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야
- 감독
- 루시아 마르티네즈 가르시아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매티 칼로, 미아 마르티네즈 가르시아
경기도로 이사한 후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한번 서울 밖으로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서울 서대문구에서 태어났고, 마포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독립한 후에는 줄곧 은평구에 살았다. 부산 금정구 금정경찰서에서 보낸 군생활을 제외하면 서울의 서북 3구, 그 안에서도 반경 10키로미터가 넘지 않는 좁은 장소에서 평생을 산 셈이다. 개굴개굴. 그런 내게 사람들의 말은 토머스 울프와 이문열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두 작가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그들 모두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 경기도에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울로 돌아가고 싶기는커녕 오히려 꼭 서울에 살아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지만 그건 내가 (갈 곳 없는) 프리랜서이고, 이사를 통해 아내의 출퇴근길은 (조금이나마) 편해졌으며, 아내와 나 모두 문화생활(정확히 말하면 외출)을 즐기지 않는 성격이고, 아이의 학군이나 사교육 같은 걸 신경 쓸 필요가 (아직은) 없는 데다가, 가족 중에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녀야 하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전보다 적은 주거비용으로 삶의 질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높아졌고, 그것이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변화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게 요즘 제가 부동산에 꽂힌 이유에요. -그래서 이제 부동산 투자라도 하실 건가요. -아직은요. 대신 아내와 함께 일요일마다 ‘구해줘! 홈즈’를 챙겨보고 있어요. -그게 뭐지? 드라마에요? [셜록] 같은? -이사를 계획 중인 시청자가 사연을 보내면 연예인들이 대신 예산과 조건에 맞는 집을 보러 다니는 예능이에요. 열심히 보고 공부해서 부동산 전문가로 거듭나려고요. 지돈 씨도 나중에 이사 생각 있으면 말해요, 제가 잘 해드릴게요. -…그건 마치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출발! 비디오 여행’을 꼭 챙겨본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지돈 씨, 저는 ‘출발! 비디오 여행’ 같은 건 보지 않아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JD를 바라보았다.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접은 후로는요. 조셉 맨키위즈의 영화 <유령과 뮈어 부인>과 마그리트 뒤라스와 도미니크 노게즈의 대담집 [말의 색채]는 모두 부동산 이야기에서 출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루시 뮈어는 독립을 선언한다.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1년 전에 죽은 남편까지 들먹이며 만류하지만 뮈어 부인의 의지를 꺾진 못한다. 부동산을 찾은 루시는 수상할 정도로 저렴한 바닷가 저택을 발견하고, 중개업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임대 계약을 맺는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성격 더러운 전 주인의 유령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뒤라스는 대뜸 자신을 매혹시켜 < 나탈리 그랑제 >를 만들게 한 집에 대한 이야기로 대담을 연다. 생애 처음 소유한 집. 정원에 창고까지 딸린 집은 당시 그녀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매우 비쌌지만,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로 벌어들인 수입으로 겨우 살 수 있었다고. 그러면서 대수롭지 않게 덧붙인다. "내 책을 각색한 영화들이 너무 좋지 않아서 내가 직접 해도 그 정도는 만들 수 있거나 그보다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1) 두 가지 교훈이 있다. 하나. 싸고 좋은 매물은 없고 집과 사람, 사람과 유령 사이에도 궁합은 있다. 