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제리
- 감독
- 빠뜨릭 브라우데
- 제작년도
- 1997
- 출연
- 크리스틴 스코트 토마스, 제라르 다르몽, 빠뜨릭 브라우데, 발레리아 브루니 떼데시, 잔 모로, 줄스-에도워드 모스틱, 마리 크랑스 산톤, 프랑소와 핑크와서, 실벵 루즈리, 헤르베 하이올레, 요나스 브라오우데, 구일라 브라우데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1981)를 사실 경박하게 ‘삐용삐용’ B무비로 언급하는 것은 무척 난감한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실제로 보지 않은, 하지만 영화제목만은 다 알고 있을 사람들은 대부분 B스럽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처럼 한국영화계에서는 뜻하지 않게 B의 운명을 타고난 영화들이 있다. 대부분 영화제목 때문이다. 입으로 울어야 할 앵무새가 몸으로 울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그 앵무새가 영화 속에서 언어장애인인 정윤희를 비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처럼 슬픈 제목이 없다. 대사로 자신의 슬픈 내면을 드러내야 할 정윤희 가 그저 하염없이 말 못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외모만 탁월하고 연기가 부족한 정윤희를 위해 그런 앵무새 설정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할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정윤희는 앞서 만들어진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와 더불어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두 편으로 2회 연속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뭐랄까, 한국영화사를 통틀어 단 한 명의 ‘여신’을 꼽으라면 단연코 정윤희다. 정윤희 일단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는 도입부부터가 B스럽다. 알다시피 정진우 감독은 한국영화사에서 < 율곡과 신사임당 >(1978)을 통해 최초로 동시녹음을 시도한 선구자다. 그래서 매번 영화가 시작할 때마다 당당히 그 사실을 공표했는데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또한 ‘제6회 동시녹음 작품’이라는 대문짝만한 문구를 선보이며 시작한다. 자랑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바로 카메라 자랑으로 이어진다. ‘TODD-AO 카메라 제1호 작품’이라는 문구도 뜨는 것. 더구나 뒷배경으로는 본 영화와 전혀 상관없이 전장의 폭발 장면이 보이고, 손현채 촬영기사가 촬영부 퍼스트로 보이는 인물과 함께 한 바퀴 뱅그르르 돈다. 왠지 당시 활동했던 분들은 ‘촬영감독’이 아니라 ‘촬영기사’라 불러야 그 아우라가 살아나는 느낌인데, 아무튼 화려한 필모그래피에 비해 한국영상자료원 데이터베이스에 증명사진 하나 없는 손현채 촬영기사의 얼굴을 그렇게 확인할 수 있다. 그는 < 초분 >(1977), < 피막 >(1980), < 뽕 >(1985), < 내시 >(1986) 등 이두용 감독과의 작업으로 유명하다. 기술의 과시 영화는 홀아비 최영감( 황해 )의 회한 가득한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벌판에서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고 내려오는 문( 최윤석 )과 수련( 정윤희 )의 환상을 본다. 그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자신의 혈육이 아닌 문과 수련을 데려다 키웠는데, 바깥에는 친남매로 알려진 그들이 사랑에 빠지게 됐고 최영감은 내내 그것을 막으려했다. 어떻게 보면 요즘 TV 막장드라마(?)의 흔한 설정으로 느껴지는데, 어쨌건 그 무엇도 그들의 사랑을 막을 수 없었다. “사랑 앞에서 무엇을 감추랴? 대자연도 숨죽인 강렬한 육체언어!”라는 포스터 카피가 인상적이다. 결국 최영감은 “제발 인간 좀 되라”며 문을 서울로 보내버리는데,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괜히 지나가는 행인들과 어깨를 부닥치고 멀쩡한 전봇대를 부여잡으며 서울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던 그는 결국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다. 