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데부
- 감독
- 마야 와이머
사진: " 플로우 ", IMDb 한국영화로는 두 편을 골랐다. 이란희 의 < 3학년 2학기 >(2024)는 < 다음 소희 >(정주리, 2022)와 겹치는 영역을 다루지만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르다. 멜로드라마는 최소화되었고 아마도 지속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차분한 일상성이 들어온다. 무엇보다 이처럼 일상의 노동과 그 환경에 이만큼 깊은 관심을 가지는 영화는 오래간만이다. 윤가은 의 < 세계의 주인 >(2025)을 통해 자주 다뤄진 특정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단호하고 명쾌한 방식은 놀랍고 새로우며 아름답다. < 씨너스: 죄인들 >(라이언 쿠글러, 2025)과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마스 앤더슨, 2025)는 올해의 할리우드 영화들이다. 지금 이 시대에 고전적인 할리우드의 재료와 스타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할까. < 내 말 좀 들어줘 >(마이크 리, 2024)는 마이크 리의 방법론이 아직도 새롭고 강렬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올해는 프랑스 영화가 두 편인데 < 여름의 랑데부 >(발렌틴 카디크, 2025)에서 우린 에릭 로메르에서 시작된 전통이 로메르의 영역을 넘어 발전하고 확장되는 과정을 보게 된다. < 미세리코르디아 >(알랭 기로디, 2024)는 아마도 올해의 코미디인 것 같다. 사악하게 어처구니없지만 그러면서도 연민과 사랑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그리고 <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파얄 카파디아, 2024)이 그려보이는 뭄바이는 영화가 도시를 그리는 가장 완벽한 도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해 보인다. 애니메이션을 두 개 골랐다. 너무 처참해서 오히려 우스꽝스럽고, 너무 작정하고 못생겨서 오히려 사랑스러운 < 달팽이의 회고록 >(아담 엘리어트, 2024)과 바로 오늘 다룰 < 플로우 >(긴츠 질발로디스, 2024)다. 사진: " 플로우 ", 네이버 영화 <플로우>를 고른 데에는 개인적 이유가 있다. 작년에 나는 같이 살던 고양이 한 마리를 떠나보냈다. 사적인 이야기는 될 수 있는 한 하지 않으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내 고양이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그 때문에 <플로우>를 처음 보았을 때 내 개인적인 경험은 영화의 감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영화가 드림웍스의 < 장화 신은 고양이 >(크리스 밀러, 2011)처럼 의인화된 고양이를 다룬 작품이라면 그만큼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든 긴츠 질발로디스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인 고양이를 그렸느냐. 그러지도 않았다. 이 영화의 이름 없는 고양이는 그사이의 가느다란 길을 걷는다. 담벼락 위를 산책하는 진짜 고양이처럼. 질발로디스가 창조한 세계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곳이다.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들이 만든 것들은 크게 부서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고양이가 사는 집에는 그곳에 살았던 인간들이 만든 것 같은 고양이 조각상과 스케치가 있다. 마치 마리 셀레스트호의 사라진 선원들처럼 인간들은 그냥 이유도 없이 갑자기 존재하기를 멈춘 것 같다. 등장하는 동물들도 이상하다. 고양이와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같이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캐피바라, 여우원숭이, 뱀잡이수리가 같은 공간에 있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을 우리가 사는 지구와 비슷하지만 다른 곳이라고 퉁 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의 물리적 실제성을 계속 의심하게 된다. 이곳은 실재하는 공간보다는 애묘가의 몽상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곳은 인터넷 사람들이 고양이별이라고 부르는 곳인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감독의 개인 경험을 의심하게 되는데, 정작 감독은 개를 기른다. 하지만 고양이와 살았던 경험이 있고 그 경험이 영화의 정서적 흐름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사진: " 플로우 ", 네이버 영화 이야기는 단순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엔 대사가 없기 때문에. 텅 빈 집에 살던 고양이가 갑자기 홍수와 마주친다. 고양이는 물을 피해 달아나고 그러다가 빈 보트 위에 올라탄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다른 동물들이 한 마리씩 보트 위에 오른다.