둘. 혹시라도 문필 활동으로 생계를 꾸릴 생각이라면 최소한 프랑스에서는 태어났어야 한다, 그것도 백 년쯤 전에, 되도록이면 마르그리트 뒤라스로… 한국에도 부동산을 다룬 작품은 많지만 부동산 이야기로 시작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 일단 떠오르는 건 이윤기 감독의 2008년 영화 < 멋진 하루 >다. 검은 화면 위로 오프닝 크레딧이 흐르면,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린다. -마석? 그게 어디야? -춘천 가는 길 어디라나 뭐라나? 아무튼 뭐 사자마자 두 배쯤 올랐대. 지금은 한 평당 70이라던데. -그럼 얼마나 번 건데? 걔는? -40에 샀다니까 30에 100해서… 삼 천? 그쯤 되겠네 -삼 천? (사이) 삼 천… -한 방에. 봐 봐, 얘 몇 주째 안 보이잖아. 전화도 잘 안 받아. 나는 구글에 '마석 땅값'을 검색한다. 가장 처음에 나오는 2019년 6월의 기사("'드디어 호재 터졌다!' 남양주 마석역 일대 땅값 후끈")에 따르면 GTX 건설과 지하철 6호선 연장 계획이 동시에 발표되면서 마석역 인근 당 평당 평균 가격은 2017년 250만원, 2018년 350만원이었던 것이 2019년에는 450만원으로 치솟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2020년과 2021년에는…? (알기 싫음) 담배를 나눠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이 향하는 곳은 스크린 경마장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부동산과 경마, 그리고 1년 전 350만원을 빌리고 잠적한 남자(하정우)에게 빚을 받아내기 위해 경마장을 찾은 여자(전도연)에서 시작하는 영화인 셈이다. 과연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촉발된 전세계적인 경제위기의 한복판에 개봉한 영화답다고 할까. 돈이 없다며 느물느물하게 잡아 떼던 남자는 돈을 받기 전까지는 가지 않겠다는 여자에게 오늘 안으로 어떻게든 해결하겠다고 큰소리친다. 어떻게? 다른 여자들의 돈을 빌려서… 남자를 믿을 수 없는 여자는 남자와 동행하기로 하고, 카메라는 그런 둘을 따라간다. 옛 연인에게 돈을 갚기 위해 다른 여자들에게 돈을 빌려야 하는데도 어째선지 무사태평하기만 한 남자와 옛 연인에게 빌려준 돈을 받는데 어쩐지 본인이 직접 운전까지하며 돈을 꾸러 다니는 것만 같은 기분에 자꾸 울컥하는 여자의 하루. 그런데 나는 왜 여기서 영화의 줄거리를 꼬치꼬치 늘어놓고 있는 걸까? 서평가로 활동하던 시절의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이다. 분량을 채우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영화가 캐릭터 무비라는 것,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대책없이 낙관적이고 유연한 성격의 남자와 안 그래도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이유없이 예민하고 불안한 성격의 여자가 티격태격 하면서도 그들에게 주어진 미션을 완료하고 헤어져 다시 각자의 길을 걸어가지만 함께 했던 짧은 시간의 영향으로 그들 모두 그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 거라는 여운을 남기는 종류의 영화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변화하는 사람은 여자 한 명뿐이라고 해야겠지만.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을 남녀로 바꾼 다음 긴 이야기를 단 하루로 압축한 것 같은 이야기, '한국남자 조병운(하정우)' 같은 느낌으로… 영화가 중간을 지날 무렵, 경마장을 나설 때부터 남자가 들고 있던 커다란 가방의 비밀이 밝혀진다. 남자는 돈이 없어 전세금을 빼고 가방 하나에 살림을 넣은 채 친구 집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면 이 영화를 사업이 망하고 이혼까지 한 속편한 무주택자와 파혼하고 새로운 직장을 구하지 못해 언제 길바닥으로 나앉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하위 중산층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단지 그렇게 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한 마디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런 종류의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고, 혹은 내겐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만한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고, 어쩌면 이 문제는 인생보다 큰지도 몰라. 