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디컬
- 감독
- 크리스토퍼 잘라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유지니오 다베즈, 다니엘 하다드, 제니퍼 트레호, 미아 페르난다 솔리스, 다닐로 과르디올라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영화를 좋아해 자주 극장을 찾는 편이었지만, 유난히 집중적으로 영화를 보았던 시기가 있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파리에서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시절이다. 그때 나는 북역(北驛) 근처의 작은 스튜디오에 살았다. 아랍인, 인도인, 중국인, 아프리카인 등 여러 지역에서 흘러온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거리는 낡고 허름했지만, 이상한 활력과 혼돈으로 가득했다. 향신료 냄새가 뒤섞여 풍기는 공기에는 흥분과 불안이 실려 있었고, 길을 지날 때 들려오던 언어들은 바벨탑에서나 흘러나왔을 법한 다성(多聲)의 소음이었다. 그 자체로 ‘영화적’이던 이 온갖 감각들이, 마치 모래시계의 바닥에 쌓여가는 부스러진 시간처럼, 서서히 나의 내부에 침전되어 갔다. 여가라 부를 만한 것이 없던 일상에 유일한 출구가 있었는데 그것이 극장이었다. 파리는 시네마의 도시였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영화관이 서너 개 있었고, 생미셸의 낡은 옛날 극장들에서는 고전영화가 끊임없이 돌아갔다. 일 년 내내 열리던 회고전들, 퐁피두센터의 특별 상영들, 한국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작품들, 한국 감독들의 전작(全作), 영화 교과서에서 이름만 보았던 옛날 작품들을 관람하는 기회를 누렸다. 논문을 쓰던 스튜디오와 극장은 삶의 두 극점(極點)이었다. 외로움, 침잠, 우울의 극을 이루는 스튜디오. 그리고 놀라운 이미지들이 주는 충격, 활력, 기쁨의 극을 이루는 극장. 나는 이 두 지점 사이를 오가던 진자와도 같았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일은 특별한 외출이 아니라 습관화된 생활 방식의 하나였다. 영화를 연구하거나 전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내가 몰두한 공부는 이미지의 문제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나는 벤야민의 저술들을 탐구하고 있었고,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그의 이미지 철학과 (수업에서 다뤄지던) 아비 바부르크의 문화학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미지의 물질성, 역사성, 능동성, 생명력에 대한 감수성을 이론적 사유의 동력으로 전환한 사람들이다. 특히 바부르크와 디디-위베르만은 이미지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의 길을 연다. 바부르크가 바라본 이미지는 태어나고 변이하며,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생명 현상이었다. 이미지에 스며 있는 이 시간적 리듬을 그는 ‘잔존(Nachleben)’이라 불렀다. 이미지도 생명체처럼 고통을 겪고, 변형되며, 살아 나간다. 파토스(pathos), 곧 겪음, 시련, 고통이라는 문제의식이 바부르크의 사유를 관통한다. 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지진파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지진계처럼, 그것이 행사하는 힘을 겪어내는 일이다. 바부르크가 “파토스적 패러다임” [1] 을 실험한 이론가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디-위베르만은 바부르크가 던진 주제들을 한층 더 밀고 나가, 로고스를 중심으로 조직된 예술사 전통을 해체하고, 이를 징후학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시각 경험 고유의 현상학적 특성, 다시 말해 ‘본다(voir)’는 행위가 언제나 ‘응시당한다(regarder)’는 역관계와 함께 작동한다는 사실이었다. [2] 그는, 주체가 자신이 보는 것에 의해 찔리고 상처 입는 촉각적 경험, 그리고 이미지가 주체 내부로 스며들어 탈주체적 변화를 일으키는 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에게 이미지란 유령이자 파토스이며, 동시에 징후다. 이는 이미지를 의미나 사실, 표상으로 고정하고 물화하여 상징계에 예속시키려는 지적 경향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 당시에는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했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니, 내가 파리에서 천착하던 이미지 철학은 (지금 나에게 익숙한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다음의 세 가지 항목으로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째, 이미지는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와 동등한 위상을 갖는 생명이며 힘이며 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존재론). 둘째, 인간이 이미지를 선험적 인식의 틀에 포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가 인간에게 침투하여 그를 흔들고 변화시키는 행위자라는 점(정동론). 셋째, 이미지를 보는 인간은 이러한 실효적 이미지에 의해 감응되어 변형되는 감수자라는 점이다(페이션시의 이론). [3] 『세계에 대한 믿음』 중 소개된 작품들 (상) < 부운 >(나루세 미키오, 1955), < 황혼의 빛 >(아키 카우리스마키, 2006) 중 (사진: “ Ukigumo ”, “ Laitakaupungin valot ”, IMDb) (하)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나의 해방일지 >(김석윤, 2022) 중 (사진: “ 헤어질 결심 ”, 네이버영화 / “ 나의 해방일지 ”, JTBC) 서설이 길어진 이유는, 작년 겨울에 출판된 『세계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쓰이게 되었는지를 (청탁을 받은 후에) 곰곰이 떠올리다 보니 그 기원이 20여 년 전 파리 시절의 이미지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집필의 실제 시간대만 놓고 말하자면, 저 책은 2021년에서 2024년 사이에 쓴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서울리뷰오브북스》, 『안과밖』, 《뉴래디컬리뷰》 같은 지면에 발표한 영화평들을 책으로 묶었고, 거기서 다룬 작가들은 나루세 미키오, 타르코프스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지아장커, 코엔 형제, 아키 카우리스마키, 켈리 레이카트, 박찬욱 , 박해영 등이다. 한눈에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듯, 저들을 묶는 단일한 주제나 특정 경향, 시대나 지역적 동질성 같은 것은 없다. 아마도 가장 느슨한 공통점은 내가 저들의 작품에 깊게 감응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책을 쓰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시네필’이나 ‘비평가’가 아니라 영화를 겪는다는 의미의 ‘시네-페이션트(cine-patient)’라고 불렀다. 