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속옷의 딸친구
- 감독
- 키타로우 하루마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마츠 스미레
봉준호 감독의 영화 < 마더 >(2009)에서 엄마 혜자에게는 남들보다 조금 부족해서 앞가림 못하는 아들 도준이 있다. 아들을 지켜보느라 손가락이 잘려도 아픈 줄 모를 만큼, 도준은 소중한 존재다. 그런 아들이 살인죄로 잡혀가자, 누명을 썼다고 철썩같이 믿고 결백을 밝히려고 혼자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결백을 밝힐만한 걸 잘 기억해보라는 혜자에게 아들은 묻는다. “엄마, 그때 왜 나 죽이려고 했어?” 혜자는 잠깐 “얼마나 힘들었으면 같이 죽으려고 했겠어”라고 말하지만 금세 아들 걱정으로 생각이 넘어가고, 그 일이 응어리가 되었을 거라고 면회실 유리벽 너머에 있는 아들에게 응어리가 풀리는 혈자리에 침을 놓아 주고 싶어한다. 혜자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들은 신경도 쓰지 않지만. 남들은 미친 사람 취급하고 욕해도 내 자식은 무죄라고 외치는 엄마, 문제가 된 아들을 어쩌지 못해 자신의 응어리에 침을 놓고 잊어내려고 춤추는 엄마. 종일 아들만 쳐다보는 혜자의 얼굴에서, 김혜자 배우가 연기한 엄마의 다른 자식이 했던 대사가 떠오른다. “하루 종일 뭐, 엄마 얼굴만 쳐다보고 있으란 말야?” 윤인호 감독의 영화 < 마요네즈 >(1999)에서 딸 아정이 엄마에게 했던 말이다. 엄마는 딸에게 전화해 불안하고 힘들다고 불평하고 관심 받고 싶어한다. 늦게 들어와서 내가 힘드니 딸에게 일 그만두라 말하며 응석 부리던 철없는 엄마의 모습을 기억하는 관객에게, 남의 아들에게까지 이입해서 “너 엄마 없니?”라고 말하며 안타까워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영화 속에서 딸의 엄마는, 아들의 엄마와 다른 존재 같다. 꼽을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영화에 아들의 엄마가 나오는데 엄마가 아들에게 공감을 호소하는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 열한번째 엄마 >( 김진성 , 2007)처럼 자신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자식으로 보듬는 여자가 있을 뿐이다. < 우리형 >( 안권태 , 2004)과 같은 영화에서처럼 아들이 엄마를 이해하는 순간은 있어도, 깊은 이해와 고통을 나누는 사이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딸의 엄마는 다르다. <마요네즈>처럼 엄마는 딸에게 자신을 이해하길 강요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그렸던 영화 < 애자 >( 정기훈 , 2009)처럼 보살핌을 받는 것은 아들이여도 엄마와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사람은 딸이라고 말하는 영화도 있다. 일단 엄마와 딸이 등장하면, 둘 사이를 특별한 관계로 묶는 것은 너무 당연한 듯이 보인다. 스릴러 영화 < 오로라공주 >( 방은진 , 2005)에서 순정이 죽은 딸을 떠올리는 회상 속에서, 순정은 어린 딸에게 노래를 부르게 한다. “아빠 이제는 알아요. 인생은 외로운 거라고.” 어린 딸은 오로라공주를 좋아하고 그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엄마가 시키는 노래를 부른다. 가사는 아빠를 이해한다는 내용이지만, 엄마가 딸에게 원하는 것은 자신을 이해해주는 것이다. 순정의 표현대로 부르고 싶지 않은 노래를 부르는 이 행동은 벌이다. < 비밀은 없다 >( 이경미 , 2015)에서도 노래로 엄마와 딸의 감정을 엮는다. 딸 민진과 친구가 부르는 노래는 아빠가 바람 핀 상대에 대한 분노고, 엄마를 지키기 위해 복수할 계획을 담고 있는 가사다. 오로라공주의 딸이 중학생이라서 자발적인 공감을 형성하기 어려웠다면, <비밀의 없다>에서의 딸은 중학생인 만큼 스스로 엄마에게 공감한다. < 미성년 >( 김윤석 , 2018)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 중학교 2학년인 주리와 윤아는 미성년자이지만 정신은 영화 안의 어른에 비교해 매우 성숙해있다. 그리고 그 성숙한 정신은 엄마에 대한 이해나, 엄마의 부족한 역할을 대신해주는 것으로 표현된다. 주리는 바람 핀 아빠 때문에 엄마가 상처받을까봐 고민하고, 윤아는 바람 핀 상대의 아이를 꼭 낳겠다는 엄마를 세상의 비난 속에서 지키기 위해 고민한다. 주리의 엄마 영주는 아이들에게 너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윤아는 처음부터 엄마가 겪을 고통을 이해하고 걱정하고 있었고, 윤아의 엄마 미희는 엄마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엄마가 아니라 여자로 이해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한다. 엄마와 딸이 이런 식으로 묘사되는 것에 관해서, 엄마와 딸의 신체적 유사성이나 같은 여성으로 사는 것에 동질감을 느낀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이상의 혐의를 찾을 수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미성년에서 미희가 윤아에게 “엄마는 아들이 생겨서 든든해”라고 말하는 부분 같은 지점이다. 