나는 머리도 식힐겸 <멋진 하루>가 담고 있는 2008년 서울의 이곳저곳 -- 개발 이전의 용산과 잠수교와 종로 뒷골목과 이태원 언덕길과 서소문 아파트와 연희동 사러가마트 등 -- 을 직접 둘러보면서 시간 속에 잠시 존재했던 어떤 것을 영원에 가깝게 붙잡아 고정시키는 이미지의 유령적인 성격에 대해 생각하며 그것이 우리의 에세이필름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찬찬히 고민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서울을 향하는 9701번 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 (편집자 주: 다음은 K정연이 JD에게 보낸 메일을 전재한 것이다. 시나리오를 위한 준비작업 중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K정연이 원고를 완성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록 불완전한 메모의 형식이나마 독자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JD의 동의를 받아 여기에 올린다. 전체적인 내용이나 분위기 모두 본 원고와는 동떨어져 있어 구태여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미리 밝힌다.) 서평을 쓰지 않는 서평가 K정연은 마감공포증 때문에 지금까지 그가 추구해오던 약간의 재치 있는 문필 활동을 그만두고 정지돈과 함게 한국 영화에 대한 에세이 필름을 만들기로 한다. 어느 날 그는 9701번 버스를 타고 서오릉을 지나던 중 같은 버스에 타고 있던 영화 평론가 유운성을 우연히 마주친다. 구산역에서 내리는 유운성을 따라 충동적으로 버스에서 내리는 K정연. 구산동 도서관 마을에서 봉산의 이름없는 묘지로, 맘스터치에서 불광천으로 향하는 유운성의 행보를 쫓는 그의 머릿속에 어떤 목소리가 들린다. "희망 없이 말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편이 낫다. 희망 없이 수다를 떠는 데서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냉소주의자의 태도다. 다만, 희망을 낙관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낙관이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둘러싼 요인들로 미루어볼 때 얼마간 바람직한 미래가 가능하다고 진단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주식시장이 낙관적이라거나 부동산 시장이 안정화도리 것이라고 전망하는 경제 전문가의 발언 따위를 떠올려보라. 희망은 여건에 비추어 미래를 낙관하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가능성의 조건 자체를 응시하는 일이다. 희망은 낙관이라고 하는 타협을 용인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긍정하는 일이다. 주식시장이나 부동산 시장에 대한 전망을 내놓기보다는 그것들을 없애버리자고 요구하는 것이 희망이다…" 2) 창백해진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K정연.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문자 메시지 보낸다. -JD, 당신은 시네마가 인생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나요? 쏘옥, 문자가 발송되는 소리와 함께 K정연 쓰러지면 손에서 미끌어지는 핸드폰. 띵 하는 메시지 수신음과 함께 JD의 문자가 액정에 표시된다. -JD: ??? 시간 흐르면 비 내리는 밤의 불광천. 헤드랜턴을 쓴 JD가 수풀 사이를 뒤지고 있다. 아! 탄성을 지르는 JD. 정신을 잃은 채 반쯤 개천에 잠긴 K정연의 모습이 보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담요를 뒤집어 쓰고 코코아를 마시던 K정연이 대답한다. -유운성 선생님을 만났어요. -유운성쌤 이요? 유운성 쌤은 어디 갔는데요? -모르겠어요. 천변의 벤치에 앉더니, 저 멀리 레인보우 브릿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있잖아요, 과거의 문 같은 거. 움직이지도 앉고 한참을 앉아 있더군요. 저는 가야했어요. 마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마감을 생각하자마자 갑자기 어지러워지더니 모든 게 깜깜해졌어요. 이렇게 말하는 지금도… 병원 진료실. 의사가 K정연에게 말한다.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마감공포증입니다. -선생님, 담당 편집자에게 제가 입원을 해야 해서 원고를 마감할 수 없다고 전화 한통만 해주시겠어요?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K정연.