인 가정에 입양되어 고려인으로 키워진 그녀는 강제이주 때 고려인들과 함께 화물칸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오게 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 백인 여성임에도 장을 맛있게 담그고, 완벽한 고려말을 구사하는 그녀의 존재는 고려인이, 디아스포라의 삶이 얼마나 혼성적이며 다양한 층위를 가지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극작가이자 이함덕의 남편인 태장춘이 독립운동가 홍범도의 일생을 다룬 “의병들”이라는 연극을 올렸고, 홍범도가 죽기 일 년 전 이를 관람했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방 타마라의 부분에서는 그녀의 두 딸의 이야기가 주요하게 등장한다. 어린 시절, 순회공연을 하는 엄마를 따라 소련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한 학교를 삼사일씩밖에 다니지 못했고, 노래는 혼자나 친구들과 함께 부르는 것이 좋으며, 엄마가 가수인 것에 만족한다 말하던 큰딸의 깊고 그윽한 표정. 언니와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엄마를 따라 가수의 길을 가고 있는 둘째 딸, 그리고 그녀가 엄마에게 바치는 노래. <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 >에는 두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영화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여전히 궁금하고 알고 싶은 기억과 역사가 담겨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자주 위안과 기쁨을 느꼈다. 유사 이래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승화하고 이를 견디어 내게 해준 것, 다름 아닌 예술. 그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음악이다. 아무것도 없이 허허벌판에 버려진 사람들, 헤아리기 힘든 고통과 셀 수 없는 죽음을 겪은 이들을 위로하고 살게 해준 고려극장의 음악. 그 정점에 이함덕과 방 타마라가 있었다. 그녀들의 삶과 노래. 영화는 이렇듯 생의 비밀을 전해주는 것이었으므로, 영화를 보는 동안 위안과 기쁨을 얻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