윤아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엄마의 보호자 역할까지 하는 와중에, 엄마는 왜 아직 뱃속에 있는 아들에 대해 든든함을 느끼는 것일까. <마더>에서 혜자는 도준의 혐의를 밝히기 위해 변호사를 만나고, 형사를 만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 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구실을 할 수 있느냐고 조롱당하는 도준이지만, 반쯤은 남성무리 안에 들어가 있는데 혜자는 이들에게 “도준이와 형제같은” 사람들이라며 도움을 호소한다. 그리고 딱 그 절반만큼 형사는 혜자에게 친절하고, 진태는 돈을 받았지만 혜자를 위해 일을 해 준다. 그 덕분에 혜자는 남자 무리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비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권력이든 무력이든, 힘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남자무리이고, 혜자가 이 안에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은 아들의 존재다. <비밀은 없다>에서 연홍은 남편을 비롯해, 형사와 같은 권력을 가진 남성집단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단이 없다. 결국 그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받는 존재는 권력과 무력을 가지지 못한 딸의 친구이다. 힘이 있는 집단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딸보다 아들의 존재가 필요해 보이는데, 이런 증거는 < 박쥐 >( 박찬욱 , 2009)에서도 찾을 수 있다. 매주 수요일, 라여사의 집에서는 마작판이 열린다. 공간은 라여사의 것이지만, 마작판의 구성원은 아들 강우의 지인들이다. 그들은 각자 의사, 형사와 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상 밖에서는 의사의 아내인 이블린과 강우의 아내 태주 쭈그리고 앉아 김밥을 마는 노동을 하고 있다. 이들 사이에는 명백히 눈에 보이는 계급이 존재한다. 박찬욱 감독의 전작 < 공동경비구역 JSA >(2000)에서 남북한 군인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게임을 하고 음식을 먹는 행위를 통해 계급과 소속에 상관없이 수평적인 관계에서 교류하는 장면을 보여준 바 있다. 이런 예시까지 들지 않아도, 남자는 밥상에서 밥을 먹고 여자들은 부엌 바닥에서 음식을 장만하던 풍경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강우가 죽으면서 이 권력관계는 모호해지고, 부인들은 모두 테이블 위로 올라온다. 혜자처럼 죽은 아들을 통해 입성한 권력 있는 남성들에게 도움을 처하면서도, 아들자식이 없는 여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전복하고 테이블 위로 올라오는 것을 제지할 능력은 없다. 이런 의심 속에서, 영화 < 박화영 >( 이환 , 2017)에서 화영은 이런 영화들이 말하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거스르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화영은 마치 아들의 엄마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화영은 엄마를 자처하며 엄마는 맹목적으로 자신의 편이 되어주고, 자식이 때리면 때리기 좋은 곳을 내미는 희생정신이 있는 사람이다. 화영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룹 안에서 화영은 여자로 여겨지지 않는데, 화영 또한 당연히 엄마를 이해하는 다른 많은 딸들처럼 엄마를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 엄마를 찾아가 욕설하고, 인터폰 너머에 있는 엄마에게 침을 뱉는다. 영화 후반부, 자신이 지켜준 가짜 딸이 자신을 희생물로 삼고 도망간 뒤에 또 새로운 딸을 데리고 와, 그들이 제대로 듣지도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얘기를 끊임없이 떠든다. 그 속에서 “너네는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라는 대사는 오히려 반대로 나는 들어줄 딸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맹목적으로 희생하는 엄마가 필요하지만, 한편으로 엄마는 자신을 맹목적으로 토로할 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박화영은 아름답지 않지만, 딸과 엄마의 관계에 대해 솔직하게 말한다. 그런 특별한 관계가 아닐 수도 있다고. 아들이 권력자에게 가까이 붙어있을 수 있는 도구로 존재할 수 있다는 짐작이, 엄마의 희생적인 애정이 정말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의심스럽게 느끼게 한다. 엄마와 딸은 정말 특별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고, 그 관계를 아름답고 특별한 것이라고 말하는 영화들의 흐름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를 되묻게 한다. 그리고 이 영화들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한국의 딸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진다. 정말 이 영화들에서처럼 엄마를 이해하고 싶은지, 정말 딸이라서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지, 무엇보다 엄마의 사랑이 아들과 딸에게 동등하다고 느끼는지. 혹은 박화영처럼 딸은 가질 수 없는 아들의 엄마를 갈망하고 있는지를.
