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순이(부제:행복의 탄생)
- 감독
- 박상호
- 제작년도
- 1963
- 출연
- 도금봉, 이대엽, 최남현, 정애란, 장민호, 양훈, 이빈화, 남춘역, 주선태, 김정옥, 강미애, 김칠성, 나애심, 송미남, 양일민, 김희갑, 구봉서, 박상익
해방 후 스무 번째 배출된 배우 최남현(崔湳鉉)은 해방 후 스무 번째 영화계에 진출한 배우이다. 주증녀(<돌아온 어머니>(이규환)), 황정순(<여성일기>(홍성기)), 주선태(<청춘행로>(장황연)), 황해(<성벽을 뚫고>(한형모))와는 1949년 데뷔 동기인 셈이다. 그가 첫 선 보인 <돌아온 어머니>는 남편이 원양어선을 타고 나간 사이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던 아내(김연실 분)가 아편중독으로 죽고, 원양어선에서 돌아온 남편은 고아가 된 아들을 어렵게 찾게 된다는 얘기다.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아내 역을 맡은 김연실(1911~1997)이 월북하고 최남현은 연극으로 활로를 찾아야 했다. 그가 영화 활동을 재개한 것은 김기영(金綺泳)의 감독 데뷔작 <죽엄의 상자>(1955)부터였다. 이후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미망인>(1955)을 비롯, <젊은 그들>(신상옥, 1955), <단종애사>(전창근, 1956), <유전의 애수>(유현목, 1956), <아리랑>(김소동), <잃어버린 청춘>(유현목), <봉이 김선달>(이상 1957, 한홍렬), <돈>(김소동), <자유결혼>(이병일), <인생차압>(이상 1958, 유현목), <오 내고향>(김소동), <젊은 아내>(이강천),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이상 1959, 전창근), <흙>(권영순, 1960), <어부들>(강대진, 1961), <인목대비>(안현철, 1962), <또순이>(박상호, 1963), <혈맥>(김수용, 1963), <추풍령>(전범성, 1965), <하숙생>(정진우, 1966), <싸리골의 신화>(이만희, 1967), <망각>(이만희, 1967), <내시>(신상옥, 1968) 등에 주연과 조연으로 기용된다. [사진] 영화 <돈>에서의 최남현, 왼쪽은 배우 김승호 최남현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유현목 감독의 <유전의 애수>(최무룡 주연)부터였다. 영화평론가 이진섭은 그의 역할에 대해 “전 화면을 통해 압권이며 무대경험에서 쌓은 액팅이 오버함이 없이 적으나 자연스러운 연기” ( 「능한 연출, 능한 연기 / ‘유전의 애수’를 보고」, 『한국일보』, 1956.07.26) 였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런 호평에 힘입어 1년도 안 돼 타이틀 롤을 맡은 <봉이 김선달>로 ‘최남현이라는 배우의 하나의 지위를 주장’ (「비교적 정돈된 야담영화 / 최남현의 ‘봉이 김선달’」, 『한국일보』, 1957.10.25) 할 수 있는 단계로 올라서게 된다. 이후 탈세와 횡령을 일삼다 법망에서 벗어나려 거짓 자살극까지 꾸민 아우(김승호)에게 "생눈 파먹은 날도적"이라고 욕설을 퍼붓는 형 이중건(<인생차압>), 일제의 식민주의 교육정책에 맞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스승(<이름 없는 별들>), 드센 아내의 성화 속에 품팔이로 어렵게 살아가는 남산기슭 해방촌의 ‘3.8따라지’ 깡통영감(<혈맥>), 국군 낙오병을 숨겨줘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 결단을 내려야하는 산골마을의 강노인(<싸리골의 신화>) 등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진] <혈맥>에서의 최남현과 김승호(왼쪽) 이를테면 <봉이 김선달>, <인생차압> 등에서 보인 해학적인 요소, 처녀를 유린하고, 남의 애인을 가로챈 <유전의 애수>의 건달(인수 역), 피폐한 농촌에서 고리대금으로 농민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돈>의 억조, 딸(윤정희)을 왕의 후궁으로 만들기 위해 사람을 시켜 딸이 사랑하는 하급 관리의 아들(신성일)을 성불구자로 만드는 <내시>의 김찬판 등 악역과 <이름 없는 별들>의 역사 교사 송선생,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킨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싸리골의 신화>의 주인공 강노인이 보인 카리스마적 면모가 여기에 해당된다. [사진]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의 최남현. (사진제공 : 김종원) 그러나 최남현은 배우로서 절정기에 이른 1968년 어느 날 갑자기 고혈압으로 쓰러져 카메라 앞에 다시 나서지 못하게 된다. 10여 년에 걸친 투병생활 끝에 1977년 유현목 감독의 <문>을 계기로 재기, <한네의 승천>(하길종, 1977), <고가(古家)>(조문진, 1977), <족보>(1978, 임권택), <심봤다>(정진우, 1979), <짝코>(임권택, 1980), <물보라>(김수용, 1980) 등에 출연했으나 예전과 같은 활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개화의 물결 속에 전통을 고수하려는 <고가>의 주인공 김노인, 아집에 사로잡힌 <물보라>의 지초시, 뜬 구름 같이 살아온 <심봤다>의 조연, 인생을 달관한 <짝코>의 배역에서 열연하였다. [사진] <물보라>에서의 최남현. 아래는 하용수 광물성의 카리스마와 최다 출연 기록 노경에 접어들면서 기세가 많이 꺾이긴 했으나 누가 뭐라 하든 최남현은 개성이 강한 성격파 배우였다. 그의 연기에서는 쇳소리가 난다. 