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버틴 래빗
- 감독
- 마이클 랜던 주니어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제인 세이모어, 톰 스커릿, 엘렌 버스타인
홀로코스트 영화는 윤리적 재현과 관련해 오랫동안 아방가르드의 위치를 점해왔다. 미학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던져졌고 홀로코스트 영화들은 이에 자의적, 타의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절멸이라는 끔찍한 폭력을 구체적으로 시청각화 하는 것은 어떠한 효과를 낳는가, 인과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폭력을 서사화할 수 있는가, 목격자가 없거나 말하기 힘든 경우 (예를 들면, 가스실) 증언과 기억은 어떻게 기록될 수 있는가, 과거는 어떻게 현재와 대화를 나누고 기억을 상속할 수 있는가, 트라우마의 고통 속에 놓인 생존자들의 증언은 어떠한 형식으로 가능한가, 관객들의 동일시와 공감은 어떤 강도로 이끌어 내는 것이 적절한가, 피해자·가해자·조력자·제삼의 목격자 들 중 어떤 시점을 선택할 것인가 등. < 밤과 안개 >(알랭 레네, 1955), <카포>(질로 폰테코르보, 1960), < 소피의 선택 >(알란 J. 파큘라, 1982), < 쇼아 >(클로드 란츠만, 1985), < 쉰들러 리스트 >(스티븐 스필버그, 1993), < 인생은 아름다워 >(로베르토 베니니, 1997), < 사울의 아들 >(라즐로 네메스, 2015), < 조조 래빗 >(타이카 와이티티, 2019) 같은 대표적 작품들을 거쳐 오며 각 질문과 관련해 새로운 미학적 선택이 쟁점화 되었고 역사적으로 홀로코스트 영화는 이전 영화와의 비교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무언가 새로운 영화적이고 윤리적인 미학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홀로코스트 영화들에는 있을 수밖에 없다. 관객들 또한 이전 영화와 관련된 쟁점을 인식하고 그에 근거해 영화를 보게 된다. 따라서 모든 홀로코스트 영화는 내외적으로 이전의 영화들을 적극적으로 매개하고 참조하는 미디어 고고학적 상태에 놓인다. 마틴 에이미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조나선 글레이저가 감독한 < 존 오브 인터레스트 >(2023) 역시 그러한 강박 속에 놓여있다. 영화는 새로운 위치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것을, 시각화 한다. 이제까지의 홀로코스트 영화가 수용소 및 피해자를 다양한 방식으로 가시화하는 선택을 했다면(평화로운 전원의 풍경과 다를 바 없는 기념관이 된 전후의 수용소를 보여준 <밤과 안개>, 방관자였던 폴란드 주민들의 변명을 듣고 있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화면에 담는 <쇼아>, 흐릿한 포커스 아웃과 좁은 주관적 시야의 제한적인 시각을 통해 목격의 의지를 영화화 했던 <사울의 아들> 모두를 포함할 수 있다), 글레이저 감독은 수용소가 아닌, 수용소 소장의 사택과 가정생활을 탐색한다.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 소장인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앙 프리에델)는 가족들과 함께 수용소 높은 담장 밖 바로 옆에 위치한 빌라에 거주하고 있다. 루돌프 회스는 아내인 헤트비히 회스(산드라 휠러) 그리고 다섯 아이들과 함께 단란한 가족을 꾸리고 있는 다정다감한 가장이다. 루돌프는 큰 아들에게 직접 승마를 가르쳐주고 잠 못 들고 집안을 돌아다니는 막내딸에겐 <헨델과 그레텔> 동화를 읽어준다. 그는 아내에겐 책임감 있고 유머러스한 남편이기도 하다. 헤트비히 역시 집안을 건사하고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며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데 열정적이다. 전쟁 기간 동안 계급적 상승을 이뤄낸 회스 부부는 열심히 ‘일’한 대가로 얻어낸 것에 큰 자부심과 애착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수용소가 아닌 사택과 그 주변의 목가적인 풍경만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화장터 굴뚝의 연기와 냄새, 강물을 따라 흘러들어오는 재를 막을 수는 없다. 영화의 제목인 ‘관심/이익 지역’은 나치에 의해 몰수된 수용소 주변 토지를 일컫는다. 이들은 이 지역을 사택으로 사용하는 등 경제적 이익(interest)을 취했다. 이 영화에서 수영장과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한껏 꾸며진 사택은 그 경제적 이득, 시각적 관심이 된다. 어떤 이미지의 관심 혹은 이익은 다른 이미지의 무관심/피해를 대가로 한다. 회스 부부는 바깥과 타자를 절멸시킨다. 