시네-페이션트는 이미지를 겪는 자다. 영화에 의해서 변형되는 자. 영화를 바이러스처럼 삼켜 그것과 함께 하나의 어셈블리지로 생성되는 숙주다. 최근에 내가 제안한 한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봄의 겪음(suffering seeing)”의 주체라고 부를 수도 있다. [4] 이런 존재는 도대체 영화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쓸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이 책의 저변에 흐른다. 나는 영화를 정신분석이나 기호학, 또는 사회학이나 매체이론으로 ‘분석’하는 대신, 영화가 가져온 감각적, 감정적, 지적 변용을 ‘보고’하는 방식을 선택한 셈이다. 이는 책에서 자주 인용된 들뢰즈의 방식이기도 하다. 영화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동맹자로 만드는 것. 감독을 철학자로, 사상가로, (또는 나의 경우에는 사회학자로) 대우하는 것. 영화에 ‘대한’ 글이라기보다는 영화에 ‘의해’ 감응되어 쓰인 글. 이것이 내가 책에서 시도했던 비평의 한 방식이라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앞에서 언급한 디디-위베르만과 바부르크의 ‘파토스적 패러다임’에 닿아있다. 시네-페이션트는 영화가 눈동자에 던지는 세계의 이미지들을 겪고, 견디고, 앓는다. 나는 책에서 여러 차례 영화의 힘의 바탕에 이런 수동성이 자리 잡고 있다고 썼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봄을 겪는다.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태를 겪는다. 극장에서, 우리의 눈동자는 그 안으로 세계가 침투하는 열린 상처, 또는 벌어진 구멍이 된다. 상처가 상처를 통해 상처를 바라본다. 기쁨이 기쁨을 통해 기쁨을 바라본다.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볼 때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런 체험의 파편들이 책 곳곳에 흩어져 있다. < 스토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79) 중 (사진: “ Stalker “, IMDb) 아쉽게도, 이제 영화를 이런 방식으로 살아내는 이들을 만나는 일은 매우 드물어졌다. 우리는 이미 포스트-시네마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영화의 황혼이며, 극장의 황혼이며, 영화를 보러 가던 마음의 황혼이고, 영화를 보고 난 뒤 스며오던 그 막막하고 어둡고 따스한 기분의 황혼이며, 그 기분을 나누는 대화와 관계의 황혼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슬프지는 않다. 쇠퇴해가는 매체만이 마지막 순간에 방출하는 구원의 힘(벤야민)을 믿기 때문일까? [5] 『세계에 대한 믿음』은 영화를 통해 인간과 세계와 맺는 관계를 고민해 온 한 시네-페이션트의 기록이다. 이미지가 우리를 통과하는 겪음의 시간이 어떻게 사유와 행위로 전환될 수 있을지를 묻는 소박한 실험. 이 책이 독자들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이미지를 겪고 말할 수 있는 영감을 제공하기를 희망한다. 시네-페이션트가 또 다른 시네-페이션트에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당신은 무엇을 보는 것을 겪었는가? *** [1]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잔존하는 이미지』, 김병선 옮김, 새물결, 2022, 270쪽. [2] Georges Didi-Huberman, 1992. Ce que nous voyons, ce qui nous regarde , Paris. Minuit, 1992. [3] 페이션시는 행위능력(agency)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감수자의 위치, 경험, 힘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그것은 무언가를 하는 힘이 아니라 겪는 힘이며, 겪음을 통해서 형성되는 잠재력이기도 하다. [4] 김홍중, “시대횡단의 징후학1.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중심으로”, 『사회와이론』 52, 2025. [5] 로절린드 크라우스, 『북해에서의 항해』, 김지훈 옮김, 현실문화A, 2017, 87쪽. 김홍중(사회학자) l 사회이론과 문학, 예술, 문화사회학을 전공한다. 그간 인간의 심적 활동이 어떻게 사회를 형성,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심리사회 연구를 수행해 왔다. 최근에는 21세기 생태파국에 대한 대안적 사회이론과 새로운 문화적 실천들을 탐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마음의 사회학』(2009), 『사회학적 파상력』(2016), 『은둔기계』(2020),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2024), 『가까스로-있음: 브뤼노 라투르와 파국의 존재론』(2025)이 있다.
올해 4월 12일, 한때 오시마 나기사의 진정한 라이벌 가운데 하나였고 일본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이기도 한 마츠모토 토시오(松本俊夫)가 세상을 떠났다. <장미의 행렬 薔薇の葬列>(1969)과 <수라 修羅>(1971)와 같은 마츠모토의 장편극영화는 국내의 시네필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2005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영화와 혁명 특별전’(2005.7.27~8.15), 한중일 아티스트들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 신시각(新視角)의 서울 전시행사로 2009년에 열린 ‘LINK!! 미디어아트전’(2009.9.4~9.13), 그리고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플랫폼 2010: 프로젝티드 이미지’(2010.11.3~11.19) 등을 통해 그의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 작업이 꾸준히 소개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오시마의 『전후영화: 파괴와 창조』와 같은 해(1963년)에 출간되어 새로운 영화를 모색하던 1960년대 일본의 젊은 영화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알려진 마츠모토의 평론집 『영상의 발견: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도 2004년에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된 바 있다. 경력 초기의 그가 영화와 관련해 쓴 주요한 글 대부분이 수록되어 있는 『영상의 발견』이 번역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츠모토 토시오의 영상작업(특히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이 그가 개진한 이론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일본의 경우, 사카모토 히로후미가 편집 책임을 맡은 총 네 권짜리 마츠모토 토시오 저작집 출간이 2016년 2월부터 시작되었는데, 현재까지는 1953년부터 1965년까지 마츠모토가 쓴 글들을 모은 제1권만이 나와 있다.) 