갱도의 밑바닥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광물성의 낮은 울림- 최남현 연기의 장점은 누구에게서 빌려온 것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내려 한 데에 있다. (김종원, 「인물영화사 / 중후한 조연 최남현」, 『일간스포츠』, 1987.07.08) 하지만 그에게는 1미터 75센티의 훤칠한 키와 상대를 꿰뚫어 보는듯한 눈매, 중후한 외모가 풍기는 무게감이 있는 반면 유연성이 떨어지는 아쉬움이 있다. 그 대신 뛰어난 연기감각과 형상력,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있다. 이런 결과는 결국 제1회 부일영화상 조연남우상(1958, <인생차압>), 제4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영화부문 대상(1967, <싸리골의 신화>), 대종상 남우조연상(1966, <추풍령>) 등의 수상으로 나타났다. [사진] <싸리골의 신화>에서의 최남현. 왼쪽 박기태 최남현은 1918년 1월 7일 김소월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서 최찬수와 박이윤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나온 후, 법관이나 은행가를 지망하는 급우들과는 달리 무대를 동경했다. 해방 이듬해에 월남하여 극예술협회(신협의 전신)에 들어갔으나 한동안 잔심부름을 하며 따분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런 그에게 출연의 기회가 온 것은 1944년 스물여섯 살 때였다. <은하수>라는 연극이었다. <범선 천우호(帆船 天佑號)>(1949)의 무대에 오를 무렵 영화 <돌아온 어머니>에 발탁됐으나 6.25전쟁으로 후속작이 이어지지 못했다. 그 대신 <명우 추해당(秋海棠)>(상록극회, 1951), <통곡>(극협, 1952) 등 연극 활동을 하며 어려운 전란기를 보냈다. 영화 촬영이 계속된 뒤에도 <한강은 흐른다>(신협, 1958) 등에 출연하여 연극과의 인연을 끊지 않았다. 공연이 없는 날엔 주선태, 박암 등 극협 단원들과 술로 회포를 풀었다. [사진]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에서의 최남현 최남현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나 외아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80년대 이후에는 술과 마작, 화투놀이로 소일하다시피 했고, 장기간의 투병으로 고급주택 등 모든 재산을 날렸다. 말년에는 양로원 생활을 하며 병상에 있는 아내까지 뒷바라지하다가 1990년 1월 7일 일흔 한 살의 생애를 마쳤다. 그의 마지막 출연작은 대한항공 858기의 폭파 사건을 다룬 신상옥 감독의 <마유미>(1990, 단역)였다. 30대 초반부터 노역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스크린을 누볐던 최남현은 40여 년 동안 720여 편에 출연하는 최다 기록을 세웠다. *
1976년 쇼브라더스의 합작영화 <여신탐>(최훈·파오시에리, 1976)의 주연으로 데뷔한 신인 배우가 있다. 바로 태권도와 무협 액션이 가능했던 연기자 김정란이다. (그림1) <여신탐>(최훈·파오시에리, 1976) 국내 포스터 그녀는 다양한 액션과 대규모 폭파장면이 등장하는 블록버스터 영화 <여신탐>에 결코 운으로 캐스팅되지 않았다. 연기력과 액션 실력에 더해 해외 거주 경험과 여권까지, 이 영화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배우였다. 그녀가 22세에 <여신탐>의 주연으로 캐스팅되기까지 과정을 살펴보자.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 원로 방송작가 김희창 선생으로 <로맨스 빠빠>(신상옥, 1960), <열두냥짜리 인생>(이만희, 1963), <또순이>(박상호, 1963) 등의 영화 각본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어린시절부터 연출자와 배우들을 접해왔고 이런 점은 그녀가 영화나 방송계에 편입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부친인 김희창 작가는 워낙 엄격하고 작품당 휴지기를 길게 두는 편이라 실질적인 생활은 어머니가 이끌었다. (그림2) 부친 김희창 작가와 연출가 허규 1960년대 중반 한국해외개발공사가 동남아 등 해외 각국으로 기술 이민을 권장하던 때, 그녀의 어머니는 부르나이 여학교에 교사로 파견된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 청소년기를 부르나이에서 보냈고 19세에 귀국한 뒤에는 외국으로 미술 유학을 결심하고 준비한다. 그런데 마침 다니던 화실 아래층에 연출가 허규의 극단 새문화스튜디오 연습실이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에 극단에 발을 디뎠고 문하생이 되었으며 수련과정을 거쳐 연극에 출연하게 된다. 1973년 새문화스튜디오와 극단 민예 소속 배우로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에 도시코 역으로, <고려인 떡쇠>에는 찌몽 역으로 출연하며 연기를 시작한다. <고려인 떡쇠>는 아버지인 김희창 작가의 작품이다. (그림3) 1973년 새문화스튜디오의 연극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의 한 장면 1974년에는 스승인 연출가 허규의 제안으로 KBS 오디션 프로그램 <신인탄생>에 출연해 입상하며 KBS 탤런트로 데뷔하게 된다. 그러나 엄격한 부친인 김희창 작가는 그녀의 활동을 반대했고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으며 방송국 내에서도 거리를 두었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인 시절을 보내던 중 그녀는 태권도 도장을 다니게 된다. 