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그런데 놀지도 않고 일도 안 한다면? 빠르게 교차 편집 되는 장면들. 다양한 시간, 다양한 날씨 아래 거리에 있는 K정연. 불안한듯 고개를 돌리면 시선 끝에 걸리는 빨간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남성의 흐릿한 모습. 유운성이다. 쫓아가보지만 매번 잡히지 않고 사라지는 유운성. 절규하는 K정연. 캄캄한 공간. 푸른 조명이 켜지면 수백 수천 개로 보이는 K정연의 모습. 거울 방이다. 잠시 후 붉은 조명과 함께 거울 속 K정연의 모습이 유운성의 뒷모습으로 바뀐다. 다시 장면 바뀌면 다양한 시대, 다양한 공장을 나서는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 그런데 모두 유운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중 한 명의 유운성을 뒤쫓는 K정연. 정확한 시대도 장소도 알 수 없는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가다 마침내 유운성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한다! 벽을 보고 선 유운성에게 다가가는 K정연.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데 유운성의 셔츠를 쥐는데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유운성. K정연이 쥐었던 손을 펴면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USB. -루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K정연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JD. 서럽게 우는 K정연에게 묻는다. -무서운 꿈을 꾸었나요. -아니요. -슬픈 꿈을 꾸었나요. -아니요. -그럼… -하룬 해도 파로키 하지 않는 꿈이었습니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JD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K정연. -지돈 씨, 저는 제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가끔은, 실은 자주, 너무 지겹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요. -세상에는 두 부류의 평론가가 있습니다. 진과 성. 진 쪽의 평론가에는 이동진과 김영진이 있고, 성 쪽의 평론가에는 정성일과 유운성이 있는 식으로요. -그건 성명학인가요. -분류학이라고 해두죠. -하지만 저는 진도 아니고 성도 아닌 걸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자리도 있는 법이죠. 이를테면, 진과 성의 사이 같은 곳이. -?? -진과 성의 사이에 있는 정. 그게 바로 정연씨의 자리랍니다. 자, 저를 따라해보세요. 진! 정! 성! -진 정 성…? -바로 그겁니다! 진정성!!! K정연이 JD에게 손을 내민다. 손바닥 위에 놓인 USB. 겉면에는 "cinema, 2004"라는 글씨가 흐릿하게 보인다. -이건…? -꿈 속에서… 제게… -2004년이라면, 라브 디아즈의 < 필리핀 가족의 진화 >일까요? -글쎄요… -리산드로 알론소의 < 죽은 사람들 >일 수도 있겠네요. 아니면 구로사와 기요시의 < 도플갱어 >? 그건 2003년이지. 그럼 < 밝은미래 >? 아냐 그건 2002년이고. 아니면 홍상수의 <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보면 알겠죠. 조심스럽게 노트북에 USB를 꼽는 K정연. 곧바로 자동재생으로 영화가 재생된다. 주인공이 불분명한 예식장안 풍경 예식이 끝난 듯 신부의 부케를 받으려 한쪽으로 몰려서는 여자들 신부가 등뒤로 부케를 던지고 날아오르는 부케를 향해 손을 뻗는 여자들 부케가 첫 번째 손을 튕겨서 다음 손을 거쳐서 통통 튕겨나가고 이 손 저 손을 차례로 튕겨나가다가 허공을 뱅그르르 돌던 부케가 왠 막대사탕을 들고 있는 손안으로 쏙- 들어간다. 카메라 빠지면 겨드랑이에 목발을 끼고선 이빨이 빠진 여자 아이가 방긋하고 웃는다. 여자아이 손에 들린 부케를 놀란 눈으로 보는 여자들. 그 위로 타이틀. “어린신부” 3) 1) 마르그리트 뒤라스.도미니크 노게즈, [말의 색채], 유지나 옮김, 미메시스, 2006 2) 유운성, '시네마, 역량과 유령 사이에서', [씨네21] 1300호 3) 필름메이커스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어린 신부> 시나리오에서 인용했다. https://www.filmmakers.co.kr/koreanScreenplays/54717 *** 그 외에도 히치콕의 < 현기증 > 뤽 베송의 < 루시 > 하룬 파로키의 <110년 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황인찬의 시 '무화과숲' 중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등을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힌다.