가해자 가족의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은 수용소에 대한 철저하고 적극적이며 의식적인 무관심 혹은 비가시성과 교환된다. 이것이야말로 이미지의 정치경제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가해자 일인이 아닌 그의 가족생활을 다루는 실내극이라는 점에서 이전에 가해자들을 주인공으로 했던 다른 영화들과도 변별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이 영화는 젠더의 정치학이 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에서 유태인 절멸 계획을 짜고 지휘한 루돌프 회스 만큼이나 그의 아내 헤트비히 회스를 주인공의 자리에 놓고 그녀의 선택과 행동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가족극, 혹은 < 잔느 딜망 >(샹탈 아커만, 1976) 같은 페미니스트 예술영화들이 실내 건축학을 통해 가족의 정치경제학을 영화적으로 전경화 했던 것처럼 집안과 그에 딸린 목가적 풍경,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의 동선이 끊임없이 시각적이고 경제적인 관심/이익의 교환체계에 놓여있음을 각인시킨다. 헤트비히는 루돌프에게 수동적으로 딸려 있는 부수적 이해관계자가 아니다. 헤트비히는 수용소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모른 척하고 무관심한 채 유태인들의 죽음을 대가로 자신의 가족의 이익을 선택한다. 루돌프가 집안 거실에 앉아 가스실과 화장터 건축과 운영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만들어낼지, 즉 어떻게 사람들을 빠른 시간 내에 가능한 많이 살해할지에 대한 계획을 사업체로부터 듣고 논의할 때, 그리고 지상에서는 담장으로 가로막혀 있지만 지하에는 비밀통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줄 때, 가족의 단란함을 포함해 중상층 가족이라는 계급적 유지가 근본적으로 집단학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가해 행위와 결과로부터 그들 자신을 분리하려 한다. 루돌프의 청결에 대한 강박, 매일 밤 모든 방의 전등을 끄고 문단속을 하는 반복 일상, 외화면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화면 안을 가득 차게 보여주는 정원의 꽃의 클로즈업 쇼트들, 침대에 누워 부부가 함께 회상하는 이탈리아 휴가, 유태인 수용수의 모피코트 주머니 속 립스틱까지 꼼꼼하게 챙기면서 유태인들의 유품이 쌓여있는 장소를 ‘캐나다’로 부르는 철저함, 정원의 꽃 이름, 주변 숲의 새 이름을 자식들에게 알려주고 기억하게 하기 등. 신체, 시각, 언어, 사유의 차원 모두에서 깔끔하게 집단학살을 분리해 내려 한다. 하지만 헤트비히와 카메라의 보지 않으려는 회피, 혹은 적극적 무관심은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음에서 비롯된다. 이 모든 디테일, 안락과 아름다움은 학살에 기반 한다. 화장된 피해자들의 뼛가루로 키워낸 탐스러운 꽃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완벽한 무관심, 외면은 불가능하다. 앎은 단순히 정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앎은 신체적이고 환경적이다. 소리, 빛, 냄새, 물의 흐름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대사들은 종종 J 또는 L 컷으로 편집된다. 앞 쇼트의 대사는 뒷 쇼트로 흘러넘치고, 뒷 쇼트의 대사는 앞 쇼트에 선재한다. 복도, 창, 문, 하늘, 강은 거부할 수 없는 신체적 앎이 통제를 벗어나 흘러 다니는 통로이다. 헤트비히는 일을 하느라 자신과 독일 장교 부인들의 앞을 지나가고 창 밖에서 일하고 있는 유태인 하녀와 하인들을 무시한다. 이들은 쇼트와 쇼트, 프레임 안과 밖을 사운드와 함께 넘나든다. 독일 장교 부인들이 유태인의 소지품을 어떻게 나눠가졌는지, 그들이 어떻게 끌려갔는지에 대한 농담을 하는 부인들의 대화는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창과 문 너머로 집 안에서 일하는 유태인들의 몸에 흘러 들어간다. 동시에 수용소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또한 막지 못한다. 잠시 머물다 간 헤트비히의 엄마, 유태인 하녀들, 그리고 딸까지 모두 그 소리를 듣지만 회스 부부는 적극적으로 듣지 않는다. 관심지역은 적극적 무관심 지역을 통해 만들어 진다. 이 영화는 신체적 앎 그리고 알면서도 행하는 악의 적극성이 어떻게 회스 부부에게서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글레이저 감독이 마지막에 루돌프 회스의 구역질 장면을 넣은 것도 이 신체적 앎에 근거한다. 그들은 알면서도 행한 것이다. 