태권도 도장에서 요가를 알려주는데 요가를 하면 살이 빠진다는 당시의 속설 때문이었다. 하다 보니 송판 두어 장과 기와 일곱 장 정도는 깰 실력이 되었고 국기원에서 초단 단증도 받게 된다. 꽃꽂이와 뜨개질이 아닌 태권도가 특기라 하니 기자들은 당장 과장을 섞어 그녀를 태권도 3, 4단의 실력자로 소개했다. 1974~5년은 태권도 액션 영화가 등장해 흥행했고 발차기가 아름다운 챠리 셀(한용철) 같은 신인 남자배우가 인기를 얻던 시절이다. 태권도가 특기인 그녀에게도 곧 기회가 찾아온다. 그녀는 1976년 태권도 도장 관장님의 다급한 부탁으로 해외에 태권도를 소개하기 위해 제작한 문화영화에 출연한다. 원래 예정되었던 여자선수가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대신 나갔던 것인데 ‘KBS 탤런트 김정란, 태권도 문화영화 <동과정>에 출연’이라는 소식이 작게 신문에도 실리게 된다. 얼마 후 영화사인 우성사로부터 연락이 왔고 긴급하게 우성사 사무실에서 오디션을 보게 된다. 홍콩 쇼브라더스로 가 영화를 찍을, 액션이 되는 여배우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우성사 사무실에는 김용덕 대표와 홍콩영화계에서 활동하고 있던 배우이자 <여신탐>에 함께 출연한 남석훈이 그녀 앞에 있었다. (그림4)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의 남석훈과 김정란. 뒤편으로 불타는 홍콩 쇼브라더스의 오픈세트가 보인다. 우성사에서는 오디션이랄 것도 없이 함께 인삼차를 마시며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였다. 그녀가 외국 유학을 준비 중이라 이미 여권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김용덕과 남석훈은 더욱더 그녀를 반겼다. 당시는 여권을 발급받으려면 외국에 거주 중인 신원보증인의 초청장과 재무보증 등이 필요해 여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너 외국 갈 수 있니?” “네”. “당장 갈 수 있니?” “네” “그러면 준비해라” 너무 쉽게 끝난 것 같지만 사실 그녀는 우성사가 찾던 배우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오디션 프로 <신인탄생>에서 검증한 연기력과 태권도 실력은 물론 여권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홀로 홍콩 쇼브라더스로 출발한다. 홍콩 쇼브라더스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 오픈세트에는 강과 산, 탑, 폭파시킬 별장과 여러 건물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촬영은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사용해 이뤄졌다. 가히 동양의 할리우드였다. 그리고 그녀는 쇼브라더스 영화의 주연배우 대우를 톡톡히 받았다. 숙소와 자동차, 의상과 분장 그녀에게 제공된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녀가 아침에 일어나면 자동차가 대기하고 있다가 그녀를 스튜디오 분장실로 데려갔다. 그녀가 분장과 의상을 마치면 때로 옆 방으로 안내되었고 그곳에서 기자들과 간단하게 촬영과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다시 차에 오르면 그녀를 촬영장으로 데려갔다. 촬영장에서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있어 그녀는 감독의 지시대로 연기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연기가 끝나고 그녀가 카메라 뒤로 빠져나오면 현장의 전담 매니저가 김정란 이름이 새겨진 의자를 펴주며 따뜻한 차를 건네주었다. 식사시간과 휴식시간이 보장되었고 촬영은 늘 일정대로 진행되었다. (그림5)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의 한 장면. 한국 형사 고은미(김정란)가 벨트에서 화살을 꺼낸 뒤 석궁을 쏘는 장면이다. (그림6)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의 한 장면. 한국 형사 고은미(김정란)가 오토바이 액션을 보여주고 있다. <여신탐>은 일본과 홍콩, 한국의 여형사로 구성된 특별수사반이 스코틀랜드 출신 형사반장과 함께 보석밀매와 납치를 일삼는 범죄조직을 소탕한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여형사들에게는 각자의 장기가 있는데 김정란이 연기한 한국형사 고은미는 석궁과 태권도가 특기이다. 영화 중반에 등장하는 국내장면에서 범죄조직에 위장 잠입한 그녀는 한국의 악당들을 태권도로 홀로 소탕하며 몸을 사라지 않는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 후반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석궁을 쏘며 몸을 날리는 등의 화려한 액션이 등장한다. (그림7)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 홍콩 포스터 <여신탐>은 홍콩개봉 당시 영어 제목이 <Deadly Angels>였는데, 세 명의 미녀들이 악당을 퇴치한다는 설정이 1976년에 방영된 미국 abc 방송국의 드라마 <Charlie's Angels(미녀삼총사)>와 유사하다. 