이론적 맥락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가 없이 마츠모토의 영상작업을 보는 일이 무의미하다거나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서만 새로운 영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스스로를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영상작가 - 마츠모토는 자신을 ‘에이조사카’(映像作家)라 칭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하나다. - 로 규정하게 된 것은 왜인지 등을 살펴보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그의 이론과 실천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거리 혹은 ‘괴리’가 있다. 그런데 그의 영상작업과 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생하고 유효한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거리 혹은 ‘괴리’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거리 혹은 ‘괴리’는 작가로서의 그가 개인적 능력의 부족이나 한계로 인해 극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영상의 근본문제에 집요하게 매달린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영상의 발견: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 표지 간략하게나마 『영상의 발견』에서 개진되고 있는 마츠모토의 영화론을 살펴보자. 그에게 있어서 영상의 근본문제란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에 이르는 모든 것의 총합으로서 하나의 사물”(「네오다큐멘터리즘이란 무엇인가」)이 된 영상, 바꿔 말하면 ‘사물로서의 영상’을 출현시키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물’ 혹은 ‘모노’(もの)란 과연 무엇인가? 영어로는 통상 ‘thing’으로 번역되곤 하는 이 개념은 『영상의 발견』에 수록된 마츠모토의 글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사물이란 본디 직접적으로 지각될 수 없는 것이지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대상들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활동을 통해 그리고 오직 그러한 활동을 통해서만 인지되는 실재(reality)라고 할 수 있다. 마츠모토 자신은 이처럼 집요한 응시를 눈을 감는다고 해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사물과 맞닥뜨리게 하는 ‘잔혹을 응시하는 눈’(残酷を見つめる眼)에 빗대고 있다(「잔혹을 응시하는 눈: 예술적 부정(否定)에 있어서 주체의 위치에 관하여」). 일견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들을 집요하게 응시하다 보면 대상들이 낯설게 보이고 사물이 출현하는 순간이 ‘우연히’ 발생하기도 하는데, 카메라가 이러한 순간과 대면할 때 생성되는 것이 영상이고 다큐멘터리의 이념은 이러한 영상을 부단히 발견해 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짐작했겠지만, 마츠모토의 영상 개념은 기술적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mechanically produced image’, ‘projected image’ 혹은 ‘video’ 같은 영어식 표현으로는 그 뜻이 대단히 불충분하게만 전달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견해는 마츠모토만의 고유한 것이라기보다는, 2차 대전 이후 일본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하나다 기요테루의 저서 『아방가르드 예술』(1954), 러시아 형식주의와 빅토르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 개념, ‘두려운 낯설음’(unheimlich)에 대한 프로이트의 논고, 그리고 무엇보다 초현실주의 운동 등에서 얻은 아이디어가 다큐멘터리 방법론과 결합된 것임은 익히 알려져 있으며 마츠모토 스스로도 숨김없이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초현실주의 작가 루이 아라공의 다음과 같은 글을 위에서 약술한 마츠모토의 사물론과 비교해 보라. “나는 어떤 장소들, 어떤 광경들이 내게 행사하는 커다란 힘을 느꼈는데 이 매혹의 원리는 알지 못한 채로 그러했다. 내게 있어 일상의 몇몇 대상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러한 수수께끼의 일부를 간직하고 있었고, 나를 그러한 수수께끼 속으로 몰아넣었다. 나는 어떻게 그리되는지(méthode)는 모르지만 어떻게 하는지(pratique)는 알고 있었던 이 도취상태를 사랑했다. [……] 내가 그것을 보는 방식에 따라 하나의 대상은 변형되었는데, 그것은 알레고리적 외양을 띠는 것도 아니었고 상징적 특성을 띠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관념을 표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바로 그 관념 자체였다.”(루이 아라공, 『파리의 농부』) 아라공이 자신만의 보기의 방식을 통해 대면한 ‘관념 자체’라는 것이 마츠모토의 사물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일상 언어의 용법에서 사물과 관념이 종종 대립되는 의미를 띤다는 점에 집착하지 않고, 이러한 용어가 아라공과 마츠모토 각각의 글의 문맥에서 기능하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마츠모토가 루이스 부뉴엘의 < 안달루시아의 개 >(1929)나 제르맹 뒬락의 <조개와 성직자>(1928) 같은 영화들은 물론이고 초현실주의 운동 자체에 매력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초현실주의를 비롯한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종종 내부세계와 외부세계의 긴장보다는 내부세계 자체에 비합리적으로 몰두(혹은 도취)한다는 데 불편함을 느꼈다. (바꿔 말하자면,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실천에 내재한 응시의 방법론은 충분하다 여겨질 정도로까지는 잔혹하지 않았다.) 여기서 내부세계란 인간의 무의식에서부터 비가시적인 사회구조까지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용어라고 이해해도 좋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가시적 내부세계에 대한 마츠모토의 관심은 1960년대에는 전자로부터 후자로 이행해 가는 경향을 보였고, 멀티프로젝션 방식을 실험한 확장영화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つぶれかかった右眼のために >(1968)와 그의 장편 데뷔작 <장미의 행렬>은 후자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에 제작된 작품이다.