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어페어
- 감독
- 글렌 고든 카론
- 제작년도
- 1994
- 출연
- 아네트 베닝, 워렌 비티, 캐서린 햅번, 피어스 브로스넌, 개리 샌들링, 크로 웹, 케이트 캡쇼, 폴 마주르스키, 브렌다 바카로, 글렌 샤딕스, 해럴드 래미스, 레베카 밀러
대한극장 이 영화 상영관으로서는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아쉬움 가득한 회고가 쏟아진다. 과거의 화려했던 극장 건물이 허물어지고 고층 빌딩으로 변신한 지 20년이 넘었건만, 안녕을 고하는 이야기들을 살펴보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20세기 대한극장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1958년 4월 4일과 1998년 4월 4일 1998년 4월 4일 국내 최초의 멀티플렉스인 CGV 강변 이 정식 개관하기 전까지 극장의 규모나 흥행수입에서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곳이 서울 중구 충무로의 대한극장이었다. 우연인지 한국 극장역사의 필연인지, 대한극장은 최초의 멀티플렉스 개관으로부터 40년 전인 1958년 4월 4일 개관했다. 개관작은 1994년 리메이크해 국내에서도 사랑받았던 < 러브 어페어(Love Affair) >(글렌 고든 카론, 1994)의 원작인 < 잊지 못할 사랑(An Affair to Remember) >(레오 맥캐리, 1958)이었다. 극장 측은 대지 660평, 연건평 1,432평의 무창(無窓) 5층 건물에 냉난방 장치와 고급 좌석, 최신식 상영 설비 등을 갖춰 외국 극장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국민의 건전한 오락과 영화문화를 위하여 많은 기여가 있기를 바란다”라는 위풍당당한 출정 소감을 밝혔다. *주1 하지만 1년도 채 못돼 운영난을 겪게 되면서 1959년 2월 극장의 운영권은 영화 수입으로 사세를 확장하고 있던 세기상사로 넘어갔다. 세기상사는 폴 뉴먼의 대표작 중 하나인 < 상처뿐인 영광(Somebody Up There Likes Me) >(로버트 와이즈, 1956)을 ‘신발족(新發足)’이라는 야심찬 문구를 곁들여 광고하며 대한극장 인수를 알렸다. 한편으로는 입장객에게 피아노와 고급상품을 증정하는 이벤트를 마련하고, 이탈리아 오페라단의 내한공연을 올리는 등 새롭게 출발하는 대한극장의 다양한 면모를 알리기도 했다. (좌) <잊지 못할 사랑> 전단 (우) <상처뿐인 영광> 전단 대형극장의 위용을 갖추다 여러 가지 시도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말까지는 국도 , 명보 , 단성사 등을 잇는 후발주자의 느낌이 강했던 대한극장이 본격적으로 대형극장, 흥행극장으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국내 최초로 70밀리 초대형 영화를 상영하면서부터였다. 1961년 9월 21일 대한극장에서 개봉한 < 남태평양(South Pacific) >(조슈아 로간, 1958)은 영화의 내용과 평가를 넘어 영화기술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케 하고, 당해 연예계의 주요 뉴스에 꼽히는 등 영화 매체의 큰 변화로서 관람객의 시선을 끌었다. <남태평양> 이후 대한극장이 국내 제일의 대형극장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한 영화는 < 벤허(Ben-Hur) >(윌리엄 와일러, 1959)였다. <벤허>는 1962년 2월 1일 대한극장에서 개봉해 10월 8일까지 무려 8개월 동안 장기 상영했고, 10월 9일부터는 세기상사가 소유한 또 다른 개봉관인 세기극장으로 이동해 상영을 이어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때의 기록적 흥행과 초대형 영화관람의 경험은 여러 차례에 걸쳐 <벤허>가 재상영될 때마다, 세월의 흐름과 관계없이 대중을 극장으로 이끄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벤허>가 대한극장에 관한 회고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할 터이다. (좌) <벤허> 국내 포스터 (우) 1986년 대한극장의 모습 <벤허>와 더불어 < 오클라호마(Oklahoma!) >(프레드 진네만, 1955), < 캉캉(Can-Can) >(월터 랭, 1960), < 왕중왕(King of Kings) >(니콜라스 레이, 1961) 등 70밀리 영화들의 연이은 상영은 대한극장의 이미지가 대중에게 각인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대형 스크린과 좌석 수 2천이라는 규모, 그 위용에 걸맞은 초대형 영화, 그리고 극장 앞 인산인해를 이룬 관람객의 모습을 삽입한 광고는 1990년대까지 대한극장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 했다. 