당시 쇼브라더스는 헐리우드에서 제작된 <킹콩>(1976)의 흥행을 보고 <성성왕>(1977)이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쇼브라더스는 국제적인 흥행의 흐름을 발 빠르게 파악하고 제작, 배급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한국의 영화사들도 이런 흐름에 공동제작 혹은 투자의 형태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림8)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 홍콩 촬영 중 이한상 감독에게 출연 섭외를 받은 김정란. 1) 그녀는 내심 홍콩에서 촬영을 마친 후 바로 유학을 가려 했지만 촬영 중에도 영화출연 섭외가 쇄도했다. <여신탐> 촬영 중 홍콩의 명감독 이한상으로부터 <백사전>(이한상·최동준, 1978)의 출연제의를 받았지만 노출장면 때문에 거절했는데 그 역할은 대만 배우 임청하에게 돌아갔다. 국내 영화사들의 계속된 출연요청으로 그녀는 <여신탐>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특명>(김선경, 1976), <소림사 흑표>(이혁수, 1977), <정무문(속)>(남석훈·초석, 1977), <금호문>(김선경, 1977), <용왕 삼태자>(최동준, 1977) 등 쉴 새 없이 작품을 이어갔다. (그림9) <소림사 흑표>(이혁수, 1977) 포스터. 검은 옷을 입은 이가 상관영봉이고 흰옷을 입은 이가 김정란이다. 상관영봉의 화려한 손모양이 포스터에도 드러난다. 1977년 출연한 <소림사 흑표>는 당시 무협영화의 히로인이었던 대만 출신 배우 상관영봉과 공동 주연한 작품이다. 상관영봉은 이미 <소림사 18동인>(1976) 등의 영화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무협 배우였고 쿵푸 액션을 하다 보니 이 작품에서는 그녀보다 유리한 점이 많았다. 쿵푸는 손동작이 화려하고 사전 동작이 많다 보니 카메라 앞에서 주목을 받기 쉬운 반면 태권도는 발차기 위주여서 액션을 열심히 할수록 오히려 화면에서 얼굴이 멀어진다는 점 때문이다. 일단 중국식 의복을 입으면 연기가 달라졌다. 액션을 하려면 목을 한 바퀴 돌려 긴 머리카락을 감아서 정돈한 뒤 옷을 접고 대사를 하고 손동작을 하는 식으로 사전 동작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얼굴이 화면에 더 오래 나갈 수 있었지만 태권도는 한번 자세를 잡으면 바로 발차기를 하고 주먹이 나가는 식이었다. 이런 동작의 차이 때문에 화면에서 돋보이기 힘들어 그녀로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으로 기억한다. (그림10) <소림사 흑표>(이혁수, 1977)의 한 장면. 검은 옷을 입은 상관영봉과 흰 옷을 입은 김정란 쿵푸가 익숙하지 않았던 그녀는 액션의 합을 그대로 외우는 방식으로 촬영했다. 국내촬영은 장비도 열악하고 준비도 오래 걸리다보니 무조건 몰아찍기를 해야 되었기에 한번 찍을 때 최대한 길게 촬영했다. 그러니 액션도 길어져 합은 열 동작 이상이었다. 사전에 액션 연습도 없이 촬영 직전 현장에서 처음으로 열 동작 이상을 알려주면 그대로 외워 촬영했고 한 동작이라도 틀리면 사고와 부상으로 이어졌다. 큰 사고는 <금호문>(김선경, 1977)에서 발생했다. 소품이 부족해 촬영용 칼이 아닌 육중한 무쇠칼을 사용했던 게 화근이었다. 상대 배우가 무쇠칼로 액션을 하다 타이밍을 놓쳐 그녀의 머리를 내려치게 된 것이다. 머리에 둘렀던 진주 장식이 터지고 머리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촬영지가 고창 정읍의 선운사다 보니 열악한 교통상황에서 급히 갈 수 있는 병원조차 없었다. 제작진은 담배를 으깨 피가 나는 머리를 지혈한 뒤 그녀를 리어카에 실어 가축병원으로 옮겼다. 마취도 없이 환부를 꿰매는 것으로 처치를 마친 후 현장으로 돌아온 뒤 그녀는 다음날부터 촬영을 계속해야만 했다. 이미 개봉일이 잡혀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현장 스태프들은 그나마 진주 머리 장식이 있어 큰 화를 면했다고 위로했지만 그녀는 부은 얼굴로 고통 속에서 촬영을 이어갔다. 촬영을 마쳐갈 즈음 꿈을 꾸고 찾아온 어머니와 함께 겨우 서울로 올라와 제대로 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안전장치 하나 없던 열악한 촬영 환경에서 사고의 위험은 도처에 있었고 사고 후의 수습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던 시절이다. 그녀뿐 아니라 무협액션장르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 모두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영화사나 작품의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무협액션영화 촬영현장의 조건이나 대우는 국내가 홍콩이나 대만보다 훨씬 열악했다. 당시 무협액션영화에 대한 국내 영화계의 천대가 촬영현장의 열악함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그림11) <금호문>(김선경, 1977)의 한 장면. 사고에서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진주머리 장식이 눈에 띈다. 대만에서는 로웨이가 제작한 <사학비권>(진지화·김진태, 1978)과 <오룡대협>(진지화·김진태, 1978)을 촬영했다. 두 편 모두 성룡과 함께 출연했는데 <사학비권>에서는 성룡에게서 권보를 빼내기 위해 소년처럼 남장을 하고 접근하는 역할이었다. 홍콩이나 대만에서 진행되는 합작영화의 경우 사전에 시나리오를 보기가 힘들었다. 보통 합작영화 제작 시 한국 영화사가 전담했던 한국 로케이션 장면의 대본 정도만 미리 받아볼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대만의 영화사가 전담한 대만 촬영분량에서는 역할에 대한 사전정보 없이 현장에서 캐릭터를 파악하고 연기해야 했다. <사학비권> 또한 대만 촬영현장에서 당일 그날의 의상을 보고서야 남장소년 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장 통역조차 한국말이 서툰 화교라 대부분 눈치껏 해석하고 연기해야 했다. 