그렇게 두 사람이 모처럼 다시 만나는 장면이 압권이다. 저 멀리 쓸쓸한 표정으로 있는 수련을 발견하자마자, 문은 마치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물속으로 뛰어든다. 당시로선 보기 드문 수중 정사신이 그렇게 탄생했다. 이 장면을 위해 오대산 금강연에서 산소통을 메고 촬영에 임했던 손현채 촬영기사는 15번에 걸친 NG 끝에 호흡기를 놓쳐 심폐소생술로 살아났다 한다(그런 그에게 대종상은 촬영상을 안겨주었다).그렇게 그들은 뭍으로 나와서도 대충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는 서로의 몸을 탐한다. 뭍으로 나온 그들 이후 정윤희 의 팬으로서 가장 아쉬운 대목은, 하지만 영화적으로는 더욱 드라마를 풍성하게 해주는 설정은 바로 어느 순간부터 문을 쫓아다니게 되는 숙( 김형자 )의 등장이다. 사실상 영화 속 대사의 절반 이상을 책임진 숙은 시도 때도 없이 문에게 들이댄다. 그러면서 자신의 얘기를 구구절절 들려준다. 어려서 살던 섬을 떠난 그녀는 부푼 꿈을 안고 뭍으로 나왔지만 결국 건달과 엮여 인생이 꼬이게 됐다. “저 하늘에 구름이 왜 이리 많을까요”부터 “인간은 고무공과 같을지 몰라. 이리저리 튕겨나가고 싶으니까”라며 거의 시적인 대사들을 남발하기 시작한다. 자신에게는 관심도 없이 걷고 있는 문을 향해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천당인가요? 지옥인가요? 아니면 좀 쉬어서 가요”라고 말하는 그 모습이 처음에는 지겹다가도 어느덧 적응하게 되는데, 김형자 역시 이 작품으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주제도 떠다니는 삶에 대한 회한을 담은 숙의 대사다. “저 기차는 어디로 가는 기차일까요. 기차를 오래 타면 엉뎅이가 아파요. 그래서 마음 내키는 대로 걷다가 다시 타고 내리고 반복하죠. 그러다 해가 저물고 다음날이면 트렁크를 들어다주는 말없는 사내를 만나게 되요. 그게 인생인 거예요.” 그런 숙이 기어이 문을 성(性)적으로 굴복시킨 다음, 자신의 기둥서방과 문이 뒤엉켜 싸우는 장면과 숙이 화장을 고치는 모습을 교차 편집시키는 대목은 압권이다. 마치 ‘에라이, 남자들이 원래 그렇지 뭐’ 라는 생각으로 지켜보던 숙은 “됐어요, 이제 그만!”하며 불쑥 그 싸움을 말린다. 싸우는 남자들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다. 괜히 큰 사고라도 나면 자기만 귀찮아지니까. 그리고는 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바이바이” 떠난다. “여기가 우리들의 종착역인가 봐요. 어차피 내릴 곳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첫 번째 정거장에서 내리는 게 나아요. 어쨌건 당신은 내 가슴이 여전히 뛰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 멋진 남자에요. 세월이 흐르면 별난 추억이 될 거에요. 그럼 안녕~.” 실로 멋진 퇴장이다. 그렇게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는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를 보고 그 속편의 느낌으로 정윤희 에게 하트를 뿅뿅 발사하며 본 영화였다가, 뜻하지 않게 김형자 를 발견하게 된 영화였다. 김형자 , 김형자, .... 김형자 끝으로 어린 시절, 이 영화를 도저히 볼 수 없는 나이로 이 영화를 보면서 충격 받았던 두 개의 장면을 얘기하며 마무리할까 한다. 알부자로 소문난 최영감이 동료 철도노동자들과 함께 술을 마시던 중, 최영감을 흠모하고 있던 술집 여주인이 “과부 사정은 홀애비가 안다”며 느닷없이 최영감의 바지를 풀어 손을 쑥 집어넣는다. “과부 사정은...” 운운하는 대사야 워낙 익숙했지만 사람들이 가득한 술집에서, 그러니까 파티션도 쳐져 있지 않은 술집에서 직접 바지를 풀어버리는 그 여주인의 기개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또 하나는 최영감이 귀갓길에 사온 핑크빛 ‘신식 고쟁이’를 정윤희 에게 선물하고 바로 입어보는 장면이다. 그 장면을 전후한 이야기의 진행을 전혀 떠올리지 못할 만큼 강렬했다. 그러니까 정윤희가 초반에 나뭇잎으로 몸을 두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런 란제리가 없었기 때문인 것. 게다가 아무리 딸이라도 피 하나 섞이지 않은 딸이 그 차림새로 아버지의 등도 밀어주고 비누칠도 해주니, 그 장면이 줬던 묘한 긴장감은 그야말로 살벌했다. 그야말로 어린 나 또한 그 장면에서 몸으로 울고 말았다. 정윤희 황해 최윤석 김형자 감독: 정진우 각본: 김강윤 , 김성화 개봉극장: 피카디리(서울) 관람인원: 169,381명