이와 같은 대형극장으로서의 위용과 이미지는 1990년대까지 단관극장으로 버티는 힘이 되었다. 1990년대 말 대한극장의 상영⋅배급을 담당했던 임철호 의 구술처럼 영화 한 편이 “터졌다 하면 하루에 만 명인데, 열흘 만에 십만 명이 되” *주2 는 규모를 여전히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화하며 극장 지형과 극장 문화 또한 변화를 겪었지만, 단관극장의 매력과 흥행의 묘미가 남아있었던 20세기 말 충무로의 풍경에 대한극장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70밀리 대형영화와 마무리한 단관극장의 여정 멀티플렉스의 성공적인 안착과 함께 단관극장으로서의 대한극장 또한 마무리에 들어가면서 들고 온 프로그램들은 역시나 70밀리 초대형 영화들이었다. 또다시 재탕이라는 소리도 들었겠지만, 대한극장다운 프로그램 선정이었다. 1998년과 1999년 상영한 <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 >(데이빗 린, 1962), <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 >(데이빗 린, 1966) 등은 여전히 단관극장과 초대형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에게 호응을 얻었다. 국내에서 단관극장의 마무리가 어땠는지를 둘러보면 비교적 아름다운 행보였다고 할 수 있으려나.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던 단관극장으로서의 대한극장 21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대한극장도 멀티플렉스로 전환하면서 충무로의 풍경 또한 변했다. 그동안 충무로와 종로, 을지로에서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극장들을 계속해서 목격했다. 사라진 극장들과 20세기의 대한극장을 기억하면서 꽤 오래전 광화문 네거리의 동화면세점을 국제극장 이라 지칭하시던 택시 기사님이 불현듯 떠올랐다. 구술채록을 하면서 대한극장에서 원로영화인을 뵐 일이 많았는데, 그들과 나는 항상 최첨단의 시설을 갖춘 대한극장에서 만났지만, 그 기사님처럼 우리는 늘 20세기의 대한극장을 떠올리며 약속을 정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제야 해 본다. 어쩌면 나는 대한극장의 입구에 들어설 때마다 상영 전 대기할 변변한 장소도 없어 극장 밖 거리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입장 순서를 기다리던 20세기 후반으로 돌아가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천 명이 함께 < 미저리(MISERY) >(롭 라이너, 1990)의 공포를 느끼고, < 라밤바(LA BAMBA) >(루이스 발데스, 1987)의 OST를 소리 없이 따라부르던 그 시절로 말이다. *** 주1. “새영화-잊지 못할 사랑”, 《경향신문》, 1958. 4. 5., 4면. 주2. 채록연구 공영민, 「임철호」, 『202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60~1990년대 수입외화의 변화 3』, 한국영상자료원, 2020, 153쪽. 공영민(영화사 연구자) l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인 구술사의 채록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영화의 전개 과정을 마구마구 적어놓은 글입니다. 