가령 “여자인데 남자로 분장했어. 배고파. 빵 먹고 싶어.” 라는 통역된 감독의 말만 듣고 ‘남장을 하고 빵을 훔쳐먹어야 하는 장면’이라 판단하고 연기했다. 그러다 옆에서 한국말을 조금 아는 성룡이 “귀여워” 라고 첨언하면 그녀는 귀여운 표정이나 코를 치는 연기를 더하는 식이었다. 정보 없이 현장에서 눈치껏 연기하다 보니 촬영 중인 화면의 사이즈를 알리도 만무했다. 그 덕에 자신이 찍히지 않는 쇼트에서도 혼자 열심히 연기해 감독이 몇 장면 더 찍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림12) <사학비권>(진지화·김진태, 1978)의 한 장면. 소년처럼 남장한 모습이 잘 어울린다. (그림13) <사학비권>(진지화·김진태, 1978)의 한 장면. 비호성주의 딸 황주로 돌아온 모습이다. <사학비권>과 <오룡대협>의 대만 촬영현장은 의사소통이 어려울 뿐 분위기나 대우는 좋았다. 분야별로 준비가 잘 되어있어 진행이 순조로웠고 식사를 굶거나 밤을 새는 경우도 없어 좋은 컨디션에서 촬영할 수 있었다. 촬영장에서 그녀 뒤에는 언제나 발받침과 차를 담은 보온병이 졸졸졸 쫓아왔는데 키가 작은 그녀를 위해 전담 스태프는 그녀가 가는 곳마다 발받침을 가지고 따라다녔다. 뿐만아니라 대만 제작팀은 당시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스폰지 속굽이 있는 키높이 부츠를 특별히 제작해줄 정도로 세심하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준비해줬다. (그림14) <오룡대협>(진지화·김진태, 1978) 대만 촬영현장. 방수일, 성룡, 진지화 감독, 김정란. 김정란의 오른쪽에는 촬영장에서 항상 그녀를 따라다니던 발받침과 보온병이 있다. 하지만 액션에 대한 부담은 여전했다. 덤블링을 하고 2층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정도의 액션은 직접 연기해야 되었고 그 수준을 넘는 경우는 대역이 대신했다. 중국에는 무술 인구가 많아 대역을 찾는 게 어렵지 않았지만 한국에는 무술이 가능한 키 작은 사람이 없어 난감할 때가 많았다. <혈육마방>(김영효·포학례, 1979)의 후반부에서 그녀는 보물이 든 궤를 차지하기 위해 남자배우들과 결투를 벌이다 죽임을 당하는데 결투 내내 맞고 쓰러지는 액션을 해야 했다. 대역이 있다 해도 어지간한 액션은 모두 해야 되었기에 비가 오면 아파서 울 정도로 늘 근육통에 시달렸다. (그림15) <혈육마방>(김영효·포학례, 1979) 촬영현장에서 김정란과 대만의 무술감독.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야 하는 상황에 난감해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녀는 몇 편의 멜로드라마 장르의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김수용 감독의 <화려한 외출>(김수용, 1977)이 그중 한 편이다. 술집 작부와 정신이상자라는 1인 2역을 맡았는데 조연이긴 했지만 개성 있는 역할이라 선뜻 응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파에 시달린 인물을 천연덕스럽게 표현해냈다. 무엇보다 연기만 하면 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웠고 ‘어우, 나도 막 이런 연기가 되네.’ 라며 신나서 한 역할이었다. (그림16) <화려한 외출>(김수용, 1977)의 한 장면 <신궁>(임권택, 1979)에서는 술집 주인으로, <짝코>(임권택, 1980)에서는 짝코의 애인 역으로 출연해 인상적인 연기를 남겼다. <짝코>는 출연 분량이 많지는 않았으나 능청맞은 연기로 어둡고 진지한 극의 분위기를 재치있게 살렸는데 그녀는 이 작품으로 대종상 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림17) <짝코>(임권택, 1980)의 한 장면 연기에 재미를 느낀 그녀는 작은 역이라도 열심히 참여했다. <물보라>(김수용, 1980)에서는 동네 아낙으로 출연했는데 바닷가에서 여자들이 뛰어와 서는 장면에서 그녀는 제일 끝에 서 있었다. 하지만 카메라는 그녀에게까지 오지 않았다. 촬영 전, 다른 배우들에게만 땀처럼 보이도록 얼굴에 물을 뿌려준 상태였다. ‘나도 땀을 흘렸어야 되는데…’ 걱정이 된 그녀는 얼른 바위틈 웅덩이로 뛰어가 고여있는 물을 찍어 얼굴에 뿌렸다. 그걸 본 김수용 감독이 웃으며 “정란이까지 찍어줘”라고 해서 출연장면을 사수할 수 있었다. (그림18) TBC 어린이 드라마 <달려라 차돌이>(1977)의 한 장면 (그림19) TBC 드라마 <대춘향전>(1980)의 한 장면. 왼쪽 끝이 향단 역의 김정란, 오른쪽 끝이 춘향 역의 이경표이다. 그녀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텔레비전 방송 활동도 겸했다. TBC 어린이 드라마 <달려라 차돌이>(1977)에는 정순누나 역으로, TBC 특집 드라마 <대춘향전>(1980)에는 향단역으로 출연했으며 꾸준히 방송 섭외를 받았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되자 집안에서 그녀의 결혼을 서둘렀고 1981년 결혼 후 남편의 반대와 육아로 자연스럽게 은퇴하게 된다. 그녀는 영화계에서 약 6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굵직한 무협 액션 영화에 출연하며 1970년대 액션 여배우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녀의 작품활동은 국내 무협액션영화의 특징과 여성 연기자의 조건, 합작영화의 제작 관행 등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그녀의 지난 활동이 앞으로도 꾸준히 조명받기를 바란다. 1) 경향신문 1976년 9월 20일 8면.