언제였던가, ‘서울아트시네마’가 옛 허리우드극장 자리로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로 기억한다. < 얼굴없는 것들 >의 상영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되는 도중 조그만 사건이 벌어졌다. 앞줄에 앉은 한 중년남자가 손을 번쩍 들더니 분통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는 감독에게 이런 영화를 도대체 왜 만들었냐고 따졌는데, 제법 긴 시간이 흘러도 그의 분노 띤 장광설은 끝나지 않았다. 진행자는 안타깝게도 그를 멈추지 못했고, 왜소한 체격의 감독은 거의 울먹이며 대답을 잇지 못했다. 그 아저씨는 화면 속의 소년이 절대 인간이 아니라고 여긴 것 같았으며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을 카메라에 담은 행위를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당시 나는 멀리서 김경묵 이라는 감독을 보며 참 수줍은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수줍은 청년이라고? 글쎄, 과연 그랬을까? 김경묵 이란 이름을 처음 알린 단편영화 < 나와 인형놀이 >(2004)는 이 청년이 아이었을 때 어떻게 심심함을 달래며 자랐는지 보여준다. ‘So Shy''''''''''''''''''''''''''''''''''''''''''''''''''''''''''''''''''''''''''''''''''''''''''''''''''''''''''''''''''''''''''''''''''''''''''''''''''''''''''''''''''''''''''''''''''''''''''''''''''''''''''''''''''''''''''''''''''''''''''''''''''''''''''''''''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인형을 가지고 외따로 노는 꼬마의 모습에서 부끄러움을 잘 탈 법한 청년의 과거가 엿보인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아이의 인형놀이를 비디오로 찍었으며 그것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세상 앞에 내놓았다는 것이다. 극중 소년은 병원에 가 “나 자신을 모르겠어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분명 자신에 대해 알고 있었다. 주변의 꼬마들과 자신이 달라 혼란을 겪었을 따름이다. <나와 인형놀이>를 찍을 즈음, 소년 김경묵은 그런 혼란쯤은 이미 떨쳐낸 후였을 게다. 김경묵은 극중 꼬마를 빌려 보통의 남자아이들이 쪽팔려할 짓거리를 보란 듯이 재연한다. 여기서 방점은 ’재연한다‘가 아니라 ’보란 듯이‘에 찍혀야 한다. 그는 보여주기 위해 재연했다. <나와 인형놀이>의 엔딩에서 소년 김경묵은 (담배도 못 피는 주제에) 담배를 꼬나물고 도도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본다. ’과감하게 자신을 드러내기‘는 < 얼굴없는 것들 >에서 반복된다. 김경묵은 은밀한 매체인 홈비디오를 장롱 속에 감추고 혼자 돌려보는 대신 다 함께 보기를 권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끔 그 비디오가 세상에서 굴러가도록 내놓았다. <얼굴없는 것들>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김경묵은 스크린 앞에 앉은 다수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이제는 좀 더 성숙한 얼굴의, 그래봤자 이제 갓 스물 살이 된 청년은 여지없이 싸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김경묵이 수줍은 청년이라고? 아니, 전혀. 통증은 그의 시선이, 그의 그것보다 더 싸늘한 타자의 시선과 충돌하면서 일어났다. 혼자만의(혹은 그들만의) 놀이가 리그 바깥에 있는 사람의 시선과 만나는 순간, 그들은 소년의 놀이에 대해 쑥덕대기 시작했다. 