딱히 반전이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은 나중에 읽는 게 낫겠습니다. < 에듀케이션 >을 보면서 따로 제목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교육에 관한 영화? 그렇게 읽으면 좀 웃겨지지 않나. 그런데 김덕중이 만든 두 번째 장편의 제목이 < 컨버세이션 >이니까 제목을 유심히 보게 된다. 이 감독이 제목에 영어 한 단어를 계속 붙이는 이유는 뭘까. 생각만 계속하니 제목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컨버세이션>은 대화에 관한 영화일까? 그래서 대화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고, 대화하는 내용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굴레가 덫이 되고, 대화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고, 이상한 지경에 빠졌다. 기억해 보니 이 영화를 여러 번 본 것도 아니고, 딱 한 번 봤을 따름이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의 경연에 여러 차례, 그것도 줄곧 눈과 귀를 대고 있다는 착각까지 일어난다. 이건 무슨 주술 같은 것에 빠진 건가. 슬슬 피곤함이 몰려와 영화에 대해, 정확하게는 그들의 대화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기로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날 즈음 나는 다시 이 영화를 꺼냈다. <컨버세이션>은 대화에 관한 영화다, 이런! 역시나 나는 같은 생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사람의 목소리로 페이드인하면, 세 명의 여자 – 은영, 명숙, 다혜가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환한 햇살이 그들 사이로 비친다. 아무리 봐도 나이 차가 나 보이는데, 그들은 친구처럼 말을 놓는다. 대화의 내용으로 미뤄 그들은 모두 파리에서 유학하며 살았던 모양이다. 그들의 대화 내용을 만약 프랑스인이 듣는다면 콤플렉스에 빠진 아시아인이라고 코웃음 칠 테고, 한국인이나 아시아인이 듣는다면 별로 친근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재수 없는 인간이라고 흉볼 것 같다. 10분이 지나고, 다음 장면에서 명숙과 다혜가 어둑어둑해진 아파트 비상계단에서 담배를 피우며 대화한다. 대화 속 관계의 영역이 더 넓어지는데, 한 번 박인 밉상의 인이 더 깊어진 탓인지 특히 명숙과 다혜에 대한 비호감은 좀체 회복되지 않는다. 대화를 마치고 은영의 집으로 되돌아가려고 할 때, 비상문이 열리지 않아 추위에 떠는 모습을 보면서 깨소금 맛이라고 여기면서도 미안하지 않다. 다음 장면은, 술에 취한 은영이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걸 보여주는데, 앞선 장면과 시간상 연결이 되지 않는다. 기사와의 대화 내용으로 보아 프랑스로 떠나기 전날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은영과 명숙이 프랑스의 한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다 성가신 상황을 겪고, 다음 장면은 다시 현재(대화 도중 ‘한남’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로 돌아와 한밤에 은영과 두 친구가 대화하는 모습을 담는다. 첫 시퀀스에서 대화의 주제로 나온 대로 그들은 프랑스어로 이야기하기를 시도한다. 은영은 곁에 있는 아기가 깨지 않도록 신경이 쓰인다. <컨버세이션>은 챕터로 나뉜 영화가 아니지만, 인물이 들어가고 나가는 시점을 기준으로 편의상 몇 개의 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44분까지 전개되는 첫 번째 챕터는 은영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사건이랄 게 없거니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도 친절하지는 않다. 한 예로, 이 챕터는 대략 다섯 개의 시퀀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쇼트의 숫자로 쳐도 여섯 개에 불과하다. 