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고 타고난 습성도 다르다. 하지만 살아남으려면 같이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동물들이 나오는 고전적인 틀의 동화이다. 영화는 동물을 의인화한 수많은 동화에서 논리와 구조를 가져오고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모두 지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키를 잡고 보트를 조종하고 윤리적 딜레마를 경험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먹이사슬이 교묘하게 탈색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잡아먹히는 동물들은 물고기밖에 없고 그들에겐 포유류나 조류의 생기가 제거되어 있다. 이 영화가 그리는 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이 정도면 너무 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영화의 묘사는 거기에 맞추어져 있지 않다. 여전히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수상쩍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자연 상태에서 캐피바라나 뱀잡이수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고양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럴싸하다. 동작이나 행동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표정이 그렇다. 이렇게 정교하게 고양이 표정을 살린 애니메이션 영화를 전에 본 적이 있나 싶다. 스크린 위에서 이런 이야기와 이런 묘사와 결합되면 관객들은 아주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사진: "Peullou( 좌 , 우 )", IMDb 홍수 이야기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노아의 방주를 다룬 성서 이야기,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 하지만 이 두 주제는 이 영화와 완전히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구약의 홍수는 인간에 대한 신의 처벌이다. 하지만 홍수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인간은 사라지고 없다.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로 보더라도 아귀가 맞지 않는데, 이 세계는 온난화를 촉진했을 기계 문명이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이 목가적 폐허와 환경 문제를 연결해 해석을 시도하면 여러모로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 세계에서 그냥 일상일까? 이 홍수가 첫 번째가 아니라는 암시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영화 속 동물들은 주기적인 홍수를 경험하며 살아온 것 같지도 않다. 이 영화의 월드 빌딩을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어느 단계에서 이상해진다. 결국 모든 게 애묘가의 꿈이라는 게 가장 그럴싸한 답이다. 영화를 연달아 보다 보면 이 세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찾으려는 모든 시도가 그리 큰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선 이 세계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어떻게 우리가 아름다움에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둘째로, 이 영화를 이루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연민, 동정, 이해 그리고 이에 바탕을 둔 친절함과 연대는 세상의 이해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친절하기 위해 굳이 세계의 숨은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주의 명령 없이 선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사진: " Peullou ", IMDb 듀나(영화평론가) l SF 작가이고 영화 컬럼니스트다. 영화 관련 저서로는 『가능한 꿈의 공간들』(2015),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2022),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2019), 『남자 주인공에겐 없다』(2020) 등이 있다.