나는 욕망의 충족이 곧 쾌락과 연결되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래야 마땅한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겐 욕망이 곧 절망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채, 밝은 빛의 저편에서 그들의 욕망의 의식은 진행된다. 그들은 아무도 보지 못할 그들만의 어두운 공간에서 서로의 욕망을 들춰낸다. 그들 중 누군가는 심지어 그곳에서조차 얼굴을 가린다. 마스크를 쓴 중년 남자는 헐떡이며 소년의 몸을 탐하고, 또 어떤 이는 두건을 뒤집어쓰고 바닥에 누워 똥을 받아먹는다. 의식을 마치면 그들은 덤덤한 관계로 복귀한다. 누군가는 서둘러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누군가는 홀로 남는다. 남겨진 소년은 무엇을 느꼈을까? 그리고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매번 관계의 절망에 빠졌을 소년은 나를 향해 묻는다. “당신 눈엔 내가 무엇으로 보여?” 괴물처럼 단순하게 정의되는 존재도 없다. 고대 신화에서부터 괴물은 단지 인간과 모습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괴물이 되었다. 그들에게 내면의 세계란 없다. 외눈박이 괴물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나는 예나 지금이나 알지 못한다. 보통사람들에게 <얼굴없는 것들>에 등장하는 것들은 그냥 부정해야 할 대상이다, 곁에 놔두면 왠지 불안한 대상이다. 다가오려고 하면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야 하며, 설령 그것들의 욕망이 내 안에서 꿈틀대더라도 한사코 거부해야만 한다. 보통사람들을 들먹이며 돌려 말하지 않겠다, 내 눈에 < 얼굴없는 것들 >의 그것들은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다. 그것들은 괴물이다. 여기서, 창 안에 웅크리고 앉은 존재를 괴물로 규정하는 것은, 창밖에서 그의 욕망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시선은 곧 규칙이자 거울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울에 비친 ‘그것’을 괴물이라 불렀다. 괴물이 탄생한 것이다. 김경묵 의 데뷔작 < 얼굴없는 것들 >은 그렇게 세상과 만났다. 고작 스무 살의 감독은 너무 뜨거워 만질 수 없는 물건을 세상에 선물했다. 당시까지, 그리고 지금까지 어떤 영화도 <얼굴없는 것들>보다 더한 충격파를 던지진 못했다. 어지간한 영화에는 눈도 끔뻑 안하는 외국의 평자들도 <얼굴없는 것들>를, 건드리면 터질 핵폭탄으로 취급했다. 비록 소수의 관객과 만났을 뿐이지만, 그들 가운데 <얼굴없는 것들>의 충격을 잊은 이는 아마도 없을 게다. 나는 김경묵의 다음 영화가 궁금했다. 저질스러운 나는 그가 <얼굴없는 것들>보다 훨씬 무지막지한 영화를 선보일 것이라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다음으로 만든 < 청계천의 개 >는 내 예상과 전혀 다른 작품이었다. 괴물의 탄생을 그린 <얼굴없는 것들>을 잇는 <청계천의 개>는 괴물의 활보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얼굴없는 것들>을 경험했던 나는 적당히 멜랑콜리한 심정으로 <청계천의 개>를 보았다. < 청계천의 개 >는 노래방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시작한다. 허림이란 가수가 1970년대 초반에 발표한 <인어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노래 가사에 맞춰 출렁이는 파도가 눈에 들어온다. 은근히 중독성이 있는 이 싸구려 이미지는, 카메라가 뒤로 빠질수록 앞의 이미지를 계속 부정하며 전개된다. 처음에 바다처럼 보이던 공간은 이내 폭포수가 떨어지는 계곡이라고 밝히고, 이어 폭포수 앞에 앉은 남자 인어의 자태를 보여주며 친숙한 자연의 이미지에서 키치와 환상을 더한 괴상한 이미지로 넘어간다. 그게 다가 아니다. 폭포수가 저속으로 떨어지고 카메라가 뒤로 더 빠지면, 보고 있던 것이 어두운 벽에 걸린 한 폭의 액자임을 알게 된다. 