두 개의 쇼트로 이뤄진 첫 시퀀스를 빼면, 전부 하나의 쇼트로 하나의 시퀀스가 구성되며, 제목 그대로 대화하는 모습만을 기록하고 있어서 정적이란 인상을 준다. 압권은 제일 긴 쇼트인 택시 내부 장면이다. 은영과 기사의 대화가 주 내용인데, 영화는 오직 은영만을 보여준다. 나는 화면 바깥에 있는 기사의 모습을 10분 넘도록 상상만 해야 한다. 현재의 어느 하루의 낮, 저녁, 밤 시퀀스와, 그 사이에 낀 과거의 두 시퀀스가 부드럽게 연결된 편도 아니다. 시간과 시간이 불쑥 드나드는 까닭에, 과거의 장면이 현재를 설명해 주지도 않는다. 이러한 특징들이 평범한 영화는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하지만, 온갖 괴상한 영화가 설쳐대는 요즘에 <컨버세이션>의 형식이 유달리 신선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택시 장면에서 문득 설렘을 느꼈으나, 첫 번째 챕터가 끝날 때까지 나는 <컨버세이션>에 깊이 빠져들지는 않았다. <에듀케이션>을 만든 영민한 감독의 소포모어징크스인가, 그런 생각만 했더랬다. 감기려고 하던 눈이 반짝 떠진 것은 44분까지의 은영 챕터가 끝나고, 갑자기 낯선 인물들로 두 번째 장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이때부터 한동안 은영은 스크린 밖으로 사라져 나오지 않는다. 여기선 승진과 필재의 씁쓸한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렇다면 은영이 나중에 그들 사이로 어떻게 들어온단 말인가. <컨버세이션>은 별개의 이야기로 나뉜 옴니버스영화일까. 그런저런 예상을 하면서 영화를 보게 된다. 첫 장의 스타일은 이후에도 바뀌지 않는다. 쇼트의 길이는 길고, 인물(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라곤 없으며, 시간과 시간 사이로 갑자기 그와 그녀가, 그와 그녀의 이야기가 들어왔다 나간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깥 공간의 개입에서 비롯되는데, 첫 장에서 갇혀 있던, 그래서 움직이지 않고 입으로만 대화하던 인물들이 바깥의 공간에서 움직인다는 점이다. 두 번째 장의 인물인 승진과 필재는 대화하면서 움직이는 존재다. 승진이 “걸을까”라고 말한 뒤 유모차를 끌며 앞장서 걸으면, 필재가 그를 따라 공원 한 귀퉁이를 도는 장면이 그러하다. 몸의 움직임과 함께 대화가 끌려 나오고, 그들은 원래 위치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움직인다. 이러한 신체의 움직임은 인물의 변화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대화에 에너지를 부여한다. ‘인물이 느끼는 감정, 인물 관계의 변화’ 같은 것들에 대화가 어떻게 관여하는가, 그것이 신기하게 눈에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과거는 기억 속에서 미화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이런 작품에선 더욱 그러하다. 첫 번째 장에서 은영이 딸 라온을 둔 시점을 현재로 상정한다면, 이후에 튀어나오는 것들은 대부분 과거의 언제일 확률이 높은데, 묘하게도 과거의 어떤 이미지들이 뜻 모를 아름다움을 제공한다. 어느 날 밤, 집 앞에 차를 주차하지 못한 필재가 좁은 공간을 배회하는 장면이 그 중 하나다. 그는 차를 몰고 어디를 다녀온 길일까, 골목을 왔다갔다 하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이 장면은 저 뒤에 나올 열차 장면과 쌍을 이룬다. KTX 안, 아마도 필재와 만나고 돌아오는 길인 듯한 승진은 종이를 꺼내 편지를 쓴다. 그의 말대로 그건 아주 슬픈 편지다. 골목을 오가던 필재는 그런 편지를 받을 줄 모르고 있을 테지. 그런저런 생각들로 두 개의 이미지를 엮는 일은 곧 ‘애통의 미를 관조’하는 것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아름답지만, 다른 정서와 마주하게 하는 장면은 승진과 필재가 버스킹을 구경할 때다. 여기서도 공연하는 가수는 화면 밖에서 목소리만 들려줄 뿐, 나는 승진과 필재만 쳐다볼 수 있다. 무심한 듯 앉은 필재에 비해, 승진의 앉은 자세는 어딘가 어색하다. 그는 안절부절못한다. 마침내 뒤로 누운 그의 손길은 가슴 속에서 주문하는 행동을 옮기지 못해 허공을 맴돈다. 