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의 라푼젤
- 감독
- 오웬 허리
- 제작년도
- 2002
- 출연
- 안젤리카 휴스턴, 켈리 쉐리던
최근 한국 애니메이션이 두 편이나 연달아 개봉을 했다. < 소중한 날의 꿈 >과 < 마당을 나온 암탉 >이 그 작품들. 한국 애니메이션의 제작 상황을 생각했을 때 웬만해선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그중 <마당을 나온 암탉>이 황선미 작가의 베스트셀러 동화가 원작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걸 본 계기로 한국아동문학에 관심이 가고, 나아가 유명 애니메이션 작가들이 사랑해온 걸작 동화들이 새삼 궁금해졌다. 가장 먼저 로알드 달의 원작들이 떠오른다. 헨리 셀릭이 연출한 < 제임스와 거대한 복숭아 >와 웨스 앤더슨의 <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 >가 달에게 거대한 빚을 지고 있다. <제임스와 거대한 복숭아>에서 갈매기들에게 매달려 푸른 밤바다 위를 날아가는 거대한 복숭아의 모습이 얼마나 환상적인지. 한밤중 거대한 복숭아 위에서 듣는 지네 아저씨의 바이올린 연주는 또 얼마나 가슴 설레는지. < 스티브 지소와 해저생활 > < 다즐링 주식회사 >를 연출한 전방위 아티스트 웨스 앤더슨이 자신의 색깔을 한껏 살린 첫 애니메이션 <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 >도 나무랄 데 없다. 닭장을 털고 농장을 습격하는 미스터 폭스를 통해 보여준 로알드 달의 유머 감각이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에도 그대로 적용돼 황홀했던 기억이 있다. 달이 생각해낸 미스터 폭스의 캐릭터나 미스터 폭스 식구들, 그리고 악질 농장주 삼인방은 어느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캐릭터. 나무 밑 여우굴의 이미지나 농장주들에게 쫓기던 미스터 폭스가 대반전을 꾀하는 결말도 유쾌하고 발랄한 여운을 남긴다. 어른들의 규범과 관습에 어긋날지라도 아이들이 원하는 반전을 그려냈던 로알드 달의 비틀린 유머 감각은 단연 최고다. 그의 원작으로 애니메이션이 나올 때마다 그의 동화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새삼 놀라곤 한다. 감독 스파이크 존즈가 모리스 샌닥의 동명 그림동화를 꿈같은 화면으로 되살려낸 < 괴물들이 사는 나라 >도 빼놓을 수 없다. 몇 페이지 안 되는 원작 속에 ‘괴물처럼 아우성치며 외로워하는 어린이’에 대한 철학을 담아놓은 샌닥의 심오한 상상력이 없었다면 절대 나올 수 없었던 작품이다. 스파이크 존즈도 그만큼 원작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지브리 스튜디오가 건드린 동화들도 빼놓을 수 없다. 영국 작가 다이애나 윈 존스의 <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나 어슐러 르 귄의 <게드 전기>이나 메리 워튼의 동화 <마루 밑 소인들>. 오리지널 스토리가 바탕이 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보다는 파급력이 덜했지만, 지브리에 새로운 상상력을 수혈해준 동화들이었음은 사실이다. < 백설공주 >에서 < 라푼젤 >에 이르기까지 디즈니가 숱하게 작업해온 클래식 애니메이션을 통해서도 수많은 동화 원작을 입체적으로 만나왔고, 윌리엄 스테이그가 쓴 동화 <슈렉>이 애니메이션으로 4편까지 장수하는 것을 목격했다. 우리에게도 물론 정채봉의 <오세암>이나 권정생의 <강아지똥>이 있다. 판매부수 100만부가 넘은 한국아동문학의 베스트셀러 <마당을 나온 암탉>까지 애니메이션이 됐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여전히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애니메이션 < 마당을 나온 암탉 >의 완성도에도 이견이 있는 상황에서, 더 다양한 색깔의 한국 동화를 많이 발굴할 필요가 있다. 오리지널 스토리의 중요성도 크지만, 이미 이야기와 캐릭터의 완성도를 갖춘 동화 한 편이 주는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모르긴 몰라도 한국 아동문학을 샅샅이 뒤져본 애니메이션 관계자들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아동문학의 조류나 성향도 잘 모르고,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되기 적합한 이야기들이 어느 정도 되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아동문학에 살을 붙이고 가지를 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콘텐츠도 없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골라보라면 요즘 한국 아동문학의 ‘핫 이슈’라 할 백희나 작가의 <달 샤베트>를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보고 싶다. 일면식도 없지만 작가가 직접 그리고 세트를 지어 사진 촬영한 입체 일러스트가 대형 아이맥스 화면에서 살아 움직이는 걸 보고 싶다. 그녀의 전작 <구름빵>이 이미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된 바 있다. 하지만 더운 여름밤 잠 못 이루는 아파트 주민들을 위해 반장인 여우 할머니가 달로 샤베트를 만들어준다는 <달 샤베트>의 그림과 이야기는 왠지 더 시네마틱하다. ‘한국의 웨스 앤더슨’ ‘한국의 헨리 셀릭’이 혜성같이 등장해 원작의 색감과 질감을 살려 스크린에 옮겨주길 괜히 기대해본다.