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의 프레임들 마츠모토는 ‘사물과의 대결’(ものとの対決)이란 “응시하는 사람의 내부에 꿈틀거리는 비합리를 그 외부의 비합리와 깊이 관련짓는 것”(「영화예술의 현대적 관점」)이라고 보았지만, 내부와 외부를 관련짓는 노력 자체는 그 둘의 긴장에 항상 예민하게 촉각을 세우고 있는 합리적 주체의 의식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를 끊임없이 주체적으로 관련시키려고 하는 엄격함을 결여하고 있는 것”(「전위기록영화론」)이었다. 외부세계와 내부세계라는 구분을 도입하는 것이나 이러한 구분에 바탕을 두고 다큐멘터리의 의의를 찾으려 하는 것은 하나다 기요테루의 논변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지적되곤 한다. 본격적으로 영화제작에 뛰어들기 전인 1957년, 마츠모토는 오시마 나기사, 요시다 기주, 하니 스스무 등 (조만간 일본영화계에 새로운 기운을 몰고 올) 젊은 영화인들이 멤버로 있던 스터디 그룹 ‘영화와 비평 모임’(映画と批評の会)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그룹에서 발간한 잡지 『영화비평』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는데, 이 모임은 하나다가 만든 ‘밤의 모임’(夜の会)을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고 한다. 하나다의 주장 가운데 일부를 마츠모토의 그것과 비교하며 음미해 보자. “새삼스레 밝힐 필요도 없이, 내부세계의 구체적인 것은 외부세계의 구체적인 것의 반영에 지나지 않으며, 외부세계의 사물 자체와 대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영 내부세계의 무의식적인 것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하나다 기요테루, 「기계와 장미」) “감춰진 세계라는 것을 단순히 마음 내부의 문제에 한정된 것으로서 이해한다면 그것은 일면적이며 차라리 전도된 것이다. 왜냐하면 내부의 감춰진 왜곡이란 최종적으로는 모두 외부의 감춰진 왜곡에 의해 규정되며 그것을 반영한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유물론적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내부라는 것은 외부의 연장이며 그 둘 사이를 절대적으로 구별 짓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마츠모토 토시오, 「감춰진 세계의 기록: 다큐멘터리에 있어서 상상력의 문제」) 겨냥하는 것은 부조리한 ‘감춰진 세계’(隠された世界)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시적이고 외부적인 것을 통해 의식적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큐멘터리란 이러한 가시성에 천착하는 ‘장르’로서 이해된다. 하지만 마츠모토의 눈에 종래의 다큐멘터리는 내부세계와의 관련을 상실한 채 소박하게 외부세계에 밀착하는 ‘자연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것처럼 비쳤다. 그리하여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지양한 것과 마찬가지로 종래의 다큐멘터리를 지양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때 그에게 영감을 제공한 것이 알랭 레네의 단편 <게르니카>(1950)이다. 표면적으로는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대한 다큐멘터리이지만, 피카소의 그림 전체를 한눈에 보여주는 일 없이 그림 자체를 파편화하고 낯설게 보이게 함으로써 오히려 레네가 본 어떤 ‘비전’ 자체를 형상화하고 있는 듯한 이 영화에 마츠모토는 깊이 매혹되었다. 피카소가 회화적 평면의 합리성을 의식적으로 해체해 버리는 작업을 통해 전쟁이라는 부조리에 상응하는 사물로서의 회화를 출현시켰다면, 레네는 어떤 정합적인 영화적 공간도 구성하지 못하는 몽타주를 용의주도하게 구사함으로써 피카소의 회화를 통해 환기되는 세계의 부조리에 상응하는 사물로서의 영화를 출현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레네의 영화에서 마츠모토는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를 이중적으로 지양하는 새로운 리얼리즘, 즉 ‘전위기록영화’ 혹은 ‘네오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보았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쓰인 글이 1958년 5월 『기록영화』지에 발표된 「전위기록영화의 방법에 대하여」이다. 오시마 나기사가 “처음 읽었을 때 느낀 충격을 잊을 수 없다”고 토로한 바도 있는 이 글은 ‘전위기록영화론’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영상의 발견』에 수록되었다. (이 글을 읽다 보면 < 히로시마 내 사랑 >(1959)이 나오기도 전에 이 영화의 방법론을 예견하는 듯한 어조로 알랭 레네라는 작가를 ‘발견’하고 있는 ‘비평가’ 마츠모토의 혜안에 놀라게 된다.) 잔혹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눈에 대한 강조는 이미 이 글에서 분명히 표명되고 있는데, 가령 레네는 “사드의 눈으로 상황을 응시할 수 있는 많지 않은 작가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든가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는 애매한 인간성 따위를 한번 철저히 추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주장할 때 그러하다. 마츠모토가 그의 전위기록영화 방법론을 레네의 선례를 따라 충실히 적용해 본 사례 가운데 하나는 TBS 방송국의 의뢰를 받아 만든 단편 <돌의 노래 石の詩>(1963)이다. 이 영화는 어니스트 사토가 찍은 사진들을 부분적으로 재촬영한 이미지들만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마츠모토가 그의 전위기록영화 혹은 네오다큐멘터리 방법론을 가장 래디컬하게 밀고 나간 것은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에서다. 이것은 1968년 4월, 소게츠아트센터(草月ア―トセンタ―)에서 ‘무언가 말해줘, 지금, 찾고 있어’(なにかいってくれ、いま、さがす)라는 표어 아래 5일간 열린 ‘EXPOSE 1968’ 행사에서 첫 공개된, 3대의 16mm 영사기를 사용한 멀티프로젝션 작품이다. 이 작품이 공개되기 불과 두 달 전 벌어진 김희로 사건 - 재일한국인 김희로가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자신을 모욕한 야쿠자들을 살해하고 이후 스마타쿄의 후지미 여관에서 투숙객들을 인질로 삼은 뒤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고발하며 경찰과 대치한 사건으로 김영빈 감독이 < 김의 전쟁 >(1992)으로 영화화한 바 있다 - 에 관한 텔레비전 뉴스화면과 보도사진을 비롯해 신주쿠역에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예술가들과 구경꾼들의 모습, 당대의 게이 문화를 담은 사이키델릭한 영상, 거리에서의 데모 광경, 오토바이 및 자동차 경주를 촬영한 기록영상, 각종 광고영상과 사진과 포스터, ‘준비!’(用意)나 ‘스타트!’