짧은 아스라함이지만, 나는 이 장면에서 <모리스>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감정이 전달됨을 느꼈다. 이 장면과, 승진과 은영이 산행에 나선 마지막 시퀀스는 대구를 이룬다. 앞선 장면과 달리, 승진의 태도는 자연스럽고 대담하다. 앞의 버스킹 장면이 있기에, 산행 장면의 승진을 보며 나는 미소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 놓인 열차 장면이 승진에게 어떤 확신을 준 것일까, 이 영화의 대다수 장면이 그러하듯 ‘그렇다’고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어쨌든 <컨버세이션>의 인물들은 적절한 단어와 몸짓을 갈구한다. 자기 마음속 어떤 감정을 표현할 단어가 쉬 떠오르지 않아, 그것을 마음껏 밖으로 내뱉지 못해 답답해할 때도 있다. 현재의 은영은 결혼과 출산 이후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사랑의 감정이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컨버세이션>은 어쩌면 그런 그녀의 감정이 찾아 나선 시간의 해법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돌고 돌아 그녀는 끝내 산행에 나섰던 그 날로 되돌아간다. 은영과 승진은 여전히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그들의 대화는 다시 한 번 엇갈린다. “말을 해야 진짜인지 가짜인지 안다”고 자신 넘치게 말했던 은영은 “내가 너 사랑한다”는 승진의 말에 말문이 막힌다. 대화의 영화에서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 그렇게 오지만, <컨버세이션>은 그 대화의 끝에서 풍성함을 거둔다. 흡사 영화 내내 쏟아져 나오던 수많은 단어들이 하나의 순간을 위해 달려가는 양, 이리저리 맞서고 뒤엉켜 싸우던 감정의 선들이 대화의 결을 따라 정리된다. 하나의 원이 완성되는 순간, 하지만 이것은 진실과는 또 다른 문제다. 버스킹 장면의 승진이 산행 장면의 승진보다 덜 혹은 더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만, 그들의 관계가 커다란 원을 돌아 하나의 지점에 도착했다는 점에서 나는 그들의 대화가 진실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승진이 편지에 썼던 것처럼, 우리는 맞는 길을 걷는 게 아니라, 각자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며, 산행에서 돌아오는 그 순간에 은영과 승진은 적어도 맞다고 여긴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대화의 영화라는 점에서 <컨버세이션>은 대화가 주를 이루는 몇몇 프랑스 영화와 근친 관계를 맺는다. 근래 등장한 프랑스 영화 중에 대화가 중심에 선 작품으로 < 러브 어페어: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 >이 있다. 그런데 <러브 어페어>의 대화와 <컨버세이션>의 그것은 다르다. <러브 어페어>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빌려 대화하는 형식의 영화다. 여기서 대화는 구애의 방식이다. 누군가의 비밀을 전달하는 것처럼 대화하면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감정 속으로 접근하고, 그러한 접근은 결국 두 사람의 관계로 매듭지어진다. 대화는 직접적으로 인물과 인물에게 영향을 주는 수단이며, 진실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야기라는 형식을 빌린다는 점에서 다른 영화와 차별화된다. <컨버세이션>에서 은영과 승진이, 혹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시간 순서대로 배치되지 않는다. 이 말인즉 그들의 대화는 이후의 감정에 어떤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은영과 승진은 곧장 맺어질 듯이 대화와 감정의 연결점을 취하지만, 그것은 이미 흘러간 몇 년 전의 한 장면에 불과하다. 