실벵 쇼메 감독의 2003년 장편 애니메이션 데뷔작 < 벨빌의 세쌍둥이 >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매 장면이 기괴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실벵 쇼메를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감독 반열에 올려놓은 이 작품이 올가을 13년 만에 국내 정식 개봉했다. 혁신적이라 평가받았던 연출은 지금 봐도 탁월하다. 무엇보다도 애니메이션 < 일루셔니스트 >와 실사영화 <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 >으로 작품 세계가 확고해진 실벵 쇼메의 13년 전이 거기 있다. 2D 애니메이션의 미학을 추구한 젊은 애니메이터의 초심, 씨네필로서의 취향이 한껏 녹아 있다. 이야기는 파리 외곽에 사는 노부인 마담 수자와 외로운 어린 손자 챔피언이 ‘벨빌의 세쌍둥이’가 나오는 TV 쇼프로그램을 보면서 시작된다. TV를 봐도, 강아지를 안겨줘도, 통 웃지 않는 소년 챔피언. 실은 자전거에 관심이 있다. 마담 수자가 자전거를 선물하자 신나게 자전거를 타던 챔피언은 세월이 흘러 사이클 선수로 성장한다. 하지만 사이클 대회 ‘투르 드 프랑스’에 참여했다가 대회 도중 마피아들에게 납치당한다. 곧 반려견 브루노와 함께 손자를 찾아 나선 마담 수자. 손자를 납치한 마피아들의 배를 쫓아 낯선 도시 ‘벨빌’에 도착하고, ‘왕년의 스타’ 세쌍둥이를 우연히 만난 후 함께 챔피언 구출 작전에 돌입한다. < 벨빌의 세쌍둥이 >는 그림이 주는 힘이 압도적이다.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 니콜라 드 크레시의 영향을 받은 그래픽 스타일의 배경부터 캐리커처 느낌으로 그려진 캐릭터들까지 개성이 뚜렷하다. 게다가 모든 캐릭터들은 대사가 거의 없다. 그 대신 캐릭터마다 각자 독특한 동작으로 성격을 드러내고 감정을 전달한다. 마치 컬러풀한 무성영화를 보는 기분인데, 실제로 자크 타티, 버스터 키튼, 찰리 채플린을 사랑하는 ‘씨네필’ 실벵 쇼메가 의도한 바다. 그로 인해 이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사람의 일상과 움직임, 사물의 쓰임새를 예민하게 관찰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애니메이터들이 캐릭터의 액션을 만드는 데 더 많은 시간 집중할 수 있도록(!) 자동차, 자전거, 마피아들이 타는 배 등등 ‘탈 것’은 3D로 작업했다. < 벨빌의 세쌍둥이 >는 그렇게 캐릭터의 움직임과 이미지 자체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면서 사운드를 절묘하게 조화시킨다. 대표적인 장면이 마담 수자와 세쌍둥이가 ‘벨빌’의 다리 밑에서 처음 만나 연주를 하는 장면, 그리고 세쌍둥이의 레스토랑 공연 장면이다. 마담 수자가 세쌍둥이와 우연히 만나서 함께 ‘벨빌 랑데부’를 연주하는 첫 장면은 그야말로 기발하고 유쾌하다. 이 장면과 중반 이후 나오는 세쌍둥이의 레스토랑 공연 장면은 실벵 쇼메 감독이 ‘스톰프’ 공연에서 영감을 얻었다. 레스토랑 공연에서는 세쌍둥이가 신문을 접었다 펴고, 냉장고 안 받침대를 튕기고, 진공청소기로 소리를 내서 음악을 만든다. 여기에 마담 수자가 자전거 휠을 실로폰처럼 두드려 환상적인 합주를 완성한다. 그런데 이 떠들썩한 순간, 마담 수자는 매서운 눈초리로 마피아 보스가 읽고 있던 신문 기사를 통해 그들의 음모를 알아낸다. 몇 개의 컷으로 짧게 표현되지만 애니메이션다운 편집 효과를 확실히 보여준다. 일상적인 장면들도 지나칠 수 없다. 마담 수자가 훌쩍 커버린 챔피언과 극한 훈련을 하고 돌아와서 저녁을 먹는 장면은 대사 없이 오직 사운드만으로 관객을 몰입시킨다. 창문 밖으로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 반려견 브루노가 짖는 소리, 축음기의 음악 소리 등으로 집안의 공기와 일상의 리듬을 전달한다. 마담 수자가 진공청소기로 챔피언의 다리를, 잔디 깎기로 챔피언의 등을 자연스레 마사지해주는 광경은 또 어떤가. 자크 타티와 버스터 키튼, 찰리 채플린이 봤다면 흐뭇하게 웃어줬을 것 같다.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세쌍둥이 자매가 자기 전 침대에 앉아서 TV로 실사영화(자크 타티 영화 < 축제 >의 한 장면)를 보며 깔깔대는 광경도 기막히다. 영화 후반 마피아들과의 엄청난 추격전까지, 말없이 많은 것을 말하는 이 기묘한 유머 감각은 결코 흔한 것이 아니다. 공간 디자인도 눈여겨 볼만하다. 가장 눈에 띄는 공간은 역시 ‘벨빌’이다. 1960년대 캐나다의 몬트리올과 퀘백, 미국 뉴욕의 건축 양식을 혼합해 디자인했다. 2m 길이의 종이에 애니메이터들이 직접 초고층 빌딩들을 그린 후 스캔을 해서 작업한 도시 전경이 압권이다. 뚱뚱한 자유의 여신상이 빅 버거를 들고 있고, 거리엔 온통 비만 체형의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벨빌’은 마담 수자가 살아온 파리의 동네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실벵 쇼메는 자신이 경험했던 미국과 프랑스의 문화적 차이를 ‘벨빌’을 통해 다양하게 풍자한다. 그곳에서 유독 호리호리하게 나이든 세쌍둥이는 자신들처럼 대도시의 외곽에서 수수하게 살아온 마담 수자와 의기투합하는데, 이들을 둘러싼 묘한 대구와 공통점, 아이러니한 설정은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한다. 실벵 쇼메는 자신이 사랑해온 문화적 유산, 어린 시절 파리 외곽에서 살았던 추억, 애니메이터가 된 후 영국과 캐나다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한편의 애니메이션에 담았다. 유쾌하고 멜랑꼴리한 스릴러 < 벨빌의 세쌍둥이 >는 오랫동안 아끼고 추구해온 많은 것들이 일상에 뿌리를 둔 상상력을 통해 하나가 된 작품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이야말로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이 세상을 들여다보는 좋은 창이 되는지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