(スタ―ト) 같은 문자들과 화살표나 물음표 같은 기호들이 언뜻 보기엔 두서없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마츠모토가 작성한 ‘그래프콘티’를 보면 멀티프로젝션에 사용된 3벌의 프린트 각각이 대단히 꼼꼼한 계획에 따라 제작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의 그래프콘티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는 후루하타 유리코 같은 논자가 지적하고 있듯 1960년대 일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화두 가운데 하나였던 당대의 ‘액추얼리티’(アクチュアリティ―)를 포착하는 데는 분명 성공하고 있다. 이 작품을 보다 보면 당대 일본 사회를 감싸고 있던 저널리즘적 기호들이 한꺼번에 끓어 넘치는 용광로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떠오르는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액추얼리티란 것이 과연 영상의 사물성과 곧바로 등치 될 수 있는 것일까?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의 힘이란 어쩌면 마츠모토가 그토록 강조했던 응시의 잔혹함과 집요함을 보기의 현장감과 기민함으로 대체함으로써 얻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일상성과 응시」에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에 대해 숙고하면서 이 영화들에서는 “대상과 주체의 관계가 목격하는 시선에 의해 결합”되어 있음을 간파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 전화의 저편 > 같은 영화에서는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목격하는 시선 [……] 응시하는 것 자체가 영상화”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영상 그 자체에 의해 대상이 주체화되고 또한 주체가 객체화되는 과정의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외부와 내부의 관계를 사물을 통해 결합시킨다는 「영화예술의 현대적 관점」의 논지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츠모토에게 있어서 영상, 응시, 사물이라는 개념이 종종 상호교환적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을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와 관련해 생각해보자. 대상들(당대 일본과 관련된 시청각적 기호들)이 주체화되는 것은 영상 그 자체를 통해서라기보다는 시선 없이 객체화된 주체의 의식, 즉 구성(그래프콘티)을 통해서이고, 게다가 대상들은 주체화되기 무섭게 영상의 액추얼리티가 선사하는 사이키델릭한 산만함 속에서 다시 객체화되어 버리고 마는 것처럼 보인다. 마츠모토는 사회의 비가시적 구조를 사물-영상으로서 드러내기를 겨냥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구조로부터 파생된 다종다양한 가시적 현상들을 포괄적으로 끌어들이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구조는 더욱 수수께끼 같은 것이 되고, 몇몇 현저한 현상들에만 집중하다 보면 스스로가 신랄하게 비판한 종래의 다큐멘터리의 소재주의나 자연주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그는 대중사회 상황에 있어서 일상성(이라는 사물) 자체와 대결하는 일은 가시적인 것에 대한 집요한 응시를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낸다고 하는 네오다큐멘터리 방법론 이상의 노력을 필요로 함도 깨닫고 있었다. 왜냐하면 “일상성 그 자체는 여전히 두루뭉술한 채로 일견 포착할 곳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아다치 마사오의 <약칭: 연쇄살인마 略称: 連続射殺魔>(1969) - 1968년에 서로 다른 도시에서 네 명을 살해한 18세의 연쇄살인범 나가야마 노리오가 여행 과정에서 보았음직 한 일련의 풍경들만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1975년에 이르러서야 개봉되었다 - 에 ‘풍경론’이라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이들을 사로잡은 고민도 마츠모토와 같은 종류의 것이었을 터다. 마츠모토가 새로운 리얼리즘의 과제로 제시한 다음과 같은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눈에 보이는 것밖에 비추지 못하는 카메라로 그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응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일상성과 응시」) ※ 마츠모토 토시오의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 작품들은 우부웹(www.ubu.com/film/matsumoto.html)에서 감상할 수 있다. 마츠모토는 <장미의 행렬>과 <수라> 이후에 <16세의 전쟁 十六歳の戦争>(1973)과 <도구라 마구라 ドグラ マグラ>(1988) 두 편의 장편극영화를 더 연출하기도 했다. 마츠모토의 영상론을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고 싶다면 영문으로 된 문헌들 가운데서는 후루하타 유리코의 『Cinema of Actuality: Japanese Avant-Garde Filmmaking in the Season of Image Politics』(2013)의 1장과 2장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마츠모토의 『영상의 발견: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유양근 옮김, 동국대학교출판부, 2004)와 더불어, 이 글을 쓰면서 주로 참고했던 것도 이 책이다. 후루하타의 박사논문 「Refiguring Actuality: Japan’s Film Theory and Avant-Garde Documentary Movement」(2009), 그리고 2002년 여름호 『Positions』지에 게재된 아베 마크 논스(Abé Mark Nornes)의 「The Postwar Documentary Trace: Groping in the Dark」도 유용하다. 본문에서 인용한 하나다 기요테루의 「기계와 장미」는 사카모토 히로후미의 박사논문 「전위기록영화론의 전후적 의미: 1970년까지의 마츠모토 토시오의 여러 활동을 바탕으로 前衛記 録映 画論の戦後的意味: 1970年までの松本俊夫諸活動をもとに」(2017)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이 논문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사이트(dl.ndl.go.jp/info:ndljp/pid/10357205)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이 논문에는 부록으로 마츠모토의 <안보조약 安保条約>(1959), <니시진 西陣>(1961), <돌의 노래>의 구성표와 내레이션이 수록되어 있다. <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 제작을 위해 마츠모토가 작성한 그래프콘티의 사진 또한 이 논문에 부록으로 실린 것을 사용했다.