즉, 이 영화의 엔딩에서 벌어지는 대화의 손길은, 영화의 첫 번째 장에서 부부의 애정을 절감하는 은영에게 직접적인 은혜의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만약 그랬다면 은영은 현재의 외로움을 조금은 달랠 수 있을 테지만, 그것은 자기 영역 밖의 일이다. 현재의 은영은 여전히 외로운 아내일 것이다. 다른 사람과 상담할 때는 이런저런 조언을 풀어놓는 그지만, 정작 그 자신의 답은 찾지 못할 것이다. 영화가, 아니면 김덕중이, 그들 – 은영과 승진이 산을 찾아 대화를 나누었던 어떤 시간을 찾아간 것이지, 현재의 은영이란 인물이 과거 어느 시점의 자기 대화를 찾아낸 게 아니라는 말이다. 엔딩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무엇이라 설명하든 – 진실이든 풍성함이든 찬란함이든 신비함이든 농담이든 – 그것은 은영이란 인물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으며, 굳이 말하자면 영화가 창조해낸 어떤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그러므로 은영에 대해 안타까워할 이유 또한 없다. 누군가 <러브 어페어>의 리뷰에서 알랭 레네가 연상된다고 써놓은 것을 읽었다. 글쎄다, 레네가 영화적 생명의 중후기에 쌓아 올린 형식적인 경지를 감안한다면, <러브 어페어>보다 <컨버세이션>을 들이미는 게 더 적합해 보인다. 예를 들어, <스모킹 노스모킹>에서 각 인물이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떻게 말하느냐, 에 따라 알 수 없는 수많은 결과를 낳는 것과, 이런 길과 저런 길을 오가는 은영과 승진의 삶의 양태가 닮아도 더 닮았다. 김덕중은 대화에 관한 영화로 <컨버세이션>을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그가 완성한 것은 ‘대화의 영화, 영화의 대화, 대화의 작동 원리’에 대해 고심한 결과물로서의 영화다. 나는 말장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던 공원 장면에서, 승진이 물었다. “그래서 애수가 뭔데?” 필재가 대답했다. “슬픔과 비슷한 건데 설명하긴 어려워” 나중에 승진은 또 말한다. “너도 애 생기잖아, 아마 애수가 철철 넘쳐흐를걸?” 대화가 다 풀어놓지 못하는 것, 그것을 기어코 대화를 통해 이뤄내도록 창조해내는 것, 그것이 곧 인물의 관계를 만들어내고, 이윽고 인물이 대화를 통해 도달한 미지의 공간이 <컨버세이션>이다. 어느 날, 김덕중 앞으로 은영이란 인물이 도착한다.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그는 결혼해 딸 하나를 두었다. 겉도는 친구들의 대화 속에서 유일하게 자기의 외로움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사람이 그다. 김덕중은 다른 시간의 레이어에 놓인 그를 상상한다. 때론 그를 시간 밖으로 내던지기도 한다. 그가 부재하는 시간 동안, 그와 인연을 맺을 다른 사람들의 레이어가 겹겹이 쌓이다, 다시 은영의 레이어와 교차한다.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 속에서 다른 머리를 하고 다른 옷을 입은 여러 은영과 여러 승진이 그 사이를 떠돈다. 그 작업을 통해 김덕중은 은영에게 하나의 순간이 될 시간과, 그 시간의 대화를 빚어낸다. 현재에서 과거의 가능한 결과를 찾아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이 영화에선 가능하다는 것을 김덕중은 영화적으로 설명하고 구현해 낸다. 어떤 서두름도 없어서 더욱 놀랍다. *무슨 까닭인지 글을 마칠 즈음 < 스프링 피버 >가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두 영화를 비교하는 짓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김덕중은 로예와 전혀 다른 감성의 감독이다.