금발이 너무해? 금발이 대단해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환상의 머릿결. 샴푸 광고 얘기가 아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 라푼젤 >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떠올릴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 드래곤 길들이기 >의 3D 효과보다 한 수 위라고 느껴지는 라푼젤의 황금빛 머리카락 3D 효과는 대단하다. 21미터에 달하는 긴 머리를 이용한 화려하고 유쾌한 액션과 머리카락 자체의 섬세한 아름다움은 3D 애니의 표현력에 경의를 표하게 한다. 실사로는 아무리 옮기려 해도 뭔가 빠진 듯한 동화의 낭만을 애니메이션만의 비주얼과 움직임으로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라푼젤>엔 그만큼 변화를 갈망하는 디즈니의 야심이 엿보인다. 디즈니의 50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인 < 라푼젤 >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상 최초로 고전 동화 원작과 3D 기술이 만났다는 면에서 먼저 주목 받았다. 하지만 뜯어보면 그 외에도 다양한 증거가 많다. 픽사의 수장 존 레세터가 프로듀서로 참여한데다가 <공주와 개구리> 때보다 훨씬 각색의 매력이 드러난다. 애초에 그림 형제의 동화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 각색하기 나름이지만, 원작의 줄기를 해치지 않는 영리한 각색이랄까. 동화에선 다소 수동적인 캐릭터였던 라푼젤과 왕자의 이미지를 확 바꿔 순진무구하고 상큼한 소녀와 능글맞은 도둑 청년의 상쾌한 활극의 이미지를 연출한 것이 인상적이다. 맛깔스러운 조연 캐릭터들이 함께 하는 화려한 연출, 작곡가 알란 맨킨의 뮤지컬 넘버들이 종합적으로 뒤섞여 디즈니가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가족, 사랑, 모험, 용기 같은 것들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과감한 도약을 보여줬다고 할까. 역시 사람이든 회사든 자기가 잘 하는 걸 해야 한다. 무엇보다 마법을 지닌 황금빛 머리카락을 지니고 태어난 까닭에 마녀에게 납치돼 18년간 탑 속에서 자란 라푼젤과 그녀의 어머니인 척 하는 마녀 고델의 관계가 흥미롭다. 라푼젤의 머리카락이 지닌 힘을 이용해 미모를 유지하려는 고델과 답답한 탑에서 바라보던 등불 축제를 꼭 한 번 가까이 보고 싶어 18세 생일에 가출을 결심하는 라푼젤. 둘의 관계는 허영심 강한 어머니로부터 독립하려는 모든 딸들의 이야기로 읽히기 때문이다. “바깥세상은 위험하다, 너한테 뭐가 제일 좋은지는 엄마가 안다”고 열창하는 고델의 위협은 너무 현실적이라 무서울 지경이다. 이런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세상에 발을 디뎠다 조금이라도 휘청이면 “거봐라” 하며 냉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기 일쑤다. 과잉보호만 할 뿐 끔찍한 세상을 헤쳐 나갈 방법은 손톱만큼도 가르쳐 주지 않는 자기중심적 부모에게서 벗어나려면, 라푼젤처럼 목숨을 걸고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이 싸움은 사랑에 빠졌다가 괜히 상처나 받느니 조용히 살라는 기성세대 어머니에 맞서 로맨틱한 인생을 꿈꾸는 신세대 딸의 전면전이기도 하다. 가족주의를 옹호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이런 면이 들여다보이는 게 좀 의외라 신선하다고 할까? 타고난 능력이었던 마법의 금발이 결국 평생의 족쇄였으며 라푼젤 자신을 옭아맸다는 사실도 눈여겨보게 된다. 자신의 유일한 재능이자 존재의 의미라고 여겼던 머리카락, 때론 그런 것들을 버렸을 때에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 또한 < 라푼젤 >에서 발견되는 삶의 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