1980년에 출판된 미국 인명사전 「마르퀴스 후스 후 인 아메리카 Marquis Who’s Who in America」에는 렌 라이(1901-1980)가 ‘모션 컴포저(Motion Composer)’로 등재되어 있다. 직역하면 ‘동작(움직임) 작곡가’가 될 이 합성어는 드로잉, 회화, 직물염색(납염, Batik), 사진, 영화, 키네틱 조각, 시와 산문 등의 매체로 작업해왔던 라이가 본인의 작업을 ‘움직임의 형상(figure of motion)’으로 압축해서 표현했던 것을 고려하면, 그를 대표하는 단어의 조합으로서 매우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모션 컴포저’가 다양한 매체를 가로지르며 운동의 리듬을 탐구했던 라이를 대변한다면, 1958년에 첫 상영되었던 <프리 래디컬스 Free Radicals>는 그의 작업 이력 전체를 함축하고 대표하는 작품이다. <프리 래디컬스>를 라이의 대표작으로 꼽는 이유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열할 수 있다. 프리 래디컬스는 화학용어로서 유리기라고 번역되는데, 홀전자(unpaired electron)를 갖는 원자나 분자를 의미한다. 보통의 원자나 분자에서 전자는 회전 방향이 반대인 두 개의 전자가 쌍을 이루어 안정된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빛이나 열과 같은 에너지가 가해져서 전자의 결합이 끊어지면 홀전자가 되고, 이는 다른 원소들과의 반응을 촉진하는 불안정한 상태를 야기한다. 라이는 전 작업을 걸쳐서 신체와 물질을 탐구했었고, 자신의 창작이론을 진화론, 신경과학, 양자역학, 유전학에서의 발견들을 통해 확인하고 설명하는 것을 좋아했다. 라이는 신체와 물질 각각 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교환 역시 에너지로 생각했고 안무를 에너지에 헌정된 예술로 간주했다. 그가 자주 썼던 용어로 표현하면, 인간의 ‘오래된 뇌(old brain, 이성이나 문자를 거치지 않고 직관적인 앎을 가능하게 하는 몸의 깊숙한 곳)’와 유전자(태고부터 내려오는 인간의 활동들이 각인된 저장소)는 사물의 운동(에너지)와 공감각적으로 공감(empathy)한다. 라이의 필모그래피에서 색채, 댄스, 리듬 등의 단어가 눈에 띄는 것은 운동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반영한다. 그러나 <프리 래디컬스>에서는 제목이 뜻하듯, 하나의 형상이 전개되고 다른 형상으로 변주되는 과정이 화학적인 촉발과 반응처럼 구성되었고, 아프리카 바기르미족(Bagirmi)의 드럼 음악(인간의 원초적 에너지)에 맞춰 안무 되었다는 점에서 라이의 관심사가 응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리 래디컬스> 별표 시퀀스의 일부 출처: http://thethird-eye.co.uk/free-radicals-by-len-lye <프리 래디컬스>를 라이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영화제작을 위한 재정적 후원을 받는 것을 포기하고 영화가 예술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다소 결연한 의지로 만들었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라이의 영화들은 제작비의 출처에 따라 여섯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런던 필름 소사이어티(the London Film Society, 1925년에 설립되어 1939년까지 지속되었던 영국 최초의 영화 협회이다. 알프레드 히치콕, 캐럴 리드와 같은 감독들도 회원이었다)로부터 제작비 일부를 충당했던 1929-34년, (2) 영국 중앙우체국(GPO, the General Post Office)의 영화과 등에서 제작비 지원을 받았던 1935-40년, (3) 영국 정보부(MOI, the Ministry of Information)의 사실주의자 영화과(Realist Film Unit)에 소속되어 나치에 대항하는 선전영화를 만들었던 1941-43년(공교롭게도 MOI는 라이의 영화를 보고 선전영화는 더 직설적이고 덜 영화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4) 1944년에 뉴욕으로 옮겨서 <마치 오브 타임 the March of Time> (타임 사에서 제작했던 단편 뉴스릴 영화 시리즈로 극장에서 본영화 전에 상영되었다) 시리즈의 연출가로 뉴스릴 영화를 만들었던 1944-51년, (5) 제작비 대부분을 스스로 충당했던 1952-59년, (6) 키네틱 조각을 만들다가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그의 고국 뉴질랜드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았던 1979-80년이다. (지면의 한계로 작품의 상세한 목록을 생략한다. http://sensesofcinema.com/2002/feature-articles/lye-2/#filmo을 참고하기 바란다.) 1945년 경 <마치 오브 타임>의 사무실에 있는 렌 라이 사진의 왼쪽은 라이가 디자인한 시리즈의 로고 출처: http://www.art-newzealand.com/Issue101/lye.htm <마치 오브 타임> 시리즈의 일부를 연출했던 시기까지 라이는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안정되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특히 존 그리어슨이 이끌던 GPO의 영화과로부터 지원을 받게 되면서, 일 년에 두 편 정도로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이 시기 작품들의 장르를 엄밀히 따지자면 광고에 해당한다. 작품 제작을 지원했던 단체 혹은 회사들(예를 들면, 임페리얼 Imperial 항공사)이 원하는 메시지를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어슨은 작품 제작에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데 있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만을 달았을 뿐, 라이가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었다. 만약 라이의 대표작을 색채의 관점에서 꼽아야 한다면, 단연코 <컬러 박스 Colour Box>(1935)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거의’ 처음으로 필름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거의’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기록상으로 이탈리아 미래파 작가인 아르날도 지나(Arnaldo Ginna)와 브루노 코라(Bruno Corra)가 1908년 필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착상을 했고, 1910년에 네 편의 추상영화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1910년대에 한스 스톨텐베르그(Hans Stoltenberg)나 앙리 스토크(Henri Storck)도 유사한 방식으로 작업했다는 기록이 있다. 라이는 필름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작업 방식을 ‘다이렉트(direct) 필름’이라고 불렀다. 이를 지칭하는 유사한 용어로는 ‘카메라 없는 영화(Cameraless film)’나 ‘필름 위에 그린 애니메이션(Drawn-on-film animation)’이 있고, 좀 더 폭넓게는 ‘핸드메이드 필름(Handmade film)’도 해당된다. <컬러 박스>는 영국 전역에서 수백만 명에게 보였기 때문에, 대중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첫 다이렉트 필름이라고 할 수 있다. (<컬러 박스>는 1935년 브뤼셀 국제영화제의 판타지 영화 부문에서 명예상(Medal of Honor)을 받았고, 이듬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이때 영화를 본 나치 관객들은 오스카 피싱거의 추상영화에 비해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혹평했다. 