< 시간을 달리는 소녀 > < 하나와 앨리스 > < 클래식 > < 건축학개론 >....익히 보아 온 그 무수한 첫사랑의 멜로들을 대입시키고, 떠올린다 해도 좋다. < 5월 1일 >은 너무도 명백히 그 혐의를 지울 수가 없는 영화다. 그리하여 지레짐작으로 이 영화를 그렇게/진부한/클리셰/덩어리 코너로 제쳐놓고 안 본다면 조금 손해다. 그러기엔 좀 아까운 구석이 많다. <5월 1일>을 제대로 보려면 그래서 이런 질문으로 시작해야 한다. 이 영화는 어떻게 무수한 첫사랑 영화를 ‘제 맘대로’ 마구 가져와서 온전히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냈을까. <5월 1일>은 멋진 주연배우와 촬영, 음악,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교차 편집, 편지와 레코드라는 소품이라는 뻔한 요소가 기념할 만한 멜로의 장면으로 구현되는 작은 기적을 경험하게 하는 영화다. 지금부터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2세대에 걸친 사랑의 이야기라 헷갈리지 않도록 멜로가 향하는 화살표를 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작 부분에서 1차 혼돈이 온다. 피아노 연주회에서 연주를 듣다 눈물을 흘리는 여자, 그리고 그 앞에 마찬가지 감상에 빠진 남자, 그리고 그 옆의 여자가 등장한다. 공연이 끝난 후 로비로 나온 여자는 남자를 알아보고 부르려 하지만, 예의 그 여자가 팔짱을 껴서 포기하고 돌아선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 교복을 입은 소녀 둘과, 이들을 지켜보는 남학생이 있는 지상철 장면이 나온다. 싱그러운 여름, 짧은 교복 치마. 단짝 친구, 등하굣길에 늘 만나는 남학생. 벚꽃이 푸른 수목으로 바뀐 걸 제외하고는 모두 < 하나와 앨리스 >의 도입부와 꼭 같아 걸리지만,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공연 장면에 등장했던 남녀의 과거 속으로 온 것 같은 플래시백 장면처럼 연결되지만, 이 소녀는 공연장에서 눈물 흘리던 여자의 딸 바이(정여희)다. 하지만 영화는 이때부터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게 되는데, 현재의 중심축은 바이다. 그녀는 자꾸 관심을 보이고 쫓아오는 숫기 없지만 잘생긴 소년 예쫑수가 싫지 않은 눈치다. 바이의 단짝 친구의 생각은 좀 다르다. 실은 자신도 예쫑수에게 관심이 있으니, 바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예쫑수에게만 잔뜩 관심을 기울이기에는 바이의 하루도 바쁘다. 친구랑 놀기도 바쁘고, 바람피운 아빠 때문에 고민하는 친구 상담도 들어줘야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던 중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던 엄마 왕레이(가정문)가 그만 교통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진다. 평탄했던 바이의 학창시절도 그렇게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뇌사상태에 빠진 엄마의 과거. 17살 소녀 왕레이(정여희)의 일상을 소환해 낸다. 교복 치마 길이는 딸 바이의 것보다 길어졌고, 발랄한 바이보다 수줍음도 많고 얌전한 소녀 왕레이. 그녀는 자꾸 못살게 구는 또래 남학생 린커밍(석지전) 때문에 골머리가 아프다. 경쟁심이 센 린커밍은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도, 자전거 질주에서도 자꾸 자신을 앞지르는 왕레이를 향해 “다음엔 이기게 안 둬”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관심과 사랑을 그렇게 괴롭힘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연애. 린커밍과 왕레이가 펼치는 티격태격하고 풋풋한 과거를 회상하는 건 물론 식물인간이 된 왕레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그녀가 연주회에서 스쳐 지나갔던, 어른이 된 린커밍(임현제)이 본격적으로 등장해 그 과거를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 건축설계사가 된 린커밍은 그 사이, 동거하는 여자가 있었지만 사랑을 믿지 못해 헤어졌으며, 친구와는 나날이 늘어가는 나이에 대한 상념을 늘어놓을 정도로 어른이 돼 버렸다.(이건 또 변명이 불가능할 만큼 너무 < 건축학개론 >과 닮았다.) 어쨌든 식물인간이 된 여자와 무료하고 허한 중년의 남자를 과거 햇빛 찬란했던 첫사랑의 한때로 착지시켜줄 ‘교통수단’은 여자의 딸 바이다. 