김경묵 은 또 한 번 우리의 시선을 시험하려는 걸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 이유는, 배경으로 흐르는 <인어 아가씨>란 노래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노래는 가사에서 직접 ‘슬픈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는데, 슬픈 사연이 특이하다.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 슬픈 게 아니라, 인어가 되었기에 슬프다는 거다. 달리 말해 인간으로서 사랑을 나눠야 하는데 인어라는 괴물로 변태했기에 슬프다는 거다. 노래가 끝나면 턴테이블 앞에서 울던 남자가 일어나 페트 병 안으로 자지를 밀어 넣고 오줌을 눈다. 기억이 맞는다면, 그는 김경묵의 영화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첫 번째 인물이다. 무심하던 이전 인물들과 달리, 그는 왜 슬픈 걸까. 자지가 있으므로 남자인 게 분명한데, 조금 지나 그는 여자로 분장한다. 털을 밀고 란제리를 착용하고 금빛 가발을 쓴다. 그리고 굵은 팔뚝에 환각제를 주사한 다음 투박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선다. 그가 몸을 애무하는 동안 거울 속 그의 몸과 가발은 탈색된다. 그의 슬픔은,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다. 그의 진짜 슬픔은, 여자가 되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거울 앞에 내보인 데서 기인한다. 거울은 말한다. 너는 괴물이라고. 그래서 남자는 괴롭다. 인간인 줄 알았던 자신이 괴물이라니. <인어 아가씨>의 노래가사는 <청계천의 개>가 ‘슬픈 이야기’라고 일러준다. 귀기가 충만한 허림의 목소리는 뱅글뱅글 돌아가는 턴테이블 위에서 ‘슬픈 이야기’라고 네 번씩이나 강조해서 노래한다. 그러므로 예정대로라면 < 청계천의 개 >는 여자가 되지 못해 결국 물속으로 몸을 던져 괴물을 완성하는 남자의 이야기로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스쳐지나가는 장면 중 하나를 주목해야 한다. ‘슬픈 이야기’라는 가사가 다섯 번째로 나올 찰나, 남자는 턴테이블에서 바늘을 들어올린다. 더 이상 듣기 싫다는 건지, 스스로 슬픈 이야기를 끝내겠다는 뜻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노래를 멈추는 건 남자의 손이다. 이후 <청계천의 개>는 처량한 노래를 멈춘 손과 정신을 물들인 환각제 사이에서 요동친다. 남자는 자기 몸을 제어하고 싶지만, 약물에 병든 그의 영혼은 자기 몸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와 남자,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고, 그 때마다 영화 또한 컬러와 흑백 사이로 순간 이동한다. 경계를 통과할 때마다 반드시 등장하는 건 거울 또는 (남자를 감시하는 경찰이 쓰고 있는) 검은 선글라스다. 거울과 선글라스에 자신의 상이 포착될 때면, 그는 남자와 여자 사이를 오가며 혼란을 겪는다. ‘내가 악몽을 꾸고 있는 건지,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내가 살아있는 건지 죽은 건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자는 혼란의 양극을 헤어나지 못한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부정해야 한다는 설정은 < 청계천의 개 >의 외형을 결정짓는다. 단 3개의 쇼트로 이루어진 < 얼굴없는 것들 >과 반대로, 자기 생각을 비현실적으로 여기게 된 남자의 이야기인 <청계천의 개>는 주어진 조건 내에서 해볼 수 있는 온갖 시도를 다 해본다. 도입부의 싸구려 뮤직비디오는 앞으로 다양하게 나올 속악한 이미지들의 맛보기에 해당한다. 디지털로 찍은 영상에 스크래치를 내고 사운드와 컬러를 제거해 흑백무성영화를 만들어보고, 통기타 가수를 현장에 불러다 뮤지컬 분위기도 내보고, 영상을 좌우로 마주 붙여 두 개의 자아라는 주제를 형상화하기도 한다(빤하지만 이 장면이 마음에 든다). 그 중 톰 칼린의 퀴어영화 <스운>의 도입부를 떠올리게 하는 공원 장면은 압권이다. 남자의 성기가 연상되는 인조대리석 의자 사이로 여자가 돌아다니고, 그녀를 중심으로 예쁜 얼굴의 남자들이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사라지는 장면은 웃지 않고 보기가 힘들다. 김경묵 은 그 장면 앞뒤로 순박하면서 저열한 뮤지컬 장면을 배치해 ‘B급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다. <청계천의 개>는 고급한 정서에 바탕을 둔 작품이 아니다. 