형태가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고 작품에 사용된 재즈 음악이 흑인적(negroid)이라는 이유에서였다.) 1935년에 영국에서 이 작품을 본 노만 맥라렌(1936년부터 1939년까지 GPO에서 일했다)은 “여기 손으로 그린(handpainted) 영화의 개척자가 있다...그것은 마치 내게 꿈이 실현되는 것과 같았다...렌 라이는 그 방식을 능숙하고 훌륭하게 보여주었다”라고 말했었다. 라이는 이 시기에 듀페이컬러(Dufaycolor), 가스파르컬러(Gasparcolor), 테크니컬러(Technicolor)와 같은 컬러 필름들을 실험하는 데 집중했었다. <컬러 박스>의 스틸 이미지 출처: https://filmcolors.org/2014/04/18/dufaycolor-films-by-len-lye 1951년에 라이가 <마치 오브 타임>을 그만두고, 1952년에 자신과 부인 앤(Ann)만 속했던 영화사의 이름을 다이렉트 필름으로 정했던 것은 카메라로 찍는 영화를 그만두고, 다시 손으로 그리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았다. 어쩌면 라이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안정되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환경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그의 영화사 이름에 담았을지도 모른다. 라이는 한스 리히터의 초청을 받아서 뉴욕시립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뒤이어 콜롬비아대학, 뉴욕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러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라이는 다이렉트 필름을 설립하고 나서 첫 영화로 <컬러 크라이 Color Cry>(1952)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라이의 영화 작품 포맷은 16mm로 바뀌었다.) 이 영화는 라이가 틈틈이 해왔던 포토그램(photogram, 필름 위에 사물 등을 올려놓고 빛에 잠깐 노출시켜서 상을 맺게 하는 방법) 작품들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라이는 모슬린 천에 새겨진 점(dot) 패턴을 마음에 들어 했고, 포토그램 방식으로 필름 위에 점 패턴을 복사했다. 이때 라이가 품고 있던 생각은 “춤추는 원자”였다. 원자에 대한 관심은 그가 <마치 오브 타임>을 연출할 당시에 시리즈 중의 하나였던, 아인슈타인과의 인터뷰를 담은 영화를 보고 난 이후부터 커져 왔다. 라이는 다이렉트 필름의 두 번째 작품으로 <리듬 Rhythm>(1957)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크라이슬러 자동차 공장을 찍은 푸티지들을 점프 컷으로 구성해 만든 1분 길이의 파운드푸티지 작품이다. 이 작품의 도입부와 후반부에도 점과 선의 패턴이 나온다. <리듬>은 1957년 뉴욕 아트 디렉터스 페스티벌(New York Arts Directors Festival)의 텔레비전 광고 부문에서 수상했지만, 크라이슬러사가 영화에 사용된 음악을 싫어했고 광고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상이 취소되었다. 1957년에 라이가 <프리 래디컬스>를 만들 전의 상황이 이러했다. 그런데 1958년 브뤼셀 엑스포와 함께 열릴 예정이었던 실험영화제 EXPRMNTL로부터 작품을 보내달라는 초청을 1957년에 받았다. (EXPRMNTL은 일명 크노케-르-주트 실험영화제이다. 이 영화제는 1958년부터 74년까지 총 다섯 번 개최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하던 실험영화작가들이 상호 교류를 시작하면서 서로를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영화제가 우리에게 좀 남다를 수 있는 이유는 동시대적인 의미에서 실험영화를 사용한-필자가 현재까지 확인했던바 내에서-첫 공식기록으로, 1957년 6월 23일 자 「국제실험영화제」라는 동아일보 기사가 해당 영화제의 작품 공모를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필자가 본 연재에서 맡은 유현목의 <손>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수도 있을 것 같다.) 라이는 초청을 받고 약 8개월간 <프리 래디컬스>에 집중했었다. 이 작품은 라이가 품어왔던 ‘춤추는 원자’의 실현이자, 블랙 리더(leader)로만 만든 첫 영화이다. 라이는 16mm 블랙 리더의 이멀전(emulsion)을 일상의 다양한 도구들을 사용해서 긁어내어 형상을 새겨 넣었다. 필름 이멀전을 벗겨내어 만드는 영화를 ‘스크래치(scratch) 필름’이라고 한다. <프리 래디컬스>는 스크래치 필름이기 때문에, 곧잘 맥라렌의 <블링키티 블랭크 Blinkity Blank>(1955)와 비교되기도 하고 이 작품에 라이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맥라렌의 작품은 검은 배경에 색채가 강조되는 작품이고, 라이의 <프리 래디컬스>는 흑백으로 필름의 투명한 부분을 통과하는 빛이 스크린에 투사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게다가 스크래치는 라이가 이전에도 사용했던 방식으로, 영향 관계라기보다는 작업 태도를 공유하는 작가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 유사성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라이는 <프리 래디컬스>로 EXPRMNTL의 2등 상을 받았다. 대상은 폴란드의 발레리안 보르보츠크(Walerian Borowczyk)와 얀 레니차(Jan Lenica)의 <돔 Dom>(1958)에 돌아갔다. 심사위원은 만 레이, 존 그리어슨, 노만 맥라렌, 알렉산더 알렉세예프, 에드가 바레즈였다. 라이는 상금으로 5천 달러를 받았다. 이 성과에 힘입어 라이는 <프리 래디컬스>가 미국 내에서 성공적으로 배급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공식 상영된 곳은 아모스 보겔이 개최했던 ‘시네마 16’뿐이었고, 상영료로 50달러를 받은 것이 전부였다. 라이는 제작 후원을 구하고 실험적인 영화에 대한 지원을 촉구하기 위해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비서로부터 답장을 받긴 했다), 미국 해외공보처, 문화교류재단 등에도 편지를 보냈지만 성과는 없었다. 뉴욕현대미술관에 <프리 래디컬스> 프린트 가격으로 4천 달러를 제시했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라이는 1959년에 「영화는 예술인가? Is Film Art?」라는 글을 쓰고 영화작가로서 파업을 선언한 뒤 키네틱 조각으로 전향했다. 1960년대 피터 쿠벨카는 여러 차례 라이에게 회고전을 열고 싶다고 요청하였으나, 그는 자신은 키네틱 예술가라며 번번이 거절했다. 이와 같이 <프리 래디컬스>는 일련의 영화작업이 수렴되었던 마침표이자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기 위한 쉼표와 같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라이의 대표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프리 래디컬스>가 라이의 작품 이력에서 더욱 흥미로운 점은 그가 1979년에 키네틱 조각에서 영화로 돌아와 다시 대면했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프리 래디컬스>는 1979년에 라이가 재편집했던 판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라이가 키네틱 조각을 경유하면서 받은 영향들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라이의 키네틱 조각 작품들의 제목과 작업 방식을 보면 차라리 <프리 래디컬스>가 이후의 작품들을 예비했다고 볼 수 있다. 