당연히 이 앎은 반성이나 죄책감이 아니라 자기 합리화와 적극적 무관심으로 이른다. 사진: "Jon obeu inteoreseuto", IMDb ( 좌 , 우 ) 홀로코스트 이후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집단학살과 관련된 예술에 있어 주요한 윤리적 테제 중 하나로 언급되어 왔다. 가해 집단이 피해자와 동일한 인간 종에 속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일이 일어난 이후 어떻게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글레이저는 여기서 이 지침을 한번 뒤집는다. 그렇다면 절멸이 일어나고 있는 중에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혹은 정말로 서정시를 쓰는 건 불가능한 것일까? 헤트비히의 정원에는 꽃 하나하나 벌레 먹지 않고 탐스럽게 피어 있다. 영화의 대부분에서는 카메라가 거리를 두고 건조한 관찰의 태도를 취하지만 헤트비히가 키워낸 꽃만은 마치 자연 다큐멘터리의 관습적 연출을 보듯 탐스럽게 클로즈업으로 정성들여 포착한다. 그것의 즉각적 아름다움에 이의를 제기하긴 어려울 것이다. ‘평화로운’ 집 주변의 목가적 풍경처럼 말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곧 그 클로즈업 바깥에서 꽃의 비료로 쓰이는 것이 소각장에서 태워진 분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보이지 않는 프레임 바깥과 내부는 끊임없이 교환되고 연결된다. 마찬가지로 루돌프가 다정한 아버지로서 동화책을 읽어주는 바깥에서 시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집단학살의 꼼꼼한 계획, 유태인 여성에 대한 성착취를 행하고 있는 루돌프는 끔찍하게도 가정적인 부성을 동시에 수행한다. 더 정확하게는 그의 부성은 가해 행위 위에 기반해 있다. 그러면 시와 노래는 어디서 가능한가? 글레이저는 수용수들을 돕기 위해 사과를 노역장에 몰래 숨겨놓는 폴란드 소녀를 적외선 카메라로 애써 보여주며 증명하려 한다. 소녀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그것을 보려는 태도는 흐릿한 쿠키더미를 찾아가는 작업이다. 나 혹은 우리의 관심/이익 영역이 아닌 바깥을 보려는 태도, 효율성이나 성과가 아닌 다른 가치를 돌보려는 태도, 타자의 존재는 교환할 수 없거나 나눌 수 없음을 인지하는 태도, 내장지각에 가까운 신체적 앎을 회피하지 않고 응시하는 태도, 실내와 목가가 얼마나 정치경제적인지를 인식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더 중요하게는 글레이저 감독이 아카데미 수상소감에서도 밝혔듯이 오늘날 시가 가능하려면 이스라엘 혹은 홀로코스트 바깥을 봐야 한다. 가자지구에서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이 어떻게 또 다른 민족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집단학살하며 가해자고 되고 있는지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팔레스타인의 이미지가 더 필요하다. 사진: " Jon obeu inteoreseuto ", IMDb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2024) 등 공동 집필.
“아름다움도 두려움도 모두 경험하라. 그저 걸어가라. 생이 계속되는 한,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끝’은 없으니.”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추운 겨울, 독일 베를린의 한 광장. 파스텔빛 집들이 하얀 입김을 포근하게 둘러싼다. 어린 소년은 여느 날처럼 넉넉지 않게 먹을거리를 사오다가 ‘파란빛’으로 반짝이는 나비를 본다. 그 날갯짓이 유난히 예쁘게 마음에 들어온 탓에, 소년은 미소를 짓고 쪼그려 앉아 나비를 바라본다. 저 멀리 날갯짓이 사라지고 나서야 일어선 소년의 옆, 낯익은 구두가 허공에 떠있다. 그렇게 소년은 광장 한가운데서 엄마의 죽음을 마주한다. 반나치 활동으로 교수형을 당한 엄마의 죽음을.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차디찬 엄마의 발을 부둥켜안고 우는 일밖에 없다. 한없이 따뜻해 보였던 집들은 서늘한 눈이 되어 소년을 응시한다. 광장엔 매일같이 사람들이 매달리고, 아이들이 장난감 대신 총을 드는 비정한 거리. 제2차 세계대전 시대였다. <조조 래빗>은 신발 끈을 혼자 고쳐매지 못했던 소년이 신발 끈을 매어주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영화다. 엄마 ‘로지’(스칼렛 요한슨)와 단둘이 사는 ‘조조’(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열살 아이가 겪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겪는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조조는 어린 마음에 소속감이 갖고 싶어 나치 소년단인 유겐트에 입단하지만 작은 토끼조차 쉽게 죽이지 못해 겁쟁이 토끼라 놀림당한다. 