검열의 추이를 담은 흥미로운 텍스트, 영화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 영화 <도시로 간 처녀>와 그 검열서류는 1970년대와 80년대, 두 시대의 서로 다른 검열 양상을 추적하는 데에 매우 흥미로운 요소를 제공해 준다. 물론, 이는 의아함을 자아낼만한 서술이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도시로 간 처녀>는 김수용 감독의 연출로 1981년에 개봉,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상영중지 사건을 겪으면서 사적(史的)으로 중요하게 언급되는 작품이 전부이다. 때문에 위의 서술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도시로 간 처녀>를 통해 두 시기의 검열 양상을 살펴보는 것은 시간을 거스르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문제, 다른 하나는 흔히 ‘검열’이라 할 때 떠올릴 수 있는 것들, 그러니까 국가가 자의적인 방식으로 법령을 구성하고 영화가 나오기 전에 삭제하는 것이 아닌 ‘상영중지’가 검열의 범주에서 설명될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이다. 이 문제들에 답하기 위해 먼저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버스안내양들이 1981년에 개봉한 <도시로 간 처녀>에 처음 반기를 들었다면 그 이전 영화들에선 버스안내양을 어떻게 다루고 있었을까? 1961년 8월, 시내버스의 차장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교체되면서 생겨난 버스안내양이라는 직업군은 1970년대를 넘어서면서까지 각종 가십들 사이에 등장하면서 타락한 여성이라는 이미지 속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열악한 노동환경과 임금수준은 ‘삥땅’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기에 버스안내양들은 일간지와 각종 잡지에서 비행을 일삼는 이들로 그려지면서 당시 요구되던 성적(性的)·도덕적 기준에 미치지 못한 이들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960-70년대 영화에서 이 직업군은 거의 등장하지 않을뿐더러 만약 등장한다 해도 당대에 소비되던 모습과는 달리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받는 노동자로 그려지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영화 <맨주먹의 소녀들>(김영효, 1976)이다. 이 작품은 성실하고 당찬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버스안내양이 깨끗하고 우수한 노동환경 속에서 보호받는 노동자이며, 스스로 노력만 한다면 자신의 꿈을 이루기에 충분한 직업군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너무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작품의 검열서류에서 지금 확인할 수 있는 <도시로 간 처녀>의 시나리오와 거의 동일한 1) 시나리오가 지난한 과정을 거쳐 <맨주먹의 소녀들>로 개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검열과정은 버스안내양들의 힘겨운 일상이 왜 1970년대에는 영화에 나올 수 없었는지, 어떻게 전혀 다른 영화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다음 문제에 답하기 위해 검열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잘 알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쉽게 규정되지 않는 것이 검열의 정의 혹은 범위이기도 하다. 보통 한국영화사에서 검열을 언급할 때에는 영화가 관객을 만나기 전 정권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시나리오나 영화 장면에 가위질을 해대는 것을 의미했다. 즉 검열은 국가가 가해자이며, 창작자와 작품이 피해자라는 도식 안에서 움직였으며, <도시로 간 처녀> 역시 바로 이 범주에서 언급되어 왔다. 영화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당국이 버스안내양들을 시켜서 벌인 검열이라는 인식은 2) 당시 많은 영화인들을 공분케 했고, 현재까지의 영화사 서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시각에는 검열에는 정부의 폭력적인 해석 이외의 것들은 끼어들 리 없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는데, 상영중지 과정 중 <도시로 간 처녀>의 검열 서류에서는 심의 주체였던 문공부, 그리고 그 산하의 한국공연윤리위원회가 오히려 검열에서 배제되는 양상을 살필 수 있다. 또한 버스안내양들의 집단적인 항의는 19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불러와 영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는 고정적으로 알고 있던 검열에 대한 인식을 좀 더 넓혀야 한다는 것과 어느 시대나 검열의 작동방식이 유사한 듯 보이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도시로 간 처녀>의 검열서류는 당대의 검열 양상을 추적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가지 문제를 성실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용이 길어질 수밖에 없기에, 부득이 두 편으로 나누어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시기상 앞서고 있으며 1970년대의 검열양상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는 <맨주먹의 소녀들>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금지와 배제로서의 검열 – 건전한 버스안내양 그리기 영화 <도시로 간 처녀>는 1981년에 개봉했지만, 그 시나리오는 홍성원의 중편 소설 「흔들리는 땅」 3) 을 각색한 1976년의 시나리오 <흔들리는 땅>에서부터 확인된다. <흔들리는 땅>의 시나리오는 소설가 김승옥이 소설 속 갸바이(차내 행상) 형섭의 서사를 버스안내양 남숙의 서사로 각색하여 우성사에서 제작하고자 한 작품이었다. 소설은 형섭이 사라진 남숙의 흔적을 찾아다니면서 듣게 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는데, 후반부에 이르러 남숙이 버스안내양을 하면서 겪었던 부당한 대우와 열악한 노동환경, 그것에 어떻게든 항의하려 투신까지 불사했던 남숙의 모습이 묘사된다. 시나리오 <흔들리는 땅>은 바로 이 후반부를 영화의 주서사로 삼아 버스안내양들이 삥땅을 의심받아 몸수색을 당하고, 뒷돈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버스 기사에게 골탕을 먹고, 대학생 승객과 연애를 하다 버림받으며, 급기야 투신자살까지 하는 장면들을 그려냈는데, 사실상 1981년 제작된 <도시로 간 처녀>의 시나리오와 차이가 없다. 시나리오 <흔들리는 땅>은 1976년 제작을 시도하는데 당시 영화의 검열을 주관하고 있던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로부터 전면 개작 판정을 받으면서 삐걱대기 시작한다. [그림 1] <흔들리는 땅>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이 서류는 예륜이 시나리오 사전 심의를 진행한 후 문공부장관에게 보내는 것으로 영화시나리오 심의 결과를 보고하는 것이다. 