물론 그것은 주어진 한계 때문이긴 하지만, 그 결과물은 남자가 통과하는 비현실적 상황 및 낯설고 일그러진 현실과 적절하게 조응한다. 혼란의 정점에서, 그녀(혹은 그)는 거울을 깨버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그)는 자신이 믿는 바를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혹은 꿈)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그)의 혼란은 더욱 가차 없이 증폭된다. 그녀(그)가 겪는 극도의 분열 상태는 파괴된 사운드와 이미지로 표현된다. 거리에서 만난 눈 먼 소년이 예언한 것 - 너는 될 수 없는 것을 찾아 헤매는 위험한 존재다 - 이 바로 이런 상황일까? 마침내 그녀(그)는 괴수에게 강간을 당한다. 아뿔싸, 김경묵 의 인물은 이번에도 파시즘적 폭력에 저항하면서도 매혹당하고 만다. 그녀(그)의 얼굴 위로 타락한 성녀의 고통스런 신음과 환희의 미소가 공존한다. 거울을 깬다고 해서 현실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깨어진 거울마저 그녀(그)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죽음의 충동에 굴복하고 말 것인가. 남자는 이제 결정해야 한다. 괴물이 인간이 되려면 진화를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각을 해야 하는 것일까. 지옥의 밤이 지나고 감시자도 사라진 아침, 지친 몸을 이끌고 청계천을 걷던 남자는 어디에선가 보았던 풍경과 마주한다. 인공폭포가 쏟아져 내리고 잔잔한 물결이 치는 그 곳. 그것은 그의 방 액자에 담긴 풍경 아니던가. 그 때, 남자는 그토록 갈망하던 반인반수의 인어가 바로 자신임을 자각한다. 문제는 거울이 아닌 자신이었던 게다. 전날, 남자는 맹인 소년에게 “보이는 것보다 내가 믿는 게 더 진실해요. 비록 그 믿음이 내가 만든 허상에 불과할지라도”라고 말했다. 그 믿음이 자각을 부른다. “넌 내가 될 수 없다”는 다른 자아의 폭압에 짓눌려 살던 남자는, 환상이나 그림이 아닌 비루한 청계천의 현실 앞에서 드디어 그 폭압을 뒤집고 그토록 갈망하던 네가 된다. 일원론과 이원론의 낡은 틀 따위는 비웃으며 그는 애초부터 자신이 괴물을 초월한 인간이었음을, 인어보다 훨씬 아름다운 존재였음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 청계천의 개 >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인어 아가씨>로 막을 연 <청계천의 개>가 허림의 또 다른 노래 <별 이야기>로 끝맺는 건 그래서다. 청승맞은 목소리로 <인어 아가씨>를 부른 허림은 방정맞을 정도로 밝은 톤으로 <별 이야기>를 부른다. ‘노래하며 우리는 행복 찾아 길을 떠나요’라고. 인어의 슬픔은 별의 행복으로 화한다. 작가는 자기 자신을 반영하고, 감독은 사회를 반영한다. 이 발칙한 감독은 <청계천의 개>를 통해 작가와 감독을 모두 꿈꾸었다. 그리고 일정 부분,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큰 부분을 성취했다. 어쨌거나 그가 동시대의 어떤 젊은 감독보다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자기 영화의 한 막을 열고 닫았다는 사실에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듯하다. 사족 : < 나와 인형놀이 >, < 내안의 평안 >, < 얼굴없는 것들 >, < 청계천의 개 >는 김경묵 영화의 첫 번째 막을 이룬다(<암코양이들>, <머리카락의 기억>, 는 보지 못했다). 괴물이 탄생했고, 괴물은 자신을 부여안았다. 언젠가 나는 김경묵이 두 번째 막의 첫 번째 장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 괴물의 첫걸음을 영화화하지 않을까, 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했다. 그 작품 < 줄탁동시 >를 얼마 전에 보았다. 괴물은 인간이 되어 우리 사이에서 살고 있었다. 서툰 걸음으로 말이다. 이제 나는 그가 그 인간의 이야기로 자기 영화의 2막을 채울 것임을 확신한다. 김경묵의 인간이 또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날지, 나는 벌써부터 궁금해 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