상상 속 친구 ‘히틀러’(타이카 와이티티) 외에는 줄곧 혼자였던 조조에게 몰래 숨어 있던 소녀 ‘엘사’(토마신 맥켄지)가 우연히 나타난다. 그리고 소년은 소녀를 만나며 조금씩 변해간다. 엄마 손에 이끌려, 엄마가 매준 신발로 문밖을 나섰던 조조는 엘사의 신발 끈을 고쳐매 주고, 직접 문을 열어 세상을 마주한다. 안아주고 싶은 각색, 연출, 음악 <조커>, <아이리시맨>처럼 어마어마한 ‘어른들’을 제치고 <조조 래빗>은 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했다. 72회 미국 작가 조합상, 73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 이어 각색상 부문에서만 세 번째 수상이었다. <인생은 아름다워>부터 <피아니스트>까지 전쟁의 비극을 다룬 영화는 많았지만,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끔찍한 제2차 세계대전의 이야기를 새롭고 독창적인 방법으로 들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조조 래빗>을 선보였다. 원작인 크리스틴 루넨스의 소설 ‘갇힌 하늘(Caging Skies)’이 제국주의와 마초적 본성, 소유의 집착을 들이댄다면, 영화는 어린 소년의 얼굴에 난 상처로 전쟁의 비극을 그린다. 부디 마음만큼은 덧나지 않길 바라며 연고를 발라 주고 싶게끔. 동화적인 상상력과 따뜻한 색감이 돋보이는 연출도 원작의 어두움을 걷어낸다. 조조가 엄마와 함께 자전거로 꽃밭을 달리는 장면, 첫사랑의 두근거림을 ‘뱃속에 나비가 가득한’ 모습으로 비유한 장면, 그리고 쓰이지 않은 편지를 진심으로 읽는 장면에서 특히나. 이렇게 어린 조조의 순수함은 마이클 지아치노 음악감독의 넘버로 울려 퍼진다.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인크레더블>, <코코>, <인사이드 아웃>으로 전 세계 어린이, 어른이 마음을 빼앗았던 지아치노 음악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20명 규모의 작은 오케스트라와 협업했다. “오케스트라 규모가 작을수록 감정선을 잘 살려주는 사운드가 나온다”는 그의 말처럼 영화 속 넘버는 정서적인 울림을 더한다. 혐오를 물리치는 풍자 <조조 래빗> 음반 커버에 ‘혐오를 물리치는 풍자(An Anti-hate Satire)’가 적힌 건 우연이 아니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블랙 코미디’가 관통하기 때문. “‘하일 히틀러’는 생각 없이 뱉어야 제맛”이라는 꾸지람(?)에서 시작된 풍자는 비밀경찰인 게슈타포가 ‘하일 히틀러’를 티키타카 주고받는 영화 후반부에서 극대화된다. 이렇듯 <조조 래빗>은 80년 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진 비극을 재치있게 담아낸다. 전쟁과 폭력, 차별과 혐오, 가짜뉴스와 프로파간다는 우리 가까이 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직도 진행형이다. 영화 속에서 두드러지는 여성과 성소수자의 역할은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사랑의 힘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말을 행동으로 증명한 엄마 ‘로지’, 조조의 세뇌된 공포를 거둬준 ‘엘사’의 존재감은 극단으로 치우친 전쟁 상황에서 여성의 용기와 강인함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은 바로 ‘클렌첸도르프’(샘 록웰)다.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인 훈련 교관 ‘클렌첸도르프’는 미친 세상에 술이 유일한 답인 양 매일 취해있다. 후배 병사인 ‘핀켈’(알피 알렌)과 있을 때면 왠지 모르게 묘한 기류가 감도는 그는 위급한 순간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조조를 보호해준다. 요란한 총성이 광장까지 울려 퍼질 때, 클렌첸도르프는 화려하게 커스텀된 전투복을 입고 등장한다. 어깨에는 빨간 망토를, 허리춤에는 커다란 스피커를, 가슴팍에는 분홍색 역삼각형 뱃지를 달고. 동성애자 홀로코스트가 만연했던 역사를 되돌아보면 클렌첸도르프의 장식은 ‘그냥’ 장식이 아니다. 캐릭터의 성격을 녹여내는 듯 유난히 돋보인다. 코드 연출이나 역할론에서 아쉬움은 남지만, 애초에 싸우려고 입을 전투복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입을 ‘상복’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장엄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군복’부터 벗어던질 수 있길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보이듯, 신발 끈을 고쳐맬 수 있다고 모두 바람직한 어른이진 않다. 