이를 살펴보면, <흔들리는 땅>은 ‘밝고 진지하게, 몸수색 짐수색 지나치지 않게’하라는 요구와 버스안내양, 버스 안 행상인들과 버스회사 간의 뇌물 수수 등의 ‘부조리 현상’을 ‘과다 노출’했다는 이유로 전면 개작 판정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세 번째 장의 ‘종합의견 보충설명 및 부분시정사항’에는 영화에서 “수색”보다는 “교양강좌나 일일일기 교육” 등의 계도적인 방법으로 보여줄 것을 예로 들고 있는데, 이러한 권고 사항은 훗날 이 작품이 <맨주먹의 소녀들>과 같은 계몽적인 영화로 나올 수 있었던 이유를 추측케 한다. 이후 약 보름만인 4월 6일, 우성사는 역시 같은 제목의 시나리오로 다시 심의신청 하지만, 초심에서 지적된 문제들이 수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주일 만에 반려된다. 4) 그 후 우성사는 시나리오 내용에는 큰 변화 없이 원작자를 김승옥으로, 주인공의 이름을 ‘남숙’에서 ‘진숙’으로, 제목을 <비번날의 세 처녀>로 바꾼 시나리오를 다시 심의 신청한다. [그림] 2 <비번날의 세 처녀>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이 작품 역시 전면 개작 판정을 받는데, 이때에는 버스안내양의 삥땅을 찾기 위한 몸수색에 남자직원이 포함된 것이나 여주인공의 투신 장면이 추가적으로 문제가 된다. 이때 심의 의견에는 인권유린의 문제가 있으니 일부 부정행위를 전체의 것으로 확대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약 한 달 후인 6월 1일, 남숙을 주인공으로 한 <흔들리는 땅> 시나리오가 다시 심의 신청되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전면 개작 통보를 받는다. 이러한 과정은 사적(史的)으로 <도시로 간 처녀>가 알려진 것처럼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닌 각색 시나리오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한편, 풍문처럼 떠도는 소문과는 상관없이 버스안내양들을 부도덕하게 다루는 내용은 1970년대 후반까지 대중에 공개되어서는 안 될 민감한 사안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흔들리는 땅>의 심의 과정은 ‘밝고 진지한’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부조리 현상’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전형적인 국가 검열 시스템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국가 검열은 가십으로 떠돌던 버스안내양들의 모습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힘쓸 수 있는 노동자로서의 버스안내양을 원했기에 앞서 지적되었던 내용들이 문제가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1975년 연두 순시 때 박정희가 여성 직업인의 처우개선의 일환으로 버스안내양에 대한 복지정책을 언급하고,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바로 이듬해 버스안내양으로서는 최초로 성진운수에서 근무하던 버스안내양 이매순이 국무총리 표창을 받으면서 여성노동자로서의 버스안내양이 주목받던 때였다. 5) 육체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힘들지만 승객을 위해 웃는 얼굴로 일하고 부모를 봉양하는 ‘자랑스런 또순이’ 6) 라는 국가가 원하던 노동자상이 만들어지고 있던 이때에 시나리오 <흔들리는 땅>과 그 수정본들이 검열을 통해 저지당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우성사는 바로 이 상황을 활용해 다시금 버스안내양들의 고충을 그린 시나리오의 영화화를 시도한다. 시나리오 <흔들리는 땅>이 다시금 전면 개작 통보를 받은 지 약 5개월 후인 같은 해 11월 3일, 역시 전과 같은 시나리오가 <아직도 먼 종착역>이라는 제목의 각색 시나리오로 원작과 원작자를 모두 바꾸어 심의 신청하는데 이 변화는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림 3] <아직도 먼 종착역>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및 작가의 영화화 승낙서 먼저 이 서류에서는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로 적혀있던 부분들이 모두 한국공연윤리위원회로 수정된 것을 볼 수 있다. 예륜은 1976년 5월부터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으로 명칭을 바꾸어 심의를 진행했는데, 영화 <흔들리는 땅>과 그 수정본들의 심의를 받는 사이 심의기관이 명칭이 바뀌었다는 것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때 수정된 원작과 원작자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데, 바뀐 시나리오의 제목은 당시 노동청에서 발행하던 잡지 《산업과 노동》의 노동자 생활수기 모집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던 「아직도 먼 종착역」에서 가져온 것이며, 원작자 이매순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 해 국무총리상을 받은 버스안내양이었기 때문이다. 덧붙여 <아직도 먼 종착역>의 심의 시나리오의 첫 장에는 이 작품이 원작의 가치와 우수성으로 인해 노동청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는 문구가 매우 부각되어 있다. 시나리오 <아직도 먼 종착역>이 시나리오 <흔들리는 땅>과 큰 차이가 없다고 했을 때, 서울로 상경한 어린 소녀가 “군수님도 타기 힘든 국무총리상을 서울 가서” 탄 자랑스럽고 자부심 넘치는 어린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은 수기 「아직도 먼 종착역」이 결코 이 시나리오의 원작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쉽게 짐작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먼 종착역>은 원작과 원작자를 바꾸고 노동청의 후원까지를 명시하며 심의를 신청했고, 이전 <흔들리는 땅>에서 지적한 ‘삥땅’의 문제나 ‘투신장면’이 동일하게 지적되었음에도, 위의 시나리오 심의의견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수정사항이 이후 두 장이나 더 빼곡하게 적혀 있을 만큼 많았음에도, 전 과는 다르게 수정통과 판정을 받는다. 이 결과는 사실상 작품의 원작이나 원작자가 시나리오의 내용에 영향을 미쳤다기보다는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인 요인이 되어 검열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서 문제가 되었던 시나리오들과 같은 시나리오였던 <아직도 먼 종착역>이 이번에는 수정 통과가 되었다면, 그 이유는 최우수 노동자 생활수기를 원작으로 삼고, 국무총리상을 받은 버스안내양이 원작자이며, 노동청의 후원을 받았다는 점, 즉 시나리오의 내용과는 상관없는 힘이 작용했다고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정통과를 받았던 <아직도 먼 종착역>은 끝내 영화화 될 수 없었다. 