라이가 품었던 ‘춤추는 원자’라는 생각은 그의 키네틱 조각들에서 더욱 다채롭게 전개되었다. 라이의 키네틱 조각은 최소한 32개의 작품이 만들어졌거나 고안되었다. 이 작품들의 목록은 새로 발굴되는 자료가 추가되면서 지금도 확장되고 있는데, 그중에 작품들의 제목을 일부 나열하면 <원자적 춤 Atomic Dance> <벨 막대기 Bell Wand> <춤추는 원자 Dancing Atom>, <뒤집기와 두 개의 회오리 Flip and Two Twisters(일명 삼부작 Trilogy)> <우주 Universe(일명 루프 Loop)> 등이다. 라이는 이 개별 작품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한데 모아놓고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일부에서 번개의 신으로 숭배되었던 샹고(Shango)의 신전을 만들려고 했다. 라이는 개별 조각 작품들의 복제품을 만들었을 때, 같은 스케일로 제작한 적이 없고 늘 변주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제목도 하나 이상인 경우가 많다. 관람객이 촬영한 <우주> 관람객이 촬영한 <뒤집기와 두 개의 회오리> 라이는 키네틱 조각을 만들 때, 그가 낙서(doodling)라고 부는 행위에서부터 출발했다. 낙서는 재료를 만지고 흔들거나 휘어보면서, 재료에서부터 파생되는 운동(에너지)의 형상을 몸으로 느껴보는 행위를 의미했다. 낙서는 그가 영화를 만들었을 때에도 작업 방식을 설명하는 핵심어였다. 라이는 조그만 필름 표면 위에 일상의 다양한 도구들로 그리거나 긁어내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재료를 느끼며 형상을 낙서해나갔다. 낙서는 초현실주의의 자유연상과 유사한 방법인데, 라이가 뉴질랜드에서 런던으로 이주했던 직후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했던 영향이 반영된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라이는 초현실주의가 지나치게 문자적이고 상징적이라고 비판했고 언제나 몸을 중심에 놓고자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라이의 낙서는 추상표현주의자들이 그리는 행위를 강조했던 것과 유사한 맥락에 있다. 라이가 주로 사용했던 재료는 금속으로, 가늘고 긴 조각(strip), 막대, 판(sheet), 롤(roll) 등의 기본 형태들을 선호했다. 이러한 형태들은 필름 재료로도 가능하기 때문에, 키네틱 조각에서도 필름의 물성 자체에 대한 라이의 관심이 연장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라이는 금속 재료로 기본 형태를 만든 뒤에 모터나 전자석을 붙여서 움직이게 만들었는데, 이 과정을 애니메이션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의 키네틱 작품들은 지속시간이 그의 영화들의 평균과 같이 4분에서 5분 정도였다. 라이는 재료에 열처리를 하거나 표면을 사포로 긁어내서 질감에 변형을 주고, 이에 따라 반사되는 빛의 차이들을 실험했다. 재료의 소리도 중요했다. 라이는 키넥틱 조각품에서 나는 소리들을 따로 녹음에서 사운드트랙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 사운드트랙은 아이튠즈에서 판매 중이다.) 그는 키네틱 작품을 전시할 때, 각각의 작품들에서 반사되는 빛과 소리가 대위(counterpoint)를 이루도록 배치했다. 이러한 작업 방식들은 아래에 삽입한 두 편의 다큐멘터리에 잘 드러나 있다. [영상 3] <낙서: 렌 라이의 인상들 Doodlin’: Impressions of Len Lye>(1987) [영상 4] <뒤집기와 두 개의 회오리 Flip & Two Twisters>(1995) 라이는 <프리 래디컬스>를 재편집한 이후 <공간 속의 소립자들 Particles in Space>(1979)을 만들었다. 평자들에 따라서 후자를 더 중요한 작품으로 간주하기도 하는데, 스탠 브래키지는 특히 이 작품을 좋아했다. 물론 <프리 래디컬스>에 대해 “믿을 수 없이 엄청난 걸작”이라는 평가도 빼놓지 않았다. <공간 속의 소립자들>에서 사용된 소리는 라이의 키네틱 조각에서 나는 소리들이 녹음된 것이다. <프리 래디컬스>와 <공간 속의 소립자들> 사이에 라이의 키네틱 조각을 놓으면 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떠오른다. 스케일이다. 개인적으로 <프리 래디컬스>를 라이의 대표작으로 꼽는 이유를 물어본다면, 그 답을 스케일에 대한 경이로운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라이는 소립자의 운동과 태양의 운동은 에너지란 측면에서 같고, 서로 통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영화로 번역하면 16mm의 작은 표면 위에 새겨진 미세한 운동은 영사기를 통해 투사되는 이미지의 운동과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같다. 다만 필름이 스크린에 투사되어 확장되었을 때, 필름 표면 위의 미세한 운동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로 증폭되고, 기념비적인 스케일의 움직이는 조각이 된다. 조각은 삼차원이고 영화 스크린은 평면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라이가 필름 위에 몸으로 새긴, 그래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힘의 차이는 필름 이멀전의 두께를 다르게 만들고, 이는 스크린 상에서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머리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케일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몸으로 반복해서 느껴야만 터득될 수 있다. 영화의 초창기, 그토록 많은 조형 예술가들이 영화에 매료되었던 것은 기념비적인 조각을 구현할 때 직면해야 하는 수많은 현실적 장애들을 영화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매혹적이고 경이로운 경험은 오늘날 컴퓨터로 영화를 만들고 보던 학생이 영화제의 상영작으로 꼽혀 처음으로 자신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았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 되어버렸다. 대부분 이 당혹감을 자신의 미숙함을 탓하며 부끄러움 속에 감추어버리지만, 사실 이러한 스케일의 차이는 탐구되어야 하는 영역에 속한다. <프리 래디컬스>를 볼 때에는 가능한 작은 스크린을 통해서 먼저 본 이후(만약 스마트폰에서 본다면 가급적 세로로), 최대한 큰 스크린으로 다시 보기를 권하고 싶다. ※ 이 글에서 언급된 영화들과 렌 라이에 관한 사실들은 로저 호록스(Roger Horrocks)가 2001년에 펴낸 「렌 라이: 자서전 Len Lye: A Biography」과 2010년에 출간한 「움직이는 예술: 렌 라이의 작품 Art that Moves: The Work of Len Lye」을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다. 렌 라이에 관한 문헌 목록은 http://sensesofcinema.com/2007/great-directors/lye/#film에 잘 정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