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엄태웅 , 주원 주연, 황병국 감독의 < 특수본 >(2011)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특별수사본부’의 약자인데 시간을 더 거슬러 1970년대로 가면 설태호 , 이원세 감독이 바통 터치하며 만든 <특별수사본부> 시리즈가 있었다. ‘한국의 CSI 였다!’라고 말하면 너무 거짓말이고, 한국영화사의 대표적인 반공수사물 시리즈라고 보면 된다. 한국영화사에 에로, 액션 시리즈만 있었던 게 아니라 나름 진지한 범죄추리(물론 추리는 좀 약하다) 시리즈도 있었던 것. 1편인 < 특별수사본부: 기생 김소산 >(1973)을 시작으로 2편 < 특별수사본부: 여대생 이난희 사건 >(1973), 3편 < 특별수사본부: 배태옥 사건 >(1973), ‘꽃할배’ 이순재 가 출연한 4편 <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 >(1974), 끝으로 역시 꽃할배 박근형이 출연한 < 특별수사본부: 외팔이 김종원 >(1975)에 이르기까지 모두 5편이 만들어졌다(1-2편은 설태호 감독, 3-5편은 이원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며 2, 4, 5편은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에서 VOD 관람이 가능하다). 특별수사본부 시리즈 이 시리즈는 민영방송 ‘라디오 동아방송’(1980년 신군부에 의해 KBS에 통합될 때까지 17년 7개월 동안 이어왔다)에서 1974년부터 1979년까지 방송된 라디오 심야프로그램 <특별수사본부> 시리즈가 그 모태다. 이 대공수사실록드라마에서 오제도 검사는 여간첩 김소산 사건, 해군 프락치 허만도 사건, 기생간첩 구자운, 점쟁이간첩 윤길도, 거물간첩 성시백 등을 도맡은 고뇌하는 반공검사로 큰 인기를 끌었다. 김수임은 광복 후 미군정기에 남조선노동당을 위해 일한 간첩으로 한국전쟁 발발 직전 총살형에 처해졌는데, 몇 년 전에는 조명화 감독에 의해 한미합작 영화로 만들어질 것이란 보도도 있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1948년, 주한 정보대장인 페이드 대령의 첩, 김수임( 윤소라 )이 특별수사본부에 체포되면서 시작된다. 매 시퀀스마다 회한을 머금은 표정으로 “그 이듬해 봄이었어요...”라는 식의 김수임 멘트로 시작하는 그 구조가, 마치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조안 크로포드의 회상으로 불쑥 시작하는 마이클 커티즈의 < 밀드레드 피어스 >(1945)를 연상시킨다. 아무튼 김수임은 남로당에 가입해 자신이 얻은 숱한 정보를 북한에 제공해오다가 오제도 검사( 이순재 )에게 체포된 것. ‘묻고 따지는’ 이순재에게 지난날을 회상하는 김수임의 과거는 도저히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다. 이화보통여자학교에 입학한 김수임은 이복 오빠인 최만용(북괴공작원의 아이콘이나 다름없는 ' 문오장 ') 때문에 17살의 어린 나이로 농부에게 시집갈 수밖에 없었고, 이듬해 시집을 뛰쳐나와 다시 이화여전에 입학한 그녀는 이강국( 신일룡 )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박헌영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이강국은 “좀 더 위대한 미래를 위해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해”라는 말을 남기고 월북하고 만다. 그런 사랑의 실패를 겪으며 페어드 대령과 결혼한 김수임은 아들 ‘밥’도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이강국을 미끼로 다시 수임에게 접근한 오빠 최만용의 획책이었던 것. 그렇게 수임은 남로당원으로서 첩보 활동은 물론 페어드에게 이런저런 인사 청탁까지 조종하는 위치에 이른다. 여기서 무엇보다 놀라게 되는 것은 후시녹음으로 완성된 외국인 배우들의 유창한 한국어다. 거의 아나운서 수준으로 얘기하는 페어드 대령은 물론 “엄마, 어디야? 빨리 와, 보고 싶어”라고 말하는 혼혈 아이 밥의 언어구사능력도 상당하다. ‘아들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는 수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오검사가 집으로 전화했다가, 밥이 대뜸 “마미?”라고 영어로 답하자 황급하게 전화를 넘기는 이순재 의 연기 또한 놀랍다. 윤소라 윤소라 는 당시 서구적인 마스크로 눈길을 끌었다. 