이는 우성사가 중요하게 부각시켰던 ‘노동청 후원’이 오히려 문제가 되었기 때문인데, 노동청은 우성사가 시나리오에 노동청의 의견을 반영하고 심의를 받기 전 노동청의 최종 검토를 받는다는 조건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았고, 노동자를 부정적으로 그려 원작과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영화후원 명칭 사용 허락을 취소했던 것이다. [서류 4] 노동청의 영화후원 명칭사용 허락 취소 공문 이 서류를 살펴보면 노동청은 노동자나 노사관계가 부정적으로 그려졌다는 것에 가장 큰 불편함을 표하고 있다. 공윤은 노동청 후원 명칭, 원작과 원작자의 함의 등을 고려하여 <아직도 먼 종착역>을 통과시켜주었을지 몰라도 정작 노동청의 입장에서는 승인할 수 없는 장면들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후 우성사는 ‘노동청 후원’ 명칭을 삭제하고 원안 이매순, 각색자 김승옥, 제작자 김용덕으로 11월 23일에 <아직도 먼 종착역> 제작을 신고, 7) 12월 3일 제작신고서는 수리된다. 8) 그런데 약 보름 후인 12월 16일, 우성사는 갑작스레 <아직도 먼 종착역>을 <맨주먹의 소녀들>의 소녀들이라는 제목으로 바꾸겠다는 개제(改題)심의의견서를 제출하는데, 9) 이때 제목과는 상관이 없을뿐더러 완전히 다른 작품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중심 스태프인 감독과 각본이 교체된다. 그리고 시나리오 <맨주먹의 소녀들>은 <아직도 먼 종착역>이 가지고 있던 고발적인 요소를 모두 삭제한 채, 모범적인 사원이며 효녀이고 부족한 시간을 쪼개 검정고시까지 준비하는 버스안내양 영옥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가 위기를 겪을 때에는 동료들이 도와주고, 나중에는 버스회사의 간부들까지 나서 영옥을 살펴주는 국책영화처럼 그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그림 5] <맨주먹의 소녀들> 검열 합격증 결국 시나리오 <흔들리는 땅>이 보여주고자 했던 버스안내양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은 약 9개월 후인 1976년 3월, 전혀 다른 내용과 제목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다. 시나리오 내용과는 상관없는 원작과 원작자까지 명시해가며 드러내려 했던 내용이 ‘오늘은 참’고 ‘내일을 위해 달’리는 버스안내양들의 모습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10) 당시 공윤에서 발행하던 월보 《공연윤리》의 영화시나리오 심의 통계 목록에서는 <아직도 먼 종착역>은 찾을 수 있지만 <맨주먹의 소녀들>은 찾을 수 없다. 이는 <맨주먹의 소녀들>이 개제신고서를 낸 후 이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심의를 진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사항들은 갑작스레 제출된 개제(改題)심의 신청서가 어딘가 강제적이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시나리오 <흔들리는 땅>을 둘러싼 이 복잡다단한 과정은 적어도 1970년대 말까지 영화 스크린에는 버스안내양들의 부정적인 모습이 드러날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엄밀히 말해 노동청의 후원을 받기로 했다는 공문과 원작자의 이름만으로 내용이 전혀 변하지 않은 시나리오를 통과시킨 것으로 보아 검열 과정 중 버스안내양들을 얼마나 세심하게 고려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반복적으로 지적되던 삥땅이나 투신자살과 같은 장면은 이후 전혀 다른 내용의 영화로 제작되어야 할 만큼 민감하게 받아들여진 것이 사실이었다.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버스안내양들의 고된 일상과 노동 착취는 1970년대에까지는 영화에 등장할 수 없었고, 이렇게 노동자의 모습은 지켜지고 있었다. 약 5년 후, 이 시나리오는 1981년 스크린에 그 모습을 드러냈고, 영화사상 초유의 상영중지 사태와 맞닥뜨린다. 1. 이때 ‘거의 동일’하다는 표현은 줄거리나 장면에서 특징지을 만한 차이가 전혀 없고,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몇몇 대사들만 바뀐 것을 의미한다. 영화 <맨주먹의 소녀들>은 시나리오 <흔들리는 땅>과 그 수정본들(이후 설명할 <비번날의 세처녀>, 다시 수정한 <흔들리는 땅>, <아직도 먼 종착역>, <맨주먹의 소녀들> 그리고 <도시로 간 처녀>에 이르기까지)과 사실상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조금씩 변화가 있다고는 해도 서사에 지장을 줄만한 것이 아니라 외래어 사용을 우리말로 순화하거나 비속어를 수정하는 정도이며, 설사 서사에 변화가 있다 해도 중심인물의 성격이나 상황 등은 변화하지 않고,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의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거나 삭제되는 정도이다. 쉽게 말해 <흔들리는 땅>의 수정본들이라 할 수 있는 이 시나리오들은, <맨주먹의 소녀들>과 <도시로 간 처녀>의 시나리오까지를 포함하여, 사실상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도시로 간 처녀>를 연출한 김수용은 <도시로 간 처녀>의 상영중지에 대해 어용노조가 시켜서 벌인 특별한 의미 없는 난동이나 폭로에 대한 검열로 인식했고(김수용, 『나의 사랑 나의 씨네마』, 씨네21, 2005, 221-224쪽), 이 영화의 제작자 임원식은 유신 때에는 검열이 폭력적이었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어용단체를 통해 에둘러 박해했다며 이를 국가의 검열로 파악했다. 임원식, “죽어도 4.3영화 한 편은 만들어서 죽겠다”, ≪제주의 소리≫, 2004년 9월 24일. m.jejusori.net. 3. 홍성원, 「흔들리는 땅」, 문학과 지성 19호, 문학과 지성사, 1975 참조. 4. 「시나리오 재심의견서」, 1976.4.13. 5. “국무총리 표창, 이매순 외 30명”, ≪매일경제≫, 1976.03.10. 7면 표제에 ‘이매순’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버스 안내양이 국무총리상을 받은 것 자체에 당시 큰 의미가 부여되었고, 이매순에 관한 기사들이 이후 줄을 이었다. 6. “총리 표창 받은 안내양 이매순양 “승객은 나의 가족”-자랑스런 또순이”, ≪경향신문≫, 1976.3.10.7면. 7. 「영화제작신고서」, 1976.11.23. 8. 영화 1733-18001, 「극영화 <아직도 먼 종착역> 제작신고 수리통보」, 1976.12.3. 9. 「시나리오 개제심의의견서」, 접수 1976.12.16., 심의 1976.12.17. 10. 김인순이 부른 영화 <맨주먹의 소녀들>의 오프닝곡 <맨주먹의 소녀들> 가사만으로도 이 영화의 의도는 파악된다.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길잡이 귀염둥이 소녀들/ 자주색 유니폼이 오늘도 빛나요/ 사연도 많겠죠. 꿈들도 많겠죠./ 그러나 이 시간도 내일 위해 일해요./ 보람찬 내일 영광스런 그 날이/ 언젠가는 오리라 믿어 보면서/ 오늘은 참아요. 내일 위해 달려요./ 고달픔을 잊고 힘차게 오늘을 살아요./ 오늘을 살아요. 오늘을 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