또 다른 교관인 ‘람’(레벨 윌슨)은 죽은 독일 병사의 군복을 벗겨 조조에게 입히고는 총을 들고 싸우게 한다.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는 옷 중에서도 ‘군복’은 계급을 드러내고 이념을 드러낸다. 군복에 담긴 정체성을 생각하면 ‘꼬마 병정’처럼 무서운 단어도 없다. 이때 영화의 첫 장면에서 조조는 군복을 입고, 마지막 장면에서 군복을 벗는다. “나치가 아닌 나치의 상징에 열광하는, 웃기게 생긴 제복을 입고 무리에 어울리고 싶어하는 꼬마애”라며 팩트 폭격을 날린 엘사의 대사는 조조뿐 아니라 지금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춤이 전쟁을 비롯한 모든 비극으로부터의 탈출이라면 우리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몸에 걸치고 있는 군복은 무엇일지. 엔딩 크레딧이 오르면 신발 끈을 고쳐매고 춤출 준비를 해보자. ‘군복’부터 벗고.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 때는 < 무림토끼 >란 제목으로 소개됐다. 원제는 <토협전기 兎俠傳奇>. 중국이 만든 첫 3D애니메이션이고, 3년 동안 150억 원의 제작비를 들였다. 제작진은 제목을 ‘쿵푸토끼’로 짓고 싶었겠지만, 왠지 자존심이 상해 다른 제목을 떠올렸을 거라 생각했다. 무술을 하는 토끼라는 설정에서 알 수 있듯이, <레전드 오브 래빗>은 < 쿵푸팬더 >를 본 중국인들의 화답이다. 주인공인 ‘투’는 호떡을 잘 만드는 요리사다. 무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적어도 그가 호떡을 만드는 기술은 이미 쿵푸의 경지에 올라있다. 어느 날, 전국의 무림 지존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원숭이 대사부가 한때 제자였던 판다 슬래시에게 배신을 당한다. 간신히 붙은 목숨으로 도망쳐 나온 대사부는 우연히 투를 만나고, 그에게 자신이 가진 신공의 기운을 전해준다. 그리고는 어릴 적 자신의 품을 떠난 딸 피오나를 찾아달라고 말한다. 도심으로 향한 투는 우연히 슬래시의 도장에서 일하게 되고, 피오니란 이름의 쿵푸 고수를 만난다.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슬래시의 야욕을 막으려 노력하고, 투는 점점 자신 안에 내재된 쿵푸의 기운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중국의 애니메이터들은 < 쿵푸팬더 >에 얼마나 약이 올랐을까. <쿵푸팬더>는 아시아 문화마저 완벽에 가깝게 모사하는 할리우드의 흡수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호권, 사권, 학권등 실제 동물들이 재현하는 쿵푸 동작부터 시푸가 포의 식탐을 이용해 훈련을 시키는 시퀀스까지, 중국이 만들었고 전 세계가 즐겼던 쿵푸영화의 잔재미들을 모조리 포함시켰다. 자국의 상징인 동물을 데려다, 역시 자국의 국기인 쿵푸를 소재로 삼은 할리우드에 대한 중국의 미움은 판다를 아예 악역으로 설정한 부분에서 나타난다. < 레전드 오브 래빗 > 속의 판다는 <쿵푸 팬더>의 판다보다 훨씬 큰 덩치에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다. 당연히 게으른 캐릭터가 아닌 그가 귀여워 보일 리도 없다. 심지어 이런 말도 듣는다. “눈에 마스카라만 칠하면 다 쿵푸팬더냐?” 부산국제영화제의 프리뷰 룸에서 이 영화를 보다가 마음 한 구석이 짠해졌다. 형형색색의 미감으로 담은 배경과 현란한 액션, 무엇보다 캐릭터에 대한 호감도는 < 쿵푸팬더 >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의 감흥은 <쿵푸팬더>에 미치지 못한다. 분명 <쿵푸팬더>를 먼저 보고 자란 아이들은 안타깝게도 < 레전드 오브 래빗 >을 <쿵푸팬더>의 아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중국이 ‘짝퉁의 왕국’이라고 해도 제작진이 그걸 몰랐을까? 할리우드가 쿵푸영화의 관습을 연구해 창조한 결과물을 역수입할 때, 그들의 자존심은 더 상처받을 게 분명하다. <레전드 오브 래빗>은 어쩔 수 없는 딜레마에 관한 애니메이션이다. <쿵푸팬더>의 아류를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쿵푸팬더>를 능가하는 애니메이션으로 자존심을 세워야 하는데, 결국에는 다시 중국이 무협의 지존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 그래서 결국 자신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동물을 저주해야 하는 딜레마라니.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산업을 통틀어서 볼 때도 흔치않은 사례 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