아마도 그런 외모가 당시로써는 낯설어서인지 김지미 , 남정임 , 문희 , 윤정희 의 자리까지 올라서지는 못했지만 꽤 깊은 인상을 남겼다. < 속 팔도강산 >(1968)으로 데뷔한 이래 제목부터 무언가 그녀의 선명한 캐릭터를 드러내는 < 버림받은 여자 >(1970), < 특별수사본부: 배태옥 사건 >, < 야녀 >(1974), < 70인의 여죄수 >(1974) 등에 출연하며 남다른 카리스마를 발산했다. < 김수임의 일생 >에서도 인사 청탁을 위해 속옷이 비치는 가운만 걸친 채 페어드 대령의 털 난 가슴을 어루만지며 유혹하는 장면이 생생하다. 물론 이강국을 그리워하는 사랑과 아들 밥을 향한 모성의 굴레 속에서 방황하는 그 깊은 슬픔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모습이 더 기억에 남는다. 당시 함께 이국적 외모의 글래머 배우로 주목받았던 김혜정의 다소 과잉된 연기와 비교하면 더욱 도드라진다. 물론 그 이국적 외모로 인해 <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1965)의 미얀마 여자, < 여진족 >(1969)의 여진족이기도 했던 김혜정 또한 유현목 의 < 아내는 고백한다 >(1964), 이성구 의 < 지하실의 7인 >(1969)에서 대체할 수 없는 에로틱한 매력을 뿜어냈다. 흥미롭게도 <지하실의 7인>에서 윤소라는 말 수가 적은 수녀, 김혜정은 성적 매력을 마구 발산하는 북한 여군으로 출연해 만났다. 역시 외모 하면 빠질 수 없는 남자 신일용도 있다. 수임이 이강국과의 첫 만남을 회상하며 “누구나 한 번쯤 보면 반할 수밖에 없는 쾌남아였어요”라고 말할 정도인 신일용 과는, 윤소라의 은퇴작이기도 한 김수용 의 < 아라비아의 열풍 >(1976)에서도 연인으로 출연했다. 그런 두 사람이 마치 <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 >(2005)의 부부처럼 ‘그 사람이 매일 아침 어디로 출근하는지 모르고’ 살아온 그 세월이 허망하다. 김수임의 화장, 그리고 페어드 대령의 유창한 한국말 그래도 김수임과 이강국은 서로를 잊지 않고 살아왔다. 클라이맥스는 이강국을 시골에서 올라온 외삼촌이라 거짓말하고 페어드 대령에게 빼내 달라고 말하는 순간이다. 수임으로 인해 한국식 인사 청탁 문화가 몸에 밴 그는 부탁대로 강국을 집으로 데려오지만, 외삼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젊고 잘 생긴 그를 살짝 의심한다. 결국 페어드는 “부인, 난 이제 사무실로 나가 볼 테니 삼촌을 좀 대접해요”라고 출근하는 척 거짓말을 하고는 그들의 뜨거운 포옹을 몰래 훔쳐본다. 그렇게 수임은 사랑에 실패하고 감옥에 이르게 된다. 반공영화이기는 하지만 “사랑과 사상이 꼭 일치되어야 하나요. 전 좌익을 사랑한 게 아니에요, 그의 마음과 육체를 사랑했어요. 사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라는 항변은 가슴 절절하다. 그렇다. 당시 공공의 적은 북한이 아니라 일본이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전 죽일 년이에요”라는 마무리 멘트를 들은 오제도 검사는 “사랑의 에고이즘이군요”라는 명쾌한 결론을 내린다. 마치 제 자리에 앉아 모든 것을 척척 추리해내는 탐정 엘큘 포와로처럼 고뇌하는 모습으로 소파에 앉은 이순재 의 모습이 그 기나긴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 특별수사본부: 기생 김소산 >에서 마지막으로 담배를 피우는 윤정희 의 모습이 압권이었다면, < 김수임의 일생 >에서는 페어드 대령의 면회 전 손거울을 보며 눈화장을 고치는 윤소라 의 연기가 심금을 울린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페어드 대령의 마지막 한 마디가 귓전을 울린다. “딸링...” 그 딸링에 덧붙여 확실히 이것 또한 말할 수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하루종일 “마미~~~”라는 말이 입에서 내내 맴돌 것이다. 김수임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검사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내 얼굴을 곱게 화장하겠어요. 추하게 있는 것은 자신을 사랑할 줄 몰라서죠. 늙은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화장을 하지 않고 남자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여자에요.” 이순재 정말 마지막으로 이순재 에 대한 얘기로 마무리하고 싶다. < 그대를 사랑합니다 >(2011) 당시 인터뷰했던 그는 가장 존경하는 선배 배우로 최무룡 을 꼽았다. “후시녹음 시절에도 그처럼 자기 대사의 템포를 살려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후시녹음이라 그런 주연급 배우들 중에 대사를 안 외워오고 그냥 입만 벌리거나 조감독이 옆에서 읽어주는 대사를 그대로 따라 읽는 경우가 허다했지. 뭐 나중에 성우가 다 하니까. 그런데 최무룡 선배는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늘 내실을 다지는 사람이었지. 메소드 연기의 대가였고 늘 끊임없이 새롭게 변신하는 배우였어. 