엄마의 컴퓨터를 정리하던 소녀는 ‘보내지 않은 이메일’ 함에서 (연주회에서 그녀가 린커밍을 만난 후 쓴) 메일을 발견하고, 엄마 대신 그걸 전달하기로 한다. 마치 자신이 엄마인 냥.(엄마의 사랑을 구제해 주려는 노력은 < 시간을 달리는 소녀 >나 < 클래식 >마저도 연상케 하니, 원 이거 참...) 5월 1일이 < 러브 어페어 >에서처럼 사고를 당한 날이라거나, 혹은 만나기로, 또 헤어진 날 같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대신 이 날짜는 이들 사랑의 복선이 되는 비지스의 곡 ‘First of May''''에 해답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트리는 내 키보다 컸었고, 다른 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하는 동안 우리는 사랑에 빠져 있었’던 그 둘 사이의 사랑을 설명해주는 것 같은 가사를 가진 비지스의 곡은 1990년대 초, 타이베이라는 배경과 함께 어우러진다. 그리고 린커밍과 왕레이 사이에서 오가는 레코드판으로 전달되거나, 또 전달되지 않는다.(< 러브 레터 >와 < 건축학개론 >의 사이 어디쯤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과 같은 설정) 어른이 된 린커밍은 갑자기 떠오른 왕레이를 향해 “5월의 공기는 그때와 같아. 사람은 다시 그 자리에 갈 수 있지만, 그때로 다시 갈 수는 없다”라고 읊조리며, 고등학교 때 농구를 하며 뛰어놀던 농구장에 가서 농구를 하고 비를 흠뻑 맞고 돌아온다. 린커밍을 만나지 못했지만, 그는 그때 갑자기 잊고 지냈던 과거와 도킹을 시도한다. < 5월 1일 >은 플래시백이 무수히 등장할 뿐 실제 과거로 들어가는 일은 없으니, 명백히 판타지는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정신없이 오가는 과거와 현재를 마치 하나의 시간대처럼 이어줄 여러 장치들을 고민해 내고 적용시킨다. 린커밍과 왕레이, 그리고 딸 바이가 전개하는 사랑의 기억과 공유는, 각각의 내레이션과 편지를 읽는 동안 오버랩 되는 음성 등으로 효과적으로 전개된다. 이 복잡한 오감 때문인지, 왕레이와 바이를 연기하는 1인 2역의 배우 때문인지, 관객은 이 과정에서 현재 시점의 17살 소녀 바이와 엄마 왕레이의 17살 시절이 오롯이 겹쳐지는 ‘판타지’에 빠져든다. 세대는 변했지만, 사랑 때문에 감정이 ‘접질러지는’ 지점은 어쩜 그렇게 예나 지금이나 똑같을 수가 없다. 린커밍과 왕레이가 비극적 사건에 휘말리고 그 연애에 성공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번엔 바이가 친구와의 삼각관계로 예쫑수를 오해하고 힘들어한다. 십 대의 첫사랑은 ‘좋아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미숙하고 낯설고 새롭다. 그래서 풋풋하고 좋기도 하지만, 또 그래서 두렵기도 하며, 실패할 경우 방어벽도 너무 낮은 위험한 도전일지니. 그렇게 조심스러운 접근 탓에 첫사랑의 신화는 스크린으로는 도저히 깨지지 않을 무한한 소재다. 자국 대만에서 보자면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 < 나의 소녀 시대 > 등 대만표 청춘물의 연장선상에서 기획된 영화로, 우리가 지금껏 보아온 아시아의 성공적인 첫사랑 소재의 영화를 모두 짜깁기한다. 그럼에도 뮤직비디오를 연출해 온 주격태 감독의 영상만큼은 그 중 독보적이다. 뭔가 일일연속극 같은 조악함이 엿보이는 시작 부분의 피아노 연주회 장면만 잘 넘기면 된다. 지상철 밖으로 우거진 푸른 초록, 교복을 입은 소녀들의 발랄한 움직임이 시작부터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아, 이때부터는 절대 정지 버튼을 누르기 힘들다. 도심이지만 초록이 유독 많은 타이베이의 정경과 십대들의 어우러짐은 눈에 담아둘 만큼 아름답다. 막 폭우가 걷히고 난 후, 물웅덩이를 따라 걷던 린커밍이 왕레이에게 마음을 고백하던 순간, 혹은 소년들이 레코드판을 훔쳐내 커버를 벗겨 옥상에 올라가 모두 하늘로 날려버리는 장면은 특히 압도적이다. 90년대지만 우리 기준으로는 더 오래전 과거처럼 보이는 낯선 90년대가 선사하는 정서도 독특하다. 왕레이의 소녀 시절과 딸 바이 1인 2역을 소화한 배우 정여희는 아마 이 영화를 보면 모두가 사랑에 빠질 만큼 매력적이다. (좀 문제적 장면일 수도 있지만) 어른이 된 린커밍이 그래서 순간 바이를 왕레이로 착각하는 장면에서처럼 말이다.