최용석 감독의 첫 장편영화인 < 제외될 수 없는 >은 한글 제목보다는 영어 제목(After)이 이 영화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한 소녀의 자살 이후에 소녀와 가까운 관계였던 세 인물들이 어떻게 남겨진 고통을 감내하는가가 이 영화의 전부다. 딸의 자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1년 6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오고, 소녀와 가장 가깝던 친구는 소녀의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시간을 보낸다. 소녀의 담임선생은 아직도 교실에서 소녀의 흔적을 느끼는 것처럼 학교를 좀처럼 떠나지 못한다. 인물들은 모두 소녀의 죽음을 경험했지만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 지독한 상황은 인물들에게 부재하는 소녀의 공간과 마치 정지된 듯 좀처럼 진전되지 않는 시간을 배회하도록 만든다. 아버지는 언어를 통해 딸의 죽음의 원인을 찾아내거나 추적하는데 익숙하지 못하다. 어눌하게 들리는 그의 말은 어미가 뭉개지거나 흐려지곤 한다. 마치 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고 딸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함에서 비롯된 죄책감이 아버지의 현재를 구성한다. 아버지는 교실을 돌아보거나 딸의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어두운 방에 주저앉아 사탕을 깨물어 먹고 찬 방바닥에 누워 잠이 든다. 소녀의 친구인 또 다른 소녀는 비어 있는 소녀의 집에 살그머니 들어오고 집이나 학교 주변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듯 물끄러미 무언가를 쳐다본다. 교사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엄마처럼 보호했었던 소녀의 죽음을 떨쳐내지 못해 괴로워한다. 세 인물의 행동으로 채워진 이 영화는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을 찾아낼 수 없는 서사구조 안에서 반복되는 행위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집과 학교라는 공간에서 부재를 견디고 관통하는 과정만이 나열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최용석 의 태도가 드러나는 첫 신에서 분명하게 제시된다. 소녀가 앉아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린다. 이어지는 쇼트는 아버지가 어딘가를 바라본다. 세 번째 쇼트는 교실의 창가에 서 있는 교사의 모습이다. 세 인물은 삼각형의 구도를 그리면서 시선으로 연결된다. 이들이 바라보는 방향은 서로를 향해 있고 죽은 소녀를 에워싸는 것처럼 느껴진다. 단조롭다고 느껴질 즈음, 이 영화가 기묘하게 미끄러지는 지점은 비어 있는 학교의 복도와 교실을 이동할 때 동반되는 핸드헬드의 급작스러운 움직임이나 교실의 횡축 트래킹이 소녀의 시선처럼 보일 때다. 또한 소녀의 친구와 소녀가 마치 동일인처럼 느껴지도록 구성해나가는 쇼트의 연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아버지가 딸의 친구인 소녀의 뒤를 쫓다가 놓치는 장면에서 소녀는 마치 유령처럼 아버지의 뒤로 휙 지나간다. 또한 아버지의 꿈에 소녀가 등장해서 뒤돌아보는 쇼트를 통해 이 지난한 애도의 과정이 끝에 도달했음을 느끼도록 만든다. 부재하지만 세 인물의 시간을 관통하고 어디에서나 등장하는 소녀의 존재는 아버지와 교사, 소녀의 친구를 마치 유사가족의 시선 아래 놓아둔 것처럼 보인다. 최용석은 이 영화를 통해 부재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부재를 감싸 안는 시선의 구도 안에 놓아둔다. 죽음이라는 받아들이기 힘든 상태를 과장하거나 승화시키는 방법 대신 정직하게 죽음 이후의 상황을 견디고, 하릴없이 반복되는 행동으로밖에 견딜 수 없는 애도를 차근차근 따라가면서 지켜본다. 자살, 부재, 죄의식,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이야기의 구조 안으로 포함시키면서 감정들을 만들어내는 데 관심이 없는 감독의 단호한 태도에서 카타르시스의 경험은 죽음에서 불필요한 요소임을 드러내고, 사건으로서의 죽음을 통해 만들어지는 스펙터클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강직하고 딱딱할 수밖에 없는 영화적 결단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