물론 다른 좋은 선배 배우들이 많았지만 자기만의 확고한 원칙과 ‘폼’이 잡혀 있는 최고의 배우였지. 그래서 한번은 최민수 를 만나 진지하게 얘기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 내가 민수 백일잔치도 가고 어렸을 때부터 쭉 봐왔거든. 이제 작품으로 만날 일은 없고, 전에 무슨 행사장에서 만난 적 있는데 머리에 두건 쓰고 수염 기르고 요란한 청바지 입고 왔기에 ‘야, 너 허리에 도끼만 차면 딱이겠다’고 한 적 있어. (일동 대폭소) 연기자로 치면 ‘성골’ 출신 배우고 또 한때 얼마나 잘했어? 멈추지 말고 좀 더 하면 정말 최고의 배우가 될 수 있을 텐데. 마스크도 얼마나 좋아. 참 아쉬워, 한번 만나서 얘기해야지.” 그렇게 그는 한국영화사 최고의 배우로 최무룡을 꼽았다. 그러면서 앞선 시리즈에서 오제도 검사를 연기한 최무룡에 이어 자신이 그 역할을 이어받은 <특별수사본부> 시리즈에 대한 애착이 컸다. 그로서는 얼마나 감격적인 캐스팅이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윤소라 신일룡 이순재 문오장 감독: 이원세 각본: 오재호 개봉극장: 대한 관람인원: 11,249명
< 크로노스 >의 비평적, 상업적 성공으로 잔뜩 고무된 길예르모 델 토로는 1994년 미국 마이애미 필름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되는데, 그 영화를 인상 깊게 본 어느 스페인 감독이 언젠가 같이 작품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온다. 그는 이제 막 국제적 거장으로 떠오르고 있던 페드로 알모도바르.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인 델 토로는 훗날을 기약하며 헤어지는데, 이내 <미믹> 으로 꿈의 무대 할리우드 입성에 성공하지만 촬영 내내 받았던 메이저 스튜디오의 압박과 간섭을 견디지 못하고 고국 멕시코로 돌아오고 만다. 차기작을 준비하며 알모도바르와의 약속을 떠올린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스페인 만화 ‘파라쿠에요스’에 영감을 받아 오랜 기간 준비해온 시나리오 한편을 완성시키는데, 이렇게 탄생한 결과물이 바로 델 토로 자신이 만든 영화 중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다는 그 작품, < 악마의 등뼈 >. 스페인 내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936년, 부모의 죽음으로 후견인에 의해 고아원에 맡겨진 카를로스가 이곳에 출몰하는 유령 산티와 마주치며 그 속에 숨겨진 어둡고 추악한 사건의 진실과 마주친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약속대로 제작을 맡아 전폭적인 지원 아래 스페인에서 촬영된다. 잔잔하고 슬픈 호러면서도 공포의 외피를 뒤집어쓴 일종의 소년 성장 드라마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이후 델 토로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역시 스페인 내전이 담긴 후속작 아닌 후속작 <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를 만들어 대구를 이루며 기묘한 균형을 맞췄다. <악마의 등뼈>가 파시즘에 맞선 세력에 대한 강렬하고 적극적인 직유라면, <판의 미로>는 이미 파시즘 치하에 갇힌 이들의 도피와 해방의 염원을 환상적이고도 잔혹한 동화 풍의 은유로 풀어내, 서로 같은 시대상의 아픔과 굴곡을 소년과 소녀의 캐릭터에 대칭 시켜 변주하고 있다. 그런 세계관을 두 작품에 걸쳐 공유하고 완성하는데 무엇보다 큰 힘을 발휘한 건 길예르모 네바로의 눈부신 촬영과 필라르 레부에타의 아름답고 숨 막히는 미술이었지만, 하비에르 나바레테의 서정적이고도 슬픈 음악 또한 잊어선 섭섭하다. 그전까지 국내는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전혀 무명에 가까웠던 하비에르 나바레테는 1956년 스페인 태생에 거의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한 인물로, 처음에는 칼하인츠 슈톡하우젠이나 가브리엘 브른칙 스타일의 전자음악에 빠져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현대음악에 몰두했으나, 점차 현실과의 격차와 학구적인 분위기에 지쳐 콘서트 작업과 연극무대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가 영화음악을 담당하게 된 건 1987년 아구스티 빌라롱가 감독과 만나면서부터였는데, 이후 호러와 판타지, 스릴러와 SF 등의 자신이 좋아하는 서브컬쳐에 주력하며 착실히 내공을 다져나간다. 그에게서 변화가 감지된 건 데뷔작을 함께 했던 빌라롱가 감독의 2000년 작 <엘 마르>. 전쟁과 고아원, 아이들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종교를 오가는 이 심리 드라마에서 나바레테는 그간 자신의 본령과도 같았던 일렉트릭 사운드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와 작업하며 섬세하고 풍부한 화성과 아름답고 애수 어린 선율, 스케일과 다양성을 갖추며 자신의 색깔을 명확하게 찾아가기 시작한다. 델 토로는 원래 내정돼있던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음악적 동지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가 스케줄 문제로 하차하자 <악마의 등뼈>와 몇몇 유사한 분위기를 가졌던 <엘 마르>의 음악을 담당한 나바레테를 주저 없이 대타로 뽑아든다. 그리고 그 전략은 아주 주효했다. 사실 <악마의 등뼈>는 이후 델 토로와 작업해 아카데미 음악상에 노미네이트됐던 <판의 미로>나 또 다른 판타지 < 잉크하트 >, 블록버스터 < 타이탄의 분노 > 등과 달리 뚜렷한 주제부를 갖추고 있지도, 또 스케일의 위용을 드러내거나 드라마틱한 서사를 구사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다른 장르의 영화음악과 달리 호러영화 특유의 기능적이고 과시적인 사운드에 집착하지도, 실험적이고 아방가르드한 도전 정신과 예술적 자의식에 취하지도 않는다. 마치 엘레니 카라인드루의 음악처럼 무색무취 투명한 애수를 띈 서정성이 유령처럼 부유하다 사라진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생겨나는 감정이듯 멜로디의 부재가 갖는 나바레테의 서정은 실체 없는 파시즘의 악재처럼 영화 내내 긴장을 선사하고, 죽음을 드리우며, 슬픔을 지배한다. 그 중심을 차지하는 건 묵직한 저음의 현악편성이다. 때론 미니멀하면서도 무조성에 가까운 불협화음과 짧은 오스티나토로 심리적인 압박과 긴장을 담아내는 선율은 고아원 내부에 얽힌 인물들 간의 관계와 비밀을 암시하며 모호하고도 (어찌 보면) 비극적인 엔딩을 향해 달려간다. 간헐적으로 오보에와 바순 같은 중저음의 목관악기가 쓰이며 위협 앞에 놓인 소년들의 가녀린 처지를 대변하는데, 꺼질 듯 말 듯 서늘하고 침울한 음색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들린다. 피아노와 하프의 차가운 울림은 지하 웅덩이 속에 갇힌 유령 산티의 존재감처럼 희미하게 현악편성에 녹아들지만, 때때로 불쑥 수면 위로 나타나며 명징한 잔상을 남겨 여운에 잠기게 만든다. 영화 후반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며 뒤늦게 약동하는 퍼커션과 함께 터져 나오는 풀 관현악의 위용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시무시한 폭탄만큼이나 강력하고 충격적인 사운드 효과로 하비에르 나타레테의 진가를 들려준다. 그 외 영화상에서 쓰인 1930년대 스페인권 노래들이 같이 담겨있는데,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탱고 영웅 카를로스 가르델의 노래 2곡과 스페인의 대중적인 악극인 토나디야 가수 라퀠 멜러, 그리고 카멜리아 앰버트와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스페인에서 더 잘 알려진 임페리어 아르헨티나가 마눌로 러셀과 부른 듀엣곡 등 5곡이 그것이다. <악마의 등뼈>는 하비에르 나바레테의 중간 기착지 같은 사운드트랙이다. 이 속에는 그가 오랜 기간 스페인에서 작업했던 초기 일렉트릭 사운드의 모습과 현재 할리우드와 다른 유로권 국가들에서 작업한 큰 프로젝트성 풀 오케스트라의 단초들이 모두 숨겨져 있다. 나바레테는 이 변곡점을 통해 달라졌고, 또 놀라워졌다. 작고 개인적인 영화였지만 길예르모 델토로가 이를 통해 현재 위치에 올랐듯, 국제적으로 무명이었던 스페인의 한 영화음악가 또한 이 작품을 통해 재발견되었다. 그게 바로 이 사운드트랙을 놓쳐선 안 되는 이유다. Track List 1. Que es un fantasma? 2. Un evento terrible 3. Condenado a repetirse 4. Una y otra vez 5. Un instante de dolor 6. Quiza 7. Algo muerto 8. Por momentos vivo aon 9. Un sentimiento 10. Suspendido en el tiempo 11. Una fotografta borrosa 12. Un insecto atrapado en ambar 13. Un fantasma 14. Eso soy yo 15. Besos frtos / Performed by Raquel Meller 16. Una lagrima / Performed by Carlos Gardel 17. Recordar / Performed by Imperio Argentina & Manolo Russell 18. Presumidos / Performed by Carmelita Ambert 19. Yo no se que me han hecho tus ojos / Performed by Carlos Gard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